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흐트러진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에 가득한 애수.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나타나 전세계적인 팬심을 자극한 세바스찬 스탠은
우직하면서도 유연한 남자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 배경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유럽의 신마저 뉴욕을 밟게 만든 이 맹랑한 세계관은 실제 도시를 배경에 두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감상에 활력을 더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확실하게 착륙한 세바스찬 스탠 역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코믹북에 기반을 둔 영화는 신화이지만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논의하길 바라는 지점보다 더
많은 부분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마블 유니버스는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겨냥하는 세계다. “많은 재향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여기서 ‘이번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를
의미하고 ‘이 캐릭터’는 당연히 스탠이 연기한 버키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물음표에 대한 답은 마블 유니버스의 차기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겸손함이 느껴지지만 스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실 세바스찬 스탠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콘스탄차에서
태어난 루마니아 출신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루마니아를 떠나 오스가십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갔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의 스탠에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스탠의 내면을 강인하게 다듬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이 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어디로
다다를 수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스탠이 처음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당도한 빈에서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오디션장에서
첫 역할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노숙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
경험을 통해 어린 스탠은 배우라는 길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촬영한 단편이었는데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세트장
안에서 긴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건너무
지루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국경을 넘어 정착한 미국 뉴욕에서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사한 계기가 찾아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첫 해에서야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청력 장애가 있었음에도 학교 연극을 모두 책임지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사실상 나를 도전하게 만들었다.”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라는 꿈을 품고 오디션에 참가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스탠은 뉴저지의 예술학교에 진학하고, 1년간 영국에 있는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스탠은 수많은 오디션장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오디션장에서 마셔왔던 숱한 고배 끝에 맛본
성취가 자신을 키운 자양분이 됐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일들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한 캐스팅 감독 앞에서 1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캐스팅 감독에게서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한 번도 붙지 못했지만, 그 캐스팅 감독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봤다. 그랬더니 다음 번엔 나를 기억하더라." 어쩌면 이런 근성이야말로 스탠이 지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스탠은 TV시리즈 <가십걸>과 <킹스>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조금씩 얻어나갔고
조나단 드미가 연출한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과 같은 준수한 영화에도 이름을 올리며 경력을 확장했으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통해 대중적인 얼굴로 거듭났다. 그런데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되레 뒤늦게 주목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연약한 청년이었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를 돕는 버키 반즈는 캡틴의 전우이자
스티브의 절친으로 거듭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라 죽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등장하는 윈터 솔져의 정체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물론
원작을 충실히 따라잡은 코믹북의 팬이라면 그의 전사를 명확히 짚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선 윈터 솔져가 버키일 것이란 예감을 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속편에서 테러 집단의 세뇌를 받고 캡틴 아메리카를 공격하는 빌런 ‘윈터 솔져’로 부활한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가 던진 비브라늄 방패를
맨 손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는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를 폭발시키는 버튼은 바로 버키다.
세계적인 기대감을 모으는 볼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인지도는 만월처럼 차 올랐다.
그러나 스탠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자 멘토로 꼽는 래리 모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역을 얻고 인물에 공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시작해라'라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 출연했던 스탠은 <더 브론즈>(2016)라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또한 J.K.시몬스와 맨디 무어가 출연하는
또 다른 코미디물 <아임 낫 히어>(2017)의
출연 계약을 마쳤고, 평소 흠모하는 배우로 꼽던 짐 캐리가 제작하는
TV시리즈에서도 등장할 예정이다. 버키의 여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세바스찬 스탠 역시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을 따라 걸어왔다. "만약 이 일이 잘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보겠다.” 다행히도
이 좌우명은 스탠에게 잘못된 길을 가리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다 즐겁게, 더욱 사랑하면서.
왕대륙이라고 했다. 쉽게 잊혀질만한 이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생소하겠지만 왕대륙은
이미 쓰나미 같은 팬덤을 부르는 뜨거운 이름이다. 이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발음할수록 거대하게 와 닿는 이름이다. 왕대륙이라니, 한반도는 집어삼키고도 남을만한 이름 아닌가. 그 거대한 이름이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한 건 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가
국내에서 개봉한 5월 11일부터였을 것이다. 대만에서 역대 흥행 최고 기록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차례대로 개봉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도장격파에 나선 무림고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던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심상찮은 반응을 얻었고, 올해 개봉 이후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객을 몰았다. 결국 대만영화 최초로 4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 됐다.
