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단 7광구에 위치한 석유시추선 이클립스 호의 시추 대원들은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심해의 밑바닥을 긁고 파 들어갔다. 하지만 1년 여간의 노력 끝에도 석유는 나오지 않고,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는 사업인 만큼 본사의 압박도 심해진다. 결국 철수 명령이 내려진 가운데, 7광구에 대한 애착이 강한 차해준(하지원)은 이에 반발한다. 그리고 철수를 지휘할 새로운 캡틴으로 7광구에 온 안정만(안성기)은 대원들에게 석유 시추를 위한 유예 시간을 끌어보자고 제의한다. 안정만과 함께 철수를 보류한 여덟 명의 대원들은 다시 한번 석유 시추를 계획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어두운 심해는 미지의 우주 공간이 전하는 고립감을,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자리한 섬과 같은 석유시추선은 우주에 떠있는 우주선의 폐쇄적 공포를 연상시킨다. <7광구>는 분명 <에이리언>을 위시한 여타의 괴물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원이 연기하는 차해준은 <에이리언>에서 시고니 위버가 연기하는 리플리의 아바타와 같다. 맞다. 짝퉁이라면 짝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여전사가 등장해서 괴물과 맞서는 액션 영화 하나 즈음 있으면 어떤가. 심해 속에서 나타난 미지의 괴물이라는 설정은 대부분의 괴물 영화들이 지니고 있는 클리셰다. 봉준호의 <괴물>도 그러했듯이 <7광구>가 빤한 게 아니라 원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기시감이 선명하다. 중요한 건 이를 특별하게 수식할 논리적인 디테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7광구>의 모든 서사는 완벽하게 낭비적이다. 괴물이 등장하기까지 30여 분의 러닝타임이 흘러가는데, 이 시간이 이 영화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는 것인지가 또렷하지 않다. 아니, 아무 것도 못한다. 누가 뭐래도 <7광구>의 주연은 괴물이(어야 한)다. 복선 노릇을 하는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본 서사가 시작되고 30여 분간 이어져 나가는 도입부의 서사는 마치 주연배우가 등장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겠다며 무대로 떠밀어낸 조연 배우들의 난장과 같다. 여덟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관계도가 그려진다. 그게 끝이다. 물론 영화는 나름의 인과와 복선을 준비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저 괴물이 나오기까지 시간을 버틸 뿐이다. 갈등은 존재하나 이유는 알 수 없고,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민폐거나 생각이 없다.
심해괴물이 등장했다. 때때로 그럴 듯하다. 완벽한 퀄리티로 구현된 결과물이라고 칭할 수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봐줄 만한 상황은 된다 할 수 있을 만한 이미지는 나온다. 심해괴물이 날뛰는 동안 사람들은 괴물의 흔적을 수색하거나 맞닥뜨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혹은 죽거나, 당연한 수순을 건넌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아남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연한 것 외에 어떠한 특별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괴물이 나온다. 그리고 싸운다. 혹은 도망친다. 그러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서 끝내 괴물을 물리친다. 딱히 독창적이라 말할 수 없는 크리처의 디자인은 둘째치고, 괴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노동처럼 피곤해 보인다. <7광구>에는 클라이맥스가 없다. 그저 널뛰기하듯, 죽고 살아나는 괴물로 인한 시퀀스와 시퀀스의 접합만이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다.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그리고 과잉된 액션 연출과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 <7광구>는 흡사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는 이무기가 근사해 보일 거라는 어떤 영화와 같이 단발적인 아이디어로부터 대책 없이 확장과 확대만을 거듭해온 허풍선 같은 영화다. 심해에서 올라온 괴물로 인해 석유시추선의 대원들이 사투를 벌인다. 이 한 문장의 시놉시스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이미지와 안이한 스토리로 피와 살을 이룬 허약한 영화 앞에서 남는 건 무기력한 감상뿐이다. 한국 최초의 ‘3D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민망하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시도는 그만한 비판을 견딜 때 비로소 성과가 된다.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시도의 순기능이기도 하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그러한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은 대부분 <에일리언>의 그것이다. 미지의 우주가 심해로, 폐쇄적 공포를 야기시키는 우주선을 해양 한가운데의 섬과 같은 석유 시추 기지로, 심지어 시고니 위버는 하지원으로. 우리도 여전사가 등장하는 그럴싸한 괴수물 하나 있으면 어떤가. 문제는 역시 완성도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겠지만 현실은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던 이무기 등장하던 어떤 영화와 그 영화 감독의 야심이 떠올랐다. 즐길만한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몇몇 시퀀스는 존재하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까지, <7광구>에서는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가 성가시게 눈에 띈다. 심지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나, 날뛰다가 공격을 받고 죽을 듯 살아나서 또 날뛰는 과정을 반복하는 괴물이나, 노동하듯 피곤해 보인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3D를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비꼬는 말이 아니다. 보는 내내 이상했다. 안경은 왜 준걸까. 분명 3D영화라 했는데, 안경 없이도 대부분의 장면을 볼 수 있는 3D영화라니. 안경을 끼는 수고스러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 시도는 필요한 일이다. 그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시도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 시도를 고무시키기 위한 칭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도 그 자체의 순기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보다 나은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칭찬보다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전직 형사였던 강태식(설경구)은 좋은 말로 하자면 ‘범죄연구소’, 속된 말로 하자면 ‘흥신소’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일명 해결사다. 모텔의 불륜 현장을 급습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대가를 얻는 그의 일상적인 활약(?)을 펼쳐 보이려던 어느 날, 그는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청난 덫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곧 그것이 자신의 과거와 깊게 연루된 일임을, 동시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이런 덫을 풀어놓고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음모의 핵심을 찾아 나선다.
