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부팅’ 그러니까 컴퓨터를 다시 켠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그러니까 영화를 리부트한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리부트는 그 대상이 되는 원작이 깔아놓은 철로에 개량된 열차를 올려놓는 작업이 아니다. 열차뿐만 아니라 철로를 싹 갈아엎고 비행장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작업이다.
변주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시리즈의 정체성만은 유지한다. <배트맨 비긴즈>(2005)엔 배트맨이 있고, <맨 오브 스틸>(2013)엔 슈퍼맨이 있다. 제임스 본드가 없는 <007>시리즈가 존재할 리 없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의 미래를 보장하는 뿌리이자 줄기이며 잎이자 꽃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할리우드엔 이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리부트다.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건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면 더욱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배트맨이든, 슈퍼맨이든, 스파이더맨이든, 한결 같이 ‘태생의
비밀’을 안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래서다. 대부분의 리부트
영화들이 ‘프리퀄 무비’로 시작되는 건 다분히 전략적인 셈이다. 리부트의 대상이 되는 기존의 작품으로부터 해방돼서 새롭게 설계된 이야기 위에서 자유로운 전개가 가능하다. 이를 테면 <007: 카지노 로얄>(2006)이나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과 같은 작품은 프리퀄의 형식을 빌려서
시리즈의 리부트를 시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서사의 발판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구축한 뒤, 나아가버린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노력보다도 손쉽게
검증된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방법론이다. 게다가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증명한 것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이야기의 너비란 그야말로
우주처럼 넓고 광활하다. CG의 발달을 위시한 영상 기술의 발달도 리부트를 부채질한다. 과거의 기술력으론 표현할 수 없었던 이미지의 구현이 완벽하게 가능해진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영화적 이미지들을 놀라운 볼거리로 발바꿈시키는 것만으로도 리부트의 가능성은 보다 무궁무진해진다. 리부트
열풍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확장될 것이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한 수많은 인기 프랜차이즈들이 리부트의 대열에 합류 중이다.
리부트 열풍은 영화계를 넘어서 TV시리즈까지 강타하고 있다. 내년에 방영될 예정인 <히어로즈> 시즌 5는 이미 기존의 시리즈를 리부트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또한 고전 시리즈로서 인기를 모았던 슈퍼히어로물인
<플래쉬>도 새롭게 리부트될 예정이다. 또한
리부트 열풍은 영화와 미드의 경계를 넘어선 스핀오프 기획으로 진화 중이다. <어벤져스>의 성공에 힘입은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가 기획된 것처럼 <다크
나이트>의 고든 경감을 주인공으로 둔 또 다른 <배트맨> 프리퀄 시리즈가 미드로 제작 중이다. 스크린과 TV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오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리부트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건 단순한 영웅전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오늘날의 슈퍼히어로 무비들과 또 다른 전형이다. 혼돈과 절망을 건너 끝내 세상을 구원하는 배트맨의 여정은 여전히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장편 연출 데뷔작 <미행>(1998)은 단돈 6천불의 예산과 게릴라 슈팅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이는 미국 내 단 두 개의 상영관에서 개봉된 뒤 4만 8천여 불의 수익을 거뒀다. 최근 놀란이 지휘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지극히 초라한 규모를 지닌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중요한 단서다. <미행>의 파편적인 서사의 운용은 놀란을 세계적인 입지의 감독으로 승격시킨 <메멘토>(2000)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 의식은 <인셉션>(2010)과도 흡사하다. 실제로 <미행>에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인셉션>의 코브와 동명인 또 다른 코브가 등장하는데 그는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어떤 의미로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는 타인의 꿈에 침투해서 기억을 조작하고 개인의 삶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미행>의 도둑질이 곧 ‘인셉션’인 셈이다.
