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지구의 멸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2012>는 바티칸 궁전을 붕괴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을 무너뜨리는 등,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재난적 이미지를 전시해내며 묵시록적 기운을 과시한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비극으로 점철될 만한 재앙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오락적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2>는 분명 대단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눈 앞에 생생하게 전시되는 파괴적인 장관이 즐비한 <2012>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지배할만한 거대한 시퀀스를 품고 있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재난의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한 교각이나 다름없다. 예감하지 못했던 재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비행하며 헤엄친다. 물론 그 이전에 재앙을 미리 점지하는 과학자들과 이를 보고받는 세계적인 권력가들의 침통한 표정을 통해 묵시록적인 엄숙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차피 <2012>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 무비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2012>에서 이미지 이외의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들의 역할이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엄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12>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너비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 닿는 충격적 강도가 기이할 정도로 얕은 영화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2012>는 규모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볼거리에 불과한 탓이다.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도 되레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의 아찔함처럼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이 때때로 재앙에 놓인 이들의 사실적 비극을 간과하게 만든다. 재앙 앞에서 생존적 본능을 곤두세우기보단 비범한 휴머니즘을 역설한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허세적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허술한 탓이다. 디테일한 CG를 통해 실물감이 대단한 재앙적 이미지와 달리 재앙을 목전에 두고 대의를 주창하는 인물들의 뻣뻣함이 스펙터클마저 느슨하게 만든다. 서스펜스적인 연출 감각도 부재하다. <2012>의 재난적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상황이 야기할만한 긴장감이 좀처럼 객석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스크린 안에서 증발된다. 단지 전인류적 위기와 다수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침통한 감상이 영화와 무관하게 개인의 심상을 지배하고 말 뿐이다.
<투모로우>를 통해 전지구적 재앙을 그렸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보다 파괴적인 인류적 미래를 그려낸다. <2012>는 어쩌면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위력을 대변하는 과시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 동안 할리우드가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전시하는 욕망의 분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2>는 말 그대로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영화다. 이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안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을 조합해놓은 편집영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두뇌가 작은 공룡들처럼 창의력도, 상상력도 부족하다. 물론 재난의 종합전시관이란 측면에서 볼거리는 분명하다. 결론은 (어떤 식이든 <2012>를 보고야 말 관객에게) 스크린이 큰 상영관이 진리다.
땅이 꺼진다. 화산이 폭발한다. 쓰나미가 밀려온다. 지구 전체가 요동을 친다. 사람이 발붙일 곳은 없다. <2012>는 해볼 만큼 해보다 못해 끝장을 보는 재앙 블록버스터다. 아마 지구에서 재앙이라고 할만한 이미지들은 죄다 나올 거다. 그것도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시원하고 화끈하게 파괴적 장관들을 그려낸다. 마치 큰 스크린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 훈수 두는 것마냥 그렇다. <2012>가 그려내는 무지막지한 이미지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볼거리다. 그럼에도 그것이 심심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2012>가 규모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는 상대적 초라함 덕분이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거대한 이미지를 이어나가기 위한 교각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교각이 부실해 다음 이미지로 건너가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다. 재앙의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생존적 리얼리티보다도 휴머니즘을 구현하겠다는 연기적 일념으로 충만하듯 인위적 상황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그 파괴적인 장관들은 볼거리 이상의 긴장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 뿐,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 서스펜스에 대한 연출적 감각이 부재하다. 물론 인류의 멸망적 위기를 관람한다는 건 묘하게 침통한 감상을 부른다. 그건 <2012>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를 묘사하는 이미지의 우월함 덕분이다. 말 그대로 <2012>는 CG팀의 공헌도가 팔 할인 영화다. 딱히 롤랜드 에머리히를 칭찬할 구석은 많지 않다. 마치 부모 잘 만난 자식의 사치를 보는 것 같다. 돈 있는 할리우드나 되니까 이 정도로 무모한 짓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만큼 그 막대한 자본을 좀 더 현명한 곳에 쓸 수 없었을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딱히 2시간 40여분에 육박해야 할 만큼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스토리는 명백한 필름 낭비다. 다 떠나서 (어차피 볼 당신이)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는 건 진리다.
전기인간(?)의 테러로 비디오 대여점 테이프의 내용물이 모두 지워진다. 빈 깡통처럼 비디오만 남고 영화만 사라졌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게는 엉망이 되고 종업원은 걱정이 태산이다. 정작 사고의 주범인 친구는 넉살 좋게 말한다. 우리가 다시 채우면 되지. 비디오 대여점이 영화 제작소로 탈바꿈한다. 그들만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제작되고 대여되며 비로소 시작된다. ‘친절하게 되감아 달라’는 비디오 대여점의 작은 소망과 무관하게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명작들을 되감아버린다. 간과할 수 없는 영화 속 명장면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재해석되고 단편적이지만 유쾌하게 나열된다. 때때로 두서 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덜컹거리지만 그 끝에 건질만한 감동이 우러난다. B급 마인드로 무장한 유희를 빌미로 전설적인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을 복원하기까지, 그 두서 없는 짝퉁 사연의 말미에 감동의 체온이 느껴진다. 문화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찾은 대중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중들이 객석의 소비자로 밀려나버린 시대에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창작의 공유를 통한 유희적 인간의 복원을 감동적으로 설득한다. 잘 만든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분명 좋은 영화라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그렇다.
