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오페라라고 한다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각각 종교적 음모론을 추적하는 기호학자의 수사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공통분모를 두고 있지만 전자가 철학적 기호를 추출하는 반면, 후자는 대중적 이슈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분자를 지닌다. 물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건 단지 기독교의 권위를 뒤흔들만한 이슈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 국한할 순 없다. 종교적 진의에 대한 갑론을박만큼 이야기의 리듬감도 중요한 관건이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보다도 속도감이 빠른 소설이다. 뒤늦게 인기를 얻은 탓에 오히려 스크린에선 속편으로 둔갑한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마찬가지로 장르적 서스펜스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블록버스터의 스케일까지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루 갖춘 작품이다. 게다가 마치 주먹질하지 않는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키는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지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역동적인 동선을 활보한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매력을 두루 얻기 좋은 캐릭터다. 물론 댄 브라운의 소설에 담긴 놀라운 단서들이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서야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수집품인가를 판단할 수 있기란 쉽지 않다. 다만 작가의 취재를 기반으로 벌어들인 단서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밀고 나가는 재능이 얼마나 쓸만한가를 확인하는 건 가능하다. 댄 브라운의 두 작품은 때때로 액션처럼 치열하게 공방하는 인물 간의 대화와 위트와 긴장감을 조절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통해 대중적 호감을 발생시킨다. 영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댄 브라운은 장르적 연출이 뛰어난 감독에 가까운 작가다. 론 하워드 감독이 댄 브라운의 소설에 호감을 느꼈다면 그런 지점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빈치 코드>가 영화적 실패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크린이 텍스트를 축약하기 위한 전시판의 역할에 국한돼버린 탓이다. 오락적 속도감마저도 상실한 듯한 안이한 형태는 원작의 가능성마저도 간과하게 만들 정도였다. <천사와 악마>의 불안요소도 다름 아닌 <다빈치 코드>의 영화적 전례에 있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는 시작부터 <다빈치 코드>와 다른 전철을 밟아나간다. 소설에서 대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연출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몇몇 캐릭터는 제 위치에서 생략되거나 비중이 축소된다. 서사가 재편되고 관계가 재구성된다. 다만 주요한 캐릭터의 관계나 활용성은 대부분 보존한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달리 영화적 변주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에 비해 소설의 영화화 과정에서 좀 더 과감한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원작이 지닌 속도감은 보존하되 텍스트를 고스란히 이미지로 재연하려는 과욕에서 벗어났다.
<천사와 악마>가 가장 자신있게 선전해도 좋을 요소는 호사스러운 풍경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크리스트교 시대의 영예를 대변하는 로마와 바티칸의 예술적 자취와 건축적 풍광을 관람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시각적 묘미다. 또한 교황의 서거 이후 교황의 인장이 새겨진 '어부의 반지(Pescatorio)'를 폐기하고, 교황을 추도하는 ‘세데 바칸테(Sede Vacante)’기간 이후 새로운 교황을 추대하는 추기경들의 투표가 이뤄지는 ‘콘클라베(conclave)’까지, 비밀스런 가톨릭 의식을 사실적으로 연출한 장면들 역시 이색적인 묘미를 부른다. 또한 반가톨릭 조직이라는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존재와 거대한 입자가속기에서 ‘반물질(antimatter)’을 추출하는 ‘CERN(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최근 빅뱅 실험으로 논란을 부른-의 존재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도 극의 말미에 등장하는 반물질 폭파 장면은 과학과 신앙이라는 패러다임의 충돌과 융화를 주제로 둔 <천사와 악마>의 클라이막스로 대변해도 좋을 만한 이미지적 성과다.
물론 <천사와 악마>는 원작에 비해 간결해진 스토리와 구체화된 이미지 덕분에 입체감이 보다 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흘러 넘치는 빽빽한 정보를 온전히 이미지로 치환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천사와 악마>의 선택이 최선이라 단정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필요악의 순기능을 수행했다고 평할만하다. 물론 <천사와 악마>에서 전달하는 정보가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 평가하는 건 무리다. 단지 그 정보를 엮어가는 스토리가 얼마나 특별한 오락적 묘미를 발생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와 악마>는 어느 정도 무난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오락물로서 인정할만한 영화다. 기적적 체험에 도달하진 못해도 흥미로운 교리를 듣는 묘미 정도는 확보한다. 확실한 건 적어도 <다빈치 코드>보단 낫다는 것.
