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은 결국 운명처럼 귀속되는 여정이다. 하지만 그 운명이란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지표들을 거쳐서야 다다르는 종착역일 뿐, 인생에 정해진 지도는 없다. 우린 인생이란 길 위에서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한 결과로서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내다본다. 인생이란 운명을 향한 선택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여정을 그린 다섯 편의 운명이 여기 있다.
<원스>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던 ‘그’는 그 거리에서 운명적으로 ‘그녀’를 만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그와 그녀는 순간의 만남을 인연으로 넓혀나간 뒤, 서로를 향해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에게 스며들어가는 사랑을 노출하지만, 점차 어둡게 내려앉는 땅거미처럼 현실을 체감하고, 서서히 희미해지는 황혼처럼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의 너머로 내려 보낸다. 탁월한 음악영화이자 애틋한 멜로영화인 <원스>는 모든 사연의 시작이 운명적인 찰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한 남녀는 운명적인 예감을 꿈꾸지만 서로에 대한 진심을 추억으로 떠내려 보내며 각자의 길로 다시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부딪히고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When you’re mind made up. There`s no point trying to change it.’마음을 정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운명은 선택을 통해 완성되고, 마법 같은 시간은 그 길 위에 놓여 있으니.
<더 로드>
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의 앙상한 풍경이 살아남은 인간들을 더없이 무력하게 치장한다. 끝나버린 세계, 의미 없는 삶, 그곳에서 생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 폐허 속을 걷는 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그리고 아이는 묻는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인가요?”인간의 이성이 더없이 무력해진 세상의 끝에서 부자는 선을 짊어지고 남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이미지로 승화시킨 듯한 <더 로드>는 비범한 원작을 비범하게 재현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그 황폐하고 참혹한 세계의 길 위로 걸어나가는 부자의 뒷모습이 마음에 불을 지피는 힐링 시네마다.
<어톤먼트>
찰나의 파문이 만들어낸 동심원의 너비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의 원작소설 <속죄>를 동명 원제 타이틀 그래도 스크린에 옮긴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는 어느 한 순간의 충동에서 비롯된 소녀의 선택이 남녀의 삶을 지울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유려한 화법으로 그려나간다. <오만과 편견>을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시각적인 심상으로 연출하는데 대단한 감각적 재능을 보인 조 라이트는 <어톤먼트>를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진 감정적 여운을 선사한다. “소설에서는 상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연극에서는 배우에게 달렸다.”하지만 현실은 무대도, 배우도 없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적인 삶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오해는 현실을 왜곡하고 삶을 파괴하지만, 후회는 너무나도 늦고 속죄는 더디다. 결국 삶이란 허구로 귀결될 수 없는 실존의 엔딩을 향하고 있으며 찰나로부터 번져나간 파문은 때로 비극과 희극을 꿈꾸거나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을 수면 밖으로 밀어 보낸다. 삶이란 그만큼 허망하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출렁임으로 예기치 않게 떠밀려 보낸 타인의 삶에 대한 속죄가 여리고 시리다.
<미스 리틀 선샤인>
육두문자 섞인 식단 투정을 내뱉는 할아버지, 자신의 커밍아웃과 자살 경험담을 털어놓는 외삼촌, 이를 비꼬며 완강한 흑백논리로 대화를 경직시키는 아버지, 염세주의적인 경향으로 묵언수행 중인 아들, 미녀 선발대회에 집착하는 딸까지, 식탁 앞에 모여 앉은 이 가족, 콩가루다. 그 가족들이 덜컹거리는 밴에 구겨 앉아 여행을 떠난다. 막내딸이 원하는 소녀미인선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대륙을 횡단한다. 순탄치 않은 여정 속에서 가족들은 서로를 꼬집고 할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다. 서로를 힐난하던 가족은 예기치 못했던 상실감을 공유하고, 누군가의 좌절감을 목격하며 점차 마음을 열어나가며 관계를 기워나가기 시작한다. 예측불허의 상황을 연출하며 소소한 웃음을 끌어내는 <미스 리틀 선샤인>은 감동적인 로드무비 가족드라마다. 콩가루처럼 흩날릴 것 같던 가족들은 험난한 여정 속을 공유하며 찰진 반죽처럼 서로를 끌어안는다. 클러치가 고장난 고물 밴을 함께 밀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하는 밴을 좇아 달려오는 이들을 붙잡아 차 안으로 끌어주는 가족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따뜻한 가족애를 선사한다.
<가을로>
봄이 여름으로 피어나는 소생기라면 가을은 겨울로 저무는 소멸기다. 완연한 초록잎들이 고개를 떨구고 갈색으로 낙하하는 하강의 계절. 마치 저물어 가는 인연의 끝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처럼 이별을 준비하는 쓸쓸하고 고요함처럼, 거친 바람을 견뎌내기 위한 대자연의 섭리처럼 보다 강인하게 1년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가을로>는 예감할 수 없었던 연인과의 이별을 맞이해야 했던 한 남자가 연인이 남기고 간 다이어리에 기록된 자취를 홀로 더듬어 가는 여행기다. 소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윤회하듯 돌아오는 계절처럼 침전되고 퇴적되는 기억 안에서 인연은 지고 핀다.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과 같은 여정을 따라 걷던 남자는 그 길 위에서 상처 입은 시간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돋아난 희망을 마주 하며 비로소 내일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잡고 걸어나간다. 울퉁불퉁한 길을 포장하듯이 지난 추억 위로 내려앉은 추억은 삶을 매만지고 보살핀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견뎌야 하듯, 아픔도, 슬픔도, 이겨내야 할 시간이 있음을 말하는 <가을로>는 마치 단풍처럼 곱고도 절실한 여운을 남긴다.
