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앞바다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온다. 한낮의 망중한을 즐기던 피서객들의 즐거운 비명이 아비규환의 절규로 뒤바뀐다. 2009년, 대한민국 여름 극장가엔 쓰나미처럼 몰려든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해운대>는 국내 최초 재난 블록버스터란 타이틀 아래 천만 관객을 수장시켰다. 그 반대편에선 밑바닥 청춘들의 스키점프 도전기가 한창이었다. 제대로 된 시설 하나 없는 강원도 무주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는 다섯 청년들은 8백만 관객 앞에서 스키점프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은 대략 2천만 명에 다다른다. 지난 해 극장을 찾은 국내 관객은 총 1억 5천 6백만 명을 웃돌았다. 불과 두 작품이 지난 해 국내 관객의 10분의 1이상을 책임진 셈이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의 공통점은 국내VFX기술, 그 중에서도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란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흥행 이전에도 한국영화에서의 CG활용 사례는 즐비했다. 전장의 참혹한 현장감을 스크린에 재현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스크린에 판타지의 세계관을 입힌 <중천>과 같은 대작들에서 CG는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한 몫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2007년, 국내영화 사상 유례없는 CG활용도를 보여준 <디 워>는 그 첨예했던 논란과 무관하게 하나의 선례가 됐다. 국내에 상영된 역대 개봉작 가운데 최고의 흥행 스코어를 기록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 역시 CG를 적극 활용한 크리처 무비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오늘날 영화에서 CG는 스크린 너머에 허구의 이미지를 전시하기 위해 장착되는 특별한 비기로서 유용하다.
CG가 스크린에 무엇이든 불러낼 수 있는 마법의 램프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CG는 VFX(Virtual Effect)의 한 분야이며 영화 안에서 VFX기술의 역할이란 카메라에 포착될 수 없는 비현실적 광경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덕분에 요즘 제작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 배우들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로봇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아예 블루매트로 둘러싸인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으며 감정을 조율해야 한다. 영화의 결과적 이미지가 CG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작 블록버스터에서 더더욱 심화되고 있다.
점차 CG의 활용빈도가 높아지는 국내영화계에서도 VFX슈퍼바이저의 능력이 대두되고 있다. “<국가대표>에서 후반 30분을 위해 CG팀과 감독, 촬영팀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폭발적인 연출로 대미를 장식하면서도 관객에게 리얼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속도감을 살리면서도 악천후 상황에서 점프를 감행하는 드라마틱한 정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CG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국가대표>의 VFX슈퍼바이저를 담당한 EON디지털필름스의 정성진 실장의 말은 CG가 단순히 영화의 기술적 보강을 위한 장치 수준에 지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화에서 CG는 극적 흐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효과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촉매로서 기능한다.
<해운대>는 ILM출신의 VFX슈퍼바이저 한스 울릭을 믿고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백주대낮에 해운대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해야 할 <해운대>는 한국영화에서 전례 없는 기획이었고 그만큼 도박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제작비 120억여 원을 들인 대작으로 손꼽히지만 방대한 스케일의 CG컷을 구현할만한 디지털 데이터량을 보장하기엔 터무니없는 예산이었다. 무엇보다도 CG작업 가운데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물을, 그것도 거대한 쓰나미를 만들어야 했다. 경험치가 없는 국내업체를 마냥 믿고 맡기기엔 무리수가 컸다. 심지어 제작사가 접촉한 유수의 해외업체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제작단가로 기대치만큼의 영상적 퀄리티를 보장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퍼펙트 스톰>과 <투모로우>의 물 시뮬레이션 작업에 탁월한 결과물을 보여준 한스 울릭은 그 예산으로도 원하는 퀄리티를 보장하겠다고 장담했다. 결국 한스 울릭은 <해운대>에서 물 소스 작업에 집중된 전반적인 VFX슈퍼바이징을 전담했고, 국내 업체 가운데 모팩 스튜디오가 나머지 VFX샷을 만들고 합성하는 파트너로 선정됐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호흡이 잘 맞았는데 뒤로 갈수록 일정 문제가 생겼다. 우리의 경험 부족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변동성이 강한 우리 현장의 요구에 대해 한스 쪽에선 원칙적인 논리로만 대응하다 보니 감정적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해운대>를 제작한 JK필름의 길영민 이사의 말이다. 외국 슈퍼바이저의 작업 능력과 무관하게 문화나 환경 차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발견됐다.
실제적인 결과물에서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드러났다. 한스 울릭은 ‘레벨 셋 시뮬레이션(Level-set Simulation)’이라는 고난도 기술을 <해운대>에 적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레벨 셋 시뮬레이션은 물입자의 상호관계를 물리적으로 계산해 연산반응을 만드는 방식으로서 실제 물의 연쇄적 반응까지도 구현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자되는 작업이라 할리우드에서도 활용빈도가 낮다. 실제로 <해운대>에 적용된 건 ‘서페이스 디포밍(Surface Deforming)’이다. 서페이스 디포밍은 출렁거리는 유사 이미지를 섬세하게 쪼개서 물표면과 비슷하게 그려내는 방식이다. 전자에 비해 유체의 움직임이 완벽하진 않지만 비용 대비 효과 안에서 탁월한 결과물이 출력된다. 미국에서 보내온 파이널 데이터는 기대를 온전히 실망으로 변환시킬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작업을 체크한 제작자와 투자자는 작업 과정 자체에 애초에 무리가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개봉을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작업의 공정 과정을 완전히 뒤집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애초에 미국의 하청을 위한 파트너로 고용됐던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에게 <해운대> VFX를 지휘하는 전권을 위임했다. 결국 장성호 대표는 미국에서 기본 작업이 된 데이터 소스를 다시 받아서 전부 재작업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질감도 바꾸고, 조명도 바꾸고, 렌더링도 다시 하고, 디테일도 다시 추가했다. 결국 640컷이 넘는 최종합성 작업에 두 달여 동안 매진했다.
장성호 대표는 말한다. “애초에 우리에게 우리 기술 내에서 한번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면 가능한 방식 안에서 지금보다 나은 퀄리티를 얻어낼 수 있었을 거다. 그것도 미국에서 사용한 예산의 절반 이하로도 가능했을 거라 본다. 다행히 결과물을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최소한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건 위안이 되지만 완성도에 있어서 결코 만족스럽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해운대>를 제작한 JK필름과 윤제균 감독은 심해를 배경으로 한 크리처 무비 <제7광구>를 기획 중이다. 현재 모팩 스튜디오는 JK필름과 함께 <제7광구>의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다. “기술보단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기술을 적용했을 때 예상치 못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발견도 있었다. 국내 CG기술이 떨어지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길영민 이사의 말이다.
과거 <괴물>의 크리처는 미국의 VFX업체 오퍼니지(Orphanage)가 구현한 것이다. 당시 크리처 무비는 한국영화에서 역시나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대작으로 꼽히는 100억 규모의 작품들은 투자 자본의 너비만큼이나 손실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선택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괴물>에서 미국의 오퍼니지가 선택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 기인한 바다. 하지만 오퍼니지는 본래 ‘하드 서피스(hard surface)’라는 기계적 질감의 CG작업으로 유명했던 업체였다. 오퍼니지는 <괴물>을 통해 크리쳐 작업의 데이터를 획득했고 그 결과적 경험치는 온전히 오퍼니지의 자산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해운대>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JK필름은 한스 울릭과 계약을 체결하며 모팩 스튜디오에 기술 이전 조건을 명시했다. 결국 <해운대>의 결과적 데이터는 모팩 스튜디오의 자산이 됐고, 이는 곧 국내VFX기술의 질적 향상을 의미한다. 최근 전세계적인 화제작 <아바타>를 작업한 뉴질랜드의 웨타 디지털은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을 통해 성장했다. 피터 잭슨은 영화시장조차 없는 자국의 VFX업체를 자신의 블록버스터에 참여시키며 세계 최고의 업체로 성장시켰다. 경험만큼 확실한 자산도 없다. 한국이 참고할만한 확실한 선례다.
