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 트렌드다. 군필자 연예인들을 모아서 출연시키는 군바리 버라이어티가 만들어진단다. 연평도에서 죽어 나간 군인도 있고, 여전히 찜질방에서 절망적인 오늘을 버티는 현지 주민도 있는데, 엄한 놈들이 특혜는 죄다 보는 인상이다. 물론 가장 큰 스타덤은 ‘보온병’출신의 안상수였지만. 한쪽에서는 군입대를 기피한 연예인에게 뜨거운 삿대질을 날리면서도 어느 한쪽에서는 금메달과 병역의무의 교체를 공식적으로 딜하도록 허하는 세상. 아닌 이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입대를 지옥문처럼 여기면서도 막상 2년 정도만 삐대고 사회에 나오면 그 지난한 시간을 완장처럼 차고 목소리 키우는 골목대장들의 사회화 지론. 이 모든 것이 분단과 오욕의 역사가 낳은 21세기의 위험한 코미디.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사상 교육을 다시 확립하면서도 아랍에미리트에 원자로 수주해먹겠다고 해병대의 젊은 청년들을 수출하는 역설. 입대영장에 끌려들어온 청년들의 피를 경제적 이익 창출과 연결하겠다는 미필 국회의원들의 합리적 애국심. 대한민국, 젊은 아들까지 팔아먹고 흥하면 행복하겠더냐. 그렇게 살림살이 좀 나아지면 좋겠더냐.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무궁한 영광을 바치는 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건, 대체 누구의 자식들이더냐. 국회에서 레슬링하는 전투력은 전방에서 펼쳐보일 수는 정녕 없는 거냐.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유승준은 훈련소가 아니라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 시민권을 방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설마 했지. 더 이상 대한민국이 돌아올 수 없는 땅이 될 줄이야. 건강한 청년 유승준이 하루아침에 대국민 사기꾼 스티붕 유로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20대 문턱을 갓 넘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입대영장은 피할 수 없는 무덤이다. 군대 면제자를 신의 아들이라 부르는 거 보면 대략 사이즈 나오지. 그렇게 군대에 끌려간 청년들이 이등병 개갈굼을 거쳐 짬밥 먹고 침상에 누워 말년병장까지 렙업된 후, 사회로 탈출하면 무덤은 성역이 된다. 영장이 지옥의 문이라면 제대는 훈장이다. 군대 안 나온 남자는 술자리에서 제물이 된다. 그런 마당에 유승준은 1등급 제물이다.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는 유승준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임을 재인식시켰다. 유승준은 용서받고 싶다고 통곡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운데손가락을 날렸다. 싸이도 두 번 입대했는데 훈련소 정문도 구경하지 못한 유승준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수밖에. 대한민국 청년들의 보상심리가 집중포화를 이루고 여론은 금새 초토화된다. 사실 군대 가기 싫은 건 다들 매한가지, 단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끌려가 버틸 뿐. 근데 그건 아나. 강남 부잣집 도련님 중에도 미국 시민권자는 많다던데. 근데 왜 걔들은 한국 땅 잘만 밟고 사냐고? 자, 페어플레이를 믿으십니까? 당신에게 진정 군대가 명예였답니까? 진짜? Really? You know what I am saying? 유남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