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뉘앙스가 오묘하다. ‘나의 친구’는 온당하지만 ‘그의 아내’는 불온하다. 시선이 느껴진다. 나의 친구를 넘어 그의 아내를 바라보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감지된다. 제목이 지정하는 ‘나’, 예준(장현성)은 ‘친구’이자 ‘그’인 재문(박희순)을 거쳐 ‘그의 아내’ 지숙(홍소희)을 바라본다. 제목만으로도 묘한 뉘앙스가 풍긴다. 묘한 삼각관계가 구상된다.
예준은 재문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다. 유능한 외환딜러인 예준은 미국 이민 생활을 꿈꾸는 재문과 지숙 부부를 위해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 뒤로 찾아온 불미스런 위기에서 재량을 발휘해 친구와 가족을 구원한다. 재문은 예준의 우의에 고마워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지원을 피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종의 열등감을 품는다. 모종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기저에 놓인 우정은 진심이다. 하지만 수면 위의 상황이 수면 아래 진심을 은밀하게 억압한다. 견고한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남자의 우정은 실상 빈부의 자장 안에서 발생하는 우열의 기울기로 변질되어 서로를 바라본다.
불미스러운 결정적 사건이 관계구도를 전복위기로 몰아넣는다. 우연이 겹쳐 거대한 비극적 필연을 완성하고 친구의 오랜 우정은 진동한다. 관계의 파국을 막아서는 건 재문의 희생이다. 재문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상황을 와해시킨다. 결국 구도적 안정이 깨지면서 잠재된 기저의 욕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잠재된 우열이 권력화된다. 예준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각오하는 재문의 심리를 순수한 우정의 발로라고 이해하기엔 석연찮다. 부채의식 이상의 어떤 위기감이 엄습한다. 예준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재문에게 있어서 예준은 자신과 지숙을 구원해줄 수 있는 동아줄과 같은 존재다. 재문의 희생은 친구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자괴적 수긍과도 같다. 이는 단순히 극영화로서의 전개 속성에 따른 사건의 발단에 불과하다 여겨도 상관없겠지만 이 영화의 태도가 정치적 해석의 의도를 부추긴다.
아내 지숙(홍소희)의 뱃속에 있는 아들 이름에 대해 고민하는 재문에게 예준은 말한다. 남자면 민혁, 여자면 예니. 예준은 민혁은 민중혁명의 약자이며 예니는 칼 마르크스의 아내를 의미한다고 첨언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위트는 정확히 이 정도다. 정치적인 조롱에 가깝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핵심은 아니다. 강변이라기 보단 유희에 가깝다. 어떤 의지를 표하기 위한 웅변이라기 보단 허구적 기호 속에서 드러나는 현실적 상황을 관찰하며 아이러니한 태도로 현실을 유희로 전락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때때로 파격적인 설정이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리듬감 있는 스토리텔링이 큰 무리없게 이어진다. 극영화로서의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그 유희적 태도 안에 잠재된 본연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나의 친구' 재문과 '그의 아내' 지숙을 경제적으로 원조하던 예준은 자신이 잉태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재문의 대리적 희생을 등에 업고 속죄의 기회를 놓친다. 결국 파국의 책임을 뒤집어 쓴 재문은 지숙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도리를 다하고 이를 지켜보는 예준은 도리어 본인의 잠재적 욕망의 상속 기회를 펼쳐나간다.
궁극적으로 파국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마다 발견되는 다양한 기호들이 해석의 여지를 발생시킨다. 영어에 무지한 소시민은 미국을 동경하고, 비좁은 골목마다 가득한 차는 자가주택이 없는 소시민이 이웃의 비하를 얻게 되는 계기로 발전한다. 궁극적으로 영화의 양상을 전복시키는 비극도 그 상황과 연동된다. 한국적이라 할만한 환경적 요소들이 비극을 잉태하는 점층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생생히 묘사된다. 자본에 강력하게 종속된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착취하는가라는 날 선 주제를 기발한 관점으로 리드미컬하게 풀어낸다. 이는 죄의식과 속죄양이라는 종교적 고찰과도 맞닿는다. 자신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놓친 자의 뒤늦은 파국은 양심을 향한 숭고한 의지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에 가깝다.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순수한 극영화적인 내러티브에 집중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 전개 자체가 흥미롭다. 문학적 비유를 동원한 문장처럼 장면과 상황은 유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실을 조명하는 식견이 탁월하다.
