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임파서블>은 분명 톰 크루즈의 영화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도 온 몸을 던지는 톰 크루즈의 열연이 큰 몫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팀원 누구도 이단 헌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으며 자신의 임무를 소화해낸다. 액션 시퀀스는 인크레더블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음에도 꼼꼼한 디테일을 잊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우월한 퀄리티의 디자인을 뽐낸다. 예고편에서도 자랑했던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의 빌딩 등반 시퀀스를 비롯해서 장관에 가까운 액션 시퀀스가 네 번 정도 등장하는데, 저마다 장관의 볼거리다. 기존 시리즈의 냉기 서린 분위기를 기대하던 팬의 입장에서는 러닝타임 곳곳에 깨알 같이 자리한 위트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사이몬 페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듯한데, 긴박함과 장난끼가 어우러진 액션 시퀀스를 보자면 브래드 버드의 ‘픽사’적인 마인드도 일조한 것 같다. 시리즈의 전환점에 가까운, 위력적인 볼거리와 캐릭터의 매력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땡땡의 모험>을 잘 몰라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즐기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퍼포먼스 캡처를 동원한 <틴틴>은 원작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를 얻어냈다. 언캐니 밸리의 한계가 간혹 목격되긴 하나, <틴틴>은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영역의 현실화와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가를 드러내는 현재의 척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틴틴>의 오락적 완성도 또한 탁월하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대가의 만남이란 카피가 단순한 홍보용 문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리즈로서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람 후,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기대치가 불필요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 틴틴 없이는 스노위도 없다.
1960년대 미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과 백인의 빈부 격차는 그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구분 짓는 주요한 잣대 노릇을 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며 인종 간의 갈등이 야기됐다. 특히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의 위상이란 백인 가정을 위해 제공되는 값싼 노동력에 가까웠다. 유년시절부터 흑인 가정부의 손에 길러진 미시시피의 백인 아이들은 자라난 뒤, 되레 그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 표면적인 계급적 구별이 사라졌을 뿐,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는 광폭한 차별의 한가운데서 폭력을 체감하면서도 묵묵히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아온 미시시피 흑인 가정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원작자와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테이트 테일러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헬프>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에 약간에 손질을 가미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각색의 묘를 살렸다. 할리우드의 다양한 신구 여배우들이 주를 이룬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일상의 풍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당대 미시시피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가 지닌 진지한 문제의식을 관객의 감상에 드라마틱하게 녹여낸다. 마치 21세기 버전의 <컬러 퍼플>이라 할 수 있는 <헬프>는 보다 경쾌하지만 역시 강건하게 그 세계의 부조리를 응시하게 만든다. 스크린은 어느 야만적인 시대를 중계하는 창과 같고, 그 너머에서 저마다 제 삶을 살아나가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뚜렷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영화는 보다 명확해진다.
<헬프>는 지난 시대의 부조리를 반추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종의 벽을 넘어서 소통한 어떤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자립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종착된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웅변이 아닌, 그 약자들이 자신의 진짜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과정을 뚝심 있고 사려 깊게 살핀다. 동시에 <헬프>는 용기에 관한 영화다. 용기란 것이 막강한 힘의 산물인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쥘 수 있는 것이 그 용기라는 아이러니를 절실히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는 차별에 관한 영화다. <헬프>는 차별을 그리되, 차별을 웅변하지 않는다. 백인 가정에서 불합리한 처사를 견뎌내야 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사랑 받지 못하는 백인 아이들을 진심으로 끌어안는 광경 속에서 느껴지는 건 흑백의 구분이 아닌 체온의 공감이다. 눈물샘보다도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따뜻하게 끓는다. 유연하고 강인한 수작이다.
