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세계 ‘아스가르드’를 통치하는 최고신 오딘(안소니 홉킨스)은 군대를 이끌고 난폭한 거인족의 수장 라우페이가 이끄는 ‘요툰하임’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구한다. 오딘의 통치 아래 오랜 평화를 맞이한 신계는 오딘의 첫째 왕자 토르(크리스 헴스워드)에게 절대무적의 병기 ‘뮬니르’를 하사하는 왕위계승식이 있던 날, 갑작스러운 요툰하임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다. 왕위 계승식을 방해 받게 된 토르는 불 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딘의 명령과 주변의 만류를 어긴 채, 동생 로키(톰 히들스톤)와 동료 전사들을 규합해서 요툰하임을 공격한다. 결국 이에 격분한 오딘은 토르로부터 뮬니르와 힘을 빼앗은 뒤, ‘미스가르드’ 즉 지구로 추방한다.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인간과 닮은 호전적인 신들이 등장하는 북유럽 바이킹 신화에 기초한 슈퍼히어로물 <토르>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그리고 (차후에 <퍼스트 어벤저>라는 제목의 영화로 공개될) <캡틴 아메리카> 등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꼽히는 작품이다. 번개를 다스리는 북유럽 신화의 수장 토르는 그리스 신화에 빗대자면 제우스 격에 가까운 최고신이다. 동시에 마블코믹스의 라이벌격인 DC코믹스의 히어로 캐릭터 중,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에 대적할 수 있는 마블의 히어로이기도 하다. 사실 코믹스물에서 묘사되는 토르는 본래 호전적인 신화의 양태와 달리 기독교적인 희생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영화 역시 이런 측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토르는 이국의 오랜 신화의 외형을 빌려서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한 사생아 같은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화와 원작을 떠나서 <토르> 자체에 집중해 보자면, 이 영화는 토르라는 캐릭터가 겪는 질풍노도의 성장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벤저스>의 전초전 성격에 가까운) <토르>는 토르의 본격적인 활약상을 선보이기 전에 캐릭터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일종의 캐릭터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마블 슈퍼히어로 올림픽이라 해도 좋을 <어벤저스>로 가는 수순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씩 스크린에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토르> 역시 이 캐릭터에 대한 심오한 치장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벤저스>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매니아들과 캐릭터의 기원조차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관객들 사이에서 감상의 편차가 발견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토르>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라는 엔터테인먼트적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다. 신계와 인간계, 즉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카메라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계의 풍경과 북유럽 신화를 고스란히 차용한 특별한 아이템들을 전시하며 자신만의 볼거리를 과시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만남, 초자연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대비적 특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토르와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인연을 통해 멜로적인 드라마를 구축하고 이런 감정선을 토대로 성장드라마의 노선을 밟아나간다. 또한 전시 수준에 가까운 선악의 극명한 대비도 오락적 취향의 갈등을 삽입한 의도로 보이며 이 역시도 깊은 수준의 감정을 잉태할만한 자질은 엿보이지 않지만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 즉 거대한 계획을 염두에 둔 소품적인 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얄팍함이 용인되지 못할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CG로 완성한 가상적인 이미지의 전시력에 비해서 액션 시퀀스의 파괴력이 미흡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자질을 충분히 설명해내는 수준을 유지해낸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잘 해석해내는 감독으로 꼽히는 케네스 브레너의 재능이 보다 탁월하게 반영될만한 슈퍼히어로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어쨌든 마블 코믹스가 잉태한 슈퍼히어로 올스타전이라 불려도 좋을 <어벤져스>의 영화화를 계획한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초전이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슈퍼히어로 무비의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는 시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이하, <토르>)은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구체화된 마블의 슈퍼히어로 대통합전을 위한 