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해운대>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수식어를 차지한 영화다. 백주대낮에 거대한 쓰나미 장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모험이었고, 한스 울릭이라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VFX슈퍼바이저가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었다. 모팩 스튜디오에서 최종작업이 된 것으로 아는데 일단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난관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모든 공정에 직접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나진 않았나.
방금 말한 대로 <해운대>는 한국 최초의 재난 영화다. 대낮에 대규모 쓰나미를 묘사해야 하는데 난이도가 높고, 우리가 기술적으로 처리해본 적 없는 부분이라 제작자나 투자자 입장에서 경험치가 없는 국내 업체들에게 도박성을 가지고 시도해보라고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 게 사실이다. 경험치 없는 작업을 하려면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고, 시행착오에 대한 기회비용을 제공해줘야 한다. 하지만 제작비 한계가 뻔한 마당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다. 게다가 CG작업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분야로 꼽히는 게 물CG다. 데이터양도 워낙 크고, 제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웬만한 기술력이나 인프라가 뒷받침돼 있지 않으면 무리한 작업이다.
제작비가 빠듯하니까 신뢰가 가는 외국 슈퍼바이저를 고용한 셈이다. 그 과정에 대해서 관여한 바가 있나. 그리고 모팩이 <해운대>에 참여하게 된 과정도 궁금하다.
해외업체들을 여기저기 많이 접촉했었지만 그 제작비로 원하는 퀄리티는 보장해줄 수 없다는 답변만 한결같이 돌아왔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스 울릭은 자신이 참여했던 <퍼펙트 스톰>과 <투모로우>의 2배 퀄리티를 그 예산에서 보장하겠다고 장담했다.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작품을 책임졌던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하니 신뢰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스한테 작업을 맡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한스가 예산이 빡빡하니 자기네 팀은 전반적인 슈퍼바이징을 맡되 물 소스의 퀄리티를 높이는 작업에 집중하고 쓰나미를 제외한 VFX샷을 처리하고 나머지 합성 작업을 맡아줄 업체를 파트너로 찾아야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국내 업체들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하고 체크해본 뒤, 모팩을 선택했다. 그 때 제작사에서 조건을 걸었다. 어차피 모팩에 예산을 많이 배정해주지 못하니까, 대신 모팩에 기술 이전을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그걸 흔쾌히 허락했다.
메인 작업을 한스 울릭이 꾸린 팀이 맡고 서브 작업을 모팩에서 하는 형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후에 개봉 직전까지 모팩에서 거의 모든 작업을 다시 했다는 말도 들었고.
처음에 작업을 시작하고 한스 울릭 측에서 R&D(연구개발)를 한다, 소스가 나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 시간에 쓰나미와 관련 없는 샷들을 미리 진행하면서 한스 울릭이 처리한 이미지 소스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쪽에서 파이널 데이터가 넘어오기 시작했는데 너무 황당한 퀄리티였다. 그 전에 소스를 몇 개 보여주긴 했지만 3~40% 작업 단계라니까 점차 좋아지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결과를 보니 투자사나 제작사도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그때부터 <해운대>CG가 개판이라니, 재난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재난이니, (웃음)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다. 안에서도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이 상태로 끝장이라 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개봉날짜도 결정된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투자사 측, 제작사 측, 그리고 나까지 미국으로 다 몰려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상황을 체크해본 결과 누가 봐도 폴리건 엔터테인먼트가 작업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게 ‘명약관화(明確觀火)’였다.
물CG의 제작방식에 대해서 설명해줄 수 있나?
물CG를 만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기술적인 부분이라 일반인들이 이해하긴 조금 힘들겠지만 쉽게 설명해보자면, 아까 말한 것처럼 물CG는 데이터 양이 크고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구현하기가 어렵다. 한스가 제안한 건 물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하는 ‘레벨셋 시뮬레이션(Level-set Simulation)'인데 입자 하나하나가 진짜 물처럼 움직이는 거다. 그만큼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물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작업방식을 응용해서 물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게 '서페이스 디포밍(Surface Deforming)'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종이 한 장을 펄럭거리면 물이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물의 질감을 부여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출렁거리게 만들어서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다. 물론 그것도 보다 정교하고 과격한 움직임을 만들려면 꽤 까다로운 작업이 된다. 하지만 기존에 상용화된 툴 안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국내 업체들조차도 어느 정도 스킬이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미리 준비 작업을 시켜서 시도하면 꽤 괜찮은 결과물을 획득할 수 있는 수준까진 왔다.
아무래도 좋은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해운대>에 책정된 예산으로 고비용의 작업에 예산을 투자하는 건 부담이었을 텐데, 레벨셋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는 한스 울릭 측의 근거가 궁금했을 텐데.
