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에서 부탁한 리스트. 기준은 2008년 국내 개봉작. 대단할 것도 없고 지극히 사적인 리스트이니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 저러쿵, 은 사양하겠음. 일단 베스트 5편을 뽑고 생각해보니 한국영화가 한편도 없다는 것이 고민스러웠지만, 5편 모두 훌륭한 작품이니 후회되진 않는다. 워스트 5편은 뭐, 보시는 그대로. 더 졸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참 피곤한 일인 것 같다.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에 누락하기가 참 망설여지는 작품들이 있지만 어쨌든 정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종종 놓친 영화도 있고.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봤지만 정말 보고 싶던 어떤 영화는 못보기도 했고. 결국 사적인 애정이 뒷심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 중, <다크나이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의 짧은 단평을 남긴다. 여하간 그렇다. 2008년도 가고 있다.
참고로 노컷뉴스의 편집판은 보지 못했다. 리스트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수렴돼 조절된 것으로 보이고, 글은 내부적으로 편집된 것으로 알고 있음. 고로 이건 최초로 작성한 원문과 리스트임.
Best
1. 다크나이트 Dark Knight
2.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an
4. 바시르와 왈츠를 Walts With Bashir
5. 월-E Wall-E
Worst
1.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
2. 날라리 종부전
3. 쉿! 그녀에겐 비밀이에요.
4.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
5.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
<다크나이트>
제목에서 ‘배트맨’이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기이하지만 영화를 본다면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이지만 이것은 굳이 배트맨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실질적으로 <다크 나이트>를 지배하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그는 배트맨에 의존해 악을 제압하는 고담시의 체제적 오류를 파고든다. 폭력을 제압하는 폭력의 딜레마를 조롱하더니 이내 쥐고 흔든다. 배트맨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퍼즐을 만들어 고담시를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조커가 만드는 혼돈의 기반은 법치의 무력 앞에서 배트맨이 취한 정당한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조커를 통해 배트맨이라는 안티히어로의 정체성을 흔든다. 초현실적인 비범함을 무장했던 영웅의 슈트 안에서 웅크린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세상 곳곳으로 확대된다.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시선이 촘촘하고 광활하다. 블록버스터의 양식으로 완성한 섬세한 드라마의 디테일이 보는 이를 내외적으로 압도한다. 걸작의 너비와 깊이, 그 모든 것이 완전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뷔작으로부터 24년, 코엔 형제는 비로소 오스카의 호명을 받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는 평단과 관객의 극찬 속에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극악한 살인마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냉철하고도 흉악한 살인마를 연기했다. 무미건조한 정적 속에서 뚜벅뚜벅 다가오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을 발휘한다. 어떤 배경음 하나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정적 그 자체를 배경으로 미세한 소리 하나에도 반응을 부른다.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모스(조쉬 브롤린)가 처음으로 대면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질식할 정도로 대단하다. 노인 복지에 대한 냉철한 진단처럼 보이는 제목은 그 극악한 상황을 뒤늦게 대면하는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의 참혹함과 맞닿아있다. 선의보단 악의가 지배하는 살풍경에서 오랜 경험과 지혜는 결국 제압당하기 좋은 노쇠함에 불과해진다. 괴력을 지닌 스릴러적 내공 앞에 감탄을 보내다가도 그 끔찍한 시선에 담긴 내면의 진심 앞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
완결된 원작 만화를 2편으로 나눈 영화로 재생산한 <데스노트>시리즈의 야심은 스핀오프로 이어졌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이하, <데스노트 L>)이란 제목처럼 스핀오프는 L(마츠야마 켄이치)을 위한 영화다. 존재 자체로 궁금증을 자극하는 캐릭터는 이야깃거리가 되기 좋은 상대임에 틀림없다. <데스노트 L>은 그 지점을 파악하고 달려든 기획이다. 문제는 캐릭터를 앞세운 영화가 본래 캐릭터의 매력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캐릭터의 고유한 특성마저 파괴한다. 밀폐된 환경 안에서 뛰어난 두뇌로 사건을 컨트롤하던 L을 활동성 인간으로 묘사한다. 영화를 통해 캐릭터의 이면을 발견하겠다는 야심은 그럴 듯 하지만 본래 매력과 관계없이 캐릭터를 창작해버렸다. 게다가 제도와 윤리에 대한 물음 자체는 실종됐다. 다소 유치한 활극 안에서 L을 평범한 히어로로 만들어버렸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소모시키며 증명한 건 몰지각한 기획 남발의 끝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뿐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일본 망가의 거장으로 꼽히는 우라사와 나오키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이상적인 작가군에 속한다. 그리고 영국특수부대 'SAS' 출신의 박학다식한 보험조사원의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 ‘마스터 키튼’은 우라사와 나오키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료하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구축하고 탁월한 장면묘사와 컷의 전환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또한 그 와중에 공포와 유머가 함께 공존한다.
