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한 주가 지나고 있다. 평생 기억에서 사라지지 못할 만큼 침통하면서도 깊게 내려앉은 한 주가 가고 있다. 사람을 하나 보내고 있다. 눈물과 애도 속에서, 때때로 분노하는 언성과 담담한 눈빛이 교차하는 세상은 모질고도 평온했다. 시청 앞과 서울역을 비롯해 곳곳에 점처럼 놓인 분향소의 풍경들이 따스하듯 서러웠다. 애처로움을 가릴 수 없어 때론 뭉클했지만 타오르는 마음 한 곳을 추스를 곳 없어 뜨겁고 매웠다.
그 죽음이 무엇을 남겼는가, 에 대한 논의는 급하지 않아도 좋다. 일단은 상처를 위로할 때다. 하지만 이 슬픔이 한데 모여 발전적인 에너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좋겠다. 고인에 대한 비통한 심정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넘어 새로운 각성의 계기로 나아간다면 더더욱 좋겠다. 고인의 뜻대로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도 스스로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인간의 진심을 능욕하기 쉬운 우리 사회의 냉소적 잔인함을 되새겨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외면했던 사회적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 정작 그 먹고 살기 위한 무관심이 스스로의 생계를 쥐고 흔드는 거대한 딜레마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던 정치인이자 타인에게 관대하던 한 인간의 죽음은 살아 숨쉬는 이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나은 사람이었다. 빈 자리에서 새어나오는 채무의 공기가 산 사람의 폐를 무겁게 채운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란 죄의식이 은연 중에 뒤섞여 산 사람을 흔든다. 고인에 대한 애도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한 위로가 절실하다. 그렇다고 어느 한 사람을 탓하지 말자.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분노와 저주로 염세하는 건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 아니다. 우린 이제부터 갈 길이 먼 사람들이다. 염치 없는 자는 칼과 방패로 스스로를 막아서지만 양심을 아는 자는 제 한 몸으로도 칼과 방패에 맞선다. 세상을 비극으로 만드는 건 어느 한 사람의 지독한 야비함이 아니라 그 야비함을 방조하고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멸망시키는 담담함이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따위로 세상을 멸시하다 담담히 주저앉지 말자. 자조하다 체념하고 냉랭해지기 보단 고민하고 일어서며 뜨겁게 내뱉으라. 당신의 뜨거운 마음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이상을 현실로 억압하지 마라. 그 이상이 언젠가 당신의, 혹은 당신의 아들, 딸의 현실이 될 것이다. 당신의 뜨거운 양심으로 세상을 덥혀라. 세상에 눈감지 말라. 눈을 뜨고 깨어있으라. 상록수처럼 푸르른 양심으로 살아있으라. 그러면 우린 될 거야. 아마.
현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상실감이 가장 큰 세대는 20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좀 더 명확히 추출하자면 2002년도 즈음 처음으로 투표권을 얻어서 대선에 한 표를 행사했던 20대, 혹은 현재 30대 초반 즈음이 됐을 청년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처음으로 대선에서 행사한 자신의 한 표가 승리로 이어지는 상황의 고무를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해는 월드컵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4강에 올라서 길거리 응원과 같은 방식의 축제적 고무를 경험한 시점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작년 촛불시위에서 보여줬던 이미지가 저항과 축제의 연동이란 점은 과거 민주화 운동의 유전자에 더해진 2002월드컵 당시 길거리 응원의 학습능력이 연장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과거 최루탄과 맞서던 전공투의 이미지를 학습하지 못했던 어린 세대가 간접적으로 흡수한 과거사의 경험치가 창의력인 놀이문화와 맞붙어 길에서 전시된 셈이다. 동시에 이는 과거 386이라고 불리는 운동권 세대에게도 어떤 자극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수동적으로 길들여졌다고 믿었던 청년들이 거리에서 자발적인 구호를 외치는 광경은 어떤 식으로든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노무현의 죽음은 젊은 세대가 주축이 돼서 길어 올린 영웅의 몰락을 보는 것 같다. 이는 분명 현재 그 당시 투표권을 행사했던 세대에겐 상실과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쥐어줄 만한 중요한 지표다. 특히 요즘처럼 20대를 억압하는 세대적 구조 속에서 그들이 느낄 갈망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분명 벌써부터 다음 대선의 향방을 가늠하는 지표로서 작동될만한 시발점이라고 본다.