또 한번의 전초전이다. <어벤저스>로 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이 작품이 토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섭섭하다면 2년여 간의 유예 기간을 기다릴 것. <어벤저스>의 문을 여는 캐릭터가 토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진짜 활약상을 볼 기회는 여전히 유효하다. <토르>는 진정한 토르를 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무지개 다리, 즉 아스가르드의 ‘비프로스트’라는 말이다. (그래도 스크린에서 구출해오고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비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안티크라이스트 일명 적그리스도, 이 불경한 언어를 제목으로 내건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불순한 기운이 그득하다. <파리넬리>를 통해서 유명해진, 바로크 작곡가 프레데릭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2막에서 등장하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도입부는 강렬한 성애에 빠진 두 남녀의 섹스를 유려한 고속촬영의 방식으로 포착한 뒤, 투명한 흑백의 색감으로 포장해낸다. 그 욕망이 절정의 쾌락으로 분열되는 오르가슴의 찰나를 공유한 부부는 동시간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삶의 균열로 빠져든다. 극렬한 성욕 속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을 방치하게 된 부부의 일상은 점차 우울과 무기력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광기로 침전돼 간다.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4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영화의 서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밑천으로 삼아 점차 흉악한 분위기로 발전돼 나간다.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점차 비이성적인 광기로 뻗어나가는 아내(샬롯 갱스부르)의 행위와 이를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남편(윌렘 대포)의 관계는 행위자와 관찰자의 단계를 넘어 가학과 피학의 상대자로 진화한다. 이는 성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상대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희열을 느끼는 새디즘과 매조히즘의 대비적인 양상까지 맞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학과 피학의 대비적 상징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이성적인 (척 하지만 실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남성과 비이성적인 광기로 물들어가는 여성의 대비를 통해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은유로 가 닿는다.
‘자연은 악마의 교회’라 일컫는 <안티크라이스트>는 종교모독이라는 주제를 건드릴만한 요소로 치장돼 있으나 이를 단순히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겨냥이라 국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신앙에 가까운 인간의 이성적 신념이 무지한 광기로 변질되는 과정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자 상징과 은유를 동원한 독설에 가깝다. 11세기 중세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 시절의 광기 어린 역사를 배경으로 둔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가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성을 무기로 둔 한 남성이 피라미드를 그려나가며 여성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악마적인 본성과 연결해나가는 과정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둘러싼 광기의 매커니즘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의 기득권으로 무장한 사회 전반에 대한 공격적인 은유처럼 보인다. 특히 에필로그로 명명된 엔딩 시퀀스는 이런 영화적 메타포를 블랙코미디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포르노 배우를 대역으로 삼아 촬영했다는) 성기 노출과 삽입 신을 비롯해서 (언론시사회에서는 공개됐지만 정식 상영본에서는 삭제된다는) 여성의 성기 절단을 비롯한 극악한 신체 훼손 신 등, 당신의 자극적 역치를 시험에 들게 할만한 몇몇 장면이 존재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단순히 극악무도한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라 폄하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성의 껍데기가 벗겨진 채 쾌락과 생존이라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남겨진 남녀의 끔찍한 양상을 묘사하는 과정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힘의 본질과 이성적 무기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적 행위를 비롯한 폭력의 상응까지, 극단적인 광기와 함께 가학과 피학의 매커니즘에 갇힌 남녀의 양태를 묘사하는 영화는 문명과 이성이라는 제어로부터 발가벗겨진 인간의 본질이 이토록 손쉽게 파괴될 수 있는 나약한 것임을 강렬하게 조명한다. 광기란 결국 순수한 극단의 소산이다. 정이든, 반이든, 가학과 피학은 어떤 식으로든 합의 광기로 통하게 돼있다. 그것이, 아니, 그것도 결국 인간이다.
