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의 참사에 애도하지 않는 이들이 파리의 참사를 애도한다는 비판을 보았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건 베이루트의 참사를 알고도 모른 척하다 파리의 참사를 알고 애도했느냐는 것이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베이루트의 참사에 대한 무지를 비양심적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가. 내 상식으론 타인의 무지를 양심의 문제로 치환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래서 그러한 양식으로 비판의 논조를 세우는 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묻고 싶다. 파리를 향한 애도가 글렀다는 것인가. 베이루트에도 관심을 갖자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딴 태도로 설득이 되겠는가.

베이루트에서의 참사와 파리에서의 참사를 두고 비극성의 무게를 재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베이루트보다 파리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베이루트를 잘 모른다. 베이루트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파리는 최소한 에펠탑의 이미지로나마 구체화된다. 두 발을 디뎌보지 않았더라도 파리를 낭만의 유사어로 손쉽게 치환한다. 베이루트와 파리는 피부로 닿는 온도조차 다른 곳이다. 그만큼 두 도시의 참사에 대한 공포 또한 각각의 온도가 다를 것이다. 베이루트보다 파리에서 기관총이 난사되고, 폭탄이 터져서 무방비 상태의 수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더욱 큰 공포로 와닿는 건 그럴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 믿었던, 항상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영토에서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충격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것 같다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 징조, 증상. 그것이 중요하다. 파리에 대한 연대를 보내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우리 집 안방이 안전하다는 믿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그런 이들에게 파리 바깥의 폭력에 무지한 주제에, 란 식으로 비판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폭력을 비난하는 방식으로서 폭력을 방관한다는 비난은 적절하지 않다. 그건 그저 상처를 헤집기 좋아하는 이들의 수작에 가깝다.

어쩌면 이번 참사를 통해서 전세계적인 테러리즘의 공포를 환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보다 가깝게 연결돼 가고 있다는 것을. 국경이라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좁아지는 시대를 넘어 예전보다 빠르게 개개인의 정서에 링크를 걸고 감정을 전송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을. 정서를 공유한다. 통증을 공유한다. 그렇게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통증을 통해서 서로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교감하는 통증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고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개개인의 연대에 자신도 모르게 힘쓰게 된다. 그렇게 종교도, 민족도, 국가도 초월하는 개개인의 연대적 세계관이 알게 모르게 성립된다. 결국 그것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파리를 향해 기도하는 목소리가 결국 이 세계를 향한 첫 번째 기도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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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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