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나이더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에 섰다. 최근 주춤한 행보를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주목 받는 감독 중 하나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한번 스스로를 증명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은 지옥에서 먹자!’고 외치던 근육질 스파르타 전사들의 결전을 그린 <300>(2007)으로 할리우드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선 잭 스나이더는 아드레날린의 갑옷을 입은 스파르타 마초들의 액션과 반대편에 선 페티쉬적인 취향의 여전사들의 액션을 그려냈다. 시공간을 초월한 걸파이터들의 액션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써커 펀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카타르시스의 이미지로 그득한 판타지 액션물이다. 블루스크린을 등지고 세트로 축조된 테르모필레 협곡 사이에 진을 치며 페르시아 적군을 상대하던 <300>의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의 여배우들 역시 병풍처럼 둘러쳐진 블루스크린 앞에서 가상의 적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뛰고 굴렀다. <300>이 불끈거리는 비장함으로 무장한 근육질 전사들의 액션이 오르가슴과 같은 쾌감을 부르는 작품이라면 <써커 펀치>는 막대사탕처럼 가늘고 길다란 소녀들의 몸놀림이 쿨하게 전시되는 환각의 약물과도 같다.
<새벽의 저주>(2004)부터 <가디언의 전설>(2010)까지, 잭 스나이더는 이름난 원작들을 자신의 감각이 담긴 프리즘에 비추어 스크린에 새롭게 투사해내는 작업을 거듭해왔다. <써커 펀치>(2011)가 그의 경력 안에서 특별하게 읽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스나이더가 연출한 장편 영화 필모그래피 중에서 유일하게 원작이 없는, 온전히 그의 머리 속에서 잉태된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써커 펀치>는 그가 연출한 실사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서 R등급을 받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의 각본으로 연출한, 다시 말하자면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관에서 펼쳐진 작품이 가장 대중친화적인 수준의 이미지로 연출됐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실 스나이더는 영화감독이기 전에 발군의 감각을 자랑하던 영상가였다. 칸 국제광고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 받는 CF감독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던 그는 와이드스크린을 이용한 영화적인 촬영방식과 역동적인 스타일, 속도감 있는 편집술, 서사적 완결성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런 그의 경력들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의 영화들을 위한 예고편과 같았다. 죠지 A. 로메로의 전설적인 고전 호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79)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는 그런 연출적 감각을 증명하는 신호탄이었다. 숨을 조이듯 천천히 다가오는 로메로의 좀비들과 달리 총구에서 튀어 나오는 탄환처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는 스나이더의 좀비들은 단도직입적인 서스펜스와 압도적인 스릴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사회정치적인 메타포를 품은 원작의 메타포를 완전히 휘발시키고 롤러코스터적인 긴장감으로 점철된 호러물을 완성해낸 스나이더의 둔갑술은 주목할만하다.
스나이더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장기를 드러낸 건 두 편의 그래픽노블을 통해서였다. 미국 그래픽노블의 대가로 꼽히는 프랭크 밀러와 알란 무어의 걸작을 각각 영화화한 <300>(2007)과 <왓치맨>(2009)은 비주얼리스트로서 스나이더가 지닌 차별적인 스타일을 증명하고 선전하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은 카메라 스피드 램핑 기법을 활용하며 액션 시퀀스의 속도감을 조절하며 감상의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고 과잉된 스타일로 시각적인 현혹을 부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스나이더가 연출한 이 두 작품에는 보다 근본적인 공통적 특성이 잠재돼있다. 무채색에 가깝게 톤다운된 채도를 입은 <300>의 풍광은 이를 통해 극의 현실적인 감각을 희석시킨다. 이런 비사실적인 색채 감각은 오래된 기록 역사를 기초로 구축된 신화적인 무용담에 보다 환상적인 에픽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반대로 실제적인 냉전시대의 세계사를 기초로 허구적인 창작력을 접목시킨 <왓치맨>은 대비적인 명암을 통해서 보다 과장된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대비적인 명암의 이미지를 연출해낸다. 이는 사실적인 세계관을 밑그림 삼아 우울한 자조와 진보적인 관점을 채색한 픽션의 진지한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스나이더가 두 원작의 스타일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스크린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실한 답변이었다. 다만 알란 무어의 그것은 일반적인 코스튬 히어로들의 활약 대신 암담한 냉전시대의 분위기와 핵전쟁의 잠재적 공포를 절망적으로 투영해낸 결과물이었다. 스나이더는 이런 원작의 성향을 단순화시키기 보다 그 복잡한 시대적 메타포들을 보다 무게감 있게 완성하는데 주력했다. <왓치맨>에 드리운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를 필두로 전세계에 불어 닥친 3D영화 열풍 이후에 제작된 <가디언의 전설>은 그 유행의 열차에 올라탄 어떤 승객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3D입체에 기대어 롤러코스터적인 체험을 부여하는 작품의 수준에 멈추지 않았다. 판타지 장르 문학에 깃든 신비를 아름답고 황홀한 이미지로 구현한 이 작품에서 3D영상의 입체감은 그 영상미를 돋보이게 만드는 수식의 장치로서 탁월하게 기능한다. 무엇보다도 육박전과 공중전이 난무하는 올빼미들의 전투는 <300>의 전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스나이더는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신의 인장을 확실하게 새겨 넣었다.
