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시선이 공허하다. 두서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어디론가 밀어내고 있다. 멀리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곧 여인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맺힌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서 길을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현실을 체감한다. 숨기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먹는다. 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인의 귀 속으로 사이렌 소리들이 들어찬다. 그리고 떠오른다. 묵묵하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만추, Late Autumn. 그렇게 영화는 관객 앞에 떠오른다.
(필름 원본이 유실됐다고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 감독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는 바닥으로 나뒹구는 낙엽이 되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을 빨갛게 물들이며 강렬하게 마지막 삶을 치장하는 단풍과 같은 멜로다. <만추>는 살인죄로 체포돼 수감된 여인이 어머니의 부음으로 7년 만에 3일 동안의 외출을 얻게 되고, 그 짧은 외출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가 서서히 자신을 사랑으로 물들인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 순간 강렬한 열애에 빠져든다는 로맨스물이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두 번의 반복을 거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동명의 로맨스물로 리메이크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 묵은 감정의 허물을 벗기듯 오랜 신파의 유효기간을 다시 한번 연장한다.
(동명의 제목을 지닌) 이만희와 김수용의 <만추>가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 형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라면 시애틀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리모델링된 김태용의 동명 리메이크물은 그 상대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차별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애틀의 풍경 속에 놓인 동양의 남녀는 자신들이 밟고 선 그 이국에서 온전한 타인으로 대비되며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잉태하지 않았던 이국의 풍광 속에 머무는 두 남녀의 몽타주는 그 단적인 풍경만으로도 두 사람의 외로움을 한껏 드러낸다. 복역 중인 수감자 신분으로서 3일만의 외출을 허락 받은 여자와 자신의 육체를 이국에서의 새로운 생을 위한 밑천으로 삼은 남자의 만남은 그리하여 운명적일 수 밖에 없다.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을 증발시켜버리듯 적막한 감상 속으로 관객의 시선을 묵묵하게 걷게 만든다. 대사 하나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만을 스크린에 가득 채운 오프닝부터 모든 서사의 뒤에 홀로 남겨진 채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하는 탕웨이의 설렘을 여운처럼 남긴 채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엔딩까지, <만추>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에서 염원하고 싶은 현실에 대한 기도로 끝을 맺으며 관객을 점차 갈망하게 만든다. 뿌연 안개가 걷히듯 러닝타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기승전결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는 감정적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며 훈(현빈)과 애나(탕웨이)의 개인적 서사를 유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두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돼 나가는지 찬찬히 관찰할 수 있도록 강물처럼 서서히 극을 떠내려 보낸다.
범상치 않은 전력을 지닌 두 남녀가 시애틀에서 우연히 만나 단 3일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한다. 서서히 서로에게 진한 감정을 물들이는 두 남녀의 거짓말 같은 러브스토리가 담긴 <만추>는 두 인물의 화학작용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온도차로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멜로물의 특성에 발을 들이기 보단, 되레 감정을 증발시키고 저온으로 숙성된 감정을 결말에 다다라 여운으로 휘발시킨다. 고즈넉한 가을로 접어든 시애틀은 적막하고도 고요하며 그 속에서 방랑하다 조우하듯 마주친 두 동양 남녀의 사연은 저마다 처연한 짐작을 부르며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숙연하게 무르익는다. 김태용의 <만추>는 마치 두 사람의 관계적 진전이 동시간대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경험적 교감으로서 설득해낸다. 외로운 두 인물의 감정이 자연히 공감대를 이루고, 이런 감정적 교감의 가능성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넘어 점차 감정적인 깊이를 형성하게 된다.
백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을 그려 넣기 좋은 표정을 지닌 탕웨이는 <만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될만한 자원이다. 그녀는 현빈의 들뜬 연기를 상대적으로 보완하는 동시에 극적인 흐름 안에서 분위기의 편차가 큰 <만추>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와 같이 자리한다. 현빈 역시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캐릭터와의 궁합도 적절하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드는 인상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생의 끝을 예감하듯 빨갛게 제 몸을 태운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져 나뒹굴기 직전의,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멜로다.
