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동시의 문제는 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읽을 대상의 미성숙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게재됐다는 것이 문제의 본체다. 성인이 읽었을 땐 괜찮다. 성인에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건 폭력이다. 그것을 '아이가 쓴' 동시라고 이해할 순 있으나 '아이가 읽을' 동시라고 인정하는 건 곤란하다. 그렇다면 '19금'이란 기준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만인을 위해 공중파에서 포르노를 틀어도 되겠지. 어른이라면 아이가 어떠한 것도 감당해낼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기까지 눈높이를 맞춰서 지혜를 전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란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대로에서 벌거벗은 채 앞에 선 바바리맨을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글을 쓴 아이가 아니라 읽을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출판사의 태도를 지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시를 쓴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스스로의 글러먹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쓴' 동시엔 죄가 없다. 그 동시는 바로 그런 어른들의,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얕은 분노 같은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일 수 있으므로,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아이의 분노에 자궁 역할을 한 어른들의 반성이 절실하다. 그리고 '아이가 읽으라고' 그런 시를 출판한 출판사는 진짜 좆 잡고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정말 뭔 생각이었던 거냐.
코에 점이 있어서 점순이라 불렀던 어미랑 닮은 무늬를 지니고 있던 주먹만한 아이는 점점 어미에 가깝게 자랐다. 하지만 어미와 달리 언덕에서 올려다 보이는 좁은 난간으로 뛰어 오르지 못해 항상 난간 아래 조그마한 돌바닥에서 위를 올려다 보며 울곤 했다. 난간으로 올라와 밥을 먹지 못하는 새끼를 위해 생각해낸 것은 캔을 까서 포크로 잘라 투척하는 일이었다. 가끔씩 조준을 잘못해서 머리에 맞기도 하고 떼굴떼굴 굴러 떨어져서 새끼가 언덕 아래로 쫓아 내려갈 때마다 '아이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캔만 먹을 수 있는 이 아이를 보고 깐돌이라 불렀다.
깐돌이가 보이지 않은 건 이제 그 흔적이 겨우내 밀려간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깐돌이에게 주기 위해 사놓은 캔이 겨울 내내 그 자리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종종 근심했다. 괜찮을까. 끊임 없이 찾아오는 깐돌이의 어미인 점순이를 보며 가끔 물었다. 네 아이 어디있니. 그 겨울이 지나는 동안 서서히 걱정도 묻혀 갔다. 가끔씩 더해가는 일상의 지층 어느 단면쯤에 있는 그 걱정을 더듬어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망각했고 떠올리지 않았지만 고양이밥을 줄 때마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아이를 생각했다. 잘 있으려나.
난간으로 뛰어올라온 아이를 보며 나는 별스럽지 않게 창가로 다가가 밥이 있나 확인했고 창을 열었다. 봄이네. 봄이 왔다. 그리고 점순이라 생각했던 그 아이를 빤히 보았다. 점순이가 아니었다.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한참 보며 기억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를 건져 올렸다. 너 깐돌이니? 나름 2년 정도 밥을 챙겨주다 보니 눈썰미가 생겼다. 그래도 실험을 하기로 했다. 점순이는 캔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캔을 까주기로 했다.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캔을 먹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와 기웃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를 보존해주는 한에서. 어쨌든 맞았다. 깐돌이였다.
녀석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사이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쯤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을 물었다. 뭐했어? 더 줄까? 밥도 줄까? 그렇게 신이 났다가 난데 없이 눈물이 나서 흐느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광장에 서있었다. 그 광장에서 자식을 잃은 채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절규하는 어떤 어미 아비들을 떠올렸다. 눈물이 그치니 밑바닥에 쌓여 있던 화가 조금이나마 씻긴 기분이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아이였던 것마냥 고마웠다. 돌아와 줘서. 제법 잘 자라줘서.
깐돌이는 까준 캔을 잘 먹고 난간을 서성이다 창문 안을 잠시 기웃거린 뒤 사라졌다. 가끔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위로를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위로가 됐다. 4월의 봄은 다시 찾아왔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됐다. 살아갈 것이다. 고양이캔도 주문할 것이다.
1. 마감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하지만 대단히 좋아서 죽을 거 같다거나, 그렇진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한 가지는 지금이 4월 17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이 맘 때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어졌고, 오늘 같은 날엔 광화문 광장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 나는 건 같은데 조금 다른 건 울적하다는 느낌 같다. 흐느낌 같은 것이 하루 종일 내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 생각해 보니 어제, 비도 왔다. 눈물 같은 하루였다.
2. 집으로 오는 길에 필연적으로 광화문을 지난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방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경찰 차벽으로 인해 완벽하게 봉쇄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새벽 4시가 넘어서인지 통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유가족이 농성 중이라는 광화문 앞과 헌화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광화문 광장 주변엔 경찰차들이 촘촘하게 서있었다. 택시가 마치 섬 사이를 지나가는 배와 같았다. 저 너머에 사람이 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오늘을 기다리며 철저하게 대비했음을 보여주듯 놀랍도록 철저하게 봉쇄된 광장 주변의 풍경이 암담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구상한 게 저것이란 말인가.
3. 광화문 인근에 사는 탓에 세월호 유가족이 머무르는 텐트를 필연적으로 자주 봤다. 봄이 끝나갈 무렵에 세워진 텐트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까지 왔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텐트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텐트도 정확히 지구와 함께 태양을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 몇 걸음 걸으면 다다를 수 있는 청와대 앞으로 유가족은 갈 수 없었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난다는 건. 내년에도 태양을 한 바퀴 돈 세월호 유가족의 텐트를 보게 될까. 어쩌면. 아니, 혹시라도. 혹은 제발.
