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인형이다. 다만 순수한 동심을 배려하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 아니다. 그녀는 성인 남성을 위해 마련된 인형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자면 성인 남성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성인 용품이다. 흔히 말하는 섹스돌(sex doll)에 가까운 공기인형(air doll)이다. 물론 인형에게 운명이나 인생이란 단어는 마땅치 않다. 그렇기에 인형의 용도를 가혹하다 설명하는 것도 마뜩찮은 일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공기인형>에서의 인형만큼은 운명이나 인생이란 단어를 동원해야 한다. <공기인형>은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 인형에 관한 영화이므로. 이는 <공기인형>이 묘사하는 세계의 정서 안에서 분명 역설적인 감상을 부를 만한 것이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마음이란 것 자체를 담아낼 수 없는 텅 빈 그릇이 된 인간들의 세계에서, 되레 마음을 얻게 되버린 인형의 운명이라니, 분명 역설적이다.
노조미(배두나)는 웨이터로 일하는 독신남 히데오(이타오 이츠지)가 소유한 인형이다. 그는 인형을 마치 자신의 애인처럼 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자신의 성욕을 해결한다. 인형은 결국 마음을 빙자한 인간의 소유물로서 행위의 대상에 불과하다. 대상화된 물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인이 집을 비우면 인형은 살아난다. 주인이 매만진대로 죽은 듯이 누워있던 인형이 일어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말을 배우고, 행동을 익힌다. 구체 관절로 인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눈에 띄게 움직이지만 인형은 점차 사고하며 세상을 관찰한다. 그리고 마음을 얻는다. 그 마음이란 우리가 익히 말해온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랑이 인형을 욕망하게 만든다. 우연히 들른 비디오샵에서 만난 직원 준이치(아라타)를 보고 감정을 얻게 된다.
고레이다 히로카즈는 언제나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표정을 지닌 풍경을 전시한다. 하지만 그 풍경의 수심 밑바닥에는 고도의 갈등과 소통의 불화가 켜켜이 쌓여 암초처럼 머리를 내민 부조리들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종종 평온한 현실의 풍경 위로 머리를 내민 부조리들은 어느 개인의 삶을 좌초시키거나 소통을 막아서고 서로 선회하게 만든다. 밀도는 변하지 않지만 온도가 변한다. 그 안온한 풍경 뒤로 내면의 갈등이 첨예하게 도드라진다. 대표작이라 할만한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근작인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틈새로 새어나오는 이상 체온의 발화점을 색출해낸다.
<공기인형>은 인형이라는 이방인의 관점을 빌려 인간들의 세계를 관찰해내고 진단하는 영화다. 도쿄라는 특정한 지정학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으며 그 환경이 연출하는 갖가지 특이점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굳이 <공기인형>이 묘사해내는 모든 병리학적인 풍경들을 굳이 도쿄라는 지정학에 매몰시킬 필요는 없다. 로케이션의 풍경은 이질적이되,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양태는 현대 도시라는 보편적 정서 속에서 일반적인 것이다. 노조미가 관찰하고 접촉하는 도쿄의 사람들에게 내재된 상실감이나 공허함은 익히 보편적인 현대인들의 감정적 재해나 다름없다. <공기인형>은 인형이라는 이방인의 눈은 익숙한 풍경들을 낯설게 재현하는 프리즘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공기인형>에서 인형이란 세상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눈이자 그 세상을 채운 다수의 사람들의 곁에 선 대조군의 역할로서 유효하다.
부자연스러운 인형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서 감상의 특이점을 확보해낸다. 시간의 흐름과 경험의 축적 속에서 변화하는 인형의 움직임과 일상적 태도를 관찰하는 건 그 자체로서 흥미롭다. 하지만 <공기인형>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진풍경은 진부한 측면이 있다. 히끼꼬모리를 비롯해, 변태적인 성욕자, 노쇠한 늙은이, 외모에 예민한 여인 등, <공기인형>에서 인형이 마주치고 상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란 하나같이 상징적인 나열의 의미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은 익히 진부하다. 익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품고 있지만 그 특수한 개별적 이미지들의 합산으로 완성된 결과값은 그만큼의 의도에 부합될만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스펙트럼의 너비보다도 프리즘의 형태가 흥미롭다는 건 <공기인형>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하지만 <공기인형>은 단지 그 세계를 중계하는,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활보해 나가는 공기인형의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형의 관점을 통해 현대인간들의 공허를 관통해 나가는 <공기인형>의 표면적 의도는 해석의 수순으로 넘어갈 필요 없이 관찰의 수순에서 해결될 만큼 영화의 표면을 떠다니는 공기의 입자와 같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의도의 깊이를 압도하는 형태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영화에서 그 형태의 완성을 가늠하는 건 <공기인형>에서 중요한 대목이나 다름없다. 공기로 채워진 노조미의 반투명한 비닐 재질의 몸이 빛을 반투명하게 관통하고 이를 노조미가 관찰할 때,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영화는 비범해진다.