<나의 소녀시대>는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근래에 개봉한 중화권 영화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흥행작이다. <응답하라 1994>처럼 199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낭만적으로 극화했는데 이를 통해 대만이라는 지역적 정서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감대와 트렌디한 매력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청춘이란 단어로부터 툭 튀어나와버린 듯한 캐릭터들은 자칫하면 유치하고 뻔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에 특별한 숨을 불어넣는 생생한 육체가
됐다. <나의 소녀시대>의 흥행이 주연배우들을
향한 팬덤으로 이어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소녀 임진실을 연기한 송운화와 교내 최고의 불량학생이자 짱으로 군림하는 소년 서태우를 연기한 왕대륙을 중심으로 태풍의 눈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런 기류를 감지한 배우들이 내한
의사를 밝히며 팬들의 술렁임도 가속화됐다. 특히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임진실처럼 SNS상에서 왕대륙의 여자친구를 자처할 정도로 지극한 팬심을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던 여성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지난 6월 5일에 내한한
왕대륙이 <나의 소녀시대> 상영관을 찾아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했을 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암표까지 판매됐을 정도였다. 이에 왕대륙은 ‘비글’처럼 상영관 곳곳을 분주히 오가며 팬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를 따라잡는 경호원들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덕분에 ‘비글미’ 있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을 꽉 채우고 돌아간 왕대륙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촬영 중인 영화가 있어서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일정이 빠듯했지만
내가 출연한 영화를 사랑해준 팬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자리를 갖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론
한국에선 첫 팬미팅이라 긴장됐다.” 왕대륙이 다시 한국에 발을 디딘 건 7월 13일 새벽 1시였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간에도 왕대륙을 마중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여든 팬들은 왕대륙의 본명인 ‘왕 따루(Wang Ta Lu)’를 외치며 선물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당일 오후, 650명에 달하는 팬들과 두 시간 여의 팬미팅을
가졌다. 팬미팅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거의 모든 팬들과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주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관계자의
전언을 듣고 그에게 한국 팬과의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미인이 많다.” 대답을
한 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장난끼가 가득 배어 있는 표정에서
<나의 소녀시대>의 쉬타이위가 느껴졌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짓궂게 느껴지지만 결코 밉지 않은 유쾌함.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팬들은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거 같다. 예를 들면 그저 웃기만 해도 좋아해주고, 작은 애교에도 환호해 주니까. 다만 안타까운 점은 있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런 면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팬들 하나하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팬들을 만나는 게 즐겁다. 다른 나라를 가도 그렇다.” 그러니까 진정 ‘비글미’가 넘치는 남자인 것이다.
1991년생인 왕대륙에게 1994년을
배경에 둔 <나의 소녀시대>는 겪어보지 못한 시절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시절의 주인공이 됐으니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쉬타이위는 굉장히 캐주얼한 캐릭터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상황이 묘사된다. 게다가 러브스토리가 중심에 놓인 영화였기 때문에 1994년이란 시절이
큰 제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거저 먹듯이 연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왕대륙이 연기한 쉬타이위는 문제아들 중에서도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대장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곤 했다. 패왕
같은 캐릭터라 그에 어울리는 패기나 두목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거칠고 사나운
면은 나와 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성격을 조절해야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과 닮았다고 느낀 점은
없었을까? “장난끼가 많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굉장히 귀엽다는
점?”
장난끼가 다분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쉬타이위는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에 매진하지만 심각한 편견에 맞서야 한다. 왕대륙은 그런 쉬타이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나도 남들에게 잘 공감 받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부정당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도 왕대륙은 쉬타이위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일곱 명 정도
있다. 그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특히 배우로 활동하는
가진동과는 15년 넘게 친구로 지냈다.” 가진동은 지난 2012년에 개봉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 왕대륙보다도 한국에 먼저 알려진 대만 출신 배우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어려움이나 고통을 나누기 보단 즐거움을 나누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코미디를 많이 좋아한다.”