돋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도 공헌도가 높다. 특히 예준을 연기하는 장현성은 악의와 호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망설이는 예준의 이중적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2년 전 완성해 이제야 빛을 보는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환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서민들의 삶이 진행 중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기이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2년 전보다도 더 구려진 요즘 현실이 이 영화의 시사성을 더 부채질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이한 삼각 구도는 수많은 오류를 품고 멀쩡하게 유지되는 현실의 축약판이나 다름없다.
남현수의 ‘오후의 뮤직’을 진행하는 라디오 DJ 남현수(차태현)는 청취율 1위를 달리는 인기 DJ다. 한때 가수로서 흥망을 맛보기도 했지만 라디오를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좋은 집만큼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명예도 얻었고 바람기를 발휘할(?) 기회도 얻었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청취자들과의 전화연결을 통해 고민을 상담해주곤 한다. 물론 진심을 다하는 척할 뿐, 뒤에서는 대화내용으로 농담을 일삼는다. 사연을 소개할 때마다 청취율을 상승시키는 황정남(박보영)의 아빠 찾기 사연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날, 미모의 애인을 집에서 기다리던 남현수 앞에 황정남이 나타난다.
소재만을 살펴보자면 <과속스캔들>은 어떤 오해나 편견을 발생시키기 좋을 만한 여지가 가득하다. 오래 전 혼전 관계로 잉태된 2세가 찾아온다거나,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그리고 화합, 아동 캐릭터를 이용한 웃음과 감동 등등, 영화가 끌어 모은 소재들은 예상 범위가 인지되기 좋은 수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고 동시에 어떤 착취에 대한 오해를 형성시킬만한 여지도 농후하다. 영화 역시 그 예상범위를 특별히 벗어날만한 파격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속스캔들>은 충분히 즐길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족드라마로 완성됐다. 뻔한 듯한 게 아니라 뻔한데도 즐길만한 구석이 충분하다.
중학교 시절 옆집 누나와 맺었던 첫경험(!)이 22살 먹은 딸로 인해 되살아난다는 설정이나 그 딸이 역시나 6세 손자까지 달고 온 미혼모라는 설정은 겉보기만으로도 상당한 무리수다. 무리수를 헤쳐나가는 돌파력은 캐릭터에서 발생한다. 고정적인 이미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배우나 신선한 이미지를 어필하기 좋은 신인배우나 존재 자체가 귀여움으로 인식되는 아역배우나 각자의 장점을 적절하게 발휘하고 있다. 캐릭터의 앙상블은 헐겁거나 과하다 싶을 만한 허구적 설정과 맥락을 제자리에 안착시킨다. 그리고 드라마가 전개된다. 결과적으로 <과속스캔들>은 기막힌 사연에서 시작되는 가족드라마이자 어느 남자와 소녀의 성장드라마다.
전복적인 상황과 캐릭터를 앞세운 유머를 통해 재치를 발휘하며 시작되는 영화는 중반부에 이르러 통속적인 슬픔을 자아내고 이내 극복을 통한 대통합 감동모드로 돌입한다. 전반부의 위트가 오밀조밀한 재미를 부여하는 것에 비해 후반부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긴 하다. 그럼에도 캐릭터의 매력은 후반부까지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며 제 능력을 다한다. 지구력 약한 드라마를 순발력 있는 유머로 극복한다. 이는 <과속스캔들>의 오락적 성과를 인정하게 만들 정도의 자질이 있다. 특히 남현수의 6살 손자 황기동을 연기하는 아역 왕석현의 능수능란한 표정연기가 이에 대단한 공헌을 보인다.