<해운대>의 스케일이 이 예산으로 레벨셋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제대로 묘사하기 쉽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하겠다는 건지, 내가 질문했을 때, 한스 울릭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우리는 ILM시스템을 지원받아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계약이 돼 있다.” 그렇다면 답이 된다. 왜냐면 ILM이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시뮬레이션 파이프라인과 시스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거든. 그럼 당연히 그럴 듯하지. 게다가 한스가 ILM출신이기도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렇게 계약된 적이 없더라. 그리고 미국에 가서 보니까 레벨셋 시뮬레이션을 약속해놓고 그렇게 하고 있지도 않았고. 물론 한스가 고용한 많은 아티스트들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경력도 있는 작업자들이었던 건 맞다. 그런데 그들이 몇 명 정도 모인다고 해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게 가능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사실 그 당시 내 느낌으론 이건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결국 모팩에서 모든 것을 다 떠맡게 된 것으로 아는데,
투자사와 제작사가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작업하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한테 슈퍼바이저 역할을 주고 내가 작업의 총책임자가 되면서 미국에 소스를 요구하게 된 거다. 소스만 받아서 나머지 작업을 우리가 다 하는 걸로 결정했지. 그런데 그쪽에서 작업을 진행했던 소스들로는 도저히 퀄리티를 맞출 수가 없어서 그 과정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아예 방법을 바꿔버렸다.
쓰나미 이미지가 사실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우리가 작업하기 전에 자료들을 굉장히 많이 찾아봤는데 실제로 쓰나미는 배불뚝이처럼 부풀어서 쑥하고 밀려온다. 보기에 위압감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물이라는 게 사람 무릎 높이로만 밀려들어와도 사람이 그 힘을 제어할 수 없다. 쓰나미가 위험한 건 그 때문이다. 그 힘에 쓸려가게 돼있다. 그렇게 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각종 쓰레기나 기물들과 엉키고 레미콘 안에서 시멘트가 돌과 자갈에 섞여 들어가는 것처럼 끔찍하고 잔인하게 죽는 거다. 그 안에 엉켜 들어가면 시체가 거의 갈갈이 찢어진다. 정말 지저분하면서도 무시무시하지.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할 순 없는 거였다. 그래서 ‘에어포일(airfoil)’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서핑 파도 같은 이미지로 아예 형태를 바꿔버렸다. 과학적인 이미지는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훨씬 위압감을 주는 방식으로 작업 방향을 잡고 다시 시작한 거다.
그 시점이 언제였나?
그때가 4월 초였다. 불과 개봉을 두 달여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내가 직접 지시해서 미국에서 받아온 소스들은 그대로 쓸 수 없어서 기본 작업만 된 데이터를 받아서 우리가 전부 다시 재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질감도 바꾸고, 조명도 바꾸고, 렌더링도 다시 하고, 디테일도 다시 추가하고, 최종합성을 한 뒤, 결국 640컷이 넘는 작업을 두 달여 만에 완전히 다시 하다시피 했다.
넉넉한 시간이 확보되지 못한 시점에서 재작업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 지점에서 아쉬움이 남지 않나?
사실 완성도에 있어서 절대 만족스러울 수가 없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레벨셋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서페이스 디포밍을 메인으로 가는 방식이 될 거였다면 애초에 우리에게 우리 기술 내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라고 주문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란 생각에 답답하고 화나는 것도 없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좀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확보됐을 거다. 그리고 미국에서 사용된 예산의 절반 이하로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었을 거고. 예고편 나가고 악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히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수준으로 마무리시켰다는 점에서는 위안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굉장히 아쉽고 불만족스러운 결과다.
올해 개봉 예정인 <워리어스 웨이>의 VFX작업에 참여했다. 당시엔 <런드리 워리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였는데 해외에서의 작업조건의 차이를 느낄만한 기회였을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 계약서는 갑을이 공정하지 않다. 무조건 갑에 유리한 조항들 투성인데 할리우드 계약서는 두께부터 책 한 권 분량인데다가 을에 대한 보장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더라. 문제가 생겨도 우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명시한 조건들이 많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만 제대로 해내면 그 외의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항들이다. 최소한의 작업기간을 보장하고, 기본적인 소스를 언제까지 제공해주며, 난이도에 따라서 작업시간의 차별적인 보장을 책임진다는 조항까지 있다. 할리우드의 방식은 분명 굉장히 합리적이고 퀄리티를 보장해주는 방식이다. 물론 그 방식이 무조건 훌륭한 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받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더 적은 비용과 더 빠른 시간 안에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퀄리티를 생산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음에도 그것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게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모든 면에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취하는 방식이 상당 부분 할리우드보다 유리하고 효과적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생기더라. 할리우드가 무조건 답이라고 볼 순 없는 거다.
물론 여전히 기술적으로 취약한 지점도 존재하고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지점이 있지만 국내 VFX산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빠른 성장을 이뤘다고 자평해도 좋을 것 같다.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많은 발전을 이뤘다는 건 맞다. 그만큼 우리가 내부적으로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노력한 지점이 분명히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국내에서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됐고, 우리에게 그 콘텐츠를 제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끊임없이 제공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닥치는 프로젝트를 당장 해내려다 보니 경험치가 쌓이고,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구르다 보니 여기까지 굴러오게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웃음) 다만 워낙 조건이 열악하다 보니까 스스로 발전할만한 동력을 갖기 어렵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구르던’ 이란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스스로 발전적인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나마 콘텐츠의 활발한 제작으로 기회가 제공됐다는 게 유일한 기회였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온당하지 않다는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나?
