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은 수많은 반도와 섬으로 이뤄진, 일명 ‘북방의 베네치아’다. 오후 4시 즈음에 해가 저무는 스톡홀름의 11월 이른 밤을 뜨거운 열기로 사로잡는 건 북유럽 최대영화제인 스톡홀름국제영화제다. 오는 17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질 21번째 축제는 선댄스 드라마 부문 대상작인 <윈터스 본>(2010)과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휘파람을 불고 싶으면 불지>(2010)와 같은 화제작들로 스톡홀름의 이른 밤을 밝힌다.
본래 한국은 해외 유명 뮤지션들의 해외 투어 스케줄에서 소외되는 지역이었다. 하나 근래 몇 년 사이 대형 밴드의 내한이 이뤄지며 점차 한국을 찾는 유명 뮤지션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한국 관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소위 ‘떼창’이라 불리는, 따라 부르기를 비롯해서 폭발적으로 열광하는 관람 매너는 되레 전세계를 돌며 무대에 선 해외 뮤지션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형 음악 페스티벌의 성사는 이런 분위기에 고무된 결과다. 인천 송도에서 개최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과 지산 밸리 락 페스티벌과 같은 자국 브랜드 페스티벌들은 축제에 목말라 있던 한국의 음악팬들을 위한 오아시스였다. 관객들은 열화 같은 성원으로 페스티벌의 입지를 매년마다 다져나가고 있다. 이런 대형 페스티벌이 서울 인근에 터를 잡고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높은 인구 밀도만큼이나 페스티벌 문화의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서울은 단연 페스티벌의 ‘핫스팟’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올해로 4회를 맞이하는 그랜드민트 페스티벌과 지난 해 시작되어 올해로 2회를 맞이한 글로벌 개더링의 기록적인 예매율은 오는 10월이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한 달이 될 것임을 예감하게 만든다.
(beyond 10월호 Vol.49 beyond SPECIAL ‘ENTERTAINMENT NEW WAVE 2010’)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 기회의 뚜껑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어떤 이는 그 내용물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거머쥔다. <트와일라잇>시리즈로 근육질 ‘짐승남’의 매력을 전세계에 전파한 테일러 로트너는 분명 후자에 해당하는 1인이다. 하지만 “그건 <트와일라잇>이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로트너는 그 대단한 관심이 온전히 자신을 증명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본>시리즈의 맷 데이먼을 보며 “내가 저런 걸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라며 감탄하거나 <노트북>(2004)과 같은 로맨틱한 영화에 대한 취향을 내보이기도 하는 로트너는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품은 원석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조지 클루니와 같은 대배우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10대 배우의 순진함을 감출 수 없지만 이는 곧 소년이 품은 야망을 드러내는 좋은 예시가 아닐까.
시체스는 누드비치로 유명한 명소지만 전세계 장르영화팬에게는 일종의 성지나 다름없다. 매년 10월, 화끈한 누드비치의 열기보다도 시체스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건 장르영화의 축제 시체스국제영화제다. 세계3대 판타스틱영화제 중 하나로 꼽히는 시체스영화제는 엄선된 장르영화로 관객들을 접대한다. 43회를 맞이한 올해에도 기타노 다케시의 신작 <아웃레이지>(2010)와 매트 리브스의 <렛 미 인>(2010) 등, 신선한 메뉴들을 마련했다. 오는 7일부터 17일까지, 살아있는 장르의 축제가 시작된다.
제각각의 층위를 이루며 퇴적된 지층처럼 인생 또한 찰나의 경험이 켜켜이 쌓인 세월로 축적된다. 저마다의 인생 안에서도 선택과 도전을 거친 삶은 귀감이 되어 빛나기 마련이다. 바로 리암 니슨이 그렇다.
