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욕을 자청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욕을 해댈수록 주가가 상승하는 <SNL 코리아>의 헤로인 김슬기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장기는 욕이 아니다. 배우 김슬기의 연기가 제대로 먹혔다는 말이다.
<SNL 코리아>(이하: <SNL>)에 출연한지 1년이 넘었다.
첫 생방송 당시엔 너무 떨려서 헛구역질이 다 났다. 그때는 토요일 생방송을 위해서 일주일씩 준비했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크루’들이 대본 좀 빨리 보내달라고 건의했다.
지금은?
이젠 방송 전날에 리딩하면 왜 당일에 하지 않고 전날하냐고 농담이 나올 정도다. 다들 마음이 편해졌다.
생방송이라서 종종 웃음을 참는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지는데 그게 은근히 웃기다.
신동엽 선배님의 캐릭터가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도 조금씩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웃음이 터졌을 때 누군가가 정색했다면 아무도 시작하지 못했을 거다. 일종의 노련한 스킬이랄까.
오픈 스튜디오의 라이브쇼란 점에서 연극 무대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래서 적응하기 편했다. 연극 무대로 조금 먼저 데뷔했으니까.
데뷔한 계기는?
학교 선배님이었던 장진 감독님이 학교 동아리의 큰 공연을 장진 감독님이 연출자였다. 그때 감독님께서 내 연기를 좋게 봐주셨는지 몇 개월 뒤에 부르셔서 연극이랑 <SNL>을 함께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어보셨다.
<리턴 투 햄릿>에선 복수할 때 쓰는 칼 역할이었다는데, 이름이 칼은 아닌 것 같은데(웃음).
장진 감독님이 <매직타임>이란 연극을 <리턴 투 햄릿>이라는 연극으로 재구성했는데 중간에 마당극 형식이 변한다. 그때 햄릿을 증언하기 위해서 칼이 등장하는데 내가 커다란 칼 모양 탈을 쓰고 등장하는 식이었다.
뒤집어 쓰는 것과 인연이 있나 보다(웃음).
탈쓸 때만 예뻐 보인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웃음).
탈을 쓰고 등장하는 이미지로 인해서 지나치게 희화화될지 모른다는 경계심은 없었나?
다른 곳은 몰라도 <SNL>이기 때문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한테 큰 머리와 뚱뚱한 옷, 짧은 다리가 너무 잘 어울리더라(웃음).
크루들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 꽤나 즐거워 보인다.
대체로 화기애애하다. 사실 <무한도전>처럼 <SNL>도 장수하고 나 역시 대표 크루로 장수해서 오랫동안 이것만 하다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하다는 거지.
평소에 욕해달라는 사람은 없나?
일상이다. 그런 얘길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니까. 나를 좋아해주는 분들은 대부분 내가 하는 욕도 좋아해주는 분들 같다. 싸인할 때조차 욕 좀 해달라는 분들이 많더라.
고민되는 부분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없다. 이런 캐릭터를 하는 것도 행복하고, 이런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의 나도 좋아하니까. 연기할 때는 그런 캐릭터를 끌어내기 쉽다. 하지만 일상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분들을 만날 때 조금 힘든 건 있다.
실제 본인의 성격은?
에너지를 금방 소모해서 충전과 방전이 반복된다. 그러니까 충전할 때의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김슬기가 원래 저런가?’ 사실 조금 더 차분한 편이기도 하고.
TV 속의 김슬기와 TV 밖의 김슬기의 차이를 확인한 사람들의 반응이란?
내게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좋게 봐주는 분도 있는 반면 자기가 원했던 TV 속의 김슬기가 아니라서 실망하는 분들도 있다. 나를 보는 분들이 저마다 다른 만큼 반응도 다양한 것 같다.
자신의 다양성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나 보다.
사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 오히려 신기하다. 누구에게나 뒷면이 있지 않나. 착한 사람도 나쁜 생각을 할 수 있고, 차분한 사람도 흥분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다양한 면이 있는 사람 같다. 그래서 배우를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긍정적인 편인가.
낙천적일지도.
<SNL>은 보수적인 사람들 입장에선 불편한 방송일지도 모른다.
나도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어느 정도로?
수영장에 한번도 가본 적 없다.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기분이랄까(웃음). <SNL 코리아>에 출연하기 이전까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SNL>을 선택했을까?
처음엔 19금 프로그램이 아니라 15금 정도였다. 19금 프로그램이 된 이후로도 힘든 부분은 없었다. 시즌2 초반에 잠시 섹시 컨셉트를 연기했지만 특별히 힘들진 않았다. 노출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의 반응은?
경상도 분들이라 표현이 어색하다. ‘잘했다. 챙겨봤다. 못 봤다. 바쁘냐?’ 이게 다다(웃음).
고향이?
부산이다. 스무 살에 대학 진학 때문에 상경했다.
졸업했나.
휴학 중이다.
당연히 연기 전공인가?
연기학과 뮤지컬 전공이다.
뮤지컬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노래도 하고 싶고, 춤도 추고 싶고, 연기도 하고 싶었다. 내 욕심에 하나만 하기엔 뭔가 아쉽더라. 그런데 뮤지컬이란 장르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럼 뮤지컬 배우가 돼야겠다고 막연하게 접근했다. 사실 부산에선 뮤지컬을 볼 기회도 없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꾼 시점은?
고등학교 시절,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 그 이전에 초등학생 시절부터 예술 분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 쓰는 싸인도 초등학교 때 만든 거다.
노래를 잘한다는 건 언제 알았나?
중학생 때 친구 따라서 가요제에 나갔는데 내가 상을 탔다. 그때부터 기회가 되면 가요제란 가요제는 다 나갔다.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가수만 하기엔 아쉽다고 생각했고 좀더 특별한 걸 찾다가 뮤지컬 배우를 찾았다, 뮤지컬 배우가 된다면 언제든 가수나 배우로 방향을 틀어도 될 거라 생각했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로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는 없을까?
그런 기대들이 많아서 너무 부담스럽다. <무서운 이야기 2>의 출연배우는 8명인데 저마다 다 주연이기 때문에 사실 내가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기대만큼 크진 않다. 일단 이번엔 김슬기가 영화도 하는구나 정도를 보여주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촬영 과정은 어땠나.
너무 춥고 힘들었다.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지만 영화를 찍는 시기가 하필 그 얼마 안된 시기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첫 영화이니 신경 써서 하고 싶었지만 2주간 잠도 못 자고 촬영하다 보니 체력도 딸리고 너무 추웠다. 개인적으론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을 겪었다는 의의가 있었다.
6월부터 뮤지컬 <투모로우 모닝>으로 무대에 오른다.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첫 뮤지컬 무대다.
어렸을 땐 조정석 선배님이나 김무열 선배님처럼 무대에서 인정 받은 뒤에 방송으로 나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방송으로 데뷔하기란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운 좋게 방송으로 데뷔했고 오히려 언제쯤 뮤지컬에 도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점점 부족함을 느끼면서 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회가 와서 생각보다 빨리 도전하게 됐다. 배우로서 욕심이 있다 보니 놓치긴 싫더라.
언젠가 욕심나는 작품의 스케줄로 인해서 <SNL> 출연이 어려워질 수 있다. 고민해본 적 있나?
<SNL>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종종 고민한다. 어떻게든 <SNL>의 스케줄을 끌고 갈 수 없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미궁 같은 고민이지만(웃음).
별일 없이 산다고 노래하면서도 참 별일이 많았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장기하는 얼굴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다.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이인 그들은 역시 여전한 기대를 부른다. 마치 ‘네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라고 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내고 가져갑시다.” 무엇을?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의 신곡 ‘좋다 말았네’ 음원을. 어디서?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어떻게? 원하는 가격으로, 최저 10원부터. 그래서 ‘백지수표 프로젝트.’ 그렇다면 왜? 장기하가 답한다. “음원 가격 결정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의견은 분분한데 소비자들에겐 직접 가격 책정을 맡겨본 적이 없지 않나. 한시적인 프로젝트지만 음악을 듣는 분들의 생각을 약간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뮤지션들이 직접 자신들의 음원 가격을 책정해서 시장에 내놓고 100% 수익을 가져가는 음원 프리마켓을 운영하던 현대카드 뮤직에서 장얼에게 무언가를 같이 해보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터였다. 장얼이 생각한 게 바로 소비자가 책정한 가격대로 음원을 제공한다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다.
국내에서 360만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강남스타일’로 싸이가 얻은 수익은 6600만원이었다. ‘강남 스타일’의 음원당 가격은 18원이 조금 넘는 수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162건의 다운로드가 기록된 ‘좋다 말았네’의 음원 누적금액은 2644049원. 곡당 1200원 이상을 호가하는 가격이다. 그 수치만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현대카드의 전태영 사장은 트위터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곡의 가치만 내라는 장얼의 부탁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가를 낸 것 같다.” 이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로 새롭게 정립된 음원가격이 음원 소비자의 객관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장얼의 팬들의 주관적인 애정이 담긴 수치로 보인다는 의견이다. “사실 팬들이 우리 체면을 살려줬다고 봐야지(장기하).” 장얼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겐 팬들과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직접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우리 음원을 다운로드 받았는데 아무리 간소하게 절차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더라. 그런 귀찮은 과정을 감내하면서 우리 음원을 사주신 분들이 고마웠다(장기하).” 그렇게 장얼은 5년 만에 팬들과 교감했다.
시작은 2008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귓바퀴를 휘감으며 심심찮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한 음절 툭툭 내뱉듯 또박또박하게 발성하는 가사엔 묘한 맛이 있었다. 랩 같기도 한데, 노래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데,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나. 에스프레소를 뽑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라떼도 주문할 수 있는 카페에서도 적잖이 ‘싸구려 커피’가 들렸다. 그 즈음 온라인에선 어느 밴드의 라이브 동영상이 적잖이 전파됐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며 진지하게 노래하는 한 사내의 양 옆으로 선글라스를 낀 두 여인이 무표정하게 팔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 그 사내란다. 장기하라고 했다.
