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그래, 네가 보고 싶은 게 이런 거지?’란 식으로 시작해서 결국 ‘자, 이래도 네가 보고 싶은 게 맞아?’란 식으로 끝난다. 그리고 결론은 결국 다음 기회로. 어쨌든 지난 ‘서’와 ‘파’가 <에반게리온>을 리빌딩한다는 목표 안에서 기존 세계관을 분리하고 재배열하는 작업이었다면 <에반게리온:Q>는 새로운 리빌딩 소스를 장착하는 작업에 가깝다. 다만 기존의 세계관 말미에서 드러났던 안도 히데아키의 분열과 자폐 증세는 막바지로 치닫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다만 기존 시리즈와 같이 자폭으로 치닫기 보단 확실한 이미지로서 세계관의 종말 혹은 구원을 그려내겠다는 완결적인 의지가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메카닉 떡밥을 줄줄이 날려대면서도 소통의 벽을 쌓은 팬덤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도 엿보인다. 기본 작품과의 궤에서 대단히 벗어나고 있음에도 평행우주와 같은 맥락임을 주장하고 싶게 만들 떡밥도 대거 등장한다. 기존 작품의 세계관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 세계관의 관성을 고스란히 품었다. 어쩌면 이번 리빌딩 시리즈에 대한 안도 히데아키의 의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Q는 Quickening, ‘되살아나게 하는’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안도 히데아키의 ‘완결보완계획’은 성사될 수 있을까. 결말편이라 알려진 <에반게리온: | |>를기다리는수밖에. 그놈의, 서비스! 서비스!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상대적으로 뼈를 드러내며 시작하는 원작의 서사가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서사의 축약을 위해 순행으로 전개를 수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공할 떡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원작에 비해서 사유화되는 인상인데, 이를 테면 원작은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 발화가 서로에 대한 견제와 의식을 통해서 발전되는 인상인 만면, 영화는 그것이 단순히 나이가 다른 수컷들의 롤리타적 욕망으로 제한하듯 그려진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핵심이 떨어져나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적요 역할의 박해일은 열심히 했다. 톤이 나쁘지도 않다. 다만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게 들리는 성대 묘사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김무열의 서지우는 감정을 좀 절제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점과 무관하게 신인 배우 김고은은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신인배우의 출연이란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모티프로 제작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속편임을 자처하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2: 신비의 섬> 역시 쥘 베른의 세계관을 토대로 영화적 세계관을 구상했다. <신비의 섬>이 그것. 그리고 <신비의 섬>의 프리퀄에 가까운 <해저 2만리>도 일부 차용됐다. 심지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도 영화적 아이디어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작이 그러했듯이 속편 역시 이 모든 문학적 텍스트를 충실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기 보단 쥘 베른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 차용된 고전들의 세계관을 방아쇠로 삼아 3D 롤러코스터를 쏘아 올리는 작품에 가깝다.
전작에서 출연했던 캐릭터의 등장을 통해서 시리즈로서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시리즈라는 정체성은 딱히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일단 전작에서 지질학자 삼촌과 함께 우연히 지구 속 여행을 떠났던 숀(조쉬 허처슨)은 조금 더 성장했고, 그는 현재 새로운 아버지 행크(드웨인 존슨)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내진 모종의 신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숀은 그것이 모스 부호임을 알아챈 행크의 도움으로 그 신호가 오래 전 실종된 할아버지(마이클 케인)로부터 왔으며 할아버지가 신비의 섬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저 쥘 베른의 세계관을 코스프레한, 할리우드발 3D 롤러코스터다. 쥘 베른 소설의 행간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쥘 베른의 상상력을 테마파크 디자인 용도로 활용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차용한 고전의 제목들은 사실상 잊어도 무방할 정도다. 그만큼 영화에서 언급할 만한 건 3D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롤러코스터 비주얼인데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즐길만한 수준의 볼거리는 된다 말할만하다. 거대한 도마뱀의 추격신이나 거대한 꿀벌의 비행신 등, 3D 롤러코스터로서 최적화된 재미를 갖춘 신들이 종종 등장하며 눈요기를 채운다.
각본은 치밀하지 못하나 영화는 딱히 이런 요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관객 역시 이성적인 관람 자체에 대한 욕망을 버릴 때 편해질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저 영화의 가이드에 따라서 스크린에 구현되는 테마파크 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용도로서 이해할 때 편한 영화랄까. 이는 결국 3D 롤러코스터적 체험에 흥미가 없다면 호기심은 일찌감치 접는 편이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오락적 스케일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상상력은 공룡 두뇌만큼 빈곤하다. <달나라 탐험>을 제시하는 예고적인 결말 역시 무리수처럼 보인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이는 미끄러지면서 버티는 재주를 용하게 터득한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한국의 근대사를 헤쳐오며 오늘날 일가를 이룬 한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생을 조명하는 영화다.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고, 블랙코미디의 리듬을 타면서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의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의 시대적 묘사가 탁월한 가운데,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낸다. 특히 영화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최민식의 가공할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서도 종종 그 리듬을 중심축으로 세워 넣고 긴장을 불어넣는 하정우의 존재감도 근사하다.
울창한 숲과 높은 돌담 속에 자리한 저택의 한 방에서 타이즈 차림으로 감금되듯 살아가는 여인 베라(엘레나 아라야)는 세계적인 성형외과 의사로서 인공피부 개발에 전념하는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실험대상이다. 하지만 베라의 일상을 매일 같이 모니터하는 로버트의 시선에서는 실험적 욕망과 다른 관음적 태도가 엿보인다. 사실 그는 아내와 사별했고, 딸과 함께 살 수가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 이런 결과들이 그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이 불편한 동거 상황은 로버트의 모친인 마릴리아(마리사 파데레스)의 도움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아들 세카(로베르토 알라모)의 등장과 함께 파국을 경험한 뒤, 새로운 관계 국면을 맞게 된다.