아일랜드 밸리미나 출신의 리암 니슨은 어려서부터 큰 체격을 지닌 탓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권투에 입문한 계기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9살의 나이에 올 세인츠 유소년 클럽에서 권투를 수련하기 시작한 니슨은 킬러 본능이 없다는 지적을 듣는 가운데서도 뛰어난 체격 조건을 기반으로 6년 뒤, 북아일랜드 헤비급 유소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올림픽 출전을 희망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던 소년이 17세가 되던 해에 링을 등져야 했던 건 펀치드렁크 때문이었다. 꿈을 상실을 견디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결과적으로 니슨은 링에서 내려옴으로써 새로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배우로서 처음 무대에 오른 니슨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영어 선생님의 제안으로 교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니슨은 점차 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 당시, 자신에게 주연을 맡겼던 그 영어 선생님이 조직한 슬레미쉬 극단에 입단한다. 아마추어 배우 지망생들로 이뤄진 이 극단은 전지역의 수많은 드라마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공연을 펼쳤다. 니슨은 <Philadelphia, Here I Come>을 공연한 Larne Drama Festival에서 호평을 얻었고 결국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니슨은 배우로서의 삶에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살이 되던 1971년, 벨파스트의 퀸즈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1년도 안되어 다시 벨리메나로 돌아와 기네스 공장에서 지게차를 몰았다. 당시 샘 하나라는 이름을 지닌 노인과 함께 일했던 니슨은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어느 날, 그는 니슨에게 충고를 던졌다. “애송이, 여기 오래 머물러 있지마. 네 삶을 찾아가.” 당시 니슨은 업무가 끝나면 틈틈이 벨파스트의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리허설하곤 했으며 슬레미쉬 극단에서의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심지어 그 해에 <Pilgrim's Progress>(1979)에 출연하며 생애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니슨은 연기를 사랑함에도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다. 뉴캐슬에 있는 세인트 마리스 사범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니슨에게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만드는 또 한번의 계기였을 뿐이다. 다시 벨파스트로 돌아온 니슨은 배우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두 번의 타협에 실패한 뒤에서야 비로소 배우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리릭 극단의 오디션에 통과한 니슨은2년에 걸쳐 극단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다양한 연기적 경험을 쌓아나가던 니슨은 투어 기간 동안 곳곳에서 영국군과 아일랜드 무장단체의 대치를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북아일랜드에서 자랐다. 덕분에 폭력과 그 폭력의 결과들을 직접 목격하며 사건들 속에서 살아왔다. 그건 언제나 내게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일이었다. 그건 정말 어떻게 분노가 삶을 잡아먹을 수 있는지에 관한 직감이었으니까.”
무대에 오른 니슨을 눈여겨 본 존 부어맨은 자신이 연출하는 <엑스칼리버>(1981)에 그를 캐스팅했다. 니슨은 <엑스칼리버>에서 동료배우로 출연한 헬렌 미렌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이는 니슨에게 새로운 구심점이 된다. 당시 인상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던 여배우 헬렌 미렌의 인맥이란 당시 초짜 신인에 불과했던 니슨에게 금광과도 같았다. 미렌과의 5년에 걸친 연애는 니슨의 세계관을 푸아그라처럼 부풀어오르게 만들었다. 롤랑 조페의 <미션>(1986)에서 만난 로버트 드니로도 니슨에게는 남다른 인연이었다. 드니로는 니슨을 자신이 사는 LA로 초대한 뒤, 친분이 있는 캐스팅 디렉터에게 니슨을 소개시킨다. 결국 니슨은 당시에 기획된 TV시리즈 1회 분량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드니로의 권유에 호기롭게 LA로 이주한 니슨은 인상적인 필모그래피 대신 단조로운 연애 경력만 권태롭게 이어나갈 뿐이었다.
1992년, 비로소 전성기가 찾아왔다. 유진 오닐의 작품을 뮤지컬로 옮긴 <안나 크리스티>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뮤지컬에 출연한 니슨은 그 해 토니상을 수상한다. 또한 대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딸인 나타샤 리차드슨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이력을 마련해준 스티븐 스필버그를 만나게 된다. 무대에서의 연기를 본 스필버그는 낯선 신인을 기용한다는 제작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쉰들러 리스트>(1993)에 그를 캐스팅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는 니슨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쉰들러 리스트> 이전까지 나는 영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믿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영화와 함께 전세계를 돌면서 이미지의 영향력을 온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이클 콜린스>(1996)로 연기력을 인정받지만 니슨은 딱히 주연을 고집하지 않았다. 영화사이트 IMDB의 그의 트레이드마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캐릭터는 종종 일찍 죽거나 영화에서 사라지지만 소년들은 니슨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예년에 비해 근래에 가벼운 영화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최근 <테이큰>(2008)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클로이>(2009)에서 위태로운 듯 끝내 흔들리지 않은 남편의 모습은 니슨의 진중함을 반영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남다르지 않다. 단지 그가 지금 보다 여유로운 가치관 속에서 영화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즐길 준비가 된 것은 아닐까. 그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다.
