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그리고 집으로.” 하지만 알 사람은 안다. 그 작자가 결코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을. 홍상수의 열두 번째 장편 <북촌방향>은 어느 영화감독의 서울상경기를 그리는, 여전히 찌질한 굴레를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남자의 궁색한 일상을 그리는 또 한번의 수기다. 도돌이표처럼 되돌아가는 동선 속에서 메트로놈의 리듬처럼 반복되는 일상, 홍상수 감독은 비슷하지만 명확히 다른 대구의 거울을 통해서 거듭되는 우연의 체감을 통해서 의미를 얻어나가는 ‘생활의 발견’을 또 한번 이룬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부터 느껴지던 싸늘한 냉소가 <북촌방향>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감지된다. 여전히 제 버릇 개 못 주듯 자신의 다짐이 무색하게 일상에 치근덕거리는 남자의 일상적인 소비는 더 이상 연민이나 추억으로 언급될 수 없는 싸늘한 한기로 둘러쳐진다.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은 홍상수의 겨울영화다. 계절이 겨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고드름처럼 얼어붙은 냉소가 선명한, 북서풍 고기압성 결말, 더 이상 희희낙락하게 방관할 수 없는 그 남자들의 겨울이 예사롭지 않다.
소스라치게 놀라듯 깨어난 남자는 자신이 사막 어딘가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곧 고통을 느낀 그는 복부의 깊은 상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왼손 팔목에 정체 모를 금속 팔찌가 채워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벗겨내려 해도 소용이 없다. 깡그리 지워진 것처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말을 탄 세 남자가 그에게 접근해온다. 수작을 거는 꼴이나 행색을 보아하니 예감이 좋진 않다. 그 중 하나가 남자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다가온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을 차례로 쓰러뜨린 남자는 옷과 신발을 챙겨 입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곧 한 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웨스턴과 SF의 이종교배, <카우보이 & 에이리언>은 그 제목만으로도 흥미롭다. 웨스턴이 과거형의 장르라면 SF는 미래형의 장르다. 일단 이 영화는 말 달리는 카우보이들이 즐비한 웨스턴의 풍경 안에 그들을 사냥하는 외계인들을 삽입해 넣으며 두 장르의 이종교배를 성사시킨다. 일단 그 괴상한 풍경의 목격만으로도 흥미가 배가된다. 동시에 기억을 잃은 채 반시대적인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장착한 제이크(다니엘 크레이그)의 정체에 관한 호기심과 그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이 이루는 관계의 양상도 흥미를 자극한다.
사실 <카우보이 & 에이리언>은 웨스턴 세계에 침입한 외계인들을 몰아내는 카우보이들의 활극에 가깝다. SF는 얹혀졌을 뿐, 기본 바탕을 이루는 건 웨스턴의 세계관이다. 황야를 전전하며 외계인을 추적해 나가는 인물들의 여정 속의 황량한 풍경에는 웨스턴의 풍미가 서려있다. 특히 외계인과의 대결을 그리는 대단원은 일종의 웨스턴식 난장에 가깝다. 외계인에게 맞서는 카우보이들의 무리에 인디언들까지 합세해서 벌이는 마지막 전투 신은 SF적인 요소를 빌린 웨스턴 스타일의 패러디적인 재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악의 구분이 불분명한 수정주의 웨스턴 양식의 캐릭터들이 이루는 갈등과 화합의 여정은 의외의 경로로 이탈하기도 하지만 감정적으로 큰 무리수 없이 자신의 종착역을 향해 나아간다. 다만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의 설계 안에서 안이하다 싶은 측면이 발견된다.
영화는 관객과 대국을 벌여나가듯 진전된다. 몇 가지 의문을 포석으로 배치하고 그에 관한 흥미를 집처럼 지어나가며 감상을 붙잡아두는 것. 이와 같은 대국의 형세에서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이 깔아둔 포석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해내느냐의 문제다.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를 잊어버린 사내와 인간을 습격하고 납치해가는 외계인들의 의도, 그리고 그들을 찾아 떠나가는 이들의 여정까지, <카우보이 & 에이리언>에는 그 끝을 목격하고 싶게 만드는 떡밥들의 가능성과 이를 부추기는 요소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종종 그 의문의 해소를 위한 결정적인 순간들, 즉 스토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만한 결정적 단서들이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부여한다. 가장 명확해져야 할 순간에 되레 불명확해진다. 다리를 이루려는 이야기의 이음새들이 헐거워서 끝내 덜컹거린다.