장기하가 출연한 그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홈레코딩으로 만든 세 곡의 노래가 든 싱글 앨범이 불티나게 팔렸다. 장기하는 혼자서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도 하고, 연주도 하고, 집에서 직접 녹음도 했다는데 공연만큼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당장 무대에서 함께할 세션들을 구했고 결국 항상 함께할 멤버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가 좋아하는 ‘토킹 헤즈’를 모티프로 작명된 밴드명이다. 사실 데뷔 초기의 장얼과 지금의 장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얼굴들’이 많이 달라졌다. 라이브 무대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두 여인 미미 시스터즈(코러스, 안무)가 탈퇴하면서, 남자 일색의 밴드로 재탄생했다. 장기하가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 드러머였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원년 멤버 이민기(기타)와 정중엽(베이스)은 여전하지만 2집부터 새롭게 가세한 이종민(건반)과 원년 드러머의 군복무로 최근에 합류한 전일준 그리고 일찍이 장얼의 비밀병기였던 하세가와 요헤이(기타)까지 합세하며 6인의 진영이 갖춰졌다.
‘김창완 밴드’의 일원이기도 했던 하세가와 요헤이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한지 20년에 달하는 기타리스트다. 지난 2집 <장기하와 얼굴들>에선 프로듀서와 기타 파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그 이전부터 장얼의 보이지 않는 멤버였다. “처음엔 기타 두 대가 필요한 곡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멤버가 되기 어려웠지만 함께 작업할수록 마음이나 생각이 잘 맞았다. 점점 하세가와 형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식멤버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대외적으론 큰 변화처럼 보이겠지만 내부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장기하).” 사실 하세가와 요헤이의 영입에는 장기하의 투병도 한몫 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밝혔듯이 장기하는 국소이긴장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기이하게도 종종 손이 꽉 쥐어져서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는 증상인데 장기하의 왼손에도 같은 증상이 생겼고 덕분에 일찍이 드러머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1집 당시만 해도 기타를 연주했지만 이젠 기타 연주도 어렵다. 그래서 사실상 트윈 기타 체제였던 밴드에 기타 파트 하나가 공석이 됐고 자연스럽게 하세가와 요헤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하세가와 형이 나보다 기타를 훨씬 잘 치니까 내 손이 불편해진 덕분에 우리 전투력이 상승할 수 있었던 거죠(장기하).”
처음 장얼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가 미미 시스터즈의 시크한 퍼포먼스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장기하가 써내려간 구성지고 알싸한 구어체 가사의 묘미와 반복적인 후렴구가 주는 경쾌한 리듬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중현, 송창식, 산울림, 송골매 등 7~80년대 국내 음악신을 이끌던 대가들의 무드를 버무리듯 얼큰하게 재현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음악적 영역을 구축해내는 저력이 있다. 불과 두 개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밴드에게 과찬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지난 5년 사이에 장기하와 얼굴들만큼 영향력 있는 밴드가 국내에 얼마나 등장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장얼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지난 2집에서는 큰 음악적인 변화가 발견됐다. 멜로디가 풍요로워지고 사운드의 입체감이 더해졌다. “아마 내 생각엔 키보드 때문인 거 같다(하세가와 요헤이).” 키보드 멤버의 영입은 밴드의 음악 제작 방식도 변화시키는 계기도 작동했다. 장얼의 음악은 대부분 장기하가 가사를 만들고 흥얼거리는 리듬을 통해서 얻어진 대략적인 멜로디를 통해서 시작된다. “1집 같은 경우엔 내가 멤버들에게 악보를 주고 이대로 쳐주라고 부탁했지만 2집에선 곡의 뼈대만 만들고 같이 합주를 하면서 편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연주자들만 생각할 수 있는 플레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좋다 말았네’를 포함한 3집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장기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건 여전하지만 이젠 장기하 안에서 끝나는 밴드가 아닌 셈이다.
무엇보다도 장얼의 가능성은 끈끈한 팀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냉면’이 뜬다는 하세가와 요헤이를 따라서 다들 냉면 애호가가 돼버렸다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장얼의 멤버들은 서로의 술버릇을 두고 또 한번 유쾌하게 떠든다. 길게는 5년간 동고동락한 멤버들은 이제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잘 통하며 잘 닮아간다. 그들에게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는 직업 이상의 즐거운 꿈이다. 그리고 오는 5월 12일, 또 한번 꿈은 이루어진다. 호스트가 돼서 게스트를 모시고 공연을 펼치는 ‘얼굴들과 손님들 1탄’이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린다. 첫 번째 게스트는 뉴욕의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텔레비전.’ 이들의 첫 내한 공연을 모시게 된 경위 또한 장얼스럽다. “우리도 지금까지 신기해하는 일이다. 하세가와 형으로부터 텔레비전이 일본 공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가서 보자!’ 이러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접선이나 해보자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데 메일을 주고 받다가 정말 성사돼버렸다(장기하).” 농담처럼 시작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우리 멤버들이 좋아하는 밴드 중엔 중에 해외에 비해서 국내 인지도가 낮은 탓에 내한하기 힘든 밴드들이 많다. 그들을 초대해서 ‘얼굴들과 손님들’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좋아할 이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장기하).” 참고로 오는 가을에 발매될 3집 앨범은 심플하지만 강력한 로큰롤을 구상한다니, 기대하시라. 장기하가 부른 그 노래가사처럼. ‘뭘 그렇게 놀래?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지 몰라?’
이미숙이 배우라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숙이란 배우를 아무도 모른다. 배우이기에 그녀는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를 위해서.
<최고다 이순신> 1회 시청률이 20%를 넘겼다.
내 복이지, 뭐(웃음).
<최고다 이순신> 1화에 송미령이 자신의 오래된 출연작을 보는 장면이 있다. 자세히 보니까 <겨울 나그네>(1986)던데, 얼마 만에 본 건가?
그 영화가 한 27년 됐지? 사실 내 작품을 다시 볼 일이 없지. 새롭더라. 문제는 그 세월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거야. 그저 엊그제 같다. 지금도 그런 감정으로 연기해보고 싶지만 들어오는 건 엄마 역할밖에 없으니까 새삼 현실적인 비애가 느껴졌다.
이젠 특별히 하고 싶은 캐릭터도 없을 것 같다.
맞다. 내게 맡긴 역할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난 사전에 감독이나 작가와 상의하면서 그들과 생각을 조율한다. 이미숙이라면 이 정도는 해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과 작업하면 오히려 내가 나한테 갇히니까 손해다. 내 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내게 있는 거지.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들자’는 각박한 캐릭터인데 밉지 않더라.
항상 강하고 억센 캐릭터에겐 해학이 보여야 미워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삶은 해학이다. 삶의 코드는 유머라고. 힘든 일을 하다가도 누군가의 한 마디에 킥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것처럼. 억척스런 캐릭터에게 유머가 보이지 않으면 너무 뵈기 싫을 거다. 그래서 들자처럼 억척스러운 엄마 역시 나름의 행복을 느끼는 부분이 있을 테고, 그 캐릭터 안에서 웃음을 발휘할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고민했다.
완벽주의자인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하지 못하니까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거다. 죽을 때까지 연기해도 완벽이란 건 없을 거다. 그래서 노력하는 거고.
그런 사람이 결국 조직에서 악역을 도맡더라.
살다 보면 인내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형평성이 어긋나는 건 누군가 잡아줘야 된다. 결국 강한 사람이 잡아주고 어떤 체계나 선례를 만들어나가야지. 그냥 한번 하고 마는 건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책임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일만 한다면 그런 상황을 또 만들 수 있다는 거고. 난 그런 상황에서 일하는 방법을 모른다. 할 건 하는 거다. 그건 성질의 문제가 아니잖아.
연기한 걸 후회한적 없나.
후회해본 적 없다. 열심히 연기했고, 연기를 위해서 나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배우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다만 배우로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선 회의가 있지. 하지만 그 회의감이 연기에 대한 마음을 이기진 못하는 거 같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거냐고 물어보면 그렇다.
운명적이란 말인가.
연기하길 정말 잘했다. 연기하는 순간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배우가 직업인가? 내겐 그렇지 않은 거 같다. 직업이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데, 그런 논리로 연기하진 않았다. 30년 넘게 연기했지만 많은 자산을 축적하지도 못했고, 작품을 많이 한 편도 아니다. 그저 캐릭터의 삶이 나를 통해서 어떻게 투시될까 생각만 했다. 그냥 지금의 내가 연기하는 지금의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거지.
연기하는 캐릭터마저도 당신의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배우로서 송미령이란 배우를 연기하는 건 어떤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송미령의 아웃라인에 대한 소스는 지금의 내게서 얻어낸 부분이 있다. 50대임에도 잘 나가는, 워너비가 될 수 있는 배우.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은 달라지겠지. 송미령의 심각함 속에도 부드러운 감정이 있을 거다. 그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송미령은 배우로서 신뢰해왔던 매니저와 갈등을 겪고 실망하기 시작한다. 사람에게 실망한 경험 없었나.
연예인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 부류다. 이 사람들의 세계가 그만큼 단순하다.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단순하고, 이성적이지 못하지. 그런 배우와 가장 근접한 건 매니저 같은 사람들인데 매니저는 이득을 위해서 일을 취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배우는 그들에 의해서 움직여야 되는 사람이다. 그런 관계에서 갑자기 신뢰하던 사람이 돌변하면 대처하는 능력은 배우가 월등히 떨어진다. 그것까지 그 사람들이 해줬으니까.
사실 송미령이란 캐릭터가 최근에 좀 시끄러웠던 송사를 연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캐릭터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더라.
피할 이유는 없잖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지금의 결과다.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법이란 건 지금까지의 경험과 다른 세계더라. 나는 지금까지 감성적으로, 인간적인 관계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법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움직인다. 사실 법을 몰라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법을 들이미니까 당황스럽더라. 결국 내 자신의 떳떳함을 읽어주는 건 대중이다. 물론 대중들은 진위와 무관하게 자극적인 말을 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사생활이 어떻든 간에 내가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확하게 보는 인식은 있단 말이다.
