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조연상 부문 후보로 오른 시얼샤 로넌은 불과 13살의 나이였다. 최연소 노미네이트 기록이었다. 배우로 활동한 아버지를 따라 촬영장을 구경하곤 했던 어린 소녀는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2007)와 함께 매우 빠르게 전세계로 전파됐다. 피터 잭슨이 연출한 <러블리 본즈>(2009)에서 주인공 소녀 수지를 연기하며 또 한번 무르익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처럼, 푸른 에메랄드 바닷빛의 눈과 고운 금발을 지닌 로넌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설원과 사막 속에서 고된 강행군을 거듭했던 <웨이 백>(2010)의 촬영장에서 로넌은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액션 스릴러물 <한나>(2011)에서 그녀가 펼친 연기적 도전의 결과물을 예상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점차 성숙해지는 로넌이 장차 할리우드의 여신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것. 지금 그녀에게서 여신의 징후가 보인다.
다채로운 재료 본연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전주비빔밥의 고장, 한국의 전주는 매년 4월마다 각양각색의 입맛을 지닌 시네마키드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자유, 소통, 독립’의 슬로건을 내건 전주국제영화제는 인디 필름과 디지털 시네마를 위시한 새로운 영화적 발견의 장을 전통적인 한옥의 도시 전주에 마련했다.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12회를 맞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신선한 영화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디즈니의 공주로서 화려한 데뷔식을 치룬 앤 헤서웨이는 궁전에 머무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성장통을 헤치며 길을 닦아왔다. 이제 그녀 앞에 길은 열려 있다. 방향을 정하는 건 그녀의 몫이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어수룩한 외모와 수줍은 성격을 지닌 소녀 미아는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소녀는 그네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았다는 그 백조처럼 사회지도층 왕가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소녀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뒤바뀐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은 할리우드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앤 헤서웨이는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 헤서웨이의 첫 번째 영화로 공개된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가 그녀의 무명 시절을 하루 아침에 지워버린 셈이다.
뉴질랜드의 <천국의 맞은 편>(2001) 촬영장에 있던 헤서웨이가 오디션을 위해 태평양을 건넘으로써 그녀의 첫 번째 전환점이 마련됐다. 미약한 경력을 지닌 헤서웨이가 디즈니 공주의 왕관을 하사 받은 건 누구보다도 커다란 눈과 시원한 미소를 자랑하는 미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처음치고는 괜찮은 경력이 있었다. 1999년, 폭스TV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겟 리얼>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선 16세의 헤서웨이는 이듬해에 영 아티스트 어워드의 TV시리즈 최우수연기자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하지만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연출한 게리 마샬이 단 한번의 오디션으로 헤서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오디션 도중 앤이 의자에서 넘어졌고 이로 인해 캐스팅을 결정했다.” 미아 역을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여자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필요했다. “본래 나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헤서웨이가 바로 그녀였다.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할리우드의 신데렐라가 된 헤서웨이 역시 성장통을 건너야 했다. 디즈니의 공주가 되어 화려한 유명세를 드레스처럼 걸쳤지만 이는 점차 그녀를 불편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2>(2004)의 촬영 일정으로 인해 헤서웨이는 출연 성사를 목전에 뒀던 <오페라의 유령>(2004)을 포기해야 했다. 학창 시절 소프라노로 활동한 바 있는 그녀에게 이는 마치 목소리를 잃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겐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전부였고, 이는 당시 내 경력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엘라 인챈티드>(2004)와 <프린세스 다이어리 2>와 같이, 밝고 건강한 미소를 요구하는 가족영화들 속에 갇힌 헤서웨이의 갈증은 점차 심화됐다. 또 한번의 공주 놀이를 마친 헤서웨이는 <하복>(2005)에서 자신의 발랄한 이미지에 욕설을 퍼붓듯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에서 노출 연기와 베드신을 선보인 그녀의 행보는 연기의 질을 떠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질풍노도의 일탈이 아니었다. 발랄한 공주로 박제처럼 남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내가 창조해낸 어떤 것보다도 그 영화가 더욱 자랑스럽다.” 여기서 헤서웨이가 경의를 표한 그 영화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다. 두 남자의 애틋한 멜로드라마인 이 작품은 그녀에게 역할의 크기와 반비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치장했던 젊은 날을 지나 결혼 뒤, 가난에 치여 거칠고 억척스럽게 변해버린 여인의 삶, 헤서웨이의 연기는 지난 날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앤디를 통해 그런 자신감은 구체화됐다. “그건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어떻게 어른답게 선택하는지, 희생의 유무가 어떤 후회를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결과적 차이를 배우는 일이었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온갖 시중을 들어야 하는 비서의 고단한 일상이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헤서웨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시행착오 속에서 진정한 희생의 의미를 깨닫는 인물을 연기해낸다. 점차 패셔너블해지는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헤서웨이에게는 몸매관리가 필요했고, 그 탓에 “배가 고파서 에밀리 블런트와 함께 손을 잡고 울었다”지만 이 작품으로 헤서웨이는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던 메릴 스트립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는 건 그녀에게 더 없는 행운과도 같았다.
