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봉 가라사데, 내 사전에 명장면 없는 영화란 없다. 국내에서 좀처럼 개봉하지 못한 두기봉의 작품을 세트로 완비한 이번 부산영화제는 어쩌면 국내에 유랑민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홍콩영화팬의 심금을 울리는 은총의 장이 될지도 모른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두기봉의 신작 <복수>는 두기봉의 필모그래피에서 첨탑을 차지하진 못해도 두기봉의 업데이트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현재진행형 두기봉표 느와르일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참새>의 개봉을 기다리다 목이 빠진 당신이라면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복수>를 직관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이미 불타오르지 않을까.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오른 <복수>는 어쩌면 당신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꼭 봐둬야 할 단 한편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TIP.나 두기봉 영화야. 기봉이 형 믿지?
<공기인형 Air Doll>
10/10 CGV 센텀시티 7관17:30 (GV)
10/13 CGV 센텀시티 3관12:30
10/15 씨너스 부산극장 1관19:30
아시아 영화의 창 | 2009 | 고레이다 히로카즈 | 배두나, 오다기리 죠, 아라타 | 116분 | 일본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인형으로 배두나가 낙점됐다. 낭만적인 인형의 꿈이냐고? 천만의 말씀, 그녀는 섹스돌(sex doll)이시로소이다. 담담하듯 안온한 풍경 속에서 시니컬한 정서를 자아내는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신작 <공기인형>은 인간이 된 인형의 관점을 관통하는 현대문명 속 인류에 대한 고찰이다. 버려진 아이들의 침묵을 담담히 그려내던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최근작인 동상이몽 속에 놓인 가족들의 시니컬한 속마음을 은밀하게 드러낸 최근작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은밀한 냉소가 인형의 낯빛을 한 배두나의 눈길을 통해 조명될 것이다. 올해 봉준호의 <마더>와 함께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기도 했던 <공기인형>은 토론토영화제 등에서 이미 호평을 인증 받은, 둘도 없는 기대작임에 틀림없다.
2009년을 뜨겁게 달군 박찬욱의 신작 <박쥐>의 10분 추가 영상이 포함된 확장판 버전을 굳이 부산에서 또 볼 필요가 있느냐고? 당신이 올해 <박쥐>에 낚였다며 육두문자를 살포한 1인이건, 스크린 앞에 무릎 꿇고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외치던 1인이건, 발동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극장을 찾았던 이라면 단 10분의 추가 분량만으로도 <박쥐>는 분명 유효한 떡밥이다. 또 한번 격음이 난무하는 화법을 동원해 영화를 패대기 치건 할렐루야를 외치며 두 손을 모으고 찬양 크리에 들어가던, 중요한 건 <박쥐> 확장판은 부산영화제에서만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부산영화제에서 업데이트된 박찬욱의 강화된 떡밥을 모른 체 하기에 당신의 호기심이 이미 동하고 있다면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닥극사.
TIP. 10분 추가 영상만으로도 파격적인 떡밥. 일단 물어봐.
<브라이트 스타 Bright Star>
10/9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16:30
10/12 대영시네마 3관17:00
10/15 시너스 부산극장 1관16:30
월드시네마: 마스터즈 | 2009 | 제인 캠피온 | 에비 코니쉬, 벤 위쇼 | 119분 | 영국, 프랑스, 호주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브라이트 스타>는 <피아노>와 <여인의 초상>을 통해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여성주의 감독 제인 캠피온의 섬세한 감각이 되살아난 성공적인 귀환이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19세기 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존 키츠와 패니 브라운의 실화적 러브스토리를 영화화한 <브라이트 스타>는 두각을 나타내는 영국 배우 벤 위쇼와 신성으로 떠오르는 애비 코니쉬의 브리티쉬 앙상블에 초점을 맞춰도 좋을 영화다. 음울한 감수성을 문체로 승화시키던 영국 음유시인의 도전적인 러브스토리. 어쩌면 <브라이트 스타>는 유려한 문장과 단정한 음율이 격정적이고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 끝내 낭만적 파고로 몰아칠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가 아닐까.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을 피해 피난민들은 철교 밑 터널로 몰려들었다. 깜깜한 어둠 너머로 하얀 안광이 빛나고, 터널을 채운 침묵 속에서 종종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오면 엄마들은 그 입을 막곤 했다. 터널 밖으로 인기척이 밀려온다. 사람들의 심장이 뛴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터널 속을 빗발치는 총알들이 휘젓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소리가 들끓던 터널은 점차 식어가는 주검들의 체온으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적층되는 시간 속에 매몰되지 않도록 끝없이 환기시켜야 할 역사, <작은 연못>은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 가운데 덧없이 회자되다 희미해진 ‘노근리 사건’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故박광정을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의 연대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당신의 피는 붉은 색이리라.