놀란이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적임자로 임명됐을 당시, 화두에 오른 건 문에 붙은 배트맨 로고가 등장하는 <미행>의 한 장면이었다. 그가 일찌감치 배트맨의 팬보이였다는 소문이 전파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배트맨에게 시행한 심폐소생술은 탁월했다.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1989)이 할로윈의 코스튬 카니발이라면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테러를 주목하는 영화였다. 그러니까 팀 버튼의 그것이 철저하게 악몽 같은 코믹스의 세계관 안에서 복무하며 현실과 괴리된 존재들을 비추는 대신 놀란은 최대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이 세계의 폭력 위를 누비는 영웅의 고단함을 추적한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 수트의 부품 하나하나의 근원과 기능까지 짚어나간다. 결과적으로 <배트맨 비긴즈>는 <다크 나이트>(2008)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위한 충실한 매뉴얼이다. 반도체의 단자들을 연결하듯 배트맨을 이루는 물리적, 정서적 인과관계에 크고 작은 디테일을 새겨 넣는 과정을 통해서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라는 이중적 자아가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장을 마련한다. 이는 단순히 놀란의 고집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인식이자 철저한 기준, 즉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 가치를 대변한다.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상영관을 벗어난 관객이 자신의 영화적 체험을 곱씹을 때, 영화 속 고담과 객석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그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되고 이로서 완성된다.
<배트맨 비긴즈>가 놀란의 배트맨을 스크린에 세우는 작업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면 <다크 나이트>는 그 완성된 배트맨을 도구 삼아서 고담, 즉 이 세계의 곳곳을 비추고, 살피는 ‘놀란의 본격적인 시선’에 가깝다.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동원된, 전작에 비해서 광대해진 스케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어루만진 디테일의 연결을 통해서 보다 손쉽게 확장된다. 물론 히스 레저의 목숨을 건 열연이 <다크 나이트>가 지닌 자질 이상의 성취를 더했다는 걸 간과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사회를 관통하는 시선과 영웅에 접근하는 방식은 주목할만하다. <다크 나이트>는 ‘이 사회의 대중이 진정한 영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인가?’라는 물음을 품었다. 고담을 유린하던 조커가 배트맨이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자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시민들은 배트맨을 비난하고 자수를 촉구한다. 조커는 대중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심리를 파고 들어 헤집는다. 이를 통해서 영웅을 끝내 궁지로 몰아넣는다.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대단원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럼에도 이 사회에 영웅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다크 나이트>에서 스스로 권위의 추락을 선택한 배트맨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고담을 구원할 흑기사가 된다. 배트맨에게 기생하듯 등을 맞댄 숙적 조커와 달리 베인은 철저하게 반체제의 선동가로서 배트맨을 마주보고 선다. 놀란은 말한다. “조커는 확실히 혼돈에 가까운 무정부주의자이자 사악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서 특별한 악당의 전형을 보여줬다. 내게 베인은 이 영화를 위한 밑천이었다. 이번 영화에선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조커가 고담을 흔드는 바람, 즉 혼돈 그 자체를 유희하는 악마였다면 베인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망의 화신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은 베인에게 뭇매를 맞고 나뒹굴던 배트맨이 끝내 허리가 꺾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광경에서 묘한 통증을 공유했을 것이다. 기댈 곳이 없다는 건 세상의 끝으로 몰린 절망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런 세상의 끝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물론 이성적인 질서와 규범이 무법적인 폭력에 의해 와해되는 풍경을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만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인 절망이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비관적인 영화가 아니다. 배트맨이 구원한 고담에서 자라난 누군가는 정의로운 신념으로 영웅적인 채비를 차리고, 세계로 나아간다. 배트맨은 말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배트맨의 탈을 쓴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란, 이 세계의 정의란 그런 것이다. 결국 놀란은 이 세계를 좌우하는 건 배트맨도, 베인도 아닌, 객석의 개개인이라 말하고 있는 셈이다.