성취는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다.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사랑을 그린 <비커밍 제인>(2007)은 현대판 신데렐라로 익숙한 헤서웨이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 영화가 자신을 위한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의 권유로 마음을 돌린 그녀는 제인 오스틴을 자신에게 맞는 맞춤복으로 완성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를 연습하고, 방언을 공부하며 고전적인 우아함에 사실성을 새겨 넣고자 했다. 스티브 카렐과 함께 한 첩보물 코미디 <겟 스마트>(2007)에서 액션까지 소화하는 팔방미인으로서 헤서웨이의 경력은 점차 다채로운 색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2009년, 헤서웨이는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는 여인이 누나의 결혼식에 참여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레이첼, 결혼하다>(2008)에서 헤서웨이의 연기는 변신이라는 수사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진화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영화로 인해 생애 처음으로 흡연을 경험한 헤서웨이는 단지 방탕한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짜 몰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의 딜레마와 이로 인해 얻은 상처들로 앙상해진 여인의 지독한 트라우마를 표출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하얀 여왕은 헤서웨이가 팀 버튼의 기괴한 세계관조차 어울리는 배우로 자라났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로 또 한번 제이크 질렌할과의 연기적 궁합을 과시하는 <러브&드럭스>(2010)에서는 파격적인 노출 연기조차 안정적으로 소화해내면서도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고 표현하는 능력까지 갖춘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언제나 10대가 지나면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건 내게 대단한 변화였다.” 배우는 경험을 입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켜줄 새로운 경험을 갈아입는다. 헤서웨이는 지금 옷장 앞에 서있다. 자신의 성장에 걸맞은 새로운 옷을 고르고 있다.
빅토리아 항구와 인접한 홍콩섬 북부 지역은 홍콩의 신흥 지역이다. 어퍼하우스는 홍콩의 새로운 중심에서 최상을 자부하는 히든 플레이스다. 당신이 꿈꾸던 홍콩은 거기서 시작된다.
어디론가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자가 원하는 ‘새로움’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다. 지금껏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 하지만 홍콩이라는 도시는 이와 다른 차원의 만족을 위한 공간이다. 한두 번 이상은 관람했을 법한 홍콩영화 속의 풍경들이 이 좁은 도시 곳곳에서 데자뷰처럼 당신을 맞이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몇몇 장소들은 언제나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기 마련이다. 소위 ‘홍콩 간다’는 말처럼, 홍콩행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건 자신이 꿈꾸던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보겠노라는 의지에 가깝다. 그렇다면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전세계 각지에서 모인 낯선 이들에게 치이며 보낸 하루 동안의 피로를 해독하기 위한, 최소한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할 수 있는 나만의 휴식처를 찾아내야만 한다.
마천루를 자랑하는 홍콩에서도 홍콩섬의 빅토리아 항구와 인접한 빌딩들은 거대한 스카이 라인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다. 그리고 그 장관을 지지하는 퀸즈웨이에 자리한 ‘퍼시픽 플레이스’는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아이코닉한 쇼핑몰이다. 덕분에 퍼시픽 플레이스 주변에는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최고급 신흥 호텔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다국적 기업 스와이어 그룹에서 설립하고 홍콩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앙드레 푸가 디자인한 ‘어퍼하우스’는 최근 1년여 사이 홍콩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최고급 부티크 호텔이다. JW 메리어트 홍콩 호텔과 한 빌딩을 공유하지만 ‘더 높은(upper)’ 상층부를 차지하는, 이름 그대로 어퍼하우스인 셈이다.