왕대륙은 코미디물에 대한 애정을 적지 않게 언급해 왔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주성치를 꼽기도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재능이 코미디와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8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면서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진지하게 정극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내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많이 웃는 걸 보고 내게 사람을 웃기는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이런 재능이 있다면 제대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연기한 쉬타이위를 통해서도 웃음을 주고자 참고한 것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만화를 좋아하는데, <슬램덩크>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코믹한 캐릭터 톤을 많이 참고했다. 실제로
쉬타이위는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닮았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실제로 왕대륙은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백호의 그림을 게시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왕대륙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8년간의 무명생활을 겪었다고 말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왕대륙이 배우라는 궤도에 올라 처음 성공적으로 착륙한 경유지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에게 지난 무명시절은 어떻게 다가올지 문득 궁금했다. “사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1년 동안 한 작품도 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평생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기다리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결국 그 시절이 연기할 수 있는 힘으로 남겨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대단한 야심을 품고 연기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로드 캐스팅을 받고
광고를 찍게 됐는데 광고에서의 연기는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지라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어렸을 때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의 왕대륙은 배우로서 진지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에 찾아온 이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젊으니까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낼 거다.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다양한
이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싶다. 그래서 진짜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생각해보고 언젠가는 그에 어울리는
배역이나 스토리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을 거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는 유덕화가 깜짝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한 그는 현재 중화권
배우들이 우러러보는 대배우다. 왕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녀시대>에선 유덕화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천장지구>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쉬타이위가 그 시절의 유덕화를 따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왕대륙은 실제
유덕화의 모습을 따라잡기 위한 디테일에 고심했다고 설명한다. “청재킷을 똑바로 입으면 안 된다. 어깨에서 벗겨질 것 같은 느낌으로 살짝 걸쳐야 한다. 유덕화는 언제나
그렇게 입었으니까.” 그러면서 익살맞게 코피를 닦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유덕화도 한때 거친 남자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왕대륙에게
유덕화는 단순한 별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되짚게 만드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유덕화도 젊은 시절엔 다양한 역할을 많이 소화했다. 그처럼 멋진
배우가 되려면 다른 배우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왕대륙은 시간을 달릴 준비가 돼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변신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고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다른 역할을 시도해보고 싶다.”
<나의 소녀시대>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짝사랑에 관한 영화다. 왕대륙에게도 영화 같은 과거가 있다. “어렸을 때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같은 반의 모든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1년 뒤 그녀는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유학을 간 뒤 한 친구가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같이 <나의 소녀시대>를 보고 싶다.” 로맨틱한 사연이다. 그렇다면 왕대륙은 쉬타이위와 달리 우정보단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만약
친구와 한 여자를 두고 다투게 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포기할 거다.” 단호했다. 그럼 아무래도 20년 동안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릴 순 없는 걸까? “물론이지. 그건 영화다! (웃음)” 역시 단호했다.
영화 촬영 스케줄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왕대륙은 한국에서 보낸 1박2일 동안에도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인터뷰와 촬영이 끝나면 밤 비행기로 대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무협 판타지 영화 <교주전>의 현장으로 곧바로 돌아갈 예정이다. 게다가 성룡이 출연하는
코믹 액션물인 <철도비호>와 중국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딸인 장말이 연출하는 판타지물 <28세 미성년>을
준비하는 등 바쁜 일정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니 서울을 두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게 그럴만했다. 그러다 문득 서울에서 어딜 가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며 왕대륙이
물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할 시간을 청했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답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왕대륙의
팬들은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대신 답변을 전해주길 부탁한다. 물론 비글미 넘치게 분주한 일정을 자청하는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음악을 좋아했다. 집에서 형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면 방문 너머로 귀동냥하고는 했다.” 장영규는 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을 들었고,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음악 감상에만 관심이 있었던 형과 달리 그는 스스로 연주해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고, 곡을 써보기도 했다. 그리고 장영규에게 음악적 관심을 심어준 형은 음악적 진로를 결정짓는 존재로 거듭났다. "형이 어린 나이에 밴드 활동을 하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영규가 저렇게 음악을 좋아하는데, 전자기타 하나 사달라’며 졸랐다. 그 덕에 중학교 2학년 생일 선물로 전자기타를 받았다.” 그렇게 장영규는 고등학교 때까지 쭉 밴드활동을 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려니 가고자 하는 학과가 없었다. "그 당시엔 실용음악과가 없었다. 하지만 다들 대학에 가니 학과는 선택해야 하는데 클래식을 전공할 준비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 말씀을 듣고 중국어학과에 진학했다."