단순한 신뢰만으로 대자본의 결과물을 맡긴다는 건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도전적 시도가 결국 보다 발전적인 여건을 이루기 위한 직접적인 통로가 된다는 건 진리다. 과거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인사이트 비주얼은 현재 강제규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알려진 <마이 웨이>(가제)에 참여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엔 CG팀에 대한 강제규 감독의 신뢰가 낮았다. 그러나 그 후로 CG파트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선 보다 적극적으로 CG를 활용하려 한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이사의 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하는 <마이 웨이>의 관건은 로케이션이다. 현재 중국과 독일, 헝가리, 한국 등지의 로케이션을 계획 중인 제작부는 현지 촬영의 필요성을 논의 중이다. 현지 로케이션의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도 적절한 효과를 얻어낼 대안적 방안을 강구 중이다. 300억 짜리 대작이라지만 전쟁영화의 스케일을 구현하기 위해선 최대한 허리끈을 졸라매야 할 예산이다. 그만큼 CG의 역할이 중요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덕을 본 ‘매트 페인팅(Matt Painting)’도 적극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하지 않고도 현장에 동원된 인원들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입력한 뒤 복사해서 편집해 넣는 기술로서 탁월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모던보이>처럼 세트를 짓는 소모적인 비용들을 매트 페인팅 작업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생한 시대상을 구현하고 제작비를 절감한 <모던보이>의 사례도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CG기술의 발전이 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능케 한다는 점을 주목할만하다. <해운대>나 <국가대표>를 비롯해 최근작인 <전우치>까지, 근래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보다 풍부해진 장르적 시도나 소재적 접근을 꾀하는 중이다. CG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인해 장르적 도전이 탄력을 얻고 있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유효하다. 2008년 제작된 <태왕사신기>나 지난해 제작된 <아이리스>와 같은 드라마는 대작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르물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결과적으로 CG기술의 발전과 함께 한국영상 콘텐츠의 보폭이 넓어지고 동선이 자유로워졌다. 그만큼 CG의 효율적인 활용에 대한 고민이 중요해졌다. DTI픽쳐스의 양석일 실장은 말한다. “체질적으로 CG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차가 뒤집히는 카체이싱을 찍을 때, 액션 팀이 직접 연출할 것인지, CG팀이 그려낼 것인지, 그 상황에 어울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제작비 여건 안에서 보다 안정적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비용을 더 들여서 CG를 하자는 게 아니라 어느 부분에서 CG가 정말 필요한지 선별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을 포장할 것인가보단 무엇을 담아내고 있느냐에 집중해야 하는 셈이다.
<해운대>나 <국가대표>의 흥행은 고무적이다.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작의 성공으로 또 다른 작품이 기획된다면 이에 참여한 업체는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물론 경계해야 할 사안도 존재한다. “과거에 CG를 전문적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 그때마다 작업 요구량이 확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할리우드 수준에 따라 국내 관객의 눈높이는 높아지는 반면 제작 여건은 여전히 낙후됐다. 결국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외면당하면 시장이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받게 된다.” 단지 기술적 성과만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대변할 순 없다. 열악한 시장의 조건 안에서 쥐어짜듯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국내업체들의 여건은 항상 최선의 결과를 바라는 시장의 기대치에 대한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만큼 업체들의 목을 조이는 열악한 국내 환경의 개선도 급선무다.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저예산에 가까운 한국영화 제작비 안에서 VFX업체에게 돌아가는 몫은 언제나 열악하다. 정당한 요구를 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과거 <집결호>를 연출한 중국의 펑 샤오강 감독이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국내 스태프들과 일하길 원했다. VFX를 담당한 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CG팀을 제외한 VFX팀이 <집결호>에 참여했다. “그 당시 우리가 너무 많은 작업에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 이사의 설명이다. 국내 VFX업체들은 대부분 동시다발적인 작업을 진행한다. 3~4편에 가까운 국내 작품의 작업을 함께 진행한다. 예산이 빠듯한 한국영화의 현실에서 최대한 많은 작품의 작업을 진행해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금이라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만큼 업무량은 늘어난다. 할리우드나 해외의 유망한 VFX회사들은 전문화된 인력들의 철저한 분업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에 반해 국내 아티스트들은 멀티 플레이어로서 기능하지 않고선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덕분에 전반적인 작품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을 얻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분각을 다투는 작업 안에서 한 사람이 두 공정에 관여한다는 건 분명 비효율적이다.
현재 국내VFX업체들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성장의 한계가 분명한 국내 영화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끼리의 과다한 경쟁은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결국 공존을 위한 방안으로 해외 시장 개척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주최로 한국을 대표하는 VFX업체 7곳이 AFM(American Film Market)에 공동부스를 차리고 한국VFX산업을 홍보하는 자리를 가졌다. “AFM에서 미국 클라이언트나 프로듀서를 만나서 <국가대표>를 보여주면 항상 제작비를 물었다. 그리고 항상 답변에 놀라곤 했다. 할리우드의 기준으로 보자면 <국가대표>가 수 백억을 가지고도 찍을 수 없는 영화다. 한국의 시스템을 놀라워한다.” EON디지털 필름스 정성진 실장의 변이다. 이에 앞서 해외 영화의 후반작업을 수주한 사례도 있었다. DTI픽쳐스, 매크로그래프, 풋티지는 <포비든 킹덤>의 후반작업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DTI픽쳐스의 양석일 실장은 말한다. “<포비든 킹덤>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캐나다나 유럽 쪽 프로덕션 업체가 그 수주에 참여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가격 경쟁력 차이도 크지 않았다. 무조건 할리우드 시장에 진출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된 건 아니다. 전략적으로 잘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하루 아침에 할리우드의 대작에 국내업체가 참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국내업체가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 개봉을 앞둔 <워리어스 웨이>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도 이와 같이 말한다. “시장에 조금씩 스며들듯이 참여하면서 좋은 평판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기회가 조금씩 열릴 수 있다고 본다. 너무 성급하게 치고 들어갔다가 되레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고 평판이 떨어지면 오히려 되돌리기가 힘들어진다.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앞선 두 사람의 말처럼 해외시장 개척은 국내VFX산업의 향방을 결정할만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보다 착실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의 협조도 중요하다. 자생적인 발판을 마련하기 이전에 산업적인 구조의 불합리를 개선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지난해 CG산업협의회를 설립한 업계는 이를 통해 정부 측과의 소통 창구를 마련하고 현실적인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전했다. 그 결과 국내외 프로젝트에 참여한 업체 가운데 제작비용을 지원하는 정책이 마련됐고, <국가대표>를 비롯한 몇몇 작품이 혜택을 받았다. AFM의 부스 참여도 이런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협의회가 업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통로이자 보다 현장을 배려하는 정책 반영을 가능케 하는 자문 기구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와 호주, 영국, 싱가폴 등 해외에서는 벌써 우리보다 먼저 자국의 CG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한국의 VFX업체는 정부 혜택을 받은 적 없다. 다른 국외 업체와 비교했을 때 20미터 뒤에서 뛰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부의 변화는 고무적이다.” 정성진 실장의 의견이다. 지금까지 한국CG산업은 열악한 토양 속에서도 열정과 노력으로 싹을 틔운 인재들의 피땀을 먹고 자라왔다. 이젠 그 희생으로 일군 토양에 물과 비료가 필요한 시점이다. “제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그냥 식칼 용도로 사용되면 보검으로서 의미가 없다. 사용자가 그 가치를 가장 많이 깨닫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의미 있게 쓰이는 거다.” 장성호 대표의 말처럼, 국내CG기술의 발전적 성과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단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발전을 이뤄온 개개인의 노력에 대한 산업적 이해가 절실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영상산업의 새로운 밑그림을 CG로 그려나가겠다는 야심도 그때부터 선명해질 것이다.