어쨌든 20대는 유일하게 자신의 세대 안에서 수용될 수 있는 정치적 스타를 잃었다. 20대에게 있어서 영웅의 이미지가 연예계와 스포츠로 한정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노무현의 이미지는 상당히 이례적인 한 점이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그 한 점을 상실했다. 이는 곧 그 이미지에 대한 실추를 시도하고 끝내 이룬 보수적 정치인과 권력구조, 언론에 대한 총체적 반감으로 연동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은 단지 추모의 차분함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지만 이후, 그러니까 포스트 노무현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분명 마련될 것이다. 어쨌든 이에 대처하는 기성 권력의 움직임도 분명 마련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일단 추모의 기간이 끝나야 명확해지겠지만. 어쨌든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 밑바닥이 끓고 있다. 노무현의 빈자리는 분명 발화점이 되고 있다. 다만 누가 그 빈자리의 적자를 차지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마치 노무현이 그러하였듯이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신선한 얼굴로 대체될 가능성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때도 사람들은 모여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눈물 흘리거나 한숨을 내쉬고 추모의 발길이 모이는 광경에서 그때와 비슷한 기시감을 얻는다. 정적과 광풍처럼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생을 관통한 두 사람의 엔딩 앞에서 사람들은 동일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형태가 전혀 다른 두 서사의 동일한 지점은 감정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놈현 탓이다, 라고 비아냥거렸던 이들도 그 죽음 앞에서 엄숙함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노무현에 대한 비아냥이 지금 MB에게 보내는 욕지거리와 차원이 달랐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마음 놓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그만큼 관점의 여유가 생겼다. 애초에 인간적 그릇의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누구처럼 고개 돌리고 상종하기 싫은 위인은 아니었던 셈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당시 사람들은 어른의 죽음을 슬퍼했다. 점차 어른이 사라지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운 주검 앞에 몰려들어 눈물을 훔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자리는 무엇을 전하고 있나. 이 거대한 비통함의 행렬 속에서 기이한 기분을 느낀다. 현재 이 죽음으로부터 느껴지는 깊은 상실감은 그 죽음과 깊게 연관돼있다. 그 죽음 이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란 인물에 대해 이토록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치부됐고, 힘없고 나약하게 조롱당하곤 했다. 하지만 죽음의 형태가 보여준 진심이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만약 이 죽음이 양심적 자살이 아닌 돌발적 사고, 혹은 자연적 사망이었다면 적절한 애도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어느 한 인간의 마지막 서사에 대중들의 마음이 동하고 있다. 극단적이지만 지극히 영화적인 결말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예술적 감동이 발생한다.
자신의 생을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진심을 전하는 이의 마음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그 마지막 진심을 추모하고 또 그리워한다. 그 마음이 만들어낸 빈자리를 보며 채워 넣을 수 없는 절망을 느낀다. 양심을 느끼는 인간이란 낯설다. 인간적으로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양심 따위가 중하다는 말이 낯설다. 노무현의 죽음은 마치 죽음으로서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양심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마냥 비참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비통함 역시 이런 감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죽음이 휘저어 놓은 자신의 마음에서 떠오르는 부조리를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게 만든다. 명예라는 언어의 숭고함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명확하게 부활한다.