카우보이들과 외계인들의 비행선이, 그리고 외계인들이 맞서는 대결 장면들은 그 자체로 이례적인 볼거리다. 버디 무비를 연상시키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해리슨 포드의 캐릭터 조합도 근사하다. 다만 자신이 마련한 의문의 포석들을, 이를 테면 초현실적인 근거에 기대어 모든 상황을 설명해버리는 이야기 방식은 이 영화가 품은 가능성의 일부를 해제시켜 버린다. 그럼에도 낭만을 머금고 있는 결말은 고전적인 웨스턴의 향수가 깃들어있다.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한, 그럼에도 흥미로운, 이종교배 블록버스터의 성취와 한계가 느껴진다.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스마트폰으로 ‘스머프 빌리지’를 다운로드 받은 뒤, 이를 운영하는 플레이어라고. 그런 어느 날, 당신 앞에 스머프 몇 명(?)이 나타나 갑작스럽게 당신의 삶에 침입한다면? (오래 전 TV로 보았던 그 스머프들 말고) <개구쟁이 스머프>의 발상은 그렇다.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활보하는 스머프들을 생각해보자. 쿨한가. 예고편만 보더라도 알겠지만,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속의 스머프들은 과거에 그들을 보고 자랐던 혹은 다 자란 뒤에 봤던 간에, 그 셀 애니메이션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그들이 아니다. 3D CG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됐을 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양감이 낯설다. 좋다. 변한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변화의 필요성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단점들을 나열하는 건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리의 조악함을 설명하기 전에 언급돼야 할 것은 이 영화의 탄생배경에 있을 것이다. 실제와 분리된 자신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스머프들을 굳이 뉴욕으로 끌어낸 건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이 스머프라는 캐릭터의 상품성을 높게 산 덕분일 것이다. 스머프를 뉴욕으로 끌어내자는 아이디어의 유무보다도 중요했던 건 결국 그 계획의 실행을 위한 제작자들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디어를 완수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계발되고 그 결과가 지금의 결과로 이어졌다. 스머프 탄생 53주년 기념은 이를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만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앞서 나열한 것처럼,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는 현재 이 작품의 상태로 보건대, 이런 방식의 제작 과정을 짐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작품이다. 단지 이 캐릭터들의 시장성만을 염두에 둔 스토리 개발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 난관이었을지, 시나리오 작가들의 노고가 눈에 선하다. 기본적으로 단순한 스토리지만 순진하다기 보단 유치하고, 선하다기 보단 둔감해 보인다. 보다 중요한 건 이 작품이 <개구쟁이 스머프>란 것이다. 스머프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보고 자란 관객들에게 이 영화 속의 스머프들이란 낯설고 어색한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매력이 부재하다. 내가 알던 그 파란 피부와도 다를 뿐더라, 내가 알던 그 이름의 캐릭터 같지도 않다. 벨벳 재질의 스머프 탈을 쓰고 그들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생물을 보는 것만 같다. 심지어 그들이 뉴욕의, 사실은 현대문명의 이기에 심취해서 쇼를 벌일 때, 안쓰럽다 못해서 혐오스럽다는 인상마저 든다.
적어도 양감을 얻은 CG 스머프들의 오리지널인 셀 애니메이션을 체험한 바 없는 요즘의 어린 관객들에게 이런 단점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영화가 어떤 수준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가조차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고로 이 리뷰도 그들을 대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속의 스머프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던 당신의 기억 속의 그 스머프들이 아니다. 차라리 실사로 연기한 가가멜과 CG로 만들어낸 아즈라이가 되레 그 만화와 실사의 엄격한 간극 아래서 아이러니하게 보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결국 이 스머프들이 대체 왜 뉴욕을 활보하고 있는 것인지 당최 모르겠다고생이 많다. 쿨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것을, 어쩌겠나. 스크린 너머 스머프들이 정말 ‘스머프’하지 않은 것을. 코스프레 하느라 고생이 많아 보이는 것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해안 관광지 코파카바나, <코파카바나>에서는 그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코파카바나를 사랑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소녀처럼 해맑은 성격을 지닌 그녀는 좀처럼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산만함과 무책임함으로 주변인들에게 본의 아닌 민폐를 끼치는 통에 딸 에스메랄다(롤리타 샤마)의 결혼식조차 참석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자신을 처량하게 만드는 가난을 극복하고,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혼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벨기에에서 콘도 이용권을 파는 영업직 사원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 엘리자베스, 그러나 스스로 바부(이자벨 위페르)라고 지칭하는 그녀는 그렇게 뒤늦은 독립을 꾀한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는 가난한 싱글맘인 바부는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어른다운 성숙한 일상을 꾸리지 못하는 여인이다. <코파카바나>는 어쩌면 한 여인의 삶을 비추는 성장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물을 고난의 린치로 몰아가며 성장을 강요하거나 그런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인물의 일상적인 변화를 쫓으며 사건들에 주목하지만 그 사건들은 인물의 심리를 쉽사리 바꾸지 못한다. 