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
“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파리에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충분히 있다면, 그렇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이 어디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헤밍웨이는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밍웨이의 저서인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원제, <(A) moveable feast>)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 파리는 낭만으로 치환되기 좋은 도시다. 앙상한 철골구조로 이뤄진 기괴한 에펠탑에 낭만의 살점을 붙이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도시의 바닥에 개똥이 가득하고, 광장과 뒷골목에 소매치기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침 튀기며 설명한다 한들, 그 환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파리의 풍광이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는 <사랑을 부르는, 파리>(이하, <파리>)는 그런 환상을 부추길만한 영화다. 물론 <파리>는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영화가 아니다. 파리의 곳곳을 누비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표정을 통해 거리의 정서를 수집하고 그들의 동선을 따라잡으며 풍경을 전시하는 <파리>는 그 거리를 채우는 이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도시의 본심을 드러낸다. 파리라는 도시 구성원의 표정을 통해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 얼굴들은 낭만과 거리가 먼 표정을 지으며 삶을 비관하고 한탄함으로써 낭만을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것마냥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실제로 그 도시의 주체들은 낭만과 거리를 두듯 삶을 꾸려나간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피에르(로망 뒤리스)는 오래 전 사모했던 여인에게 고백을 전하지만 좌절을 경험하고, 그의 누이인 엘리즈(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의 사랑을 비관하다 삶을 염세하는 지경에 다다르곤 한다. 저명한 역사교수 롤랭(페브리스 루치니)은 제자인 래티시아(멜라니 로렌)를 사모하다 스토킹을 저지르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할 즈음에 절망에 봉착한다. 심지어 시장의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즈음 죽음으로서 감정을 짓이긴다. 이쯤 되면 파리는 사랑의 메카가 아니라 로맨스의 무덤에 가깝다. 그 도시에서도 사랑은 결코 쉬운 낭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염세하는 이도, 사랑을 갈망하는 이도, 하나같이 사랑을 통해 삶을 꿈꾼다. 오래된 도시는 사람처럼 나이 들어가지만 그들의 감정을 통해 한층 젊어진다.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해서 발생하는 도시의 모더니티’처럼 낡은 이별과 새로운 사랑이 충돌하며 도시의 낭만을 발생시킨다. 혈관처럼 세밀하게 이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은 산소와 같은 사랑을 나누며 도시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파리>는 역설적인 나르시시즘의 영화다. 도시는 사랑을 꿈꾸고 그 꿈은 낭만을 이루고야 만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삶을 펼쳐내는 만큼 산만한 구석도 많지만 <파리>는 그만큼 다채롭고 풍만한 영화다. 편견이든, 착각이든, 일방적으로 포장된 도시의 실제적인 표정을 통해 진짜 낭만의 정체를 드러낸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리는 낡은 도시지만 그 낡은 풍경엔 오래된 낭만이 깊게 배어 새로운 세대에게 그 혜택을 전한다. 파리는 분명 낭만의 도시다. 그 도시는 분명 낭만을 꿈꾸게 한다. 비록 이방인들을 통해 부풀어오른 허세라 할지라도 그 도시는 분명 한번쯤 누군가가 꿈꿀만한 이미지와 정서를 품고 있다. 물론 우리가 꿈꿔야 할 낭만은 단지 파리로 날아가 해결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국의 낭만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그 결핍의 주체가 스스로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굳이 이국의 로맨스를 꿈꾼다면 낭만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건 파리지앵들에게도 쉬운 낭만이 아니다. 낭만은 파리가 아닌, 서울에도, 자신의 주변에도 얼마든지 산재해있다.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낭만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의 낭만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를 역설한다.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낭만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현명하고 뚜렷한 낭만의 역설적 전파다.