4. 지난 1년 동안 세월호는 끊임 없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끝끝내 떠오르는 단어였다. 서울에 있다가도, 부산에 있다가도 진도 앞바다를 생각했다. 나는 잊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내가 잊지 않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잊을 수 없었다. 그 두려움을 통해 그 날을 끊임 없이 떠올려야 할 것 같았다. 추모의 의미로 달았던 노란 리본은 강력한 상징이 돼서 떼낼 수 없는 것이 됐다. 평생을 바쳐 추모해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내가 어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점점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게 죄를 짓는 것만 같다. 물려줄 죄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우울하다.
5. 세월호 유가족이 한 말이 각인된다. “박근혜는 죽으면 자식이 없겠지만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겠지. 하지만 나나 부인은 거둬줄 사람이 없다. 내가 박근혜보다 나이가 적다. 죽을 때까지 두고 볼 것이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것이다. 광장에 서서, 광장이 돼서.
예전에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언론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이를 둘러싼 총체적인 매커니즘에 관해 취재해서 긴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뒤늦게 마지막으로 강호순의 얼굴 공개에 탑승한 MBC 보도국 관계자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론 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JTBC <뉴스룸>이 성완종 회장의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한 것도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 방송의 보도윤리란 일반적인 사회적 윤리와 완벽하게 동일한 궤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보원의 엠바고를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일 순 없겠지만 알 권리를 바탕에 둔 보도윤리를 중점에 두고 보도방침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뉴스 관계자의 기류를 판단할 때 참고할만한 사항은 되겠다.
이번 사안이 향후 <뉴스룸>의 행보에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모르겠으나 <뉴스룸>이, 본질적으로 손석희가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된 건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판단을 내린 손석희도 잘 알고 결정한 사항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정말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다.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손석희는 녹음 파일 공개가 언론으로서의 직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건 손석희의 직업정신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활시위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건 <뉴스룸> 보도국이, 손석희가, 사회적 윤리를 배반했다고 논할 이들을 정서적으로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인데 그 국면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겠다. 그리고 그만큼 막중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손석희의 믿음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결국 아무도 모를 것이다. 손석희의 판단에 온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가 내린 판단은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으로 그의 자리를 지켜볼 것이다.
생이란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로 손쉽게 구분된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들은 괴롭고 비루한 일상을 통해서도 이어지는 생을 그린다. 쉽게 꺾이지 않는 생의 가능성을 응시한다.
멕시코 시티에서 태어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건 17세 무렵이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역선의 물류 창고에서 자고
바닥을 청소하며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다다른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남다른 시각을 제공했다. “바르셀로나는
정말 대단했다. 어떤 모험심을 가진, 매우 어린 시절이었다. 수많은 이웃들을 소개해주는 친구가 생겼고, 끝내주는 경험을 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모임을 보면서 감탄했다. 탐험을
하는 내게 있어서 정말 쿨한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한 <비우티풀>(2010)은 이
당시에 목격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다양한 출신 성분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광경을 목격하고 체험했던 여정이야말로 그의 영화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 같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아모레스 페로스>(2000)는 이 세계의 너비를 되새기게 만드는 작품이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고향인 멕시코 시티를 배경으로 둔 이 영화는 각자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는 세 인물의 생을 세 개의 시점으로 나열하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칸국제영화제의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찌든 때처럼
거리에 눌러 붙은 폭력성을 묘사하고 퍼즐 같은 서사 구조를 지닌 덕분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을 연상시킨다는 평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곤잘레스 이냐리투에게 폭력은 허구적인 소품이 아닌 현실의 언어였다. “나처럼 매일같이 거리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사람이 죽는 도시에서 산다면, 폭력과 죽음은 더 이상 재미있는 일이 아닐 거다. 폭력에는 그에 응당한 결과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만약
당신이 폭력을 구사한다면, 그 폭력의 결과는 당신에게 돌아올 거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초기작인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2003), <바벨>(2006)은
서사적으로 유사한 형식성을 취하고 있다. 세 부류로 나뉜 개별적인 삶과 그 일상이 부득이한 이유로 타인의
삶과 충돌하고 끝내 이 세계를 에워싸는 사건으로 확장된다. 세 작품은 동일하게 서사를 파편처럼 나열하고
퍼즐 구조의 서사로 진전된다. 다중적인 시점을 통해 서사의 확대와 증축을 꾀하며 입체적 감상을 유도한다. 이처럼 유사한 서사적 형태를 지닌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건 우연과 필연을 통해 진전되는 관계의 층위와
현실적인 생의 너비를 체감하게 만드는 관성이다. 어느 개인의 경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라는 물리적 너비를 포괄할 수
있는 생의 무게감을 실감하게 만든다.
<비우티풀>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라는 감독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다중적인 시점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서사를 지닌 전작들과 달리 <비우티풀>은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첫 번째 정극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 수미상관의 구조로 이뤄진 이 작품은 생과 죽음의 양면성을 유려한 슬픔과 환희로 승화시키며
시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감상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왜냐면 사실 <비우티풀>은
굉장히 참담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바르셀로나의 빈민가에서 힘겹게 두 자식을
키워나가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둔 이 영화는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가는
이야기다. 가난과 고통 그리고 배신과 죽음이라는 어둡고 험난한 단어들로 점철된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긴다 말할 수 있는 건 죽음으로도 부서지지 않는 생의 가치를 시적인 정서로 담아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말처럼, “<비우티풀>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한 영화다. 삶을 향한 찬가다.” 그
비극적인 생의 마감을 지켜보면서도 그토록 평화로운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건 결국 그 생이 어떤 종착만은 아닐 것이란 믿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마치 영적인 기적을 목격하는 듯한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그 영화에 담겨있다.