바부가 꿈꾸는 여유로운 이상향 코파카바나처럼 이 영화는 쉽게 꺾이는 인물의 의지와 심리적 변화를 삶의 성찰로 연계시키는 여느 성장드라마들과 달리 스스로의 방식으로서 삶을 돌파해나가는 한 여인의 낙관을 지지한다. 물론 이는 무책임한 방관이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아나가던 여인이 역시 스스로 선택한 자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아이러니를 깨닫게 만든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낙관으로 삶에 올인하는 그녀가 이를 통해 삶을 역전시키는 과정은 다소 극화된 아이러니이지만 되레 통쾌하다. 완전한 기회를 쥔 상태에서도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꾸릴 줄 모르는 여인의 삶을 지켜본다는 건 아슬아슬한 일이지만 영화는 그녀의 선의를 관객에게 노출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진심을 성의껏 관찰함으로써 그녀의 삶을 응원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가 겪어나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매끄러운 서사에 녹여냄으로써 거부감 없는 감상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도 이런 감상을 가능케 만드는 건 바부를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다. 다소 과장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한 여유를 안고 극을 걸어나가는 그녀는 때때로 나이를 잊은 듯 발랄하면서도 오랜 경험에 기반한 관록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듯 바부를 연기한다. 냉정과 격정 사이에서 감정적인 기복이 큰 캐릭터를 연기해온 누벨바그 여신 이자르 위페르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들지만 씩씩하고 낙천적으로 삶 위로 부유하듯 살아가는 여인을 연기해내는 <코파카바나>에서의 그녀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자벨 위페르의 존재감은 <코파카바나>를 완성하는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자벨 위페르의 관록은, <코파카바나>의 낙관은, 정처 없는 삶에 작은 위로를 얹는다. 케세라세라, 어떤 식으로든 삶은 그리 향하기 마련이다. 당신의 꿈이 오롯이 놓여 있는 그곳으로.
어느 기차 속에서 잠을 자듯 창에 기대어 있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난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여자는 일행인 듯 친근하게 그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할)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는 자신이 거기에 왜 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누구인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곧 끔찍한 찰나를 경험한 남자는 반복되는 8분 간의 동일한 경험을 거듭하며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며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정보가 저장된 파일을 의미하는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에 대비시킨 듯한 작품이다.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 속에 보관된, 다시 말하자면 백업된 8분 간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 기억에 담긴 정보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서 8분은 보관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량이며 이를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영화는 고난도의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과학의 힘을 통해서 죽은 이의 두뇌에 보관된 기억 속에 삽입되어 8분간 재현되는 그 과거 속에서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소스 코드>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인물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중요한 건 <소스 코드>가 전자들처럼 시공간에 관한 특별한 발상을 설득력 있게 포장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시간여행 이론에 가까운 <소스 코드>의 시공간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양태를 하나의 의식적 세계로 확장해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이론적이나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사실 타인이 경험했던 1인칭 시점의 과거로 잠입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둔 시점을 대신 시뮬레이션하고, 그 기억이 펼쳐진 모든 환경들을 롤플레잉으로 운용한다는 영화적 설정에는 분명 의심할 만한 오류가 잠재돼 있다. 이를테면 경험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시공간의 영역까지 대체자가 대신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렇다. 하지만 <소스 코드>는 이런 설정의 무리수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릴 만한 매력적인 자질이 농후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적 설정은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초자연적 과학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험과 함께 재난과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장르적 묘미를 전달한다. 반복되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묘미는 시공간의 한계를 되레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구축되고 있다는 매력으로 승화됐다. <소스 코드>의 시간여행 원리는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복사하는 복제의 특성에 가깝지만 이를 자가적으로 진화시키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복제 자아가 진짜 자아의 꿈을 대신 실현해내듯 복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리얼리티 속에서 삶을 회복시키는 인물의 태도, 이는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가상을 추구한다는 리얼리즘의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셉션>의 팽이가 멈추었는가, 를 두고 벌어지는 분분한 의견에 대한 진보적인 결론처럼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자질의 성과는 바로 ‘시공간의 새로운 지배자’, 던칸 존스라는 이름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 일명 적그리스도, 이 불경한 언어를 제목으로 내건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불순한 기운이 그득하다. <파리넬리>를 통해서 유명해진, 바로크 작곡가 프레데릭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2막에서 등장하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도입부는 강렬한 성애에 빠진 두 남녀의 섹스를 유려한 고속촬영의 방식으로 포착한 뒤, 투명한 흑백의 색감으로 포장해낸다. 