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 단평

cinemania 2010. 7. 22. 09:45

냉전시절 미국에 침투해 잠복해 있던 러시아 스파이들이 일거에 미국 공격을 개시한다는 ‘데이-X’라는 냉전시절 가설에 대한 신빙성을 묻기 전에 이 낡은 가설이 여전히 이야깃거리로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솔트>는 여성 스파이를 앞세워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작품이나 야심의 그릇만 그럴싸한 아류작에 불과하다. 와이파이 시대에 모뎀 켜는 소리마냥, 설정 자체가 진부한 이 스파이물은 이를 극복할만한 대안으로 안젤리나 졸리라는 여배우의 매력 자체를 내세워 끊임없이 액션의 보폭만 넓혀 나간다. 어쩌면 단지 우격다짐처럼 액션을 밀어넣을 수 있는 공간 확보가 본래 목적이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 눈요기 역시 그 모든 단점을 덮을 만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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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단평

cinemania 2010. 7. 13. 21:31

타인의 꿈을 설계하고, 그 꿈에 침투해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생각을 추출하는 자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은 마치 의식 속에 잠재된 거대한 무의식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실험처럼 보인다.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들은 주체적인 자아의 세계관을 놓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고 깨어나며 한 꺼풀씩 경계를 벗어나거나 들어선다. 세계관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서처럼 시작되던 영화는 점차 내밀한 설계도를 펼쳐 보이며 서사적 속도감은 유지한 채 시각과 정보의 밀도를 팽창시키며 영화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 입구와 출구의 위치는 정확하며 구조는 입체적이되 경제적인 동선을 보유한 내러티브와 경이적인 인테리어를 보는 것마냥 발견에 가까운 영상들이 곳곳에서 자리한 <인셉션>은 분명 하나의 전형으로 남을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라도 열어보고 싶게 만들 만큼, 어느 작가의 머리 속에 담긴 의식과 무의식의 싸움이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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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는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산산조각 나버린 어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놈 목소리>처럼 절규하는 아버지는 <올드보이>처럼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을 괴롭히는 범인을 <추격자>처럼 좇는다. 후더닛 구조를 포기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도전적인 작품이지만 결과물은 지극히 실패에 가깝다. 좀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것마냥 맥락의 가닥을 잡지 못하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열연은 연기쇼와 같은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지나치게 의욕만 앞선 장르적 기시감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용서는 없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올해의 과유불급 스릴러로 꼽힐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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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속으로> 단평  (0) 201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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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는 포항에서의 실제 전투를 극화한 <포화속으로>는 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 신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감 넘치는 전투신을 목격하기 보단 ‘전쟁 화보’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다. <포화속으로>는 재현보다도 포장에 능한 작품이다. 물량공세를 퍼붓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긴박감이나 비장함을 발견할 수 없는 건 그 덕분이다. 캐릭터의 비장함도, 전쟁의 참혹함도, 하나 같이 흉내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포화속으로>는 전쟁의 껍데기를 두른 마초 화보 영화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만들 심산이었을까. 그렇다면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놓았다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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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동명의 원작 게임을 즐긴 이들에게는 이름만으로 추억이 되겠지만 그 제목의 형태 이상의 의미는 염두에 두진 말 것. 마치 올드한 아케이드 어드벤처 게임을 상기시키듯 올드 패션한 어드벤처 무비를 완성시킨 것마냥 촌발 날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적당한 합의는 거둔 오락영화랄까. 투박하지만 활극적인 묘기에서 발생하는 서커스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다면 그럭저럭.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종종 막무가내처럼 흐르는 서사와 액션을 즐길 수 없다면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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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 단평

cinemania 2009. 12. 18. 11:15

<범죄의 재구성><타짜>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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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단평

cinemania 2009. 12. 11. 19:38

벌써부터 로버트 저메키스의 한숨이 들린다. 저메키스가 오랫동안 약진과 답보 사이를 전전하는 사이, 제임스 카메론은 한 방으로 모든 것을 바꿔놓을 참이다. 현격한 기술력의 진화가 대자본의 투자 가치마저 설득할 정도로 놀랍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라는 닳고 닳은 소재를 순수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건 아이디어의 힘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은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의 가상적 체험을 가능케한다. 접촉을 감지할 때마다 형광빛의 색채감과 LED에 가까운 조도를 밝히는 판도라의 대자연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인테리어된 원시림의 풍요를 접목하며 환상적인 감상을 부른다. 기술적 진화가 완성한 이미지는 감성적 체온마저 전달한다. 그 모든 것이 3D라는 기술적 도구를 효과적인 표현 양식으로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찍어낼 수 있는 <2012>가 거대한 사치라면, <아바타>는 자본만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진짜 명품이다.


<아바타>의 블록버스터적인 스케일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3D관람을 권장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만큼 <아바타>를 통해 목격할 3D비주얼이 체험 이상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현존하는 3D영상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평해도 좋은 첫 번째 작품이다. 단순히 체험적 값어치만을 따진다 해도 기회비용을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또 한번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한다 해도 <아바타>는 그 발언마저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라 이해시킬만한 작품이다. <아바타>는 영화 역사상 새로운 세기를 일군 혁신적 유산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며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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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문> 단평

cinemania 2009. 12. 1. 14:36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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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단평

cinemania 2009. 11. 20. 15:31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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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의 셀프메이드(self-made) 작가가 된 감독. 그 전업엔 사연이 있다. 감독은 눈이 멀었고, 빛이 없는 세상에서 연출이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이야기꾼으로 삶을 전가했다. 감독은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그게 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처럼 어긋난 단추를 채우듯 균열적인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의 삶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리던 시절을 수집해 다시 삶을 복원해나가는 작업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잔잔한 심해에서 거친 수면으로 나아가듯 로맨스의 파국을 심상찮게 묘사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지만 특유의 멜로적 파토스에서 새어 나오는 긴장감과 성격이 다른 스릴러적 서스펜스가 별도로 구성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풍부한 정서적 감흥을 자아내는 유려한 영상은 여전히 대단한 감상을 부여하면서도 서사적 흥미를 자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전작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덕분에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감지되던 자극적 심상의 깊이가 얕아진 듯한 인상이 들지만 텍스트적인 재미는 좀 더 보충된 느낌이다. 동시에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98)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자전적 고백이 담긴 것만 같은 입체적 감상마저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영화적 경력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귀향>이나 <그녀에게>만큼의 감정적 진동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안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페넬로페 크루즈를 선택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안목은 이번에도 또 한번 여실히 증명된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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