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낭만을 품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사랑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시킨다.
<겨울왕국>은 동화적인 세계관을 빌려서 특유의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구축하는데 능한 디즈니의 장기가 여실히 반영된 애니메이션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둔 작품이죠. 하지만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 자체가 다르며 이야기 양상도 완전히 판이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참고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겨울왕국>에선 사악한 ‘눈의 여왕’이 등장하지도 않고, 남매에 가까운 소년과 소녀 대신 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원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죠. 디즈니 특유의 낙관적인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사실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흥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고 스크린을 채우는 이미지의 완성도가 그런 결점을 보완해주고 있죠. 특히 살아있는 눈사람 캐릭터인 올라프의 등장은 <겨울왕국>이란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 개인적으론 최근작 중에선 <겨울왕국>보다 <라푼젤>이 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푼젤>보다 <겨울왕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훌륭한 뮤지컬 넘버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디즈니의 저력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말이죠. <겨울왕국>의 OST는 역대 디즈니 클래식의 사운드트랙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킬링 넘버 ‘ Let It Go’는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자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무엇보다도 <겨울왕국>에서 흥미로웠던 건 디즈니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2009)부터 <라푼젤>(2011) 그리고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지난 몇 년간의 디즈니는 낙천적인 해피엔딩의 강박을 넘어서 ‘지금’이라는 시제에 어울리는 감각과 철학을 반영한 작품들을 거듭 발표하고 있죠. 어쩌면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의 브레인이었던 존 래세터를 디즈니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울왕국>은 익히 예상되는 왕자와 공주의 러브스토리로 극을 밀고 가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빤히 보인다고 믿었던 결말을 아주 살짝 비틀면서 대단히 참신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디즈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배반하지도 않고요. 자신의 세계를 참신하게 보존해냅니다. 그래서 <겨울왕국>의 결말은 정말 좋은 작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공주와 개구리> 이후로 디즈니에선 대단히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21세기의 디즈니가 찾은 마법의 비결은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주가 아니라 말이죠.
저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봤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직접 극장에 데려가셨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서 만약 지금 저에게 어린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겨울왕국>을 보러 갔을 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겨울왕국>만큼 사랑스러운 결정을 지닌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볼 기회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사회지도층 공주로 태어났지만 마법의 금발을 타고난 덕분에 기구한 운명 속에서 성장한 소녀 라푼젤, 그녀는 자신을 유괴한 탐욕스런 여인 고델을 어머니로 알고 그녀의 반협박적인 모성애 연기에 속아 높은 탑 속에서 갇히듯 자라났다. 덕분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긴 금발만큼 자라난 라푼젤의 성에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도적 플린이 침입하고 우연히 그를 붙잡게 된 라푼젤은 그가 지닌 보물을 숨긴 뒤, 자신의 소원과 맞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그림형제의 고전동화 <라푼젤>을 각색한 디즈니의 50번째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묵은 영광 속에서 고성처럼 낡아가던 ‘디즈니 캐슬’의 새로운 리노베이션을 선언하는 작품과 같다. 지난 2009년,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각색한 <공주와 개구리>로 셀애니메이션 명가의 저력을 21세기에 증명한 바 있는 디즈니는 <라푼젤>을 통해서 CG애니메이션에서도 디즈니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라푼젤>은 디즈니가 처음으로 시도한 CG애니메이션이 아니며 <볼트>를 통해 이미 자신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라푼젤>은 고전동화의 현대적 각색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스토리 양식을 새로운 애니메이션의 기법 안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양식에 새로운 감각을 수혈해내며 디즈니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냈다.