무엇보다도 공기를 채우며 일상을 거닐던 인형이 자신의 몸을 타인의 숨으로 채운 뒤, 그 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 <공기인형>이 나열한 군상의 표정을 동원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미는 명확해진다. 타인의 숨결을 통해 생동하는 삶이란 이처럼 아름답고 애처롭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아름답고 애처로운 삶으로부터 도피할 때, 인형이 그 삶을 선택함으로서 지금의 세계와 그 안의 사람들이 마주한 공허의 너비가 실체를 드러낸다. <공기인형>은 단순히 멜로영화라는 장르적 평가 안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자적인 성취를 이룬 영화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면서도 그 비극적 종결을 예감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상식 안에서 마음을 쏟아내고 이를 통해 비극을 체감하는 인형은 그 담담한 표정을 통해 되레 그 현상적 파국의 너비가 품은 감정적 여운의 가능성을 마음껏 확장한다.
무엇보다도 <공기인형>은 배두나가 연기한 공기인형의 육체만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배두나는 <공기인형>의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영화를 이룬다고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배두나의 연기 자체의 탁월함은 물론이고, 인형이라는 이방인으로서 존재하는 대상이 배두나라는 비일본인의 신분으로서 연기된다는 점만으로도 그것을 관찰하는 이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른다. 평온한 표정으로 체온을 연출하지만 냉정한 낯빛으로 세계의 환부를 적출하는 고레이다 히로카즈가 <공기인형>에서 배두나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공기인형>은 이미 탁월한 가능성을 품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두나는 단순히 육체의 움직임만으로도 공허한 세상을 채우는 인형의 꿈을 생동감 있는 현실로 승화시킨다.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움직임이 구사되지 않는, 타격감이 없는 성룡영화라니 생소하다. 액션 장면은 있다. 하지만 그 액션 장면에서 성룡은 우리가 아는 성룡이 아니다. 그냥 마구 휘두르고 얻어 맞기도 한다. 액션 활극이 아닌 사실적인 느와르 안에서 성룡의 위트는 전혀 구사되지 않는다. 그 진지함만큼이나 진중함도 대단하다. <신주쿠 사건>은 살벌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도쿄의 비정한 정서를 온전히 체감하는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의 도쿄 생존기다.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한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넘치던 90년대 도쿄 신주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희망과 절망을 가로지르는 불법이민자들의 저항과 애환을 핏빛으로 투영한다. 성룡과 판빙빙을 비롯한 중화권 배우들과 타케나카 나오토를 비롯한 일어권 배우들은 제 역량을 다함과 동시에 그 조화가 자연스럽다. 사실적인 신체훼손 장면이 연출되는 등 폭력의 수위가 높지만 그 무거운 정서가 캐릭터의 공포와 분노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무엇보다도 활극적 액션을 연출하지 않고 온전히 표정만으로 승부하는 성룡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연륜과 관록이 넘치는 성룡의 표정은 비정한 느와르의 내면을 탁월하게 대변하는 창이나 다름없다.
군중의 목소리와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아래, 인공적으로 반짝이는 스팽글(spangle) 도시가 펼쳐진다. <도쿄!>의 오프닝은 미쉘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까지, 됴쿄를 바라보는 세 이방인들의 시선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선을 집약한다. 반짝거리는 빌딩 숲 사이를 가득 메운 갖가지 소음들로 들어찬 도시의 풍경 속에 숨어들어간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형체. 발들일 틈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론 기이하게 텅 빈 풍경. 인공 도시 안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단상들이 어렴풋이 어른거린다. 가늠할 수 없는 세 감독의 옴니버스 <도쿄!>는 이처럼 뚜렷한 형체가 짐작되지 않는 거대한 실체를 구상한다.
