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도 좋구나. 처음으로 나가는 해외가, 그것도 출장이 피렌체라니.” 한 선배가 말했다. 그렇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20대 끝자락에 찾아온 생애 첫 출국에 대한 심정이란 1%의 설렘과 99%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처음으로 떠나는 외국에서 혈혈단신 파리를 경유한 뒤,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막연했고, 불안했다. 파리 공항에서 로마행 비행기를 경유하기 위해 긴 출입 통로를 홀로 걷다가 문득 뒤돌아봤을 때 아무도 없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치 미아가 된 것 같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하지만 경유를 위해 공항에 홀로 머무르는 동안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알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로마 공항에 당도해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타고, 비로소 기차를 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헤매다가도 물어물어 방향을 찾았고 그럭저럭 당도했다. 비로소 피렌체에 두 발을 디딘 건 새벽 2시경.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었는데 수중에 담배가 없기에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한 외국인에게 담배 한 대를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브라질산인데 조금 독하다는 충고와 함께 흔쾌히 담배 한 대를 건넸고, 잠깐 대화를 나눴다. 이국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그러곤 택시를 잡아타고 피렌체의 피에솔레 언덕 위에 자리한 호텔에 도착해서 피로를 씻어내고 몸을 뉘고 보니 장장 20시간에 달하는 여정이 꿈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밤 꿈을 꾸진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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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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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출간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와 인도, 발리를 도는 1년 여간의 여행을 거친 원작자의 기행적인 감상과 성찰을 담은 이 작품은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이하, <먹기사>)라는, 원작과 동명으로 발표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원작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 깨달음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대가 영상 안에서도 유효한 감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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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등불이었다. 첨예한 첨탑의 시대를 벗어나 유연한 아치의 시대로 돌아가는 르네상스의 태반이었다. 일 살비아티노는 고전적 우아함과 현대적 세련미가 어우러진 호텔이다. 르네상스의 중심에서 르네상스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그 자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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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왔다. 피렌체를 보고 왔다. 다녀 오니 남는 건 흩어져 나갈 기억과 그 기억을 조금이나마 붙들어줄 사진들이더라. 사진은 많이 찍어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고, 할 말도 너무 많아서 기록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당장 급한 마감이 끝나면 적당히 여행기를 정리하고 사진도 정리할 생각이다. 그냥 버려두고 방치하기엔 큰 경험이었고, 좋은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피렌체의 두오모를 오를 날이 올 거란 생각은 한 적 없다. 현실은 때로 꿈꾸지 못한 것들을 이루게 함으로서 무언가를 꿈꾸게 만든다. 그런 날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시 내 삶이 놓인 곳으로 돌아왔고 다시 복잡하게 살 것 같다. 꿈 같은 시간은 지났고 난 다시 현실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꿈은 유효하며 그 꿈이 있을 때 삶이 보다 나아질 수 있음을 알았다. 난 아직 어리고 짧은 사람이지만 이 짧은 여행이 내 자그마한 나이테의 동선을 조금은 넓혀주지 않았을까, 문득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돌아왔다. 뒤늦게 새삼스럽지만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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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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