이만희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의 김태용 감독 버전은 전작들이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란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차별적인 리메이크 영화라 할 수 있다. 시애틀에서 만난 동양의 남녀는 마치 유령처럼 관계 속에 파묻힌 채 말을 걸고, 우연히 재회한 뒤, 애틋한 감정의 교류를 느끼기 시작한다. 대사 한마디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에 다가서며 스산한 감상을 일깨우는 인상적인 도입부부터 적막한 풍경 속에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부까지,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이 증발된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그 너머에 다다라서야 피어 오른 애수를 절감하게 만드는 멜로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든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빨갛게 피어 오른 단풍이 곧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과 같이,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인상적인 멜로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행복합니다>가 9일 오후 2시,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소름><청연>을 연출한 윤종찬 감독의 세 번째 작품 <나는 행복합니다>는 올해 타계한 이청준 작가의 단편 소설 ‘조만득 씨’를 각색한 작품으로 현빈과 이보영이 주연을 맡았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지리멸렬한 삶을 다루고 있다. 정신질환 환자들을 치료하는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나는 행복합니다>는 환자로 입원한 만수(현빈)와 정신병동의 간호사로 재직 중인 수간호사 수경(이보영)의 사연을 평행처럼 진행시키는데 두 인물은 각자 미쳤거나 미쳐가기 직전의 상태에 몰려있다. 두 인물의 삶은 대칭을 이루듯 펼쳐지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모를 모시는 만수와 암투병중인 노부를 모시는 수경의 삶은 경제적 난국과 그로 인한 연애의 파국을 경험한다는 측면까지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지난한 삶을 거쳐 과대망상증이란 정신질환자로 규정된 수만과 달리 미쳐버리기 직전에 몰렸을 뿐, 아직 질환자로 판명되지 않은 수경은 정상인이다. 결국 상황 이후의 수만을 상황 이전의 수경이 목격하고 관찰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동병상련은 서로를 보좌한다. 각자가 상대의 처지를 바라보는 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차별된 의식 세계로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통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영화는 고단한 수경의 현실을 그만큼이나 고단했던 수만의 과거와 종종 대칭 시키는 동시에 수만의 현실과 대비시키는데 그것은 수경의 비극적 현실의 무게감을 측정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수경으로 하여금 어떤 예정될 것만 같은 미래를 경계하게 만든다. 수만의 현실과 과거를 순차적으로 진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수경의 현실이 미묘하게 맞물려 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떤 연대를 모색하거나 노골적인 교감을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두 사람은 적절히 동떨어진 위치에서 상대를 관찰하거나 적절한 거리감만큼 서로를 탐색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낙관을 배제한 이 영화의 엔딩은 지속될 비극의 굴레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희망을 자아낸다. 이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떤 희망을 모색할 수 있다’는 윤종찬 감독의 주관이 개입한 측면이기도 하거니와 그 결과물의 주제 양식이 그것을 적절하게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이들의 비극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허구지만 그것이 바탕으로 두른 세계관은 결코 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을 예감하게 한다. 종이에 써 갈긴 만수의 수표는 형태적으로 우리가 탐닉하는 지폐와 별다를 바 없다. 비정상인에게 수표로 통용되는 것이 정상인의 눈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통용되는 돈의 가치, 더 나아가서는 재화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역설과도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행복합니다>는 어쩌면 현실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가치를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역설적 리얼리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처럼 생존 그 자체를 희망이라 붙드는 영화는 역설적인 제목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잴 수 없는 인간적 의지의 표상 같아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축제의 마지막 날, 그 지리멸렬한 비극을 대면해야 하는 어떤 관객들의 상황도 역설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것이 이 시대에서 점차 간과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복합니다>는 희망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축제를 위한 특별한 마침표가 될만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