(조금 의외였지만) 예상과 달리 <커플즈>는 단도직입적인 로맨틱코미디는 아니다. 가이 리치 식의 내러티브, 주자 1루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히트 앤 런을 걸었는데 타자의 헛스윙으로 뛰던 주자가 죽을 마당에 포수의 포구 실수로 낫아웃 상황이 됐으나 포수가 재빨리 던진 공이 2루수의 실책으로 외야로 빠져 나가는 바람에 주자가 살다 못해 3루까지 냅다 뛰는데 달려나오던 중견수의 호수비로 3루에서 주자가 태그 아웃됐지만 낫아웃 상황에 1루로 달린 주자가 2루까지 진루한 상황, 즉 의도에서 벗어난 우여곡절이 산으로 가면서도 여영부영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엉망진창의 상황을 계산해내는 능력이 볼만하다. 물론 가이 리치 드립은 약간의 과장이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상 밖의 옴니버스 구조 속의 접점 설계가 꽤 그럴싸하여 흥미롭다. 다만 때때로 지나치게 의도적이라고 광고를 하는 찰나가 있어서 미약하게 흥미를 반감시키는 순간도 존재하며 때때로 현실성이 떨어져 리얼리티가 죽는 광경도 목격되지만, 분명 자신의 특별한 화술을 장점으로 어필할 줄 아는 로맨틱 코미디. 다만 볼때마다 속 터지는 남자 주인공은 그냥 그러려니 하시라.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는 가난한 가장이다. 그는 마약 거래와 밀입국자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브로커로 삶을 꾸려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은 그렇게 흘러 넘어왔다. 그에게는 남다른 능력도 하나 있다. 죽은 자를 보는 것, 그리고 말을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서서히 직감한다. 선명하지 않은 삶의 흐름 속에서도 선명해지는 것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죽은 자를 본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은 목격이 가능해도 대화가 불가능함을 안다. 아니,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을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우티풀 Biutiful>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할 것이다.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단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Beautiful’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어느 언어인가. 아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Biutiful은 Beautiful을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쓴 언어다. 이는 고의가 아니다. 그저 어느 한 남자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 행위에는 숨겨진 의도가 없다. 그저 그 남자, <비우티풀>의 욱스발이 인식한 단어의 외형이 그러했을 뿐이다. <비우티풀>은 그런 영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마치 자신의 꿈을 해몽하듯 이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여정 안에서 점차 어떠한 의도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흐릿해진다.
알 수 없는 두 시퀀스의 연결을 통해서 시작되는 <비우티풀>은 그 불투명한 원점의 의미를 선명하게 밝히며 눈을 감듯 끝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불안이 영화 곳곳을 채운 몽타주들을 수집하다 이내 인물의 감정으로 파고들 때, 영화에 잠재된 수많은 비극이 제 머리를 들고 제 몸을 드러내듯 구체화되고 명확해질 때, 관객 대부분은 영화와 함께 시름하면서도 그 세계 자체를 둘러싼 기이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냐리투는 <비우티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서 영화적 해석에 개입하고자 했는데, 그의 변에 따르면 <비우티풀>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된 영화였으며 어느 공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비우티풀>은 온전히 이냐리투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인 셈인데, 이 영화는 그만큼 비선형적인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생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대해서 고찰하고 사유한다. 이 영화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이 세계에 자리한 어느 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자 보편적인 삶 속에 자리한 어떤 하나의 생에 관한 이야기다. 규정된 언어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듯 규정에서 벗어난 언어가 때로는 더욱 분명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마치 규정되지 않은 언어처럼 쓰여졌다. 어느 한 남자의 삶으로부터 뻗어나간 영화는 결국 이 세계를 채운 어느 특별한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의 너비, 즉 죽음이라는 비극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삶의 보편적 숙명의 너비가 저마다의 생으로 채워지고 모여서 이 세계의 형상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인과의 변형적 제시를 통해서 흥미를 돋우는 화술과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부조화가 이루는 특정한 리듬감, 이냐리투 특유의 화법과 묘사로 채워진 이 영화의 인장을 더욱 근사하고 명확하게 새겨 넣는 건 바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비우티풀>은 이냐리투의 영화이며 바르뎀은 그 세계를 완성하는 핵심처럼 영화 속에 자리한다. 아버지로서의 고뇌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통해서 생존을 체득한 이가 체감하는 불행, 바르뎀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상을 통해서 그 모든 생의 스펙트럼을 일거에 점령하듯 영화 속에서 걸어나간다.
<비우티풀>은 그 남루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 즉 죽음을 목격하는 방법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인식에 신비로운 사유를 더한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대구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처럼 잉태되고 종말된다. 그 끝에서 의미는 선명해진다. 삶을 정지시키듯 죽음이 찾아올 때, 그 정지된 삶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존될 수 있다면 과연 이 세계에서의 삶은 무엇으로 남겨지는가. 그 끝에 다다라야만 알 수 있는 물음. 하지만 당신의 삶은 어느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가치로 누군가에게 전승될 것이다. 삶을 이루는 건 ‘삶’이란 단어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규정할 수 없는 삶을 각자의 언어로 읽어나가듯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사라진다.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존(로버트 드니로)은 가석방 심사관이다. 가석방 심사 자격을 원하는 죄수들은 그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인다. 혹은 연기한다. 그의 업무는 바로 그 연기를 구분하고 진심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의 앞에 어느 날과 같이 한 죄수가 앉았다. 그는 방화죄로 검거되어 형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스톤(에드워드 노튼). 그는 자신이 가석방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존은 고민한다. 그런 그의 곁에 미모의 여성이 나타난다. 스톤의 아내 루세타(밀라 요보비치)라고 했다. 죄수의 주변인과의 만남은 부적절하기에 그녀를 피하던 존은 거듭되는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와 마주 앉게 된다.
