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나이더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에 섰다. 최근 주춤한 행보를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주목 받는 감독 중 하나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한번 스스로를 증명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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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영화화된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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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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