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보이>개봉이 늦어졌다. 개봉이 늦어질수록 배우는 결과물이 더더욱 궁금해질 것 같다.
다른 사정에 대해서 난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반 작업이 중요했으니까 결과적으로 큰 힘이 된 거 같다. CG는 시간과 공력이잖아.
간담회 때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는데 울 거 같더라.
진짜로 난 울다 갔다. 우리 배우 셋이서 손 꽉 잡고 영화를 봤는데 셋 다 울었지. 만약 옆에 해일 씨 스타일리스트 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태 많이 안 좋았을 거다. 특히 난 화장도 했으니까, 휴지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면서 울었지. 물론 내가 내 연기하는 거 보면서 울고 그런 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진데 그냥 그때 다들 개인적인 감정들이 생각났을 거다. 나도 그 때 당시 내 마음이 너무 생각났는데, 그러니까 진짜 눈물 나더라. 그래서 사실 영화가 끝난 다음에 간담회를 할 감정이 안 돼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안 하면 안 되는 거 알긴 아는데 혼자서 있고 싶었지.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깊은 까닭일 수도 있지만 현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바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촬영장분위기는 일할 때 내 개인적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다. 촬영장이 어수선하다고 내가 해야 될 걸 못하진 않으니까. 내가 못해서 못한다면 모를까, 촬영장분위기가 진지하고 조용하다고 내가 의기소침해지거나 이렇지도 않고. 내가 진지해야 할 무대에 있을 땐 개인적인 문제건, 일 때문이건 상관없다. 물론 촬영장분위기가 어수선하면 좋진 않지. 그렇다고 그게 치명적인 방해가 되는 건 아니다. 일 끝나고 촬영이 종료되면 그냥 자연스럽게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얼굴 없는 미녀>가 안 그랬던 것 같다. <얼굴 없는 미녀>를 통해서 거친 여러 가지 감정의 여운들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좀 그랬다. 조난실이란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게 아니라 조난실이란 캐릭터를 통해 이 작품을 만나고 이를 통해 겪은 과정에서 얻어진 감정들이 다시 상기됐다. 사실 작품 끝내고 오래 전에 쉬었던 만큼 쉬는 동안은 괜찮았다. 편안했지.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그때 그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 같더라.
영화를 직접 보고 난 느낌은 어떤가?
일단 원작과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다는 건 원작을 보셨으면 아실 테고. 다만 그게 우연히 그리 된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정해져서 된 거니까. 난 개인적으로 영화가 전체적으로 맘에 든다. 이게 완벽하게 뛰어나서라기 보단 개인적으로 그 자체가 그냥 맘에 든다. 분야마다 개개인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고. 물론 마음 속으로 고통을 겪어가면서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그런 과정은 대부분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좋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여운들이 남을 것 같은 영화라서, 난 그 지점들이 좋다.
원작을 먼저 본 건가? 아니면,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원작을 봤다.
원작을 먼저 접해서 그 내용을 맘에 들어 했다면 시나리오에 납득하긴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지. 성격이 너무 다르니까. 재기발랄함과 발칙함, 그리고 감히 우리가 범접할 수 없을 만한 그 시대의 어떤 기운, 원작엔 그런 기운이 충만하잖아. 영화는 원작과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지. 사실 내가 했던 영화 중에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린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정도 아닌가? <타짜>도 전혀 다르고, 시대가 달랐고 개개인도 다르고 정마담조차 아예 다른 캐릭터였고. 그런 변화를 대중들이 얼마나 많이 공감하느냐의 문제겠지. 하지만 일단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고 이에 배우들도 동의했고, 애초에 우리가 본 시나리오가 원래 그랬으니까. 이미 그렇게 결정된 엔딩에서 시작한 시나리오니까 그 핵심적인 기운은 원작과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지.
조난실 캐릭터도 원작보다 가미된 점이 많다.
엔딩이 그렇게 되려면 조난실 캐릭터가 달라져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난 원작도 재미있게 봤다. 사실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느낌이지. 교육을 통해서 엄격한 강요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를 어떤 인물들을 통해 다른 시각으로 그려나갔다는 것. 사실 이해명이란 인물에겐 현실감이 없지만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정서, 그리고 행위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기막히더라. 그런 게 재미있었다. 사실 지금도 이해명의 감정이 다 생각난다. 조난실이 어땠는지 기억 안 나도 이해명의 감정은 지금도 다 생각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결말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영화에서는 원작과 달리 조난실의 내면적 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모호한 느낌을 가진 원작의 캐릭터보다 그렇게 직시된 감정선을 노출하는 캐릭터가 연기적으로 더 편하지 않았을까?