고전동화의 텍스트를 밑그림 삼아 다채로운 캐릭터를 세워 넣고, 위트 있는 활기로 덧칠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활기는 <라푼젤>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러브스토리와 권선징악이라는 두 개의 요소는 여전하되, 새롭게 각색된 고전동화의 현대적인 운용이 돋보인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마련은 아기자기한 위트와 어드벤처로서의 활기를 더하는 탁월한 수단이다. 캐릭터의 매력이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좌우하는 가장 큰 열쇠임을 생각한다면 <라푼젤>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의 성과를 증명하는 단서나 다름없다.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라푼젤> 역시 다양한 노래와 춤으로 극적인 감정들을 고조시키며 흥겨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라푼젤>은 분명 디즈니라는 타이틀 안에서 빤히 읽혀지는 것들을 품은, 전형적인 디즈니 클리셰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상투성과 전형성 안에서 줄타기를 한다. <라푼젤>은 후자에 가깝다.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라는 이해를 넘어서는 건 누구나 알지만 바라고픈 이야기라는 감동이다. <라푼젤>은 픽사와 드림웍스의 시대에서도 빤하다 못해 낡아 버린 듯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치가 여전히 지속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불식시키는 답변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디즈니의 인장이 뚜렷한 <라푼젤>은 바로 그 이름에 걸린 기대에 어울리는, 최상품의 감동으로 채워진 디즈니의 새로운 고전이다. 누구나 바라는 그 감동, 그것이 바로 디즈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가치이며 <라푼젤>에 바로 그것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영국의 수학자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란 필명을 앞세워 1965년에 발표한 동화다.지극히 개인적인 의식의 흐름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와 비상식적인묘사가 동원된이 작품은 비논리적인 기괴한 설정들이 도처에 난무함에도 직관적인 상상력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동반하며 그 세계관에 대한 호기심을 당긴다. 동명의 제목 그대로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이 창조한 그 기이한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하지만 팀 버튼은 루이스 캐럴이 손으로 써내려 간 세계를 영상으로 치환하려는 노력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팀 버튼이 참고한 건 비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뿐만이 아니다. 또 한번 앨리스를 통해 특별한 모험담을 그려낸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역시 팀 버튼의 세계로 편입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루이스 캐롤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온전히 팀 버튼의 것이란 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본격적인 서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것처럼 앨리스(미아 와시코우스카)의 굴 속 추락으로 시작된다. 분명 유사한 방식으로 그 특별한 세계관에 침입하듯 발을 들이지만 전반적인 이야기는 그 원판과 다른 뉘앙스를 발생시킨다. 최소한 루이스 캐롤의 원작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애초에 그 세계관에 발을 들일 뿐 재현적 가치에 관심이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원작의 포스트(post)로서 서사를 설정하고 있다. 서사적인 순차로 볼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후에 등장한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 캐릭터와 세계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보다 흥미롭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두 작품을 포괄하고 변주하되 어느 쪽에도 부합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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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과 하얀 여왕(앤 헤서웨이)이 서사의 주요 대목을 차지하고 있으며 트위들디와 트위들럼(매트 루카스)과 같은 캐릭터도 등장하는 동시에 재버워키나 도도새처럼,역시 후자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서사의 결정적 줄기에 활용된다. 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 제목과 달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역을 넘어 루이스 캐롤이 창조한 앨리스의 세계관을 뒤엉켜 아우르고 있음을 명시한다. 모자 장수(조니 뎁)와 하얀 토끼(마이클 쉰 목소리)는 두 작품을 포괄하는 상징적 장치에 가깝다.원작에 비해 성숙한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그 세계에 등장하는 소녀와 동일한 인물이되 팀 버튼의 야심을 대변하기 위해 내세워진 캐릭터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앨리스는 팀 버튼 그 자신이라도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이 완성한 ‘이상한 세계’를 다시 한 번 팀 버튼이 재창조한 이상한 세계다. 궁극적으로 루이스 캐롤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그 세계는 역시나 개인적인 취향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시킨 팀 버튼에게 남다르지 않은 감상을 부여했을 것이다. 