언제나 그렇듯, 다소 황당하지만 귀여운 그녀와 덜 떨어진 듯 순수한 그가 만나 에피소드는 이뤄진다. <엽기적인 그녀>이후로 곽재용 감독의 머릿속엔 그저 대조적인 성향의 여자와 남자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좌충우돌 에피소드 밖에 없는 것 같다. <싸이보그 그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싸이보그 그녀(아야세 하루카)는 먼 미래에서 지로(코이데 케이스케)에게 날아와 한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남녀의 동거가, 엄밀히 말하면 싸이보그와 주인의 합숙이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 게 좋다. 그걸 안다고 해 봤자 모르는 것만큼이나 속 터지는 일이 될 테니까. <싸이보그 그녀>는 두서 없는 영화다. 인과관계에 대한 납득은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저 시트콤 같은 상황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서사엔 스토리텔링에 대한 장기적인 배려 따윈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자아도취되는 영화의 감정선 따위에 몰입할 가능성은 반 푼어치도 발생할 리 없다. 거대한 지진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머리에 다다르면 이 영화의 태생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일본 개봉판을 재편집했다는데 전자도 딱히 궁금하진 않다. 영화의 말미에 묘사되는 지진만큼이나 100분의 러닝타임이 끔찍하게 막장이라 원래 형태를 되새김질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아야세 하루카의 미소가 작은 위로가 된다.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국내에서 방영됐던 TV시리즈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스타트렉>의 네임밸류는 분명 국내에서 ‘듣보잡’에 가깝다. 특히 <스타트렉>이 전세계적으로 ‘트레키(Trekkies)’라는 광신적인 팬덤까지 형성하며 성대한 지지를 얻은 시리즈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리즈가 국내에서 얻은 대우는 가히 ‘안습’에 가깝다. 하지만 1966년에 제작된 진 로든베리의 오리지널 시리즈로부터 5번에 걸쳐 진전된 TV시리즈와 10편의 극장판까지 업데이트 된 <스타트렉>의 발자취는 국내 사정과 무관하게 무궁무진 그 자체다. J.J.에이브람스가 이 시리즈의 프리퀄(prequel)이라 소개된 <스타트렉: 더 비기닝>(이하, <더 비기닝>)을 축조하기까지의 과정도 분명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스타트렉>은 분명 전설이다.
<더 비기닝>은 전설을 위해 마련한 또 다른 초석이다. 시작을 의미하는 부제처럼 시리즈의 시계를 원점으로 되돌린 것 같지만 실상 그 야심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자면 <더 비기닝>은 단순한 프리퀄이 아니다. 그저 앞선 시리즈가 묘사하지 못한 옛날 이야기 따위를 삽입하거나 발전된 그래픽기술을 통해 과거에 불가능했던 비주얼을 전시하는 부록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더 비기닝(The beginning)’이라는 부제는 그 위치를 알리는 지표가 아니라 일종의 선언에 가깝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는 ‘리셋(reset)’도 아니고 지금까지 진행되던 모든 사연을 뒤엎고 새롭게 건축하는 ‘리부트(reboot)’도 아니다. 말 그래도 또 다른 시작에 가깝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원점을 그려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서사의 영역을 단선적 배치로부터 탈피시킨 상대성 원리다. 공간에 구멍이 뚫리고 그 공백을 통해 차원의 장벽이 무너질 때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개념은 순간이동과 상대성 원리의 기초적 결합이며 이는 <더 비기닝>이란 프로젝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원리이자 규칙이 된다. 또한 <스타트렉>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이미 기본적인 물리적 원리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원리를 응용하는데도 무리가 없다. <스타트렉>은 영화 밖 현실에서 가설의 형태로 존재하는 물리적 법칙들이 이미 현실화된 하이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다. 그만큼 영화 밖 현실과 영화 안 현실의 괴리는 미래의 기술적 진보라는 테마 자체만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미래라는 서사적 허구는 현실적인 불확실성을 원리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판타지의 현실적 그릇으로 확보된다.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 시대적 성취로 인정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새로운 이야기의 동력원으로 확보된다.
