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인간(?)의 테러로 비디오 대여점 테이프의 내용물이 모두 지워진다. 빈 깡통처럼 비디오만 남고 영화만 사라졌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게는 엉망이 되고 종업원은 걱정이 태산이다. 정작 사고의 주범인 친구는 넉살 좋게 말한다. 우리가 다시 채우면 되지. 비디오 대여점이 영화 제작소로 탈바꿈한다. 그들만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제작되고 대여되며 비로소 시작된다. ‘친절하게 되감아 달라’는 비디오 대여점의 작은 소망과 무관하게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명작들을 되감아버린다. 간과할 수 없는 영화 속 명장면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재해석되고 단편적이지만 유쾌하게 나열된다. 때때로 두서 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덜컹거리지만 그 끝에 건질만한 감동이 우러난다. B급 마인드로 무장한 유희를 빌미로 전설적인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을 복원하기까지, 그 두서 없는 짝퉁 사연의 말미에 감동의 체온이 느껴진다. 문화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찾은 대중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중들이 객석의 소비자로 밀려나버린 시대에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창작의 공유를 통한 유희적 인간의 복원을 감동적으로 설득한다. 잘 만든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분명 좋은 영화라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그렇다.
롱숏에 담아낸 풍경들이 저마다 장관이다. 인물 너머에 펼쳐지는 풍경들도 좋은 밑그림이다. 그저 카메라에 잡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호주를 위한 영화다. 게다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배우 니콜 키드만과 휴 잭맨까지 출연한다. 바즈 루어만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사랑과 전쟁, 인간과 자연을 아로새기는 거대한 대서사로 기획했다. 특히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얻었던 호주의 수난사를 위로하고자 한다. 특히 노예로 착취된 혼혈2세들, 일명 ‘빼앗긴 세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성찰보단 호강에 가깝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스토리는 초호화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스토리는 안이하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활공하는 카메라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방만한 이야기에 방대한 이미지가 산만하게 흘러 넘친다. 저마다 제 빛을 내느라 응집될 겨를이 없다. 호주의 절경도, 배우들의 열연도, 방만한 서사도, 거대한 규모도, 하나같이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정작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게 없다. 그저 거대한 전시관을 보고 나온 기분이다.
노컷뉴스에서 부탁한 리스트. 기준은 2008년 국내 개봉작. 대단할 것도 없고 지극히 사적인 리스트이니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 저러쿵, 은 사양하겠음. 일단 베스트 5편을 뽑고 생각해보니 한국영화가 한편도 없다는 것이 고민스러웠지만, 5편 모두 훌륭한 작품이니 후회되진 않는다. 워스트 5편은 뭐, 보시는 그대로. 더 졸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참 피곤한 일인 것 같다.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에 누락하기가 참 망설여지는 작품들이 있지만 어쨌든 정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종종 놓친 영화도 있고.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봤지만 정말 보고 싶던 어떤 영화는 못보기도 했고. 결국 사적인 애정이 뒷심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 중, <다크나이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의 짧은 단평을 남긴다. 여하간 그렇다. 2008년도 가고 있다.
참고로 노컷뉴스의 편집판은 보지 못했다. 리스트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수렴돼 조절된 것으로 보이고, 글은 내부적으로 편집된 것으로 알고 있음. 고로 이건 최초로 작성한 원문과 리스트임.
Best
1. 다크나이트 Dark Knight
2.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an
4. 바시르와 왈츠를 Walts With Bashir
5. 월-E Wall-E
Worst
1.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
2. 날라리 종부전
3. 쉿! 그녀에겐 비밀이에요.