원래 편한 건 하나도 없다. 뭘 해도 다 불편하고 어렵다. 만약 그게 쉽다면 배우들은 일부로라도 어려운 걸 찾아서 쓸 때 없어 보이는 몰두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실은 그게 결코 쓸 때 없는 건 아니다.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도 관건이었을 것 같다. 조난실은 항상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여자다. 연기하는 스스로도 캐릭터와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원작에서의 조난실은 그 자체가 묘연해도 되는 여자인 거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조난실은 묘연한 매력이 있는 여자가 아니라 묘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여자인 거지. 필요에 의해서 묘연해지는, 선택적인 팔색조랄까. 그렇다고 감정이 절대 분명한 건 아니다. 왜냐면 해명이 이미 이 여자의 진심을 알았다 하더라도 조난실은 끝까지 해명에게 가리는 부분이 있으니까. 관객이 눈치채는 순간보다 해명이 늦게 눈치채는 거다. 난 조난실의 감정은 관객을 이해시키기보다 궁극적으로 해명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원작과 다른 건 조난실의 진정이 더 담겼다는 거지.
조난실이란 캐릭터는 스스로를 위장한다. 그건 일종의 연기적 행위처럼 보인다.
연기라기 보단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니까, 어쩌면 해명 앞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연기를 했을 수도 있지. 처음에 해명은 감정이 앞서서 이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랑했지만 조난실은 팀의 일원을 망가지게 한 분노와 총독부에 다니는 남자에게 알아내고 싶은 정보가 있었을 거다. 결국 해명의 기구를 갖다 팔아서 자기 조직의 자금으로 쓰기도 하니까. 하지만 단지 이런 목적을 위해 아틀란티스라는 카페에서 키스를 하고 이 남자의 집에서 잠시나마 함께 살았을까? 어느 정도 호감도 있었을 거다. 그러니 얼마나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은 또 얼마나 심란했겠어. 그 순간엔 필요와 목적에 의해서 연기했겠지만 감정을 절대 숨기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겠지.
난투극을 벌이고 나서 함께 만취한 상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애틋함이 전해졌다.
취기 어린 몸짓으로 이해명의 귓가에 대고 조난실이 노래를 들려주는 게 난실이의 진심인 거 같다. 이 철없는 남자를 자꾸 좋아하게 되는 거, 난 사실 이런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 입장인데도 웬만큼 독한 마음 먹지 않고서야 마음이 흔들리는 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지. 이해명이란 사람이 맹목적으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만큼 그 상대도 그 순수한 진심을 느끼게 되면 달라질 수 밖에 없거든. 난실이 해명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는 어쩌면, 난 이런 염원을 하는 사람이야, 이걸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난 그래서 그 씬이 개인적으로 좋다. 조난실의 진심이 가장 잘 드러난 느낌이니까. 정말 사랑하는 남자까진 아닐지라도 좋아하는 남자한테 내 진심을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절대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발 알아주길 바라는 간절함도 느껴지고.
지금도 스스로도 울컥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이건 우리 해명 씨가, 아니 해일 씨가 어떤 인터뷰에서 얘기해서 벌써 기사화 됐으니까 하는 얘기인데, 사실 그게 술에 만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상호 동의 하에 두 사람 다 술을 조금씩 먹고 했다. 난 술을 잘 안 먹기 때문에 얼마나 취해야 되는지 잘 몰라서 조심스러웠는데, 해일 씨는 좀 많이 먹었지. 취기를 가지고 연기한 건 처음이었고 내가 취해본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취해서 캐릭터를 잊고 실수하거나 촬영에 누가 되는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는데 그렇겐 안되더라. 그런데 조금 취한 상태였을까. ‘왜 그 실력으로 무대 뒤에서 노래를 해!’라고 해일 씨가 말할 때, ‘일본 말로 노래하기 싫어서’라고 대답하면서 정말 가슴에서 울컥하던데!(웃음)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던보이>는 시대적 고증이 잘 된 느낌이다.