일단 류승완이 기획하고 정두홍이 무술감독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해결사>는 분명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일단 그런 기대감을 품은 어떤 이가 있다면 그 방향을, 혹은 그 기대감의 정도를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만큼이나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에도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그린 <해결사>는 시종일관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 안에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인물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영화다. 하지만 <해결사>는 단순히 그 활약상을 묘사하기 위해 이야기를 최소의 수단으로 삼으려 들지 않는 영화다.
개인에게 얽힌 음모의 실체가 실상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와 폐악의 범위로 확장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인물이 얻게 될 충격은 곧 관객에게 전이돼야 할 문제의식으로 발전될만한 것이다. 실제로 <해결사>는 현실정치를 직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클라이맥스로 점철될 때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풍자의 의미를 더할 때, 쾌감은 분명 배가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해결사>는 풍자라는 작품의 의미적 성취와 함께 말 그대로 이야기로서의 완결성 안에서도 분명한 파급력을 얻어낼 수 있는 구조적 특성을 지닌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사>라는 결과물 안에서 딱히 이로운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되레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 되레 산만한 인상을 남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사>에서 가장 기대하고자 한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은 지나치게 의미에 매달린 영화의 야심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며 궁극적으로 그 야심 또한 그 의미에 근접해내기 보단 극의 흐름에 있어서 발목을 잡는 낭비적인 욕심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해결사>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이 부재한다. 음모를 뒤집어 쓴 인물이 끝내 이루는 건 단순한 폭력적 응징에 불과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설경구라는 주연 배우 탓일지 몰라도) <공공의 적>을 연상시키는 엔딩이기도 한데 두 영화의 결말이 클라이맥스라는 용어 안에서 대조군을 이루는 건 말 그대로 중심인물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공공의 적>이 강철중이라는 인물의 활약을 거칠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반면 <해결사>에서 강태식의 활약이란 고작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룰렛 안에서 돌고 돌다가 운 좋게 타인의 도움에 구제받는 식이다. 음모에 빠진 인물의 감정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못할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도 부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방점을 고민하지 못한 채 어떤 이야기적 구성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자아낸다.
주연배우들이 주도하는 액션신은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가 느껴질 뿐, 탁월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는 사실 <해결사>에서 가장 아쉬운 측면이 될 것이다. 적어도 액션을 통해 어떤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해결사>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결점이 될 것이다. 최근 <아저씨>와 같이 특별한 성과라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액션신을 연출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해결사>의 액션은 어떤 스타일도 어필하지 못한다. 특히 후반부의 카체이싱은 대단히 공허하다. 몇몇 조연배우들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이는 영화의 공백을 메울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대체 <해결사>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에서 해결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가장 큰 의문이랄까.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을 예상했다면 일단 기대치의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일단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보다는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을 추구한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담아낸 <해결사>는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을 풀어내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을 기대해야 할 영화다. 문제는 추구하는 바에 비해 결과물이 조금 지지부진한 느낌이랄까.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인상을 남기며 산만한 감상을 이끈다. 이를 치장하는 액션신조차도 육체적 노고 이상의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몇몇 조연배우들의 대사나 행위가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공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