배우로서 충실히 살아왔다는 자신감 덕분인가.
배우니까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해야 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 사실 배우의 사생활을 평가하거나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건 대중의 역할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가 말미를 주니까 허를 찔리는 거다. 결국 배우로서의 평가가 중요한 거다. 그런 자신감을 얻을 수준이 되지 않는 배우에게 사람들은 간섭하거나 참견하고 방향까지 제시하려 든다. 결국 중요한 건 행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가장 정확하게 있느냐는 거지.
<미라클 코리아>의 MC를 맡았다. 연기 외의 방송활동도 늘어난 것 같다.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 방에서 TV로 볼 땐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분야든 그만의 고통이 있다. 물론 힘들지 않으면 일이 아니겠지.
<기적의 오디션>에서 탈락자를 발표하고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이미숙이란 사람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를 심사한다는 건 이성적인 일인데 나는 너무 감성에 치우진 사람이더라. 조직의 인사개편엔 미흡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다(웃음). 이런 취약점이 있다는 걸 <기적의 오디션>으로 느꼈다. 능력은 없었어도 내 감정만큼은 진짜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미숙이 자신과 다르다고 느낀 적 없나.
아마 사람들은 이미숙이라면 세고, 냉정하고, 어렵고, 무섭고, 뭐 이런 수식어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일적으론 그렇다. 나는 프로니까 받은 만큼 해내야 하고, 더 받기 위해서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정에 약하고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사실 50세를 넘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늙어가는 건 피해갈 수 없을 거다. 그만큼 맡을 수 있는 배역의 가짓수도 줄어들 거다.
순응해야지. 발버둥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 역효과가 일어난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고. 살짝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 되는데 사실 그렇기가 조금 힘들더라. 나도 그로부터 편해진 건 불과 2~3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렇다고 나를 놓는다는 게 아니다.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러니까 방법이 생기더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난다. 그래서 지금은 편하다. 다만 배우로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건 숙제 같다. 어쨌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배우로서 잘할 자신이 있다. 열심히 살아가면 되니까, 정말 그렇게 살 자신 있다.
미국에서 돌아온 감독 김지운이 드디어 한국에서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그런데 제목부터 심상찮다. <사랑의 가위바위보>라니, 코오롱과 함께 하는 단편 프로젝트의 일환이라지만 두 눈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그를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촬영 중간에 모니터를 보는 모습이 영락없이 감독이더라. 피사체가 되는 기분은?
별로다(웃음). 사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숨어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관음증의 속성이 있다. 그래서 거꾸로 객체가 돼버렸을 때의 당혹감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보듯이 나를 보겠구나, 싶은 어색함. 모니터를 보는 건 그저 감독으로서의 직업병이고(웃음).
연출에 매력을 느낀 계기는?
어릴 때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배우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던데.
이번에 찍을 단편 <사랑의 가위바위보>(가제)에 관해서 말했다.
가제이지만 김지운의 영화 제목이 그렇다니 쇼킹하다(웃음).
2000년도 초반에 제작비 10만원을 받아서 영화를 찍는 ‘10만원 비디오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사랑의 가위바위보>가 그때 기획된 단편이었다. 남산에서 크랭크인하고자 모였는데 비가 억수 같이 왔다. 10만원 예산 영화의 날짜를 미룰 수 없으니 비가 오지 않는 경기도로 가서 <사랑의 힘>이란 단편을 찍었다. 문소리 주연에 카메오로 송강호도 나온다.
로맨스 장르는 처음인데.
그 동안 너무 남자 이야기만 해서 여자 중심의 영화를 찍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장편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마침 코오롱에서 단편 제의를 했고 묵혀둔 소재를 풀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로맨스물을 거의 보지 않은 편인데 내게 낯선 장르가 내 영화적 감수성이 충돌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사실 전면적으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한다는 건 모험이라서 이런 단편 작업은 점검의 동기가 된다. 브리지나 인큐베이팅의 역할도 되고.
도시, 자연, 사람이라는 테마에 자신의 개성을 녹여야 한다는 고민이 있을 것 같다.
아직 흐릿한 상태지만, 아웃도어 룩이 도시적인 룩의 한 형태로 자리잡아간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도시도 자연의 큰 범주라고 본다면 아웃도어 룩을 입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담아낸다면 ‘Your Best Way to Nature’라는 코오롱의 슬로건과 내 주제가 자연스럽게 버무려질 거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연출작에서 공간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계단의 이미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 연인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따라가는 과정엔 그 관계에 관한 상징성이 있다. 가위바위보라는 게임에 잠재된 승부욕이나 계단의 상승적인 이미지로 연상되는 실현욕구는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방랑자처럼 보일 정도로.
항상 지금의 모순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에 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 <달콤한 인생>은 내면으로 침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영화가 떠올라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처럼 호쾌한 영화를 만들었다. 시각적인 스펙터클은 좋았지만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밀도가 빽빽한 <악마를 보았다>를 쥐어짜듯이 만들었다. 그런데 괴롭고 우울해서 B급 코드의 유머를 펼칠 수 있는 <라스트 스탠드>에 닿게 됐다. 내 안에 잠재된 호기심이나 벗어나고 싶거나 바꿔보고 싶은 욕망들이 결합되어 차기작에 반영되는 것 같다.
명확한 설계도를 그리고 작업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A부터 Z까지 딱 떨어지게 계획하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통해서 점점 명확해진다. 배우가 들어오고, 의상이 들어오고, 공간이 생기고, 이야기가 점점 맞춰진다. 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게이머인 셈이다. 어떤 결과를 프로그래밍하지만 게이머로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주제로 굳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아직 싱글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너무 바빴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나를 길게 봐야 되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한편으론 이 두 가지를 잘할 자신이 없고, 아직까진 자유로운 게 좋다. 그런데 <놈놈놈> 때 3개월 이상 외국에 나가야 되니까 짐을 싸는데 정말 혼자 싸기 싫어서 10시간 정도 짐을 싸다가 풀다가 반복했다. 와이프가 있다면 전화 한 통으로 필요한 걸 받을 수 있을 텐데 싶어서 그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했다(웃음). 이번에 뉴욕에서도 외롭더라.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1년 4개월씩 있으니까 외로워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더라. 한국에서의 외로움은 선택이었는데 외국에서의 외로움은 완전히 박탈인 거다(웃음). 한편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홍상수, 임상수, 이처럼 영화를 잘 만든다고 생각한 한국 감독들은 다 결혼했더라. 박찬욱 감독은 딸 얘기하고, 봉준호 감독은 아들 얘기, 류승완 감독은 분유 얘기하고(웃음). 난 사명감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일종의 사명감 같다. 어쩌면 가족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닐까. 일을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서 벗어나는 거니까(웃음)
할리우드에서의 촬영은 어땠나?
초반엔 약간 현실성이 없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뿐만 아니라 흑인 배우 중에 몇 되지 않는 아카데미 수상자인 포레스트 휘태커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니까 되게 신기하더라(웃음). 처음엔 LA에서 미팅을 할 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쩌다가 내 앞에 있지(웃음)? 게다가 자신이 직접 출연하고 싶다고 온 거라니.
이병헌에 관해 들은 바는 없나?
<지. 아이. 조 2> 촬영장에서 이병헌이 연기할 때 스태프들이 모니터에 모여서 구경한다더라. 브루스 윌리스가 나올 때도 그렇진 않다던데. 일단 뿌듯하다. 물론 내가 키운 배우는 아니지만(웃음), 나와 오래 작업한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니까. 심지어 <레드 2>에 나오는 명배우들도 다 이병헌을 좋아한다더라. 일하는 사람들은 일 잘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지 않나.
할리우드에서의 경험이 특별한 모티프가 되진 않을까?
할리우드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도 없었고 특별히 할리우드에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놈놈놈>과 <악마를 보았다>를 찍고 나니까 내게 영화 찍는 일이 즐겁지 않더라. 사실 <장화, 홍련>때부터 계속 제의가 왔었는데 새로운 공기가 필요했고 나를 다시 최악의 상태로 던져보자고 생각했다. 결국 <라스트 스탠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고, 그 목적은 할리우드 진출이라기 보단 한국에서 느꼈던 현장의 즐거움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차기작은 한국에서 할 건데, 할리우드에서도 <라스트 스탠드> 이후의 제안이 들어오곤 있다.
1화 대신 1수. 윤태호는 바둑의 한 수를 두듯 <미생>을 그려나간다. 한 수 한 수 현실과 이상의 대국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가 지어지고 허물어진다. 그래서 미생이다.
단행본 네 권의 판매부수가 10만부를 넘었다.
사실 출판사와 계약한 건 다섯 권이었고 1년 연재하면 끝나는 분량이었으니 그것만 하고 털어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10수 지나면서 힘이 실린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날개 달린 대리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지날 땐 이거 길게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생>은 웹툰이지만 단행본으로 보는 맛도 괜찮더라.
사실 <미생>은 단행본 페이지로 먼저 만들고 나서 한 컷씩 떼어 웹상에 붙인 작품이다. 보통 온라인에서 상하로 나뉜 컷과 컷의 간격에 삽입된 내레이션이나 대사엔 임팩트가 있다. 그런데 책에선 스크롤 방식으로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대사가 구석의 작은 컷 안에서 훅하고 지나가니 그런 느낌이 덜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으로 먼저 보다가 기다리기 감질나니까 온라인으로 넘어온 독자들 중엔 오히려 책이 낫다는 이들도 있다. 결국 받아들이는 독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더라.