덕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팀 버튼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전적 작품으로 치장했다 해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비정상적 기질을 창의적 에너지로 변환시킨다는 건 분명 여러 모로 남다르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직접적인 대사까지 동원하며 비정상적이라 규정된 창의력에 대한 응원을 전달하기도 한다. –멋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상이지.- 마치 팀 버튼 자신 스스로에게 바치는 헌사이거나 연민과 같은 위로처럼 들릴 정도로 때때로 비장한 느낌이 동원되기도 한다. 앨리스에게 과거에 ‘이상한 나라’에 온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상한 나라’의 캐릭터들은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 꿈이라 믿는 앨리스의 망각을 일깨운다. 이는 팀 버튼 스스로의 다짐이거나 혹은 그가 전달하고 싶은 일종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동심의 망각, 혹은 자유로운 사고의 고갈은 대부분 어른이 되면서 벌어지는 관성적인 변화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가 당면해야 했던, 혹은 감내해야 했던 현실을 반영하듯 앨리스의 극복을 유치할 정도로 비장하게 묘사해낸다.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팀 버튼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세계관을 디자인으로 삼아 팀 버튼의 취향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이는 곧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팀 버튼에 대한 호불호에서 시작할 때 보다 온당한 접근이 가능한 작품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인위적인 색감만으로도 <찰리의 초코릿 공장>을 연상시킨다. -하물며 두 작품은 원작 동화를 스크린에 옮겼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작을 도구처럼 참고한 뒤,온전히 자신만의 판본을 디자인했다는 점에서특별한 작품이다. 원작의 캐릭터들은가공된 이미지를 얻고, 관계 구도는 뒤섞이고보다 강한 성격을 자랑하는 캐릭터로서 위치를 지킨다. 캐릭터의 변주는 원작과 영화의 거리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다.동시에 배우들의 연기는 그 의도를 수행하기 위한 자산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헬레나 본햄 카터인데 외형만으로도 눈에 띄게 과장된 머리 크기로 등장하는 그녀는 히스테릭한 블랙코미디로 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를 어필한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끝에 다다를수록 그 기이한 세계를 목격하는 이들에게 허전한 감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 세계관의 디자인은 팀 버튼이 품은 기괴한 발상의 결과물로서 스크린에 착상되지만 그 디자인에 담아낸 서사는 (팀 버튼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상투적이며 한편으로 식상할 정도로 안이해 보인다. 평범을 강요하는 세계에서 고립되듯 살아가던 이상한 앨리스가 비정상적인 이상한 나라 속에서 자아를 찾고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성취를 완성하는 과정이란 팀 버튼 스스로를 이입해내는야심의 반영에 가깝다. 하지만 그 야심을 품은 서사에는 어떠한 야심도 없어 보인다. 마치 디자인을 전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제작된 결과물처럼 단조로운 서사는 특별한 감흥으로부터 객석을 차단해낸다. 3D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그 효과도 딱히 탁월해 보이지 않는다.-애초에 이 작품은 3D로 촬영되지도 않았다.-결국 팀 버튼을 설명하기 위한 작품으로서는 유용하지만 팀 버튼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가 지금까지 선사했던 매혹적인 작품들을 경험했던 이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단지 이상한 이미지로 가득한 팀 버튼의 모방작이거나 습작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매혹이 사라진 팀 버튼의 기괴함이란 그만큼 허전하다. 멋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상일지 몰라도, 비정상이 항상 멋진 건 아니다.
분명 2D 셀애니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3D CG애니메이션이 대세다. 하지만 시대가 끝났다 하여 시대의 주인공까지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명맥이 끊어졌던 디즈니의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전성기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를 증명할만한 유산의 상속은 가능하다. 디즈니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오랜 명맥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작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그리고 <라이온킹>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향수 그 자체일 것이다.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에 쌓인 묵은 세월을 털어내고 닦아낸 결과물이다. 기본적으로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지닌 <공주와 개구리>는 사실상 ‘신데렐라’스토리를 끌어들이며 동화를 변용한다. 동시에 흑인 여주인공을 앞세우고 1920년대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삼아 보다 현대적인 형식의 동화로서 이야기를 착안하는데 주력했다.