사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는 하나 같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 세계의 단면들을 수집해 오면서도 생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이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마치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삶이여, 다시!”라고 외쳤던 니체의 격언처럼 그렇다. 다만 이 거대한 비극의 도가니 속으로 내몰리는 인간들의 군상이 어떤 구조 속에 놓여있는가를 통해서 이 삶을
비극으로 내모는 인과와 심리를 제시한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로부터 괴로운 심정을 얻는다는 건 그만큼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괴로운 서사의 끝에서 되레 감상적 치유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건 결국
그의 영화가 서로의 통증을 분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이 세계에 대한 영적인 믿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버드맨>(2014)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증언과도 같다.
대략 5년 전, 자신이 구상했던 어떤 이야기의 조연 캐릭터를 모티프로 개발된 <버드맨>은 한때 ’버드맨’이란 슈퍼히어로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어떤 배우의 재기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버드맨>은 단순히 어떤 배우의 연기적 재기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다. 곤잘레스 이냐리투도 “솔직히 그런 주제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아가 우리를 끌어올려줄 수 있지만 순식간에 우리를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에 힘을 내주고 휘둘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버드맨>은 한 퇴물 배우가 자신을
파괴하는 망상과 세간의 비웃음으로부터 삶을 회복해나가려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은 때때로 우스꽝스럽다
못해 신랄한 블랙코미디 형태로 묘사되는데 이는 기존에 곤잘레스 이냐리투 영화와 이질적인 감상적 온도를 전달한다.
동시에 명배우들이 시종일관 장대비처럼 쏟아내는 대사량과 그 대사에 세찬 리듬감을 가미하는 드럼 솔로,
그리고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카메라 워크 등 전작들에 비해 보다 화려해진 테크닉들로 영화의 기교적인 밀도가 한층 높아진 인상이다.
무엇보다도 <버드맨>은 보기 드물게 유머러스하고 신랄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첫 번째 블랙코미디이지만 어느 생에 대한 경의를 품은, 그의 다섯 번째 찬가다. 어떠한 예측도 뛰어넘는 이 영화의 결말은 타인들에 의해 손쉽게 실패라고 손가락질 받는 누군가의 삶이 결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응시하는 생의 철학으로 비상한다.
“내 영화들은 내 자신의 연장선이다. 일종의 내 생명과 직결된
경험의 증거들, 매우 드문 선행과 매우 많은 한계들과 함께.”비참한 삶의 형태 속에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생의 가능성.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응시하는 건 결국 이 세계의 너머가 아닌 자기 자신과 우리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그것이다.
<버드맨>의
결말에 대하여
아마도
<버드맨>을 보게 된다면 그 결말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엠마 스톤의 ‘빅 아이즈’를
통해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 결말은 원래 예정됐던 결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의 촬영이 중반에 다다랐을
즈음 그 결말이 정말 최악이라고 느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결국 각색가들과 함께 새로운 결말에 골몰했고,
결국 지금 형태의 결말을 완성했다. 그는 지금 형태의 결말에 대해서 굉장히 만족했고,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본래의 결말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극도로 말을 아낀다. “원래의 결말에 대해선 결코 말하지 않을 거다. 매우 황당한 것이니까. 정말 나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결말
또한 황당하다고 느낄 관객은 존재할 거다. 이쯤 되면 어떤 결말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나? 보면 안다.
아는 형이 조심스럽게 카톡을 보냈다. ‘페북으로 쌍용차 후원 릴레이를
하는데 다음 타자로 널 지목해서 태그해도 되겠니?’ 그러라고 했다.
1만원을 쌍용차 후원 계좌에 입금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 후 관심 있는 지인 두 사람 이상을 추천하면 된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대략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야 기억이 났다. 기억난
김에 입금하고자 했다.
하지만 1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을
입금하고, 다음 타자는 지목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10명의 후원을 대신했다고 생각하련다. 괜히 누군가를 추천해서 부담을
안겨줄 수도 있고, 이미 다른 방식으로 후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만약 당신이 쌍용차 해고자들에 대한 후원에 관심이 있다면 동참해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이 글이 누군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의 창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분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내가 혹은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처지가 될 수 있음을 공감하고 기꺼이 저 투쟁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농협 3510598588683 김정우] 계좌에 1만원을 후원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면 된다. 응원의 메시지가 주는 힘도 대단할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거대한 정치적 패악을 뒤바꿀 동력도 필요하겠지만 당장 벼랑으로 내몰린 일상을 구제할 수 있는 온기
또한 절실하다. 그러니 그 온기를 전하고 누군가에게 폼 나게 자랑하시라.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전파하고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지 나게.
거침 없이 말했다. 언뜻 가볍게 들렸다. 하나 곱씹을수록 명확했다. 주지훈은 똑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종영된 미니시리즈 <밀회>는 <도쿄타워>를 원안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사실 2009년에 안판석 PD가 <도쿄타워> 원안으로 기획했던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던 것으로 안다.
잘 알겠지만 그때 내가 사고를 쳐서 다 무산됐다. 이제 당당해졌다는
건 아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숨겨서 뭐하겠나 싶은 거지. 법적으로
죗값을 치렀지만 여전히 책임감을 느낀다. 괜히 나 때문에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될
사람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내 일을 하려고 한다.
연기로 용서를 빌겠다는 말인가?
배우가 하는 일이란 연기로서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다.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줄 수도 있고 때론 상처를 치유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내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내 연기가 그런 불편함조차 잊을 수 있도록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면 지난 과오도 조금이나마
희석될 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숨기려고 하기 보단 잘못을 인정하고 맞을 건 맞더라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긍정적이다.