장영규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국어에 대한
흥미가 없었으므로 학교 생활에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무용가 안은미다. "미술을
전공한 사촌누나와 가깝게 지냈는데 당시에 누나는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혹은 그 지망생과 어울려 다녔다.” 그때 만난 이들 중엔 먼 미래에 각자의
분야에서 대단한 역량을 펼칠 인물들이 즐비했다. 이를테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이불과 최정화 그리고
영화감독 이재용 등이었다. “그들은 홍대나 종로 일대의 클럽을 휘젓고 다니며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놀았는데 나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짐을 들어주거나 촬영을 했다. 그리고 종로에서 록음악을 주로 틀던 ‘오존’이란 바에서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행위예술을 펼치곤 했는데
별의별 사람이 모여 예술 활동을 하는 걸 보며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다.”
그 중에서도 안은미는 오늘날의 장영규를
각성시킨 자궁 같은 인물이었다. “하루는 LP판 12개를 가지고 와서는 ‘공연에 쓸 음악을 네 마음대로 만들어봐라’고 던져주더라. 집에 가져가서 곡을 이리저리 자르고 붙여 짜깁기해
한 시간짜리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음악이 마음에 든다며 가져다 쓴 공연이 좋은 성과를 거뒀다.” 1991년 안은미가 제1회
MBC 창작무용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고 이듬해 축하 공연으로 준비한 <알라리 알라리요>였다. 당시 장영규는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던 차였다. “취직을 해야 하나 걱정할 무렵이었는데 안은미와의 인연으로 무용 음악을 시작했다. 하지만 먹고 살기는 빠듯했기 때문에 가수들 공연장에서 세센맨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무용 음악은 결국 장영규의 작품 세계를 확고히 다지는 축이 됐다. “당시에
공연 음악 하나 만들고 받은 돈이 10~20만원 남짓이었다. 그
돈으론 작곡가를 쓸 수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으니 기존에 있는 음악을
4채널 짜리 카세트로 짜집기해서 공연 음악을 만드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끝없이 자르고 섞었던 작업이 공부가 됐고, 음악 활동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사실 장영규를 대중적으로 알린 건 무대음악보단
영화음악이었다. 그의 첫 영화음악은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이었다. 그 후로 6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작업했고 최근엔 <곡성>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회자되기도 했다. 문득 장영규가 생각하는 영화음악과 무용음악의 차이가 궁금했다. "영화에서는 음악이 딱 짜여진 틀에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약이 많은데 무용음악은 상당히 자유롭다. 이야기가 명확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추상적인 작업이다 보니, 어떻게 가든 끝내 한 지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아 무용 작업이 더 흥미롭다.” 그렇다면 장영규가 원하는 작업 과정 방식은 어떨까? “무용수가 음악에 긴장하게 만드는 작업이 좋다. 연습 기간에는 기본적인
리듬만 작업해 주고, 안무가 완성되면 그때 비로소 곡을 입힌다. 처음부터
명확한 색깔을 만들어 주고 작품을 그에 맞추면 어딘가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처음에는 최대한 색깔을 빼고 마지막에 확 입히는 거다. 그러면 무용수들이 몸에 익은 리듬과 박자임에도 새롭게 들어온 음악적 색을 느끼고 긴장 관계를 이룬다."
한편 장영규는 지난해에 직접 무용을 연출하기도
했다. 국립무용단과 협업하여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완월>이 바로 그것. 소치동계올림픽 국제아트페스티벌에 공연하러 갔다가
국립무용단이 강강술래를 추는 걸 보곤 영감을 받아 국립무용단에 작업을 제안했다가 오히려 연출을 제안 받고 고민 끝에 이를 수락했다. 사실 장영규가 끌린 건 강강술래의 음악이 아니라 원형의 동작이었다.