한 남자가 있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인텔의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진짜 존재감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그는 언제나 틈나는 대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가 정해놓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생의 쾌감을 좇아갔다. 그런 어느 날처럼 그는 무작정 유타주의 블루존 캐넌으로 도보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동행을 만나 자신만의 루트 안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쾌감을 안긴 뒤, 또 다른 영역으로 혼자 떠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던 그 사내는 위풍당당하게 협곡을 건너기 위해 틈새에 놓인 바위 위에 발을 내디딘다. 순간 발을 지탱하던 바위가 떨어졌고 그는 협곡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협곡 사이에 끼인 바위 틈새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통증보다도 경악스러운 건 결코 손을 뺄 수 없다는 것. 누구도 찾지 않는 깊은 협곡 속에서 오른팔을 볼모로 남자는 갇힌다. 그리고 결국 그 남자는 127시간을 버티다 자신의 괴사된 오른팔을 잘라내고 사막을 걸어 나와서 비로소 구조된다. 이는 실화다. 아론 랠스톤이 바로 그다.
15분. <127시간>이라는 영화의 타이틀은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렸을 즈음에서나 떠오른다. <127시간>은 거기서 시작되는 영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새롭게 구축해내는데 성공한 대니 보일은 <127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동시에 서사적 구조의 운용력을 탁월하게 검증해낸다. 실화에 바탕을 둔 <127시간>은 그 사연만으로도, 오른팔을 잘라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냈다는 어떤 남자의 진짜 사연만으로도 특별해질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대니 보일의, 그리고 제임스 프랭코가 연기한 <127시간>은 단지 그 사연을 재현한 영화라는 것으로만 언급될 작품이 아니다. 혹은 대니 보일의 스타일리쉬한 영상, 제임스 프랭코의 괄목할만한 연기, A.R.라만의 탁월한 음악도 주인공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그 남자의 생이 증명한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오른팔이 협곡과 바위 사이에 끼인 채, 협곡에 갇힌 남자가 탈출하기까지 견뎌야 했던 127시간의 여정을 90여분의 러닝 타임 내에 녹여낸 <127시간>은 사실 어느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매우 심심해 보이는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 최근 개봉된 <베리드>와 비교되기도 하는 -대조가 아닌- 이 작품은 하나의 공간에 놓여 있으나 그 공간적인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내는, 어쩌면 그것을 통해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여기던 사내가 좁은 협곡에 갇힌 채 자신의 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야금야금 좀먹어 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오른팔을 버리는 자해에 가까운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구원하게 된다는 과정을 재현하는 <127시간>은 단지 아론 랠스톤이라는 실화적 인물을 위한 장이 아니다.
<127시간>은 단지 어느 한 인물의 극한에 다다르는 자기 극복의 체험기가 아닌, 극한의 위기 속에서 생의 끝에 다다를 수도 있었던 어느 한 인간의 승리를 전 인류적인 승리로 승화시키는 작품이다. 협곡과 바위 사이에 끼인 자신의 오른팔을 빼내고자 안간힘을 쓰던 아론이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며 버티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당연하다 여기던 햇살 한줌의 은혜와 가족이라는 존재의 위안을 깨닫다 결국 생을 위해 자신의 오른팔을 버리고 지상으로 올라와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을 되찾고 그 이상의 생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란 그 참담했던 지난 날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자신의 팔을 자르는 남자의 모습이 처참하기 보단 통쾌함으로 느껴진다는 건 <127시간>이 그만큼 인간의 한계, 즉 자기 육체의 일부를 포기하고서도 생의 전부를 놓을 수 없다는 인간의 집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쾌감 덕분일 것이다. 이는 육체의 일부를 상실하고도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는 것과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완전한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에서 벗어나서도 결과적으로 삶은 가능한 것이라는 일종의 완전성에 대한 해방감이 전달된다. <127시간>은 그 실화 자체가 주는 일종의 경이감을 보다 현실적인 체험 혹은 체감으로 전달하는 진정한 인생실용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대니 보일의 스타일리시한 감각은 <127시간>에서도 빼어난 능력을 자랑한다. 분할컷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중간중간 다각도의 시점으로 상황을 묘사해내는 연출력은 <127시간>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영화에 역동적인 인상을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뛰어난 자질이다. 또한 홀로 협곡 속에 갇힌 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감정적 변화를 겪은 실존인물을 대신해 그런 과정을 생생하게 대변해낸 제임스 프랭코의 연기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127시간>을 이루는 모든 훌륭한 요소들은 하나 같이 어떤 하나의 의미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들에 가깝다. 그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다. 식상하고 지루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127시간>은 그 심플한 사연을 이토록 거대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영화다. 놀라운 실화의 의미를 넘어선 그 의미를 재발견하고 보다 쉽게 이해시킨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실화다. 적어도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조작된 사연이 아니다. 그러니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오른팔을 내주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건 바로 지금 당신의 삶이다.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첨단 로봇의 시대. <써로게이트 Surrogate>는 본래 단어의 의미처럼 ‘대리자’로서 기능하는 로봇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인간을 대신한 로봇의 육체가 주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집에 누운 채 두뇌활동만으로 로봇을 조종한다. 덕분에 인간이 자취를 감춘 거리엔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인공피부를 두른 로봇들로 가득하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얼짱이 될 수 있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몸짱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단순히 대리적 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교감마저 주인과 공유할 수 있는 써로게이트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체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대리인이다.