죽을 순 없으니까, 계속 살아가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좋은 친구들>의 이도윤 감독님도 그러더라.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거라고.” 내 잘못을 반석으로 삼아서 그 위에 쌓인 교훈들을 활용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친구의 권유로 하게 된 일이라고 들었다. 원망스럽진 않나?
사실 그 친구를 이제 더 이상 보진 않는다. 원망해서가 아니다. 내 선택이었으니까 내가 책임지는 게 맞다. 다만 다시 그 친구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기분 나쁜 일이 될 수 있겠더라. 아무래도 그 일로 손해를 입은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서로에게도 좋을 일은 아닐 거 같고.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이진 않나?
원래부터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동네 술집이나
편의점 앞에서도 잘 앉아있는 편이다. 작품을 하지 않을 땐 살도 많이 찌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있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드문 거 같다. 옷도
막 입고 다니니까. 실제로 보면 내가 너무 까맣다더라(웃음).
주당이라던데.
먹으면 많이 먹는 편이다. 요즘은 운동 때문에 한 달 가까이 못 먹었는데
앞으로도 두 달 정도는 못할 거 같다. 그런데 조만간 개봉을 앞둔
<좋은 친구들> 제작보고회도 있고, 시사회도
있을 거라 뒤풀이가 좀 걱정이다. 다들 ‘네가 견딜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저주를 퍼붓는데, 절대 안 먹을 거다(웃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라도?
지금 준비하는 차기작 때문에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론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힘들다. 어릴 때 술만 먹지 말고 운동 좀 해놓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웃음).
개봉을 앞둔 영화 <좋은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남자영화’다. 이렇게 단순히
‘남자영화’라고 할만한 작품엔 처음 출연하는 거 같은데.
<좋은 친구들>은
내게 잘 맞는 옷이었다. 그만큼 진짜 내 모습을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친한 친구들하곤 서로에게 욕도 많이 한다. 낄낄거리면서 헛소리도
많이 하고. 원래 남자들이 좀 그런 거 있잖아. 서로 까면서
친해지는 거. 그리고 쉬는 동안엔 술을 좋아하다 보니 살도 많이 찌는 편이라서 실제로 한 10kg 정도 체중을 늘렸다. 일상적인 내 모습을 담고 싶었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감독님과 말이 너무 잘 통해서 대부분의 신이 두 테이크 안에서 오케이 됐다. 그래서
우리끼리 너무 잘 맞아서 너무 잘 찍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최근에
ADR(후시 녹음)을 하면서 편집된 영상을 보면서 둘 다 대가리 박고 반성했다(웃음). ‘너무 우리끼리 으쌰으쌰 했나?’ 싶더라. 아까 말했듯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 달간 술을 안마셨는데
그날 딱 한번 마셨다.
뭐가 아쉬웠나.
화면으로 보니까 희한할 정도로 멀끔해 보이더라. 그게 좀 아쉬웠다. 물론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병신
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웃음).
사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라 너무 과묵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 얘긴 많이 듣는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 이미지보다
더 차갑게 대한다. 처음 만났는데 말을 툭툭 던지거나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서로 그래도 상관없다면 페어 플레이니까 괜찮다. 하지만 내가 하면
괜찮은데 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저 혼자 잘나면 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보통 초보 배우 시절엔 본인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언제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까?
<마왕> 촬영
중에 어떤 신을 앞두고 많은 연습을 했다. 그래서 굉장히 자신 있었지.
그런데 상대 연기를 하는 선배님 앞에서 준비한 걸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리액션을
맞추다가 그대로 끝나버렸지.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까 내가 준비했던 것보다 그게 훨씬 좋아 보였다. 한 수 배웠지.
자신의 단점을 쉽게 인정하는 편인가?
스스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면 발전할 수 없다. 인정해야 고칠 수
있지. 그러니 남 탓하면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야 잘나오고,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잘 안 나오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다. 일단 나부터 잘하는 사람이 돼야지.
스스로에게 엄격한 면이 있는 거 같다.
스스로에게 제약을 줘야 노력이란 걸 하게 된다고 믿는다. 아니면 나태해지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부럽다. 물론 그런 사람은
드물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대본만 열심히 보면서 농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준비하는 만큼 잘해내는
선배가 있고, 항상 술 먹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잘해내는 선배가 있다. 스타일이 다른 거지. 하지만 결국 정진하면 정점을 찍는 거다. 하지만 그 선배를 보고 현장에선 저렇게 다 놓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 선배는 이미 기본이 돼있으니까 그게 되는 거다. 무대에서 10년씩 해왔던 사람들이니까. 날 것이 좋다고 하는데 잘 알겠지만
함부로 날 거 먹으면 장염 걸린다(웃음).
선배들이 꼭 연기적인 교훈만 주는 존재는
아닐 거다.
옛날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자기한테 들어온 작품들만 고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잘 나가는 좋은 배우들도 직접 작품을 찾아 다닌다는 얘길 듣고 멍해졌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내게 너무나 큰 사람들이었으니까. 요즘은 “이 작품 재미있는데 나 주면 안돼?” 이런 얘기 잘 한다. 예전엔 그런 부탁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 같아서 쉽게 못했는데 지금은 편해졌다.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넉살이 생겼다고 할까?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웃음).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르지.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늘어가고 그만큼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한번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자주 찾던 동네 술집으로 친해진 동료 배우를 불렀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한 아저씨가
오시더니 반갑다고 툭 치면서 ‘오, 누구 씨!’ 이러는 거다. 그런 상황을 목격하니까 이해가 되더라. 그 친구는 항상 룸이 있는 곳에서만 술을 마셨는데 내가 항상 그럴 필요 없다고 잔소리를 했거든. 나는 한번도 그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남자 나이 서른
셋이면 애도 아니고 그날 따라 기분이라도 안 좋아서 욱해버리면 술 기운에 싸움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다
안 좋은 기사라도 나면 큰일이고. 여배우들은 오죽할까 싶더라. 직접
겪어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
특별히 친한 배우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류)덕환이, (김)재욱이 정도? 군대에서
만난 (이)준기도 친해졌다.