만약 입구 주변에 걸린 거대한 원형의 예술품을 지나쳤다면 다시 한번 이를 주목해 보자. 이는 한국인 조각가 최태훈이 만든 예술품이다. 사람 인(人) 자가 얼기설기 모여 원을 이룬 이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류의 ‘숲(Forest)’이자 전세계 각지에서 모인 투숙객들이 이룬 또 하나의 세계, 어퍼하우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첫 인사다. 어퍼하우스는 이와 같이 아시아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예술품들로 콜라보레이션을 이룬 거대한 전시관이자 입구부터 최상층의 레스토랑까지, 여행자들을 위한 정화의 의식으로 구상된 거대한 예술품이다. 특히 호텔 곳곳에 놓인 둥그렇고 매끄러운 돌 조각들은 순탄한 여정을 기원하듯 마음을 안온하게 도닥인다.
어퍼하우스가 정의한 ‘시적인 오르막 여정(A poetic upward journey)’은 지상보다 높은 곳을 향함으로서, 일상으로부터 탈피한 여행의 가치로 나아가길 바라는 의식이다. 이는 마치 세속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숙소의 정취 속에 머무르는 호시노야 료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입구를 지난 당신을 맞이하는 건 거창한 리셉션 대신 간소한 프론트의 직원들이다. 그들이 한 손에 든 아이패드는 어퍼하우스가 자랑하는 유니크한 아이템이다. 각 방에 비치된 아이팟과 연계되며 이를 이용하는 투숙객들은 자신의 요구를 일일이 직원에게 설명하는 수고를 덜어낼 수 있다.
짐을 풀고 두 다리를 뻗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 당신은 긴 터널과 같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야 한다. 여행자가 맞이할 여행의 덮개를 벗겨내듯, 어퍼하우스에 들어서기 위한 기다림을 지나면 비로소 편안한 쇼파들이 놓인 로비에 당도한다. 입구에서 본 원형의 구조물이 나무처럼 자라난, 비로소 당신의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축하하는 또 다른 작품에 고무되는 기분이 느껴진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바로 옆에 놓인 문을 열고 나간다면 거대한 빌딩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듯 숨어 있는 ‘시크릿 가든’을 만날 수 있다. 작고 아담한 이곳은 당신의 여정에 동참하는 이와 함께 찾아야 할 작은 휴식처다.
홍콩의 어느 호텔보다도 너른 공간을 제공하는 어퍼하우스의 룸에서는 홍콩섬의 너른 풍경 또한 감상할 수 있다. 호텔의 홍보 담당자인 미쉘 라우는 구체적으로 어퍼하우스가 ‘3차원의 시야(three-dimensional view)’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숲(Green), 도시(city), 바다(harbor)까지, 홍콩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행선지를 고민할 어떤 투숙객들에게 이 호텔이 중계하는 모든 풍경들은 처음 마주하는 홍콩의 혜택일 것이다. 이 세 종류의 풍경들은 어퍼하우스가 홍콩 여행에 있어서 얼마나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대변하는 예시로서도 유용하다. 영국식 정원을 옮겨온 듯한 홍콩 공원과 빅토리아 항구, 그리고 빌딩숲까지, 어퍼하우스는 홍콩섬에서 주워담아야 할 풍경들을 병풍처럼 두른 전망대다.