<더 비기닝>은 이런 가능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서사의 형태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가공하거나 새롭게 포장만 바꾼 것이 아닌, 과거와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대체 현실(alternative reality)’을 창조해낸다. 마치 어떤 표면을 흐르는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우주선의 몸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더 비기닝>은 어떤 일부분의 노출을 통해 흥미를 자극하면서 거대한 결과물을 통해 탄성을 내지르게 만든다.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시작은 이야기의 파편과 같다. 그 파편의 흔적을 추적하고 새로운 파편을 수집하며 이야기의 동선을 가늠할만한 단서가 되는 거대한 원리가 등장하는 중반부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캐릭터의 탄생 시점을 비틀고 이를 통해 운명을 보존하되 새로운 필연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캐릭터의 성향이 변화하고 새로운 변주가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스타트렉>시리즈의 전통적인 트레키나 새로운 트레키의 양자가 될 후보군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다.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와 스팍(잭커리 퀸토)을 비롯해 우후라(조이 살디나)와 술루(존 조), 맥코이(칼 어번), 스콧(사이먼 페그)과 같이 새로운 얼굴로 대체된 전통적 캐릭터들은 오래된 추억과 교감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양자로서의 표정을 드러낸다. 또한 체코프(안톤 옐친)와 같은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이 시리즈가 과거와 다른 방향의 탐사를 펼칠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미래를 담보로 한 대부분의 SF영화들과 달리 다소 낙관적인 <스타트렉>시리즈의 감수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음과 동시에 과거보다 진보된 영상 기술을 통해 과감한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쾌감을 장착한다.
이는 프리퀄도 아니고, 속편도 아니다. 시리즈의 0번째 위치를 선점한 동시에 11번째 자리마저 점유한다. 시리즈의 중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출발점에 섰다. 서사에 합류하기 보단 서사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탈출해버렸다. 확실한 건 이 시리즈가 매력적인 탐사를 시작할 것이란 기대감이다. <더 비기닝>은 새로운 탐사에 앞서서 새로운 세대의 트레키를 끌어당길 거대한 떡밥 그 자체나 다름없다. <더 비기닝>은 이로서 추억을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험이 펼쳐질 광활한 우주적 가능성을 품었다. 이는 새로운 대탐사 시대를 예언하는 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제임스 커크의 질문에 관객은 답해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바꾸는 거, 반칙이죠?”올드 트레키들은 “장수와 번영을! (Live long and prosper!)”그리고 새로운 트레키들은 ‘행운을! (Good luck!)’. 어떤 쪽이라도 황홀할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개성이 강한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는 <엑스맨>시리즈는 각자 개별적인 사연의 줄기를 성장시키기 좋은 캐릭터의 금광이다. 집단으로 투척해도, 개인으로 조준해도 맥락은 가능하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앞선 세편의 시리즈에서 중심에서 활약했던 울버린(휴 잭맨)의 전사를 다룬다. 캐릭터의 존재만으로 기획을 가능케 한 영화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 열 이야기 안 부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획이다. 물론 이는 앞선 세 편의 시리즈가 나름대로 성공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더욱 설득력이 강해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울버린이 무의식을 통해 문득문득 방출하는 그의 과거사와 관련된 조각 같은 이미지들은 <엑스맨>시리즈에서 중요한 호기심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울버린의 과거를 추적하는 <울버린>은 호기심을 자극하던 캐릭터의 역사 자체를 드러내는 이벤트라는 점에서 흥미를 부른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만으로도 <울버린>은 폭넓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은 돌연변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는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고 출생의 비밀마저 듣게 된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소년의 삶이 순탄치 않게 미끄러져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불사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해나가는 로건(휴 잭맨)과 빅터(리브 슈라이버)의 서사가 감각적인 이미지를 밀어내며 나열된다. 비범한 삶의 궤도에 들어서는 캐릭터의 유년시절에서 시작해서 성장한 캐릭터의 환경을 명확한 이미지로 흘려 보내는 타이틀 시퀀스는 폭력 가운데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돌연변이의 숙명 그 자체를 짧고 굵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 <울버린>은 울버린의 과거라는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형태애서 멈춘 영화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애초에 구겨버려야 한다. 일단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꽤나 반갑다. 또한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네임밸류 아래 큰 성과가 아니다. <울버린>은 캐릭터의 기원 그 자체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발생시키지만 캐릭터의 기원을 묘사하는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색한 영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외관은 오락적 기능성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영화적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영웅의 사연을 그저 구경거리로 제한해버린 셈이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휴 잭맨)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에서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깊은 잠재력을 지닌 영화임에 틀림없다. 비범한 오프닝 시퀀스와 감각적인 타이틀 시퀀스는 그런 기대를 한껏 달아오르게 한다. 그러나 <울버린>은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멈춘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구겨버려야 한다.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는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반가움이 이를 대체한다.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아래 대단한 성과가 아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은 충분하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용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다는 의미가 적나라하게 나뒹굴 뿐이다.