시사회에 오셨던 여러 전문가분들도 그러시더라. 그 시대를 연구하는 박사 분들이 여럿 오셨는데 다들 완벽에 가까운 재현이라고 놀라시더라.
올해 초에 ‘인사이트 비쥬얼’이라는 VFX스튜디오에 취재차 들렸다가 <모던보이>CG작업 과정을 본 적이 있다. 경성을 완성하는데 CG의 공헌도가 상당한 걸로 안다. 사실 실제로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본 풍경과 영화 상의 경성은 많이 다를 거다. 아무래도 배우들도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감흥을 느꼈을 것 같다.
깜짝 놀랐지. 조선총독부의 복도 천장, 복도 깊이, 하다못해 해명이 일하는 곳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해명과 신스케가 얘기할 때 살짝 보일 듯 말 듯 일렁거리는 초록빛, 사실 내가 본 건 파란 벽이었을 뿐인데 도대체 실사 조명을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도시락 들고 해명이 총독부로 막 들어갈 때 창문에서 신스케가 ‘이해명!’을 외치면서 손 흔들잖아. 난 그거 어디서 찍은 지 알거든. 그건 또 어떻게 한 거야!(웃음) 사실 난 펼쳐진 공간보다 실내공간에서 많이 나오니까, 오픈 세트라 하더라도 블루매트가 멀리 있어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런데 공간에 대해서 감이 안 잡혀서 난감했던 적이 한번 있었지.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의 호화로운 오픈 레스토랑을 찍을 때, 작은 세트장을 레스토랑이라면서 실제 바닥보다 좀 높여놨더라.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건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보조 출연하시는 분들. 그 주변으로 경성 시가지가 보인대. 좀 이상했지. 그런데 CG로 완성된 장면을 보니까 그때 내가 느꼈던 어색함조차 상쇄시켜줄 정도로 놀라운 배경으로 완성됐더라.
그런 상황에서 연기를 하면 분명 어색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만큼 연기를 하면서도 뭔가 미완성의 기분을 느꼈을 테고.
꼭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불편한 상황은 많지. 잘 하려고 기를 쓰는데도, 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난 왜 이걸 진짜처럼 보지 못할까, 싶을 때가 너무 많으니까. 그럴 땐 정말 미치겠다. 그런데 사실 배우는 영화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노는 거지. 실상 그 공간을 더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연출자고. 그래서 결국 어떤 연출자가 어떻게 운용했느냐에 따라서 배우의 개인적인 완성도와 다르게 또 다른 완성도가 생기는 것 같다. 사실 그래서 배우가 더 초라해 보일 때도 있지. 후진 영화에서 배우가 열연하는 것처럼 가엾어 보이는 것도 없는 것처럼. 그 배우는 얼마나 열성을 다해서 했겠어.
조난실은 결국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진심을 위장하는 바가 있었을 거다. 때때로 배우이기 때문에 종종 영화를 위해서 캐릭터를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없나?
위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럴 때는 있었지. 항상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정말 내가 이 난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는 편리하게 해왔던 대로, 아주 전형적인 방식으로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안 해. 내가 재능이 부족해서, 혹은 아직까지 무언가가 부족해서 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어떤 순간이건 내 감정이 서지 않거나, 감정적이건 논리적이건 어떤 식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순간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억지로 연기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입장이다. 그럼 지금까지 모두 다 완벽하게 납득했냐, 라고 묻는다면 물론 그렇진 않지. 그렇지만 그런 근거가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 같다. 그리고 그걸 억지로 시키는 연출자는 결코 좋은 연출가도 아니고.
노래도 잘 하더라. 실제 실력인가, 아니면 시스템 기기를 활용한 건가?
본래 난 성량이 안 좋다. 그런데도 일부로 기계적인 거 별로 안 넣고, 심지어 에코도 안 넣었다. 왜냐면 노래에 조난실의 진심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물론 일부 불안한 음정은 잡아주셨겠지. 처음 무대에서 부르는 곡은 원래 노래가 되게 어렵다. 그런데 그 노래의 목소리 톤이나 태도가 조난실과 너무 잘 매치돼서 나나 감독님이나 음악감독님이 무리인 걸 알면서도 욕심을 내서 최대한 해보고 안되면 다른 곡으로 하자고 합의했다. 시간이 얼마든지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성량이 안되니까 ‘웅산’이라는 재즈 싱어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트레이닝 받았다. 그렇지만 디테일하게 개입하진 않더라. 조난실의 감정이 중요하고 그 감정으로 그 노래를 해석하는 게 중요했지, 내가 재즈 가수로서 테크니컬한 기술을 뽐낼 건 아니었으니까. 대신 기본적인 음률이나 음폭을 잡아주는 건 중요했다. 조난실은 그런 재능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김혜수도 최소한 그 정도의 재능은 갖춰야 되는 거니까.