세 종류의 규모로 나뉜 어퍼하우스의 117개 룸들은 세련된 인테리어와 최신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공간이다. 결이 살아있는 원목 재질의 벽에는 장식과 같은 손잡이들이 있으며 이를 잡아당기는 건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리본을 푸는 것과 같다. 여행에 있어서 목욕이란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거나 끝내는 의식이다. 커다란 창을 통해 풍요로운 정경이 전달되는 욕실의 욕조에 누워 피로를 희석시킨다는 건 마치 호화로운 도시를 홀로 점하듯 설레는 일이다. 유기농 재료로 만든 바디용품 브랜드 REN의 어메니티를 구비한 어퍼하우스는 여행용 물품으로 채운 파우치까지 무료로 제공한다. 방 안에 놓인 개인용 바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 맥주와 음료수, 커피와 간식거리까지, 모든 것이 당신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스카이 라운지나 다름 없는 그곳에서 마음껏 맥주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무엇보다도 근사한 일이다. 가능하면 방안의 모든 것들을 만지거나 열어봐야 한다. 곳곳에 숨겨진 크고 작은 깜짝선물을 확인하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보다 더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장관들을 소유하고 싶다면 ‘카페 그레이 디럭스’로 올라가 보자. 어퍼하우스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49층 정상에 자리한 이 곳은 어퍼하우스가 자랑하는 최상의 서비스다. 한쪽에는 오픈 키친의 레스토랑이, 한쪽에는 바가 자리한, 이 공간은 반짝이는 금장 장식과 물결 무늬의 단아한 원목들이 대비적으로 어울리는, 화려하고 온화한 인테리어의 역동적인 인상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정상급 셰프 그레이 쿤즈의 손으로 빚어낸 카페 그레이 디럭스가 2011년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한 개를 얻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주문하게 될 어떤 음식도 당신이 실망시킬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조언이다. 아침 식사가 뷔페식이 아닌 주문식이라는 것도 특별하다. 애프터눈티는 기본이다. 창을 통해 와이드하게 펼쳐지는 홍콩의 전경이 이른 아침에서 늦은 밤까지, 카페 그레이 디럭스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갈아 입힌다. 진미에 풍경을 곁들여 식사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다.
약간의 발품과 기다림을 감내할 수 있는 당신은 어퍼하우스의 인근에 있는 가든로드 피크트램 터미널에서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의 피크트램을 체험한 뒤,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도 좋다. 그곳에서 당신은 홍콩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아볼 수 있다. 쇼핑의 천국 홍콩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 얼마든지 지갑을 열 준비가 된 당신에게도 어퍼하우스는 분명 최적의 입지다. 호텔 문을 나선 뒤, 길 건너편에 있는 퍼시픽 플레이스의 출입구로 들어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각종 의류 매장들이 즐비하게 펼쳐진다. 인파의 행렬에 휩쓸리듯 자신만의 아이템을 찾기 위한 분주한 경쟁에 시달리듯 공격적인 쇼핑을 감내해야 하는 홍콩의 대형쇼핑몰들과 달리 퍼시픽 플레이스는 넉넉한 보폭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여유롭다. 3층으로 이뤄진 쇼핑몰은 각층마다 취향을 배려하듯 정돈된 덕분에 동선의 편의가 느껴진다는 것도 좋은 이점이다. 쇼핑 명소가 즐비한 완차이나 침사추이도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퍼하우스는 하루 동안의 여정으로 짜릿해진 감각을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는 안식처다. 홍콩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얻고 싶다면, 홍콩의 중심에 자리한 어퍼하우스를 소유하라. 당신의 감각을 최상으로 끌어올릴, 홍콩의 히든 플레이스가 거기에 있다.
Recomender
퍼시픽 플레이스 상층부에 자리한 부티크 호텔. 아이팟으로 직접 체크인&아웃은 물론 다양한 룸서비스 주문이 가능하다.