<공주와 개구리>는 딱히 새롭다 말할만한 여지가 없는, 디즈니의 지난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궤도 위에 탑승한 작품이다. 선악의 대비는 뚜렷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들의 역경과 모험은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조건들은 그 동안 디즈니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동원됐다. 진정성과 상투성이라는 백지장 차이는 동일한 요소들을 표현하는 방식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지녔거나 참신한 기법이나 창의적 방향성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의 장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선과 악, 노래와 춤, 꿈과 희망, 역경과 모험, 단순하지만 특별한 동화의 세계로부터 구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유쾌하고 즐거운 퍼레이드와 같이 진전된다. 마법과 모험의 세계관과 춤과 노래의 향연이 볼거리를 이루지만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로맨틱한 무드다. 어드벤처와 뮤지컬은 러브스토리를 이루기 위한 소스가 된다.
1920년대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흑인공주를 그리고 있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인종차별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건 마치 오바마 시대를 기념하는 팬서비스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인물들은 그런 현실적 편견이나 불합리와 무관하게 동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순수한 낭만을 노래하는 역할로서 충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은 유아적인 낙관이라기 보단 동화적 순수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다. 디즈니의 새로운 2D 애니메이션은 테크놀로지의 중심에서 아날로그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대변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란 존재하는 법이다. 능수능란한 픽션의 파도 속에서도 순수한 동화적 감동은 떠내려갈 수 없다. 기술은 변해도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 <공주와 개구리>는 망각했던 동화적 세계를 복원하는 장인과의 반가운 재회나 다름없다.
일 때문에 바쁘기만 한 부모의 무관심이 원망스러운 코렐라인(다코타 패닝)은 새롭게 이사온 집을 구경하던 중 작은 문을 발견한다. 벽으로 막혀있던 문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코렐라인은 결국 그 문이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임을 알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인형 눈의 부모를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인형눈을 한 그 곳은 코렐라인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된 세계다. 일에 매달리는 진짜 부모와 달리 가짜 부모는 코렐라인에게 헌신적이고 자상하다. 하지만 단추를 단 눈은 때때로 기괴하며 음침한 예감을 부른다.
인형을 새롭게 봉제하는 바느질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출발하는 도입부는 인형과 바늘의 이미지를 통해 순수함과 불길함이라는 양면성을 재단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코렐라인: 비밀의 문>(이하, <코렐라인>)의 상상력을 온전히 대변한다. 팀 버튼의 원작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연출한 <크리스마스 악몽>의 헨리 셀릭 감독의 새로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인 <코렐라인>은 <크리스마스 악몽>만큼이나 불길하고 순수한 악몽의 세계다. 세계적인 작가 닐 게이먼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코렐라인>은 동화적 세계관을 구술하는 텍스트를 표현력이 풍부한 이미지로 치환하고 새롭게 각색한다.
닐 게이먼이 창작한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완성된 <코렐라인>은 이미지만큼이나 독창적인 세계관을 품은 스토리텔링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코렐라인이 현실로부터 느끼던 결핍을 우연히 발견한 비밀의 문 너머의 충족시켜나간다는 사연은 오늘날 어린이들을 고립시키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맞닿아있으며 이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계몽적이다. 그러나 마치 음침하게 변주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판타지 버전같기도 한 <코렐라인>은 자연적이고 순수한 동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괴하고 음흉한 괴담의 기운을 그려넣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을만 하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며 현실 안에서 결핍을 쌓아나가던 코렐라인이 우연히 발견한 비밀의 문 너머의 세계에서 부모와 빼 닮은 단추눈의 부부를 만나 그들이 제공한 환상적인 공간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과정은 순수한 아이들의 꿈을 대변한다. 그러나 친부모 몰래 매일같이 비밀의 문을 건너 대리만족을 만끽하던 코렐라인의 미소는 점차 위협적 예감으로 일그러진다. 단추눈의 불길함이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순간, 동화적 모티브에 가려 있던 악몽의 채색이 짙어진다. 코렐라인의 긴장감이 이미지를 타고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된다.