사실 우리나라 소비자, 관객들은 까다롭지 않나.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제작비가 얼마였던지, 제작기간이 얼마였던지, 이런 거 안 따지거든. 사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극장가서 한국영화나 할리우드 영화나 동일한 티켓값을 지불하는 마당에 그런 걸 봐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완성도를 추구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가 된 거다. 조건이 열악해도 욕먹지 않으려면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발전한 거지.
CG를 활용하면 제작비가 상승한다는 오해도 많다. 물론 요즘 블록버스터의 예산은 CG에 할당되는 비율이 높은 게 사실이지만 CG가 제작비를 경감하는데 활용되는 경우도 많다.
제작비가 커지는 요인으로 CG를 지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내가 볼 땐 일정 부분 오해가 있다. 오히려 제작비가 열악하고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CG에 의존하게 됐고 더 높은 완성도와 더 큰 스케일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거다. 우리나라처럼 제작비 상황이 열악하면서도 관객들의 요구가 높은 환경일수록 CG의존도는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활용가치가 그만큼 크다고 예측된다. 내 생각에 우리가 작업한 7~80%의 작품에서 CG는 제작비를 절감하는 동시에 완성도를 추구하는 쪽에 활용됐다고 본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국가대표>의 마지막 스키점프 장면 같은 경우, 만약 세팅해서 찍었다면 상당히 많은 돈이 깨졌을 거다.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아주 훌륭한 사례가 아닐까? 사실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작업은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잘 활용된 케이스라고 보인다. 영화에서 크게 기여한 셈이지. <해운대>는 너무나 당연한 케이스고.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공군이 밀려오는 장면 처리도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효율적인 사례지.
사실 국내에서 할애되는 CG작업의 비용은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비한 수준에 가깝다.
우리나라는 할리우드에 비해서 VFX제작비용이 싸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에게 놀라운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영화가 잘 만들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제작비 대비 완성도가 기겁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윤제균 감독님은 JK필름을 할리우드에 진출시켜야 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웃음) 그래서 미국 쪽하고 접촉하고 계시는데 다들 하나같이 <해운대> 제작비만 들으면 깜짝 놀란다더라. 물론 <해운대>가 할리우드 스탠다드 퀄리티라고 볼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제작비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판단했을 때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획득해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그런 면에선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건 국내 산업적 단가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작업자들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오히려 가격경쟁력으로 와전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사실 제작비가 절감됐다는 측면은 희생을 밑바탕에 깔고 우리가 스스로 감내하면서 더 요구해야 할 비용을 우리 스스로 감내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상황이 변화돼야 할 지점이 있긴 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단지 싸다는 것으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건 산업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거다. 비싸다고 할지라도 퀄리티로 승부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지난해 11월에 AFM(American Film Market)에서 국내업체들과 공동으로 부스를 차리고 해외 프로모션을 했다. 당장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는 점만으로도 특별한 성과가 아니었을까.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업체가 여러 가지 상담을 했다. 사실 계약 직전까지 가니 마니, 이런 건 언론용 멘트에 가깝다.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었던 건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애초에 관심도 정보도 없었던 해외 영화사나 제작사들이 한국에 이런 VFX업체들이 의외로 많고 생각보다 퀄리티가 괜찮다는 인식을 조금씩 만들어냈다는 거다. 일단 알릴 수 있어야 그 다음 기회도 발생한다. 국내 VFX업체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던 상황에서 해외 홍보효과란 측면만으로도 분명 의미 있는 행사였다.
AFM진출을 보도하는 뉴스나 기사 가운데 해외진출이 가시화된 것처럼 말하는 보도가 많았다. 사실상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라서 그런지 어느 날 우리가 갑자기 할리우드의 유명 작품에 깃발 꼽기를 기대하는 측면이 있더라. 그게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하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도 그들 나름대로 목숨 걸고 하는 작품일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시아 변방 국가에 메인 작업을 맡길 리가 없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이 확 이뤄질 것처럼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하는 면이 있다. 우리가 처음에 어필할 수 있는 건 가격 경쟁력일 수 있지만 시장에 조금씩 스며들듯이 참여해서 좋은 평판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너무 성급하게 치고 들어갔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서 평판이 떨어지면 다시 되돌리기도 힘들어진다. 해외진출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그래서 너무 성급하게 질러나가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신중해야 하는 입장이다.
<괴물>당시 작업한 오퍼니지의 데이터는 오퍼니지의 소유였기 때문에 결국 국내에 남겨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안다.
뒷맛이 씁쓸한 지점이 없지 않았다. (웃음)
그런 의미에서 <해운대>는 결과적인 데이터를 모팩에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노하우가 우리에게 남겨졌으니까. 비슷한 작업을 다시 한다면 훨씬 효율적인 방식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끌어낼 자신이 생겼다.
JK필름에서 제작하는 <제7광구>에도 참여하나?
지금 프리 프로덕션을 2달 가까이 진행 중이다. 컨셉트 디자인까지 우리가 다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심해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알고 있는데 역시나 국내에선 블록버스터 규모의 예산이 투자된다고 들었다. 일단 크리쳐 무비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일종의 모험이 될 수도 있겠다.