이윤기 감독의 신작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촬영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국가대표> 이후로 4편의 영화에서 하정우란 이름이 보이더군요. 이미 촬영이 끝난 <페럴렐 라이프>를 비롯해서 현재 촬영 중인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신작 <황해>와 전계수 감독의 차기작으로 예정된 <러브 픽션>까지, 정말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웃음) 쉴 틈도 없어 보이는데 체력적인 부담은 없나요?
체력적인 문제는 없어요. 일단 저와 프로덕션끼리 서로 약속했던 부분만 잘 맞아떨어져서 계획적으로 촬영이 준비되고 이뤄지기만 한다면 스케줄은 물리적으로 전혀 무리 없이 돌아가니까요.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난 캐릭터를 복제하지 않고 잘 변주해 나가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는가라는 부분이죠. 배우로서 얼마나 소비되지 않느냐가 최고의 관건이랄까. 상업적인 설득력을 염두에 두면서도 기존에 있었던 영화보다 새롭거나 실험적인 프로덕션, 제작 방식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선택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러브 픽션>은 굉장히 새로운 영화에요.
어떤 점에서 말인가요?
대사의 템포나 리듬, 톤 자체가 굉장히 만화적이에요. 우리가 영화상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캐릭터들의 대사 속도보다 2배 정도 빠르거든요. 과거 ‘하워드 혹스’의 작품이나, ‘우디 알렌’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만큼이나 빨라요. 그런 점에서 유니크(unique)한 면이 있죠. 지금은 제작이 딜레이(delay)돼서 언제 촬영에 들어갈지 미지수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꼭 전계수 감독님과 찍어내고 싶어요.
지금 찍고 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이윤기 감독과 두 번째 만났고, 이미 <황해>를 통해 나홍진 감독과 두 번째 작품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과도 이미 두 차례씩 작업했죠. 한 감독과 다시 만나서 작업하는 경우의 장점을 그만큼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물론 엄청난 신뢰가 생기죠. 전작을 통해서 지지고, 볶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모니터를 통해서, 어떤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많은 부분을 공유했으니까요.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와 내가 연기했던 인물이 있는 한편의 영화를 우리가 만든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전반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베스트를 뽑기 위해 같은 단계에서도 더 위에 있는 문제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거죠. 거두절미 할 수 있는.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은 언제 결정하신 건가요?
<추격자>를 끝내고 나서 나홍진 감독님과 윤석이 형하고 같이 또 다른 그림을 그려보면서 이런 거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게 <황해>였어요. 작년 여름에 결정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생각해오면서 준비하고 있죠. 당장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준비해야지, 하는 게 준비가 아니잖아요. ‘구남’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감독님을 만날 때마다 얘기를 나눠가면서 장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준비를 해나가는 거죠. 이렇게 하다 보면 1년에 많게는 주연작 3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지속적으로 몸을 달궈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또 일상 안에서 몸을 식히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 배우로서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만큼 일상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배우 하정우로서의 삶과 김성훈으로서의 삶에 분명한 차이를 두려고 해요. 예를 들면 연예인이 아닌 일반적인 친구들과 축구팀을 만들어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과 부딪혀보기도 하고, 그 사람들과 같이 밥도 먹는 건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3~40대, 많게는 50대까지, 지금의 남자들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무엇을 통해서 삶의 체증을 해소하는지 직접 느끼고 저도 30대 초반의 남자로서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것들이 리프레쉬(refresh)되는 것 같아요. 그만큼 발란스(balance)를 맞춰주는 게 가장 중요하고 이런 생활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작을 하는 만큼 차기작 선택에 있어서 전작과의 캐릭터적 차별성이 중시되지 않을까 싶군요.
매번 다른 거 같아요. 어떤 배우가 ‘메소드(method)’ 연기를 한다 했을 때, 메소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또 다르게 ‘스타니슬라브스키(Stanislavski, 1863~1938)’식의 연기를 할 수도 있고요. 자기의 경험으로 회귀해서 그 안에 놓인 자신만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도 있고, 연기 하나하나를 기술적인 표현 방법으로 구사하며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법도 가능하죠. 우는 장면에서도 제 감정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우는 연기 자체를 만들어내는 거에요. 이렇게 다양한 표현 방법을 염두에 두는 건 최소한 1년 이상의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국가대표>라는 상업적 작품이 여름에 떡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보트>라는 저예산 예술영화를 찍어도 보완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조합을 생각하고 나니 더욱 큰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종종 보면 상당히 본능적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분석적으로 연기에 접근한다고 들었습니다. 단지 캐릭터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신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그 안에서의 역할 자체의 높낮이를 제한할 만큼 계산적인 연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따라서 연기적 표현 양식이 달라지는데요. 홍상수 감독님은 좀 예외적인 케이스지만, 윤종빈 감독님, 이윤기 감독님, 김영남 감독님, 다들 극사실적인 연출 방식을 선호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런 영화 안에서 배우가 해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일단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그렇다면 배우는 철저히 도구이자 오브제(objet)로서 관객들에게 그 신을 잘 설명하고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봐요. 감독들이 컷을 쪼개는 스타일에 따라서 종종 빈 공간이 많이 생기기도 하는데, 쉽게 얘기해서 마가 뜨는-일반적으로 촬영 현장에서 대사와 대사, 액션과 액션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생길 때 ‘마가 뜬다’고 표현한다.- 부분이죠. 그 부분에서 관객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봐요. 윤종빈 감독님은 원신원컷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종종 인물을 따라잡으며 팬(pan, 카메라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기법)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팬을 하기까지 1, 2초 정도 마가 뜨는 장면이 생겨요. 그렇게 마가 뜨는 장면에서 감독이 원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내가 할 몫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내가 그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거든요. 캐릭터가 변질되지 않고, 스토리가 피해 받지 않게끔 시나리오 상에 명시되지 않은 애드립을 넣어줘도 될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서 내 개성을 조금 더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는 것 같고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작업이기도 하겠죠. 직접 찍은 단편 영화가 한편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카메라를 잡아본 연출적 경험이 연기적 관점에 작게나마 일조한 측면이 없을까요?