사람들이 되게 안 어울린다고 하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사실 스타일이 정반대라 서로 흉보면서
토할 때까지 술 마신다(웃음).
남들이 보면 싸우는 줄 알겠다.
사실 이번에 촬영하면서 (이)광수랑
친해졌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오해할 소지가 많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광수가 NG를 내면 내가 ‘역시 예능하는 새끼는
안돼’라고 놀린다. 그러면 광수가 욕으로 응수한다. 사실 광수는 예의 바른 동생이다. 그 정도로 우리가 친해졌다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우리 관계를 잘 알만큼 곁에 있는 건 아니니까 멀리서 볼 땐 주지훈이 이광수를 엄청 무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겠더라.
그런 걸로 기사라도 나면 피곤한 일이고
사실 기자들이 모르고 쓰는 거라면 괜찮다. 그런데 대부분 알면서 일부로
쓰는 거잖아. 사실 배우를 공인이라고 하는데 공인은 사전적인 의미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다. 내가 공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을 지닐 필요는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건 공인으로서의 책임은 아니다. 배우의 사생활이 국민의 알 권리는 아니다. 공무원들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이니까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배우는 자기 능력으로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물론 배우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할 순 있다. 하지만
사사건건 기사화하면서 그걸 알 권리라고 포장하는 건 어이없지. 그런 의미에선 기자들이야말로 공인이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생각하면 굉장한 책임감을 느껴야지.
최근에 가인과의 연애도 폭로되듯이 밝혀졌는데.
특별히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숨어 다니는 편도 아니고. 하지만 먼저 나서서 밝힐 이유도 없는 거지. 어쨌든 누군가 미행하듯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20대
후반과 30대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군대도 다녀왔고.
군대 다녀오니까 현장 인원의 절반 이상이 나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른다(웃음).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요즘은 20대 초반 같은 기분을 느낀다. 보통 스무살 중반 정도가 돼야 성인이라는 게 느껴지잖아. 아무래도 20대 초반엔 대부분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을 계속 만나고, 돈도
없으니까 하는 짓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기간이 필요한 거지.
입대 전에도 <돈주앙>이라는 뮤지컬로 공연한바 있는데 군대에서도 뮤지컬
공연을 했다고 들었다. 특별히 뮤지컬에도 흥미가 있었던 건가?
단순히 소리 내서 발성하고 발음하는 연습이 지겨웠다. 그때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는데 문득 뮤지컬 발성이 기교를 부리지 않고 깨끗한 발성을 해야 하는 거라 기본 발성과 동일하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원래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지겹지 않게 발성 연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뮤지컬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국 뮤지컬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밴드 활동도 하더라. 자작곡도 있던데.
흥얼흥얼하면서 녹음했다가 세션 멤버들한테 들려주면
그들이 악기로 연주해서 곡이 하나 나온다. 물론 어디 가서 음악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 창피한 수준이지.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해선 안될 이유도 없다. 물론 이렇게 편하게
연기하는 건 안 된다. 연기는 내가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까.
서촌의 집과 사무실과 가게들이 오픈하우스
서촌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서 올해 또 한번,
벌써 두 번째 손님맞이였다.
지난 2013년에 시작된 오픈하우스 서촌은 지난해에 참여했던 프로그래머들의
긍정적인 호응을 통해서 지난 5월 17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 동안 두 번째 손님맞이를 마쳤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오픈하우스 서촌에서도 건축가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서촌에 터를 잡은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이나 사무실을 공개하는 오픈하우스와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또한 서촌 일대에 자리한 레코딩 스튜디오와 레스토랑, 갤러리, 아트북 서점 등이 오픈스튜디오와 오픈마켓, 오픈키친 등의 테마를
내걸고 제각각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한편 오래된 한옥들이 늘어선 서촌의 좁은 골목을 함께 걸으며
그 골목에 깃든 정취를 즐기는 재미와 오랜 역사 속에서 뿌리내린 의미들을 설명하는 답사 프로그램이 서촌의 곳곳에서 진행됐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열의도 대단하다. 마냥 편히 즐기는 축제 현장이라기
보단 강의를 찾아온 학생들 같다고 여겨질 만큼 눈 여겨 보고, 귀담아 듣고, 때론 받아 적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서촌을 찾았던 이들 가운데선 이런 행사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들도 많았을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픈하우스 서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홍보
방식이 동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홍보 자체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직접적인 홍보 수단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로 국한된다. 프로그램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참가 신청을 원하는 이들은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야 한다. 참가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된다. 다만 사적인 공간이나 특정한 동선에 따르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인 만큼 참가 인원이 20명 안팎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적극적인 홍보 자체에
대한 큰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으며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홍보 자체도 불가능한 면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온전히 한 사람이 주관하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건축전문 저널리스트 임진영이 서촌에서 살기 시작한 건 6년 전이었다. 유달리 건축가 사무소가 많은 동네였고, 건축전문기자인 만큼 친분이
있던 건축가들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서촌엔 건축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나 창작자, 콘텐츠 기획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을 통해서 크고 작은 네트워크와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선 소소한 이벤트가 마련되곤 했다. 이를 목격한 임진영은 이 소소한 커뮤니티들을 하나로
묶을 플랫폼이 존재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서촌에 사는 건축가 황두진을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과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점차 계획이 구체화됐다. 이 동네에 터를 잡은 콘텐츠 창작자들의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는 크고 작은 이벤트에 참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각자의 집과 스튜디오를 오픈해보자.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오픈하우스 서촌’이다.