"<강강술래>라는 노래에 동작이 갇힌 느낌이었다. 기존의 민요를 걷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입히면 현대적인 작품으로 거듭날 거라 생각했다." 음악감독이 아닌 연출자로 참여한 그는 무용 동작의 연출도 관여했다.
"마치 음악 작업할 때처럼 원형의 동작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듯 만들어봤다.”
사실 장영규는 규정하기 힘든 뮤지션이다. 무용, 영화, 연극음악과
역시 규정하기 힘든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와 국악기를 다루지만 국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비빙 그리고 민요 밴드라 일컫는 씽씽까지, 가히 전방위적인 음악을 섭렵해왔다. 그야말로 소리수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악기와 어디에나 있는 소리로 작업하는 게 지루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소리를 수집하여 그걸 근원적으로 쪼개 악기로, 소스로
만들어 작업한다.” 현재 파리를 비롯해 유럽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안은미의 <조상에게 바치는 댄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작업된 음악을
사용한다. 전국을 다니며 수집한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노래를 따서 음을 쪼개고 더해 전혀 다른 느낌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음악을 만드는 요소가 다양하겠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화성, 선율보단 소리, 구조, 리듬이다. 언제 흥미가 바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기 집중하고 있다." 장영규는
오로지 자신의 흥미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흥미가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about
장영규는 전방위적인 음악가다. 무용음악, 영화음악, 연극음악, 시각예술
사운드 작업,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국악기 프로젝트 비빙, 민요 밴드 씽씽 등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다방면의 음악적 작업을 전개하면서도 소리의 해체와 조립이라는 실험적인
스타일을 추구해 나간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쳐다봤다. 정작 당사자는 씩씩하게 걷고 웃으며 말한다. "옛날에는 길에서 다 쳐다봤다. 우주복도 아니고,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그때는 머리카락이 있었는데.(웃음) 그럼 내가 씩 웃어줘. 일종의 실천적 참여 작품인 거지. 거리 퍼포먼스! 나는 하고 싶다 생각하면 했다. 그게 내게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무용가 안은미가 춤을 추게 된 것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섯 살의 나이에 우연히 보게 된 한국무용수가 입은 의상의 색을 보고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 "춤이라는 게 마치 달나라로 가는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결국 7년간 어머니를 조른 끝에 4천원의 레슨비를 허락 받았다. 시장통 건물 2층에 있는 낡은 무용학원에 발을 딛게 됐다. "무언가를 하는 내가 좋았다. 음악이 나오면 좋고, 내가 춤을 춘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8개월 만에 첫 번째 비행은 끝이 났다. 어머니의 뜻대로 무용학원 대신 영어학원을 가게 됐다.
다시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사실 진로라는 개념보단 좋아서 한 거지. 그러다 무용반
언니들이 대학을 간다 길래 왜 가냐 물으니 무용과가 좋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도 춤을 직업으로 삼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선 그녀가 추고 싶은 춤을 가르치는 이가 없었다. 안은미는 학교 밖에서, 그리고 무용 밖에서 답을 찾았다. "학점을 따야 하니 학점
받을 만큼은 하고, 저녁에는 내 것을 했다. 내 마음대로
했다. 그리고 무용계에 있는 사람보단 미술하는 사람들과 많이 놀았다.
최정화나 이불, 이영주, 이수경 등 새로운 관점을
찾고자 하는 작가들을 만나서 뭔가 해보자면서." 실제로 그녀는 미술작가 최정화의 작업물과 무용을
잇는 탈경계적인 작업을 해내기도 했다. 그녀에게 춤이란 보여주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언어였다. "무용이 추상적인 언어 같지만 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막연히 아름다운 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연의 균형감각을 삶에 투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은미는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던져 균형을 잡아보고자 했다. "내 몸에 충격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걸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1992년에 한국을 떠나 뉴욕에 당도했다.
안은미는 뉴욕에서 서서히 자기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뉴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30대 무용수는 뉴욕을 근거지로 안은미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나갔다. 맨하튼 예술재단의 안무가 상을 받고, 뉴욕 예술재단의 아티스트 펠로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뉴욕은 그런 영광으로 점철된 영토가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재미있게 살았다. 1년에 한번 공연하고, 영어 배우고, <뉴욕 타임스>
읽고, 아메리카노 마시다가 '방세 언제 내지?' 생각이 들면 나가서 일하고. 그렇게 방세 내고 나면 또 놀고. 그렇게 10년을 뉴욕에서 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10년이 짧다는 걸 알았다.