스펙이 인간의 가치를 대변하는 기준이 되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갈증을 느낀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갈된 인정을 감지한다. 인간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성공과 성취가 소유욕을 대변하는 시대에서 사람의 마음이란 갈 곳이 없다. 그런 시대에서 감수성에 예민한 사람이란 아슬아슬하다. 전직 대통령 시절부터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사람들은 품위가 없다고 했지만 실상 그 품위 없음이 권위적 길들임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있다는 것에 통쾌를 느끼지 않았을까. 놈현스럽다, 라는 막말에 담긴 비아냥은 애증과 같았다. 쥐새끼라고 멸시당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놀림이다. 물론 이 죽음을 통해 분노를 확보하진 말자. 지금은 위로를 전할 때다. 너와 나의 마음 사이의 허물어진 간격을 살피고,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볼 때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다만 사람답게 사는 방식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서로를 안고 쓸어 내려야 한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담기 전에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시간을 품자.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으로 기억되거나. 죽은 영웅을 추모하는 우리는 결국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니 악당은 되지 말자. 사람은 못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애도하라. 그게 사람이 사는 방식으므로. 산 사람은 살아서 답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란 이런 건가. 슬프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렇게 진한 애정이 있진 않았다. 차라리 애증이랄까. 무엇보다도 안타깝다는 말이 언어가 아닌 한숨으로 나온다는 건 분명 진심이다. 죽음이란 찰나의 쓸쓸함으로 위안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두고 기억나는 일이다.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얼굴이었건, 누군가의 술자리에서 씹어대기 위한 안주거리였건, 누구나 알만한 이의 죽음은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다.
사고도 아닌 자살이란 말이 조금은 낯설었다. 누군가는 지금쯤 말하고 있겠지. 그 정도 가지고 자살씩이나. 현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 그리고 고위 공직자까지 포함해 연병장에 일렬로 세워서 깔끔하게 통장 관리해온 사람들 순위를 매겨보면 노무현은 몇 번째에 해당될까. 누구 말대로 인물이 아니었군. 그래, 인물이 아니었어. 돈 받아먹고 입 씻고 뻔뻔하게 살아갈만한 위인이 아니었던 거지. 나약했다. 지금까지 누구라도 그러했듯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사람들도 살아갔을 텐데 정작 스스로는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참 쓸쓸한 일이다.
드라마틱한 사건인 건 분명하다. 이 드라마를 보고 느낀 감정이 도대체 어떤 형태의 결론으로 굳어질지도 잘 모르겠다. 더 참혹한 건 그 이후의 세상이다. 종로나 청계천, 시청, 그리고 심지어 대학로까지도 경찰들이 쫙 깔렸다는데 난 이 현장에 분노를 느낀다. 물질적 요구로 마음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함께 손을 부여잡고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이 세태에 난 분노한다. 이 죽음 이후의 감정이 분노로 연결된다는 것이 참혹하다. 어째서 애도하지 못하는 건가. 어째서 이 상실감을 연대하지 못하게 하는 건가.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가장 무능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현명함을 억누르는 꼴이라니, 마치 기르는 개에게 물린 것마냥 마음이 심란한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자살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홈피에 끄적인 김동길이란 작자나 현재 서거가 아닌 자살로 수정해야 한다며 입방정 떨고 있는 조갑제 같은 위인은 뭘 아는지 모르겠다. 댁들의 죽음이 얼마나 세상을 상쾌하게 만들지, 남의 죽음을 함부로 지껄이는 이들의 삶이란 얼마나 무가치 한 것인지. 관심이 사치인 인생이란 이런 것들이다. 정작 자살해도 좋을 위인들이 성질이 뻗치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되레 호통치고 살아가지. 나 잘났다고.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티끌이 부끄러워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감동이 된다.그리고 아픔이 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티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란 없기에 자신의 삶을 순수한 방식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난 이 죽음을 애도하련다. 노무현이 티끌 하나 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양심적 채무가 누군가의 짐이 되길 원치 않았던 사람이라서다. 그게 바로 사람이다. 사람 구실 못하는 짐승의 우리 같은 세상에서 사람이 되길 원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이처럼 절절하다. 명복을 빈다. 서거든, 자살이든, 부디 편히 눈 감길. 의미 있는 삶이었어. 적어도 사람 냄새가 났지. 그러니 이제 사람의 빈자리를 추모합니다. 잘 가세요. 노무현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