그 욕망이 절정의 쾌락으로 분열되는 오르가슴의 찰나를 공유한 부부는 동시간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삶의 균열로 빠져든다. 극렬한 성욕 속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을 방치하게 된 부부의 일상은 점차 우울과 무기력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광기로 침전돼 간다.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4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영화의 서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밑천으로 삼아 점차 흉악한 분위기로 발전돼 나간다.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점차 비이성적인 광기로 뻗어나가는 아내(샬롯 갱스부르)의 행위와 이를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남편(윌렘 대포)의 관계는 행위자와 관찰자의 단계를 넘어 가학과 피학의 상대자로 진화한다. 이는 성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상대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희열을 느끼는 새디즘과 매조히즘의 대비적인 양상까지 맞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학과 피학의 대비적 상징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이성적인 (척 하지만 실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남성과 비이성적인 광기로 물들어가는 여성의 대비를 통해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은유로 가 닿는다.
‘자연은 악마의 교회’라 일컫는 <안티크라이스트>는 종교모독이라는 주제를 건드릴만한 요소로 치장돼 있으나 이를 단순히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겨냥이라 국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신앙에 가까운 인간의 이성적 신념이 무지한 광기로 변질되는 과정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자 상징과 은유를 동원한 독설에 가깝다. 11세기 중세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 시절의 광기 어린 역사를 배경으로 둔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가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성을 무기로 둔 한 남성이 피라미드를 그려나가며 여성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악마적인 본성과 연결해나가는 과정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둘러싼 광기의 매커니즘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의 기득권으로 무장한 사회 전반에 대한 공격적인 은유처럼 보인다. 특히 에필로그로 명명된 엔딩 시퀀스는 이런 영화적 메타포를 블랙코미디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포르노 배우를 대역으로 삼아 촬영했다는) 성기 노출과 삽입 신을 비롯해서 (언론시사회에서는 공개됐지만 정식 상영본에서는 삭제된다는) 여성의 성기 절단을 비롯한 극악한 신체 훼손 신 등, 당신의 자극적 역치를 시험에 들게 할만한 몇몇 장면이 존재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단순히 극악무도한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라 폄하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성의 껍데기가 벗겨진 채 쾌락과 생존이라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남겨진 남녀의 끔찍한 양상을 묘사하는 과정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힘의 본질과 이성적 무기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적 행위를 비롯한 폭력의 상응까지, 극단적인 광기와 함께 가학과 피학의 매커니즘에 갇힌 남녀의 양태를 묘사하는 영화는 문명과 이성이라는 제어로부터 발가벗겨진 인간의 본질이 이토록 손쉽게 파괴될 수 있는 나약한 것임을 강렬하게 조명한다. 광기란 결국 순수한 극단의 소산이다. 정이든, 반이든, 가학과 피학은 어떤 식으로든 합의 광기로 통하게 돼있다. 그것이, 아니, 그것도 결국 인간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학생들이 모인 교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독백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일인칭 시점의 서술로 일관되는 소설의 구어체는 유코의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소설의 화법은 사건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부하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단지 교훈적인 메시지에 접근하기 보다는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목적에 충실한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다섯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의 양상을 중계하며 결말부를 제외하면 내러티브의 흐름 또한 동일하다. 하지만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는 건조한 톤의 문체로 일관된 원작과 다른 범위의 감상적 접근을 유도한다. 영화는 보다 인위적인 연출적 과장이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미끈하게 정돈된 이미지가 유려하게 흐르는 <고백>의 영상은 유코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진실에 다다라 비로소 그것이 이 영화의 분위기와 이질적인 포장에 가까운 결과물이자 위장에 가까운 고의적 연출이라는 진실에 접근한다.