바둑과 직장을 소재로 둔 만화를 제의 받은 후 연재까지 3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위즈덤하우스에서 제안한 건 바둑의 10계명이라 불리는 ‘위기 10결’을 통해서 직장인들의 처세를 설파한다는 컨셉트의 작품이었다. 10년 전부터 바둑꾼들의 이야기를 생각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이끼>는 준비부터 완결까지 5년이 걸렸다. 그렇게 보면 내가 60세까지 할 수 있는 작품이 몇 타이틀 안 되는데 <이끼>를 끝낸 마당에 직장인들의 처세에 관한 만화나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일단 계약금을 받았고, 그 제안을 배려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서야 지금의 방향을 제시했다. 도리어 출판사에선 고마워했다. <이끼>가 영화화되고 유명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작가가 알아서 잘할 텐데 괜히 앞질러간 게 걱정됐다더라. 반대로 난 2년 동안 시간을 보내고서야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었다(웃음). 3년간 작품을 준비하는데 한번도 날 흔든 적이 없었다. 그런 배려 덕분에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직장생활 경험이 없으니 취재원이 필요했을 텐데.
6수 연재할 때까지 취재를 거절 당해서 취재원을 못 만났다. 그래서 초반엔 회사 모습이 좀 두리뭉실하게 그려졌다. 사회경험이 많은 직장인들도 볼 텐데, 내가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한 지인으로부터 상사맨인 남자친구를 소개받고 시작됐다.
6수까지? 불안하지 않았나?
계약상 더 이상 연재를 미룰 수 없었다. 역시 계약은 위대하더라(웃음). 기업 홍보팀에 전화하면 매번 거절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 만약 공식적인 루트로 조언을 받았다면 기업의 이미지를 염려하느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분들 입장에선 반기업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포함될 수도 있고.
지금은 취재원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 같다.
메일이 엄청 온다. 특히 요르단 에피소드에선 취재 협조를 자원하는 주재원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말에 문맥이 있듯이 취재에도 결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의 이야길 듣게 되면 충돌 지점이 생기겠더라. 물론 사진 자료나 기본적인 정보는 감사하게 받았지만 맥락을 흔들만한 디테일이 유입될까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사람을 만나진 않았다.
시점을 유지하는 주체를 명확하게 두고 다양한 팩트만 수집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 <미생>의 원 인터내셔널은 취재원들과 함께 만든 가상의 회사다. 그 회사의 폼은 일반적으로 여러 회사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설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가 끼어들면 전혀 다른 방향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염려스러웠다.
당신에게 직장 경험이 없었던 것처럼 장그래도 직장을 처음 경험한다.
장그래의 보고서 작성 에피소드를 위해서 취재원들에게 긴 문장을 짧게 축약한 보고서 작성 사례를 제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결과는 갖고 있었지만 그 과정을 그리는 건 내 몫이었다. 그 과정을 찾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나와 장그래가 똑같이 발전한 셈이다. 과거 미술로 인해서 좌절했던 내 경험이 장그래의 대사로서 삽입됐을 수 있고, 데뷔 전 문하생 시절의 후회나 반성이 장그래의 인턴 생활과 겹쳤을지도 모른다.
인물의 상황에 공감하면서 자기 현실을 늘어놓는 댓글이 자주 보인다.
다들 알아서 자기 고백을 해주니까 제2의 취재가 된다. 가끔씩 올라오는 이견들도 악플과 다른 진지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끼>때와는 상반된 체험이다.
공감대를 키우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은 없었나?
93년도의 데뷔작을 독자 입장에서 처음 봤을 때 그 작품이 너무 모자라 보였다. 제3자가 된 거지. <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떤 주의나 주장을 펼치기 보단 목격하듯 묘사하자는 거다. 내가 내 데뷔작을 봤던 것처럼 독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제3자의 입장으로 목격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대사를 소박하게 쓴다. 문장이 현란하면 특정한 누군가의 정체성처럼 느껴지지만 문장이 소박하면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나.
<야후>나 <이끼> 그리고 <미생>의 사연은 주인공들의 실패와 절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불처럼 뜨겁게 번지는 인물이라면 <미생>의 장그래는 물처럼 차갑고 유하게 흐르는 인물이다. 작가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처럼 보인다.
최근에 이런 얘길 들었다. “드디어 작품에서 어머니가 나오네요.” 깜짝 놀랐다. 전작들에서 주인공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건 모두 가부장이었던 거다. <로망스>에선 장인어른이 모델이었고, <야후>나 <이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도 아버지와 연관된 이야기였다. 사실 <이끼>로 단단하게 매듭을 지은 느낌이 있었다. 가부장이란 정서에 기대서 창작해왔던 시절이 <이끼>로서 결산된 느낌이랄까. <미생>엔 확실히 모성애적인 코드가 있다. 영업 3팀에서도 모성애적인 연민이 강하지 느껴지지 않나.
개인적인 삶에서 계기를 찾을 순 없을까?
한번은 고향 가족들과 지리산에 놀러 갔는데 어머니께서 딸에게 물으셨다. “아빠가 무서워? 엄마가 무서워?” 그러니까 엄마는 화를 많이 내도 이해해주는 느낌이 있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화만 내니까 무섭다고 했다(웃음). 한편으로 서운한 이야기지만 확실히 아내가 잘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가끔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애들한테 화낼 때 아내에게 짜증내면서 뭐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큰 애는 엄마가 자기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정서적으로 믿는 거다. 아내의 힘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이야기도 변화시키는 것 같다.
<이끼>는 보는 사람도 힘이 들어가는 작품이었다. <미생>은 반대다. 그건 작가도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물론 마감은 항상 힘들겠지만(웃음).
프롤로그에선 자기 연민에 빠진 인물이 나온다. 슬픔을 먼저 던져주고 진행하는, 전형적인 내 패턴인데 그걸 딱 보니까 과거처럼 하기 싫어졌다. 나이를 먹으니까 몸이 어떻게든 조금은 자라있어서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을 수 없으니까 갈아입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그래라는 이름도 특이하다.
그 이름은 3수에 등장하는데 거의 3수 시작 직전에 생각한 이름이다. 당시에 ‘예스(Yes)’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오피스텔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거울에 비친 단어를 보고 ‘그래. 장그래?’하는데 어감이 착 붙더라. 그리곤 여자가 ‘안녕’하면 남자는 ‘그래’하는 걸로 여자 캐릭터는 ‘안영이’로 지었다(웃음). 바둑에서 오래 사는 돌을 부르는 장생을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웃음).
<미생>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축을 잡고 저마다의 시점과 합리를 설득한다.
다양한 직장인들이 그들 자신을 투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캐릭터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주인공은 그런 이들을 드러내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거다. 워커홀릭인 오차장이 있고, 위아래의 교량 역할을 하는 김대리, 권위적이진 않지만 대리보단 무게감이 있는 천과장 같은 이가 그들이다. 그들과 경쟁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염려해주는 옆 부서의 팀원들도 있다. 워낙 회사의 인물군이 다채로우니까 의식적으로 캐릭터를 설정하고 묘사하기 보단 스토리의 이슈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인물을 배치하는 요령이 생긴다.
영업3팀은 굉장히 이상적인 팀이다. 능력과 배포가 있는 상사들과 발전하는 막내 사원들이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잘 돌아간다. 영업3팀 자체가 <미생>의 주제이자 작가의 이상이라고 본다.
분명히 그렇다. ‘미생’은 완생으로 가는 길인데, 사실상 완생이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다. 대부분은 진짜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엔 그 꿈을 잊는다. 하지만 성인으로서의 이상도 있는 거다. 그걸 묘사하고 싶었다. 다른 부서를 통해선 어쩔 수 없는 현실의 각박함을 보여준다면 영업 3팀은 그 자체로서 내가 짐작한 직장인들의 이상향을 그리고 싶었다. 당신은 이런 욕망과 열기를 안고 입사하지 않았나? 이런 상사를 꿈꾸지 않았나? 어쩌면 그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꿈꿨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미생>인 거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고졸인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기 어려울 거란 대사가 등장할 땐 뼈아픈 기분마저 들더라.
요르단 사업 에피소드가 끝나고 ‘당연히 이 정도면 장그래도 정사원 돼야지!’란 댓글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그 에피소드를 지난 해의 사업 실적과 10대 성과를 공개하는 2013년도 시무식 장면으로 연결했다. 독자들 입장에선 영업3팀의 요르단 사업이 대단한 이슈였고, 장그래가 큰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만화 속의 대기업 차원에서 엄밀하게 보자면 그 이전에 비리 과정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미 존재했던 사업을 다시 한번 세팅한 것뿐이다. 사업 자체를 올바르게 되돌린 측면은 있지만 회사의 성과로선 당연한 업무였을 분이니까 장그래가 부각될 이유가 없었던 거다.
현실적이라서 더욱 가혹하다.
스토리상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다. 장그래가 잘된다고 이 사회의 계약직 사원들이 다 잘되는 건 아니다. 물론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장그래 정사원 시켜라!’ 이런 댓글들이 늘어서 나조차도 거부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못을 박았다.
낙관적인 거짓말은 할 수 없지만 긍정적인 비전은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고민했다. 그런 비참함으로 끝내야 될까. 그래서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라는 대사를 넣었다. 정사원이 되지 못했다고 장그래의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니까. 큰 상금이 걸린 대국에서 패한 바둑기사들은 ‘한판의 바둑이 끝난 거지’ 그러고 만다. 살다 보면 수많은 바둑판을 마주하니까 그저 한판일 뿐이다. 그 초연한 태도가 정말 매력적이다.
바둑 실력은?
10급 정도.
10급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18급에서 1급으로 올라가고, 승단하면 초단에서 9단으로 올라간다. 10급보다 밑이면 대단히 못 두는 건데, 바둑의 재미를 느끼는 초입 단계랄까. 수는 낮지만 바둑TV에서 유명한 기사의 대국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는 정도?
어떻게 입문했나?