한편, 외부적으로 큰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음에도 <미녀는 괴로워>가 연상된다. 시사성을 지닌 소재가 보편적인 감정을 야기시키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두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대의 속성이 캐릭터 스스로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무대에 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공통적으로 노래를 잘 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음악감상의 즐거움은 서브적인 묘미를 부여한다.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은 만화작가 강풀의 원작을 영화화한다는 것만으로 <순정만화>는 일단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바보>에 이어 영화화된 세 번째 작품이자 이전에 영화화됐던 작품들이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원작의 인기를 배반할만한 결과를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실질적으로 원작을 본 관객이라면 <순정만화>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적용할 수 밖에 없는 잣대는 분명 원작의 영향력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순정만화>는 위에서 열거한 이전의 두 작품에 비해 적절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할만한 수준이다. 원작을 변주함에 있어서 과욕이 지나쳤거나, (<아파트>) 원작의 스토리와 설정을 축약하기 급급했던(<바보>) 전작들과 달리 <순정만화>는 만화 본래의 설정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수순에서 영화적인 이미지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작이 지닌 최대의 장점인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순정만화>는 작정하고 써 내려간 듯한 비현실적인 연애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표백된 것처럼 선량하고, 그 인물들이 인연을 맺는 방식도 일상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가까운 예로 CF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가능할 것 같은 특별한 경우의 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순정만화>가 공감할만한 여지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정서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까닭이다.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커플 관계를 상정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일반적인 연애의 감정들을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넉살 좋게 그려내고 있다.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라기 보단 인물의 감정에서 발견되는 적절한 수긍에 가깝다.
원작이 지닌 장점을 영화적으로 잘 계승하고 있는 <순정만화>는 특별함보단 안정감이 장점인 작품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중심에 자리잡은 두 커플은 비현실적인 나이차를 지니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양상의 로맨스를 점해나간다. 하지만 특별한 갈등 상황에 직접적으로 돌진하기보단 적절한 유머와 캐릭터의 사연에 적절한 여백을 두며 차근차근 인물의 심리를 관찰하고 따라잡는데 주력한다. 풋풋하고 순수하게 서로를 알아가는 띠동갑 커플과 일방적인 연하남의 구애를 받는 연상녀의 마음 기울이기엔 현실적인 편견을 넘어설만한 극적 재미가 존재한다. 소심한 30대 남자와 낙천적인 10대 여자, 적극적인 20대 초반 남자와 소극적인 20대 후반 여자의 로맨스는 각자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상황에 몰입하기 좋은 설득력을 구사한다. 비록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인지하면서도 수긍하고 싶게 만드는 여력이 충분하다. <순정만화>란 제목처럼 그 판타지 로맨스의 한계까지도 적절한 수준으로 묘사된다.
영화화되는 건 비단 소설, 공연, 음악뿐만이 아니다. 작년에 개봉된 <히트맨>을 비롯해 너무도 유명한 <툼 레이더>나 <레지던트 이블>과 같은 사례처럼 오늘날 롤플레잉 게임(RPG)도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출처가 되고 있다. 특히 자극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이미지에 몰두하고 있는 오락영화의 경향 속에서 어떤 게임들은 충분한 매력을 구가할만하다. 동명의 게임을 모티브로 한 <맥스 페인>도 마찬가지다.
슈팅이 주가 되는 롤 플레잉 ‘맥스 페인’처럼 영화 <맥스 페인>은 총격이 난무하는 액션씬의 스케일을 전시한다. 권총과 리볼버, 샷건과 기관총까지 다양한 총이 등장하는 <맥스 페인>은 분명 여지없는 액션 영화(처럼 보이는 영화)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일단 캐릭터의 사연이다. <맥스 페인>은 액션 시퀀스를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리 호쾌한 액션 영화는 아니다. 되려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암울하고 침침하여 시종일관 무겁고 어둡다. 미해결 사건 부서(cold case unit)에 소속된 주인공 맥스 페인(마크 윌버그)의 타이틀을 제목으로 내건 영화는 미궁에 빠진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이 영화는 게임의 이미지를 그저 모티브로 소환했을 뿐, 게임과의 완전한 연관성을 염두에 둔 것 같진 않다. 다만 종종 액션 시퀀스에서 활용되는 블릿타임이나 슬로우 모션은 게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매트릭스>에서 선사한 충격 이후로 이제 그것이 탁월한 성과를 이루지 않곤 맥 빠질 거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암담한 건 단지 이 영화의 분위기가 아니다. 이 영화 자체가 실로 암담하다. 슈팅에 기반을 둔 롤플레잉 게임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만큼 액션 시퀀스에서 낭비되는 탄환 수는 상당하지만 그것이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건 허세가 지나친 탓이다. 지나치게 낭비되는 스타일 앞에서 반응 속도가 느슨해진다.