오픈하우스 서촌의 모티프가 된 건 올해 가을 개최를 목표로 준비 중인 ‘오픈하우스
서울’이다. ‘오픈하우스 뉴욕’이나 ‘오픈하우스 런던’처럼, 서울에 살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어쩌면 알기 힘들었던 서울의 건축물들이나 건축가와 창작자들의 스튜디오를 일시적으로
개방해서 서울이라는 도시의 건축적인 환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취지의 일환에서 기획되는 건축 전문 축제다.
그만큼 행사를 주관하는 기획자가 중심이 되는, 중추신경계의 역할이 중요한 축제다. 하지만 오픈하우스 서촌에선 자율신경계의 역할이 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오픈하우스
서울의 주인공이 서울의 ‘건축’이라면 오픈하우스 서촌의 주인공은
서촌의 ‘사람들’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사적인 공간이나 상업적인 공간을 개방하고 비상업적인 이벤트의 장으로 돌려서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오픈하우스 서촌과 오픈하우스
서울의 프로그램 기획 방식은 유사하다.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들이 한 방향의 목표를 향해서 약진하듯 진행돼야
할 오픈하우스 서울과 달리 오픈하우스 서촌은 모든 프로그램들이 제각각 각개전투하듯 진행되는 행사다. 모든
프로그램이 서촌이라는 공통 분모를 플랫폼 위에 놓여있을 뿐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야심이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야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오픈하우스 서촌은 서촌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의 행사가 아니다. 그저
서촌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크고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해온
한 사람이 이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뿐이다. 다만 서촌에서 공존하는
느슨한 커뮤니티들에게 어울릴만한 느슨한 플랫폼을 마련하고 평소 서로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식했던 커뮤니티간의 교류를 도모하자는 성격의 행사이니만큼
게으른(?) 홍보 방식도 나름대로 어울린다. 물론 오픈하우스
서촌이 외부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그들만의 축제인 것은 아니다. 다만 서촌에 대한 흥미가 있었던 이들에게
단순히 서촌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서촌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안겨준다는데 보다 뚜렷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의 터가 되는 서촌엔 전통적인 기반과 새로운 흐름이 공존한다. 덕분에 오픈하우스 서촌에 참여하는
이들이 20대부터 60대까지 고른 연령 분포도를 보인다는
것도 신선한 일이다.
오픈하우스 서촌은 지역 기반의 축제가 해당 지역의
경제 활성화라는 미명하에 되레 지역 주민을 소외시키는 행사일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거창하고 화려한
축제로 지역을 포장하는 것보다도 그 지역을 구성하는 일원들의 즐거움을 도모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픈하우스 서촌은 오픈하우스 이태원이 될 수도 있고, 오픈하우스
가로수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플랫폼을 확립할 수 있는 자발적 의지가 필요할 뿐이다. 오픈하우스 서촌은 임진영이란 기획자를 통해서 시작됐고, 올해까진
포스터 제작을 비롯한 공적인 비용을 모두 그녀 개인이 충당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많은 비용이 드는
건 아니지만 부담되는 바가 없진 않다. 그래서 후원이나 모금을 고민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비영리 축제로서의
취지를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스럽다. 어쨌든 임진영 씨는 올해까진 괜찮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답은 마치 내년에도 오픈하우스 서촌이 계속될
것이라는 선언 같았다.
조선의 왕을 위해 피어났던 궁중채화는 왕실의
몰락과 함께 져버렸다. 하지만 지금 다시 궁중채화가 피어나고 있다. 조선의
임금이 아닌 만인을 향해서, 정성 어린 손끝에서 다시 피어난다.
채화는 어느 계절이 되면 자연스레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사람의 손
끝으로 피우는 꽃이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쉽게 조화라고 말하기가 꺼려진다.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피고 지는,
나름대로 생의 주기를 지닌 꽃이기 때문이다. ‘비단 채’자와
‘꽃 화’자, 풀이하자면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그래서 채화다. 하지만 조선 시대
궁궐에선 ‘꽃 화’자 대신 ‘빛날 화’자를 썼다고도 한다. 궁중을
장식했던 채화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채화가 단순히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으로서만 존재했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8일부터 25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아름다운 궁중채화’ 기획전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궁중채화 기능 보유자인
황수로 장인이 재현한 궁중채화들을 전시했는데 단순히 채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서 궁중 속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던 채화의 진경을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이 기획전은 기축년(1829년) 순조 즉위 30년을 기념하는 궁궐에서의 잔치를 축약해서 재현하며
그 풍경 곳곳에 자리한 궁중채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창경궁 명정전에서의 낮 잔치를 재현한 임금의
잔칫상 앞에 좌우로 자리한 건 하얀 벽도화준과 붉은 홍도화준이다. 여기서 화준이란 쉽게 말해서 꽃병이란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왕의 주변을 장식하는 꽃답게 꽃나무 자체를 병에 세웠다. 그 크기와 화려함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벽도화준과
홍도화준의 꽃은 오얏꽃이다. 오얏꽃은 ‘오얏 이’자의 한자어로 표기되는 조선의 이씨 왕조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이 두 화준은 그야말로 왕을 상징하는 실수목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크고 화려한데 꽃잎과 잎사귀 사이마다 자리한 나비와 벌, 꿩과 공작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고 화준의 꼭대기에 자리한 한 쌍의 봉황도 올려다 보인다.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오얏꽃에 몰려든 군신들을 의미한다. 이는 곧
두 화준 자체가 조선왕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 화준 너머로 1500명의 문무백관들이 쭉 앉아있었는데 이들
모두 ‘잠화’라는 머리꽃을 꽂고 있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악사나 무희들 심지어 시중을 드는 이들까지도 모두 머리에 잠화를 꽂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금의
진찬상 위의 고임음식에도 ‘상화’라 불리는 꽃이 장식돼 있었고, 문무백관들의 독상에도 모두 이와 같은 꽃장식이 돼있었다고 한다. 물론
잠화나 상화는 모두 생화가 아닌 채화였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절대권력을 자랑하는 임금의 어명을 통해서 전국의 다양한 생화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채화를 제작해서
사용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유교를
숭상했던 당대의 조선의 왕실이니만큼 솔선수범해서 유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존중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꽃을 꺾어서 궁궐의 장식물로 쓸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은 꽃이 시든다는 건 그만큼 불경한
의미로 읽힐 수 있으니 생화 대신 불변하는 채화를 제작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사실 채화의 제작 과정은 만만치 않다. 일단 조선 시대 기록의 고증에
따르는 만큼 천연 재료 기반의 제작방식을 고수한다. 천연 재료로 만든 천에 천연 염색은 물론 3년 동안 숙성시킨 밀풀을 바르고, 본드 대신 아교로 접착한다. 그래서 염색한 천은 다듬이로 두드린다. 이는 천연 소재의 천을 가위로
자르면 올이 쉽게 풀릴 수 있기 때문에 다듬이로 두드려서 씨줄과 날줄의 결을 으깨어 천을 단단하게 만드는 거다.