문하생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작가 선생님들께서 가끔 바둑을 두셨는데 어른스러워 보이고 멋있더라. 그래서 바둑을 배웠다. 그런데 패배감 관리가 안되더라. 지고 나면 아까 뒀던 바보 같은 수가 계속 떠오르고 너무 분하고 약 올랐다(웃음). 남들은 하루에 서너 판도 두는데 난 한 판만 둬도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관련 서적을 읽는 건 재미있어서 그쪽으로 빠졌다. 바둑인들의 삶은 알수록 대단하다. 조치훈 9단은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휠체어를 타고 와서 바둑을 둔 휠체어 대국이 유명하다. 그때 누가 왜 그렇게 바둑을 두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바둑, 그래도 바둑.” 남들한텐 바둑일 뿐이지만 자신한텐 바둑이 전부라는 거다. 대단한 비장함이 느껴진다. 바둑 기사들의 정수가 남긴 어록들을 보면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경지가 느껴진다.
단행본의 ‘작가의 말’에서 바둑을 자기 패배조차도 복기하는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그 문장을 읽고 새삼 바둑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했다.
대여섯 살부터 바둑을 둔 영재급 아이들 중 몇몇은 연구생이 된다. 감정 정리도 잘 안될 것 같은 그 꼬맹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복기한다. 그 아이들이 패배의 감정을 어떻게 관리할까,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어떻게 노력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연민이 생긴다. 바둑이 어려운 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격랑의 사춘기에 연구생이 되어 승수를 채우고 입단하고자 할 텐데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천재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어렵다. 실력이 늘어도 자신보다 더한 천재를 만나서 패배하면 실력이 낮은 거다. 그런 과정을 견딘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그 단단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떨까 궁금했다.
부모로서의 심정도 더해질 것 같다.
아이에게 연민이 들 때가 있다. 분명히 이런 상황에선 슬플 거 같은데 웃고 있을 때가 있다. 그걸 보면 슬프다. 이 정도는 참아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데 부모 입장에선 그렇게 애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더라.
인생이 바둑이라면 본인은 어느 정도 수를 둔 거 같나. 어떤 판국이 보이나?
포석은 다 지난 정도? 이 판이 어떻게 될 거 같다고 어느 정도 정돈된 형세랄까. 나란 사람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진 대충 정해진 거 같다. 큰 자리들을 보면 내가 확보한 지점도 있고, 남에게 넘어간 지점도 있고. 이제 중반 이후에 끝내기를 어떻게 잘 처리할지가 문제다. 한 집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도록 정당하게 잘 싸울 수 있는 판을 짜야 한다. 디테일하게 모든 단계가 중요한 시기가 온 거 같다.
컬러풀한 에너지로 무대를 누비던 2NE1의 산다라박이 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순수한 여인으로서 카메라 앞에 홀로 섰다. 산다라박이 아닌 박산다라라는 이름으로.
“아마 오늘 화보 촬영도 2NE1으로서 했다면 예전처럼 무서운 언니들 컨셉트로 갔을 텐데 박산다라 혼자이기 때문에 차분한 느낌을 시도해볼 수 있었던 거죠. 저희 팬들은 이제 제가 뭘 해도 잘 안 놀라는데 오히려 오늘 찍은 화보가 지난 반삭보다 더 충격적일 걸요.” 그녀의 말처럼 오늘 그녀는 충만한 에너지로 악동처럼 무대를 누비던 2NE1의 산다라박을 벗고 여성스러운 순백의 의상을 입은 박산다라로서 카메라 앞에 홀로 섰다.
박산다라가 산다라박으로 불리게 된 건 <인간극장>에 출연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그녀의 필리핀 생활이 ‘내 이름은 산다라박’이란 타이틀로 전국에 송출되면서 알려진 산다라박이란 이름은 2NE1의 산다라박으로서 완전히 익숙해졌다. 그녀 스스로에게마저도. “이젠 저조차도 가끔은 산다라박 대신 박산다라라고 불리는 게 어색해요. 외국인도 아닌데.” 사실 2NE1의 산다라박이 된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9년 전, 21살 무렵이었다. 당시 필리핀의 국민여동생과도 같았던 산다라박이 일개 연습생 신분을 선택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이 말이다. “그땐 어렸으니까요. 지금은 아마 그렇게 못할 거에요. 필리핀에서 너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국에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었죠. 꿈이었던 YG에 들어올 수 있어서 두려움 없이 온 거 같고요.”
지난해엔 반삭까지 시도했던 산다라박도 10대 시절엔 S.E.S.나 핑클 같은 가요계의 요정을 꿈꾸던 소녀였다. 애초에 솔로로 연습했던 네 멤버가 처음 2NE1이란 이름 아래 한자리에 모였을 땐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로가 봐도 너무나 다른 그들이었다. 게다가 학창시절엔 벙어리로 오해 받을 정도로 숫기가 없었던 그녀다. 심지어 10년 가까이 본 YG의 양현석 대표, 일명 양 사장과도 여전히 살갑게 지내지 못하는 그녀에게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세 멤버들과의 어울림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청 어색했죠. 그런데 그 세 명이 혼자 밥 먹거나 연습하면 먼저 다가와줬어요. 그래서 빨리 친해진 거 같아요. 지금은 다른 세 멤버들이 저를 보호해주고 챙겨주는 거 같아요.” 물론 작은 오해도 있었다. 산다라박은 최근 동갑내기 멤버인 박봄에게서 처음엔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이야길 들었다. 당황한 나머지 살갑게 전화한 박봄에게 무뚝뚝하게 응답해버린 탓이었다. “지금은 제 성격을 잘 아니까 뒤늦게 그 일이 너무 웃긴대요.” 여전히 숫기가 없어 보이는 그녀가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2NE1의 멤버 산다라박이라는 건 조금 놀랍다. “학교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제가 용기를 내서 학교 축제 때 솔로로 노래를 했어요.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녀에겐 진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가 필요했단 말이다. “데뷔 전부터 제 꿈은 항상 콘서트 무대에 서는 거였는데 재작년에 한번 해보고는 완전히 맛이 들렸어요. 그래서 작년에도 투어 돌면서 정말 즐거웠죠. 재작년엔 일본 투어만 했지만 작년엔 미국이랑 싱가포르, 대만까지 갔다 왔거든요. 특히 첫 미국 공연은 떨렸어요. 아는 이 하나 없는 뉴저지까지 와서 잘할 수 있을지, 관객이 많이 올지 두려움이 컸거든요. 그런데 놀랍게 객석이 다 차있어서 한인 교포들이 많이 와주셨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다 현지의 미국인들이라고 해서 놀랐죠. 투어 마지막엔 많이 울기도 했어요. 올해에도 작년보다 많은 곳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국경과 언어를 넘어서 자신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넓어졌음에 짜릿해진다는 것, 확실한 무대 체질이다. 그녀가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 아쉬움도 적지 않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어를 돌고 왔어도 한국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요. 작년엔 디지털 싱글로 발매한 ‘I Love You’를 빼면 새로운 게 없었으니까요. 항상 새로운 곡과 새로운 퍼포먼스와 새로운 스타일로 무대에 서는 게 기대되거든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낯설고 그만큼 새로웠던 데뷔 초가 문득 그리울 때도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2NE1의 산다라박으로서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 욕심이란 게 이것저것 더 해보고 싶은 건가 봐요. 데뷔 4년째가 된 지금까지 좋은 추억도 많았고, 한 단계씩 더 발전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욕심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어쨌든 그녀도 이제 나이 서른이다. ‘다 죽여버리자!'며 무대에 오르는 2NE1의 산다라박으로서 도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박산다라로서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시점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동안의 외모가 시간을 멈춰 세우는 건 아니니까. “사실 26살에 데뷔했으니 빠른 편은 아니었죠. 우리 팀의 (공)민지만 해도 16살에 데뷔했잖아요. 물론 딱히 나이에 신경 쓰진 않았어요. 2NE1이란 팀 자체가 어린 소녀 같은 느낌은 아니니까 계속 이렇게 음악을 해나갈 수도 있을 거 같고요. 하지만 서른이 되니까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건 사실이에요.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물론 2NE1을 벗어나서 홀로서기를 하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2NE1의 산다라박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믿는다. 단지 박산다라라는 이름으로 이루고 싶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욕심이 많다.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제 모습을 많이 남기고 싶더라고요. 5년 뒤에 돌아봤을 때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한편 최근 결혼식을 올린 원더걸스의 선예의 소식은 묘한 자극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제가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마음이 이상했어요. 되게 예뻐 보였어요.” 데뷔 3년간 연애 금지 조항을 잘 지킨 덕에 소속사로부터 연애의 자유를 보장받은 지금은 어쩌면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막연한 연애보다도 새로운 음반 녹음에 주파수가 맞춰져 있다. 정규 앨범이 될지, 미니 앨범이 될진 모르지만 그녀가 위한 새로운 곡과 새로운 퍼포먼스와 새로운 스타일이 마련될 예정이라는 것. 박산다라가 말했다. 처음 마주본 순간의 어색함 대신 그 익숙한 산다라박의 표정으로.
열정적인 폭발력과 훈훈한 외모로 무대를 누비던 조정석은 지금 대중 앞에 한 발 다가섰다. 나약할 리 없는 집념으로, 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게.