어떤 신하고 신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극적 흥미를 높이면서 찍고자 한다면 그 신에서 마지막 컷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연기를 끝냈는지 신경 쓴 후에 그 다음 신의 첫 번째 컷을 구상하죠. 예를 들어서 완전 풀샷으로 끝나는 신이 있어요. 그 풀샷에 제 모습이 담겨있고, 그 다음 신에서 윤석이 형의 타이트 바스트나 타이트 클로즈업이 들어가요. 그럼 여기서 내가 어떻게 연기해줘야 윤석이 형의 타이트 샷이 잘 붙겠다 계산하는 거죠. 캐릭터의 연기를 떠나서 영화적 재미를 주는 극적 연출의 영역까지 고려하는 연기가 가능하면 더욱 극적으로 신이 넘어가는 효과가 생겨요. 아무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모든 연기가 정확하게 계산과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때때로 그런 계산의 오차를 메우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 필요할 때도 있을 거고요.
영화 안의 신마다 초(初)목표가 있잖아요. 각 신마다의 흐름에 따라서 발란스를 맞추는 가운데서도 각 신마다의 초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거죠. 계산적인 합을 잘 맞춰서 도달해야 할 신이나 장면이 있고, 어떤 건 그냥 현장에서 그때 그 기분에 한번 맡겨보자, 하게 되는 지점도 있는 거 같아요. <추격자>에서 심리 분석관과의 대질 신은 정확히 3번 째 촬영일에 가서야 촬영할 수 있었어요. 왜냐면 처음엔 그분하고 뭔가 톤이 안 맞았고, 두 번째는 제가 못했어요. 이상했거든요. 그 장면만큼은 계산하지 않았던 장면인데 그 전에 파출소에서,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하는 장면이나 그 다음에 이 형사가, “그 여자 어떻게 했어.” 물으면 정으로 찍고, 아킬레스를 따서 어쩌고 하는 장면, 그리고 여자 형사에게 냄새 비리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중요 포인트가 반복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건 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템포까지 계산하면서 연기했지만 마지막에 클라이막스 지점에선 어떤 계산이 설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건 그냥 현장 가서 내 느낌대로 찾아가서 해봐야겠다, 싶었죠. 계산대로 해보면 뭔가 너무 작위적이 될 거 같아서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흔한 취조 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꽃이죠. 스릴러의. (웃음) 그렇기 때문에 무모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 있게 내 필대로 가봐야겠다, 했는데 두 번이나 안된 거에요. 두 번째엔 감독님한테 정말 정중하게 오늘 못 찍겠다 사과드리기도 했죠. 한번 테이크를 갔는데 하고 나니까 너무 작위적이라 민망한 거에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정우, 너 이제 어떻게 할래. 그만 찍을까.” 하시길래 마지막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했죠. 결국 그 날 안 찍고 세 번째 날에 촬영장에 갔는데 사실 그날도 느낌이 별로 안 좋았어요. 몸 상태도 안 좋았고. 그런데 거기서 딱 느낀 게, ‘그래. 지영민도 지금 피곤하겠지. 그렇게 시달리고 밤을 새고 얻어터져서 지금 새벽 4시까지 왔는데, 지치겠네. 얘기하기도 싫겠네. 나도 연기하기 싫은데, 부담도 되고, 이걸 써봐야지.’ 했는데 통한 거에요.
<국가대표>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작품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심 걱정되는 바는 없었나요? 그런 지점과 비슷한 걱정은 있었죠. 시나리오 자체가 많이 거칠었거든요. 스토리는 분명하고,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그려지는 인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산만한 부분들이 있었고요. 하지만 김용화 감독님에 대한 100%신뢰가 있었고, <국가대표>가 상업영화로서 분명한 미덕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에 분명히 이 종목을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가 거칠긴 하지만 그걸 100배 이상 덮어줄 장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처음에 감독님한테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이런 소재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고요.
사실 <국가대표>는 하정우 씨가 찍은 첫 상업영화라 명명해도 될 것 같습니다. <추격자>가 5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사실 <추격자>가 처음부터 그 정도로 대단한 인지도를 얻을 것이란 기대감에서 기획된 영화는 아니니까요.
(손을 모으면서) 그렇죠.
그런 점에서 <국가대표>는 전작들과 다른 연기적 접근성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용화 감독 같은 스타일에서는 분명 달라져야죠. 일단 컷 수가 너무 많고 편집에 따라서 인물의 입체감이 너무 많이 달라지니까요. 그랬을 땐 최대한 표현을 자제하고 노멀하게 감정의 발란스를 유지해야죠. 일단 과잉수준으로 넘어서면 안 돼요. 이렇게 작품 색깔이나 연출 스타일에 맞게 변할 수 있다면 우려할만한 조건들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애초에 상업영화임을 인지하고 작품에 들어간 영화는 <국가대표>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런 이해가 연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었을까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국가대표>에서는 내러티브 위로는 절대 나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철저하게 기능적인 역할이라 생각했죠. 다른 배우들을 위해서 희생했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앙상블을 위해서 노력했어요. 표면상으로 중심축은 저였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인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절반은 사실 방 코치의 몫이기도 했고요. 이런 발란스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 관계를 그리는 각 신마다 수위조절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두 번째로 <국가대표>엔 유난히 바스트 샷이 많았고, 김용화 감독의 영화는 음악이 유난히 많은 편이기도 하고, 교차편집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조금 더 튀어 보여서 개성이 드러내면 굉장히 언발란스해질 것 같았죠. 그만큼 감정을 최대한 비워내려고 노력했어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제 감정의 옷처럼 입히게끔, 혹은 편집이나 영화적 장치들로 과장시킨 감정들이 저를 거치면 과잉이라고 보이지 않게끔 제가 서 있는 것, 제가 쳐다보는 것, 이런 행위 속에 담길만한 감정도 비워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덧붙이지 않으려고,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프레임 안에서 후반 작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여지나 여백을 열어놓으려고 했고요.
<국가대표>는 연기 이전에 스키점프 선수로서의 자태를 몸에 익히는 작업이 배우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스포츠 영화입니다. 완벽한 기술력을 몸으로 전시할 수 있을 때 설득력 있는 연기도 가능한 영화니까요.
사실 스키점프라는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배우가 맡은 역할은 10%정도 뿐이었어요. 어차피 선수들이 스키점프 장면에서 대역을 맡았고, 배우들은 점프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스키점프 장면에 잘 연결시키는 역할이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최대한 어깨 높이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키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부츠를 만질 때조차 어색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죠. 점프복을 내 몸이 익숙하게 느끼도록 노력했어요. 그래서 직접 점프복을 갖고 다니면서 집에서도 점프복을 입고 러닝머신을 많이 뛰었고요. 심지어 부츠도 갖고 다녔고. 그런 생활적인 익숙함까지 일반관객들이 디테일하게 느낄 순 없겠지만 거기서 중요한 건 지금 배우가 선수로서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동기 부여를 주는 거죠. 결국 이런 게 대사 연기나 다른 부분에서 분명히 파급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것 역시 메소드의 기본적인 방식이죠.