취재와 인터뷰 영상을 거칠게 편집해 서사적으로 배열한 도입부는 <써로게이트>가 주창한 세계관에 대한 객관성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써로게이트를 혁신이라 일컫는 생산자와 몇몇 과학자, 그리고 써로게이트의 반대편에 놓인 세력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써로게이트>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부각시킨다. 써로게이트가 개발되어 인류의 범죄율이 완벽히 사라졌다는 17년 간의 서사를 간략히 정리하는 도입부를 넘어 현재에 다다르며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써로게이트>는 정체불명의 살인사건을 묘사하며 의문스럽게 본론으로 들어선다.
주인과 교감하되 피로나 충격을 전달하지 않는 로봇의 형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만약 이 기술이 현존한다면 인류의 삶은 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상 가능성이 높은 고난이도 작업에 인간 대신 써로게이트를 조종시킨다면 일의 정밀도는 높아지고 인간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써로게이트>에서의 써로게이트는 특정한 기능적 작동을 위해 마련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온전히 인간의 삶을 대신하다 못해 장악해버린 로봇의 도시에서 집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써로게이트>는 고의적으로 비관적인 감상을 도모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행동범위를 온전히 기계에게 양도해버린 인간들의 삶은 편리라기 보단 일종의 포기처럼 보일 정도로 기계에 예속된 삶을 산다. 그건 어쩌면 기계라는 숙주에게 육체를 강탈당한 채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육되는 인간들의 비관적 미래를 그린 <매트릭스>를 응용한 버전처럼 보일 정도다. 궁극적으로 써로게이트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문명에 의해 점령당한 인간들의 미래를 그리는 SF묵시록과 궤가 다르다. 타의적으로 삶을 빼앗긴 인류의 양상과 달리 자의적으로 삶을 양도한 인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리적 삶을 향유한다. 이는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를 배제한 채 온전히 정신적 활동에 기댄 인간의 삶이 과연 완전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써로게이트’는 그 상상력에 제기되는 현실성의 의문을 집요하게 따져 묻지만 않는다면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이루는 소재라 할만하다. 혈색 없는 표정으로 인간의 움직임과 감정마저 대신하는 기계적 육체는 그로테스크한 감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 존재적 형태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인간의 뇌파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로 작동하는 써로게이트가 인간의 모든 대리적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써로게이트>의 설정은 개인적 범위와 사회적 범위에서의 접촉과 고립을 통해 다양한 감정적 양상을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 만한 것이다. 다만 그 자질을 <써로게이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건널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의 일상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써로게이트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에 품을 만한 의심을 묵과한다 해도 그 기술이 완벽하게 보편화된 인류의 풍경은 지나친 허풍에 가깝다. 현실적 여건에 대한 물음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행적 풍토가 현상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풍경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영화적 설명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설정에 대한 의문은 스토리의 진전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될만한 것이다. 범죄수사물의 형태에서 음모론의 양상으로 발전해나가는 스토리는 적절한 설득력을 등에 업고 진전된다. 결국 기이하게 통용돼버린 기이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인, 그리어(브루스 윌리스)의 감정적 자각과 충동은 정착된 세계관의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건한 것이라지만 실상 그 감정을 세계관의 전복으로 활용하는 영화적 태도가 지나치게 안이한 탓에 특별한 의미 자체를 무마시킨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서 버리는 광경을 설득력 있는 것처럼 관람하길 강요하는 느낌이다.