활기찬 교실의 풍경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침전돼 있다는 사실은 곧 그 교실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지고, 그 모든 과정은 세련된 영상으로 포장된다. 이는 일종의 위장이다. 진실을 폭탄처럼 안고 있는 아이들은 그 불안감 속에 스스로 잠식되고 도피하듯 공격성을 발휘하다 이내 쉽게 폭발의 위협에 꺾이고 만다. 이는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공격성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을 겪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평온한 외형에 대한 은유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작은 괴물들이 자라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삶을 유린한 뒤,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의 룰을 완성한다. <고백>은 이 모든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한 학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압축하고 확대해나간다. 그리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으로 구현해낸다.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영상이 감상의 흐름을 막아서는 경우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 냉소적인 영화는 결국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말해도 좋은 결과물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의 지옥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기준조차 깨닫지 못한 악마로 길들여지고, 또 다른 지옥을 함께 만들어간다. <고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동시에 결코 낯설지 않은, 소름 끼치는 경고이자 진단이다. 당신의 아이는 안전한가? 그 전에 당신은 안전한 사람인가? 스스로 장담할 수 있는가?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당신의 무관심까지 집어삼킬 게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포트스미스라는 마을에 매티 로스(헤일리 스타인펠드)라는 소녀가 나타났다. 같은 날 마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당일이 범죄자 세 명의 사형집행일이었던 까닭이다. 어쨌든 소녀가 그 마을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말을 사기 위해 포트스미스를 방문한 아버지와 동행한 하인 탐 채니(조쉬 브롤린)가 아버지를 죽이고 주머니의 금화를 들고 인디언 구역으로 달아나버린 것. 영민한 소녀 매티는 그의 뒤를 쫓을 동행자를 고용하기로 결정하고 그 중 거칠기로 악명 높이만 검거율이 대단한 연방보안관 카그번(제프 브리지스)에게 접근한다. 그 와중에 탐 채니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의 행적을 뒤좇던 텍사스 레인저 라 뷔프(맷 데이먼)가 그들 주변에 나타난다. 이로서 세 사람의 추적이 시작된다.
존 웨인의 서부극으로 잘 알려진 헨리 해서웨이의 연출작 <진정한 용기>를 리메이크하며 화제가 된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는 (국내 수입사에서 가져다 붙인 서로 다른 개봉명과 무관하게) 동명의 원제를 지닌 두 작품의 기원이 된 웨스턴 소설의 대가 찰스 포티스의 <트루 그릿 True Grit>을 영화화한 각색물로서도 높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는 포티스의 원작과 달리 후일담에 가까운 매티의 1인칭 내레이션을 걷어내고 존 웨인이 연기한 카그번의 캐릭터를 묘사하는데 주력한 영웅주의 서부극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매티의 내레이션을 복원하며 극의 흐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동시에 보다 능동적으로 극적 흐름을 유추하게 만드는 감상자의 역할을 생성시킨다. 극적 발단이 되는 인과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을 걷어내고 인물의 대사와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건의 격발지점을 예측하게 만든다. 이는 보다 많은 서사적 예상과 캐릭터적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다.
카그번을 연기하는 존 웨인과 제프 브리지스의 이미지만으로도 <진정한 용기>와 <더 브레이브>의 차이는 손쉽게 발견된다. 거친 주정뱅이이자 난폭한 총잡이인 카그번이라는 인물은 지저분하고 게으른 이미지가 농후한 <더 브레이브>의 제프 브리지스가 깔끔하게 정리된 인상이 느껴지는 <진정한 용기>의 존 웨인보다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감상을 부른다. 극적인 상황에 따라 연기력의 격차가 짙게 발견되는 <진정한 용기> 속 캐릭터들보다도 <더 브레이브>의 캐릭터들은 뛰어난 상황 몰입으로 실제적인 연기에 접근해 낸다. 동시에 <진정한 용기>와 달리 <더 브레이브>는 원작의 텍스트를 통해 예견되는 황량한 풍경으로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코엔 형제가 연출한 이미지들은 어린 소녀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좇아 연방보안관을 고용하고 추적에 나선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흥미진진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특히 결말부의 태도는 두 작품의 대조적인 관점을 녹록히 드러내는 결정적인 한 수나 다름없다. 보다 낙관적이고 경쾌한 엔딩으로 마무리된 <진정한 용기>의 감상적 태도와 달리 <더 브레이브>는 보다 냉정한 시선으로 목표에 다다른 인물들의 관계적 결말에서 황량하고 건조한 회상의 양식으로 갈무리한다. 이는 해서웨이의 영화가 훼손시킨 포티스의 원작이 지닌 세계관을 복원해낸 결과물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다양한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면서도 직관적인 시선과 냉소적인 위트로 세상을 관조하는 코엔 형제의 세계관은 <더 브레이브>에서도 유효하다. 낭만주의 웨스턴과 수정주의 웨스턴의 길목에 위치한 원작의 관점은 사실적인 관점과 냉소적인 위트로서 현상을 직시하는 코엔 형제의 시선을 통해 또 한번 새롭게 거듭났다. 소품에 가까운,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의 연출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코엔 형제는 <파고>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냉정한 태도로 세상을 직관해내는 스릴러물을 통해 품격 있는 걸작들을 만들어 내곤 했다. 물론 <더 브레이브>가 코엔 형제가 만들어낸 필모그래피 속에서 상대적으로 걸작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코엔 형제의 냉소적인 시선이 견지된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라는 이름 안에서 가능한 영화적 품위가 담긴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기억될만한 작품이다.