서두르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10년은 다 내
것이 된다. 아득바득 살 필요 없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그냥 가는 거지." 한국에서도 안은미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무용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안은미는 2000년 대구시무용단에서 단장직 제안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은미 컴퍼니에 무용수가 10명 있는데 아마 내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을 만나러 왔구나 싶다. 우리 팀은 신선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헌신으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닿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어느 정도 넘어서면 다들 경이롭게 본다. 외국으로
투어를 나가도 이런 팀워크가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안은미 컴퍼니는 유럽 등지를 돌며 춤을
춰왔다. 한국 할머니들의 막춤을 무대에 올린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비롯해 여고생과 아저씨가 등장하는 <사심
없는 댄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덕분이다. 그녀가 이런 막춤을 무대에 올리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무용수들과 형식적인 작업을 해오다 보니 안무가로서 만족하면서도 색다른 시각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몸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나갔고, 한달 만에 270명을 찍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시각을 얻었다. 할머니들 춤을 막춤이라 부르지
않나. 쉬운 춤이라 생각했는데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본 몸에 놀라운 힘이 있더라. 살아오면서 축적된 정서, 배경, 성격
등이 함축된 몸을 흔드는 거다." 막춤 안에 깃든 세월과 세상과 인생을 보았다. 그래서 무대에 올리길 결심했다. 학생들과 아저씨들을 무대에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을 기록하다 다른 세대가 궁금해졌다. 같은 질문을 애들한테 하면 어떨지, 아저씨들한테 하면 어떨지. 애들은 무조건 아이돌 댄스를 춘다. 그리고 아저씨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는 한국 남자들은 춤추는 걸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 역시 역사이고, 객관적인 시점이니 그런 몸을 기록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1부와 할머니가 등장하는 20분짜리
영상을 보여주는 2부 그리고 그 영상 속의 할머니가 무대 위로 올라와 막춤을 추는 3부로 구성된다. 그리고 피날레에선 공연을 보던 관객들까지 무대로
올라와 춤을 춘다. "무대는 아티스트의 영역, 객석은
관객의 영역, 이런 틀을 없앴다. 그런데 우리가 봐도 놀라운
정도로, 관객들이 해일이 밀려오는 것처럼 무대로 뛰어올라온다. 그리곤
할머니들과 무용수들과 같이 춤을 춘다. 나이든 국적이든 상관 없다. 언어보다
더 센 표현이 터지는 거다." 춤의 장을 넘어 삶의 장으로 변모한 무대, 그것이 안은미가 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춤을
통해 자신을 살리는 방식이다. "예술 하는 사람은 안정감을 가지면 안 된다. 자신을 코너에 세우고 긴장감 있게 살아야 한다. 작가가 결과물을
못 내면 창피한 거잖아. 지구를 떠나야지. 그러니 매일 내
자신을 코너에 밀어 넣는다." 마치 영원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을 사람 같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춤도 멈출 것이다. 달나라로 가는 판타지에도
마지막 장은 있을 것이다. 안은미는 말했다. "아마
방전되는 날, 그날 갈 거다. 우주선 타고. 상상만 해도 귀엽지 않나?" 이보다 유쾌할 순 없다.
about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사심 없는 댄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로 유럽 등지를 열광시킨 안은미는 동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다. 안은미
컴퍼니 소속 무용수들과 함께 세계를 돌며 무대에 오르는 그녀는 파격보단 자유를 추구하며 행복하게 춤을 추고 있다.
로타(Rotta)라는
가명으로 사진을 찍는 최원석은 보기 드문 팬덤을 지닌 포토그래퍼다. 그는 유명해지길 꿈꿨고, 유명해져서 좋다고 말했으면 더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로타의
일본산책>은 출간 전에 이미 예약 판매로 1쇄가 매진됐다. 미소녀 포토그래퍼가 인기에 편승해서 여행사진집을 낸 거 아닌가? (웃음)
옛날부터 일본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많아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다. 그런데 인지도가 생긴 상황에서 사진집을 내고 전시를 하면 확실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다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라 신기하다.
