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문>을 보기 위해선 전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뉴문>의 전편인 <트와일라잇>은 분명한 취향의 호불호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등마저 굽어버릴 판인데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거리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적 만듦새에 대한 불평이 좀처럼 합당하게 먹힐 구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뉴문>이 보고 싶은 이라면 그에 따른 명확한 취향의 확신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셈이다.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를 상상했다간 화들짝 놀라다 못해 십자가를 그을 만큼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는 정통 팬들에게 불순하다 못해 이단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여기서 뱀파이어란 단지 10대 취향 팬픽의 비범한 주인공에 가깝다. 태양빛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린다는 스와로브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들과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황홀한 시선엔 환상이 어른거린다. 뱀파이어라고 쓰고 아이돌이라 읽어야 한다. 단지 뱀파이어는 거들 뿐, 중요한 건 사랑이고 로맨스다. 그러니까 결국 뱀파이어란 존재는 태생이 다른 인간과의 로맨스에 난관을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종교배의 삼부능선인 셈이다.
초반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읊조리는 <뉴문>은 이윽고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치환한다. 자신이 곁에 있을수록 벨라가 위험해진다는 판단을 내린 에드워드가 결국 벨라를 떠나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벨라가 탈선을 시도하고 자살마저 결심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동원되는 건 삼각관계다. 남몰래 벨라를 사모하던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자신의 마음을 종종 어필하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벨라는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벨라는 제이콥의 비밀을 알게 되고 벨라도 모르는 위기가 다가온다.
사실상 <뉴문>은 진지하게 눈뜨고 볼 수 없는 영화다. 만약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라는 소재에 이끌려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팔자를 탓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귀여니 소설을 읽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개념적 충격을 체감했다면 <뉴문>을 보는 130분 간 자기성찰을 하다 못해 득도라도 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건 이 영화의 태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뉴문>은 유아적인 환상으로 점철된 원작 텍스트의 태도를 온전히 이미지로 재생하고 있는 영화다. 열광과 혐오의 기준도 그 지점에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수 없는 취향의 현상인 셈이다.
확실한 건 <트와일라잇>을 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면 <뉴문>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됐거나 그 오그라듦을 하나의 개그 장르로 이해해버렸던 당신이라면 조만간 티켓을 손에 쥘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고, 늑대인간이고, 로맨스고, 멜로고, 다 해당사항 없다. 그 절실한 대사와 그윽한 눈빛을 의도적인 개그로서 즐길 수 있던가, 슈퍼스타적인 뱀파이어의 외모에 매혹당하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130분을 견딜 재간이 없을 게다. 물론 여자친구 손이라도 잡고 보게 될 남자라면 극장 문을 박차고 나와서 그 지난한 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건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최소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된 여자 친구의 상향평준화된 눈높이를 고려해본다면 조만간 찾아올 크리스마스에 TV리모컨이나 붙잡게 될 확률이 커질 테니까.
수능시험날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 아직도 수능을 보는구나. 너무나 까마득해 나완 먼 세상이야기처럼 들렸다. 하긴 벌써 2008년이야.
그 날 아침엔 마음이 무거웠다. 몸이 뒤뚱거렸다.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지금 걷는 게 걷는 게 아니란 것처럼 수험장으로 향했다. 그 하루가 지나면 인생이 바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땐 그랬지. 시험지를 받아 든 손은 바빴고, 한번 읽어 내린 문제가 잘 파악되지 않을 땐 낭떠러지 끝에 밀린 듯 절박해졌다. 그렇게 모든 시험을 끝내고 캄캄해진 밖으로 나설 때 즈음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련한 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가벼움이 감지됐다. 하얗게 불태웠어. 그저 그 삭막한 공간에서 달아나는 것만으로도 쇼생크 탈출이었지. 그땐 알았을까. 나의 10대가 그딴 식으로 꺼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수능만 보면 세상 끝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듯 대충 난 이렇게 살 거야, 라고 생각하는 시절이 내게도 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한참 몰라서 모든 것이 막연했던 시절, 순진무구하다 못해 무지해서 창피함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교복을 입고 교과서를 펴 들던 그때 세상은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학에 가서 누구나 그렇듯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그렇게 어른으로 살아가는 거라 생각했다. 친구도 많았던 시절이라 친구 없는 어른들이 이상했다. 축구도, 농구도 하지 않고 그냥 술만 마시고 사는 어른들이 기이했다.
난 꿈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잘 모르겠다. 의대에 가리라 열공하던 짝 옆에서 난 교과서를 보고 무엇을 꿈꿨나 모르겠다. 인생은 방정식처럼 간단할 거라 생각했을까. 2차든, 3차든, 4차든, 그저 해만 구해서 답만 적어 넣으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을까. 물론 난 딱히 수학을 좋아하진 않았다. 나름 못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때때로 어려운 문제 하나를 오기처럼 부여잡고 끙끙대다 답을 알아내곤 홀로 벅차 오르긴 했어도 그래서 수학이 좋아요, 라는 변태 같은 답변을 하고 싶진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춤도 추고, 담배도 피웠을까. 그 와중에 어쩌다 3년 동안 임원을 해먹었나. 정치에 자질이 있었나. 그 때 내 친구들은 날 보고 날라리 반장이라 불렀는데, 이 정도면 나도 여의도 입성할만한 자질이 있나요. 좀 더 등쳐먹은 경력이 필요할까요. 아, 싫음 말고. 뽑지 마! 식빵.
난 언제부터 글을 쓰고 싶었을까. 기억나지 않아. 그냥 남들이 넌 좀 글을 잘 쓰는 것 같아, 라는 말 따위에 그런가 싶다가도 글을 써야지, 라고 결심했던 적이 있기나 있었나. 역시나 기억나지 않아. 지금 내가 글쟁이가 된 걸 보면 인생이란 게 정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수능 날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험지에 인생의 정답은 없었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내게 수능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건 그냥 통과의례였을 뿐이야. 난 생각한다. 고로 수능은 중요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대학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염치는 없다. 좋은 대학을 나올수록 당신이 이 사회에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확률은 조금 높아지는 거라고,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정직할지 모를 일이다. 요즘 세상 꼴을 보면 더더욱. 고지를 점령해야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거니까.
다만 그게 끝이 아니야. 인생 최대의 고비에서 벗어난 것처럼 후련함을 느낀다면 곧 알게 될 거다. 인생 최대의 어려움에 직면한 것처럼 좌절감을 느낀다면 곧 알게 될 거다. 그건 그냥 지나간 어느 하루일 뿐이라고. 초등학교 6년을 지나, 중학교 3년을 거쳐, 고등학교 3년을 다 보낼 때 즈음,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능을 치르고 그렇게 한 계절을 넘어선다.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시절 무엇을 보고 배웠든 모두가 다 지나간 옛일이다. 언젠가 그때 좀 공부 좀 열심히 해놓을 걸 그랬지, 라며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것도 그땐 이미 그리 중요하지 않겠지. 어차피 그 게임은 업로드도 안돼. 리셋 따윈 꿈도 꾸지마.
그때 이미 당신은 연애도 해보고, 섹스도 해보고, 돈도 벌어보고, 어쩌면 결혼해서 애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그 돌이킬 수 없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길. 그대의 10대가 가고 있음을 그대들은 모를 일이겠지만. 하긴 나도 그랬어. 한심하지.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었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과연 있을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원래 지 앞가림 못하는 놈이 참견은 많은 법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