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2005년 4월 17일, LA타임즈엔 ‘2현으로 세상을 소유한 바이올린 주자(Violinist Has the World on 2 Strings)’라는 헤드라인의 칼럼이 실렸다. ‘포인트 웨스트(POINTS WEST)’를 연재하는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이었다. LA의 ‘펄싱 스퀘어(Pershing Square)’공원에 있는 베토벤 동상 주변에서 들려오는 ‘베토벤 소나타’를 쫓아간 ‘스티브 로페즈(Steve Lopez)’는 2현밖에 남지 않은 고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Nathaniel Anthony Ayers)’를 만났다. 그 뒤로 스티브는 나다니엘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도시의 거리 정책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결국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도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LA타임즈 기자이자 인기칼럼니스트인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하게 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제이미 폭스). 스티브 로페즈가 나다니엘에 관해 연재한 칼럼을 엮어 전기적 소설로 각색한 동명원작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솔로이스트>는 실화와 영화의 협연이다. 단조와 같은 삶 속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스티브는 전환을 위한 쉼표를 갈망한다. 도돌이표와 같은 착란에 갇힌 나다니엘에겐 새로운 삶을 위한 마침표가 필요하다. 나다니엘을 위해 헌신적인 원조를 마다하지 않는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통해 드라마틱한 기사 소재가 아닌 진짜 삶을 정화시키는 감동을 얻는다. 나다니엘은 스티브의 진심을 통해 점차 세상에 마음을 열어나간다.
스티브와 나다니엘의 관계에 망원경을 들이미는 동시에 그들의 개별적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솔로이스트>는 현실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관계적 묘사방식에서 현실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 넣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어내기 어렵다. 형태적으로 관계를 묘사해나가지만 재현적 이미지 이상의 정서적 감흥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과 이언 매큐언 원작의 <어톤먼트>와 같이 영국작가들의 텍스트를 풍요롭고 섬세한 이미지로 전환해낸 조 라이트의 감수성 어린 재능도 <솔로이스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섬세한 문체를 예민한 영상으로 치환하고 풍요로운 문장을 풍부한 색채에 반영하며 조 라이트의 감각을 비범하게 드러내던 전작들과 달리 <솔로이스트>는 또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콘트라베이스 현을 포착하는 클로즈업 광각 샷과 함께 베토벤의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치환한 환상적인 장면과 같이 예민한 시선과 풍요로운 감각을 드러내 보이긴 하나 전반적으로 <솔로이스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미지는 그 드라마만큼이나 평이한 결과물에 가깝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건 <솔로이스트>가 재현해낸 실화 역시 마찬가지다. 스크린은 단지 현실의 감동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현실이 이뤄낸 감동의 본위가 스크린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스크린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발췌해내고 있는지가 주요한 관점으로서 감상을 지배하게 된다. 물론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그 사연의 실체가 된 현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것이 실화라는 정보를 미리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솔로이스트>는 허구적 사연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판단한 관객의 착시를 보다 강렬한 감상으로 이끌어낼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끝에 걸린 현실성의 환기가 <솔로이스트>에서 가장 강렬한 대목이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현실을 통해 완성된 영화라는 점이 <솔로이스트>에 강한 방점을 남긴다. 이는 결론적으로 <솔로이스트>가 부여하는 영화적 감동이 뒤늦게 체감하는 현실에 대한 환기보다 놀라운 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두 인물의 관계와 함께 개별적 인물의 고독과 혼란을 묘사하는 영화는 두 영역에 놓인 정서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저마다 방치하듯 선을 벌려나가는 느낌을 준다. 덕분에 내러티브의 집중력이 응집되지 못해 감상을 흩뜨리고 있다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는 호연을 펼친다. 하지만 순차적인 수순을 따르듯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서 두 배우의 연기 역시 평범함을 더하는 요소처럼 나열되는 것만 같다. <솔로이스트>는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의 가치를 방증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딱히 부족한 인상을 남기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스티브 로페즈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의 근황을 전하는 자막이 영화적 재현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실화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재현적 한계의 사례로서 유용해 보인다. 마치 원곡의 울림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주력을 선보이는 관현악단의 공연을 보는 것만 같다. 다만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 아래 베토벤 심포니를 연주하는 LA 필하모닉의 공연은 어떤 영화적 얼개와 별개로 좋은 부록의 역할을 한다. 만약 현재에도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두 인물의 실제적 모습을 보고 싶다면 LA타임즈 홈페이지에 있는 스티브 로페즈의 칼럼을 검색해볼 것. 칼럼과 함께 첨부된 동영상 너머의 실제적 삶은 재현이 넘볼 수 없는 감동을 전달한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나약함은 힘을 필요로 하고, 배신은 피를 부른다.” 닌자를 양성하는 비밀 집단 ‘오즈누’의 수장 오즈누(쇼 코스기)의 대사처럼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리고 라이조(정지훈/비)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체제에 대한 반역자다. 일종의 신고식이라 할만한 첫 번째 살인 임무 이후, 조직에 등을 돌리게 되는 라이조는 자신의 삶이 있는 곳이라 믿었던 ‘오즈누’를 떠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 달아나고 조직에 맞선다. <닌자 어쌔신>은 폭력적 강압을 강령처럼 받아들이며 유지되던 조직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의 투쟁을 선혈이 낭자한 살육적 이미지로 담아낸 B급 취향의 액션물이다.
<닌자 어쌔신>이 묘사하는 닌자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초인이나 다름없다. 유년시절부터 고아들을 모아 살인병기로 키워내는 비밀집단 오즈누는 닌자라는 존재감에 신비를 덧씌워 리모델링한 가상적 세계관이다. 은둔과 잠입을 장기로 뛰어난 암살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닌자의 베일적 존재감 자체를 도화지 삼아 상상력을 덧칠하고 스크린에 전시한다. 사실 이는 서양에서 제작된 오리엔탈리즘 소재의 영화들이 범하는 자아도취적 환상에 가깝게 보인다. 다만 그것이 만화적이고 게임적인 세계관 안에서 펼쳐낸 과장이라고 납득했을 때 그 착시적 환상을 인정할만한 수준은 된다. <닌자 어쌔신>을 비현실에서 펼쳐지는 허구적 캐릭터들의 피범벅 액션물이라 이해하고 납득했을 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이 성립된다.
사실 낡은 유물과 같은 닌자를 현대시제 안에서 재현했다는 점만으로도 <닌자 어쌔신>은 이미 시대적 현실감을 거부하는 판타지다. ‘오즈누’가 ‘명성황후’시해에도 관여했으며 현대에서도 암암리에 중요한 암살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유로폴(Europol)’ 수사관의 발언은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구시대의 유물의 존재적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수순에 가깝다. 비밀조직의 활약상을 구체화시킴으로써 조직의 연원적 깊이를 설명하고 은밀한 활동범위를 인지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허구적 환상을 실제적 세계관에 이입시킬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다만 ‘명성황후’시해 사건, 일명 ‘을미사변’이 유로폴 수사관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손쉬운 예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물론 그것을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가 배려한) 이벤트로서 마련된 의도적 삽입이라 인식한다면 심각하게 진지해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등장하는 TV속 한국사극은 일종의 애교다.