Rooms 117(including 21 suites and 2 penthouses)
Bar and Restaurant Café Gray Deluxe
Facilities Gym, hybrid cars for airport transters and private hire, secondly lawn space and private events, Paperless arrival and departure experience
Features Complimentary In-room bar and espress machine,free Wi-Fi internet, LCD TV with 2.1 surround sound with simple connectivity for PC, Ipod touch,
영국의 아역 배우 대부분이 거쳐갔다는 <해리 포터>시리즈 오디션 현장에서 4만 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마에 흉터를 새길 자격을 얻은 건 다니엘 래드클리프였다. 시리즈의 첫 번째 연출자 크리스 콜럼버스는 “그가 방에 걸어 들어온 순간 해리를 찾았다”고 생각했고, 원작자 조앤 K. 롤링은 “콜럼버스가 더 나은 해리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원작의 대단한 인기는 래드클리프의 후광이 됐다. 하지만 그는 ‘해리 포터’로서 마법 주문을 외우는 일에만 열중하지 않았다. 특히 BBC의 TV영화 <마이 보이 잭>(2007)은 그가 단지 해리 포터와 닮은 운 좋은 아이가 아님을 입증하는 바다. 심지어 실험극 <에쿠우스>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전라 노출까지 불사한 그의 이력은 주목할만하다. 마법 세계와의 안녕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우먼 인 블랙>(2011)의 일원이 되어 믿을 수 없게 기쁘다”는 래드클리프의 시선은 벌써 ‘호그와트’ 너머에 있다. 마법보다 빛나는 가능성으로, 더 이상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좋다.
프랑스 상류층들의 휴양지로 잘 알려진 도빌은 ‘꽃으로 수놓은 해변’이라 불리는 해안 도시다. 그리고 매년 3월, 이 아름다운 도시는 아시아 영화를 위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영화만을 상영하는 도빌 아시아영화제는 올해로 13회를 맞이한다. 이스라엘 출신 감독 아모스 지타이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가운데, 프랑스가 사랑하는 한국 감독 홍상수의 회고전도 마련됐다. 3월 9일부터 13일까지, 도빌의 그림 같은 해변에서 오리엔탈 드림이 상영된다.
환갑을 넘긴 여배우에게도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변신이라는 단어로 수식될 수 있는 결과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헬렌 미렌은 지금 새로운 변신을 꿈꾸고 있다.
<더 퀸>(2006)은 각본가 피터 모건이 시나리오를 집필한 <라이벌>(2003)과 <특별한 관계>(2011)를 잇는, 토니 블레어 3부작의 징검다리가 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더 퀸>은 단도직입적인 제목처럼 영국 수상 시절의 토니 블레어보다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관점이 보다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총리 선거가 보도되는 TV를 바라보는 여왕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와 방 안에서 담소를 나누는 오프닝 시퀀스는 세상과 괴리된 위치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보살펴야 하는 여왕의 고독한 위엄을 생생하게 내비친다. 그리고 <더 퀸>에서 그 고독한 여왕의 내면에 깊은 경의를 바치도록 위엄을 부여한 건 바로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하사 받았던 ‘데임’ 헬렌 미렌이었다.
러시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미렌은 6살부터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감각”을 지닌 배우를 꿈꿨다. 8살에 입학한 학교에서 시작된 무대 경험은 13살에 입학한 세인트 버나드 수녀원의 여자 고등학교에서 접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통해 좀 더 구체화됐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로 정숙을 강요하던 학교의 방침은 반사적으로 안티테제적인 성향이 강한 미렌의 독립성을 부추겼다. 또한 모델로 성공한 사촌 타니야가 <007 골드핑거>(1964)에 출연하자 그녀는 더욱 강한 자극을 얻었다. 하지만 딸의 바람이 부질없다고 믿었던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교육자로서의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렌의 시선은 부모가 제시한 길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 몰래 국립 청소년 극단의 오디션을 치르고 통과한 뒤,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관 위로 본격적인 삶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NYT에 입단한지 2년 만에 런던의 올드 빅 극장에서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관능적인 연기로 클레오파트라를 선보인 미렌은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에이전트와의 계약이 성립되는 등, 그녀의 입지는 완전히 변했다. 2년 뒤,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의 제안으로 극단을 옮긴 그녀는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에서 맡은 크레시다 역을 통해 나신의 육체로 무대를 장악했다. 노출을 불사하는 그녀의 도전적인 특성은 스크린 진출의 기회로 확대됐다. 