<써로게이트>는 세계관에 대한 디자인에 심취해 그럴듯한 이미지를 구사할 뿐, 그 구동방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아이디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건 표면적인 설정에 대한 강요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인 설정에 적절한 설득력을 내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껍데기를 만끽하는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인류와 대비되는 대리 로봇의 존재를 통해 휴머니즘적 성찰까지 경유하고 액션영화로서의 묘미까지 내달리곤 하는 <써로게이트>의 재원적 야심은 부실한 설계도 덕분에 일거에 무마된다. 설득력이 부족한 세계관 덕분에 기초적인 아이디어로부터 얻어지는 흥미는 손쉽게 휘발된다. 특히나 상투적인 결말은 <써로게이트>가 지극히 안일한 영화임을 인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주름이 선명한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만이 추억을 자극할 뿐이다.
밀착한 남녀의 육체가 전후로 흔들릴 때마다 남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새어 나온다. 막 섹스를 마친 남녀의 표정만으로도 절정의 환희가 느껴진다. 하지만 육체적 쾌락이 끝난 직후, 현실적 고민이 그들의 침대를 덮친다. 현실적 물욕 앞에서 육체적 쾌락의 잔상이 손쉽게 걷힌다. 그리고 30분 후,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가 마련했던 어떤 비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되레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극이 예감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라는 중후한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힌 형제의 공모로부터 시작되는 가족의 파멸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비극의 방아쇠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혼한 전처와 딸로부터 무시당하는 행크(에단 호크)는 자신의 무능력을 극복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형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던진다. 동생과 달리 반듯한 직장의 중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앤디 역시 당장 거액의 돈을 마련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형제는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결국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된다. 잠깐의 긴장감을 견디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큰 행운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꿈이 박살나고 결코 맞이해선 안될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드러난다. 형제의 공모가 비밀로 움트는 사이,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이 뿌리를 내려가며 파멸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난다.
<악마가>는 플래쉬백을 적극 활용하며 지속적으로 서사를 재구성한다. 서사의 변화와 함께 서사를 지배하는 시점이 이동한다. 30분 후로 점프컷하는 초반의 단 한번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진하는 서사의 중심에 놓인 인물을 갈아입으며 5번에 걸쳐 플래쉬백된다. 전진하다 뒷걸음질치는 서사는 사건의 전모를 천천히 드러내며 사건에 연루된 인물 제각각의 사연을 수집해나가고 이를 통해 <악마가>는 영화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구축한다.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하나의 면처럼 이어 만든 입체도형의 형태로서 영화를 완성해나간다. 행크와 앤디의 시점이 교차되던 영화가 그들의 아버지인 찰리(알버트 피니)의 시점으로 옮겨 마침표를 찍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서사는 원인에 대한 의문을 결과까지 이어나가며 시작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의 에너지를 보존한다.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1975)와 <네트워크>(1976)와 같이 사회를 관통하는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과거의 영예를 누렸으나 현대에선 점차 잊혀지던 시드니 루멧은 2007년에 발표한 <악마가>를 통해서 영광의 시계를 현재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악마가>는 팔순을 넘긴 노장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신선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기품 있는 연륜이 깊게 배어든 중후한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시종일관 중후한 극적 무게를 보존하는 동시에 고조된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특히 심장박동기의 신호음을 이용해 긴박하면서도 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결말부는 <악마가>의 클라이맥스로써 손색이 없다. 어떤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발견되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백미다. 특히 온화한 미소 너머로 점차 불안의 기색을 방출해내면서도 대범하게 움직이는 앤디를 연기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표정은 <악마가>의 심리적 깊이를 대변하는 바다와 같다. 반대로 초조하게 흔들리는 에단 호크의 표정은 영화의 불안한 심리를 출렁이게 만들고, 알버트 피니는 단호한 중압감을 더하며 마리사 토메이는 관능과 허무를 동시에 이끈다.
