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는 간 때문만은 아니다. 밥 말리는 말했다. “악은세상을 망치려고 하루도 쉬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추적자>의 백홍석도 그래서 뛰고 또 뛰었다.
정의는 승리한다, 라는 말 쉽게 믿을 수 있는가. 승리가 셀프던가. 정의는 우리 주변에서 늘 손쉽게 패배해왔다. 하지만 99번의 패배 끝에 단 한 번의 정의가 승리하면 대부분 정의가 승리했다고 손쉽게 자축한다. 당연히 그리 돼야 할 일에 기꺼이 감격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무력한 일인가. 혹자들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추적자>에서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히는 강동윤은 말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타납니다. 30억이면 친구의 딸을 죽이고, 총리가 되기 위해선 평생 지켜오던 신념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죠. 난 어쩔 수 없었다고. 백홍석 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잘 알려진 대로 <추적자>는 ‘땜빵’용으로 편성된 작품이었다. SBS는 월화미니시리즈 <패션왕>의 후속작으로 <빅>을 편성하려 했으나 KBS2에게 밀린 뒤, <드라마의 제왕>을 주목했으나 캐스팅문제로 <추적자>를 급히 편성했다. 입봉작도 없는 신인작가에 시청률을 책임질만한 스타배우 하나 없는 <추격자>는 몸뚱이 밖에 믿을 게 없는 백홍석과 같은 신세였다. 7월 19일에 종영된 <추적자>의 시청률은 22.6%를 기록했다. 월화드라마 중 시청률 1위였다. 작품의 힘만으로 건져낸 결과였다. 고무적이다. <추적자>는 힘있는 이야기를 엔진 삼아 스피디하면서 리드미컬한 연출력으로 시동을 걸고, 박근형, 김상중, 손현주, 김성령 등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 호연으로 핸들링했다. 매회마다 속도감 있는 액션이 발생하는 가운데 반 박자 빠른 내러티브의 대회전을 통해서 한 뼘씩 예상을 빗겨나간다. 선악의 대립을 웅변하기 보단 복잡다단하게 얽힌 관계의 정치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의 방향을 주시하며 지극히 현실적인 음모론을 제시한다.
대기업 회장인 장인과 유력한 대권 후보인 사위는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할 때조차 상대의 빈틈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체스판이다. 이기기 위한 싸움을 설계함에 있어서 중요한 건 이용할 수 있는 무기를 파악하는 일이다. 모두가 그들의 말이 될 수 있다. 강동윤은 말한다.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 보면 깔려 죽는 벌레도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손을 내미는 정치인은 그 손으로 자신의 말을 고른다. 무엇보다도 <추적자>엔 진짜 거물의 표정이 있다. ‘주판 함 놔볼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서 회장은 결코 손해 보는 승부는 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미친 년이 머리에 꽂고 있는 꽃하고 같은’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건설한 제국의 안녕이다. 그는 연기하듯 아버지의 표정을 짓다가, 다시 회장의 자리로 돌아온다. 결코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 그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셈할 뿐이다. 자신이 홀로 남는 고독한 순간까지도 그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계산한다. 부지런한 악당은 끝까지 세상을 피로하게 만든다.
본래 가제는 <아버지>였다. <추적자>의 몸통은 딸을 죽인 진범을 추적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녹록하잖다. 사람 하나 매수하기 위해서 돈 10억 즈음은 아무렇지 않게 쓰는 적을 몸뚱이 하나로 버티는 건 피로하고 고단하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건 ‘수정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정의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가만히 앉아서 쥘 수 있는 것이던가. <추적자>는 결국 당신을 목격자로 만들고 있다. 당신이 행동하지 않으면 정의란 그저 한낱 2음절 단어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백홍석처럼 달리고 구르라는 말도 아니다. 대선이 올해였던가? 세상을 결정짓는 순간은 마치 도둑의 발걸음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법이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그리고 집으로.” 하지만 알 사람은 안다. 그 작자가 결코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을. 홍상수의 열두 번째 장편 <북촌방향>은 어느 영화감독의 서울상경기를 그리는, 여전히 찌질한 굴레를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남자의 궁색한 일상을 그리는 또 한번의 수기다. 도돌이표처럼 되돌아가는 동선 속에서 메트로놈의 리듬처럼 반복되는 일상, 홍상수 감독은 비슷하지만 명확히 다른 대구의 거울을 통해서 거듭되는 우연의 체감을 통해서 의미를 얻어나가는 ‘생활의 발견’을 또 한번 이룬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부터 느껴지던 싸늘한 냉소가 <북촌방향>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감지된다. 여전히 제 버릇 개 못 주듯 자신의 다짐이 무색하게 일상에 치근덕거리는 남자의 일상적인 소비는 더 이상 연민이나 추억으로 언급될 수 없는 싸늘한 한기로 둘러쳐진다.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은 홍상수의 겨울영화다. 계절이 겨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고드름처럼 얼어붙은 냉소가 선명한, 북서풍 고기압성 결말, 더 이상 희희낙락하게 방관할 수 없는 그 남자들의 겨울이 예사롭지 않다.