놀란의 영화는 항상 진실에 대한 물음을 품고 있다. 그 물음은 일종의 게임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진실을 마주하기까지의 고난과 목도했을 때의 충격을 중요하게 다룬다. <프레스티지>(2006)는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면일지도 모른다. 마술은 트릭이다. 눈속임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시시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훈련된 눈속임이 아니라 위장된 진실이라면? 최고의 마술을 꿈꾸던 두 마술사가 경쟁 끝에 도달하는 진실은 생각 이상으로 놀랍고 끔찍하다. <프레스티지>는 바로 놀란이 품은 진실게임이다. 놀란은 말한다. “자신만의 세계와 논리를 가진 영화들이 관객이 보는 이미지 이상의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당신이 바라보는 영화적 세계가 스크린 너머의 허구일 때 우린 안전하지만 그것이 때때로 현실로 튕겨져 나올 때, 영화란 더없이 위험한 도구처럼 보인다. 최근 콜로라도 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벌어진 참혹한 총기 사건도 영화의 잠재적 불안을 조커처럼 속삭이고 부추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세계를 망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이다. 놀란이 전하는 진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우린 믿어야 한다. 당신이 지켜야 할 모든 가치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 스스로를.
(BOX)왜 아이맥스인가?
“아이맥스가 영화를 위한 최고의 포맷으로 발명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이유다. 상업영화 최초의 사례였다. 심지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전작의 두 배에 달하는 55분 분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70mm 아이맥스 필름에 담긴 광대한 비주얼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다. 하지만 놀란은 단순한 볼거리를 의식한 것이 아니다. “<인셉션>은 그 특이한 풍경을 포착하기보다 꿈의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게 중요했기에 아이맥스 대신 핸드헬드 카메라의 현장감을 활용했다. 반면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아이맥스의 거대한 캔버스에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그 차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방식에 의존한 결과였다.”놀란이 재발견한 아이맥스에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있다.내년에 개봉될 <스타트렉: 더 비기닝 2>와 <헝거 게임: 캐칭 파이어>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됐으며 스티븐 스필버그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중이라니, 3D를 잇는 차세대 영화 플랫폼은 아이맥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말들을 쏟아냈다. 우린 이 고독한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아니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고담은 부패한 악의 소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전쟁은 끝났다고. 배트맨이 경찰견에 쫓겨 어둠 속으로 달아난 것도 벌써 8년 전 일이다. 고담의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자 했던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를 죽인 악당임을 자처한 배트맨은 더 이상 고담의 밤거리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그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고담의 백기사 하비 덴트의 그 대사처럼, 살아남은 배트맨은 악당이 됐고, 내부자의 배신으로 악당 투페이스로 변절한 하비 덴트는 결국 죽어서 영웅이 됐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 앞에서 엄숙한 물음을 삼킬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진짜 영웅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그건 마치 유대인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서사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엄숙한 히어로 무비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팬덤이 다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줄을 선 건 당연하다. 북미 개봉 첫 주에 극장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흉악한 암초에 걸려 주춤했지만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성하며 전세계 7억불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배트맨의 부활을 목격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한 광활한 도시 풍광 아래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대결, 고독한 신념으로 분투하는 영웅의 피로한 고뇌, 조커 그리고 멀리 떠나버린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의 진풍경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복음이었다. 혼돈을 즐기는 조커에 맞서다 끝내 고담을 지키고자 영웅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한 배트맨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강적, 베인에 맞서서 또 한번 고담을 구원해야 한다. 그 무용담 앞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서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이 트릴로지는 유년 시절 고담 뒷골목에서 부랑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부모를 목격한 한 소년이 어른이 돼서도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박쥐 코스튬을 입고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다 진짜 삶을 회복하기까지의 서사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복귀를 겨냥한 제목이자 제 삶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사내가 그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 비긴스>에선 어린 브루스 웨인이 실수로 우물에 추락해서 자신에게 날아든 박쥐 떼에 질겁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물을 탈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숱하게 악몽을 꾼다. 그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고담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될 이미지를 구상하던 중, 집안에 날아든 박쥐를 통해서 모티브를 얻는 건 필연이다. 자신의 공포를 악인들의 공포로 전이시킨다는 건 일종의 복수심에 가깝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법적 체제로서 정당하게 악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비 덴트의 이상을 지지하는 건 고담의 법 체제 확립을 통해서 고단한 자경단 노릇을 그만 두고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고픈 욕망 때문이다.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말한 레이첼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비 덴트는 이상이고, 레이첼은 현실이다. 