물론 <닌자 어쌔신>에 조준된 기대감의 팔할은 액션에 놓여 있을 것이다. 피칠갑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닌자 어쌔신>은 상업영화의 포맷 안에서 기획되고 제작되는 안전한 액션영화라고 하기엔 강력한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다. 도입부부터 고어적 수준의 신체훼손 이미지를 노출하며 그 이후로도 잔인한 장면들을 더러 연출해 보인다는 점에서 B급 취향을 과감히 전시한다. 물론 도입부의 살육신을 포함해 라이조와 오즈누의 일대 다수 대결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들은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장치적 효과보다도 육체적 스턴트의 흔적이 두드러지는 <닌자 어쌔신>은 아날로그적 역동성을 만끽하게 만드는 올드한 감성의 액션영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액션신이 밤시간과 어두운 실내를 배경으로 묘사되고 빠른 몸놀림을 따라잡지 못하는 카메라엔 잔상이 가득한 경우가 많아 시각적 제약이 뒤따른다. 또한 지나치게 건조한 톤의 감정을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액션을 구경한다는 것 이상의 흥분감이 동원되기 어렵다. 건조하게 스크린 너머의 액션을 담담하게 지켜보게 될 공산이 크다.
<닌자 어쌔신>은 대중적인 할리우드 메인스트림 영화라기 보단 마이너적인 B급 취향의 액션영화라고 칭하는 게 보다 어울려 보인다. 게임이나 만화적 세계관에 심취했다는 워쇼스키 형제의 취향도 배제하기 어렵다. 오즈누에 반발한 라이조가 그에 맞서 조직을 붕괴시켜나가는 과정은 흡사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의 활약상을 스크린에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이지마다 적절한 미션을 수행하고 그 끝에 다다라 최종 보스를 격파하면 게임은 끝난다. 그만큼 <닌자 어쌔신>은 단순하고 명확한 영화다.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액션신의 향연은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순차적인 수순 안에 놓여있기에 능동적인 예상을 무마시킨다. 예상범위 내에 명확히 갇힌 이야기처럼 그 사연의 진전을 통해 얻을만한 감흥은 얕은 수준이다. 덕분에 클라이맥스가 이루는 감흥의 세기도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디자인된 세계관을 품은 내러티브는 단지 게임적 세계관을 작동시키기 위한 에피소드적 장치에 불과하다.
만약 <닌자 어쌔신>을 할리우드 표준 규격의 대중적 액션영화로서 기대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방향를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B급 취향의 하드고어 이미지를 저돌적으로 제공하는 영화로부터 취향의 소통불가적 배신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취향을 적절히 감내할 수 있는 관객에게 <닌자 어쌔신>은 적절한 킬링타임을 제공하는 액션영화로서 유효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정지훈의 할리우드 주연작이란 사실에 기대감을 품은 국내관객에게 팁을 하나 주자면, 터미네이터적인 무표정을 일관하고 감정적으로 봉인된 캐릭터 라이조를 연기하는 정지훈은 묵묵한 액션 캐릭터로서 <닌자 어쌔신>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 영화적 의도에 적합한 성과를 드러내지만 그 이상의 ‘연기’를 원했을 관객이라면 이 역시 기대적 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이후로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내가 참 오랜만에 영화를 찍긴 찍었나 보다. (웃음) 이런 생각이 제일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게 이상해. 내가 7년 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인데 그걸 남들이 막 말해주니까 오히려 나중에 내가 너무 오랜만에 찍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게 이상하다. (웃음) 나는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거든. 요즘 감독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기회가 금새 오지 않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를 찍느냐고 그러니까. (웃음) 그게 신기하더라.
<질투는 나의 힘>에는 장난끼가 배어든 듯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선 듯한 긴장감이 지속된다. 캐릭터의 내밀함은 두 영화의 유사한 지점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옛날 영화들 보면 배우들이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데 요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약간 낄낄거리듯 말한다. 좀 더 풀어진 듯 보여져야 자연스러운 걸로 인식된다. 옛날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다 정중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영화들에선 꼭 그렇지 않다. 그런데 난 그냥 요즘에 만든 영화지만 정중하게 꼭 할말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 된 건가?
파주는 안개가 많이 핀다. 어떤 한정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 곳의 정서를 대변하는 자연적 풍광이 이미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주에 안개가 많이 피는 걸 보고 파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개는 <파주>의 심리적 밀폐성을 대변하는 미장센이자 전체적으로 내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그 안개로부터 어떤 감흥을 받았나?
그렇게 짙은 안개는 생애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봤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안개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경험해봤으니까. 그런 안개를 화면에 담으면 마치 사막에 살던 사람이 영화를 통해서 눈이라는 걸 처음 보듯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짙은 안개를 처음 보겠구나 싶어졌다. 그러니 꽤 담을만한 게 아니었을까. (웃음)
그 물리적인 형태 자체로서 감흥을 얻은 건가, 아니면 그 형태를 통해 표현적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흥을 얻은 건가.
내가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에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듯이 영화 안에 그걸 끌어왔을 때 보는 사람도 그렇게 작용 받길 기대하는 게 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상징이나 의미를 내 스스로 붙여본 적은 없다. <파고>(1997)를 보면 눈이 아주 많이 나오는 것처럼. (웃음) 그냥 그 장소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인상이랄까? 그런 거지.
멜로적 복선이 정서적으로 밑바탕에 놓여있지만 꽤나 미스터리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꽤나 흥미로운 서브 플롯들이 가지를 치고 있기도 하고 서사의 이동이 잦다. 그 덕분에 이야기를 쫓아가는 긴장감도 발생하는 것 같다. 단순히 멜로영화라고 생각했을 땐 상당히 독특한 지점의 구성이다.
멜로영화라는 게 두 남녀가 사랑하는데 장애가 있고, 그 장애를 어떻게 넘어서기도 하고, 못 넘어서기도 하는 그런 것 아닌가. 이 영화에서도 장애가 등장하고, 역시 장애를 못 넘어서는 그런 멜로영화 범주 안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대부분의 멜로영화는 그런 장애를 하나 정도만 설정해놓지만 <파주>에선 그렇지 않다. 서브 플롯도 두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메인 플롯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서브는 언니가 어떻게 죽었나, 와 철거 현장에 관한 플롯이다. 결국 결말에서 두 남녀가 어떤 식으로든 잘 살 수 있도록 뭔가 해결되고 풀어내야 할 부분이 잘 풀려지지 않는 건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남자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고, 여자는 일단 그걸 알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철거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꽤나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재개발 철거에 관한 서브플롯이 원래 구상된 소재였던 것인가, 아니면 후발적으로 끌어들이게 된 소재였나.
결말을 원래 이렇게 상정했다.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의 핵심 인물인데, 여자가 다 같이 하는 그 일을 망쳐놓는다. 그래서 이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이 여자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선택할 것인지, 의 갈래에서 다 같이 하는 일을 망쳐놓더라도 개인적인 일을 선택한다. 이게 이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큰 구상이었다. 철거 투쟁도 그래서 들어온 거다. 둘의 관계에서 이 남자가 자기가 해왔던 커다란 대의적 일도 포기할 만큼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철거 투쟁 자체가 둘의 관계를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수단이다. 그 남자가 어떤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커진다 해도 결국 그 여자를 위한 선택을 먼저 염두에 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멜로드라마 범주 안에 있는 거니까.