웨스턴 복수극이라는 평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더 브레이브>는 그 사건 속에 놓인 인물들의 입체적인 성격을 통해 극적 전개에 대한 흥미를 높인다. 서술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자 사건의 기준이 되는 매티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다부진 면모를 드러내며 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낸다. 동시에 나태하고 독설적이지만 정의적인 위엄을 지닌 카그번과 소심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나 인정이 깊은 라 뷔프의 동행은 다양한 갈등과 충돌을 빚으며 평면적인 극의 흐름에 흥미로운 에너지를 부여한다. 서부 개척 시대 웨스턴의 풍경을 넓게 조망하면서도 인물들의 성격을 세심하게 조명하는 <더 브레이브>는 세계관의 너른 풍경 속에서 깊은 인간적 체온을 발췌해낸다. 포티스의 원작이나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를 접한 이들에게도 영화의 이런 입체적인 면모는 흥미를 끌만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리메이크와 소설의 영화화라는 형식적 의미를 뛰어넘는 영화적 성취이자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코엔 형제의 장인적인 면모에 대한 재확인으로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더 브레이브>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총망라된 동시에 그들의 빼어난 연기가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작품이란 점에서 감탄을 부르는 영화다. 똑똑하고 야무진 매티 로스를 연기하는 헤일리 스타인펠드는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캐스팅에 가깝다. 소심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라 뷔프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지난 캐릭터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나 보다 능숙한 연기적 방식으로서 극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는 <더 브레이브>의 완성도에 일조한 하나의 영화적 특성이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다. 존 웨인의 말쑥함과 달리 지저분한 행색의 제프 브리지스는 극적인 사실성을 더하는 동시에 보다 중후한 위엄을 갖추며 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데 혁혁한 공헌을 해낸다. <더 브레이브>가 코엔 형제의 영화가 아닌 제프 브리지스의 영화로 불려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잠언 28장 1절을 인용하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극의 마무리까지, 중후한 세계관의 중량감을 유지하면서도 감각적인 리듬감을 통해 신을 열고 닫으며 극적인 흥미를 자아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더 브레이브>는 이미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코엔 형제가 일정한 영화적 성취를 완수해내는 장인의 궤도로 들어섰음을 확신하게 만드는 인장과 같다. 동시에 이 작품은 역시 장인이라 불려도 좋을 명배우의 중대한 일조를 통해 빚어낸 웨스턴의 위엄이란 점에서 보다 고무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만희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의 김태용 감독 버전은 전작들이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란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차별적인 리메이크 영화라 할 수 있다. 시애틀에서 만난 동양의 남녀는 마치 유령처럼 관계 속에 파묻힌 채 말을 걸고, 우연히 재회한 뒤, 애틋한 감정의 교류를 느끼기 시작한다. 대사 한마디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에 다가서며 스산한 감상을 일깨우는 인상적인 도입부부터 적막한 풍경 속에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부까지,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이 증발된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그 너머에 다다라서야 피어 오른 애수를 절감하게 만드는 멜로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든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빨갛게 피어 오른 단풍이 곧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과 같이,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인상적인 멜로다.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은 과하다. 오글거리는 대사나 간지러운 표정 연기도 숱하게 나온다. <글러브>는 꽤나 올드한 영화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눈길을 끈다. 장애를 극복하는 스포츠영화라는, 이미 닳고 닳은 영화적 양상을 직구로 관통한다. 정재영은 때때로 과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이 영화의 감정에 진심의 무게를 얹어 내며 구원투수 노릇을 한다.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맥 빠진 중심타선을 보는 느낌이지만 홈런은 아니더라도 진루타는 쳐내는 드라마가 대타 노릇을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