그런데 사실 모든 연기라는 게 다 그런 거 같아요. 로버트 드 니로가 <택시 드라이버>를 위해서 3개월 간 택시 운전을 했다는데 그걸 하고, 말고에 따라서 과연 어떤 연기적 차이가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제일 큰 차이는 그렇게 3개월을 했기 때문에 택시 운전자에 대해서 알 것 같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기고 연기적으로 더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게끔 동기부여를 형성해주지 않았을까라는 거죠. 그런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큰 효과라고 생각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전작에서 맡았던 캐릭터들보다 평면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도 보다 직설적인 느낌이 들고요. 사실 하정우 씨가 좀처럼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덕분이기도 하고요. (웃음)
김용화 감독님의 훌륭한 점 가운데 하나는 매 장면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거에요. 감독이면서도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쇼트를 바라보고 있는 거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정말 행복해하는 여자의 표정을 비추는 쇼트가 있는데 감독이 처음에 여주인공한테 그 표정을 주문했을 때는 원했던 표정이 잘 안 나왔대요. 그래서 감독이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 후에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상상해보고 그 표정을 한번 만들어봐라”. 그랬더니 여배우에게 기막힌 표정이 나왔다고 하죠. 그런 것처럼 김용화 감독도 매 적재적소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현실적인 요소도 생기고,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끌어내게끔 움직일 수 있게 유도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국가대표>엔 기존에 제가 했던 연기적 표현 방식들과 달리 감정이 굉장히 풍부해져서 간지러운 부분이 있죠. 마지막에 버스를 내린 뒤 공항에서 나와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전 그러기 싫다고 했어요. 솔직히 너무 간지러웠거든요. 공항에서도 과연 그렇게까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처음에 감독님에게도 그렇게 질문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죠. “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많은 대중들은 이렇게 연기를 해줘야 터칭(touching)을 좀 받는다.” 그래서 납득이 했어요.
<추격자>나 <멋진 하루>처럼 두 명 정도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전되는 영화는 배우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묘미가 됩니다. 그러나 <국가대표>처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하죠.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이루는 입체감이 관건이기도 하고요. <국가대표>를 보면서 <비스티 보이즈>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리더라는 역할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비스티 보이즈>는 매니저로서의 느낌이라면 <국가대표>는 맏형 같은 느낌의 차이가 있었죠. 사실 현장에서 또래 배우들 가운데 실제로 맏형 노릇을 했을 거 같은데요. 선배로나 형으로서나 후배들을 지켜보는 입장이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과 4~5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만큼 제 나이가 많은 거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이 저를 선후배가 아닌 동료나 친구로 느낄 수 있길 바랬고요. 그들을 도와준다기 보단 편하게 같이 어울리려고 노력했어요. 도리어 그들을 더 높여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조언을 한번 구해보기도 하려고 노력했죠. 어쩌면 <멋진 하루>에서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도연 누나가 저를 계속 서포팅(supporting)해줬다고 느꼈는데 제가 도연 누나로부터 느꼈던 걸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본인이 경험했던 부분이라 더욱 그 중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겠죠. <추격자>와 <멋진 하루>의 하정우 옆에 김윤석과 전도연이라는 좋은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정말 엄청난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히트>에서 고현정 누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덕분에 어떤 캐릭터로 만나서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기 보단 자연스럽게 형, 누나, 하면서 인간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어쩌면 배우들의 앙상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하정우 씨 스스로도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멋진 하루>의 병운이라고 밝혔던 것으로 아는데 정말 실질적으로 병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래요? (웃음)
제스처라던가, 세세한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발생하는 뉘앙스가 언뜻 병운을 연상시켜요. <비스티 보이즈>에서의 대사처럼 느낌이 있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연기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을 창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연기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나요?
(손뼉을 치면서) 아! 지금 갑자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어쩌면 <국가대표>의 밥, <보트>의 형구, 그리고 대표적으로 <추격자>의 지영민, 이 세 인물은 사실 제 힘으로 연출해낸 캐릭터 같아요. 그리고 <비스티 보이즈><멋진 하루>는 그냥 저에게 있는 그대로 했던 거 같고요. 제가 요즘 채플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키드>(1921), 이런 작품들을 보면 채플린이 감독이기도 하면서 본인이 직접 그 인물을 연출하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럴 수 있다면 되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 그대로 캐릭터 자체를 하나의 창작으로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요. 사실 채플린은 방랑자적인 캐릭터를 계속 연출하고 사용해왔죠. 하지만 <라임라이트>(1952)같은 경우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늙은 인간 채플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이런 양면성이 공존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전자의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고, 복제 논란이 많을 수 있을 거에요. 그래서 관객들이 그런 의미를 좀 알고 제 연기를 본다면 굉장한 재미가 있을 거 같아요. 감히 말씀 드려보자면 이 시대의 채플린, 이런 캐릭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거 같아요. 짐 캐리가 <에이스 벤추라>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재미난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 배우의 어떤 한 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영화를 봤을 때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너무나 영화적인 캐릭터니까요. 도리어 저의 것을 보여주는 게 또 영화적일 때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추격자>의 지영민, <보트>의 형구, <국가대표>의 밥 같은 경우는 저의 또 다른 다채로움이 반영된 캐릭터라는 점, 만약 그걸 알고 저와 제 영화를 보신다면 충분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보트>의 형구와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종종 지난 캐릭터와의 연속성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하정우 씨처럼 한 작품을 끝내고 바로 차기작에 들어가는 경우, 이렇게 전작의 캐릭터와 연관성이 존재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캐릭터적으로 기시감이 크지 않나요?
사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마다 거의 다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전부 다 약간 방랑자 같단 생각이 들어요. 쉽게 예를 들자면 집이 없고, 가족이 불투명하고, 인물의 성장환경이 좀처럼 노출되지 않으면서, 그런 식으로 뭔가 여지가 있어 보이는, 개인적으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면 재미를 느끼는 거 같아요. 영화를 찍을 때 저도 제가 재미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거든요. 만약 그런 연관성이 없다면 재미가 없을 거에요. 아니면 반대로 완전히 다른 뭔가가 있어서 느껴지는 재미도 있겠죠. 앞으로 다른 캐릭터를 만나보고 찾아 보면서 그런 재미를 열어나가다 필모그래피가 좀 쌓이다 보면 그 때 또 한번 정리해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죠.
연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그림, 무용,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관심은 호기심에서 출발하지만 적당한 관심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죠. 그래서 어느 정도 자기 기준 안에서 적당히 성취를 이뤘다 싶으면 쉽게 만족하고 손에서 놓기도 하고요. 마치 이건 이 정도면 됐어, 라는 식이랄까요. 하지만 하정우 씨에게 연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관심 이상의 욕망처럼 보입니다. 성취에 대한 깊이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어쩌면 다른 관심들이 그만큼 그 연기적 성취를 위해 할애되는 부차적 노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 굉장한 연관성이 있어요. 쉬운 얘기로 영화를 찍거나 배우로 살아가는 건 종합예술을 하는 거잖아요. 제가 그런 순수예술에 많이 기대고 영감을 얻게 되는 거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떠한 지점에서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건 충분히 거기에 대해서 얻은 바가 충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만약에 미술을 한다, 사진을 찍는다,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도 어떤 일부분에서만 영감을 얻어요. 어쩌면 그게 다 저를 치우치지 않게 하는 지점일지도 모르죠. 그러한 것들이 오로지 제가 연기를 하고 영화를 찍는데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죠. 만약 주객이 전도돼서 제가 그 발란스를 놓치고 다른 것들에 빠져들면 일단 묘미는 있겠죠.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에 치우치는 건 제가 생각하는 방향 안에서 빗나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들은 제가 계속 연기적으로 영감을 받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부분으로서 가치가 있어요.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는데 왠지 풍경보단 인물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표정에서 느껴지는 다양성이 캐릭터의 내면을 표정으로 구사하는 배우에겐 좋은 영감을 부를 것 같거든요.