우주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운석이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결혼식 날 거인이 된 수잔(리즈 위더스푼, 한예슬)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기지에서 선배(?) 몬스터들과 함께 ‘거대렐라’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채 격리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계로부터 정체불명의 거대로봇이 또 미국 땅에 떨어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전군이 동원됐지만 거대로봇에게 맞서긴 역부족이다. 결국 비밀리에 격리돼있던 몬스터들이 출격한다. ‘거대렐라’가 된 수잔과 함께 미씽 링크와 닥터 로치, 밥은 작전에 성공하면 자유로운 신분을 주겠다는 워 딜러 장군(키퍼 서덜랜드)의 약속과 함께 거대로봇을 제압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온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박진감 넘치는 SF액션물의 외피가 예상돼지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나사 빠진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와 대사를 통해 유머로 발생시키는 스크루볼 코미디에 가깝다. 특히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라는 혈통을 입증하듯 의인화된 몬스터 캐릭터들이 해학적인 위트를 구사한다. 스토리 라인 자체는 결과적으로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는 정서적 감흥이 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식상한 스토리는 어떤 면에 있어서 <몬스터>의 야심에 어울리는 배경이다. 인간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몬스터들이 지구를 구하고, 되레 인간의 혐오를 극복하며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존재로 변태되는 성장스토리엔 나름대로 제 크기에 걸맞은 의미가 있다. <몬스터>의 야심은 심오한 스토리텔링과 어울릴만한 것이 아니다. 스토리는 조연에 가깝다.
주연은 영상이미지다. ‘인트루 3D(Intru 3D)’라 지칭되는 3D영상기술을 통해 구현된 입체적 영상이 <몬스터>의 야심 그 자체다. 시각적 기술의 진일보를 통해 새로운 차세대 엔터테인먼트의 자극을 체험하고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일수록 이미지는 단명해진다. 거대로봇과 맞서는 몬스터들의 에피소드는 거대한 사물의 등장을 통해 스케일을 넓히고 스펙터클을 확장하려는 기술적 성취의 전시적 욕망의 부산물에 가깝다. <몬스터>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시킨 3D영상의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알리는 현대의 지표란 점에서 일단 흥미롭다. 이미 역치의 수준이 실무율의 단계에 들어선 영상의 오락적 기능성을 대체할 입체영상의 현대적 지표가 어느 수준에 다다랐는가를 증명하는 기술적 성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몬스터>는 되레 자신의 야심과 다른 지점의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 같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담보로 한 혁신적인 이미지를 장착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떤 수준 이상의 이야기와 함께 맞물리지 못한다면 영화적 만족도를 주지 못한다는 것. 뛰어난 효과는 뛰어난 영상의 기반이 되지만 그것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창작적인 스토리를 기반으로 삼지 못한 이미지는 결국 영화로서의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인상적인 매력이 있지만 그것 또한 <몬스터>를 권할 만큼 강력한 매력이라 정의 내리기도 쉽지 않다. <몬스터>는 창작과 기술의 조합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