한때 물밀듯이 쏟아지는 조폭코미디가 한국영화계를 장악하던 호시절이 있었다. <조폭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등 희화화된 조폭 캐릭터를 통해 코믹한 설정을 이어가던 조폭코미디는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 뒤로 시리즈가 양산되면서 설정의 질적 묘미보단 가공된 웃음의 양적 팽창이 극대화됐고 그만큼 관객은 점점 식상해 했다. 그럼에도 한동안 프랜차이즈를 유지하던 조폭코미디는 끝내 한동안 시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관객은 조폭코미디를 소비하면서도 때때로 그것을 충무로 영화를 비난하는 질적 표준으로 손가락질했다.
<유감스러운 도시>(이하, <유감 도시>)는 과거의 향수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정준호와 정웅인, 정운택, 그리고 김상중까지, 과거 <두사부일체>의 기시감도 덧씌워진다. 게다가 메가폰을 잡은 이는 <두사부일체>의 속편인 <투사부일체>의 김동원 감독이다. <유감 도시>는 정확하게 조폭코미디의 혈통을 계승한다. 속편의 양산으로 질적 하락을 거듭했지만 과거 조폭코미디의 시작은 나름대로의 설정적 묘미를 품고 있었다. 브랜드 네이밍을 거둘만한 실효가 어느 정도 존재했다는 의미다. <유감 도시>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속편이 아닌 이상에야 나름대로의 설정적 묘미는 검증할만한 자질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누가 봐도 <유감 도시>는 <무간도>를 삼켰다. 물론 <디파티드>급의 변주적 능력은 없다. 그저 코미디를 위한 일종의 패러디적 포석으로 <무간도>를 지목했을 따름이다. 경찰은 조폭이 되고, 조폭은 경찰이 된다. 설정은 누구나 아는 그것과 같다. 형태적으로도 홍콩 느와르의 비장함을 종종 내비친다. 그리곤 비범한 듯 묘사되는 상황을 코미디로 전복시킨다. <유감 도시>는 비장함을 묘사하는 척 하다가 우스꽝스럽게 그 상황을 전복시킨다. 이 형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내러티브를 전진시키는 와중에 개그콘서트에 가까운 상황들이 수없이 치고 빠진다. 때때로 희극적인 대사나 상황들이 발견되긴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지극히 촌스럽고 장기적으로 지루하다.
이야기가 뻔하다거나 그런 건 애초에 대단한 지적대상도 아니다. 산만한 구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도 어딘가 지겹다. 모든 걸 떠나서 <유감 도시>가 자신의 장기라 믿는 유머가 단연 볼품없다. 배우들의 몸개그나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대사는 순간적으로나마 웃음을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곧 비웃음이 된다. 순간적인 웃음으로 인내하기에 앞길이 뻔한 스토리는 길고도 험하다. 무엇보다도 성매매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착취적 성향의 개그들은 때때로 불편하기까지 하다. 시대착오적인 기대감이 <유감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나름대로 자기 캐릭터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영화는 최악으로 다다른다.
사람은 때로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부딪힌다. <유감 도시>는 이 대사로 시작된다. 반대로 관객은 때로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에 배반당한다. <유감 도시>는 목적이 뚜렷한 영화다. 당신을 웃겨주겠다. 하지만 요즘 웬만한 버라이어티만큼의 웃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TV는 적어도 관람료가 필요 없다. 단지 변변찮은 웃음을 구하기 위해서 극장까지 발품을 팔고 돈을 쓴다는 건 심각한 사치다. 아무리 시대가 흉흉하다지만 돈 주고 웃음을 사주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질 이유는 없다. 유감스러운 영화가 또 한편 등장했다. 이래저래 시대 유감이다. 코미디영화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편견에서 헤어나올 때는 이미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