<파주>에선 구체적인 연도나 연원을 알리는 근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초반부 TV에서 흘러나오는 범민족대회 연대사태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제외하면 그 시대성을 가늠할 방편이 부재하다. 단지 서사를 감지하게 만드는 자막과 짧은 대사가 몇 번 등장할 뿐이다. 처음에는 편집본에 자막으로 연도를 넣었다. 그 버전으로 모니터를 했더니 더 헷갈려 하고 혼란스러워하더라. 처음 등장하는 게 1994년인데 그 다음에 ‘몇 년 후’ 자막이 나오니까 자꾸 계산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냥 현재 시제를 기준으로 8년 전, 7년 전, 3년 전, 해주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는 결론이 났다.
시대상에 대한 적확한 적시가 등장하지 않는 덕분에 몇몇 장면은 되레 현대적이란 느낌을 준다. 범민족대회 장면은 얼마 전 촛불시위 같고 철거위 장면은 얼마 전 용산 사태를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은 그 뉴스 장면 보고 촛불시위 때문인지 알았다 하더라. (웃음)
구시대적인 지표를 영화에 반영했을 뿐인데 그것이 되레 현대적인 감상을 부른다니 시대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가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보시는 분들이 원래 설정한 연도보다 더 최근으로 봐도 상관없고, 심지어 그걸 촛불시위라고 보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에겐 단지 아까 말했던 다 같이 하는 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중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철거 투쟁을 설정하게 됐다. 내 생각엔 한국에서는 늘 짓고 부수기 때문에 그런 게 계속 진행되는 일이고,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쓸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용산에서 불행했던 그 사건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조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파주>를 후일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후일담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자주 활용되는데 그 안에서 인물의 오해를 그려나가고 그 오해를 객석의 감상적 오해로 전이시킨다. 서사적 배열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서사가 긴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게 할 수 밖에 없다. 서사에 단절을 시켜줄 수 있어야 어떤 이야기를 점프시킬 수 있는 건데 서사가 단선적으로 흐를 때는 점프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니까 긴 시간대를 다룬 이야기에서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건 불가피한 방식 같다. 일종의 추리극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그 방식 안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건 어렵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추적해가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추리극을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그리스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이야기처럼 현대에서 과거의 일을 추적해나가고 분석하면서 조합하는 형태가 나에겐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되더라. 물론 그게 흥미롭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웃음)
서사적 이동이 잦기 때문에 플롯을 쫓아가는 감상 자체에서부터 묘한 긴장감이 유발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긴장감 자체가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특이점을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보통 어떤 남녀의 사랑에 장애가 있으면 보통 부모의 반대거나 주변의 역경인데, <파주>는 그보단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에 대한 이해적 차이가 장애가 된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남자는 밝히려 하지 않고, 여자는 그걸 알아야겠다고 하는 심리가 장애로서 결말까지 이어지는 거다. 그냥 내 생각엔 평범한 거 같다. (웃음)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이원상(박해일)의 전 애인이 한윤식(문성근)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했을 때 그 이후로 뭔가 엄청난 파국이 벌어질 것 같지만 정작 상황은 담담하다. <파주>에서도 은모가 중식의 속내를 알게 된 순간 뭔가 파격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지만 오히려 상황이 무마되는 동시에 시퀀스 자체가 종료된다. 어떤 면에서는 관객이 품고 있던 상상이나 기대할만한 긴장감을 무마시킴으로써 파격적인 감상을 부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지만 말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말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라지진 않는다. (웃음) 현실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비밀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도록 보는 사람에게 훈련이 돼있다고 할까? 만약 비밀이 밝혀지면 복수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너도 사랑했니, 나도 사랑했다, 이러면서 울고 불고 좋아해야 하거나, 꼭 그래야 하나. (웃음)
최은모의 캐릭터가 <파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단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내밀하게 감정을 이끌어가면서 전체적인 영화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인물이랄까. 그런데 서우에게 그 캐릭터를 맡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어차피 20대 중학생 배역이랑 성인 배역을 같은 배우로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배역으로 한다고 치면 그 배우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어야 할 텐데 내가 생각할 때 지금 20대 초반의 배우들은 누구랑 해도 아직 다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험을 하더라도 서우 씨와 하는 게 제일 좋겠다 생각했다. 내 개인적인 느낌에 서우 씨 얼굴을 보면 되게 강인하다 느껴지는 면이 있다. 사실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성형을 하면 그 사람의 개성이 없어지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보편적인 미인이 된다. 하지만 서우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게 있다. 워낙 자기 개인성이 강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서우 씨를 보면 마치 들짐승과 같은 본능이 떠오른다.
동물적이지.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압도당하지 않는 눈빛을 지녔다. 단순히 겁을 내기보단 마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음, 맞아. 되게 에너지가 높다. 기가 아주 높은 친구다. 어차피 어떤 20대 초반의 배우랑 해도 그 분들의 경험이나 경력은 다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우 씨가 원래 가진 에너지가 다른 배우보다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파주>를 통해 서우라는 젊은 배우의 잠재력이 많이 발견됐다고 해도 좋을 거 같다. 그 동안 서우가 보여준 외향적인 캐릭터와 달리 <파주>에서 연기한 최은모는 은밀하고 내향적인 캐릭터다. 그만큼 디렉션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다. 특별한 스트레스는 없었나.
서우 씨 연기는 깨끗하고 순간적이다. 순간적으로 되게 큰 에너지가 나온다. (손가락으로 책상 가운데를 짚으면서) 가끔 서우 씨가 이 정도 지점에서 표현을 하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여기서 조금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그 방향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이만큼 간 게 아니라 (더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면서) 이만큼 갈까 봐. (웃음) 어떤 배우의 유동성이 좁으면 내 말이 잘못 들어가도 이렇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밀어낼 수 있는 폭이 있는데 차라리 서우 씨는 말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한 거다. 워낙 순간적으로 강하게 뛰쳐나오는 에너지가 커서 어떻게 말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은 됐다. 잘못 말하면 확 튀어 올라서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느낌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딱 상태가 좋게 잡히면 그 지점이 너무나 좋으니까.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나 보편적인 형태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형태의 사랑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 흥미가 없어서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형태의 사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의 심리가 보다 흥미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경험이 많거나 깊은 감정을 잘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왜 그런 형태를 끌고 오는가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해보는 연애니까, 누구나 다 해보는 일로서 그 형태를 갖고 오기가 쉽기 때문인 거 같다. 그냥 편의적으로 갖고 올 수 있는 소재를 다른 형태로 가져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의 결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비에 대한 해석이 엇갈릴 만한 장면이다. 결과적인 형태 안에서는 비극 같지만 궁극적으로 점지되지 않은 미래적 상황에선 희망을 예감해도 무관할 것 같다. 어쨌든 김중식을 가둔 최은모는 파주를 떠난다. 과연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일까?
아마 여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라고 생각할 거 같다. 물론 일을 보러 언젠가 오겠지. 예를 들어서 부모님 집을 팔러 온다던가, 뒷수습을 하러 임시로 오는 경우는 있겠지만 인도에서 돌아올 때처럼 다시 파주에서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돌아오진 못할 거 같다. 그리고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라도 모를 일이지. 그냥 떠날 때 심정이 그랬을 것 같다. 김중식 얼굴도 다시는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고. 그 사람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을 명목을 지워야겠다 마음먹지 않았을까.