호주의 해변을 병풍 삼아 누드를 드러낸 <에이지 오브 컨센트>(1969)는 그녀가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인 관능을 고스란히 활용한 작품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에로티시즘의 거장이라 꼽히는 틴토 브라스의 문제작 <칼리귤라>(1979)에서 그녀는 광기에 빠진 로마 황제의 음란한 정부로 등장하며 악녀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다지기도 했다. “영국 배우 중 헬렌 미렌과 같이 전적으로 섹스 어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가디언>지의 코멘트는 이런 경력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드 신에 있어서 섹시함 따위는 없다. 더 불편할 뿐이다. 나는 옷을 벗고 있는 것보단 입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미렌이 누드를 감행한 건 단지 그것이 자신의 연기적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교회 그림을 보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발가벗은 육체를 보길 원한다.” 이런 생각처럼 미렌은 과감한 노출을 통해 대중의 주목을 얻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이를 성과로 매듭지을만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단지 괜찮거나 멋있게 보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육체마저도 연기적 완성을 이루는 방편으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의지와 확신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빠른 성공을 얻어냈다. 하지만 미렌에게 “20대는 고문”이었다. “왜냐면 무엇이 돼야 하는지, 혹은 그 모든 게 잘 풀려나갈지도 알 수 없고, 소위 어른이 됐음에도 그 어떤 것도 배운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때때로 그것이 진짜 자신인가라는 고민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무대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영국 배우들처럼,극단에서 연기적 경험을 시작한 미렌에게도 셰익스피어는 밟고 건너야 할 연기적 토양이었다. “셰익스피어를 연기할 때, 관객들은 당신이 똑똑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때 악녀로서의 이미지를 구가했던 그녀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녀는 한때 자신이 활약하던 국립극장과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훗날 미렌은 이에 대해 고백했다. “권력의 제재에 타협하고 늘 올바른 행동만 하는 건 내게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실로 악명을 얻는 것”, 즉 스스로를 악명으로 위장하며 자유를 추구했다.
“미렌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을 무대 밖으로 밀어낼 정도다.” 1974년, <레이디 맥베스>로 오랜만에 무대에 복귀한 미렌에 대한 이런 평은 그녀의 현실을 대변하는 바이기도 했다. 사실 미렌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에게는 하나 같은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 과감한 노출 여부와 상관 없이 일맥상통하는 어떤 태도가 발견된다.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 곳이나 드러누운 채 칼리귤라를 유혹하는 캐소냐의 음란한 욕망이 자신이 사모하는 한 남자를 향한 정열적인 표현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건 그 결말부에 다다라 칼리귤라의 최후를 목격하는 그녀의 절규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칼의 고백>(1984)의 애절한 결말부나 역시 <고스포드 파크>(2001)의 결말부에서 드러나는 절절한 고백신을 비롯해서 근작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의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애틋한 이별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녀가 연기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위장한 여인들의 연약한 심성이 담긴 눈물로서 결말을 맞이하곤 했다.
동시에 그녀들은 개인과 체제의 기로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들이어야 했다. <더 퀸>의 엘리자베스 2세는 물론, 또 다른 영국 여왕을 연기한 <엘리자베스 1세>(2005)에서 그녀는 개인과 국가라는 경계 위를 방황하는 여왕의 연약한 이면을 묘사하는 동시에 여왕의 고뇌가 어떤 가십거리처럼 여겨지지 않도록 위엄 있는 표정과 자태를 마련했다. 모성애와 정치적 신념의 기로 위에 선 여인으로 출연한 <어느 어머니의 아들>(1996), 그와 반대로 망령이 든 국왕이자 남편을 대신해서 권력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내치고 왕권을 차지하려 드는 아들의 음모에 맞서는 왕비 역으로 출연한 <조지 왕의 광기>(1994)에서도 갈등 위를 떠돌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결코 달아나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담백하게 드러낸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부조리한 사랑에 대한 이해에 앞서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단호한 의지로 복수를 감행하는 여인으로서 확고한 의지를 연기한다.
