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
그는 다짐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히틀러를 척결하겠노라. 그는 히틀러를 자신의 적으로 선포하는 중이다. 그는 장교다. 그러나 히틀러가 숨쉬는 독일을 향해 진군하는 연합군의 장교가 아니다. 나치의 표식을 달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군의 장교다. 그는 자신의 최고 상관을 적으로 규정한다.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실패하면 반역이 된다. 기로에 선 그 남자는 성공을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실패한 혁명에 앞장 선 남자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장교로서 국가 전복을 꿈꿨던 슈타펜버그(톰 크루즈)의 실패한 혁명에 관한 실제적 사연이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어느 한 인물의 일대기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발키리> 역시 결과는 훤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과가 정해진 사연이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이뤄진 영화가 이에 충실하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새로울 것이 없다. 정해진 길을 따라갈 뿐이다. 정해진 결말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이야기에 대한 의문은 불필요하다. 단지 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들려지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미 공개된 결말이나 다름없는 <발키리>엔 결말에 대한 짐작이 필요없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에 반하는 군부 세력과 연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과정엔 미스터리의 흥미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사전에 공개된 정보를 통해서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히치콕의 방식과 유사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인물의 사소한 움직임마저 세심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샷은 공간의 여백까지 번져나가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적 충돌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두르고 있으나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베를린 한복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광경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의 끝을 예감하는 이들의 각기 다른 표정이다.
그 표정엔 공통적으로 어떤 두려움이 엄습해있다. 이미 자신들의 전쟁이 패배할 것임을 아는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의 끝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고뇌를 품고 있다. 패망을 알면서도 체제에 기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다. 그 와중에 슈타펜버그만이 자신의 신념을 통해 행위를 관철시킨다. 히틀러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동조자들이 갈등할 때 슈타펜버그는 과감히 행동을 펼친다. 여기서 슈타펜버그는 양심적인 내부자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때때로 브라이언 싱어의 잠재된 혈통의 욕망을 읽게 만든다. 그를 묘사하는 주체의 욕망이 슈타펜버그를 선으로 규정하려 할 때 <발키리>는 때때로 격양된 감정을 품는다. <발키리>의 가장 큰 흥미는 양립된 야심의 중간자들이 갈등하고 추이를 지켜보는 표정에서 발생한다. 중간에 선 자들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표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고뇌가 감지된다.
<발키리>는 비상전시체제를 대비한 독일의 예비군 동원을 뜻하는 작전명이다. 또한 극중에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삽입된 ‘발키리의 비행’이 흐르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키리는 용맹하게 전사한 전장의 용사를 천상의 발할라 궁전으로 인도하는 여신이다. 발키리는 때때로 남성 인간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 남자를 떠나거나 그 반려자가 된 남자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묘사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발키리 여신 브륀힐테와 결혼을 약속한 지상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갈등과 반목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키리 작전을 믿었던 슈타펜버그 역시 작전 지휘자의 변심으로 혁명의 수장에서 반역을 선동한 주범으로 반전된다.
물론 현대의 역사는 그를 반역자로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그의 최후는 명백하다. 역사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선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이 절대적 정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발키리>의 결말이 과정보다 감흥이 덜한 건 단지 예상된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슈타펜버그의 의지가 숭고한 정의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하는 태도가 어딘가 식상하기 때문이다. <발키리>의 결말은 휴머니즘을 향하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전쟁에 패배했지만 정치적 승리를 꿈꾸던 이들의 표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결말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마치 홀로코스트 영화의 영웅을 접대하듯 관성적이다. 영웅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것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핑계는 식상하다. 브라이언 싱어의 욕망이 영화를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의 수여라기 보단 지나친 미화적 욕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 역시 <발키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감수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