인물 사진을 굉장히 좋아해서 종종 사람들을 찍으러 가요. 많이 찍었고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종종 어떤 인물들을 봤을 때 특이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거 같아요. 사실 배우가 가장 멋지게 보일 때는 그 배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한테 연기적 영향력을 굉장히 많이 주셨던 대학 교수님한테도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배우는 무표정의 힘이 제일 중요하다. <대부3>에서도 알파치노가 시칠리아로 넘어가서 아들의 연주를 회상하는 장면 있잖아요. 알 파치노는 아무 것도 안 해요. 선그라스 낀 얼굴로 무표정한 알 파치노의 얼굴에서 회상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알 파치노 컷으로 돌아오면 안경 벗고 가만히 있죠. 아까 초반에 말씀 드린 것처럼 어쩌면 그 무표정이 그 회상 장면을 넣을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라고 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무표정이라는 건 그 사람의 제일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얼굴의 안면근육을 다 풀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사진을 찍을 때도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표정으로만 찍어달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그 사진들을 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어쩌면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때라고 할 수도 있겠죠.
맞아요. 사실 우린 어떤 강박 속에 있는 거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 사람들은 잘 그려야 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실사와 똑같이 그려야 된다라는 강박으로 이해해요. “그림 잘 그리세요?”라고 물어보면, “아, 그림은 젬병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림 자체가 그냥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거잖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동차를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꽃을 그리는 건데, 어렸을 때부터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전 그게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도 마찬가지 같아요. 분명히 모든 사람이나 모든 배우들이 자기만의 매력 포인트를 갖고 있는데 그걸 어떤 이상한 기준에 자꾸 맞춰가려고 하는 거 같거든요. 배우로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자신만의 매력 포인트로 삼아야죠. 그림을 그린다면 제가 생각하는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는 거에요. 그 안에서도 자신과 엄청나게 싸우게 돼요. 내가 그리는 이 꽃이 남이 봤을 때 꽃이 아닌 거 같은데, 이 색은 남이 보면 어딘가 대비가 맞지 않다고 말할 거 같은데, 생각하죠. 하지만 결국 그게 풀리게 되면 제가 원하는 걸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릴 수 있는 결과에 도달하게 돼요.
누군가의 기준을 쫓아가기 전에 자신의 기준에 따라 모든 걸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죠.
사실 전작들은 대부분 감정적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감정적인 해소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는 결말의 스키점프 신을 통해 모든 감정을 증발시키는 느낌입니다. 배우에게도 그만큼 명확하게 감정을 해소해주는 쾌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너무나 좋아해요. 스키점프로 날아가는 장면이나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뭔가 해소됐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감독님은 밥이 자기 인생에 통찰을 했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이번 <국가대표>를 통해서 많은 걸 받아들인 부분이 있었어요. 밥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나니까 제가 이전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은 너무나 방황하거나 방랑하면서 겉돌지 않았는지 고민하게 됐어죠. 이젠 좀 더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제대로 된 직업도 있는 캐릭터를 만나야겠다 생각도 들었고요. 어쩌면 그 장면 자체가 주는 속 시원함이 지금 저에게 어떤 쉼표가 될 수 있는 게 아닌지,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건 아닌지, 인생의 1라운드를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촬영 중에 큰 부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그 마지막 장면이 촬영 때 살이 제일 많이 올라왔던 신이었어요. 살 퉁퉁 쪄가지고, 감독님께서 “너 때문에 컷이 안 붙는다. 어떻게 겨울하고 여름 사이에 8kg차이가 나냐.” 하소연하셨죠. (웃음) 제가 그때 팔이 부러져서 한달 반 동안 운동도 못하고 스트레스 받다 보니까 먹기만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게 그 솔트레이크 장면만 남았었죠.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웃음)
<두번째 사랑>같은 경우는 미국에서 영어로 연기를 했고, <보트>에서는 일본에서 종종 일본어로 대사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국내 배우가 타지에서 타국어로 연기를 하거나 자국어를 쓰는 외국배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건 흔한 기회는 아니죠. 어떤 면에서는 도전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되게 단순하게 받아들인 거 같아요. 일단 제가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거 같고요. 어쩌면 지금까지 무모하게 계속 추진해나가고 있었는데 이젠 다져나가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험을 축적해야 되고 이를 통해 뭔가를 더 학습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굉장히 웃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뭔가 정말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를 위해서 지금 나이부터 계속 쌓아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고 도전해 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국가대표>가 개봉했으니 이제 하정우 씨가 또 한번 떠나 보낸 작품이 됐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찍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작품을 맞이한 셈이죠. 이렇게 항상 영화를 보내고 맞이하는 시기가 짧은 만큼 전작과의 친밀감을 덜어내는 것이 새로운 작품에 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요?
제 몸이 재료라면 재료를 달궈놓은 상태에서 또 시작할 수 있는 셈이니까 그것만으로 되게 좋은 거 같아요. 사실 저는 한 작품을 끝내고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계속 이렇게 작품을 거듭하는 부분에 있어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요. 옛날에 <카르멘>이라는 연극을 했었는데 그때 엄청난 상처를 받았었어요. 친했던 선배가 공연을 보고 나서 막말을 하는 거에요. “너 연기하는 거 보고 정말 실망했다. 난 네가 연기를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민망해서 쫑파티도 못 갔어요. 그때 연출자하고도 사이가 안 좋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죠. 대인 기피증까지 올 정도였어요. 그런 피해의식이 있었는데 그걸 풀어준 게 <고도를 기다리며>였어요. 그렇게 위축된 상태에서 소극장 공연 한번 재미있게 해보자는 동기들과 함께 무대에 서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카르멘>때 했던 고민과 막막함이 완전 풀렸어요. 아, 이게 치유가 되는 구나 싶었죠. 최주봉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작품으로 상처를 받으면 다시 작품으로 치유해야 된다. 대신 기 기간을 더 두면 안 된다.” 스키점프도 마찬가지거든요. 스키점프에서도 점프하다 넘어지면 코치가 바로 다시 가서 뛰라고 해요. 왜냐면 그 기억을 없애주려고. 매번 작품을 찍다 보면 슬럼프가 분명히 와요. 상처도 생기고요. 제가 알게 되는 실수에 대해서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든 지점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늘 다음 작품에서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서 다음 작품 찍다 보면 예전에 했던 고민들이 녹을 때가 있죠.
어쩌면 지난 고민들을 녹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기간이 보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여자랑 몇 날 몇 일 섹스를 하다가 ‘아, 써야겠다’ 해서 제 방에 들어가서 몇 일만에 만들었다고 하죠. 베케트가 그랬듯이 잭슨 폴락도 필이 왔을 때 밤 새도록 그림 그렸다 하고, 그렇게 필이 올 땐 계속 하고 싶잖아요. 지금이 아무리 저에게 다지는 시기다, 그렇게 말하게 된다지만 그냥 지금 저는 너무 하고 싶은 욕망이 충만한 상태 같아요. 저한테 어떻게 이런 다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요.
지난 출연작들이 개봉할 때와 기분 자체가 다르지 않나?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어느 작품에 애정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너무나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준비했던 작품이 개봉하는 시기라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자신의 얼굴이 걸린 포스터를 보는 기분은 어떤가?
그냥 그걸 보면 개인적으로 좀 더 영화에 대한 애정이 커지지 않나 싶다. 아, 진짜 내 영화가 시작되는구나, 라는 생각. 사실 영화라는 게 촬영이 끝나고 사람들에게 소개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처음 촬영하는 순간의 설렘이나 미뤄져 있던 내 기억 덕분에 영화를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힘들거나 위험해 보이는 신이 많더라. 특히 차 지붕에 매달려서 가는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던데.