결국 조커의 계략으로 이상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사라지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은둔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단지 전편에서 사라진 배트맨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의 광기로부터 구해낸 고담에서, 하비 덴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길 자처하며 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법의 기틀을 마련한 배트맨은 그 비틀린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악당의 출연과 함께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진다. 현란한 전술과 압도적인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던 배트맨은 베인 앞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다 끝내 허리가 부서져 일어서지 못한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배트맨과 함께 구타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 허구이고 그 너머의 절망이지만 객석까지 비통한 공기가 흐르는 건 자신들의 강력한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적인 목격이자 체험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베인에 의해서 감금되는 감옥은 마치 그가 유년 시절 추락했던 우물을 닮았다. 브루스 웨인이 그 곳을 기어올라야 하는 건 고담을 유린하는 베인을 막아서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곳이 자신이 홀로 기어오를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끌어올려준 아버지도 없는 그 지하 감옥에서 그는 허리에 묶인 끈 하나에 의지한 채 벽을 잡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른다. 물론 브루스 웨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광경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떤 칼슘 보조제를 먹었는지 의아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모든 서사에서 중요한 건 그 행위에 깃든 상징적 의미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소돔과 고모라가 된 고담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을 시작한다. 예정된 수순대로 고담을 구하고자 허리를 펴고 기어오른 배트맨의 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서사의 끝자락에는 보다 성스러운 결말이 대기 중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도시를 살리고자 스스로 제단에 오르듯 날아오르는 배트맨은 성배가 된다. 비로소 죽어서 영웅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슈트를 벗으며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헤어진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며, 강력한 상징의 허물을 벗고 진짜 삶을 찾는다.
굳이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몇 가지 의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3부작의 관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탁월한 마침표를 찍는 수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에 하이퍼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슈트의 제작 과정까지 합리적인 인과를 설계하는 방식은 때때로 편집증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존재 가능한 영웅의 형상을 설득하며 이 트릴로지가 바로 우리 세계와 맞닿은 거울상이라 설득한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을 수 차례 언급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기구한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 내부에 잠재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린 프란츠 랑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메트로폴리스>. 어느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놀란은 간절한 희망을 추출해냈다.
이건 어느 영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어찌됐건 가능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야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결말부에서 비행 직전의 배트맨에게 경찰청장 고든은 묻는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배트맨은 답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부모를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위로하는 고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 이 도시에는 배트맨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
<다크 나이트>가 선사한 광활한 충격을 맛본 당신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주님일 거다. 무한한 혼돈과 같은 조커를 이겨낸 배트맨은 존재 자체로 파괴이자 절망에 가까운 강적 베인에 맞서 처절하게 짓밟히면서도 또 한 번 일어서서 소돔과 고모라가 될 고담시를 구원해야 한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잇는 트릴로지의 피날레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164분의 러닝타임 안에서 다시 한 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영웅의 소비 실태를 고민하고 제시한다.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는 미국 내 사회에서 월가 시위와 같은 계급적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현실이 적극적인 메타포로 동원된 인상이기도 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결국 자본과 계급이라는 21세기의 시민사회를 관통하는 히어로계의 <시민 케인>이라 할만하다. 배트맨은 여전히 고뇌의 간지를 풍기고, 베인은 압도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훅을 날리는 건 캣우먼이다. 한두 가지 결정적 순간이 전체적인 완성도 안에서 살짝 뒤쳐지는 인상이지만 결말은 가히 복음이 되어 배트맨을 성배로 만들고야 만다. 개별적인 작품의 완성도에서 봤을 때 <다크 나이트>를 넘지 못하는 듯하나 3부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기 이야기를 완벽하게 갈무리하는 수작이다. 아이맥스 카메라 촬영분량만 72분에 달하는데 이걸 과연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안보고 배기는 것이 정상일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광대하고 웅장하며 처절하나 결국 경배할 수밖에 없는, 영웅 대서사시. 과연 이런 3부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는 점차 광대해지고 있다. 기억을 잃은 사내의 퍼즐 같은 일상은 거대한 꿈의 해석으로 진전됐다. 놀란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의 팽이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모든 경험을 더듬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스스로가 말하는 경험은 7살에 시작됐다. 시카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액션 피규어와 함께 아버지의 슈퍼 8mm 카메라를 장난감처럼 다루며 영화를 익혔다. 후에 학업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온 놀란은 런던대학교 산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칼리지 필름 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몇 편의 단편을 연출한다. 졸업 후, 장편 데뷔의 활로를 모색하던 그는 훗날 제작자로서 든든한 후원자가 될 엠마 토마스를 만나 1997년 결혼식을 올린다.