<스톤>은 두 인물의 심리전을 포석으로 삼아 서스펜스의 집을 지어내는 스릴러다. 이에 위태롭게 얹혀진 여인의 관능은 서스펜스를 강화시키려는, 그리고 보다 입체적인 관계를 구성해내기 위한 한 수다. 결국 중요한 건 두 인물이 밀고 당기며 벌이는 심리적 거리감의 구도인데, 그만큼 뚜렷한 정황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제시돼야 의도를 관철할 수 있는 스릴러물이란 의미다. 모호하거나 애매한 느낌의 감지 뒤에는 확실한 실물의 제시가 뒤따라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스톤>은 은유적인 수사로만 치장된 듯한, 결과적으로 어떠한 실물이 쥐어지지 않는 스릴러물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두 인물의 관계는 선명하지만 그 선명한 관계의 긴장감이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자와 그 의도를 감지하려는 자 사이의 기싸움이 수면 위의 이미지로 설명될 뿐, 깊은 서스펜스의 밑바닥으로 관객을 끌어내리기에는 호흡이 얕다.
로버트 드니로와 에드워드 노튼은 그 인상만으로도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두 사람의 대립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스톤>은 분명 뭔가가 있어 보이는 영화다. 그러나 끝내 그 있어 보이는 분위기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 메시지는 짐작이 간다. 프롤로그로부터 짐작되는 속내는 죄의식을 품은 자가 심판자의 위치를 취하고 있는 형태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힌다. 하지만 그 읽힌다라는 의미 이상의 공감을 부여하지 못한다. <스톤>은 자신이 취한 설정 이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범작이다. 선악의 경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같지만 모호한 선문답에 다다를 뿐, 그 고민에 관객을 동참시킬만한 자질을 얻지 못했다. 그저 물결처럼 상황이 흐르는 가운데서 바닥에 가라앉은 돌처럼 관객의 사고를 정지시킨다. 인상적인 출연진은 그만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지만 그 연기만으로 이 영화를 구원하기에는 너무도 버겁다. 그저 묵묵하게 감흥 없이 흐르는 사연의 끝에 무거운 공허함이 감상을 짓누르는 기분이다.
‘셋’이란 안정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숫자다. ‘둘’은 무난하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 권태는 밀려온다. ‘셋’은 그래서 보다 지속적인 흥미를 자극하고 보다 공고한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하나’와 ‘하나’ 사이의 관계를 흔드는 또 다른 ‘하나’와의 유지가 요구된다. 그래서 ‘셋’은 그만큼 ‘둘’보다 심오한 숫자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둘’에서 시작되지만 ‘셋’으로 넘어갈 때 본격적인 사회적 현상이 발생한다. ‘둘’이 사회를 이루는 필요조건이라면 ‘셋’은 결국 사회를 이루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인 셈이다.
<쓰리>는 바로 그 문제의 ‘셋’에 관한, 어느 특별한 ‘3각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베를린에 한 부부가 있다. 유명 TV앵커 한나(소피 로이스)와 아트 엔지니어로 일하는 시몬(세바스티안 쉬퍼)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지만 그들은 은연 중에 자신들의 권태기를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삶은 딱히 문제 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곧 부부는 각자 모종의 관계를 통한 비밀을 얻게 된다. 시작은 여자였다. 그녀는 망설였지만 결국 선택했고, 이를 즐겼다. 그리고 곧 남자도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만한 사건을 얻고 관계를 지속한다.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문제와 상관 없이 두 사람은 급격하게 그 관계로 빠져들었다.
톰 티크베어의 <쓰리>는 문제적인 소재를 실생활적인 합리로 풀어내고 전위적으로 전시해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 생을 유지하고 버텨내려 하지만 때때로 그 관계에 속박되어 자신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삶을 포기하거나 인내하기도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삶을 단단하게 세우는 지지대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수갑과도 같다. 감정은 자유지만 제도는 곧 속박이다. 제도란 바로 그 자유로운 감정을 속박하고 구속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용이하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을 제어하는 도구인 것이다.