<악마가>는 흉악하고 퇴폐적인 사회를 고발하고 있지만 근엄한 기운을 잃지 않는 중후한 영화다. ‘하나씩 더해도 완벽해지지 않는 삶’을 떠도는 도시의 양자들은 결국 끝없이 더해지는 욕망에 이끌려 천천히 파멸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앤디의 제안을 받은 행크의 불안을 잠재우는 건 다름 아닌 지폐이며 행크의 제안을 받은 바비(브라이언 F. 오바이런)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 또한 지폐다. 양심과 공포를 잠재우는 건 물질적 욕망이다. <악마가>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 본연의 존재적 가치를 망각한 이들의 삶이 향한 본질적 비극을 향해 전진하는 가족드라마다. 지독하게 흉악하고 끔찍한 스토리는 현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폐부를 정확히 찌른다.
개인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결국 가족은 붕괴된다. 이는 결국 극악하게 타락한 세태를 대변한다. <악마가>는 결국 중후하고 세련된 영화적 양식을 통해 충격적인 현실의 세태를 놀라운 방식으로 고발하는 영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천국으로 가 있기를(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근사하면서도 엄숙한 제목을 포함한 이 문구는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흉악한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비통한 기도와 같다. 그리고 <악마가>는 그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뜨거운 시선이자 깊이 전해 들어야 할 비장한 묵시록이다.
정체불명의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엔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 숫자들은 인류에게 찾아올 재앙을 예언하는 암호와 같다. 1959년 메사추세츠의 초등학교에서 개교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묻었던 타임캡슐로부터 50년 만에 발견된 종이엔 지난 50여 년간 전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을 예언한 숫자들로 채워져 있다. 문제는 그 외의 숫자들이다. 지난 50년 간 발생했던 재앙을 지목하는 숫자들 외에 다가올 재앙을 가리키는 숫자들이 있다는 것. 다가올 재앙의 정체를 반신반의하는 사이 끔찍한 예감은 실재가 된다. 재앙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는다. 예언이 작동한다.
“모든 것은 이미 의도된 순서대로 이뤄진다.”“모든 것은 의미나 의도가 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대립적인 관계에 놓인 두 주장은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통해 서로를 마주본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 근거가 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그 결과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없다. 예상되는 결과를 안다는 것이 무력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를 이룰 수 없을 때 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보다도 무기력하다. 특히나 그것이 거대한 재앙이라 할 땐 더더욱 참담할 뿐이다. <노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을 알게 된 인간이 그 앞에서 체감해야 할 스스로의 무력함을 어떤 방식으로 수긍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음모론처럼 시작되는 영화는 종말론에 다다른다. 지적인 추리를 요구하는 척하지만 결과적으론 종교적 성찰에 가깝다. 어쩌면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노잉>은 어느 재난 영화와 판이한 방식의 블록버스터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 보단 어떤 방식으로 그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해진다. 극복이 아닌 체념으로, 그리고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는 이들의 운명을 그린다. 예언서는 재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안이 아니라 그 재난이 부를 거대한 화를 미리 각오하게 만드는 선언과 같다. 그 이전에 두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 재난은 어느 블록버스터들과 마찬가지의 태도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유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 선연한 재난은 <노잉>을 온전히 실존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과학적 이론부터 지적인 추론, 그리고 장황한 스토리까지, <노잉>은 수많은 정보를 다룬다. 그만큼 <노잉>은 관객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좋은 영화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를 발췌하는 건 딱히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정보는 때때로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탓이다. 그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정보를 수집할 필요 없이 스토리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넘쳐 보내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정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영화는 비단 스크린 너머의 결과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실현하지 못할 것 같은 결과를 영화적 관성을 밀어붙여 끝내 이루고야 만다. <노잉>은 블록버스터의 탈을 쓰고 있지만 철학서마냥 진지한 사유를 요구한다. 압도적으로 끔찍한 결말의 영상은 대단한 스펙터클을 완전한 비극으로 절감하게 만든다. 엔터테인먼트의 속성으로 체험할만한 영상이라 말하기엔 단연 비극적이다. 짜릿하기 보단 끔찍하다.