의외지만 <맥스 페인>이 주력하는 건 이미지가 아닌 스토리다. 단지 게임은 모티브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포스트 9.11의 그림자도 노골적으로 아른거린다. 뉴욕의 톤 다운(tone down)된 색채도 세기말적이다. 묵은 냄새가 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맥스 페인>은 기존에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어서 너덜너덜해진 것들을 콜라주 하듯 스크린에 갖다 붙인다. 그 와중에 뉴욕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들고 싶어하고 그 세계의 음모론을 파괴하는 고독한 안티히어로의 그림자를 그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맥스 페인이 바라보는 환각의 도시에서 활공하던 발키리의 무의미한 이미지처럼 <맥스 페인>은 허무맹랑하다. 액션은 기이한 슬로 모션의 강박에서 허우적거리고, 진지하게 흐르는 스토리는 지쳐 쓰러진다. 한가지 확실하게 증명되는 건 포스트 9.11의 영향력이 이 단순 명확한 게임마저도 지독한 허세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결코 좋은 영향력이 아니란 점에서 실로 유감이다.
신윤복은 기록이 묘연한 실체다. 그림은 전해지나 그에 대한 삶은 알 길이 없다. 고증이 불가능한 신윤복의 실체는 상상을 전전할 수 밖에 없다. 신윤복에 대한 관심은 그의 풍속화가 조선후기 양반들의 에로티시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신윤복의 화폭에 담긴 조선의 에로티시즘이 과연 남성적인 관점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TV시리즈 <바람의 화원>과 동명원작소설은 그 의문에 상상력을 동원한 바다. 불분명한 역사적 실체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이됐다.
팩션(faction)은 테두리가 모호한 밑그림에 색감을 넣은 결과물이다. <바람의 화원>과 마찬가지로 신윤복에 여성성을 대입한 <미인도>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허구적 결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지만 이는 ‘만약’이라는 의심을 위한 반어적인 자기 방어에 가깝다. 여성으로 치환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둔다는 점에서 <미인도>는 <바람의 화원>과 비교군이나 대조군의 영역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인물에 접근하는 양식이 비슷하다 해도 두 작품은 엄밀히 다른 태도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여성성을 조명하는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만큼 두 작품의 연관성이 연동된다는 걸 애써 배제하긴 힘든 노릇이다.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윤복이 ‘단오풍정’을 그리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만으로도 여실하다. 도화서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머릿속으로 구상한 광경을 화폭으로 구현하는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과 실제로 눈 앞에서 마주한 현실을 화폭으로 옮겨 담아내는 <미인도>의 신윤복(김민선)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 그려내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열려 있던 인물이 그려내는 눈을 대변한다면 <미인도>의 신윤복이 그리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닫혀있던 인물이 만난 세상의 창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만큼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을 갇혀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바람의 화원>보다 <미인도>가 두른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는 물론 단점이 아니다. <미인도>가 <바람의 화원>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만큼 인물을 해석할만한 여지를 더욱 넓힌 바가 분명 존재한다. 허구의 텍스트가 어떤 상상을 걸치는가에 대한 호불호는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소재의 특이성을 소비하는 내러티브가 실질적으로 평이하다. <미인도>는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된 인물의 평범한 내면을 드러내겠다는 <황진이>와 비슷한 야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만큼이나 <미인도>의 성과도 미약하다.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조명하는 직설적인 표현양식들은 나름대로 파격적인 면모가 있지만 신윤복을 제물로 삼아 시대를 조명한 양상이다. 결국 신윤복이라는 컨텐츠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을 고려하자면 수지 맞은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강무(김남길)와 신윤복의 로맨스로 돌입하는 순간, <미인도>는 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제지간인 김홍도(김영호)와의 치정 관계 또한 불미스럽고 불필요하게 가지를 친다.
<미인도>는 신윤복을 전시할 뿐, 신윤복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 신윤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굳이 왜 신윤복인가, 라는 의문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수화 같은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도 조선의 은밀한 에로티시즘 욕망보다도, <미인도>에 얹혀질 만한 기대감은 신윤복이란 캐릭터에 대한 관점이다.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신윤복에게 보고 싶었던 건 단지 저고리를 풀어헤친 속살의 섹슈얼리티만은 아니었을 터. 결국 <미인도>는 무책임한 욕망을 덧씌운 무심한 자화상에 불과하다. 그 안에 신윤복은 없다. 그저 편애하기 쉬운 이야기와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즐비할 따름이다. 그나마 설화를 연기한 추자현이 종종 눈에 띤다. 소재의 비범함은 지나치게 평범한 관점을 거듭 확인시킬 따름이다.