첫
사진집인 <Girls(소녀들)>를 내고 인지도가
수직상승했다.
아무래도 사진집과 전시가 이슈가 된 타이밍에 설리 화보 이슈까지
겹쳐서 시너지가 난 거 같다.
미소녀
컨셉트의 사진은 언제부터 찍었을까?
오래 전부터 진행한 작업이었다.
다만 페이스북엔 공개하는 걸 싸이월드에 공개하지 못했던 건 그 당시엔 반응을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이런 사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한국에선 어려울 거 같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참고했다. 그러다 한 5년 전부터 타이밍이
괜찮다 싶어 조금씩 노출했지.
공연사진을
찍으면서 포토그래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어 보니 현장감이 너무 좋았다. 지인이 공연장 스태프였던 덕에 무대 근처에서 촬영할 수 있어서 촬영하는 묘미도 있었고. 그러다 내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이 생겨서 적극적으로 찍게 됐고, 자연스럽게
일로 연결됐다. 페스티벌 촬영 의뢰를 받고, 뮤지션들의 앨범
재킷도 찍게 됐고.
과거
싸이월드에서 본 클럽 사진들의 현장감이 인상적이었다.
A 클럽 촬영을 통해 빛을 쓰는 법을 익혔다. 빛을 잘 쓸수록 춤추는 모습도 역동적으로 잡히고, 예쁘게 나오니까. 사실 클럽 사진 찍는 사람이 꽤 많다. 그들보다 더 잘 찍는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열심히 찍었지.
인정욕구가
강한가?
흔히 말하는 '따봉충'이지. (웃음) 옛날부터
꿈은 하나였다. '유명해지고 싶다.' 정말 소박하지 않나? 누군가는 세상을 위한 꿈을 꾸거나 대단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기준도 없이 그저 유명해지고 싶다니. (웃음)
유명해지니까
좋은가?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 들어오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사진을 찍는 덕분에 이와이 슌지 감독도 만났고. 물론 실력이 없었다면 그럴 기회가 없었겠지만.
설리에게선
직접 연락이 왔다던데.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만나보고 진짜라는 걸 알았다. 페이스북에 있는 내 사진이 다 마음에 든다고, 그런 느낌으로 찍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서태지도
직접 연락을 하던가?
그건 아니고. 어쨌든
공연 사진을 잘 찍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연락을 했는데 결국 앨범사진도 찍고, 인터뷰 기사를 비롯한 공식
사진도 찍게 됐지.
무라카미
다카시가 SNS에서 로타의 사진집을 극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무라카미 다카시의 한국 전시를 촬영했는데 내가 자기 전시를
찍었는지도 모를 거다. 만약 일본으로 찾아가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면 관계가 진전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너무 바빴다. 아쉽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언젠가 기회는 있을 거다.
혹시
유명해져서 불편한 건 없나?
게임할 시간이 없어진 거? (웃음) 사람 만날 일이 많아지니까 개인시간이 너무 없어졌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까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기 힘들더라. 그래서 미안하다. 만나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니까 오히려 친한 사람이 생길 기회가 더 없다. 아이러니하지.
유명세를
얻으면서 과거에 로타라는 이름이 '로리타'와 '오타쿠'를 더한 이름이라고 언급한 방송 영상이 뒤늦게 발굴돼서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로부터 집단적인 공격을 받았다.
처음엔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싶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사실 넓은 범위에서 보면 그렇게 이해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반박하는 것도 이상하지. 다만 로리타를 의식하고 작업한 건 아니니까 그런 부분은 확실히 짚고 싶다.
아무래도
말의 무게를 느꼈을 거 같다.
조심해야겠단 생각은 들었지. 솔직히
사진 컨셉트를 설명할 때조차 로리타를 언급해본 적도 없다. 그때 영상을 찍는 PD가 '로리타가 섞인 이름 아닌가요?'란 식으로 장난스럽게 물어봐서 나도 장난처럼 대답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PD도 조금 얄밉네. (웃음). 물론
그때 현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사실 당시만 해도 로리타를 공격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종의 컨셉트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강했지. 그래서 걱정 자체를 안
했던 것도 같다.