영화를 찍으면서 레코딩도 함께 한 건가?
음악감독님이 처음 미팅 때 내 음색만 체크하셨다. 아무 노래나 불러달라 하시곤, 됐습니다, 하시더니 ‘개여울’이라는 곡을 나중에 가져오시더라. 가사가 김소월의 시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 정서와 맞아 떨어지고 조난실의 내면과도 맞닿는 게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래 들었을 때 마음이 일렁거리는 게 있는 것도 같았다. 연기하다 보면 그게 더 느껴지기도 하고. 사실 연기하기 전에 레코딩을 다 끝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하자고 부탁 드렸다. 실제로 영화에 들어가는 ‘개여울’은 다 끝낸 다음에 한 거다. 그래서 트레이닝 후로 몇 개월 지난 목소리라 가다듬어 지지 않고 거칠지. 사실 개인적으론 처음 부른 노래가 훨씬 매끈하고 기술적인 완성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음폭에 대한 훈련도 잘 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조난실을 연기하면서 내가 예상했던 조난실의 감정과 달라진 폭을 느꼈고 감독님도 나중에 부른 노래에 그런 감정이 담겨서 나중에 부른 걸 쓰신 거 같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지만 받는 게 있겠지? 실은 조난실 준비하면서도 여러 가지 공부도 했고, 작업을 거치는 와중에 영향을 얻은 것도 있고.
어려서부터 연기를 지속한 만큼 개인적으로 갈등도 많았을 거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성숙하잖아.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빨리 캐치하고 그 꿈을 향해 구체적인 실천들을 하는 것 같다. 우리 땐 그렇게 못했지. 나도 우연히 광고모델 하다가 영화를 찍었고. 성인 영화였지. 그런 성인 영화 말고 성인 등급의 영화. 그때 내가 만 열 다섯 살이었는데 그 때 했던 역할은 십팔 세 밤무대 여가수였지. 원래 김진아 언니가 내정돼있었는데 언니가 미국에 갈 일이 있어서 그 역할을 수행할 신인을 급하게 찾던 중에 영화사에서 내가 출연한 광고 사진을 본거다. 내가 최소한 대학생은 되는 줄 알았다나. 광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의뢰가 왔다.
첫 광고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태권도복 입고 나오던.
그러니까, 그거! 그 광고 찍고 그 회사에서 또 뭘 해달라 그래서 내가 ‘암바사’ 사진광고도 찍었다. 지금 보면 애 같은데 그땐 좀 성숙하게 보였나 봐. 화장을 해서 그랬나.
어린 나이였는데 어떻게 허락하게 됐나?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사실 나야 애니까 모르는 거지. 부모님이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고. 아버지께서 심각하게 반대하셨지. 그땐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 이런 포스터들이 걸려있던 시대라 영화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전혀 다르기도 했고. 그런데 미성년자 딸에게 그런 제의가 왔으니.(웃음) 그런데 감독님이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사무실에 열심히 찾아가셨고, 그 과정에서 시나리오도 좀 바꿨고, 종래엔 학교에도 오셨다. 선생님들도 허락 안 했으니까. 감독에겐 그런 치사한 과정이 있었던 거지.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하게 됐지만 내가 뭘 알아? 모르지. 광고는 하란 대로만 하면 되지만, 웃어요, 하면 빵긋 웃고.(웃음) 나 진짜 그 때 가관이었다.
박중훈 씨도 그 작품으로 함께 데뷔했다.