최근작 <레드>(2010)에서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임을 각인시켰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자태로 묵묵히 기관총을 연사하고 오래 전 헤어졌던 연인에게 낭만적인 입맞춤을 선사하는 <레드>에서의 모습은 그녀가 지난 날 보여줬던 수많은 노출보다도 되레 파격적인 동시에 아름답다. 최근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더 템페스트>(2010)의 연출자 줄리 테이머는 말한다. “이런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여자들을 위해 쓰여진 바가 없다. 그래서 헬렌 미렌과 같은 여배우가 이런 기회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작업을 원했다.” 60대 중반의 나이를 넘긴 미렌이 지금 전성기 못지 않은 특수를 누릴 수 있는 건 그녀가 여전히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의 배우로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내 모든 야심은 질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고백했던 미렌은 자신이 질투했던 이들 앞으로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하게 걸음을 옮기며 자신만의 족적을 남기고, 보폭을 넓혀왔다. 지금도 그녀는 꼿꼿하고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스스로 꿈꾸던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감각”을 지닌 배우로서.
대중의 주목을 얻어야 할 배우들에게 타고난 미모란 선천적인 재능과 같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 압박을 느끼게 만든다. 맥아담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고전적인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는 <노트북>(2004)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맥아담스가 웨스 크레이븐의 스릴러 <나이트 플라이트>(2005)를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시도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시도하길 원한다.” 그녀는 단지 할리우드의 퀸카로 살아남길 원치 않았다. 물론 여전히 그녀는 충분한 연기적 시도도, 그리고 이를 보좌할 확실한 기회도 만족스럽게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앞으로 나를 떠미는 인생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가 배우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 선천적 재능이라면 그녀가 품은 호기심은 배우로서의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 후천적 재능이다. 할리우드의 퀸카를 넘어서 더 나은 배우로서의 삶을 이룰, 진짜 재능은 이미 그녀에게 있다.
클레르몽페랑은 프랑스의 남북을 잇는 관문이다. 천재 수학자 파스칼을 낳은 이 작은 도시는 수많은 대학들이 위치한 학문의 요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매년 2월 이곳에서는 ‘단편 영화제의 칸’이라 불리는 클레르몽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가 열린다. 영상 분야 신예들의 성장을 위한 관문으로, 재능의 발견을 위한 교류의 장으로 변모한다.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수많은 꿈들이 ‘약속의 땅’ 클레르몽페랑으로 모인다.
지난 해 혜성처럼 등장한 캐리 멀리건은 일찍부터 배우를 꿈꾸고 있었다. 한때 조바심을 냈던 것도 그만큼 열정이 뜨거웠던 탓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왔다. 꽃이 피어 오르듯, 재능이 만개한다.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두는 2009년 작인 <아바타>와 <허트 로커>가 벌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배우 관련 부문만큼은 두 영화의 세력 다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특히 만년 여우주연상 수상 후보인 메릴 스트립과 헬렌 미렌을 제치고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한 산드라 블록은 수많은 말을 몰고 다녔다. 그리고 시상식 이전부터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던 배우가 있었다. “캐리 멀리건, 스타가 탄생했다.” 첫 주연작 <언 애듀케이션>(2009)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얻어낸 캐리 멀리건은 <타임>매거진의 헤드라인처럼 놀라운 발견이었다.
1985년생, 그러니까 이제 20대 중반을 통과한 멀리건의 이력이 시작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오만과 편견>(2005)에서 키티 베넷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할 당시만 해도 멀리건은 딱히 대중의 눈길을 끄는 존재는 아니었다. <언 애듀케이션>을 연출한 론 쉐르픽의 말처럼, “그와 같은 속도로 대단히 유명해질 수 있다는 건 특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쉐르픽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난 멀리건은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매니저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세 살의 멀리건은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도버해협을 건넌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뒤셀도르프는 전세계의 사람이 모여 드는 국제적인 공업도시였다. 그녀가 네 살에 입학한 뒤셀도르프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Dusseldorf E.V.)는 서로 다른 50개국에서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곳은 그녀가 배우로서의 오늘에 다다르는 시작점이었다. 2년 뒤, 멀리건은 교내 연극무대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그녀의 오빠 오웬이 출연한 <왕과 나>에 참여하길 원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어렸던 그녀에게 허락된 건 코러스 석뿐이었고 어린 그녀는 화를 삼킨 채 그 자리에서 무대를 지켜봤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다. “그게 내가 연기를 원하게 된 전부였다.”