조정석을 만난다고 하자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나? 그가 평소와 달리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풋풋한 청년의 얼굴을 지우는 대신 강렬한 남성의 인상을 그려넣었다. 도발적인 여인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의 야심. 그렇게 조정석을 위한 화보 밑그림이 완성됐다. 촬영 당일,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촬영 장소를 찾은 조정석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의 얼굴에 강인한 인상이 들어찼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조정석은 뮤지컬계의 스타였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알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공연장을 찾지 않은 이들에게 조정석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단지 가리킬 손가락이 필요했을 뿐이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와 <더 킹 투하츠>의 은시경이 가리키는 대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들어 비로소 별을 봤다. 5:5 가르마를 탄 납뜩이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에 포복절도했던 관객들은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핏이 딱 떨어지는 제복 혹은 수트를 입은 말끔한 외모와 강직한 성격의 훈남 은시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대부분 처음엔 몰랐다. 그리고 갸우뚱하다 뒤늦게 놀랐다. “인물 자체가 다르니까 “얘가 얘야?”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어떻게 두 캐릭터를 같이 연기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보여지는 시기가 비슷하니까 오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찌감치 촬영을 마친 첫 영화가 그 뒤에 제작된 첫 번째 공중파 드라마와 맞물린 시기에 개봉했다. 영화와 드라마가 함께 주목받았다. 진정한 ‘골든 타임’이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에서 조정석을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다. 곧 뮤지컬 지망생들의 도전을 그린 드라마 <왓츠업>에 그가 캐스팅됐다. “드라마 촬영 일정상 공연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드라마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편성이 보류되면서 1년 동안 지난한 촬영 스케줄이 이어졌고, 경력에 구멍이 생겼다. 주변에선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며 우려했지만 조정석은 시간을 투자하며 담담하게 때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나 드라마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건축학개론> 오디션으로 기회를 잡았고, 2011년에 방영된 <왓츠업>을 본 이제규 감독은 그를 <더 킹 투하츠>에 불러들였다. 믿음으로 얻은 수익이었다. 더 큰 이윤을 요구할 차례였다.
조정석을 쏘아 올린 신호탄이 된 납뜩이를, 조정석이 납득하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용주 감독의 주문처럼 관객을 웃길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집에서 TV로 보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커다란 스크린으로 처음 영화를 보는데 내가 나올 때마다 미치겠더라. 중반부터 긴장이 풀렸다. 납뜩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사람들이 내가 나올 때마다 웃는 거다.” 납뜩이가 없는 <건축학개론>이란 얼마나 심심했을까. “어떡하지, 너?” 같은 납뜩이의 명대사가 조정석의 애드리브였단 사실은 그의 캐스팅이 진정한 신의 한 수였다고 믿게 만든다.
<건축학개론>과 <더 킹 투하츠> 이후로 조정석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한 시대극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의 촬영을 마쳤다. <방가! 방가!>의 감독 육상효의 새로운 연출작으로 80년대 미군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의 에피소드를 그린 이 코미디물에서 그는 ‘민중가요계의 조용필’로 불리며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조정석은 일찍이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다. 하지만 연기자가 되면 어떻겠냐는 교회 전도사의 권유로 한 달간 개인 레슨을 받고 시험을 친 서울예전에 합격했다. 일종의 계시였다. 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퇴했지만 그에겐 이미 또렷한 길이 열려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지만 조정석은 ‘자신을 굳건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과를 명예처럼 간직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한 작품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지난 작품들을 모두 기억한다.”
무대에 데뷔한 2004년부터 2010년 초까지 조정석의 시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일복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작품 끝나면 바로 작품하고, 작품 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했으니까.” 단 한 번, 연습도 공연도 없었던 2주를 통째로 쉬었던 걸 제외하면 6년간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 무대에 올랐다. 6개월간 일주일에 8회 공연 그러니까 200회 가깝게 공연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모리츠 역으로 단독 캐스팅됐을 때도 6개월간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그 무대에 올라 모리츠가 되어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매일 죽는 남자’다. 조정석의 믿음이란 그런 성실함과 집념을 담보로 둔 것일지 모른다. “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야 된다. 칼을 한 번 꺼냈으면 제대로 휘둘러야 되니까.” 공연이 끝나고 자신이 느낀 문제나 새로운 욕심들을 기록해 둔 ‘배우일지’도 그 칼을 제대로 휘두르기 위한 칼집이다. 그는 단단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건축학개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두 번 정도 있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던 <바람피기 좋은 날>과 조승우의 추천으로 캐스팅이 유력했던 <고고 70>이 바로 그것. 하지만 공연 중인 작품들과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공연 같은 경우, 오래전부터 공연장 대관을 준비하고, 출연 계약도 일찍 한다.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헤드윅> 때문에, <고고 70>은 <이블 데드> 때문에 포기했다. 영화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장 해내야 할 일을 팽개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서 겪어온 순간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무대란 고향이자 뿌리다. 공연에 입문한 초기 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2005년에 <그리스> 할 때 공연 끝나고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가 택시비가 없으니까 막차 끊기기 전에 뛰쳐나와서 막차를 타거나 막차를 놓치면 찜질발에서 잤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잘 웃고 장난기도 많지만 눈물 흘리는 건 싫어한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약해지는 게 싫을 뿐이다. 1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홀로 지쳐 쓰러져 울면서도 누군가의 앞에선 의연해야 했다. “어차피 앞으로 겪어야 할 경험을 조금 일찍 경험했다. 그래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일흔이 넘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기울어가는 가세를 지지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2004년, 데뷔작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람도 아닌 1인 다역’을 연기하는 조정석의 무대를 처음 본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셨는데 보고 나서 우시더라.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아들의 출연작을 모두 챙겨본 어머니였다. 가끔 촬영이 없는 날 어머니와 함께 <더 킹 투하츠>를 볼 때면 TV 속 아들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시는 어머니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하지만 ‘당장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할 자신이 없는’ 지금은 ‘아직 아닌 거 같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아한 세계>의 감독 한재림이 연출하는 고려시대 사극 <관상>에서 조정석은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와 함께 촬영을 준비 중이다. <건축학개론>을 본 한재림 감독은 ‘괜찮은 배우가 있다’며 조정석을 추천했고 <더 킹 투하츠>를 본 송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선택받았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이제 다시 출격이다. 출격.” 설렘이 가득한 미소로 내뱉는 단단한 각오. 그것 참, 결코 약해질 리 없는 관상 아닌가.
내 감각에 포커스를 맞추려 했다. 내가 느끼는 공간과 냄새, 시야, 용의자를 바라보는 심정까지, 나로서 캐릭터 안에 들어가는 거다. 한번은 컷을 하고 모니터를 확인하는데 내 입장에서 도저히 쓸 수 없어서 다시 한번 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내가 공감해야 움직일 수 있었다.
본인의 연기를 쉽게 만족하지 못하나?
평생 그럴걸.
이제 오디션이 필요 없는 배우 아닌가?
오디션이 필요 없는 배우는 없다. 최소한 리딩이라도 하면서 현재의 컨디션을 알려야 된다. 당락의 의미를 떠나서 진짜 내가 해도 되는지 질문해야지. 지난 작품에서 이 정도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 정도 할 거란 기대만으로 작품에 들어갔다가 무너지면 서로 낭패다. 서울보증보험에서 내 연기를 공증해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어땠나?
연기 자체는 동일하지만 영화적 기법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각 장면에 어울리는 에너지를 안배하면서 작품 전체의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 <용의자 X>에서도 그 호흡을 놓쳐서 한 컷을 버렸다. 한 장면 찍을 때마다 시나리오를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롯데 자이언츠 팬이라고 들었다. 부산 토박이?
나고 자랐지. ‘구도 부산’의 핏줄이 어디 가겠나?
언제 서울로 올라왔나?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 모두 올라왔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다.
서울에서 제일 멀어서 부모님한테 안 걸릴 줄 알았다.
연극영화과를 영문학과로 속인 거?
속인 건 아니다. “아버지, ‘경성대 영흐여하과(발음을 뭉개면서)’입니다.” 그랬더니, “뭐? 영어? 그래? 괜찮네! 알았다!” 그리 된 거지(웃음). 딱히 반대하신 건 아니고, 한 2~3년 하다 관둘 줄 알았다 하시더라.
지금은?
영화에 입문할 때,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로 아버지 성함 좀 빌려 쓰면 안되겠나 여쭸더니, “집에서 가져갈 게 없으니 별 걸 다 가져간다. 맘대로 해라, 마!” 하셨다. 요즘은 항상 로열티 얘기하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공식석상에서 내 이름을 되찾아야지(웃음).
본명이?
원준이다. 조원준.
야구 영화를 두 편이나 했다.
<글러브>에선 야구선수로 나온 게 아니니까. 어느 연말 파티 중에 최동원과 선동렬이 나오는 <퍼펙트 게임>이 제작된다고 들었는데 그 자리에 박희곤 감독님이 있었다. 무작정 가서 “나 야구 잘 안다!” 그랬지. 대뜸 해태 타이거즈 역할을 말하길래 유니폼만 입어도 좋으니 롯데 단역을 하겠다 했다(웃음). 촬영할 때 야구 못하니까 화내더라. “너 야구 잘한다며?” 그래서 말했지. “잘 안다고 했지, 잘 한다고 안 했는데(웃음).”
광주에서 군생활을 했더라.
그래서 서울말만 썼다(웃음). 어차피 롯데가 맨날 꼴찌하던 때라 군생활에 집중했다.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브루터스 리, <글러브>에서 찰스, <맨발의 꿈>에서는 제임스, 외국인 이름의 캐릭터를 자주 맡았다.
그렇네. <솔약국집 아들들> 할 때 영어를 못해서 작가님께 맨날 빌었다. 2형식 이상 쓰면 안 된다고(웃음).
예전에 비하면 정말 샤프해졌다.
살을 빼고 있을 땐 괴롭다. 조절해야 하니까. 작품이 없으면 살이 찐다. 그냥 놓고 지내니까. 스스로 어떻게 변해야지, 라는 건 없다. 뚱뚱해지거나 샤프해지는 건 그 작품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당위성을 쫓아가는 거지.
배우들이 체중을 조절하는 건 항상 경이롭다.
솔직히 다이어트는 징글징글하다. 처음 한 달은 배가 고파서 자다가도 욕 나온다. 한 달이 지나면 새벽에 <식신로드>를 봐도 괜찮다(웃음). 어느 정도 목표량을 달성하면 스스로에게 상을 줘야 된다. 그 상을 먹겠다고 달리는 거지.
배우에게 다이어트란 캐릭터의 갑옷을 입는 과정이다.
즐기지 못하면 불가능하지. DNA 구조를 바꾼 게 아닌 이상 몸으로 거짓말하는 거잖아. 연기란 빙의도 접신도 아니다. 이성과 감정을 평행하게 두고 항상 외줄을 탄다. 주목 받는 게 부담스러운 건 그래서다. 잘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는데 일정한 기대가 있다는 건 부담스럽지.