중훈 오빠는 배우로서의 욕망이 진짜 있었던 사람이다. <깜보>한다고 처음 합동영화사 갔을 때 장두이 아저씨는 미국에서 아직 안 오셨고, 상대역이라고 중훈 오빠가 왔는데 물빠진 빽바지에다가 청자켓을 입은 모습이 너무 불량해 보이더라.(웃음) 나중에 들어보니까 오빠는 나한테 잘 보이려고 웃었대. 난 웃는 모습조차 너무 불량해 보였고.(웃음) 그런데 실제로 연기할 때 욕심이 대단했고, 적응력도 대단하고, 내가 볼 땐 그 때 이미 처음부터 연기도 잘 했던 거 같다. 머리도 비상했고. 그에 반해 난 너무 평범한 애였지. 조감독님 허리띠 잡고 다니면서 눈 오면 조감독님이 업고 다니기도 했고, 촬영하다 자고.(웃음) 밤을 새본 적이 없었거든. 그 때는 15시간, 16시간이 보통이었으니까. 카메라가 앞에서 돌아가거나 말거나 촬영하다가 졸리면 옷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다. 그렇게 애가 대충 깨워도 안 일어날 정도로 자니까 어른들 마음이 좀 그랬는지 그날 촬영은 접고. 내가 그렇게 자랐지.
그 나이엔 특별한 경험이었을 거다.
배우라는 개념이 생기기엔 정신적으로 많이 어린 나이였지만 좋았던 건 어른들 틈에 있었다는 거? 학교에 가면 그 또래들만 봤을 텐데, 어른들이 다 유별나잖아. 머리 긴 아저씨도 있고, 희한한 옷도 입고 다니고, 특이한 얘기도 많이 하고. 영화 얘기, 음악 얘기, 이런 걸 보고 들으면서 이런 게 예술가들인가, 싶었지. 머리만 길어도 저 아저씬 뭔가 심오한 게 있나 봐, 그랬고.(웃음) 다들 예술가의 기운이 있었으니까. 그런 게 신기해서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몰두했다. 그런 게 꽤 오래갔지. 그런데 정작 감독님이 말하는 건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감독님도 날 애기 다루듯이 했다. 이게 이해가 되니? 감독님이 물으면 예, 라고 하지만 뭘 알았겠어. 그렇게 영화 하면서 철도 들었지. 그런데 내가 너무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내가 일해야 하는 분들과 개인적인 소통이 안 되더라. 날 애기 때부터 만 봐왔고, 난 늘 그 팀에서 애기였고, 그러다 보니 내가 이제 성인이 되도, 혜수는 애기니까 몰라, 이렇게 생각했는지 아무도 나랑 얘기를 안 해. 그런데 난 이제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면서 이 일에 내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만큼 이 일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만큼 일에 대한 어떤 의지나 방향, 내가 원하는 것, 그런 고민이 생기잖아. 근데 그게 좌절이랄 것도 없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듯한 상황이 늘 연출되는 거다. 근데 그것도 괜찮았다. 늘 그랬으니까 그런가 보다 그랬지. 그런데 어느 순간 못 참게 되는 순간이 생기면서 괴로워졌다. 이십 대를 그렇게 보냈지.
배우로서의 능동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걸까?
능동성? 글쎄, 사실 그런 고민들은 20대부터 있었으니까. 개인적인 방황이나 좌절 같은 거, 물론 그땐 방송도 많이 하고 1년에 한편 꼴로 영화도 했지만 주로 밝은 드라마만 하면서 항상 웃기만 하고, 누가 봐도 지나치게 밝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른 척 하고 싶지만 절대 모른 척 할 수 없는 고민들이 자꾸 생기잖아. 왜냐면 내가 실제 생활하는 시간의 대부분이 거기 있었으니까. 그러다 내가 진심으로 이게 정말 쉽지 않구나, 라고 좌절했던 건 우리나라영화계가 다른 단계로, 다른 진화를 겪을 때였다. 영화계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세대가 좀 달라졌지. 세대 교체를 겪었다고 할까. 그때 나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늘 그런 거였지. 김혜수는 항상 하이톤에 건강미 넘치는 밝은 웃음만 보여주는,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단면적이거나 이면적인 인간미를 찾아보기 너무 힘든 사람이 됐다는 걸 깨달았지. 어느 순간 내가 이지경이 됐구나, 그렇구나. 이런 좌절이 컸다.