작두 타고, 굿판을 벌이며 온몸으로 귀기를 발산하던 전통무속과 달리 요즘 점집은 캐주얼하고 멀티플렉스적이다. 무당과 타로 마스터가 한 건물에 입주해서 팀웍을 이룬다. <청담보살>은 그런 트렌드를 소재적으로 반영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운명적 배필을 만나야만 삶이 풀린다고 믿는 미녀보살 태랑(박예진)은 비전이 전무해 보이는 백수 승원(임창정)이 자신의 운명적 상대임을 알게 되고 작업(?)에 착수한다. 사실상 과장된 상황극이 주를 이루는 <청담보살>은 연출력이나 개연성보다도 순발력에 의존하는 코미디다. 덕분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멜로적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감정은 좀처럼 와 닿지 않으며 전반적인 사연 역시 유치하게 건들거리는 탓에 로맨스 자체가 사족같다. 재치를 발휘하는 배우들의 애드립에 의해 유머가 작동하지만 그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운명적인 상대에 천착하던 보살이 결국 그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게 된다는 외피적 설정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후반부는 온전히 넌센스다. 단지 몇몇 배우들의 애드립에 만족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관객에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은 좀 길어 보인다.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에 의지한 채 감춰진 과거를 찾아 서울공항에 내려선 메이(성유리)는 길가에서 차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은 택시기사 은설(장혁)에게 손을 붙잡힌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은설의 손을 뿌리치려던 메이는 은설이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누군지 알 길이 없는 택시기사 은설은 심장이 언제 멈출지도 모를 ‘민히제스틴 증후군’이란 보기 드문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죽음과 직면하듯 살아가는 남자와 본의 아니게 상실한 과거를 되찾고픈 여자, 기구한 현실에 놓인 남녀는 운명적으로 손을 잡는다.
핸들을 붙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의 간절한 표정이 의문을 자아낸다. <토끼와 리저드>는 결말부의 한 조각을 떼어내 전진배치하고 이를 통해 유효해진 물음표의 정답을 찾아가는 멜로적 여정이다. 형태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토끼와 리저드>란 제목은 두 남녀의 트라우마와 연관된 두 마리의 동물을 나열한 것이다. 유년시절 기억에 남겨진 ‘빨간 토끼’를 찾아달라는 은설이나 어깨 뒤에 ‘도마뱀(lizard)’모양의 긴 흉터를 지닌 메이에겐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고통이 존재한다. <토끼와 리저드>는 두 남녀의 트라우마에 얽힌 운명론적 인연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그 상처마저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궁극적으로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모든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토끼와 리저드>는 결국 숨겨놓은 서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지속적인 극적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우연한 만남 뒤 필연적인 재회를 거듭하며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남녀의 인연은 결국 운명적 관계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정체된 듯 미약하게 진전되는 남녀의 관계가 망각된 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결말부는 <토끼와 리저드>가 다다르고자 하는 성취적 결과나 다름없다. <토끼와 리저드>의 관건은 사연의 핵심이 드러날 결말부에 다다르기까지 암시적 상황을 제시하며 극적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놓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토끼와 리저드>는 답보적으로 진전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을 설득시키는데 미숙한 멜로다. 영화는 온전히 캐릭터의 행위나 태도만으로 그 순간의 감정을 곧잘 묘사할 뿐, 캐릭터의 감정에 조언적 역할을 하는 상황을 제시하거나 연출적 뒷받침을 가미하지 못한 채 온전히 캐릭터가 자아내는 순간의 감정들을 방치하고 휘발시켜버린다. 사실 <토끼와 리저드>는 극적 의문을 해결할만한 결정적 서사를 감춰두고 서사적 진전과 함께 공개되는 기억의 너비를 늘려나가고 이를 통해 결말부에 등장할 결정적 순간의 목도까지 기다릴 관객의 인내심을 확보해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대단한 감흥을 부를 만큼 인상적인 사건을 전개하지 못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단순히 두 인물간의 감정적 마찰만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나가려는 듯 단조롭고 심심한 영화다.
자연광을 적극 활용한 투명한 이미지와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화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종종 희미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이란 수사는 무색하고 사연은 지극히 작위적이며 감정은 얕아서 마음을 담기 어렵다. 제목의 모호함만큼이나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영화에서 두 남녀 배우는 적절히 제 몫을 다 한다. 다만 두 배우의 기능적인 연기를 좀처럼 감정적으로 보좌해주지 못하는 영화 덕분에 캐릭터마저 겉도는 인상을 준다. <토끼와 리저드>는 서사적 배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확장하지 못한 채 그 단편적 찰나에 기댄 채 사연만 늘려나간 형태로서 감상을 느슨하게 만드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그 지난한 운명적 예감을 실체로서 공개하는 결말부도 딱히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좀처럼 설득력 없는 감정들이 느슨하게 전시되다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실체가 별다른 파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명백히 실패한 멜로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