칼을 빼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그곳엔 대상이 없다. 소년은 강해지고 싶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공을 대상으로 협박해봐야 증명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년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소년의 칼은 소년의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다. 소년은 낮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윽박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온다. 창문을 가린 방이 특이하다. 어느 밤, 소년은 또 한번 나무를 상대로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시작한다. 인기척을 알 수 없게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난 소녀가 소년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
<렛 미 인>은, 궁극적으로 원제인 ‘Let the right one in’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소녀를 초대하는 주문이다. 이는 영화를 본다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의 감정적 의미다. 소녀가 소년에게 듣고픈, 혹은 소년이 소녀에게 전하고픈 진심의 언어다. 그것은 투명하게, 때론 창백하게 느껴지는 스크린의 중의적 질감과 무관하지 않다. 눈빛에 반사된 자연광처럼 투명한 광량을 보존하던 스크린은 때때로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처럼 질겁한 인상으로 돌변하곤 한다. <렛 미 인>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과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맥락의 평면성은 특별한 장치적 소재 하나로 입체적 양상을 띤다. 동심에서 비롯된 순수한 로맨스는 귀엽고 천진난만하지만 그 관계의 배후엔 경악할만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이란 이엘리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란 점에 있다. 다시 한번 이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는 낮에 죽어있고, 밤에 살아나는 존재, 즉 뱀파이어다.-스포일러라고 판단하지 말 것. 어차피 영화는 이런 정보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미 이 정도의 정보는 이 영화의 홍보상에서 배포되는 실정이다.- 그녀의 존재는 <렛 미 인>에서 역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호러 장르의 제스처를 안고 간다는 점을 암시하게 만드는데 그에 따라 영화상에서도 잔혹한 방식의 호러적 장면들이 연출되거나 등장하곤 한다. 또한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소년과 소녀의 러브스토리의 지속적 한계를 예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양면성을 획득한다. 별개의 지점에 놓인 두 감정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소통시킨다.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스웨덴의 평화롭고 적막한 풍광이다. 다소 이색적이긴 하나 끔찍한 상황에서는 항상 기이하게도 유머가 발생한다. 풍경에서 발생하는 역설적 태도가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태도와 함께 기이한 슬랩스틱을 발생시킨다. 자연이 잘 보존된 그곳의 평화로운 풍경은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편으로 그 적막함이 모종의 살인을 기획하기 좋은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장소에 대한 모순이 공포와 유희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투명한 채광이 창백하게 돌변할 때 정서적인 긴장감만큼이나 어떤 적막한 고립감이 동시에 발생한다. 그 적막한 풍경 속에 홀로 선 오스칼의 모습도 외롭기 짝이 없다. 심지어 친구들이 소변기에 버린 바지를 봉지에 주워담고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엔 한겨울의 한기만큼이나 외로움이 담담하게 서린다. 오스칼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소년이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동병상련의 상대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은신처다. 처지가 비슷한 건 이엘리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갈망한다.
오스칼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년에게 세상은 무심하고 창백한 곳이다. 이엘리와 오스칼은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은총이다.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자 절대적인 신뢰가 가능한 상대다. 그 은밀한 연대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감정을 투명하게 보존한다. <렛 미 인>은 초자연적인 소재를 통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를 황홀하게 완성한다. 간혹 무덤덤하게 접근하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지만 <렛 미 인>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애틋한 멜로다. 괴로움이 직면한 낮에 창백하기만 하던 소년은 소녀가 살아나는 밤을 기다리며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년을 한 뼘 성장시키고 소녀를 살아가게 만든다. 소년의 밤은 누군가의 낮보다 아름답다. 그 밤엔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가 있으므로, 소년은 빛난다. 무엇보다도 <렛 미 인>은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선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판타스틱한 러브스토리는 실로 경악할만한 로맨스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007 카지노 로얄>은 새로운 징조였다. 젠틀한 매너로 본드걸의 마음을 사로잡는 훈남 스파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22번째 ‘007’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이하, <007 퀀텀>)는 전작의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받은 새로운 작전명이다. 전작의 아크로바틱한 오프닝만큼이나 육중한 카체이싱으로 포문을 여는 <007 퀀텀>은 근육질로 대변되는 터프한 마초적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았음을 무심하듯 시크하게 증명한다.