실제로 진짜 고속도로에서 찍은 장면인데 그 차가 봉고라 스틱이었기 때문에 덜컹덜컹할 때마다 움찔했다. (웃음) 그 장면뿐만 아니라 스키점프에서 점프하는 신 빼고는 배우들이 직접 모든 걸 거의 다 했으니까.
스크린으로 봐도 스키점프 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장면은 아찔하더라. 직접 그 위에 선 사람의 입장이 궁금해질 만큼.
진짜로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거 같다. 좀 높아서 무섭겠지, 정도가 아니다. 수직 높이가 50~70m 정도 되는데 스키장비를 착용하고 그 나무 바에 앉아서 몸을 지탱하고 있으면 내 마음대로 내 몸을 컨트롤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와이어를 달고 있지만 만의 하나 사고로 내려가게 된다면 그냥 무조건 뛰어야 된다. 사실 그냥 뛰면 되지, 이건 아니잖아. (웃음) 느껴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할까.
훈련과정은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배우들이 훈련받는 것 같더라. 단지 연기로서 훈련을 흉내 낸 게 아니라 진짜 훈련이나 다름없는 장면이었다.
나 같은 경우, 거의 쉬지 않고 계속해서 2년 정도 작품을 해왔기 때문에 <국가대표>를 위해 합숙훈련을 시작했을 땐 늘 불규칙적인 생활과 적은 운동량에 몸이 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3개월 동안 하루 종일 운동만 해야 되는 생활을 겪다 보니까 처음엔 몸이 체력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오히려 그 덕분에 많이 건강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촬영 때는 훈련을 통해 우리가 익혀오고 몸으로 기억한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한 훈련들을 계속 했다. 훈련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건 3개월 동안 땀 흘린 합숙기간 덕분에 좀 수월했지.
혈기왕성한 남자끼리 모여서 땀 흘려가며 찍었던 만큼 얻게 된 추억도 많을 것 같다. 분위기 메이커라고 할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성동일 선배와 하정우 형, 두분. 늘 촬영장에서 분위기 메이커가 된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늘 현장에서 지치고 힘들 때 동생들과 같이 장난도 치고, 덕분에 으쌰으쌰 하면서 힘도 내게 되고.
연기적으로 의지가 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굉장히 많았지. 사실 성동일 선배나 하정우 형은 워낙 많은 작품을 해오신 분들이고 연기력이야 이미 검증된 분들이니까, 사실 우리 동생들만 잘 하면 되는 거였다. 근데 전혀 그런 부담감은 갖지 않고 촬영했다. 같이 즐기고 같이 호흡하면서 작업했고 그렇게 그분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따라가다 보니까 우리가 못할 거란 생각이 전혀 안 들더라. 에너지를 많이 받은 덕분에 좋은 장면이 나오고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함께 고생했던 만큼 전우애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뭔가 해보자는 기분도 들었을 거 같고.
그 긴 시간 동안 그런 게 없었다면 아마 마지막까지 이렇게 즐겁게 촬영하기 힘들었을 거다. 단순히 촬영 기간이 긴 걸 떠나서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지칠만한 촬영이 많았다.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촬영하면서 계속해서 끝까지 으쌰으쌰 할 수 있었던 건 비슷한 또래 남자들끼리 워낙 마음이 잘 맞아서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공부도 많이 됐고.
최근 흥철처럼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자주 연기하는 것 같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자뻑 하림이나 <오감도>의 지운도 그랬고.
그러니까 그런 모습들이 분명히 나한테도 있는 거 같다. 그런데 기본적인 생활 패턴이라던가 어떤 모습에선 차이가 있다. 작업 현장에서는 장난도 치고 말도 많이 하기도 하다가 기본적인 생활 자체에선 딱히 그렇지도 않으니까.
왜 자신을 캐스팅했는지 김용화 감독에게 물어본 적 있나?
안 물어봤다. 그러니까 갑자기 물어보고 싶네. (웃음) 글쎄, 그냥 나에게서 흥철이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을 찾으셨을까. (웃음)
자신의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맡아오고 있다. 최근 <오감도>에선 아예 고등학생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흥철도 20대 초반의 나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안인 덕분이겠지만, (웃음) 오히려 그 덕분에 생긴 콤플렉스는 없나?
연기를 시작하기 전엔 동안인 얼굴에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오히려 연기를 시작하면서 많이 줄었다.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덕분에 <커프>의 하림이도 있을 수 있었고, 얻은 게 많으니까. 동안이란 소릴 들을 수 있을 때 많이 듣고 싶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웃음)
그렇다면 왜 과거엔 그게 콤플렉스였을까?
남자들하고 어울리는 거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렇게 약간 마초적인 성격이 강했던 거 같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거 같다.
사실 어릴 땐 조금 나이 들어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나도 어느 누구처럼 그랬던 거 같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부에 진학했다. 그만큼 연기에 대한 진로를 염두에 두고 학업에 접근했다는 의미 같은데.
사실 입시 준비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웃음) 진짜 잘 몰랐다. 우리 학교가 가진 전문적인 커리큘럼이나 학교가 가진 특성 자체를 잘 몰랐다. 연기 분야로 입시를 준비하는데 그 당시 우리 학교에 가장 먼저 입시가 있었다. 게다가 국립대라 등록금도 싸고, 단지 그 이유로. (웃음)
그 학교에 가고 싶어도 못 간 학생이 듣게 된다면 부아가 치밀지도 모를 대답인데. (웃음)
진짜 그만큼 내가 이 학교에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우리 학교 입시를 목표로 그에 맞춘 준비만 했기 때문에 그땐 너무 가고 싶었다.
한예종은 입시에서부터 실기를 굉장히 중시하는 편이다.
실기를 굉장히 많이 보고 연기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것들을 본다. 이건 그냥 나중 얘기지만, 만약에 이 학교를 떨어졌다면 아마 나는 대학을 못 갔을 거다. 모든 걸 그냥 이 학교 기준에 맞춰서 준비했었기 때문에 이 학교 못 들어가면 난 다른 데 못 들어가겠구나, 할 정도로 그 기간 동안 모든 걸 올인해서 준비했으니까. 다행히 천만다행이었지.
그 순간만큼은 연기에 인생을 걸었다고 말해도 될 거 같은데. (웃음) 결국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기를 선택한 셈인데, 결과적으로 지금 연기자로서 살고 있다. 진짜 연기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인가?
우리 학교의 가장 큰 설립 목표가 연극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연기를 비롯해서 모든 작업 자체가 연극을 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 학교를 들어가서는 그냥 연극 배우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동기부여가 늦었던 만큼 고민도 많았을 것 같다.
연기에 대한 애정이나 욕심이 생기고 진짜 한번 제대로 배우라는 말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2년 정도 학교를 다니게 됐을 때부터인 거 같다. 그 전에 거의 1년 반 정도는 학교에 들어가서 고민을 많이 했다. 연기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실력도 없고, 재능도 없는 거 같고, 그래서 진짜 실제로 이걸 그만 두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학교를 잠깐 떠나있다가 다시 학교에 돌아오게 되면서 그때부터 제대로 평생 여기에 올인하자고 마음먹었다.