<내가 사는 피부>는 티에르 종케의 <독거미>를 각색한 작품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유일하게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피부>는 알모도바르의 작품들에 익숙한 관객의 입장에서도 지극히 이질적인 결과물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마치 연극적인 무대장치처럼 고안된 저택 안에서 관음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주변인으로 자리하는 관계 구도의 작위성, 이 모든 영화적 모티프들은 인공적으로 구조화됐으며 스스로 그런 특성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세 챕터로 나뉜 <독거미>는 냉소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시제의 단절과 관계에 대한 착시를 감행하며 감상적 충격을 야기시킨다. 캐릭터의 세밀한 사연을 해부해서 재조립하듯 마련된 영화의 각본은 소설과 유사한 이야기 흐름을 지니고 있지만 다양한 장르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인위적인 인상을 더욱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사실 <내가 사는 피부>는 알모도바르의 소품처럼 보인다. 일단 그의 영화라는 점에서 <내가 사는 피부>의 인위적인 디자인 양식은 대단히 생경하게 느껴지는데, 영화를 채운 이미지와 캐릭터, 스토리텔링까지 이 모든 영화적 조건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놓여있음을 노골적으로 피력하듯 보일 정도다. 동시에 이런 갖은 요소들이 저마다 파편처럼 영화 속에 자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탓에 간혹 영화 자체의 집중력이 흐려진다는 인상이 나타난다. 전체적인 하나의 인상을 완성해나간다기 보단 퍼즐의 조각을 제각각 살펴보는 것과 같이 감상이 흩어진다. 하지만 이런 인공적인 인상이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감상으로 귀결되며 영화적 호기심을 부추기고, 미스터리를 짙게 드리우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때때로 불필요한 정보를 구술하고 있거나 그 정보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는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신이 발견되기도 한다.
<독거미>와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피부> 역시 복수극의 플롯을 완성하고 있는데 초중반까지의 모호한 미스터리가 그 이후의 플래시백과 맞붙어 인과를 이룰 때, 영화의 잠재된 서스펜스가 극대화된다. 사실 이야기의 흐름 자체도 완전한 인과의 합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은 아니지만 결말부에 다다라 증강되는 서스펜스는 확실하게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그 역할을 해낸다. 궁극적으로 <내가 사는 피부>는 징벌과 속죄라는 표면적 상황을 통해서 가학과 피학의 욕망을 표현하는 자품처럼 보이는데 알모도바르 특유의 관음적인 페티시는 이런 추측을 보다 가능성 있는 해석이라 단정짓게 만드는 단서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사는 피부>는 영화적 결과의 일부를 찬찬히 뜯어놓고 봤을 때, 알모도바르의 지난 영화들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총합적인 측면에서 특유의 매력을 품은 작품이라 이해될 만큼 돌연변이 같은, 소품의 경력이다.
<땡땡의 모험>을 잘 몰라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즐기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퍼포먼스 캡처를 동원한 <틴틴>은 원작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를 얻어냈다. 언캐니 밸리의 한계가 간혹 목격되긴 하나, <틴틴>은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영역의 현실화와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가를 드러내는 현재의 척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틴틴>의 오락적 완성도 또한 탁월하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대가의 만남이란 카피가 단순한 홍보용 문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리즈로서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람 후,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기대치가 불필요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 틴틴 없이는 스노위도 없다.
1960년대 미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과 백인의 빈부 격차는 그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구분 짓는 주요한 잣대 노릇을 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며 인종 간의 갈등이 야기됐다. 특히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의 위상이란 백인 가정을 위해 제공되는 값싼 노동력에 가까웠다. 유년시절부터 흑인 가정부의 손에 길러진 미시시피의 백인 아이들은 자라난 뒤, 되레 그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 표면적인 계급적 구별이 사라졌을 뿐,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는 광폭한 차별의 한가운데서 폭력을 체감하면서도 묵묵히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아온 미시시피 흑인 가정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원작자와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테이트 테일러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헬프>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에 약간에 손질을 가미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각색의 묘를 살렸다. 할리우드의 다양한 신구 여배우들이 주를 이룬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일상의 풍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당대 미시시피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가 지닌 진지한 문제의식을 관객의 감상에 드라마틱하게 녹여낸다. 마치 21세기 버전의 <컬러 퍼플>이라 할 수 있는 <헬프>는 보다 경쾌하지만 역시 강건하게 그 세계의 부조리를 응시하게 만든다. 스크린은 어느 야만적인 시대를 중계하는 창과 같고, 그 너머에서 저마다 제 삶을 살아나가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뚜렷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영화는 보다 명확해진다.
<헬프>는 지난 시대의 부조리를 반추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종의 벽을 넘어서 소통한 어떤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자립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종착된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웅변이 아닌, 그 약자들이 자신의 진짜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과정을 뚝심 있고 사려 깊게 살핀다. 동시에 <헬프>는 용기에 관한 영화다. 용기란 것이 막강한 힘의 산물인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쥘 수 있는 것이 그 용기라는 아이러니를 절실히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는 차별에 관한 영화다. <헬프>는 차별을 그리되, 차별을 웅변하지 않는다. 백인 가정에서 불합리한 처사를 견뎌내야 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사랑 받지 못하는 백인 아이들을 진심으로 끌어안는 광경 속에서 느껴지는 건 흑백의 구분이 아닌 체온의 공감이다. 눈물샘보다도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따뜻하게 끓는다. 유연하고 강인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