(Box) 이언 페이슬리, 영감의 원천
“그는 6피트보다 큰 남자가 그저 열변을 토하며 전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실로 아름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연기였다는 게 아니라 그것 또한 대단한 연기이고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리암 니슨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기이하게도 개신교 지도자인 이언 페이슬리다. 니슨은 자신만큼이나 체격이 큰 페이슬리가 자신과 대조적일 만큼 공격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자신을 비추며 연기적 영감을 얻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는 떠오르는 필름 메카다. 매년 9월에 개최되는 토론토국제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꿈에서 시작됐다. 1976년, 각지의 영화제 수상작을 상영하는 ‘페스티벌의 페스티벌’로 시작돼 1994년에 이르러 토론토국제영화제라는 오늘날의 격식을 갖추며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35주년을 맞은 이번 영화제는 보다 뜻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오는 9월, 토론토 시내에 개장하는 5층 건물 ‘TIFF Bell Lightbox’라는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것. 자본과 장르,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영화제의 취지에 걸맞게 상영작들도 풍성하다. 집행위원장 카메론 베일리가 “35주년을 기념하는데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마이클 맥고완의 신작 <Score: A Hockey Musical>(2010)을 비롯해서 다양한 작품들이 영사기 앞으로 모여든다. 9월 9일부터 19일까지, 토론토는 더욱 풍성한 꿈에 빠져든다.
제이든 스미스의 유명세는 분명 윌 스미스의 아들이란 사실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행복을 찾아서>(2006)를 통해 제이든 스미스는 혈연 관계보다 뛰어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여전히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말할 수는 없지만 스미스는 분명 아버지의 이름으로 힘입은 아이만은 아니다. <베스트 키드>(2010)는 그 확신의 새로운 근거로서 유효하다. 유명 배우의 아들에서 유망한 아역 배우로,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었다. 한낮에 단잠을 자고 있었을 게다. 어느 순간 어렴풋이 눈이 뜨였고, 순간 적막한 기분을 느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음을 직감한 어린 것은 내심 불안해진 탓에 퍼뜩 잠이 깨어 엄마를 불러댔다. 그리 넓지도 않았던 집 구석구석을 돌며 엄마를 불러댔지만 돌아오는 건 빈 공간만큼의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을 밀어내려는 것마냥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내며 빽하고 울어내기 시작했다.
울음은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여전히 기억이 난다. 입안에 물려주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사탕을 우물거리는 내 등을 두드리던 엄마의 손. 달아난 울음.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원래 그리도 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어린 시절 그 날만큼은 그랬다. <나홀로 집에>(1990)의 케빈처럼 가족들의 빈자리에 쾌재를 부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생각 따위는 내게 진짜 먼 나라 이야기였던 거다.
대식구였던 케빈의 가족과 달리 단 네 명에 불과했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나란히 극장에 앉아서 봤던 영화는 바로 그 <나홀로 집에>였다. 부모님은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이 작품이야말로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서 봐야할 영화라고 생각하셨던 건지, 내 손을 잡고 극장으로 갔다. 속편이 나왔을 무렵, 또 한번 부모님 손을 잡고 극장을 향했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도 그 당시 어린 것이 뚫어져라 스크린을 보는 모습이 당신 보시기에 좋으셨나 보다.
그 날로부터 20여 년 정도가 지난 지금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절 홀로 집을 지키던 어린 케빈은 나이가 들어서도 홀로 남겨진 집 안에서 그렇게 유쾌할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말미에서 케빈은 돌아온 가족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내보인다. 생각해보니 그 미소는 내가 기억하는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이었다. 추억이라 불리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 사소하고 하찮기만 하던 것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점차 애틋해지고 간절해진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것들이 있다. 내 울음을 멈추게 했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바로 그런 것 말이다. 나는 이제 혼자 남은 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날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온 것이다. 더 이상 그 단맛을 맛볼 수 없는, 그런 나이로.
<원티드>(2009)를 본 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엄마, 나는 안젤레나 졸리와 같은 액션 키드가 될래요!” 꿈은 이루어졌다. 불과 한 달 뒤, 딸과 함께 대본을 본 어머니는 말했다. “맙소사, 클로이. 네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정확히 네가 원하던 환상적인 역할이잖니.” <킥 애스: 영웅의 탄생>(2010)의 ‘힛 걸’은 그렇게 태어났다. 클로이 모레츠는 마치 <킬 빌>(2003)과 같은 잔혹한 세계에서 귀여운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태연하게 칼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긴다. 깜찍한 아역 여배우의 패러다임을 비웃듯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터프한 매력을 각인시켰다. 최근 <렛 미 인>(2008)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촬영을 마친 모레츠는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을 비롯해서 다양한 러브콜에 시달리는(?) 중이다. ‘핫 걸’의 질주는 이제 시작이다.
로카르노는 그림 같은 도시다. 병풍처럼 펼쳐진 스위스 산맥 아래 잠긴 호수의 장관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말을 절감하게 만든다. 매년 8월 그 그림 같은 풍경 아래 영화들이 상영된다. 올해로 63회를 맞이하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는 새로운 재능으로 무장한 영화를 발굴하는 전통적인 영화제다.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을 비롯해 총 500여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백미는 풍요로운 풍광 아래 펼쳐지는 야간 야외상영이다. 8월 4일부터 14일까지,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필름이 영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