<007 퀀텀>은 정체불명 글로벌 조직의 배후를 추적하고 그들의 음모를 소탕하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의 활약을 그린다. 동시에 전작 <007 카지노 로얄>의 결말부에서 목숨을 잃은 연인 베스퍼(에바 그린)의 복수를 노리는 제임스 본드의 사적 심리를 끌어내기도 한다. 제임스 본드의 호화로운 스타일은 유지되지만 그는 더 이상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지나간 연인에 대한 깊은 향수가 제임스 본드를 지배한다. 말없이 묵묵한 인상에서 단호한 의지가 보인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정형화된 대중성은 그렇게 변주된다.
‘007’이란 프랜차이즈는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007 카지노 로얄>은 냉전이라는 패러다임으로 고착화된 브랜드를 갱생시키기 위한 일종의 시도였다. 선악의 개념으로 대비되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경계가 이데올로기의 몰락과 함께 죽은 언어로 퇴색하고 제3세계의 약진으로 재편된 세계 질서 속에서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질 것 같았던 시리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옷을 갈아입는데 성공했다. <007 퀀텀>은 시도를 통해 고무된 새로운 선언과도 같다. 제임스 본드는 이익에 따라 손을 잡거나 등을 돌리는 전세계적 질서 사이에서 더욱 돈독해지고 치밀해지는 음모의 배후를 추적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첩보원의 존재는 시대착오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정보의 소유가 거대한 이익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아날로그적 접근은 더욱 절실해진다. 제임스 본드의 육체가 더욱 부각되는 건 그만큼 더욱 복잡하게 움직이는 정보의 뒤를 쫓아야 하는 현대 첩보전의 고단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첨단기기를 총동원해 세계를 감시하는 디지털 첩보전의 공백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제임스 본드는 당연히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적격이다. 그의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세대를 영접하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의 적자나 다름없다.
육해공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다채로운 액션씬은 <007 퀀텀>을 스파이물보다 액션물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본 얼티메이텀>을 비롯한 ‘본’ 시리즈의 영향력인지 정교하면서도 묵직한 육박전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심지어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처럼 장소를 불문하고 시종일관 달리고 또 달린다.-실제로 <본 얼티메이텀>의 액션감독을 맡았던 댄 브레들리가 <007 퀀텀>의 액션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도망자 제이슨 본이 아닌 추격자 제임스 본드는 고뇌의 무게보단 저돌적인 과감함을 선택한다. 무엇보다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기존의 제임스 본드들과 궤를 달리하면서도 그 클래식한 느낌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캐릭터의 형상은 겹쳐지지만 태도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이미지를 보존한다. 뉴타입으로 개조된 제임스 본드는 또 한차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시대는 변했고, 제임스 본드도 변했다. 하지만 '007'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의 성공적인 귀환이다. 잭 화이트의 기타 훅(hook)과 알리샤 키스의 소울풀한 창법으로 새롭게 변주된 오프닝 넘버는 신세기 제임스 본드의 본격적인 재출범을 알리는 강렬한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근사한 데코레이션의 케이크가 먹음직스럽다. 한 조각 잘라 한 입 베어 물어보니 부드러운 빵 사이를 채운 촉촉한 생크림이 달콤하기 그지없다.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었을 때 그 혀끝에 전해지는 달콤함은 행복의 최소단위라 할 수 있을까. 잠시나마 오로지 홀로 느낄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이 혀끝에서부터 달콤하게 녹아 내린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인생의 너비를 깨닫고 미세한 행복을 찾아가는 네 남자의 사연이다.
일본의 베스트셀러이자 국내출간 시에도 큰 인기를 모았던 순정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원작으로 한 <앤티크>는 원작의 레시피와 데코레이션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배달했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같이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트렌디한 취향이 적극적으로 총아를 이룬다. 구체적으로 나누자면 동성애를 소재로 한 퀴어 무비이자 케이크 가게의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 전문직 드라마, 그리고 꽃미남들의 메트로섹슈얼한 이미지를 근사하게 엮어낸 캐릭터 무비다. 이 모든 것들이 <앤티크>의 화려한 데코레이션 양식을 완성하는 요소다.