지금껏 스나이더의 작업 대부분은 어느 작가들이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허구의 존재들을 스크린에 소환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평단의 비아냥과 참담한 스코어를 봤을 때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재앙이었다. 과연 <써커 펀치>는 스나이더의 실패작인 것일까? 사실 <써커 펀치>는 <인셉션>(2010)과 비슷한 부류의 작품이다. ‘인셉션’과 ‘킥’을 반복하며 꿈의 층위적 구조를 설계하고 그 층마다 종류가 다른 액션 시퀀스들을 채워 넣는 <인셉션>의 전략과 같이 <써커 펀치> 역시 무의식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에 파편적인 액션의 유희를 채워 넣는다. 다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 같은 논리적인 장치들로 관객을 설득시키지 않는다. 이는 서사적 실패라기 보단 고의적인 도발처럼 보인다. 어쩌면 <써커 펀치>는 스나이더의 세계관을 이루는 자질들이 총동원되어 나뒹구는 비주얼의 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놀란 형제의 무한한 신뢰 속에서 <슈퍼맨>의 새로운 시리즈를 찍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모이는 건 여전히 그의 재능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대변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새로운 영광을 준비할 때다.
이미 영화화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 ‘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 ‘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가면을 뒤집어 쓰고 독자적으로 제작한 제복을 걸친 히어로들이 밤거리를 누빈다. 아노미 상태의 도시와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는 자발적 본분 아래 세상을 감시하고 범죄를 다스리고 종래엔 조직을 정비해 힘을 결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개인들의 이념과 성격 차이로 간격이 벌어지거나 충돌이 발생하던 중 정부의 코스튬 히어로 활동 금지를 담은 ‘킨(Keene)’ 법령이 제정되고 히어로들의 활동권은 영구히 박탈당한다. 그들은 더 이상 강대한 미국의 새로운 신화를 자처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선전도구이거나 이를 거부한 채 추방당하거나 쫓기는 불순한 음해세력에 불과하다. 가면을 벗은 은퇴한 히어로가 되거나 정책에 대항해 아나키스트처럼 살아간다. 체제적 감시와 음모, 그리고 대중적 멸시 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들은 영웅으로 살아가던 과거를 그리거나 멸시하며 살아간다.
잭 스나이더는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도사린 우중충한 음모론의 시대를 그린 <왓치맨>을 묵시록의 이미지로 승화시켰다.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는 히어로들의 번뇌와 고민이 강렬하게 투영된 원색의 사각 프레임을 음울하고도 우아한 그로테스크의 스타일리쉬로 변주한다. 거친 질감으로 구현된 원색 바탕의 이미지와 방대한 대사량과 내레이션의 여백까지 삽입된 직사각형 틀의 일정한 간격은 프레임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대체되고 온전히 구현된다. <왓치맨>은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선택했다. 원작을 미리 접한 이라면 마치 코믹스의 움직이는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강한 원색 톤으로 이뤄진 원작의 날카로운 색감과 달리 영화는 회화적인 색감과 대비적인 음영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물론 세세한 구석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원작의 내러티브 가운데 일부는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제외됐다. 스토리텔링의 큰 줄기를 보존하는 범위에서 선별된 삭제 범위는 현명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160여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은 원작의 너비가 그만큼 방대함을 상대적으로 입증한다.
<300>의 비쥬얼을 염두에 두는 관객이라면 <왓치맨>에서도 그 기대감의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다. 물론 <왓치맨>과 <300>의 비주얼을 영화적 결과값으로 설명하는 건 원작의 차이를 간과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두 작품의 영화적 결과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이다. 잿빛 필터를 씌워놓은 듯 톤 다운된 채도에 극대화된 명암 속에서 혈기왕성한 전투씬 사이마다 고속촬영을 통해 우아한 움직임을 새겨 넣던 <300>은 분명 스타일리쉬의 한 정점을 찍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팽창된 근육질 사내들의 육체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300>의 직선적인 세계관과 달리 <왓치맨>은 다양한 캐릭터들간의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의 맥락들이 제각각 어지럽게 보존된 세계다. 정신분열적인 산만함이 난해함을 부르지만 심오한 상징과 은유의 체계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특성이 각기 다른 히어로 캐릭터들은 복근 하나로 팀워크를 과시하던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음영을 강조한 듯한 컬러는 도시의 비열한 정서를 이미지로 각인시키고 영화의 무게감을 한층 더한다. <300>과 마찬가지로 우아하면서도 과감하게 묘사되는 이미지즘의 향연은 <왓치맨>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배트맨과 유사한 슈트를 입고 비행선을 조종하는 나이트 아울(패트릭 윌슨)을 비롯해 신적인 능력을 지닌 푸른 사내 닥터 맨하튼(빌리 크루덥), 끊임없이 변하는 데칼코마니 형상의 복면을 음침하게 뒤집어쓴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날렵한 액션을 구사하는 여성 히어로 실크 스펙터(말린 애커맨), 뛰어난 지력과 속을 알 수 없는 오지맨디아스(매튜 구드), 그리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불한당 마초 히어로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까지, 제 각각의 캐릭터들은 모든 슈퍼 히어로의 판본을 되새김질하면서도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한다. <왓치맨>은 그 다양한 캐릭터의 사연이 담긴 원작의 스토리를 간과하는 바없이 스크린에 전시하고 나열해나간다. 원작에 충실한 영화적 표본의 한 전형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왓치맨>은 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의 세계를 스크린으로 탁월하게 이양했다. 원작의 열렬한 팬이라면 분명 이 작품에 열광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유명한 배우 하나 등장하지 않는 <왓치맨>은 덕분에 가면 너머의 캐릭터들의 익명성을 객석까지 공고히 다지는 인상이다. 그 이전에 원작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이루는 캐스팅이 실로 성공적이다.