‘몬스터’와 ‘20세기 소년’, 그리고 현재 연재 중인 ‘플루토’는 ‘마스터 키튼’을 방대한 습작으로 삼은 결과물에 가깝다. 물론 ‘마스터 키튼’ 이전에 발표한 ‘야와라!’나 그 이후에 발표한 ‘해피!’처럼 명랑한 트렌디 스포츠 만화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사실적인 형태의 세계관에서 가늠할 수 없는 심리적 기운을 지닌 인물-요한, 친구, 플루토-이 그 세계를 장악해나가고 그 반대편에서 그 가늠할 수 없는 실체에 접근하는 인간들의 사투-덴마와 안나, 켄지 일파, 게지히트 형사-가 펼쳐질 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거대한 흥분을 일으킨다. 그의 만화는 영화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 묘사에 능하고 장면의 연출에 과감하다.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이 우려와 기대를 동반한다면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다.
<20세기 소년>은 원작의 재연 그 자체를 희망한다. 일단 실사의 인물들을 보자면 완전히 만화 속 캐릭터와 일치할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인물의 실사적 형태도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거의 강박적이다.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영화로 구현한다는 형태적 변형에 목적을 두고 있을 뿐, 영화적인 현실 자체를 간과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만화를 본지 오래된 독자들에게도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줄 정도로 원작의 상황을 충실히 재연한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만화의 탈을 쓴 채 경직된 흉내를 낼 뿐이고 엉뚱하게 울려퍼지는 음향효과는 기괴한 감상적 태도를 강요한다.
본래 ‘20세기 소년’은 그 기이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익살맞은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지치지 않는 건 그 유머감각이 윤활유의 역할을 한 덕분이다. 영화는 후자보단 전자에 매료된 것인지, 혹은 후자가 일본영화 특유의 썰렁한 정서 연출 속에서 매몰된 것인지 좀처럼 후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약 <20세기 소년>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의 진지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면 그 안에서 발생해야 할 유머감각들이 깡그리 결여됐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펜터치에 녹아있던 정서적 인간미가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을 오가는 컷의 전환방식도 간결한 칸과 칸 사이에 발생하던 만화의 상상력을 쫓지 못하는 양상이다. 성년이 된 인물들이 과거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거나 그 시절의 일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산만한 인상을 준다. 그건 마치 영화가 만화의 어떤 장면, 혹은 어떤 인물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건 원작에 맞춰 영화를 검열하고자 하는 태도다. 단지 이미지를 재연하기 위한 식물적인 목적이 스크린을 생기 없이 지배한다.
원작에 대한 겸손함이 강박적이다.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적 접점이 중시되는 ‘20세기 소년’은 그런 캐릭터 관계를 명석하게 정돈하거나 과감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서사의 일부를 미약하게 변주했지만 전반적으로 장황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으로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예습하지 못한 관객에게 그 흥미로운 세계관을 온전히 담고 있는 만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만 시키는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능동적인 호기심을 원치 않는 관객에게 <20세기 소년>은 거대한 괴작처럼 느껴질 공산이 크다. 3부작으로 기획된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은 ‘피의 그믐날’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아직 이야기는 두 번이나 남았다. 문제는 ‘제1장, 강림’이 관객들을 남은 시리즈에 대한 흥미와 절교시킬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실사로 구현된 ‘20세기 소년’을 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어떤 원작팬들은 <20세기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년의 꿈이 악몽 같은 현실로 변모하는 흥미로운 과정을 애정이 아닌 애증으로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면 그것만큼의 비극도 없어 보인다. 남은 두 번의 기회가 갈급해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