간담회 때 보니까 긴장하듯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이 경계심 강한 들고양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쉽게 겁을 내지만 막상 그 겁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런 모습에서 <파주>의 최은모가 겹치는 지점도 있고요.
전 이런 말 듣게 되면, ‘아, 그렇구나.’ 생각하게 돼요. (웃음)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색다른 감상을 얻지 않을까 궁금하네요.
<파주>는 스크린으로 봐도 화질이 선명하지 않고 뿌옇잖아요. 현장에서 봤던 모니터가 굉장히 작아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감정적 표현들로만 오케이라 느끼고 갔죠. 배우들도 스크린을 통해 처음으로 모니터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가끔씩 불쌍해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닌데도 어떤 대사를 할 때 너무 불쌍해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들고양이 같다는 말씀이 최은모에겐 굉장히 잘 어울리는 표현 같아요. 항상 눈동자에 누군가를 경계하는 게 드러나고, 조금은 불안해하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은모가 불완전한 인간형, 불안정한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눈빛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표현하고, 그렇게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최근 방영된 드라마 <탐나는도다>를 비롯해서 <미쓰 홍당무>와 <파주>에서 연기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어요. 일단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겠죠. 하지만 그만큼 약간의 긴장감이 어깨에 지워진다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약간이라기 보단 너무! (웃음) 그런 칭찬 자체가 저한테 큰 응원이 되지만 사실 무섭기도 하고, 굉장히 큰 짐이 되기도 하니까요. 저는 아직 영화를 두 작품 밖에 못했고 이제 조금씩 뭔가를 보여드리면서 아직은 좀 혼나도 괜찮다고, 지금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얘기들을 듣게 되면 겁이 나요. 칭찬을 못 받아도 속상하겠지만 칭찬을 받아도 그런 생각이 들죠. 나중에 분명 큰 질책을 받을 때도 올 거라고 보거든요. 너무 큰 기대를 얻다가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나, 벌써부터 이런 걱정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연을 많이 맡으셨던 선배님들이 작품을 선택하기 어려우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분들에게 받은 연기적인 믿음과 신뢰를 저버릴 수 없는 입장일 테니까요.
시나리오를 보고 캐릭터를 접했을 때도 욕심과 갈등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파주>를 선택할 때도, 아직 연륜이나 경험이 부족한 내가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됐어요. 만약 제가 못하면 7년 동안 써왔다는 이 시나리오가 망가지는 거고, 많은 분들에게 죄송한 일이 될 거 같아서 주저했죠. 이거 놓치면 후회야, 라는 욕심으로 염치불구하고 뛰어들었던 작품이죠. 아직 난 조금씩 공부하면서 가도 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기도 했고요. <파주>덕분에 많은 분들에게 또 다른 용기도 얻을 수 있었죠.
처음 연기 제의를 받고 시나리오를 통해 은모라는 인물을 살펴볼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일단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던 거 같아요. 시나리오를 받은 게 <탐나는 도다>찍고 있을 때였고 촬영이 중단되기 직전 상황이었거든요. 만약 <탐나는 도다> 촬영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면 <파주>를 찍지 못했을 거에요. 그리고 <파주>를 찍으면서 <탐나는 도다>를 병행했다면 굉장한 영향을 받기도 했겠죠. 그런데 <파주>를 찍고 나서 다시 <탐나는 도다>에 복귀했기 때문에 저에게 <파주>는 서우라는 사람에게 들어온 운명 같았어요. 그때 제가 육체적으로도 마음으로도 고생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고요. 전 원래 미친 듯이 밝은 성격이거든요. (웃음) 힘들어도 겉으로 표현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 마음을 잘 모르기도 하고요.
박찬옥 감독님은 서우 씨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봤을까요? 혹시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묻거나 추측해본 적은 없었나요?
박찬옥 감독님을 처음 뵙는 미팅 자리에서 힘든 넋두리를 했어요. (웃음) 그때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거든요. 물론 그땐 제가 최은모에 대해서 분석을 했다거나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때였죠. 박찬옥 감독님이 그런 제 모습을 보고 김중식처럼 저를 보살펴주고 싶은 동정심을 발견하셨던 것 같아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단 제 이야기만 했거든요.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인 목소리로)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몰라요. 언니는 몰라.” 막 이러면서. (웃음)
이선균 씨가 간담회에서 그런 말을 했죠. 카메라만 돌아가면 사람이 변한다고.
(웃음) 제가 평상시에는 장난도 많이 치는데 은모는 워낙 저와 많이 다른 캐릭터다 보니까 카메라 돌아가면 은모가 돼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제 이중성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선균 오빠인 거 같아요. 사실 버진이할 때는 제 일상이 워낙 버진이스러워서 카메라가 안돌 때나 돌 때나 다를 게 없었을 거에요. 예전에 처음 연기 시작할 때 한번 웃음이 터졌다가 슛 들어가도 제가 그걸 못 참아서 크게 혼난 적 있어요. “서우 집중 안 해?” 그렇게 따끔하게 혼난 덕분에 슛 들어갈 때 집중력이 커졌나 봐요.
방금 말씀하신 <탐나는도다>의 버진은 서우 씨와 가장 닮아있는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제일 가깝죠. 그렇지만 서종희도, 버진이도, 은모도 다 저로부터 시작한 캐릭터에요. 셋 다 저와 따로 있는 게 아닌 거죠. 감독님과 제가 같이 만들어나간 가상 인물이지만 어차피 다 저에요. 서우란 사람이 세 명 있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하나를 뺀 나머지는 제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는 거죠. 버진이가 저와 좀 많이 가까웠을 뿐이고, 저와 많이 달라 보이는 은모 또한 저의 한 모습인 거에요.
본인에게서 가장 쉽게 드러날 수 있는 캐릭터인지, 아니면 쉽게 드러날 수 없는 캐릭터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은모는 단지 후자 쪽 캐릭터였나 봐요. 그런데 <탐나는도다>가 조기 종영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표했더군요.
감독님께서 그러셨어요. “야, 우리 조기 종영돼서 이렇게 매니아층도 생겼으니까 좋게 생각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도 좀……(웃음)
흥행적 지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작품이 있죠. 어쩌면 <탐나는도다>도 그런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쓰 홍당무>나 <파주>역시 두고두고 이야기될 작품이 될 거라 생각하고요. 어쩌면 그런 작품에 출연했다는 것이 언젠가 배우로선 좋은 기회였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 역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행운이 맞을 거라 믿어요.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출연했지만 그때도 사실 저는 연기의 ‘연’자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마다 현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창피할 정도로 부서지듯이 혼나고 눈물도 많이 흘렸거든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닌 거죠. <파주>에서도 스크린에 있는 최은모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뒤에서 연기했던 서우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많이 배워가면서 찍었고, 많은 부족함을 느꼈죠. 그래서 그런 힘든 시간들을 끝까지 이겨냈고,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힘이 나요. 뒤늦게 행운이라 생각하지만 그 행운을 갖기 위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웃음)
<미쓰 홍당무>나 <탐나는도다>는 캐릭터나 작품 자체의 기질만으로도 두드러지는 인상의 작품이었어요. 그러나 <파주>는 사실 캐릭터나 작품 자체의 기질이 두드러지는 영화는 아니죠. 적막하게 멜로적 복선을 깔고 가지만 미스테러 스릴러적인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사실 저희는 찍을 때 그런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배제한 느낌으로 갔다고 생각했어요. 은모가 언니의 죽음을 의식하는 건 중식을 밀어내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했고, 방패막처럼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묻으려는 심리가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또 한가지는 언니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계속 얘기해주는데도 그걸 믿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말조차 배제한다고 할까요? 감독님께서 선악을 왔다 갔다 하는 최은모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최은모라는 캐릭터의 모호함이 그런 정서에 일조하는 부분도 있었겠죠.