아까 <해운대>의 노하우가 우리에게 자산이 됐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고 그 자산이 <해운대>같은 영화만을 위한 자산이 되는 건 아니다. <해운대>를 해봤기 때문에 큰 데이터를 컨트롤해야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우리에게 생겼다. 성향이 다른 작품이라 해도 그 스케일을 효과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거다. 예를 들자면 계속 1~2층짜리, 아니면 높아 봐야 3~4층 건물 짓던 사람이 갑자기 3~40층 건물을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건물의 성격이 달라지는 건 다른 문제다. 큰 호텔을 지어봤던 사람이라면 규모가 큰 공장을 짓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거다. 스타일이 달라질지언정 스케일이 큰 건축물을 지어봤던 노하우는 고스란히 활용된다.
현재 한국에서의 VFX작업에 대한 활용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나?
의외로 기존의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VFX에 대한 이해도가 심각하게 낮다. 그래서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고, 이런 식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봤을 땐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반도 써먹지 못하고 있다. VFX기술을 활용할 때 가능한 확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꾸 할리우드만큼 그림이 안 나오네, 이런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자기 주머니의 쌈짓돈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계속 남의 방만 쳐다보고 부러워하는 꼴이다.
그래도 과거보단 많이 나아진 수준이 아닌가?
과거엔 심각한 수준이었지. 그래 놓고 책임만 우리한테 묻는 이상한 형국이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단 협조적이긴 하다. 이젠 영화에서 VFX가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메인 스텝이라는 걸 인정하고 우리 의견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다루진 않는 수준까진 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게 야기시키는 문제가 있다. 준비상황에서 작업 중인 현장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가르키는 방향을 봐야 하는데 자꾸 손가락 끝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지만 자꾸 자기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거다. 결국 제대로 된 소스가 획득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았냐고 말하게 되고, 결국 그런 면에서 답답해지는 거지.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가 지휘를 하는데 연주자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자기 악보만 보고 연주해버리는 거다. 개개인의 연주가 나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결국 오케스트라가 파워를 발휘하는 건 지휘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곡의 느낌을 끌고 가느냐에 달렸다. 그런 면에서 조합이 잘 이뤄지지 않는 면이 발생하는 거다.
CG를 이용한 프리 프로덕션도 활용되고 있다. 사실 프리 프로덕션은 촬영 단계에서의 낭비를 줄이고 보다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 프리 프로덕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프리 프로덕션이 무엇을 해야 하는 단계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프리 프로덕션이 중요하다고 다들 말로는 떠들지만 실질적인 방법은 모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무서운 건, 표면적으로 그들이 확보한 기술적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보일지 모르지만 그보다도 프리 단계에서의 충분한 검증을 통해서 완성도를 보장할만한 프로세스를 확보하고 작업을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프로덕션과 포스트는 그걸 실행하는 단계지. 애초에 프리 프로덕션을 통해 깨지고 부딪히며 시행착오를 겪는 난장판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다. 게다가 숙련된 스태프들이 많은 덕분에 계획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그렇게 사전에 계획을 미리 세우고 출발하니까 예측대로 훌륭한 답이 나온다. 사실 비용이 지불되지 않는 프리 프로덕션은 진짜 프리 프로덕션이 아니다. 우리는 배우 캐스팅 시기와 투자 계약 시점이 맞물리기 때문에 대부분 크랭크 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제작이 가시화된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대부분의 프리 프로덕션이라는 건 기존에 작품을 같이 해왔던 스태프들과의 친분이 있어서 이번 작품도 같이 해보자며 사전미팅을 준비하는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해왔던 경험치 내에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서로 의논하는 단계랄까. 사실 프리 프로덕션은 이미 실행하는 단계여야 한다. 그게 안되고 있다.
여전히 CG에 대한 거부감을 지닌 사람도 있을 테고, 반대로 CG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리란 막연한 믿음을 지닌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지나치게 터부시해서 소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냥 다 CG에 의존해버리려고 억지를 부리거든. 사실 CG가 모든 걸 해결해주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고, 다른 VFX효과를 이용했을 때 더 효과적인 부분이 있고, 절대 CG를 활용해선 안될 만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 그걸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니까 결과물이 난잡해지고 퀄리티가 엉망이 되는 거다. 얼마 전에 박철수 감독님이 인터뷰를 하나 했던데 답변을 보니까 참 답답해지더라.
어떤 내용이었나?
우리나라 영화에 CG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영화가 망가졌다고 하시고 <그랜 토리노>를 예로 들었더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CG를 전혀 쓰지 않고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나. 그건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그랜 토리노>가 CG를 적극적으로 쓴 영화는 아니지만 구석구석 CG를 꽤 쓴 작품이다. 다만 효과적으로 필요한 곳에 활용했기 때문에 CG라는 게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전에 <아버지의 깃발>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CG투성의 영화 아닌가. <스페이스 카우보이>도 CG없이는 불가능한 영화였다. CG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모르고 난잡하게 사용된 결과물만 보고 그 자체를 터부시한 셈이다. 만약 어떤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지 않았다면 연기를 못한 그 배우와 그 배우에게 제대로 된 디렉션을 주지 못한 연출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 연기자 전체가 의미 없다고 싸잡아 판단하는 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거다. 물론 박철수 감독님은 극단적인 케이스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충무로를 좌지우지하는 많은 제작자나 감독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태생 자체가 기술로부터 비롯된 예술이다. 기술과 함께 하는 예술인 셈이다.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답답해지는 거다. 훌륭한 감독들은 언제나 훌륭한 기술을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 아닌가.