포문을 여는 것은 미쉘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다. 히로코(후지다니 아야코)는 자신의 애인인 아키라(카세 료)와 도쿄로 상경해 친구의 거처인 작은 쪽방에서 머무른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묻는 어느 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깊은 우울에 빠져들던 그녀는 어떤 변신을 맞이한다. 공산품처럼 비슷한 크기의 방이나 줄지어 선 자동차보다도 가치가 앙상하다고 느끼는 히로코의 변신은 물질가치의 경도 속에서 스스로 퇴락을 경험하는 현대 도시인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 그 불행은 유령처럼 인식되는 자신의 가치를 사물에 빗대어 몰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가볍진 않지만 묵직하지도 않다. 수긍할만한 의도는 존재하지만 큰 감흥을 부르기엔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사물과 공간에 감성을 부여하는 미쉘 공드리 특유의 미술적 감각만큼은 탁월하게 구현된다.
1999년 작, <폴라 X>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레오 까락스의 <광인>은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도쿄 도심의 하수구에서 출현하곤 하는 정체불명의 광인(드니 라방)은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라지곤 한다. 광인은 도쿄의 하수구를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그 밑바닥엔 대동아 전쟁 시대의 잔재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대일본의 기저에 잠재된 군국주의적 욕망을 도시의 상하구조로 형상화하여 고발하는 제스처 같기도 하다. 역으로 그것은 어떤 상흔에서 비롯된 공포와도 연동된다. 정체불명의 광인이 벌이는 폭력적 행위가 부르는 도심의 혼란은 패전국의 역사를 물려받은 일본인의 심리적 반작용을 자극한다. 마치 광인의 재판장은 전범재판소를 연상시키며 그곳에서 광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서슴없이 표한다. 광인은 일종의 망령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혹은 짐처럼 짊어진 일본인의 이중적 심리가 유령 같은 형체로 도사린다. 드니 라방의 거칠고 사나운 연극적 연기는 이런 심리적 형상을 끌어내는 일종의 촉매와 같다. 노골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결말부는 둔탁한 맥락을 지닌 이 작품의 모호한 가치를 대번에 끌어올린다. 동시에 그것은 다음 상대를 겨누기까지 한다.-메르드의 다음 모험은 뉴욕에서!-
말미에 등장하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와 팬시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9년 동안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 자신의 적막한 삶을 담담하게 인식하는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마주친 피자배달부(아오이 유우)를 통해 변화를 겪게 된다. 소품과 같은 상징성과 은유적 태도가 이미지로 구체화되긴 하지만 <흔들리는 도쿄>는 간결하면서도 단출한 테마가 짧은 시간에 잘 숙성된 작품이다. 현실도피적인 남자의 편집증적 삶에 어지럼증과 같은 흔들림이 찾아온다. 폐쇄적인 안정에 갇혀있던 히키코모리가 우연히 외부와 접촉하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설정은 실로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정체된 삶에 흔들림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정돈된 삶이 일사불란해진다. 도시의 유령은 비로소 삶의 윤곽을 확보한다. 히키코모리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진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에 접속한 봉준호 감독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능숙한 연출력으로 잘 포장된 작품이다.
연출자의 개성이 적극 반영된 개별적 결과물들은 형태적으로 불균질한 패키지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맥락은 도쿄라는 유령이다. <도쿄!>의 세 작품은 도쿄에서 얻은 모티브를 통해 도쿄라는 특수한 이미지를 완성하지만 그것은 도쿄의 실체가 아니다. 그 지점에서 <도쿄!>가 어느 정도 통찰력을 검증 받은 개인의 해석적 관점을 수집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만큼 그것은 보편적인 심리를 아우르는 대신 특별한 시야를 확보한다. 누군가가 문득 느꼈을, 혹은 느낄만한 도시의 단상이 심중하거나 재기 발랄하게 구현된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바탕으로 한 기획은 그 도시에 대한 어떤 관심을 볼모로 한다. 그런 점에서 과연 현재 서울이란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