그로
인한 여파가 있었을까?
사실 사진집이 나오기 전에
<프로듀스101> 쪽에서 촬영 제안이 왔다. 걸그룹 '여자친구'의 소속사에서도 왔고. 그런데
로리타 이슈가 터지고 다 무산됐지. 그런데 최근 '아이오아이(I.O.I)'와 광고 촬영을 진행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거 같다.
안티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두둔해주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나를 대신해 싸워주는 팬이 생겼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사실 논쟁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부정적인 의견도 존중하고, 억울한 건 전혀 없다. 그냥 이렇게 찍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 보고 말하는 건 좋다. 하지만 내 사진도 안보고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모르고 욕하는 거니까.
내 사진을 알고 욕하는 건 상관 없다.
일본에선
이런 사진이 흔하다는 식으로 비하하는 이들도 있더라.
한때 우리나라 만화가들이 대부분 일본만화처럼 그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만화를 따라 한다는 비난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 제 식대로 그린다.
나도 처음엔 일본 그라비아 톤을 따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영향을
받은 거지, 베낀 게 아니니까. 사실 요즘 우리나라 포토그래퍼들이
어떤 사진을 찍는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도 많이 듣는데 최소한 '이거 로타가 찍은 거네'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 자신감이다. 내 느낌은 존재하는
거니까.
'로타'라는 이름은 본래 로봇 캐릭터를 구상하며 만든 이름이라고 들었다. 정확한
의미가?
특별히 의미는 없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로봇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로보트'가 연상되면서도
귀여운 이름을 짓고 싶었다. '로'로 시작되는 두 글자의
귀여운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로타'하니까 괜찮게 들렸다.
그
캐릭터는 어떻게 됐나?
넥슨에서 개최한 공모를 위해 만든 건데 안됐지. (웃음) 그런데 최근 넥슨과 미팅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좋아하더라. 그림으론 인연이 없었지만 사진으론 인연이 생겼다.
일러스트를
그리다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대학교 시절에 제대한 뒤 처음
'똑딱이'를 잡았는데 여자친구를 찍어주다 보니 더 예쁘게 찍어주고 싶더라. 그러다 더 좋은 장비로 찍어보니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오는 걸 알게 돼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장비병'이 생겼다. 그런데
점점 잘 찍는단 소리를 듣게 되면서 피사체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실력이 늘면서 기회로 연결됐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나 사진을 찍는 이유에 차이는 없었다.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그림을 시작한 것도, 사진을
시작한 것도 내가 표현한 걸 남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겠단 마음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도 좋은 반응을 얻는 게 좋아서였는데 카메라를 잡았을 때도 비슷한 욕구가 있었던 거지.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될 거라 확신한 건 언제였을까?
재미있게 하면 대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사진작가가 될 거란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취미로 공연을 찍다 보니 일이 됐고, 서태지
사진까지 찍었다. 미소녀 컨셉트가 좋아서 촬영했는데 일로 이어지더니 설리한테 연락이 왔다. 재미있게 하다 보면 뭔가 되겠단 생각은 했지만 돈과 연결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최선을 다했지.
한
인터뷰에서 '점잖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변태라서 이런 사진을 찍고 있는 거 아닐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변태라고 생각하나?
변태가 아닌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리고 변태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는 단어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박찬욱 감독도 변태적인 성향이 있을 거다. 젠틀하고 고급스러운 언변을 구사하지만 머리 속엔 변태적인
상상력이 있으니까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도 사진을 통해 내 안의 변태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셈이고. 하지만 그걸 저질스럽게 표현하고 싶진 않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상상력이 떨어질 수는 있어도 표현력은 좋다고 생각한다. .
혹시
새로운 미소녀 사진집을 출간할 계획은 없나?
6월말에 나온다. 소니
뮤직과 컬래버레이션 형태로 진행 중인데 사진집을 넣은 2CD 형태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된다.
특별한
목표는 없을까?
잠깐, 고민 좀 해보고. 음, 요즘 해외에서도 조금씩 인지도가 생기는 거 같은데 일본이나
동남아, 유럽 쪽에서도 알려지고 싶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