상반된 공간의 특성을 대변하는 대비적 이미지는 <코렐라인>의 세계관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로서 탁월한 기능성을 발휘한다. 특히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틀에 3D입체영상의 날개를 단 이미지는 기능적인 효과보단 입체적 감각 그 자체가 중시될만한 독창적인 이미지의 카니발을 선사한다. 스톱모션의 분절된 연속성은 물리적인 입체감을 구현하는 동시에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보존한다. 물리적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비주얼은 호러적인 긴장감을 연출하거나 캐릭터의 심리적 두려움을 생동감 있는 물리적 형태로 반영하는데 있어서도 효과적이다. 다만 아동 취향의 동화적 색채가 강한 소설을 원작으로 두는 만큼 이야기의 기본 맥락은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교훈적인 결말도 상투적인 감상을 부른다. 이미지의 입체감에 비해 스토리의 평면성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코렐라인>은 수공예적인 제작방식만큼이나 풍부한 감수성으로 이뤄진 이미지의 체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완벽한 인공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요즘의 애니메이션의 월등함을 제치고 <코렐라인>의 진보된 투박함을 권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화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순수한 상상력이 황홀한 이미지의 날개를 달고 악몽의 카니발을 선사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이 황금비율을 이루는 <코렐라인>의 황홀경은 감성적 체온이 느껴지는 기술의 진보를 설명할 수 있는 성과 그 자체다.
물고기라곤 하지만 물고기처럼 보이진 않는다. 인면어라고도, 금붕어라고도 불리지만 엄밀히 말해서 물고기 흉내를 내고, 그렇게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캐릭터다. 심지어 생의 비밀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다. 포뇨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후지모토가 인간임에도 어떻게 물 속에서 온전히 사는 건지, 흡사 바다의 여신처럼 보이는 그란만마레가 포뇨의 어머니라는 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건지 막막하다. 실상 별반 상관없다는 듯 그렇다. 답 없는 수수께기처럼 묘연하지만 신화처럼 비범하다. 67세를 넘긴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야마자키 히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는 단순한 유아적 발상을 통해 순수의 경지를 선사한다.
소스케로부터 포뇨라는 이름을 얻은 뒤, 포뇨는 브륀힐테-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참조-라 부르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절한다. 그리곤 인간이 되려 한다. 종래엔 인간이 된다. 목소리를 팔지도 않고, 마법의 힘으로 한계를 넘어선다. ‘인어공주’처럼 동화적이지만 천진난만하게 비극을 넘어선다. 순수하되 거창하지 않다. 포뇨는 인어공주가 아니다. 물거품으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19세기 안데르센 동화에서 비극적 색채를 탈색시키며 희망을 염색한다. 비극적 클리셰를 배제한 채 경쾌하게 모험을 완성한다.
정체불명의 캐릭터 관계가 상상력을 부채질하지만 이야기는 되려 단명하다. <벼랑 위의 포뇨>는 소년의 사랑을 얻은 물고기가 소녀로 변하기 위한 모험담이다. 이 단명한 스토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연친화적 상상을 구현한 회화적 색감을 의상처럼 입고 있다. <벼랑 위의 포뇨>는 동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순수한 낙관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세상이 물에 잠기는 위기 속에서도 천진난만한 소년과 소녀는 심각한 어른들의 리얼리티와 동떨어진 세계다. 미지의 모험, 마법과 전설, 유아적 자질과 연동되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이미지의 물살을 타고 이야기는 매끄럽게 구연된다. 지극히 유아적인 색채와 디자인으로 구성됐지만 경이적인 장면들이 천진난만하게 순간을 지배한다. 거부할 수 없는 비현실의 순수가 스크린을 가득 적시고 객석을 머금는다.