<쓰리>는 바로 그 제도적 속박에 대한 합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불행을 억누른 거짓 행복과 동거하는 삶보다는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그 욕망의 절충과 합의를 통해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고 공유하는 편이 백배는 나음을 보여주는 전위적인 전시인 것이다. <쓰리>는 이 문제적인 주제 의식을 거칠게 주장하거나 장황하게 설명해내는 노력 대신 그러한 삶의 단편을 연출하고 응시하게 만든다. 문제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영화는 단순히 그 도발적인 스토리텔링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건조한 인상이 느껴지기는 하나, 이야기의 흐름에는 무리가 없고, 깊이가 있으며, 예상 경로에서 벗어나는 놀라움과 성찰을 안겨주는 순간도 존재한다.
삶이란 전기줄 두세 갈래의 흐름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에 어떤 행위를 통한 비유로 형상화시켜야 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복잡한 삶을 단순화시키는 방식은 결국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 안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를 공유하고 한 덩어리로 승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 <쓰리>는 윤리적인 문제제기 안에서 자유롭진 않지만 분명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작품이다. 서로에 대한 인정과 각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때, 보다 너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르틴 주터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릴라 릴라>는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눈덩이 구르듯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감당하지도 막아서지도 못하는 한 남자에 관한 사연이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러브스토리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다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카페의 평범한 웨이터에 불과하던 다비드(다니엘 브륄)는 마리(한나 헤르츠스프룽)라는 여인에게 사로잡히고, 그녀가 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우연히 얻게 된 정체불명의 인물이 남긴 소설을 자신의 것처럼 사칭해 마리에게 접근한 다비드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성취감을 맛보는 것도 잠깐일 뿐, 그것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사건임을 곧 깨닫게 된다.
삽시간에 성공가도에 올라선 남자.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둔 성공이 아닌 누군가의 재능이 남긴 유산을 본의 아니게 도용해버린 남자.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나 늦은, 그리고 애초에 얻고자 했던 여인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남자. 누군가가 쓴 소설을 우연히 발견한 남자가 단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를 자신의 것처럼 사칭을 하고, 끝내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글 좀 읽는 여자는 그 소설의 진가를 알아보고, 출판사에 남자 몰래 출판 문의를 넣어버렸고, 출판사는 긍정적인데 남자는 망설이고,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니 소설은 출판되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지만, 정작 그 소설은 제 것이 아니고, 그 삶도 제 것이 아니고, 그 와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어느 남자가 접근해 오고, 남자의 수심은 깊어져만 가고, 여자와의 갈등은 심해진다.
단지 이 맥락만으로도 <릴라 릴라>는 가능성이 풍부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릴라 릴라>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로 뻗어나간 줄기에서 서스펜스의 가시를 철저하게 제거한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다. 작가가 선택한 방향은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작품의 설정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를 테면 타인의 재능을 훔친 다비드의 심리적 불안, 즉 서스펜스에 주목한 스릴러물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릴라 릴라>는 이런 개인의 불안보다는 관계에 보다 주목한다. 또한 심각한 갈등과 불화가 발견될만한 관계조차도 연민과 연대가 발견된다.
착한 영화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선의를 품고 있으며, 악의조차 상대를 배려하며 행한다. 덕분에 영화는 종종 비현실적인 거짓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조건이 이 영화의 기발한 설정을 보다 깜찍하게 수식하는 인상이 든다. 물론 로맨스 영화로서 남녀의 심리적 관계를 설명해나가는 기승전결의 인과가 결말부에 다다라 무리수에 가까울 만큼 논리적인 설득을 포기하고 있다는 인상도 느껴진다. 갈등의 요건이 두터운 캐릭터의 관계가 지나치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시선을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의 잣대로 견지하고 싶진 않다. <릴라 릴라>는 그 비현실적인 우연만큼이나, 그 불순한 행위의 결과를 해피엔딩으로 밀어내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감상을 야기시키는 영화다. 우연은 결국 시간이 지나 필연으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릴라 릴라>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뒤바뀐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틱한 영화다. 영리한 설정이 너무 순진하게 발전된 구석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훈훈하다. <굿바이 레닌>의 다니엘 브륄과 <포미니츠>의 한나 헤르츠스프룽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반갑다.