게다가 윤기도 더해져서 보다 자연스러운 빛깔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단단해진 천을 열
겹 정도 겹쳐서 꽃 모양의 본을 뜬 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한번에 가위로 오린다. 그렇게 오려낸 한
장 한 장에 밀랍을 발라 코팅한 뒤 인두로 지져서 자연적인 꽃잎의 형태를 만드는데 그야말로 채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게 완성된 꽃잎을 네다섯 겹으로 겹쳐서 모아 한 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꽃잎들을 네다섯 장씩 모아서 꽃 한 송이를 조립하고 거기에 꽃술을 붙이면 꽃이 완성된다. 본래
꽃술은 노루 꼬리털로 만들었다지만 지금은 구할 수가 없으니 모시나 삼베로 만든다. 모시나 삼베를 꼬아서
가느다란 꽃술의 형태를 만든 뒤 꿀과 아교를 발라 송화가루로 채색한다. 이렇게 완성된 꽃을 평균적으로
다섯 송이 정도씩 가지 하나에 달게 되는데 이를 한 타라고 한다. 이때도 대나무로 만든 죽실을 이용해서
꽃송이를 가지에 고정시킨다. 홍도화준이나 벽도화준은 2000개
가량의 타가 모여서 완성된다. 화준 하나마다 대략 만 송이에 가까운 꽃으로 이뤄지는 셈이다.
채화의 꽃과 잎은 모두 만들어낸 것이지만 채화를 매단 가지는 자연 가지를 꺾어다가 쓴다. 오래된 매화의 가지를 구해서 바싹 말려서 쓴다. 조화와 채화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조화와 달리 채화는 생사의 경계가 존재한다. 마치
생화가 시들듯이 채화도 시든다. 천연염료를 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바래지고, 습도가 높으면 꽃잎이 힘을 잃는다. 채화가 사람의 손에 닿아야 피는
꽃이라는 건 그래서다. 사람의 손으로 지속적으로 관리해줘야 한다. 조선시대
궁궐에선 채화를 만드는 장인인 화장이 15명 정도 있었다는데 상시적으로 궁궐의 채화를 관리했다고 한다. 게다가 꿀을 채취하는 꿀벌의 분비물인 밀랍으로 꽃잎을 코팅하고, 송화가루를
꽃술에 바르는 만큼 채화 역시 작게나마 생화의 생기를 품고 있다. 실제로 2007년 덕수궁에서 열린 채화 전시에선 문을 열어놓자 벌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궁중채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레 그 명맥이 끊겼다. 지금은 가까스로 그 명맥을 일부나마 재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오늘날엔 일상에서의
실용성을 완전히 상실한, 박제화된 전시품에 가깝다. 그만큼
황수로 장인은 현시점에서 모색할 수 있는 채화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그 힌트를 찾은 건 먼 프랑스에서다. 19세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실크 소재의 꽃을 만들어온 프랑스의 르제롱 가문은 4대가 지닌 지금도 꽃을 만드는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격변기를 거치며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 명맥을 이어온 건 시대와 어울리는 방식으로서 전통적 기술을 실용화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탐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다양한 모자의
장식품으로서 유행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엔 크리스찬 디올, 지미 추 등의 오트쿠튀르와의 파트너십을
통해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채화 역시 현시대에 어울리는 실용적 가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재현해야 할 채화의 종류가 많다는 건 일종의 기회다. 그만큼
채화의 실용성을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용적인 가치 창출이야말로 전통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조선에서 피어났던 채화를 다시 피워내는 노력은 어쩌면 불멸의 상징이길
바랬던 채화에 진정한 영원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고, 편집도
한다. 그리고 불과 26세의 나이로 전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다. 자비에 돌란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최소한 높은 꿈을 꾼다면 바로 그 아래에라도 떨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배우이자 감독인 자비에
돌란은 만 19세의 나이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칸국제영화제의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신인감독상이라 일컬어지는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다. 이
이례적인 결과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 연출작 <하트비트>(2010)와 세 번째 연출작 <로렌스 애니웨이>(2010)는 다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지난해에 공개된 <탐엣더팜>(2013)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탐엣더팜>은 연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한 남자가 아슬아슬한 폭로의 기로에 서며 겪게 되는 폭력성과 상실감으로부터 발전된 왜곡된 감정들을 그린 스릴러물이다. 이야기 자체에 대한 집중력이 보다 돋보이는, 보다 성숙해진 작가적인
역량을 드러낸 수작이다. 사실 종종 자비에 돌란에게 ‘스타일
과잉의 아류’라는 오명을 씌우는 비평가들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작품이 남기는 강렬한 인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낸다. 자비에 돌란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비범한 스타일과 도발적인 메시지는 26세에 불과한 어린 감독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면서도 한편으론 그 나이에 걸맞은 도전적인 시도를 인정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영상과 적재적소에서 어울리는 음악으로 점철되는 <하트비트>와 <로렌스 애니웨이>의
공감각적인 묘미는 자비에 돌란을 스타일리시한 감독이라고 여겨지게 만들만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적인 제목의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가 어머니와의 의외로