어쩌면 그런 개인들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게 기술적인 발전이나 시스템의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다.
훌륭한 연기자는 캐스팅 리스트에서 우선 순위에 올라갈 수 밖에 없고, 연기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도태돼야 당연한 거다. 마찬가지로 VFX를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업체들이 기회를 더 많이 갖고 그렇지 않은 업체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옥석이 갈려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작품을 끝내고 나서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지지 않는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예산 대비 퀄리티를 끌어냈는지에 대한 검증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마다 조건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비교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까 비용에 비해서 작업 결과가 엉망이었다 해도 그냥 분위기 타서 대충 넘어가고,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 하에서 엄청난 기여도를 남겼음에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봤을 땐 그걸 판단하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금 억울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느낀다.
많은 개선점이 필요하다 느끼겠지만 개선이 시급한 사안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
장기적으로 많은 부분들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겠지. 그렇지만 일단 지금 당장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프리 프로덕션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제대로 준비하는 게 무엇인지를 인식시키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적극적으로 활용됐을 때 값어치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증명해서 기존 방식대로 영화를 제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를 깨닫게 만들고 프리 프로덕션의 의미를 갖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그걸 설득하기가 쉽진 않지.
일단 그런 설득이 가능한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나마 <해운대>를 하고 나서 윤제균 감독님과 어느 정도 신뢰가 생겼고 상당한 이해를 얻고 있다. 그리고 감독님도 우리한테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계신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반응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실 투자자도 따라서 반응해줘야 되고 산업 전체가 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줘야 되니까 쉽지 않다. 결국 좋은 선례를 제시해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했더니 이런 결과를 얻었다, 라는 선례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는 그것이 당연해지는 풍토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상당한 숙제다.
결국은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다.
내 학부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다. 대학 시절, 강사 한 분이 우리나라 디자인이 발전하지 않는 이유는 클라이언트의 안목이 수준 이하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디자이너가 아무리 훌륭한 시안을 들고 가도, 그 시안 몇 개 가운데 가장 후진 시안을 선택한다는 거다. 결국은 사주는 사람의 안목이 발전하기 전에는 디자인이 발전할 수 없다는 거지. 디자이너들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이 제시하는 디자인을 받아주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다. 잔인하게 얘기하면 돈 쥔 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은 문제다. 제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그걸 그냥 식칼로 사용하면 어떤 의미가 있겠나. 결국 사용자가 그 가치를 깨닫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의미 있게 쓰이는 거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도 있지만 그 노력만으론 부딪혀야 할 한계도 크다.
VFX에 대한 무지를 타파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VFX를 작업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공부하는 반면, 영화를 작업하는 사람들은 VFX에 대해 무지하다는 게 결국 작업적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뮤지컬을 연출하는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지 않고 이해도도 없다면 말도 안 되겠지. 당연히 VFX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충분한 공부를 하고 이해도를 지녀야 한다. 감독이 연기 지도를 하면서 연기에 대해서 아무런 기준도 관점도 없다면 한심할 거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2003년 3월 19일,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바그다드 상공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총공세로 바그다드는 초토화됐고 미군의 진격으로 도시는 점령됐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목으로 이라크에 무력을 행사했고,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전쟁처럼 시작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주장했던 대량살상무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 허구적 주장이 대량살상의 참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그린 존>은 명확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하며 확고한 팬덤을 형성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다시 한번 맷 데이먼을 앞세워 ‘진짜’ 미국의 치부를 들춘다.
로이 밀러(맷 데이먼)는 제이슨 본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다르지만 유사한판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수색하는 ‘MET-D’ 팀에서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미육군 소위다. 정부의 주장대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 그는 매번 ‘정보와 현장 상황이 다른’ 임무수행 과정을 겪어나가며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종의 확신을 통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이행할 뿐, 분석의 의무가 없다는’ 상관의 냉소적인 답변 뿐이다. 하지만 밀러가 품은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이를 눈여겨보던 CIA요원 마틴 브라운(브렌단 글리슨)은 그에게 모종의 제안을 던지고 진실의 은폐를 도모하는 국방부 요원 파운드스톤(그랙 키니어)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아래 명분은 온전히 퇴색됐다. 9.11 테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듯 이라크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듯 그승리를 자축하던 미국은 그 뒤로 깊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렁에 빠졌다.그리고포스트 9.11이후, 그로부터 잉태된 파괴적징후는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지적되고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사실그모든 징후들의 시발점이 된 그날을 되새김질하며 그 뒤에 자리한 음모론을 폭로하는 건 분명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미 지난 9.11테러와이라크전으로부터 생산된징후들은 수 차례에 걸쳐 관찰되고 진단되어 왔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보다 너른 텍스트로 확장돼 왔기 때문이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로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평화와 독재의 타도를 위한 이라크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해명을 여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세계평화’적 결의가 아닌 ‘석유전쟁’의 일환이라는 것도 공공연하게 제기된 진실이나 다름없다.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아닌 ‘석유’의 수급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은 사실로서 확증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린 존>이 그려내는 풍경은 분명 새삼스럽지만 그 풍경 너머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 존>을 통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2003년에 벌어진 참상은 2010년의 현실에서도 미결의 과제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현장감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두 편의 <본> 시리즈를 비롯해서 <플라이트 93>과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선사한 현장의 이미지는 가히 체험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와 긴박감을 제공하는 빠른 컷의 전환, 그리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찰나의 몰입을 도모하는 줌 인의 타이밍. 폴 그린그래스는 특유의 장기를 활용해 <그린 존>에서 전장의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미군의 바그다드 폭격신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대량살상무기 수색에 나서는 미군의 시가전을 다루는 초반부부터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연출을 통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린 존>을 통해 사실적인 전장을 묘사하는 폴 그린그래스가 목표한 것이 단순히 그 현장성의 재현이었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린 존>은 그 재현 자체만으로도 다이렉트한 쾌감과 명확한 감상을 발생시키는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 존>의 야심은 그 현장감의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린 존>이 재현하는 긴박한 현장감은 결과적으로 그 현장의 기저에 웅크리고 있는 음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나 다름없다. 관객은 <그린 존>이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진실의 너비를 함께 목격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볼모로 둔 그 참혹한 현장의 진실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이되 첨예한 시선을 유지해낸다. 위기일발의 전장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의 참상과 대비되는 ‘그린 존’의 과소비적인 정경은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뼈 있는’ 풍경이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을 내건 강대국의 대의적 논리가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농락하는 소수 권력자의 야욕임이 고발한다.