이듬해 ‘신카피 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한 놀란은 장편데뷔작 <미행>을 연출한다. 단돈 6천불의 저예산 영화 <미행>은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한 탓에 도둑촬영이라 불리는 게릴라 슈팅과 핸드헬드로 촬영된 작품이다. 주말 동안만 촬영을 이어나간 탓에 1년 만에 완성된 영화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주목을 얻은 뒤, 북미 2개 극장에서 상영되어 5만 불의 수익을 올렸다. 작가지망생 빌이 임의의 인물을 미행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의 <미행>에 대해 놀란은 이처럼 말했다. “그건 트릭이다."순행적인 서사의 흐름을 조각처럼 자르고 이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 마주세운 뒤 플래쉬백과 플래쉬포워드의 형식으로 전진시킨 <미행>의 서사는 관객에게 하나의 레일에서 마주보고 달려오는 두 개의 기차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멘토>는 명확하게 <미행>보다 스케일이 커졌지만 두 영화의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는 놀란의 말처럼 <메멘토>는 내러티브의 문법에 도전한 <미행>의 성공이 낳은 또 다른 실험적 결과물이다.
동생 조나단 놀란의 단편소설 <메멘토 모리>를 기초로 완성한 <메멘토>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 복수하려는 남자의 여정을 그린다. <미행>의 서사적 구조를 흡수한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구조적 특이성을 더욱 특별하게 보완했다.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남자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마주보듯 진전되는 두 개의 서사는 결국 중간 지점에서 충돌하듯 멈춰 선다. 은폐된 서사의 조각을 통해 비밀을 위장했던 <미행>과 달리 <메멘토>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감춰진 사실이 드러날 때 진실이 변질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미행>이 진실에 관한 추적을 그린다면 <메멘토>는 진실에 대한 폭로를 그린다. 무엇이 옳은가라는 객관적 사실을 넘어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는 주관적 진실을 겨냥한다.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을 거듭하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결국 놀란의 재능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할리우드의 러브콜 속에서 놀란이 선택한 건 동명의 스웨덴 영화를 리메이크한 <인썸니아>(2002)였다. 뉴욕의 베테랑 형사 도머는 알래스카의 살인사건에 파견수사를 나오던 중에 백야로 인해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는 <메멘토>의 레너드와 같이 진실을 헤매는 동시에 미로와 같은 함정 속에서 신념을 고민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알 파치노, 로빈 윌리암스, 힐러리 스웽크의 캐스팅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놀란의 입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차기작은 이를 증명한다. 놀란은 <블레이드>시리즈의 각본가인 데이비드 S. 고이어와 함께 호흡정지 진단이 내려진 <배트맨>시리즈의 생명연장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 낡은 히어로 시리즈의 부활은 새로운 심장의 이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화적인 과장에 기대며 악몽의 세계관을 연출한 팀 버튼과 달리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논리적인 인과와 사실적인 묘사가 동원된 하이퍼 리얼리즘의 히어로 블록버스터로 완성됐다. 이는 결국 <다크 나이트>(2008)를 위한 단단한 초석으로서 확실한 가치를 얻었다.