<원령공주>를 비롯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출한 전작에 감동했던 어떤 이라면 <벼랑 위의 포뇨>에 불만을 토로할지 모를 일이다. 숭고한 이미지에 철학적 깊이마저 담아낸 전례에 비춰보자면 원론적이고 동화적인 순수를 일관되게 채워낸 <벼랑 위의 포뇨>는 백치스럽게 안일한 우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백치적 일상을 떠올린다면 <벼랑 위의 포뇨>는 되려 숭고하다. 바다 밑바닥을 긁어내는 그물더미로 가득한 쓰레기는 현실에서도 유효한 풍경이다. 바다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버린 채 제 주변의 깔끔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이야말로 실로 지독한 낙관에 젖은 채 살아간다. <벼랑 위의 포뇨>는 당신의 순수를 시험대에 올릴만한 작품이다. 당신의 순수는 얼마나 잔존하는가. 현실이 순수하지 않다 해서 순수의 경지를 폄하해선 안될 일이다. 사랑과 평화. 그 실질적인 미덕이 아름답고 경이롭게 공존한다.
적어도 자녀를 둔 부모라면 꼭 <벼랑 위의 포뇨>를 보여줄 것. 당신이 좋은 부모라면 분명 깊은 순수를 머금은 자녀의 행복한 웃음을 물거품으로 만들만한 푸념을 던질 리 없을 것이므로. 어쩌면 아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 포뇨 좋아! 그만한 행복이 또 있을까. 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만화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더 바라고 있나. 어쩌면 그건 어른이라는 오만이 아닐까.
인간과 요정이 공존하던 시절, 인간의 지배적 욕망은 요정계를 자극하고 결국 두 종족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에 맞선 요정계의 왕 발로는 황금으로 만든 불사의 군대, ‘골든 아미(Golden Army)’를 만들어 전투에 투입하고 전장은 살육의 바다가 된다. 요정계의 왕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살육에 대한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골든 아미를 봉인한 뒤, 인간과 불가침 휴전 협정을 맺는다. 유년 시절 헬보이가 들었던 그 동화의 후일담은 결국 헬보이(론 펄먼)가 대면할 현실이 된다. 지옥의 열쇠가 될 운명을 거부한 붉은 악마는 골든 아미를 찾아 떠나는 어드벤처 미션 <헬보이2: 골든 아미>(이하, <헬보이2>)를 통해 본격적인 2차 성징에 돌입한다.
세상을 구원했다는 칭송은 헬보이(론 펄먼)를 심드렁하게 만들 것이다. 차라리 캔맥주와 시가, 고양이, 그리고 리즈(셀마 블레어)를 위해 세상을 보전했다고 한다면 모를까. 지옥을 여는 열쇠라는 육중한 오른손과 거칠게 깎아낸 이마의 뿔의 흔적, 붉게 물든 긴 꼬리, 지옥에서 온 헬보이는 자신의 선천적 운명과 후천적 제약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미성숙한 자의식을 지닌 안티히어로다. 헬보이는 선과 악의 패러다임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둘러싼 운명적 강요를 거부했을 뿐이다. 첫 번째 강요를 거부한 헬보이에게 현실은 또 다른 강요를 부여한다. 초자연현상연구사무국(BPRD)의 해결사이자 문제아인 헬보이는 자신을 아들처럼 여기던 트레버 브룸 박사(존 허트)가 (전작에서) 죽은 후, 조직의 통제를 따돌리고 노골적으로 일탈을 즐기곤 한다. 그 와중에 리즈와의 갈등도 심해진다.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적이던 헬보이는 TV카메라 앞에 당당히 나타나며 상부에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반항심이 불거진 헬보이 앞에 새로운 적이 등장한다. 골든 아미를 부활시켜 인간을 말살시키려는 요정족의 누이다 왕자(루크 고스)는 골든 아미를 부활시키려 하고, 이를 위해 골든 아미를 조종하는 황금 왕관 조각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선천적 운명을 거부한 헬보이가 맞서는 상대는 인간의 반대편에 선 요정의 왕자다. 하지만 헬보이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넌 우리와 더 닮았어. 