그 너머에서 우린 새로운 물음을 얻는다. 스스로의 멸망을 통해서 대안이 발생한다면 그 희망을 긍정할 수 있나? 어려운 물음이다. 그 즈음에서 어쩌면 생각해야 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우린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세계의 멸망과 함께 죽어 없어질 운명에 처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노잉>은 그 거대한 이미지를 동원해 대단히 절박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똑똑해지는 것보다도 현명해진다는 건 실로 어렵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엄적 고민이란 점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의 가치란 희귀하여 값진 것이다. 그만큼 <노잉>은 보기 드물게 현명한 블록버스터다.
신호등의 붉은 정지 신호에 멈춰있던 차들이 신호가 바뀌자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그 가운데 분위기 파악을 못한 듯 차 한대가 길을 막고 서서 뒤차들의 성화를 얻고 있다. 이상한 낌새에 웅성거리던 사람 몇몇이 도로를 가로질러 멈춰선 차 옆으로 다가선다. 운전석에 앉은 일본인 남자(이세야 유스케)에게 다가간 행인들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남자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시작임을. 상황은 그렇게 사소하고도 갑작스럽게 이뤄진다.
영화는 희뿌옇게 표백된 듯한, ‘우유의 물결’이라 표현되기도 하는 눈먼 자들의 시점을 종종 스크린에 투영하며 극중 인물들의 비극을 실감케 한다. 성별, 나이, 직업 따위와 무관하게 그 도시-어쩌면 온 세상-의 인간들은 눈이 먼다. 보지 못하는 이들의 세계 속에 볼 수 있는 한 사람이 고립됐다. 정부는 눈먼 자들을 병동수용소로 격리시키는 정책을 발효한다. 눈먼 남편(마크 러팔로)을 따라 수용소로 들어온 여자는 성녀처럼 눈먼 이들을 돌본다. 홀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자(줄리안 무어)만이 그 도시의 변화를 지켜본다. 시력을 상실한 인간들로 채워진 수용소는 이전 세계와 구분되는 새로운 세계다. 과거 그들이 지녔던 사회적 지위나 능력에 따른 개개인의 품위는 소멸되고 그들은 서로 육체만이 유일한 눈먼 인간으로 만난다. 결국 알력이 발생한다. 뒤늦게 타병동에 입소한 남자는 자신이 소유한 권총으로 폭력적인 협박을 서슴지 않으며 수용소를 장악한다. 수용소로 유입되는 식품을 독점하여 수용소를 통제한다. 민주주의적인 다수결로 유지되던 협약은 군주제적인 폭압에 짓눌린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위협 속에서 사람들은 무력해진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원제: ‘Blindness’)는 제목처럼 어느 도시의 눈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처럼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도 이름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도, 사람도, 심지어 해당연도에 대한 일말의 정보조차 없다. 그 도시의 서사는 불분명하고 일방적인 은유의 영역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도시는 모든 사회가 품은 정치적 오류를 메타포로 끌어안는다. 과학적인 증명이 동원되지 않는 그 상황 자체가 거대한 사회적 실험극을 연상시킨다. 이는 인간 개인의 본성에서부터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관통한다. 시력을 상실한 도시의 인간들이 문명의 중심에서 야만의 행위를 거듭하는 광경은 충격을 동반하는 상식이다. 이성적인 제도와 규약으로 지탱되던 커뮤니티의 질서가 통제의 기능성을 상실했을 때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원작 소설을 읽은 이에게 <눈먼자들의 도시>는 이미지로 구현된 텍스트를 지켜보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는 소설의 문맥을 충실히 받들고 있다. 텍스트로 이뤄진 맥락들이 다양한 해석적 기반을 두르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가능성을 단순히 이미지로 나열하는 성과로 축약해버린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전지적 시점을 유지한다. 