<다크 나이트>에 앞서 연출한 <프레스티지>(2006)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야심만만한 두 젊은 마술사의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마술과 마법, 트릭과 환상이라는 가짜와 진짜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마술사들의 이야기는 마치 허구와 실재의 세계에 두 다리를 걸친 작가의 고뇌와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토리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관계, 서사적 구성까지 모든 측면에서 놀란의 능력이 극대화된 이 작품은 캐릭터의 팽팽한 대립구조를 통해 배트맨의 강적 조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의 리허설을 연상케 만들었다.
“슈퍼맨은 근본적으로 신이지만 배트맨은 헤라클레스와 같다. 그는 많은 결함을 메워나가는 인간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블랙 슈트에 가려진 인간의 결핍과 고독을 발췌해냈던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다다라 본격적으로 그 이중성에 주목해 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배트맨과 조커를 그린 <다크 나이트>는 오락적 이미지로 위장한 사회학적 실험의 양상마저 연출한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라는 명대사는 제도적 결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배트맨의 반제도적 활약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를 겨냥한다. 조커의 공황적인 태도 속에서 고립되는 영웅의 자화상은 제도적 한계와 사회적 정의의 함수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개봉을 앞두고 급작스러운 비보를 전한 히스 레저의 무시무시한 열연이 담긴 <다크 나이트>는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며 블록버스터의 완성과 깊이에 대한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 동시에 이는 거대한 시스템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다는 놀란의 자신감이 피력된 결과물이다.
“나는 <인셉션>(2010)이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다른 장르들과 수많은 다른 타입의 영화기법이 조합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놀란의 말처럼 <인셉션>은 다양한 장르를 쌓아 올린 지층과 같은 영화다. 타인의 꿈에 침입해 생각을 추출해내는 인물들의 활약을 그린 <인셉션>은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통해 얻어진 SF적 세계관에 다양한 캐릭터의 개성과 활약상을 전시하며 케이퍼 무비 특유의 활력을 주입한다. 동시에 카체이싱과 무중력 격투, 설원의 총격전까지, 경계를 넘을 때마다 생소한 환경으로 돌변하는 꿈의 단계적 변화는 다양한 액션신을 연출하기 위한 공간적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동시에 이 모든 여정은 확실한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지울 수 없는 페이소스를 ‘인셉션’시킨다. 이 열린 결말은 놀란 스스로 자신의 손을 떠나간 영화의 결과에 대한 관객 스스로의 판단을 유도하는 것과 같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팽이를 비추던 줌인숏이 암전되는 순간, 그 모든 ‘꿈의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 순간에 탄식을 내뱉었다면 다시 한번 되돌아가서 팽이를 응시하라. 놀란은 “나에게 영화의 즐거움이란 당신이 인식할 수조차 없게 누군가의 머리 속으로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있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놀란을 따라 팽이 앞에 섰다. 팽이를 계속 돌릴 것이냐, 멈출 것이냐, 그건 이제 당신의 몫이다.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그 재능이란 실로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단지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라. 그리고 즐겨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재능이 당신을 풍요롭게 만들 지이니.