<앤티크>는 네 남자의 사연이 조각처럼 모여 완성된 하나의 케이크와 같다. 네 남자가 모인 케이크가게 ‘앤티크(Antique)’는 각자의 사연 속에 내재된 상처를 서로에게 고백하는 장소다. 봉인된 트라우마를 풀어내듯 네 남자의 비밀스러운 사연이 공개될 때 그 상처와 대면한 멤버들간의 연대감은 더욱 돈독해진다. 또한 네 남자는 각자의 특별한 사연만큼이나 개성이 강하지만 그들의 어울림도 자연스럽다. 제 각각의 맛이 다르지만 진열장에 나란히 세워두기 좋은 조각케이크처럼 돋보이는 조합을 형성한다.
TV미니시리즈의 형식으로 몇 회 분량에 나눠 방영해도 좋을 만큼 확대해도 좋을 만한 사연을 집약적으로 추스르고 연결해 나가는 <앤티크>는 그 사연의 간격을 매듭짓고 연계하는 방식으로 시각적인 편집효과를 적극 활용한다. 컷어웨이나 와이프와 같은 장면 전환을 적극 활용해 화면을 다채롭게 디자인하고 때론 뮤지컬적인 요소를 가미하며 화려한 장면을 얹어내기도 한다. 특히 다양한 효과를 응용한 표현력으로 스크린에 만화적 틀의 상상력을 입히는데 성공한다. 시각적인 묘미가 도처에서 발생한다. 발랄하면서도 지나치게 붕 뜨지 않는다. 그 틈새로 유머러스한 대사와 상황들이 포개진다.
가장 흥미로운 건 <앤티크>가 남성들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진혁(주지훈), 선우(김재욱), 기범(유아인), 수영(최지호)은 <앤티크>라는 하나의 케이크를 이루는 네 조각과 같은 존재다. 물론 구심점이자 무게중심인 진혁의 사연이 중점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다른 세 남자의 사연 역시 저마다 기둥을 이루고 <앤티크>를 지탱한다. <앤티크>는 네 명의 사연을 비중의 차이와 별개로 고른 관심을 얻을만한 형태로 완성한다. 네 조각의 사연을 통해 <앤티크>는 달콤한 인생의 비결을 선사한다. 각기 상처를 지닌 네 젊은 청년은 서로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를 바라보며 스스로 위로 받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꿈에 대해, 기억에 대해 각기 절망하거나 좌절하던 청년들은 비로소 스스로를 극복하고 진짜 삶을 꿈꾼다. 아마추어들은 비로소 프로페셔널로 성장한다. <앤티크>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한 트렌디드라마다. 외모에 신경 쓰면서도 내실을 갖추고 있다. 근사한 데코레이션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를 맛본다는 건 실로 즐거운 일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즐거움을 만끽해도 좋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의, 식, 주가 붕괴되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상실된다.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1953년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엔 빈곤의 기운이 가득하다. 애나 어른이나 막론하고 먹고 사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곳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줄 정도의 여유도 없다. 기본적인 욕망조차 결핍된 도시에서 비정함이 새어 나온다. 그곳에서 소년은 울어봤자 별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전쟁 후 고아가 된 종두(이완)와 태호(송창의)를 주인공으로 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어느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1953년 서울을 재현한 스크린 너머의 풍경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치 못한 이들에게 일종의 실감을 안겨줄 만한 설득력이 존재한다.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두 소년의 삶을 둘러싼 시대적 정서를 이해하는 통로다. 전쟁이 끝나고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받아주기엔 너무도 허기진 그 시대의 정서는 서슬이 퍼렇다. 법도 질서도 자리잡지 못한 시장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힘이다.