작품마다 얻어지는 감흥이 다를 것 같다. 특히 <커피프린스 1호점>은 본인에게 특별한 작품이 아닐까. 처음으로 자신에게 캐릭터라는 걸 부여한 작품이니까.
나한테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물론 그 전작들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들도 역시 너무 하고 싶고 욕심나는 작품들이었지만 작품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노력했던 것과 기대했던 것만큼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커프>는 그런 점에서 맞물린 만족감을 준 작품이다. 하고 싶다는 욕심과 진짜 재미있을 거 같다는 기대감, 그리고 작품이 가진 힘과 대중적 관심이 너무나 잘 맞물렸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림이라는 캐릭터로 기억될 수 있었던 거 같고. 그걸 통해서 좀 더 많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과 기회도 많이 제공됐고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굉장히 특별한 작품이다. 하나의 큰 재산을 얻었다고 할까. 사실 선배들에게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드라마는 3개월이라고, 3개월 지나면 어차피 다 잊혀진다고, 그만큼 관심도 수그러들 거고 새로운 뭔가를 또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고. 그런데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하림이라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거 같다. 어쩌면 아직 내가 그 이후로 사람들에게 기억될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오랫동안 내가 맡았던 캐릭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하나의 큰 재산을 얻은 게 아닐까. 소위 흥행했다고 말하는 영화라 해도 그 작품의 제목과 배우는 기억해도 그 배우가 했던 역할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한다는 건 쉽지 않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내 이름은 몰라도 캐릭터 이름을 알고 불러주는 게 서운하지 않냐고 물어보지만 나는 이미 3년이나 지난 하림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준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커피프린스 1호점>을 통해서 바리스타가 됐다면, <국가대표>에선 스키점프 선수가 됐다. 연기 이전에 어떤 특정한 분야의 전문성을 몸에 익힐 필요가 요구될 필요가 있었다. <국가대표>는 육체적 완숙도를 보여주는 전문스포츠 선수가 돼야 한다는 점에서 좀 더 분명한 준비 단계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렇겠지만 시나리오를 받고 영화를 준비하기까진 스키점프 자체가 생소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짧다고 말할 수 있는 기간 동안 긴장을 풀지 않고 몰입해서 훈련한 덕분에 뭔가 많은 걸 습득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오랜 시간 준비하고 훈련했다면 그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긴장이 풀어지면서 나태해지거나 소홀해져서 몸으로 기억하고 체득하는 게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영화상에서 진짜 어설프게 선수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진짜 준비된 상태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진짜 선수 같은 수준에 도달해야 했다. 준비된 상태에서 어설픈 건 할 수 있지만 어설픈데 준비된 상태를 보여줄 순 없으니까. 그래서 코치나 선수들 모두 3개월 동안 굉장히 긴장하고 몰입해서 훈련했다. 그래서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몸에 체득한 걸 바로 영화에 적용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
흥철이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되는 건 방 코치의 딸 수연에게 첫눈에 반한 탓이다. 흥철에겐 멜로 라인이 있다. (웃음) 사실 그것이 영화에서 급작스러운 감정적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연기하는 당사자의 의견이 궁금하다.
사실 영화로 보여지는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건 흥철이가 수연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커져서 절실해진다는 설명들이 많은 부분 생략된 탓이다. 근데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독님하고 얘기하면서 찾아나간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렇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느꼈다. 사실 영화에서도 찾아보면 흥철이 그렇게 사랑에 빠져서 절박해질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거든.
어떤?
음, 일단 흥철이란 인물 자체가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고 좋고 싫음에 있어서 단순하다. 그런 인물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어, 너무나 좋아. 그런데 밥이라는 장애물이 중간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더 절박해지고 욕심이 날 수 밖에 없다. 사실 실제로도 그럴 때가 많거든. 그런 문제없이 너네 둘이 잘 만나봐, 그래서 둘이 매일 만나고, 사랑하고, 좋기만 하면 오히려 다른 생각도 들고, 사랑이 주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군가 자꾸 너네 만나면 안돼, 방해하거나 내가 소홀하면 다른 사람과 잘 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면 사람은 더 절실해지고 절박해질 수 밖에 없거든. 빨리 내 여자로 만들어야 될 거 같고. 실제로 밥이라는 인물이 중간에서 흥철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어주고, 끊임없이 그런 요소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랑에 빠져, 그래도 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순진하진 않지만 그만큼 솔직한 인물이기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거다. 너무 놓치고 싶지 않고 절실한 사랑을 만났기 때문에 그만큼 거침없이 표현하고 싶고, 그런 게 흥철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 같고.
스키점프 신은 <국가대표>에서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보는 것만으로 시원함이 느껴진다. 사실 CG의 공헌도가 큰 신이기도 한데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완성된 화면에 대한 궁금증이 크진 않았을까? 물론 어떻게 만들어질지, 100% 완성된 결과가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사실 그 장면에서의 CG는 경기장 사이드의 배경이나 관중들에게 쓴 게 전부다. 나머지는 다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라서 사실 실제로 찍은 점프 영상들을 보는 게 우리에겐 더 감동적이고 짜릿한 흥분을 전하는 것 같다. 오히려 이게 어떻게 보여질까, CG가 어떻게 잘 입혀질까, 그런 걱정을 했는데 진짜 좋은 영상이 나온 거 같다. 사실 우리도 그 장면에서 들어가는 CG를 보면서 어떤 게 CG인지 헷갈렸다. (웃음) 어디까지가 CG고 어디까지가 실사지? 막 그랬다.
한번쯤 진짜 점프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어떨 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선수들이 부러웠던 적이 많았다. (웃음) 그 느낌이 뭔지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운 거다. 우린 너무 무섭고 공포가 장난 아닌데, 어떻게 이런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려서 맨몸으로 하늘을 느끼는 기분은 도대체 어떨까, 정말 너무 궁금했다. 15m부터 시작해서 30m, 60m, 이렇게 점프대가 많은데, 우리가 계속 훈련했을 때 아마 다들 15m나 30m에서는 뛸 수는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됐을 거다. 코치님도 그랬었으니까. 만약 직접 뛰었다면 아마 한 30m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선수들이 부러웠다. 정말. (웃음)
만의 하나 사고가 생기면 정말 큰일이니까, 아무리 실력이 있었다 해도 결코 뛰어선 안 되는 일이었을 거다.
영화가 그냥 끝나버리니까. 재수없으면 살짝 다친 걸로 끝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원래 스키는 탈 줄 알았나?
나랑 재환이랑 재응이는 스키 자체를 처음 타봤다.
그럼 올 겨울엔 스키장에 꼭 가야겠다.
스키에 대한 재미나마 마저 느껴야지. (웃음)
저마다의 삶 안에서 난관 속에 놓여있던 청년들이 국가대표가 되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점프를 한다. 배우로서 좀처럼 넘기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더더욱 주목 받을 기회가 늘지 않을까.
배우로서 계속 점프하고 싶다. 실제 국가대표 선수들도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점프를 해왔고, 그 가운데 점점 더 좋은 성적을 내면서 끊임없이 계속 점프하고 있다. 계속 점프를 할 수 있는 게 더 중요하다. 한번 뛰어내릴 때마다 넘어지냐, 착지하냐, 에 연연하기 보단 계속해서 뛰고 점프하다 보면 더 나은 자세로 날고 착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길 거 같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뛰면서 좀 더 멋지고 아름답게 날고 착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희망을 이어나가고 싶다.
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