굉장히 모호하죠. 저는 솔직히 약간 음흉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이전에 했던 다른 캐릭터들은 연기적으로 굉장히 세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게 독특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최은모가 오히려 더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너무나 모순적이고 반어적인 복잡미묘한 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게 독특하지 않다면 무엇이 독특하겠어요. (웃음) 최은모는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이고 소위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캐릭터보다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최은모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연기를 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죠. 평생 살면서 이런 캐릭터를 또 맡을 수 있을까? 박찬옥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이상 그게 가능할까? (웃음) 은모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사실 많지 않을 거에요. 감독님께서 누구보다도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었고 그만큼 어려운 캐릭터였던 것 같고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정말 똑똑하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와, 내가 되게 이런 생각을 했나? (웃음)
말씀 잘 하시는데요. (웃음) <미쓰 홍당무>나 <탐나는도다>에서 연기한 서종희와 캐릭터는 뭔가를 밖으로 드러내고 만들어가는 캐릭터였다면 <파주>의 최은모는 뭔가를 안으로 자꾸 삼켜야 하는 캐릭터였던 것 같습니다. 서사적 흐름도 궁극적인 것을 감춘 채 의심을 갖게 만들고요. 그러니 아무래도 앞선 두 캐릭터를 연기할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겠죠.
연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감독님께서 주신 디렉션이 많은 공부가 됐고요. 능동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라고 하셨거든요. “그냥 연기하지 않으면 돼. 네가 그냥 최은모여야 해. 그걸 보는 관객들이 네 연기를 단면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그 가운데서 우리가 목표한대로 감정적인 요동치는 감정만 느끼게 만든다면 그게 맞는 거야. 네가 진짜 느끼면 그게 오케이야.” 이런 얘기를 하셨죠. 중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너무 아프고,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주체가 안 되는, 그런 은모의 감정을 제가 느꼈어요. <파주>에서 그걸 배웠죠. 그래서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걸 보는 관객들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정말 못 느낀다면 제 연기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답답함을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쩌면 최대한 표현하지 않는다기 보단 표현을 못 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을 제가 그냥 맡았던 것뿐이에요. 은모는 슬퍼도 슬픈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인간인 거 같아요. 언니 무덤에 갔을 때도 은모는 슬퍼하고 있었고,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거 같은데 울지 않잖아요. 너무 담담하게, “그만 내려가요.” 하고 내려가는데 전 그 때 너무 짠했어요.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어떤 톤으로 말을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게 꼭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더라도요.
최은모 이전에 앞서서 연기한 서종희와 버진이는 뭔가를 밖으로 끌어내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안으로 누르고 삭혀야 하는 최은모보단 감정적 어려움을 덜 겪지 않았을까 싶어요.
종희나 버진이는 톡톡 튄다고 할까요? 굴곡이 굉장히 심한 캐릭터였어요. 좋은 연출과 스토리 덕을 본 것도 있지만 캐릭터를 오고 가면서 컨트롤해야 할 숙제들이 있었죠. 은모를 생각하면 그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생에서 스물 세 살까지 성장하는 과정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더해지는 나이 대마다의 과정을 표현해야 했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점에선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하는 법을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말수도 없어지고 밥도 잘 못 먹었어요. 제가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한번은 3일 동안 거의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많은 스태프 분들 걱정을 끼치면서 촬영했던 적도 있었어요. 선균 오빠도 식사를 많이 못하시더라고요. 정말 가슴 아픈 사랑을 하는 은모처럼 제 모습도 그렇게 돼가고 있었나 봐요. 감정적으로 화가 났을 때, ‘악!’하고 소리 지를 수도 있겠지만 (담담하게) ‘알았어.’하고 말 때도 사실 화난 게 느껴지잖아요. 표현의 차이랄까? 이번에는 그걸 배웠고, 표현했던 거 같아요.
<미쓰 홍당무>에 이어서 <파주>에서도 교복을 입었네요.
심지어 광고에서도 입었어요. (웃음)
아까 말한 대로 <파주>에선 10대에서 20대까지의 나이 대를 표현해야 했으니까 교복을 입어야 했죠. 물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사이에 외모적으로 큰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 시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될 문제였을지 몰라도 정작 연기하는 당사자로선 어떤 특별한 구분을 보여줘야 할 거란 의무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죠.
일단 최은모를 연기하면서 뭘 보여주려고 부담 갖지 말자, 뭘 하려고 하지 말자, 라 생각해서 어떤 특별한 고민은 옆에 놔두고 연기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꼭 해야 할 숙제가 있었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성장배경을 보여줘야 하는데 사실 그 시기가 사람이 가장 많이 변할 때잖아요.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찍었던 영상을 보면 지금 제가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요. 고등학교 때도 또 다르고, 또 스물 세 살 때도 다르고, 너무나 많이 다른 거에요. 외형적으로 보기에도 전혀 다른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사람은 똑같아도 조금씩 다른 느낌이 나야 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파주>는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였기 때문에 그런 걸 외부적인 효과를 빌려서 과하게 표현할 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분장 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분장팀의 황현규 선생님께서 그런 제 고민을 인정해주셨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점점 머리가 커진다고 하잖아요. 중학교 때 별 생각 없던 아이가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사물에 감정을 담기도 하는 거죠.
<파주>는 두 인물의 오해와 착오를 통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는 사건을 그린 영화에요. 사랑이란 감정의 이타적인 영역과 이기적인 영역이 잔인할 정도로 발가벗겨지는 느낌도 들고요. 어쩌면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사실 서우 씨는 경험적으로 사랑을 이해하기엔 아직 부족한 나이라서 그런 경험적 깊이에 대한 갈망이 생기지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한번이라도 제가 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해봤다면 좋았을 걸 싶더라고요. 누군가가 나를 떠나갈 때 내 팔다리가 찢겨나가는 것 같이 가슴 아프고 뼈저리다고 하잖아요. 배우는 그런 게 연륜인가 봐요. 나이가 많아서 연륜이라기보단 그런 경험이 많이 필요한 건가 봐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는 거죠. 그게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영화 끝나면 정말 그런 사랑을 꼭 해볼 거야, 마음 먹었어요. 물론 금지된 사랑은 하고 싶지 않지만, (웃음) 누군가를 정말 뜨겁게 사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사람을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이 담아둘 수 있을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이렇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이게 사랑인 건 맞는 것일까, 확인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래도 어쩌면 미성숙한 감정이 최은모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기 때문에 가족을 배신하거나 양심을 어기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직 최은모 안에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적인 순수성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한 거죠. 그런 제 모습이 최은모에게서 보이는 거 같아요.