신호등의 붉은 정지 신호에 멈춰있던 차들이 신호가 바뀌자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그 가운데 분위기 파악을 못한 듯 차 한대가 길을 막고 서서 뒤차들의 성화를 얻고 있다. 이상한 낌새에 웅성거리던 사람 몇몇이 도로를 가로질러 멈춰선 차 옆으로 다가선다. 운전석에 앉은 일본인 남자(이세야 유스케)에게 다가간 행인들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남자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시작임을. 상황은 그렇게 사소하고도 갑작스럽게 이뤄진다.
영화는 희뿌옇게 표백된 듯한, ‘우유의 물결’이라 표현되기도 하는 눈먼 자들의 시점을 종종 스크린에 투영하며 극중 인물들의 비극을 실감케 한다. 성별, 나이, 직업 따위와 무관하게 그 도시-어쩌면 온 세상-의 인간들은 눈이 먼다. 보지 못하는 이들의 세계 속에 볼 수 있는 한 사람이 고립됐다. 정부는 눈먼 자들을 병동수용소로 격리시키는 정책을 발효한다. 눈먼 남편(마크 러팔로)을 따라 수용소로 들어온 여자는 성녀처럼 눈먼 이들을 돌본다. 홀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자(줄리안 무어)만이 그 도시의 변화를 지켜본다. 시력을 상실한 인간들로 채워진 수용소는 이전 세계와 구분되는 새로운 세계다. 과거 그들이 지녔던 사회적 지위나 능력에 따른 개개인의 품위는 소멸되고 그들은 서로 육체만이 유일한 눈먼 인간으로 만난다. 결국 알력이 발생한다. 뒤늦게 타병동에 입소한 남자는 자신이 소유한 권총으로 폭력적인 협박을 서슴지 않으며 수용소를 장악한다. 수용소로 유입되는 식품을 독점하여 수용소를 통제한다. 민주주의적인 다수결로 유지되던 협약은 군주제적인 폭압에 짓눌린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위협 속에서 사람들은 무력해진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원제: ‘Blindness’)는 제목처럼 어느 도시의 눈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처럼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도 이름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도, 사람도, 심지어 해당연도에 대한 일말의 정보조차 없다. 그 도시의 서사는 불분명하고 일방적인 은유의 영역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도시는 모든 사회가 품은 정치적 오류를 메타포로 끌어안는다. 과학적인 증명이 동원되지 않는 그 상황 자체가 거대한 사회적 실험극을 연상시킨다. 이는 인간 개인의 본성에서부터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관통한다. 시력을 상실한 도시의 인간들이 문명의 중심에서 야만의 행위를 거듭하는 광경은 충격을 동반하는 상식이다. 이성적인 제도와 규약으로 지탱되던 커뮤니티의 질서가 통제의 기능성을 상실했을 때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원작 소설을 읽은 이에게 <눈먼자들의 도시>는 이미지로 구현된 텍스트를 지켜보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는 소설의 문맥을 충실히 받들고 있다. 텍스트로 이뤄진 맥락들이 다양한 해석적 기반을 두르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가능성을 단순히 이미지로 나열하는 성과로 축약해버린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전지적 시점을 유지한다. 생경하게 도시를 바라보며 시작되는 초반부부터 내러티브를 동원해 귀결되는 말미까지 전지적 시점을 고스란히 밀고 나간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묘사하는 텍스트는 불확실성을 통해 상황의 끔찍함을 증폭시키지만 영화는 선명한 이미지로 상황의 추이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재난영화적 이미지는 정치적 메타포를 휘발시키고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까지 희석시킨다. 해석의 여지는 줄어든 만큼 관람의 욕구로 채울 수 없는 빈틈이 노출된다. 그 와중에 일본인 부부 캐릭터까지 배치하며 원작에 비해 지나친 사실성을 가미한다.
물론 <눈먼자들의 도시>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도시의 인간들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눈이 멀어버린다는 묵시록적인 설정이 그 상황 자체를 묘사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다만 그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들에 비해 영화의 성취는 미약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원제 ‘Seeing’)가 실명 상태에서 벗어난 도시인들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의 본질은 더욱 확고해진다. 반면 <눈먼자들의 도시>는 그저 거대한 해프닝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좀비 같은 인간들이 가득한 유령 같은 도시만이 이색적으로 펼쳐질 뿐, 백색테러의 은유를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선명한 이미지는 희미한 텍스트보다 많은 것을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