스스로에게 가장 큰 변화를 제공한 건 <쓰리>가 아닐까 싶다. 조난실이 이해명을 만나 격변을 겪듯 본인도 <쓰리>를 만나서 어떤 변화를 경험한 것 같고 <얼굴 없는 미녀>로 확신을 찍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내적인 변화나 요동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좀 다르게 보여줄 수 있었던 찬스가 <쓰리>였지. 그 지점은 분명해. 그리고 거기서 다른 어떤 불가해한 수렁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건 <얼굴 없는 미녀>가 맞고. 김지운 감독님이 자연스럽게 나에 대해서 다른 면을 보셨던 거 같다. 그렇다고 억지로 김혜수의 이런 면을 봐야겠다,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김지운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신라의 달밤>때문에 압구정에 있는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을 때, 매니저였던 성혜 씨가 내가 김지운 감독님 좋아하는 거 아니까 아래 층에 김지운 감독님이 계시다고 알려주더라. 사실 감독이나 배우가 먼저 가서 인사하는 게 어려운 건 자존심 상해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거든. 내가 이 감독님 좋아한다고 해서 그 감독님에게 굳이 찾아가 인사하는 게 조용한 분들에겐 부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망설이다가 그냥 가서 인사 드렸는데 뭔가 메모하고 계시는 거다. 뭐하세요? 물으니까, 단편 준비해요, 하셨고, 그렇게 잠깐 이야기하고 다시 올라온 게 전부인데 나중에 그 단편 시나리오를 받게 됐다. 개인적으로 대학 때 단편 작업을 좋아했기 때문에 공포건 뭐건 상관없이 단편이라 좋았고, 김지운 감독님과 너무 작업하고 싶었으니까 어쩌면 시나리오 안보고도 했을지 모르지. 사실 단편이라 개봉할 줄도 몰랐다. 그게 한국, 홍콩, 태국 합작으로 만든 같은 테마의 옴니버스 프로젝트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고. 그런 건 상관없었으니까.
차기작에 대한 계획은 아직인가?
계획이 없다. 아직 못 정했다. 잘 안 들어오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몇 개월에 한번씩 간혹 들어오는 것들이 고민해보게 만든다는 거. 연기는 해야 되는데, 이러다 손가락을 빨면서 워크샵을 전전할 지도 모르지.(웃음)
최근 영화를 위주로 활동했던 배우들이 드라마로 진출하는 경우가 늘던데.
나쁜 것 같진 않다. 가뜩이나 시장도 좁은데 따질 필요도 없지. 배우는 연기를 하면 되는 거고.
예전엔 본인도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다.
난 주로 드라마를 했었지. 배우는 지속적으로 연기해야 되는데 백 개를 해도 하나 잘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이거보다 나아지길 바라지. 그건 불가능해. 왜 <타짜>의 정마담을 못 뛰어넘냐, 사실 그런 각도에서만 본다면 더 이상 그 지점에서 연기를 하지 않는 게 옳다. 그런데 그건 아니지 않나. 그럴 수만은 없지.
그건 단지 다른 사람들을 통한 고민만은 아닐 거다. 스스로 느끼는 어떤 강박이 될 수도 있다.
평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내 인생을 통해 무언가 많은 것을 쏟아 붓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정체돼있기만 하면 내 인생에도 의미가 없는 셈이지. 그걸 굳이 남들이 알아봐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일부로 남 모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너무 못 알아봐주면 그것도 좀 서운하겠지. 그런데 정말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 그리고 실은 그것보다 더 한 것도 해야 된다는 걸 이번에 배웠다. 이게 정말 다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또 다른 게 있더라. 그거 하나 이만큼 해내는 게 죽도록 힘들고 정말 이래야 하나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할 수 있구나, 해야 되는 구나, 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정말 그래서 뭔가 나아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나도 모르는 거고. 다만 그걸 해보자는 거고. 쉽지 않겠지.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림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특별히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했나?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까 하게 된 거지. 정규수업도 다 못했던 애가 미술공부를 어떻게 하겠어. 어쩌다 몇 년마다 가끔 한번씩 심심할 때, 그려볼까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야. 장난 같은 거지.
배우 김혜수 외에도 인간 김혜수에 대한 욕심이 많아 보인다.
10대 중후반부터 20대까지 열심히 살았지만 맘껏 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나 봐. 욕심이 많다기 보단 그냥 놓치기 싫은 것들이 좀 많아. 그런 것들을 알게 된 뒤로 좀 안 놓치고 살려고 하지.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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