<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린 존>은 그 모든 부조리가 잉태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부조리의 청산을 주장하고설득한다. 음모론의 대가토니 길로이의 각본에 비해 <그린 존>이 설계한 음모론의 그물망은 보다 평면적이지만 폴 그린그래스의 사실적인 연출력과 맷 데이먼의 우직한 표정은 진실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로 전진하는 날카로운 눈과 단단한 두 다리를마련했다. 이라크의 현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시작점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시리즈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딜레마의 출발점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그린 존>을 통해 첨언하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채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린 존>은바로 그 의미의 원점을명확하고 통쾌하게 관통한다.
(연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근미래에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대체에너지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로 공급한다. 소량만으로도 고효율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자기장 물질 언옵타늄은 지구에서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덕분에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한다. 미해병대 출신이지만 다리가 마비되어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가 판도라 행성에 온 건 언옵타늄의 채굴과 관련해 과학자로서 핵심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다.
그 과업이란 제이크 셜리의 일란성 쌍둥이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Na'vi)'족의 유전자에 결합해 만들었다는 ‘아바타’를 형과 유전자가 일치한 제이크 셜리에게 맡기는 것. 나비족의 주둔지에 매장된 막대한 언옵타늄을 채굴하려는 기업적 야심은 제이크 셜리에게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수술비를 보장하며 그를 판도라 행성으로 이끌고 그에게 아바타의 육체를 입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염탐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바타에 접속한 제이크 셜리는 자신이 빌린 새로운 육체가 두 발을 땅에 딛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판도라 행성의 밀림에서 거대한 현지야생동물의 습격을 받게 된 그는 일행으로부터 낙오돼 죽을 고비를 맞이하지만 나비족 여성 네이터리(조 샐다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생명의 나무’가 있는, 나비족의 본거지로 들어서게 된다.
친자연적인 노스탤지어 이미지
<아바타>는 분명 혁신적인 비주얼만으로도 그 가치에 대한 의심이 불필요한 영화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걸고 등장한 기존의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받아 왔던 것과 달리, <아바타>는 비로소 성과라는 단어를 동원해도 좋을만한 값어치를 드러낸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에서 3D비주얼을 실험하며 답보와 약진의 데이터를 구축해온 로버트 저메키스와 달리 제임스 카메론은 장고의 시간을 인내하며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온전히 새로운 토대를 구축해버릴 참이다. <아바타>가 새롭다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이미지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그 이미지의 형태를 지칭하는데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으로부터 거둬들일 수 있는 특별함은 그 외형적 디자인보다도 판도라의 대자연과 (유사인류 형태를 띤) 나비족의 내면적인 교감방식을 전시하는데서 비롯된다.
<아바타>는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판도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는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은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는 방대한 네트워크 망이자 형광색 혈액이 흐르는 혈관으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다. 판도라 행성의 식물과 대지는 마치 센서를 장착한 터치스크린처럼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때마다 LED조명에 가까운 선명한 조도를 밝힌다. 개체들의 반응은 서로를 연결한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정보망을 구성한다. 형광 색채감을 드러내는 판도라의 야경은 시각적으로 황홀한 결과물이지만 그 조직적 체계를 완성한 아이디어가 보다 놀라운 산물에 가깝다. <아바타>는 창조와 응용이라는 창작적 협주로서 거대한 세계관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전율을 이루는 영화적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나 다름없다.
현대적인 감각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판도라의 풍요로운 원시림 이미지는 주제의식을 단단하게 매만지는 수단으로서 효과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디지털 문명에서 비롯된 착상이 자연적 풍경과 접목됐을 때 발생하는 감상적 결과가 단순한 교훈적 주제를 순수의 경지로 이끌어낸다. 오만한 기계적 문명을 동원해 나비족의 자연을 파괴하고 유린하는 인류의 민폐는 판도라 행성의 풍요로운 대자연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두드러진다. 동시에 3D비주얼을 위시하는 기능적 이미지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기술적 발전을 과시하는 이미지 기술을 진정한 영화적 표현 방식으로서 영화에 녹여낸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한 성과가 드러난다.