순수한 울림을 지닌 성장드라마였던 것처럼 자비에 돌란의 영화들은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 자체로서의 힘을 지니고 있다. 지난 두 편의 전작 <하트비트>와 <로렌스 애니웨이>가
자비에 돌란의 감각을 총천연색으로 부각시킨 작품이었다면 <탐엣더팜>은 자비에 돌란이 지닌 무채색의 심연을 내보이는 작품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선 자비에 돌란의 신작 <마미>(2014)를
경쟁부문에 초청했다. <마미>는 역대 최연소 경쟁부문
출품작이다. 당신이 꼭 자비에 돌란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알듯이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데엔 대부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비에 돌란도 마찬가지다.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활동했다.
퀘벡의 TV쇼 프로덕션 매니저였던 이모는 아역 배우를 찾으면서 우리
어머니에게 내가 연기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치장하고, 노래하고, 춤추길 좋아했던 내가 이 일이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 살에 연기를 시작했고, 그 이후로 광고, 영화, TV 프로그램의 오디션에 참여했다.
그 당시가 기억날까?
세트가 신기했다. 그리고 촬영장 분위기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대여섯 살쯤에 촬영장에서 어른들의 욕이나 성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본능적으로 들어도 되는 것과 들어선 안될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촬영장을
경험한 건 잊을 수 없도록 엄청난 기억이었다. 열 살 땐 열여섯 살 정도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직접 연기하는 것도, 연기를 지도하는 것도 모두 능숙해 보인다.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건 매우 어렵다. 나는 그들이 지닌 현재의 능력과 숨겨진 잠재력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지켜본다.
가끔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로렌스 애니웨이>를 찍을 땐 배우들의 작은 제스처를 확인했다. 직접적인 대사 대신 노래나 사소한 행위와 같은 디테일로도 장면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를 직접 편집하기
시작하면서 촬영 중에도 미리 결과를 그려낼 수 있게 됐다.
당신의 영화에서 주로 언급되는 건 스타일이다.
일단 캐릭터, 대사, 감정의
연결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들을 무시하면, 영화의 완성도가
흔들린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다. 스타일은 액세서리에
가깝다. 내가 미장센만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나는 스토리 위주의 영화를 생각하면서
미장센을 같이 떠올린다. 그래서 내 영화에 대해서 스타일에만 치중한 분석을 보면 불쾌하다. 스타일리시한 시퀀스는 영화의 15% 정도인데 사람들은 그것만 기억하는
것 같다. 관객들은 때때로 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어디서 주로 영감을 얻는 거라 생각하는지?
영화를 진지하게 본 건 16살 때부터였고, 18살에 처음 연출을 했다. 그 이후로 영화나 책은 볼 수 있는
만큼 많이 보고 있다. 특히 사진이나 그림에 대한 책이나 잡지를 보는 게 좋다. 뉴욕에 가면 항상 서점에 가는데 거의 파산할 정도로 책과 사진집, 화집을
산다. 이런 부분들이 내게 영향력을 끼치고 그렇게 형성된 분위기가 영화에 참고가 되는 것 같다. 때때로 영화는 잠재된 본능을 실현해주는 도구처럼 느껴진다.
데뷔작도 그렇고 당신의 영화는 부모님에
대해서 자주 말하곤 한다.
대중들은 때론 상어 떼와 같아서 영화를 던져주면 관대한 피드백을 주기도 하지만 너덜너덜해지도록 물어뜯기도 한다. 결국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둘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와 내 영화에
관해서도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만의 관점이 생겨난다. 나는
세상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만 근본적으론 부모님께서 내 영화를 사랑해주실 때 정말 행복하다. 그럴 때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어린 나이가 주목을 끄는 면도 있다.
45세가 된다고 해서 영화를 만드는 재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사람이 나아갈 방향을 나이가 결정해주진 못한다. 나는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주변엔 35세, 45세, 55세, 60세가
된 친구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미 네 살 때 오럴 섹스를 알기도 했다. 아니, 여섯 살
때였던가(웃음)?
퀴어 영화의 영역에서 분석되기도 하는데.
<로렌스 애니웨이>로
퀴어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사실 나는 그 상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퀴어를 강조할수록 특정 집단의
영화라고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상”이나 “유대인상”은 없는데, 퀴어
상이 있다는 건 아주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나는 내 영화가 동성애를 그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예술가로서 내가 할 일은 세상에 당연한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가 무엇으로 남길 바라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래서 팔짱을 끼고 연간 400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다. 길을 걷던 나를 멈춰 세우고, “당신의
영화를 보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 영화를 보고 웃지도, 울지도 않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