다만 그 흔한 히어로물들을 상기하고 극장을 찾은 이들에게 <왓치맨>은 지독하게 무겁고 엄숙한 장례미사나 다름없을 가능성이 크다. <왓치맨>은 광활하고 방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히어로 무비에 대한 관성적인 기대감을 품고 <왓치맨>을 본다면 자신의 기대와 무관한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원작에 숨어있는 시대적 메타포를 향유할 수 없는 관객에게 <왓치맨>은 그저 끔찍하게 긴 제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작품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는 자신의 의지에 걸맞은 성취를 이뤘다. <왓치맨>은 분명 난해하고 심오한 원작 그래픽 노블의 새로운 전시관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한다. 결말부의 미세한 변주 역시 영화적인 설정으로서 좋은 선택이었다 평할만하다. 영화적인 재해석을 포기했다기 보단 좀처럼 재해석이 불가능한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곁가지를 쳐내고 주요한 설정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의 시대적 기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디테일의 수선을 마쳤다. 원작을 뛰어넘는 재해석을 선보이진 못했다 해도 원작의 명성을 공고히 다질만한 스크린작은 하나의 명예에 속한다. 원작의 팬이라면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또한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읽고 싶어질 관객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후자보단 전자의 쪽이 영화와 원작을 섭렵하는데 있어 좀 더 우월한 감상의 위치를 선점할 가능성이 생긴다. 원작보단 영화가 좀 더 친절한 편에 속하는 까닭이다.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자가 아니다. 신이라 불려도 될만한 닥터 맨하튼조차도 실험적 실수에서 비롯된 후천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기술과 자본의 힘을 빌린 메카닉으로 무장하거나 예기치 않게 돌연변이가 된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독한 신념을 품고 신체를 단련하거나 이상을 고취시키는 것뿐이다. 닥터 맨하튼을 제외한 나머지 히어로들은 단련된 사람들일 뿐이다. 실제로 앨런 무어의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는 히어로 코믹스의 영향력에서 코스튬 히어로가 등장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왓치맨>은 단지 초인들의 활약과 특별한 고독을 묘사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를 은유하고 사회를 관찰하며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다. 특수한 가면과 의상으로 정체를 가린 히어로들은 제각각 모순된 사회를 바라보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주체가 된다. 결국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한다. 진실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필요악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거대한 선을 구축하거나, 혹은 이에 동조하거나 그저 무기력해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방식을 모색하고 선택한다. 그들의 코스튬은 비범한 특수성을 위시하는 이미지라기보단 내외의 이중적 심리를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다. 처참하지만 한편으로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결말부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구조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누가 왓치맨을 감시할 것인가?(Who watches Watchman?)’라는 질문은 단순히 스크린 너머의 세계에 갇힌 고민만은 아니다. 거대한 힘의 움직임은 모든 작은 것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움직임을 끊임없이 주시하지 않을 때 세상은 때때로 위태로워진다. <왓치맨>은 그 심오한 질문을 내던지기 위한 새로운 그릇이다. 또한 <왓치맨>은 익숙한 대답을 떠오르게 만든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영웅을 악당으로 변모시키는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 등장했던 그 시기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를 넘어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이 도래했다. 슈퍼 히어로 코믹스를 한 단계 진일보 시켰던 1980년대의 변혁을 상기시키듯 21세기 다크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영웅을 악당으로 변질시키는 건 단지 영화 속의 시대상에 불과한가? <다크 나이트>와 <왓치맨>을 보게 될 21세기 관객들은 과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20세기의 그래픽 노블들은 왜 21세기의 스타일을 입고 다시 구현되는가. 가상의 세계를 수놓은 화려한 비주얼 너머로 도사린 의미심장한 물음엔 어쩌면 우리가 얻어야 할 어떤 조언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왓치맨>의 원작에서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모든 건 네 손에 달렸어.'
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