태호와 종두는 시장의 주먹인 명수(안길강)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악도 불사하는 냉혈한 도철(이기영)이 두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편치 않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신들이 빼돌린 미제 물건을 처분하려는 태호는 계산에 능한 만큼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반면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종두는 명수의 싸움을 목격한 뒤 그를 동경하며 힘을 기른다. 태호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종두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태호는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이익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만 종두는 직관적인 판단과 옳고 그름의 신념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대비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 갈등과 화합을 그려내며 이를 통해 비극적인 시대상을 상충시키려 한다. 아이들이 이루는 군집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자치적으로 완성한 유사가족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부모 역할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성장기를 잃어버린 채 어른 행세를 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가 선명한 비극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상황 속엔 그 자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열악함이 선명하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엔 큰 무리가 없다. 간혹 상황이 심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로맨스를 통한 갈등과 같은 클리셰의 흔적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인상은 아니다. 감정이 개입될만한 어떤 여지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이다. 비정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이들의 고군분투는 비관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양식을 그저 바라보게 만들 뿐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사실감을 주지 못하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적인 풍경 너머의 정서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만한 비극적 시대상에 대한 수긍을 이미 전제로 두고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담담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참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관찰이 지속될 따름이다.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며 그 내부를 지배할만한 비극적 사연도 전시하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당연해 보인다. 그 세계가 짊어진 거대한 비극의 굴레가 눈앞에 생생하여 어떤 낙관도 버겁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강자와 약자의 우열관계가 생생한 시대에 기본적인 가치는 생경한 언어처럼 무기력하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며 살아온 전후1세대의 삶을 조명한 휴먼드라마다. 비극 자체를 삶이라 치환하며 버틴 이들의 사연이다. 생계에 목숨을 건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소년의 눈물 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성장기를 박탈당한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처럼 비열해지거나 스스로 강해지길 꿈꾼다. 가혹했던 시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소년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비극을 전제로 한 무용담을 기억에 쌓아나간다.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개입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무력한 수긍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낙관과 비관이 양립한 듯한 극의 말미에서도 의지보단 어떤 체념이 먼저 감지된다. 영화적 재능보다도 시대를 관통하는 관찰자의 야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거짓이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거짓에 압도당해 쓸모를 잃고 그 빈자리마저 거짓으로 메워진다. 형체가 없는 거짓이 진실의 육체를 장악할 때 선악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중동과 미국의 전쟁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끝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포스트 911의 시대에서 악의 축으로 구분된 이라크는 미군의 로켓세례를 얻었지만 그 반작용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발생시켰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고도화된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기 위해 첨단의 반대편에 서는 방식을 터득했다. 도청이나 추적 자체를 막기 위해 휴대폰이나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으며 게릴라적인 대응으로 적의 정보를 분산시킨다. 정보력이 약화되면 적과 아군의 구분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적의 실체는 모호하고 동지에 대한 신뢰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거짓과 진실은 백지장 차이로 옷을 갈아입고 소통의 부재는 총구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로저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만(러셀 크로)의 갈등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적진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CIA요원 페리스는 지뢰처럼 깔린 도처의 위협을 피해 테러리스트의 본산을 찾아내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현장에서 활약하는 페리스는 자신과 접촉하는 정보원들과 인간적 신뢰를 갖추려 노력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무선으로 지령을 내리는 호프만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충고를 앞세우며 매번마다 페리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들 뿐이다. 작전 과정에서 자신의 절친한 정보원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긴 페리스와 호프만의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중동에서 고군분투하는 페리스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것과 달리 본국에서 생활하는 호프만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이라크와 미국의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은 삶에 대한 이해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건 옳고 그름의 여부가 아니라 증명될 수 있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삶과 죽음도 그 지점에서 판별된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을 끌어내기 위해 평범한 건축가를 거물 테러리스트로 설계해 위장된 테러의 주범으로 조작해 미끼처럼 내모는 과정은 거짓이 실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수긍할만한 결과를 위해 희생양이 동원되고 모종의 신뢰는 전략적 볼모로 채택된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분명 포스트 911의 텍스트를 이어받은 작품이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초월해 개인적 의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국가와 문화라는 프로파간다의 경계가 부딪히는 사이, 그 아래 머무는 인간은 어느 한편의 실체 없는 명분을 지탱하기 위해 거짓을 품기 위한 실존적 육체로 투하된다. 생사의 기로를 넘으며 그 허상을 목격한 페리스는 결국 스스로의 진실된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허상의 세계에서 탈출한다. 거짓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뛰던 말은 궤도를 이탈한다.
과감한 액션과 세심한 스릴이 거듭되는 <바디 오브 라이즈>는 생생한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는 영화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긴박감과 달리 스크린의 표면에선 건조한 기류가 발견된다. 전반적으로 능동적인 움직임이 발생하지만 정적인 무기력이 감지된다. 그건 영화가 묘사하는 그 세계를 향한 무기력과도 같다. 재활의 의지로 몸부림칠수록 진창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듯 어지러운 중동의 현실은 그 자체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암담할 따름이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그 익숙한 회의감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탄탄한 연출력과 두 주연배우의 녹록치 않은 연기가 감탄스럽지만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현실의 무게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