<아이 엠 러브>는 중후하고 섬세한 이탈리아 밀라노 상류 재벌가문의 그리스 비극적 몰락을 그린다. 가문의 영광은 세대의 균열과 감정의 변절을 통해 서서히 기둥 뿌리가 흔들려 간다.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치열하게 따라잡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파국의 형상을 우아하게 따라잡으며 역설적인 심상을 자극하는 <아이 엠 러브>에서 방점을 찍는 건 아무래도 틸다 스윈튼의 열연이다. 2002년도에 이미 <틸다 스윈튼: 러브 팩토리>라는 가족 다큐멘터리로 틸다 스윈튼과의 각별한 인연을 과시했던 루카 구아다니노는 결국 틸다 스윈튼의 열연을 바탕으로 인상적인 장편을 완성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를 수상한 작품이자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틸다 스윈튼을 올해 부산에서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놓치지 말 것.
TIP.이탈리아 명문가가 죄다 마피아일 것이란 편견은 버려.
<피시 탱크 Fish Tank>
10/9 대영시네마 2관14:00
10/1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14:00
10/15 대영시네마 1관16:30
월드 시네마 | 2009 | 안드레아 아놀드 | 마이클 패스빈더, 해리 트레더웨이, 키어스틴 워레잉 | 124분 | 영국
2006년 칸영화제에서 자신의 첫 번째 장편 <레드 로드>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던 영국의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는 올해도 자신의 두 번째 장편 <피시 탱크>로 <박쥐>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하며 명성을 이어나갔다. 두 편의 장편 연출작으로 두 번의 칸영화제 트로피를 쓸어담은 안드레아 아놀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뛰어넘다 못해 박차버린 셈이다. <피시 탱크>는 전작 <레드 로드>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도시적 생존본능에 짓눌린 인간적 체온을 구원하기 위한 진심을 담고 있다. 감정적 격발을 유도하는 문제적 결말을 향해 서서히 달궈져 나가는 서사는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의 체온마저 끌어올릴 정도로 뜨거운 것이리라.
어제를 기점으로 해서 많은 사람이 떠났고, 장기적으로 남을 예정이 아닌 사람들은 오늘을 고비로 부산을 등 뒤에 둔채 서울로 떠난다.
방에 혼자 남았다. 수요일까지 있을 예정인데 어쩌면 목,금이 될 수도 있을까, 곰곰이 생각중이다.
취재하느라 영화는 많이 못 봤다.
하지만 운 좋게도 GV까지 걸려있는 에릭 쿠 감독의 <마이 매직>과 두기봉 감독의 <참새>를 3일날, 프리머스 해운대에서 연달아 봤다.
<마이 매직>은 내상이 깊은 남자의 담담한 외상을 그린 영화다. 그 남자는 모든 고통을 참아낸다. 그건 그 남자의 능력이다. 하지만 그 학대는 그 남자를 깊에 파헤치고 갈기갈기 찢는게 분명하다. 남자는 담담하지만 피는 흐르고 상처는 남는다. 에릭 쿠 감독의 말처럼 슈퍼 히어로가 아닌 그 남자는 분명 인내라는 능력을 타고 났지만 그보다도 그 인내를 부축하는 힘은 아들에 대한 부성에서 발현된다. 결말은 너무나 슬펐다. 어금니 꽉 깨물고 참아서 가까스로 눈물은 넘치지 않았지만 충분히 울뻔 했다. 우는 게 창피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앞에 나가서 에릭 쿠 감독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빨개진 눈으로 나서는 게 좀 꺼려졌을 뿐이다. 여튼 <마이 매직>은 정말 좋은 영화다. 그 안엔 벅차오르는 슬픔이 있다. 그건 희망이 아님에도 투명하다. 실로 아름다운 영화다.
<참새>는 대단하다. 두기봉 영화인데 총격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기이하긴 하지만 그만큼이나 세련되고 우아한 소매치기 씬이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듯 카메라의 구도는 가히 예술이다. 4남자가 서있는 공간의 대기가 절감된다. 그 장소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온다. 결말부의 수중씬을 보면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결코 거짓말 아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확 젖혀졌다. 대단한 전율이 아우라처럼 몸을 감싼다. 어떤 설명도 필요없다. 결말부의 수중 시퀀스 만으로도 <참새>는 걸작이라 불릴만한 이유를 적절히 제시하고 있다. 마치 연극적인 느낌의 버스터 키튼 식의 유머러스도 즐겁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과연 개봉하려나, 이런 생각하니 우울하다.
<스카이 크롤러> 야외 상영은 표를 끊었지만 못 봤다. 써야 할 기사도 있었고, 핑계 같은 말이지만 바빴다. 하지만 못 간게 다행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겐 꽤나 미안한 말이지만 상영사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안 가길 천만다행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말을 듣고 보니 국내에서 개봉될 것도 같다. 태원에서 수입했다는데 한글 자막 작업도 상당히 진전된 상태라고 한다.
내려와서 간만에 현장 사진도 찍었고, 뉴스도 줄창 썼다. 명함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고, 어젯밤엔 택시에 핸드폰을 놓고 내렸다가 겨우내 찾았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예기치 못한 갈등 상황도 있었고, 심각한 충돌도 빚어졌다. 한편으로 예상 밖의 문자도 받았다. 여러가지로 액티브했다. 2박3일 남았다. 좀 더 한산해질 것이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부산에 남았다. 오늘밤은 해운대 바닷바람 맞으며 맥주나 한 캔 마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