누아다 왕자의 말처럼 헬보이는 자신이 속한 그 세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되려 배척하고 강제하고 있음을 점점 깨닫기 시작한다. <헬보이2>는 인생의 방향을 가늠한 헬보이가 자아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두 번째 시험대다. 콘크리트 벽을 부수던 거대한 숲의 신이 헬보이에게 제압당한 채 아스팔트 위로 녹색잔해를 남길 때 헬보이는 황망한 허탈감을 느낀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을 위한 것임에도 인간은 되려 그를 괴물이라 손가락질하고 상처를 입힌다. 결국 누아다 왕자와의 사투 끝에 골든 아미를 봉인시키는데 성공한 헬보이는 다시 한번 세상을 구하지만 자신을 향한 또 다른 강압적 운명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대립구도의 뒤처리를 맡고 있음을 깨닫는 헬보이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가치관을 바로잡고 세상에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요정과 괴물, 정령과 마수가 공존하는 <헬보이2>의 세계는 크로테스크한 판타지의 욕망이 산재했지만 순수한 동화적 호기심으로 충만하다. 유사한 이미지의 세계관으로 이뤄진 <판의 미로>를 비롯해 시리즈의 전작인 <헬보이>로부터 <헬보이2>의 미장센은 고스란히 연계되고 있으며 <크로노스>와 <미믹>과 같은 초기작들의 몇 가지 설정들이 아기자기하게 동원되어 <헬보이2>를 채운다. <헬보이2>는 독창적이면서도 경이적인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선사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방대한 결산처럼 보인다. 특히 저마다 독특한 캐릭터를 방대하게 전시한 트롤시장의 풍경을 비롯해 후반부에 펼쳐지는 골든 아미의 거대한 행렬은 그 전체적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백미는 도심 한복판에 소환되는 숲의 신과 대결하는 씬인데 이는 자연에 대한 거대한 경의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인간의 파괴적 본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만큼 숭고하다.
다만 <헬보이2>는 때때로 산만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누아다 왕자의 골든아미를 저지하는 헬보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주변부에 이목을 끌만한 거리가 적잖아 종종 이야기의 집중력이 흐려진다. 헬보이의 반항과 고뇌를 필두로 에이브(더그 존스)와 누알라 공주(아나 월턴)의 멜로 라인이 형성되고, 새로 등장한 심령술사 요한 크라우스 박사를 비롯한 서브 텍스트들이 곁가지를 치고 저마다 불쑥 자라 맥락의 일관성을 침범한다. 한편으로 <헬보이2>는 전작에 비해 액션의 비중을 키우고 유머의 빈도를 늘림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인 기능성을 구사한다. 볼거리가 많아진 만큼 눈으로 느낄만한 호사로 가득하다. 하지만 기초적으로 동화적인 이야기의 해결방식 역시도 유아적인 뉘앙스를 남기기 때문에 성인이라면 유치하다 느낄 만한 구석도 분명 존재한다.
그래도 <헬보이2>는 분명 순수한 독창적 에너지로 무장한 경이로운 블록버스터다. 기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미술적 양식이 동화적 순수함에서 기반한 세계관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인간은 또 한번 헬보이로 인해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그를 질시한다. 결국 헬보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리즈와 함께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난다. 드디어 헬보이의 진짜 운명이 시작된다. 더 이상 인간의 이기심의 방패로서 이용당하지 않는다. 소년은 그렇게 질풍노도를 뛰어넘으며 진짜 남자가 된다. 여전히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해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헬보이는 또 한번 운명적인 강요에 맞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