자연친화적 노스탤지어, <아바타>는 노골적인 주제의식을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순하고 명확하게 밀고나간다.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인류의 어리석은 욕망은 손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주거지를 무덤으로 만들어나간다. <아바타>에서 인류는 점차 푸른빛을 잃어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외계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서마저 파괴를 일삼는 비루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을 지적하는 주제의식을 지닌 영화들은 <아바타>이전에도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래서 <아바타>가 상투적인 영화라고 확신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단순하다’와 ‘엉성하다’의 의미는 명확히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의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주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라는 형태로서 이야기될 때 더욱 마땅한 평가가 가능해보인다.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아바타’ 세계관
<아바타>가 전시하는 판도라의 생태계는 사실상 지구의 생태계를 리모델링한 것에 가깝다. 그 이미지의 형태가 익숙한 것이라기 보단 그 이미지의 모티브가 명확히 읽힌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에 다다르진 않을만한 풍경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판도라는 지구의 ‘아바타’ 같은 행성이다. 사실상 <아바타>의 세계관 자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토대로 구축된 ‘아바타’ 같은 세계관이며 이로서 <아바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거대한 우화로서 기능한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를 체험하는 제이크 셜리는 곧 관객을 위한 ‘아바타’이며 <아바타>라는 영화 자체가 이 세계의 발전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아바타’와 같은 영화인 셈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모티브는 그 외형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자의식마저도 이 세계와 연동돼있다. 제국주의 근대사를 비롯해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수난의 기록이 역사로서 당당히 자리한 인류의 서사는 <아바타>를 이루는 가장 명확한 근간일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인류의 폐해적 역사를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에 반영한 <아바타>는 폭력적인 인류의 욕망을 고발하는 이미지와 그 욕망의 자멸을 그리는 내러티브로서 강한 공분과 희열을 전달한다. 나비족의 본거지를 무참히 파괴하는 인간들의 공세는 그 자체를 보는 관객의 마음을 짓이겨버릴 것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이 붕괴되는 광경을 통해 관객은 인류가 저지른 침탈과 파괴의 역사를 환기시킬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단순하고 명확하게 의표를 찌른다. 후반부에 (아바타의 육체를 빌린) 제이크 셜리가 이끄는 나비족의 역공이 대단한 쾌감을 부르는 것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연동된 상승효과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동족들의 죽음에 대단한 희열을 느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바타>는 인류의 자멸을 통해 인류의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인 셈이다. 이미지의 혁명이란 수사는 실상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아바타>가 영화의 미래라 불릴만한 근거도 이 지점에 있다.
<아바타>의 스크린은 단순히 기술적 진화를 전시하는 윈도우가 아니다. <아바타>에 동원된 기술적 진화는 영화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 도구로서 제 위치를 확고히 지킨다. 이는 3D비주얼이라는 기술적 대안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 안에서도 발전적인 답변이다. 단순히 전시적 효과로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3D비주얼은 분명 ‘영화적’이란 단어 안에서 충분한 가치를 설득한다. 물론 <아바타>는 단순히 체험적 행위만으로도 가치가 온당한 영화다. <아바타>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 대단한 수준의 체험이 숭고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는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현존하는 3D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장담해도 좋은 첫 번째 성과다. 제임스 카메론은 로버트 저메키스가 결코 헤어나지 못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무덤 옆에 자신의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모션 퍼포먼스 캡쳐’라는 새로운 촬영기술을 도입해 완성했다는 <아바타>의 디지털 캐릭터들은 낯선 이미지를 통해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상상력을 두른 채 실사적인 체험을 가능케 한다. <아바타>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동자에 감정을 구현했다. 실제 배우의 외모가 서린 동시에 나비족의 외형적 특성이 포장된 <아바타>의 디지털 외계인들은 선명한 눈동자의 자연스런 동공 수축과 근육 이완을 디테일하게 전시하며 이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그 디지털 캐릭터들의 눈망울은 <아바타>의 감정적 깊이를 드러내는 호수나 다름없다. 그 눈은 제임스 카메론을 테크놀로지의 장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방점인 동시에 <아바타>의 기술적 진보에 진심마저 담아낸 진화의 산물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화시키고자 ‘아바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이를 통해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타이타닉>을 통해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했던 제임스 카메론의 오만한 발언은 <아바타>를 거쳐 진정한 자신감으로 진화했다. <아바타>라는 결과물로서 자신의 왕좌를 증명해냈다. <아바타>는 분명 새로운 세기를 일군 영화적 유산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21세기 고전이 탄생했다.
지난 15년간 이석원은 뮤지션으로 살아왔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드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서 다섯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하지만 2009년은 이석원이란
이름 석자에서 뮤지션이란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존재로서의 이력을 알린 한 해다.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 2009’의 트레일러를 연출했고, <보통의 존재>란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동시에 지난해 발표한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3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상에서
3관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대중의 너른 지지마저 얻었다. 음악가로서의
깊이를 채우는 동시에 새로운 영역으로 존재를 확장해갔다.