생경하게 도시를 바라보며 시작되는 초반부부터 내러티브를 동원해 귀결되는 말미까지 전지적 시점을 고스란히 밀고 나간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묘사하는 텍스트는 불확실성을 통해 상황의 끔찍함을 증폭시키지만 영화는 선명한 이미지로 상황의 추이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재난영화적 이미지는 정치적 메타포를 휘발시키고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까지 희석시킨다. 해석의 여지는 줄어든 만큼 관람의 욕구로 채울 수 없는 빈틈이 노출된다. 그 와중에 일본인 부부 캐릭터까지 배치하며 원작에 비해 지나친 사실성을 가미한다.
물론 <눈먼자들의 도시>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도시의 인간들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눈이 멀어버린다는 묵시록적인 설정이 그 상황 자체를 묘사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다만 그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들에 비해 영화의 성취는 미약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원제 ‘Seeing’)가 실명 상태에서 벗어난 도시인들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의 본질은 더욱 확고해진다. 반면 <눈먼자들의 도시>는 그저 거대한 해프닝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좀비 같은 인간들이 가득한 유령 같은 도시만이 이색적으로 펼쳐질 뿐, 백색테러의 은유를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선명한 이미지는 희미한 텍스트보다 많은 것을 놓쳤다.
2박3일간 동원훈련을 다녀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곳이 나름 빡센 일정을 잠시 접고 잠깐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도피처가 됐다. 하지만 그 무료함에 몸을 배배 꼬다 이상하게 생긴 스크류바가 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탈출한 것 같다. 아무래도 빡센 자유가 한가한 무자유보단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그 폐쇄적인 환경의 본질이 무엇인가였다는 생각. 끊임없이 자고 또 잤음에도 정신교육 시간은 길고도 험했다. 자다 지쳐서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실수로 뜬 눈을 한 채 교육을 받았다. 기억나는 건 이 구절이다. 전쟁이 나면,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그래. 우린 전쟁을 대비해야 해. 수비는 최고의 공격이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위해서 우린 최고의 살수를 몸에 익히고 그것의 중요성을 열심히 설득당한다.
아, 물론 전쟁 따위는 결코 중요치 않아!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단지 인간이란 게 이딴 식으로 아이러니하게 생겨먹었다는 거지. 어쩌면 이 지구상 최대의 비극은 스스로 엄청나게 똑똑한 존재라고 믿는 인간이 선량한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자연을 무참히 지배하고 군림한다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언제나 생존을 위해서 무언가를 파괴하고 학살한다. 그것이 동족이라 할지라도 본능을 넘어선 이기로 무언가를 통치하려 든다. 모르겠다. 그 아이러니를 우린 너무 쉽게 수긍하고 있는 게 아닌지.
존 레논과 요코가 꿈꾸던 평화의 침대는 안드로메다 어딘가를 유영하는 외계 언어처럼 생경한 거다. 어쩌겠나. 인간이 이렇게 삭막한 걸.
음, 닥치고 동원 핑계로 마감하지 못한 글들이나 열심히 써제껴야 겠다. 일은 해도해도 줄지 않고 나날이 쌓인다.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리고 영화가 누려지는 것도 아닌데, 몸은 고달프다. 생각해보니 인간이 삭막하다 말하기 전에 지독하게 삭막한 제 일상부터나 어떻게 잘 마감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