거대한 쓰레기통 속에서 쓰레기를 파헤치다 보면 결국 쓰레기 더미에 깔려 밑바닥으로 매몰될 것이다. <도가니>는 쓰레기를 목격하고 이를 주워담으려던 한 남자가 자신이 쓰레기통 한 복판에서 매몰될 위기에 놓였음을 깨닫고 겪게 되는 갈등과 결심을 그린 작품이다. <도가니>는 공지영의 원작에, 그 이전에 실화에 빚을 진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는 자신이 짊어진 의무와 책임을 잘 알고 있다. <도가니>는 분노를 먹어야 사는 영화다. 분노할 일에는 분노하는 게 옳다. 다만 그 분노의 낭비를 경계해야 한다. 영화는 그 진실의 현장으로 관객을 이끌고, 응시하게 만들며, 공분을 일으킨다. 중요한 건 이 지점이다. 그 공분은 영화 밖의 현실로 향해야 한다. 영화는 어느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당연하다. <도가니>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고발 영화다. 허투루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남는 건 결국 현실에 대한 물음이다. 누군가는 그 쓰레기 속에 매몰될 것을 알면서도 쓰레기를 파낸다. 당신도 그 쓰레기를 보았다. 함께 파내려 갈 자신이 있는가. 적어도 이 영화는 옳은 게 옳다는 것을 알고, 말하면서도 제 몸 건사하고 식구도 먹여 살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당신이 머무는, 혹은 당신이라는 도가니를 끓게 만든다. 좋은 온도다. 나를 끓게 만든, 그리고 당신과 우리를 끓게 만들 것이라 믿는 그 온도를 지지한다.
야심 차게 시작한 베이커리 사업은 씁쓸한 과거의 실패담이 돼버렸고, 비호감이 철철 넘치는 룸메이트는 상의 한마디 없이 역시 비호감인 여동생을 집에 모셔놓고도 기고만장으로 일관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인에게는 그저 수많은 섹스 파트너 가운데 하나로 취급 당할 뿐인, 그 혐오스러운 일상의 주인공은 바로 애니(크리스틴 위그)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절친한 친구 릴리언(마야 루돌프)이 그녀에게 기쁜 한편으로는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함께 늙어가는 노처녀 친구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한 것 그리고 들러리 대표로 서주기를 부탁 받은 것. 둘도 없는 친구의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위해서 애니는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일찍이 미국에서 ‘여자 버전의 <행오버>’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그 소문대로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뽐내는 화장실 유머로 치장된 코미디물이다. 하지만 <행오버>시리즈가 그 막장 유머에 대한 취향이 필요한 미국식 코미디물이라면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한 여인의 성장드라마 위에 파괴력 있는 유머가 가미된 작품이란 점에서 공감의 여지가 보다 너른 작품이다. 메가폰을 잡은 폴 페이그보다도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주드 아패토우의 인장이 보다 짙은 이 작품은 그가 연출한 전작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나 <사고친 후에>, <퍼니 피플> 등과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한 내러티브가 설득력 있게 극의 밑천을 마련해나가는 위로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들을 장식처럼 얹혀나간다.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 입장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볼거리를 이루는 이 작품의 유머들은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매설된 지뢰와 같다. (물리적인 가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끔찍하리만치 가혹하게 난감해지는 어떤 상황들 혹은 한없이 엇나가거나 유치하게 일관하는 성인들의 대화와 행동들로부터 지속적으로 투하되는 유머들은 양에 비해서 질적으로 우수한,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드레스장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소동극을 비롯해서 마력과도 같은 폭소의 자질이 곳곳에 설치된 이 작품의 유머 코드에도 취향의 호불호는 작용할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행태를 담보로 벌어지는 극단의 연출이란 점에서 공감대의 웃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것이 <행오버>와 이 작품의 웃음을 구분 짓게 만드는 또 하나의 차별점에 가깝다.
물론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미친 듯이 몰아치는 웃음의 광풍만으로 채워진 단순 코미디가 아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한 여인이 갖은 갈등과 충돌을 겪은 뒤, 비로소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견뎌내고 스스로 다시 일어선다는 보편적인 성장드라마의 틀거리가 이 작품의 본론에 가깝다. 이토록 빤한 교훈이 나름의 설득력을 얻었다 말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어떤 특정한 소재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대상 혹은 캐릭터 자체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서 시작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덕분이다. 결혼과 자립이라는 고민 앞에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한 여인이 수많은 난관에 직면하고 스스로를 뒤돌아볼 계기를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단편적인 설정 이상의 깊은 이해를 품고 있다.
여자가 당당해야 이 영화는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제대로 살았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망가지는 동시에 깊은 감정까지 포괄하는 여배우들의 열연은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완성시킨 기초적인 자산과 같다. 애니 역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를 비롯해서 그녀의 주변부를 장식하는 로즈 번, 마야 루돌프 등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은 모든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놀랍도록 과감한 영화의 난장 속에서 끝내 제각각 반짝인다. 진심으로 더럽게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