<뿌리 깊은 나무>의 무휼이나 <범죄와의 전쟁>의 김판호는 천차만별의 캐릭터인데, 연기 범위가 넓더라.
사실 무휼의 준비 기간은 짧았다. 시놉시스를 보고 딱 꽂혀서 뭐라도 하고 싶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섰다가 칼도 많이 써야 된다 하니, 아차, 싶었지. 결국 중요한 건 무휼이 왜 거기 존재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왕의 호위무사라는데 겉치레로 경호원 노릇만 하는 인물은 아니니까. 무휼에게 이도, 세종이란 사람은 대체 무어냔 말이다. 작가님과 얘기하면서 무휼에게 세종은 곧 조선이란 결론에 닿았다. 그런 마인드로 현장에 가니 무휼이 될 수 있었다. 다양한 의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이성과 정서를 넓히는 게 중요했다. 현장엔 연기를 돕는 스태프들도 많으니 그들을 믿어야 된다. 정답은 작품에 있다.
경험하지 않곤 모를 것 같다.
운 좋게도 트레이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산엔 배우 인프라가 적다. 서울말을 할 줄 아는 배우도 없으니 번역극을 하면 무조건 무대에 섰다. 덩치 큰 배우도 없고, 자연히 공연을 많이 했지. 많이 한 놈한테 당할 놈 없지 않나. 그래서 20대엔 나이 마흔 다섯이 되는 게 꿈이었다.
마흔 다섯?
그 나이가 된 선배님들의 호흡은 아무리 훈련해도 나오지 않거든. 늙고 싶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막상 나이 서른 되니 30대라 우울해하고(웃음).
나이 서른은 어땠나?
사람들 이야기가 들렸다. 뭔가를 흉내 내기 보단 물 흘러가듯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된다는 걸 알았지. 거대한 강의 흐름에도 부딪히는 바윗돌 하나 즈음은 있으니까. 욕심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자연스럽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내 마음이 무엇으로부터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했다.
의외로 수다쟁이 같다. 무휼처럼 과묵한 캐릭터는 어떻게 참았나?
뭐, 컷하고 떠들면 되니까(웃음). 사실 연기하는 게 어려웠지. 존경하는 선배님들도 많이 계셨고.
술도 많이 먹었나?
어디 가서 술로 안 밀리는데, 선배님들 뵈니까 사람 아닌 사람 많더라. “내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으니 조금만 먹자.” 그런데 회 한 접시 나오기도 전에 소주 네 병을 까(웃음).
개구진 성격 같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하니까 상대가 먼저 거부감을 느끼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하게 된다. 사실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불편했다. 여름에는 땀도 많아서 버스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괜히 일어났다. 겨울에 만원 지하철 타도 내 탓인 거 같고.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걸어 다녔다. 소심했지.
극단에서 무대 연출도 했다던데.
연기를 위한 기능적 역할로서였다. 배우가 자유롭게 노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해체시키는 작업이 연출이라 생각했지. 배우가 되기 위한 워크샵이랄까? 연출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하면 안 되는 직업 같다(웃음).
무대에 다시 서고 싶은 생각은?
항상 한다. 태생과도 같은 곳이니까. 잠시 쉬고 있는 것뿐이지.
놓쳤으면 후회했을 것 같은 영화는?
첫 영화였던 <말죽거리 잔혹사>.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군대 고참이 연출부에 있어서 단역을 주더라. 한 장면만 세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역할이 있고, 지리하게 병풍처럼 출연하는 역할이 있었다. 이 일을 길게 해야 될 거 같으니 현장에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항상 어깨에 걸리거나 저 뒤에 서있는 식이더라(웃음). 부산에서 연극할 땐 너무 열악해서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했다. 조명도 만지고, 분장도 하고, 의상도 맞추고, 글도 써야 된다. 영화 현장의 파트 포지셔닝은 경이로웠다. 현장 스태프들한테 이거 저거 묻고 다니면서 많이 배웠다. 연극적 본질이나 영화적 본질은 달라도 연기적 본질은 똑같다 이거야. 그렇다면 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
첫 수업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돈 받으면서 했지.
아직도 그때 생각나나?
요즘엔 ‘이 정도 뛰고 힘들어? 이 정도도 못 따라가?’ 생각한다. 그렇게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결국 내가 계속 할 일이니까.
초심이 중요하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부담으로 변하지 않길 바란다. ‘이런 걸 또 해야 돼?’가 아니라, ‘이거 재미있을 거 같은데!’ 할 수 있어야지. 작품 속 캐릭터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꾸준히 도전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준비라는 게 그런 거 같다.
박진희는 배우로서의 삶이 남다르긴 하지만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게 배우 박진희와 자연인 박진희는 한 줄기의 인생을 유영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흐름을 타고.
들고 있는 책은 제목이 뭔가요?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네요. 여기 놓여 있길래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에 일탈의 사전적 의미가 나왔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또는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재미있네요.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에서 연기한 선주는 평생 일탈을 꿈꿔보지 못한 여자였거든요.
솔직히 박진희 씨도 일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사실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개성 있는 배우들이 많아서 나만 너무 평범해 보이니까. 그래서 일탈을 시도했다가 심장이 떨려서 포기하고, 결국 일탈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았죠.
일종의 성장통 같네요.
20대 초반에는 항상 20대 중반 정도가 되면, 20대 중반에는 30대가 되면 성장할 거라 믿었어요. 어느 한 순간 어른이 될 거라 생각한 게 아니라 그 나이면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철없는 아이였죠. 그런 탓인지 성장영화를 좋아해요. 그래서 <청포도 사탕>도 좋아요. 서른이 돼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거니까.
어른이 되길 바라는 이유가 있었나요?
좀 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면 보다 좋은 연기를 할거라 생각했어요. 결국 원하는 만큼 잘되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아요?
옛날에는 작품 외부의 이유를 보기도 있었어요. 상대 배우라던가, 그냥 타이밍이 맞아서라던가. 그런데 이젠 작품 자체만 보게 돼요. 진짜 하고 싶은 걸 알게 된 기분이죠.
선주는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요. 본인은 어때요?
옛날엔 저도 그랬어요. 참는 게 사랑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꾹 참다가 폭발해서 이전 사건까지 생각하며 싸움을 크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말할 거면 확실히 하고, 말하지 않을 거라면 완전히 터는 것이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란 걸 알았죠.
<청포도 사탕>처럼 여배우들이 많은 현장은 어떤가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인지 여자들과의 작업이 편해요. 어릴 때는 예쁘게 나오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서른 살을 넘기고 나니 현장에서 내 포지션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여자들끼리 대화는 많이 했어요?
박지윤 씨와 붙는 신이 많아서 지윤 씨랑 많이 나눴죠. 사실 팬이었어요. ‘성인식’처럼 도발적인 무대를 할 때도 멋있고, 후에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했을 땐 완전 반했죠. 지윤 씨와 출연 여부를 얘기 중이라고 들었을 때 같이 하고 싶었어요. 선주와 소라는 전혀 다른 아이잖아요. 그래서 저랑 상반되는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지윤 씨의 이미지가 영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배우로서 스스로 평범하다 생각하나요?
사실 15년간 배우로 살아온 제가 지극히 평범할 순 없겠죠. 다만 독특한 배우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배우도 있어야 되니까요.
그런 생각이 정립된 과정이 궁금하네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예전에 드라마도 찍었다고 자랑할만한 에피소드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활동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엔 인터뷰하면서, “저는 잘할 거에요, 더 잘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20대 중반까지는 쉴새 없이 바빠서 어떤 위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죠.
대학원도 졸업했는데, 공부 욕심이 많나 봐요.
공부 욕심은 분명 있었지만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그 욕심을 다 소진했어요(웃음). 수업 듣는 건 좋았는데 논문을 쓰는 1년 동안 나랑 공부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얼마 전 존 박 씨와의 스캔들이 있었는데, 워낙 스캔들이 없던 배우라서 되레 신기하더군요.
원래 방송 의도는 작곡을 하는 남자와 작사를 하는 여자가 만나서 곡을 하나 만드는 거였어요. 환경 문제에 관한 가사를 써보겠다는 취지로 수락했죠.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서 제작진이 봄에 어울리는 아련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데 그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첫 주 방송을 보고, ‘어? 이게 뭐지?’ 싶다가 3주쯤 되니,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었지만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죠. 그냥 나만 아니면 된다, 싶기도 했고.
존 박 씨의 볼에 뽀뽀한 것도 불가피한 연출이었나요?
야구장에 간 건 두 번째였는데 그날 너무 추워서 5회까지만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자꾸 한 회만 더 보자고 하는 거에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7회 정도가 끝나니 키스타임이란 걸 하더라고요. 갑자기 전광판에 저희가 비춰져서 당황했는데, 계속 비춰지니까 결국 존 박 씨가 ‘누나, 그냥 볼에 하고 끝내죠?’ 그렇게 된 거였어요. 예능을 몰랐고, 좀 순진했죠.
진짜 연애를 해야죠.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나지는 건 아니잖아요. 연애정보회사에 내놓을 수도 없고,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고(웃음).
특별히 요즘 꽂힌 게 있나요?
요즘에는 스님 책들?
네?
작가가 스님인 책들 있잖아요. 최근에 혜민 스님과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라는 책을 쓰신 정목 스님 트위터를 팔로우했다가 그 분들의 책을 읽었어요. 생각이 확장되는 기분이었죠.
불교신자인가요?
무교에요. 그냥 참선이나 수행 같은 과정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어요. 8월 초에 문경의 수련원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어요. 명상하고 서로 묻고 답하며 생각하는 게 너무 좋았죠. 새롭게 리셋하는 기분? 지금까지 살아온 35년 안에서 그 일주일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을 기준으로 지난 시간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좀 다른 삶을 살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소라가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이 선주와 재회하는 계기가 되죠. 혹시 유명한 배우가 된 덕분에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은 없었나요?