여섯 살짜리 꼬마의 다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필요했다. 후에 다시 가족과 함께 런던의 하이드 파크로 돌아온 멀리건은 자녀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길 원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영국의 명문 가톨릭 여자사립학교인 올딩엄 스쿨(Woldingham School)에 입학한다. 호텔 매니저로서, 대학 강사로서, 바쁜 일상을 보낸 탓에 멀리건의 일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부모에게 기숙사 제도를 지닌 이 학교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비비안 리나 모린 오하라와 같은 여배우를 배출하기도 한 이 학교에는 훌륭한 드라마 부서가 있었고 멀리건은 이를 통해 배우로서의 자양분을 마음껏 쌓아나갔다. 다른 수업을 무시하듯 오로지 연기에 몰두해 나간 그녀는 <크루서블>이나 <스위트 채러티> 등과 같은 고전 연극 무대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멀리건을 지도한 주디스 브라운(Judith Brown)은 그녀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그녀는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옳은 기질과 성공을 향한 투지도 지니고 있었다.”
멀리건의 부모는 그녀가 명문대에 진학해서 학구적인 직업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연기자로서의 미래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성공이 멀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연기 전공을 꿈꾸던 그녀는 부모 몰래 선술집에서 돈을 벌며 연기 전공이 가능한 대학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세 번의 불합격 통보였다. 그리고 더욱 암담한 것은 그런 그녀의 비밀을 어머니가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간절한 희망이 묘비에 새겨진 유언처럼 허망해지듯 그녀에게는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올딩햄 재학시절, 멀리건은 로버트 알트만이 연출한 <고스포드 파크>(2001)의 각본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줄리안 펠로위스와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여교장이었던 다이애나 버논의 친구였던 그는 멀리건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가 쏟아내는 대단한 연기적 열의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식사 후, 버논을 통해 냉담한 충고를 전했다. 내용인즉, 은행원과 결혼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멀리건과 펠로위즈와의 만남은 악연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멀리건은 버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버논은 다시 한번 펠로위즈에게 그녀의 진심을 전달했다. 결국 펠로위즈의 가족식사에 초대받은 멀리건은 자신의 열정을 다시 한번 토로했다. 이는 헛되지 않았다. 펠로위즈의 부인인 레이디 엠마는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오만과 편견>의 제작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제작진에게 멀리건을 소개했다. 조 라이트는 멀리건에 대한 첫인상을 이처럼 말한다. “그녀가 왔고, 훌륭한 캐스팅 멤버였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줬다.” 멀리건의 오랜 집념이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출연을 확정 지은 멀리건은 로얄 코트 극단에 입단하며 무대 데뷔를 이루고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며 연기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마련해 나갔다. 같은 해, BBC에서 TV시리즈로 제작한 찰스 디킨스 원작의 <황폐한 집>에 캐스팅될 때까지도 무대에서 거듭 연기를 이어나갔다.
“19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진짜 적절한 관계를 얻지 못했다. 루저 중의 하나였다고 할까.”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는 그녀가 이 캐스팅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이해해줄 ‘관계’의 성립에 고무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재능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와중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작은 역할을 거듭하던 그녀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더 그레이티스트>(2009)의 출연을 통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기억될만한 기회를 얻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의 출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제작자와 세 번에 걸친 만남의 시작이 바로 그 선댄스영화제였던 것이다.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대로 성공적이었다. ‘오드리 햅번’에 비유된 그녀의 주가는 올라갈 차례만 남겨두고 있었다. 같은 해 제작됐던 <브라더스>와 <퍼블릭 에너미>에서 작은 역할로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는 ‘브리티쉬 인베이전’이라 불릴만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거치며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2010년, 올리버 스톤의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와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는 멀리건의 새로운 입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특히 데뷔작 <오만과 편견>에서 주연을 맡았던 키이라 나이틀리와 또 한번 함께 출연한 <네버 렛 미 고>는 불과 5년 사이, 멀리건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증명하는 대조군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그녀가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놀라운 직업을 얻었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이는 매우 멋진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즉시 그 느낌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녀에게 연기란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녀는 새롭게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재능이 만개할 그 순간을 인내했다. 바로 지금, 그녀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재능이 여전히 만개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