후반부에 중식이 은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되레 은모는 그 상황으로부터 달아납니다. 사실상 가장 갈망하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는데 되레 그 상황에서 도망가는 셈이죠. 은모의 그런 감정을 어떻게 이해했나요?
그 신을 찍을 때 정말 고생했어요. 원래 달아나기 전에 “형부를 잘 모르겠어요. 형부, 누구세요?” 이런 대사가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그 대사를 쓰면서 닭살이 돋아서 빼셨다고 하셨죠. (웃음) 그냥 그 신에서 이미 은모의 마음이 정리된 거 같아요. 형부 앞에서 뛰쳐나가서 거리를 걸어갈 때, 형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느끼면서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방법을 찾아낼 거야. 널 밀어낼 거야.’ 그런 단호한 다짐을 하고 있고,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다음 신에서 언니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건 ‘난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암시적 질문이기도 하고요. 나한테 말해달라면서 울부짖는데 그렇게 중식을 대하는 은모의 모습은 한편으로 초라해 보였어요. 어쩌면 중식에게 매달린 은모의 모습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컷이었던 거 같아요. 은모는 평생 중식에게 의지하면서 위만 쳐다보고 있었던 아이였고, 지금도 스물세 살이 됐지만 아직도 예전에 그렇게 살아왔던 은모를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 보이고요. 일단 9년 동안 몰랐던 중식의 감정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게 은모에겐 막상 나쁘지만은 않았을 거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게 단순히 기쁨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런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니까요. 그렇지만 형부라는 사람이 처제에게 키스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언니에 대한 배신적 행동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중식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거죠. 그런 많은 감정들이 공중전화 박스로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조금 드러나는 것 같아요. 원래 키스신에서 은모의 감정을 보다 친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지만 편집으로 잘랐어요. 수치심을 느꼈다거나 정말 이 사람을 떨쳐버리기로 마음 먹은 듯 보이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사실 <파주>가 설명적이거나 친절한 영화는 아니잖아요. 많은 분들이 상상하시기 나름이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감정들이 돋보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그 이전까진 은모 혼자 중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철저하게 감정을 숨긴 중식과 달리 은모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는 감정을 노출하니까요.
은모를 얘기할 때 의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은모는 다 알면서 듣고 있죠. 보험회사 직원이 직접 얘기해줘도 그걸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밀어내는 거 같아요. 그래서 중식을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그런 현실이 너무 미운 거에요. 그러면서 언니의 죽음을 다시 느끼게 되니까 언니 죽었을 때 얘기해달라고 말하는 거죠. 어쩌면 중식 입으로 “너 때문에 죽었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의심하는 감정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다음에도 누군가는 분명히 얘기해주지만 은모는 그걸 듣지도, 믿지도 않죠. 끝까지 은모를 그게 사실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떠나버리는 거에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미운 거에요.
끝없는 자기 부정 같은 것 말이죠. 감정을 통해 선악을 구별 짓는 건 불필요하겠지만 그로 인한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발생합니다. 결국 오해나 착오로부터 발생하는 상황들도 그로 인한 피해가 되겠죠.
제가 어제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난 건데, 은모가 중식을 그렇게 만든 건 사실 중식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닐까요? 중식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은모는 알고 있으니까요. 은모가 중식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떠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타적인 행위인 거죠.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그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게 된 행위일 뿐이고요.
유배이자 보호에 가까운 거죠. 자신의 마음에서 밀어낼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 가두는 동시에 철대위의 책임을 중식이 혼자 떠맡지 못하게 하는 기능까지 염두에 둔 행위랄까요.
철대위에서 중식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할 때, 은모는 ‘절대 그렇게 돼선 안돼.’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요. 제 가족이 너무 미워도 그 가족이 만약 경찰서에 있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은모에게 중식은 사랑하는 남자인 걸 떠나서 형부와 처제라는 가족이기도 하고요. 적합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걸 내버려둘 최은모는 아닌 거 같아요.
적은 필모그래피만으로도 나름대로 인상적인 평가를 얻고 있어요. 앞으로 예상치 못한 굴곡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은 스스로를 고무시키고 긴장시키는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런 기대들이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제가 미워요. (웃음) 스스로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을 노련하게 이겨내고 거쳐내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서우라는 사람이 묵묵히 연기를 잘 해나갈 수 있는 배우다운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한류 붐에 편승해 ‘텔레시네마7’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TV방영을 목표로 제작된 7편의 TV영화가 국내 극장에 상영된다. <내눈에 콩깍지>는 그 7편 가운데 첫 번째 주자다. 그 내용인즉,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킹카 훈남인 강태풍(강지환)이 갑작스런 차 사고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시각장애를 겪고 덕분에 미의 법칙을 거꾸로 거슬러 (영화적 주장에 의하면) 폭탄과 같은 외모를 지닌 동물잡지기자 왕소중(이지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영화들을 쥐고 흔든다면 실상 남아날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는 비약적인 안도감을 안은 채 <내눈에 콩깍지>의 설정을 받아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 인위적인 뻐드렁니를 앞니에 끼워넣고 주근깨도 좀 찍었다지만 이지아의 외모가 고스란히 보존된 왕소중을 탈레반적 폭탄 취급하는 것도 웃어넘길 수 있다. 동시에 강태풍의 제스처나 대사로부터 넘쳐흐르는 과도한 허세적 태도가 단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재미를 의도한 영화적 고의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눈에 콩깍지>는 명백하게 극장용이라 내걸고 티켓값을 요구하기엔 부끄러운 작품이다. 흥미를 자아낼 가능성이 지극히 얕은 사연이 잘게 쪼개지고 늘여뜨려진 형태로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연을 방출하는데 여간 피곤한 느낌이랄까. 단순히 3~4편 정도로 나뉘어서 방영된 형태로서 관람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2시간 동안의 장기전에서 오는 지루함은 덜했을지 모를 일이다. 전반적으로 딱히 흥미롭게 관찰될만한 사건이 부재하며 인물들의 감정적 정리는 설득력이 완벽하게 결여된 느낌이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사연은 팬시하지만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안이하다.
일시적인 시각적 장애란 소재도 딱히 설득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간과한다 해도 그 너머로부터 진전되는 감정적 갈등과 진화가 좀처럼 설득력 있는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하게 과장된 대사와 제스처조차도 그 끝에 다다라서는 그냥 손발이 오그라든다. 좀처럼 끝나야 할 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사족이 굴러다닌다. 나름대로 적정량의 역할을 충당한 배우들에게 동정심이 배어날 정도로, 게다가 순차적으로 개봉될 6편의 차기 작품에 대한 불신지옥에 빠질 정도로, 그렇다.
코끼리를 보고 싶다는 인물의 머리 위 하늘에 코끼리가 날아다닌다. 일순간 망각을 더듬어 기억을 재생하는 인물의 머리 속 두뇌 피질의 형태가 화면에 드러난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무의식적 추상을 이미지적으로 구체화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것만 같은 작품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라는 제목에 내포된 허상처럼 영화는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속박된 인물들의 공허한 심상을 끊임없이 겉돌아 나간다.