찰리 채플린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희극지왕
찰리 채플린을 그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의 달인 즈음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창시자라면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의 개척자다. 채플린은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즈음으로 여겨지던 무성영화에 예술의 의미를 새겨 넣었다. 삼류 연극 배우였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채플린은 가난하고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을 희극으로 전복시키며 세상의 비애를 돌봤다. 자신의 경험을 필름에 투영한 기념비적인 장편 데뷔작 <키드> 이후로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나 <서커스>를 통해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역설적인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부조리한 세상을 겨눈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의 작품을 통해 코미디를 저항적 유희로 끌어올렸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채플린은 삶이야말로 진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 희극지왕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슬픔을 어루만지는 진심이자 불의를 향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여전히 세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시대를 앞서 나간 작품들은 되레 동시대인의 공격을 얻곤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마 이 방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공개될 당시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온전히 기술에 심취해 버린 껍데기처럼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날 큐브릭의 작품들은 창작자의 직관과 도전이 이룬 독창적인 성과로서 인정받았다. 큐브릭은 기술로서 시대를 선도하는 테크니션이었지만 일찍이 씨네필이었던 그는 단지 기술적 실험의 매체로서 필름을 남용하지 않은, 기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필름 장인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지만 그를 작가적 반열에 올린 건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작품이었다. 특히 폭력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린 <시계태엽 오렌지>는 당시 런던에서 영화가 개봉되면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얻을 정도의 문제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영화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서 큐브릭에게 영생을 부여했다.
레오 까락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네아스트
프랑스가 전세계 영화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누벨바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끌어올린 ‘새로운 흐름’그 자체였다. 그리고 누벨바그의 포스트 세대라 할 수 있는 누벨 이마주는 영화를 이미지의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사조였다. 그 누벨 이마주의 중심에 레오 까락스가 있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시퀀스의 이미지 혹은 단 한 컷만으로도 깊은 인장을 남긴다. 물론 그는 단순한 비주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구현하는 영화적 이미지는 그 찰나만으로 영원을 설득할 수 있을 낭만이나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비범한 광기가 서려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심오한 시네아스트로서의 재능을 선보인 그는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고통과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꿈틀대는 사랑을 무언으로 설득한다. “도시의 어디에나 내 사랑이 있다.”까락스의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대사는 자신의 영화처럼 좀처럼 말이 없는 까락스의 절망이 진정한 사랑을 위한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 – B급으로 위장한 컬트의 수집가
일명 B급 영화라고 국내에서 통칭되는 ‘B무비’는 동시상영관을 의미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떠리처럼 상영되던 삼류영화들을 지칭하는 언어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B급 영화들이 컬트의 영역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남자의 공이 8할이다. ‘키치’라는 용어를 훈장처럼 미화시킨 주범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극장을 드나들며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목격하고 그 모든 취향을 제 것으로 섭렵해낸다. 이는 결국 그의 창작적 뿌리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B급 영화의 경박한 완성도 속에 자리한 통렬한 쾌감을 포착해내고 이를 하나의 위장된 영화적 트릭으로 활용하는데 성공한 재간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즐겼던 다양한 영화들, 즉 필름 누아르부터, 웨스턴 무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쿵푸영화,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 자신을 흥분시켰던 다양한 영화적 이미지들을 재현하고 탁월하게 조립하며 자신의 영화로서 재창조해낸다. 영화광이었던 소년은 스스로를 B급으로 무장하며 그렇게 컬트의 중심에 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역설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가
<메멘토>의 망각과 기억, <인썸니아>의 수면과 각성, <프레스티지>의 환상과 트릭,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대조적인 관념이 공존하는 세계관을 오가는 인물의 혼돈과 착시를 설득시키고야 마는 야심가다. 등을 돌리듯 맞선 두 세계의 대조적인 단면을 의식과 무의식의 대칭적인 구조로 설계하고 이를 통해 두 세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명료하게 설득해낸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호흡정지 진단이 내린 히어로 시리즈의 생명연장을 이룬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블록버스터를 거대한 철학적 명제의 장으로 끌어올리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거대한 스케일을 반도체적인 세심함으로 완성해낸 <다크 나이트>는 작은 결점조차 허락하지 않는 놀란의 이성적 두뇌가 총 집약된 야심작이다. 그리고 <인셉션>은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대변하는 총아적인 단서나 다름없다. 꿈과 현실을 넘나 드는 인물들의 분투는 <다크 나이트>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새삼 각인시키며 전세계를 ‘꿈의 해석’으로 끌어들였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드는 듯한 놀란의 꿈은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으로서 세계를 매혹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