20대 초반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다가 현지에서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유학을 갔다가 현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사는 언니였는데 초행이니까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해서 3~4일 정도 머물렀죠. 벌써 10년 전이네요. 그런데 며칠 전 트위터로 멘션이 왔어요. 너무 반가웠죠. 보고 싶네요.
트위터는 자주 해요?
예전엔 별별 이야길 다 했죠. 요즘은 가끔 환경 이야기나 하는 편이에요.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머니 덕분인 거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있는 양동이를 모두 마당에 내놓고 빗물을 받아요. 그걸로 세차하고, 마당 청소하고, 화분에 물도 줘요. 설거지 마지막에 헹군 물은 꼭 다시 쓰고. 어릴 땐 너무 귀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에 뱄어요. 얼마 전엔 저희 집 주차장에 채송화가 폈는데 어머니께서 채송화를 죽일 수 없다며 주차장을 사용하지 말라는 거에요. 다들 결국 동의했죠.
곧 유학을 떠난다고 들었어요.
첫 번째 목적은 여행이었고, 길게 머물 생각이라 어학공부도 계획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해서 그냥 긴 여행이나 다녀올 거에요.
얼마나 긴 여행이죠?
돌아오는 티켓을 끊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한 일주일 뒤에, ‘저 그냥 돌아왔어요!’할지도 모르죠(웃음).
목적지는 어디에요?
아일랜드요. 자연 경관이 좋은 나라라고 해서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어요. 너무 멀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드디어 가게 됐네요. 심지어 혼자서. 이것도 하나의 일탈 아닐까요?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기대하는 건 없나요?
뭔가 기대했는데 얻은 게 없으면 실망하잖아요. 반대로 기대한 게 없는데 뭔가를 얻으면 기쁘겠죠? 그래서 기대 같은 거 잘 안 해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쉽진 않네요.
<피나>는 피나 바우쉬의 유산에 관한 영화이자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다. 피나 바우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나영, 그녀가 말하는 피나와 나.
피나 바우쉬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우리 엄마를 제일 좋아해요. 제겐 독일의 엄마였죠. 인자하고 겸손하셨어요. 어느 위치에 있다는 생각보단 그저 자신의 것을 하시는 분이셨죠. 절대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으셨고요. 오히려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수용했어요. 그래서 새 시대로 나아가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바닥에 깔린 물을 흡수하는 스폰지 같은 분이셨죠.
피나가 급작스럽게 타계한 3년 전 기억이 궁금합니다.
당시 피나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했어요. 공연 후 관객 인사에서 보통 가운데 서계시는데 옆으로 빠져 계시더니 무대에서 내려오셔선 자꾸 앉아계셨죠. 피나는 모든 해외 투어에 동행하셨는데 예정된 투어를 앞두고 무용수들을 불러모아서 말씀하셨어요. 사실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해야 하니 함께 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요. 저흰 오히려 이 기회에 좀 쉬시라며 투어를 떠났죠. 폴란드 투어 중 어느 점심 시간 즈음이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죠. 1시까지 모여달라고요. 다들 피나가 너무 힘들어했던 걸 아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긴장하며 모였는데 돌아가셨다더군요.
단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무용수마다 리액션은 달랐지만 굉장한 충격이었죠. 하지만 당일 저녁에도 공연이 있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는 말했죠. 주어진 공연을 끝까지 하는 게 우리 책임이고, 피나도 그걸 원할 거라고. 프로답게 공연을 마쳤고 피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공연 후 관객 인사는 생략했어요. 무대 뒤는 울음바다였죠. 폴란드와 이탈리아 투어가 있었던 그 2주 동안이 장례식 같았어요. 피나가 기다리는 독일로 돌아와서 진짜 장례식을 했죠.
피나가 이끌던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ztheater)’가 지속될 수 있는 힘은 뭘까요?
피나는 각각의 무용수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했어요. 자기 식으로 사랑하는 대신 그 사람의 방식으로 사랑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피나 혼자 모든 걸 했다면 무용단은 사라졌겠죠. 피나가 무용수들에게 원했던 건 본인들만 알아요. 그래서 공연은 이어질 수 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40년이 되어가는 무용단이 하루 아침에 확 무너질 리 없잖아요. 모든 무용수들은 여전히 간직한 피나와의 사랑을 공연으로 보여주고 싶어해요. 피나가 무엇을 하고자 했을지 의논하면서 공연하고 있죠.
피나는 <피나>의 촬영 테스트를 이틀 앞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영화 작업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피나는 항상 함께 해야 될 일들은 단원들과 의논했어요. 피나가 빔 벤더스 감독과 작업을 결정했을 때도 빔에게 저희와 논의하라 말씀하셨죠. 빔은 영화를 어떻게 진행하고 싶은지 저희와도 의논해왔어요. 피나가 돌아가신 뒤 영화를 그만둬야 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저희는 계속 하길 바란다고 빔에게 전했어요. 빔도 좋아했죠. 그리고 무용수들을 모아서 여러분들이 피나와 맺었던 인연과 인상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고 보여달라 하시더니 그걸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완성된 <피나>를 본 감상은 어땠나요?
하나의 메모리 같았죠. 일단 피나도 나오고 저희가 피나와 맺었던 결실 그리고 형제 같은 저희 무용수들과 함께 겪은 과정들을 보면서 빔에게 영화를 찍자고 요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피나>에서 본인의 솔로 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무용수들은 피나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을 표현했어요. 제 독무는 무용단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피나와 작업했던 도시 시리즈작 가운데 홍콩 작품에서 췄던 솔로였죠. 피나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 드문데 예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춤을 말씀하셨어요. 자신은 그 춤이 너무 아름답고 좋다 하셨죠. 그걸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얼굴을 칠하는 장면은 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피나에게 드리는 마음이었어요. 브라질 작품에서 했던 건데 브라질의 한 원주민 부족 여자들은 우리가 연지 곤지 찍듯이 온몸을 빨갛게 칠해요. 그게 그들에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이래요. 몸 전체를 빨갛게 칠한 남자의 몸에 입과 눈과 얼굴을 갖다 대면서 제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건 결국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감사의 표현이었죠.
피나 바우쉬는 어떤 스승이었나요?
피나를 만나기 전에는 춤추기 위해 사는 것 같았어요. 피나랑 작업한 뒤로 춤은 나를 알아가는 도구가 됐죠. 피나 스스로의 물음을 저희한테 주면 저흰 답해나갔죠. 내 안의 것을 보게 하시고 스스로 찾게 만드셨죠. 자신을 표현하려면 진심이 필요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전달하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되니까요. 피나도 자신을 알아가는 중이었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알았죠. 그걸 제게 일깨워주셨어요.
피나의 사진에는 항상 손에 담배가 들려있어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담배가 하나의 돌출 수단이었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피나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정작 당신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하셨죠. 카멜이란 담배를 피우셨는데 작업할 때 담배만 준비하는 어시스턴트도 있었어요. 가끔 불 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놓고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했죠. 그리곤 ‘어? 담배가 여기도 있었네?’ 하시면서 마저 피셨죠. 처음에는 많은 무용수들이 무용실에서 담배를 함께 피웠대요. 다들 나이가 들면서 담배를 끊고 그런 분위기가 제한됐는데 피나 한 분에게만은 허락됐죠. 물론 공연보실 때는 안 피시죠.
빔 벤더스의 아내이자 사진작가인 도나타 벤더스의 사진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그 중 본인의 컷도 하나 있더군요.
피나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찍은 사진이에요. 저희 무용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촬영한 사진가는 거의 없어요. 도나타는 피나의 허락 하에 저희 무대 공연까지 촬영했죠. 피나 무용수들과 함께 한 사진 작업을 책으로 내려는 계획이 있대요. 그 컷은 포트레이트가 필요하다 해서 저희 집에서 촬영했어요.
빔 벤더스와 도나타 벤더스는 피나와의 인연 덕분에 자연히 가까워진 건가요?
빔은 그렇죠. 도나타는 일본에서 빔과 도나타의 사진전을 진행한 일본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원래 친분이 있었지만 <피나> 작업을 통해서 가까워졌죠. 애기를 많이 나눠보니 공통점도 있었고, 그 계기로 더욱 친해졌어요. 빔에게 한국에 와서 <피나>의 홍보를 돕게 됐으니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으니 영화를 찍으면서 경험했던 것을 얘기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도나타는 전시 때문에 방문하려 했는데 무산돼서 안타깝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어요.
50세가 다 되셨는데, 육체적인 한계가 느껴지진 않나요?
젊은 시절에는 과격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피나는 제게 항상 정적인 것들을 요구했어요. 처음엔 불만이었죠. 이런 열정이 있는데 왜 항상 저를 정적으로만 표현하려 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업할 때마다 피나 선생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었죠.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제 영혼과 육체의 밸런스가 이렇게 맞아 떨어질 수 없는 거에요. 피나는 각각의 사람이 지닌 에센스를 끌어내셨어요. 제가 지닌 정적인 에센스를 보신 거죠.
만약 독일을 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전 독일에서 그냥 무용을 배운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독일인들은 세련되고 예쁜 멋은 없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겸손하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투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 가졌다 해서 드러내며 살지 않고, 도울 줄 알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처음에는 언어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르니 고생했죠. 철학자가 많이 나올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나라가 조용해요. 이 바쁜 나라에서 갔으니 처음엔 외로울 정도였죠. 비도 많이 오고. 그 모든 게 결국 저를 보게 만드는 생각과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독일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제가 없었겠죠.
Who’s Pina Bausch?
독일 출신의 현대 표현주의 무용의 대가. 4개 대륙의 28개국 105개 도시에서 공연.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탄츠테아터’ 장르의 선구자. 전세계 도시들에서 영감을 얻은 <세계 도시 시리즈>로 각광받았다. 2009년 6월 30일 암투병 중 향년 68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