사진작가 현우(장혁)와 성형외과 전문의 민석(조동혁), 그리고 외국계 금융 전문가 진혁(이상우). 유년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세 남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확대해나가는 영화는 개별적인 사연을 진전시키는 동시에 종합적인 형태로서 사연들을 엮어나간다. 실연의 상처에 시달리는 동시에 코끼리를 찾아 헤매는 현우와 질환적 수준으로 성적 집착과 여성 편력에 빠진 민석, 그리고 12년 간 외국으로 떠났다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 사랑을 갈구하는 진혁까지, 세 남자의 사연이 평행하게 전시되듯 흘러간다. 그 와중에 남편과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연(이민정)과 불현듯 등장해 실연당한 현우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정신과 의사 장선생(황우슬혜) 등의 여성캐릭터가 세 남자의 사연에 깊게 연관되어 사건의 형태를 벌려나가기 시작한다.
시쳇말로 시크와 엣지라는 허세적 단어가 떠오를 만큼 스팽글하고 럭셔리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세 남자들은 저마다 여유로운 삶 속에서도 공허와 허무라는 사치를 떠돈다. 텍스트로 기록된 상상적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듯 직설적으로 시각화된 이미지들이 적나라하게 활용된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말 그대로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중요한 건 그 인테리어적 디자인과 이미지의 기능성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그 공들인 디자인과 이미지가 무엇을 위해 영화에서 복무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좀처럼 답을 주지 못하는 영화다. 단지 전시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강박적으로 추상(抽象)을 구상(具象)으로 변주해나가는데 치중한다.
동시에 두서 없는 145분 간의 사연은 장황함을 넘어 지난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낭비다. 물질적 욕구가 팽배한 가운데 정신적 허무에 시달리는 오늘날 젊은이의 삶을 그렸다, 라는 박제적인 문구가 떠오르는 영화의 형태는 정작 그 삶의 본질이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가라는 지표를 드러내지도 못한 채 이미지만 둥둥 띄워 스크린에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흡사 자신의 미술숙제를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유아적 욕망처럼 칭찬받고 싶어서 안달 난 느낌이랄까. 흡사 영화적 스크린이 아니라 시각디자인 전시장의 쇼윈도 너머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미지적 강박만큼이나 세 인물을 둘러싼 사연의 흐름 역시 허세로 가득하다. 뭔가 비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잡히는 알맹이는 없다.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내용적으로 지나치며, 의미적으론 모호하다. 그저 허상에 갇힌 전시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와 닿지 않는 선문답처럼 코끼리만 찾아 헤맨다.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영화와 무관하게 장자연의 얼굴이다. 대담하고 발칙한 홍보문구 따위가 낚시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육체적으로 착취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장자연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자의 감상을 숙연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유작이 돼버린 이 영화에서 그녀가 남길 이미지들은 좀처럼 안쓰러워 보는 이를 침통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때때로 그녀를 비춘 앵글을 낭비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녀의 캐릭터가 자살한 채 욕조에 몸을 누운 시퀀스에서 지나치게 그녀를 앵글에 수집해 넣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장면을 삭제할 순 없었겠지만 그 이미지가 그렇게나 자주 스크린에 잡혔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불순함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뭔가를 더 보여주고 싶은 강박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화일 뿐이란 이야기다. 그 강박이 지나치다. 그리고 지난한 사연은 질식할 만큼 길고 더디다.
결혼을 하루 앞둔 신부가 예기치 않은 죽음에 터진다. 우발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예비신부 히로코(우에노 주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체를 유기하기로 결심한다. 히로코는 평생 꼴찌로 살아왔다는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이상형과의 결혼식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시체를 트렁크에 담아 집을 나선 히로코는 그 와중에 길에서 빠친코 전단지를 돌리던 코미네(코이데 케이스케)의 차를 탈취해 산에 오르지만 자살을 희망하는 여자 고바야시(키무라 요시노)의 엉뚱한 동행을 받아들인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시종일관 엉뚱한 인물들의 등장을 통해 이야기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틀어댄다. 뮤지컬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도입부 시퀀스를 비롯해 때때로 스릴러나 호러적인 연출이 가미되는 등 다양한 장르적 형태가 순열적으로 전시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목적으로 둔 산만한 소동극이다. 새로운 삶을 꿈꾸던 여자가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비로소 성장을 맞이한다는 성장담이기도 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두 여자의 버디무비이자 캐릭터 무비이기도 하다.
두서없이 진전되는 산만한 전개와 과장된 감정을 표출하고 상황을 연출하는 캐릭터들은 고의적으로 의도된 코미디의 양식에 가깝다. 시종일관 비현실적인 태도로 일관되는 상황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 현실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품었다는 사실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방편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백치미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우에노 주리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영화적 과장마저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이해시키는 윤활유에 가깝다. 사실상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우에노 주리의 매력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낙관에 대한 강박이 지나친 영화다. 소재적으로 <달콤, 살벌한 여인>을, 캐릭터적으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앞선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사연에 현실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형식적 열거에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감정의 밀도를 채우는데 실패한 영화처럼 보인다. 감정이 탈색된 백치미적 사연의 끝에 자리한 성찰적 태도마저도 또 하나의 형식적 나열처럼 보일 뿐, 그에 앞서 전개된 사연의 총합이 이루는 결과적 에너지로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엉뚱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매 시퀀스마다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지만 저마다 파편화된 형태로 굴러가는 시퀀스들은 결과적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곧장 휘발되듯 소모된다. 결국 여정의 나열 끝에 걸리는 캐릭터의 성찰은 딱히 인상적인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할 뿐이다. 좀처럼 와 닿지 못하는 낙관의 비현실성이 마음에 걸린다. 우에노 주리를 비롯해 과장된 상황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그 과장된 상황의 연속적 나열이 부여하는 소동극이 나름의 재미를 부여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농익어야 할 성찰은 헐겁다. 백치미적인 웃음을 나열하는 것도 좋지만 낙관적 성찰마저 백치미적이라 너무 가볍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
“여기 이렇게 변한 지 오래 됐어.”들뜬 어조로 무례하면서도 심드렁하게 말을 뱉는 택시기사, 그리고 옆에 앉은 여자.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의 파주는 예전에 그녀가 자리하던 그곳이 아니다. 그건 그곳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곳에서 보낸 시절로부터 멀리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욱하게 길을 메운 안개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에 내밀한 긴장감이 차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연과 속내를 점치기 어려운 인물의 표정으로부터 호기심이 예민하게 출렁인다.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서듯 서늘한 적막을 유지하다가도 날카롭게 찌르고 거칠게 흔드는 찰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리는 작품이다.