4.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
5.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
<다크나이트>
제목에서 ‘배트맨’이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기이하지만 영화를 본다면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이지만 이것은 굳이 배트맨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실질적으로 <다크 나이트>를 지배하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그는 배트맨에 의존해 악을 제압하는 고담시의 체제적 오류를 파고든다. 폭력을 제압하는 폭력의 딜레마를 조롱하더니 이내 쥐고 흔든다. 배트맨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퍼즐을 만들어 고담시를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조커가 만드는 혼돈의 기반은 법치의 무력 앞에서 배트맨이 취한 정당한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조커를 통해 배트맨이라는 안티히어로의 정체성을 흔든다. 초현실적인 비범함을 무장했던 영웅의 슈트 안에서 웅크린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세상 곳곳으로 확대된다.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시선이 촘촘하고 광활하다. 블록버스터의 양식으로 완성한 섬세한 드라마의 디테일이 보는 이를 내외적으로 압도한다. 걸작의 너비와 깊이, 그 모든 것이 완전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뷔작으로부터 24년, 코엔 형제는 비로소 오스카의 호명을 받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는 평단과 관객의 극찬 속에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극악한 살인마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냉철하고도 흉악한 살인마를 연기했다. 무미건조한 정적 속에서 뚜벅뚜벅 다가오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을 발휘한다. 어떤 배경음 하나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정적 그 자체를 배경으로 미세한 소리 하나에도 반응을 부른다.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모스(조쉬 브롤린)가 처음으로 대면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질식할 정도로 대단하다. 노인 복지에 대한 냉철한 진단처럼 보이는 제목은 그 극악한 상황을 뒤늦게 대면하는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의 참혹함과 맞닿아있다. 선의보단 악의가 지배하는 살풍경에서 오랜 경험과 지혜는 결국 제압당하기 좋은 노쇠함에 불과해진다. 괴력을 지닌 스릴러적 내공 앞에 감탄을 보내다가도 그 끔찍한 시선에 담긴 내면의 진심 앞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
완결된 원작 만화를 2편으로 나눈 영화로 재생산한 <데스노트>시리즈의 야심은 스핀오프로 이어졌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이하, <데스노트 L>)이란 제목처럼 스핀오프는 L(마츠야마 켄이치)을 위한 영화다. 존재 자체로 궁금증을 자극하는 캐릭터는 이야깃거리가 되기 좋은 상대임에 틀림없다. <데스노트 L>은 그 지점을 파악하고 달려든 기획이다. 문제는 캐릭터를 앞세운 영화가 본래 캐릭터의 매력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캐릭터의 고유한 특성마저 파괴한다. 밀폐된 환경 안에서 뛰어난 두뇌로 사건을 컨트롤하던 L을 활동성 인간으로 묘사한다. 영화를 통해 캐릭터의 이면을 발견하겠다는 야심은 그럴 듯 하지만 본래 매력과 관계없이 캐릭터를 창작해버렸다. 게다가 제도와 윤리에 대한 물음 자체는 실종됐다. 다소 유치한 활극 안에서 L을 평범한 히어로로 만들어버렸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소모시키며 증명한 건 몰지각한 기획 남발의 끝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뿐이다.
26마리의 개가 사납게 내달린다. 사나운 개떼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는다. 청자는 감독 자신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과거 이스라엘 군인으로서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던 아리 폴만 감독의 자전적 성찰이다. 동시에 그 잔인한 기억에서 상실로 도피한 자의 뒤늦은 참회이자 치유다. 영화는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의 현재 고백을 통해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기억을 복원해나간다.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취하는 건 <바시르와 왈츠를>이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티가 어떤 이들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착시와 연동된 까닭이다. 비극을 목도한 이들의 심리적 공황과 정신적 상흔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환상과 실존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총격전이 펼쳐지는 도심의 도로 한가운데서 스텝을 밟으며 기관총을 사격하는 병사의 모습 위로 왈츠가 흐른다. 우아한 이미지 사이로 비통한 정서가 유유히 새어 나온다.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의 결과가 담긴 실제적 풍경이 등장하는 말미에 도달하면 그 모든 이미지의 정보가 얼마나 끔찍한 현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환기된다. 승자도 패자도 소용없다. 살아남은 자는 지울 수 없는 업보의 여생을 떠안게 될 뿐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 거대한 비극에 압사당한 인간 그 자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렛 미 인>은 기본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스 영화다. 소년과 소녀의 만남은 플라토닉한 로맨스의 숭고한 미를 체감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벼운 장치 하나로 평면성이 극복된다. 천진난만한 로맨스의 배후엔 질겁할만한 공포가 창백하게 잠복해있다. 투명함과 창백함을 지닌 중의적 풍경의 스웨덴 설원은 평화와 공포를 함께 담아내기 좋은 공간이다. 한적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사라지면 눈 밭에 피가 맺힌다. <렛 미 인>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주문이다. 따돌림 당하는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는 외로움의 반려자로 서로에게 기댄다. 무심한 세계 속을 외롭게 전전하던 소년은 소녀와의 기이한 로맨스를 통해 비로소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경악할만한 악의를 환상적인 순수로 구원하는 비범한 재능을 가미한 러브스토리다. 황홀하여 잊혀지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