타이틀 시퀀스 이후 플래쉬백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사를 진전시키는 <파주>에서 김중식(이선균)이 보는 TV화면에 비춰진 ‘범민족대회 연대사태’광경을 제외하면 시대적 연원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부재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명확한 연도에 대한 표기나 언급이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서사적 진행과정을 예감할 수 있는 건 과거를 지칭하는 몇 번의 서술적 자막과 대사뿐이다. <파주>는 실제적 서사의 현실적 배경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연출자의 본 의도를 떠나서) 그 형태는 마치 <파주>가 어떤 시공간에 놓여있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방치해버리는 것마냥 보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배경으로 둔 <파주>는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영화다. 심지어 서브 플롯에 가까운 철거 신은 근래 재개발 철거 문제로 참상을 빚은 용산의 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파주>가 낙후된 지방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성으로 감지되는 풍경의 특성이란 게 도시에 비해 낙후된 발전적 척도로 가늠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그만큼 영화의 외부에 놓인 세상의 변화가 부조리한 탓이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적극 활용되는 <파주>는 플롯의 서사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적 난이를 유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지 서사의 배열과 플롯의 접목을 차례대로 밟아가는 행위 자체가 불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흐름이 감정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단 되레 내밀하게 감정을 감춰둔 채 그 외면적 상황만으로 관객의 판단과 추리를 도모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까닭이다. 실질적인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크린으로 묘사되는 상황과 그 이미지와 서사적 추이를 통해 제시되는 근거만으로 조합되고 추리되는 예감과 의심은 결과적으로 <파주>가 뒤늦게 드러내고 공개하는 사연 속에서 오해와 착오로 전복된다. 오해와 착오는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에게 쌍방간의 영향력을 미치는 <파주>의 특성적 기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속내를 감춘 채 홀로 감정을 삭히다 소통의 불가해가 발생시킨 오해와 착오 속에서 사건을 엉뚱한 구석으로 밀어붙이다 과오적 찰나로 상대마저 밀어내곤 한다. 동시에 서사적 미궁을 만들어 관객의 오해를 유도하고 이를 묵살할만한 근거지를 뒤늦게 밝힘으로써 인물의 밀폐된 심리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서사적 짜임새를 절묘하게 다지며 극적 흥미를 유도한다.
<파주>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밀어붙이는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멜로적 복선을 밑바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면적 기질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해내는, 멜로로서 현격한 가치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내밀한 인물의 심리가 과거로부터 전진해 나가다 또 다른 회상으로의 이탈을 반복하곤 하는 서사적 플롯이 서서히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와 함께 첨예하게 발전해나가는 남녀의 관계는 기민한 오해와 착각을 건너 안도와 불안의 감정에 두 발을 각각 디디고 선 채 파국의 심상을 농밀하게 축적해 나간다. 지속적인 불길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외부적 지표들의 환기를 통해 인물의 서사적 전후를 끊임없이 구성해나가고 이를 통해 정보적 차단과 접근을 조율해 진실과 진심의 격차를 벌리다 이내 좁혀버린다. 단순히 은모(서우)와 김중식의 치정으로 위장됐지만, (그리고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한 뼈대이기도 하지만,) <파주>는 단순히 파격적인 멜로라 불릴만한 소재의 단순한 외벽에 단단한 서브플롯의 내면을 켜켜이 쌓아 넣으며 거대한 심상을 구축해 냈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도피 중이던 김중식을 중심에 두고 연이어지는 비극적 연애담을 통해 불길한 뉘앙스를 뻗어나가던 영화는 끝내 파국적 형태를 그려나가되 결코 비관적 선언으로서 사연을 매듭짓지 않고 진전적 여운을 남겨 둔다. 끝내 불길한 기대심리를 미세하게 벌려둔 채 시선을 거둔다. 사랑의 파괴적 본능을 대변하듯 낙관적일 수 없는 멜로적 파국을 징검다리처럼 건너던 영화는 그럼에도 그것이 끝끝내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속박임을 증명하듯 위태로운 관계를 생의 억겁처럼 끈질기게 이어내려 한다. 은밀한 응시와 묘연한 관찰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금기를 맴도는 감정적 욕망은 세상의 살풍경 속에서 연약하게 움츠리면서도 덧없이 자라난다. 금기와 욕망이라는 이중성 안에서 갈등과 불안에 휩싸이던 은모가 중식의 확신적 태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되레 그것을 밀어내는 광경은 그 상황 이전에 영화에서 제시된 사회적 단면들을 거듭 경험한 은모가 그 테두리에 대한 불안감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란 방어적 본능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주>는 단순히 감정을 교류하는 쌍방간의 감정적 진폭을 벗어나 사회적 알고리즘 안에서 개개인이 발생시키는 감정적 진동이 초래할 암묵적 파장을 면밀하게 살피고 이를 통해 사연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간다.
재개발 철거를 앞두고 이에 저항하는 철대위 주민과 이를 진압하는 용역깡패의 대립 과정을 그리는 과정에서 과감한 철거 몽타주를 동원하며 감상을 거칠게 압도하고 흔들어대기도 하는 영화는 때때로 서사의 일부를 직설적인 묘사 대신 간접적인 대사나 상황의 연결만으로 짐작하게 만드는 모호한 국면으로서 강렬한 잠상(潛像)을 심어두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파주>의 주요한 언어는 표정이자, 눈빛이고, 인물 그 자체다. 그만큼 배우들의 호연은 <파주>에서 주요한 장치이자 필수적인 여건으로 기능한다. 칼날을 잡은 것마냥 위태롭지만 그만큼 강인한 심리를 표출하는 은모 역의 서우는 인물의 중의적 표정과 눈빛을 무기로 내밀한 심리를 탁월하게 객석에 전달해낸다. 서우가 연기하는 은모가 쭈뼛하게 선 <파주>의 긴장감을 대변하는 칼 끝이라면 반대로 이선균의 김중식은 단단한 반석이다. 담담한 표정만으로 안정적인 감정으로 속내를 위장한 김중식을 대변하는 이선균은 일관된 표정과 목소리 톤으로 철저히 위장된 삶을 밀어나가다 잠재된 감정을 일거에 방출시키며 강렬한 진동을 발생시킨다. 그 밖에도 극적 감정의 중요한 매개가 되는 최은수 역의 심이영은 헌신과 열연을 통해 영화에 일조하며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조연들이 저마다 적절하게 제 역할로 영화의 토대를 이룬다.
아득하게 잠재된 감정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고, 천천히 극적 열기를 높여 감정을 데우던 영화는 그 끝에서 감정의 끓어오름을 묘사하기 보단 결코 끓어오를 수 없게 차디찬 현실과 직면한 감정적 갈등의 진화를 포착한다. 안개가 자욱한 길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던 인물이 일순간 안개가 걷힌 길 위에서 목도한 선명한 풍경에 되레 압도당하듯 미궁과도 같은 감정적 혼란 속에서 짐짓 안도하던 은모는 중식의 고백과 함께 명료해진 감정적 정리 앞에 되레 돌아선다. 파주로 돌아온 은모는 결국 파주에서 등을 돌린 채 다시 길을 나서지만 은모가 발을 딛는 곳은 더 이상 안개가 사라진 또 다른 파주일 것이다. 안개와 같이 불안정한 감정에 미혹되던 소녀는 무례하고 삭막한 세상 속에서 자라난 뒤, 선명해진 감정적 확신을 되레 뿌리치고 달아난다. 연민적 이타와 결핍적 이기로 맞붙어 자란 사랑은 결국 금기를 넘어서지 못한 채 유배되고 한편으로 보존된다. 결국 안개처럼 희뿌옇게 감정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던 남녀는 비로소 마주선 뒤에야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내달린다. ‘해서는 안 될 말’과 ‘할 수 없는 말’사이에서 방황하는 남녀에게 <파주>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광야이며 그 안에서 사랑은 속박으로 농익어 서로를 당긴다. 뜨겁게 끓어오르기 보단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적 여운이 인상적인 <파주>는 그래서 그만큼 더욱 애절하고 절실한 감정을 무겁게 침전시키는 고밀도 멜로다. 마치 안개처럼 피고 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