이와 같은 이석원의 행보를 지켜본 누군가는 그를 아주 특별한 존재라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동떨어진 세계의 일처럼 여겨지는
기회를 차례로 성취해 나가는 이의 삶이란 특별하게 여겨져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석원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아주 보통의 존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는 목을 보호하기 위해 며칠간 입도 열지 않는다는 예민함은 완벽한
무대를 연출하고 말겠다는 최선의 집념이다. 동시에 그 완벽한 무대는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완벽한 무대를 이루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는 특유의 기질로서 쟁취해야만 하는 그만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이석원의,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분명 꿈의 팝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 음악을
하면서 즐거운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이석원의 말은 의외의 사실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스스로를 투과하는 창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족했다. 이석원에게
음악이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하고자 했던 수단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신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가치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는
아주 보통의 완벽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만남을 거듭한 이석원과의 두 번째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첫 번째 인터뷰로부터 정확히 이틀 만에 이석원은 메일을 보냈다. 인터뷰를
다시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 인터뷰에 첨언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전히 다시 하자는 제안이었다. ‘인터뷰가 중간에 끊긴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다’는 그는 ‘인터뷰에 기록된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상대와의 인터뷰가 분명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발음하는 이와의 대화를 한 차례 더 이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인터뷰가 이석원의 마음을 온전히 대변하는 결과물로 완성됐다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자신의 작품에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던 이석원의 노력처럼 이 기록 역시 이석원이란 인물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는 진심 정도는 전해지길 바란다. 아주 보통의 완벽주의자를 위한 아주 보통의 인터뷰로서 말이다.
왜 인터뷰를 다시 하자고 했나?
그날 시간적인 문제로 영화제 직원 분이 인터뷰를 중간에 자르지 않았나. 그리고 나도 공연을 앞두고 힘든 상황이었고, 사실 영화 관련 인터뷰로만 생각했다가 예기치 않게 음악적인 질문을 많이 받게 되니 급작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
원래 인터뷰에 호의적인 편인가? 아니면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가?
솔직히 나는 인터뷰를 힘들어하는 편이다. 내 일기를 본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일기에 여러 차례 썼던 것처럼 인터뷰에서 내가 한 답변들을 나 스스로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내 음악을 듣고, 일기를 보고, 방송이나 공연을 통해서 나를 접하고, 나를 볼 수 있는 여러 경로가 있지 않나. 그 중에서 라디오에 나와서 떠드는 것과 인터뷰에서 말하는 건 내가 한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거짓말했다거나 이런 말이 아니다. 뭐라 해야 할까. 사람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그 순간 내가 했던 말이 활자로 남고 기록이 돼버리니까 그게 내 영원한 진심으로 남게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싫다. 항상 인터뷰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다 후회한다. ‘내가 그 말을 왜 했지?’ 이런 게 너무 많아서. 이건 같은 맥락인데 나는 작업할 때도 수정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걸 굉장히 힘들어한다. 앨범이나 글은 내 맘대로 끝없이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할 수 있지만 인터뷰는 수정하기가 힘들지 않나. 그래서 다시 할 수 있을까 겸사겸사 물은 거다. 아마 지난 번 인터뷰와 같은 질문을 해도 전혀 다른 대답이 많을 거다. 감안해서 들어달라.
‘지산 락 밸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올해 처음으로 개최된 페스티벌이었는데 어땠나?
좋았다. 내가 볼 땐 페스티벌 가운데 주최측에서 이렇게 잘 준비한 경우는 드물다. 공간도, 사운드도 좋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해갔기 때문에 더 좋았다. 여기서 완벽이라는 의미는 이렇다. 사실 본인들이 완벽하게 라이브를 준비해도 사운드 쪽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공연은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전속 엔지니어를 항상 대동하고 간다. 일단 소리가 완벽하게 보장되니까 우리가 가진 걸 100% 보여줄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좋았다.
외국의 뮤지션들과 함께 참여하는 페스티벌이란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오아시스(Oasis)’와 같은 날 공연했는데, 기라성 같은 외국 뮤지션과 한 무대에 서거나 그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 자체로부터 어떤 자극을 느껴보진 않았나?
일단 오아시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오아시스의 셋 리스트가 사실 친절한 편은 아니다. 변동도 별로 없고. 물론 내가 좋아하거나 아는 노래가 많이 나오면 좋지만 이미 여러 차례 봤기 때문에 특별하진 않았다. 그보다 우리 앞에 공연했던 ‘프리실라 안(Priscilla Ahn)’이 굉장히 사랑스럽더라.
전국 투어를 마친 뒤 첫 공연이었다. 밴드 단독 콘서트와 페스티벌의 라이브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어떤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거의 7달씩 콘서트를 할 정도로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인데 표현이 좀 그럴지 모르지만 용도별 공연을 많이 한다. 우리 단독 콘서트, 그 중에서도 극장 콘서트, 그리고 우리 콘서트 브랜드인 ‘월요병 콘서트’라는 것도 있다. 월요병 콘서트냐, 아니면 일반 극장 콘서트냐, 이에 따라서 분위기는 완전 달라진다. 같은 행사라도 일반적인 대학 축제냐, 지역 행사냐, 에 따라 다르듯 행사마다 종류가 다르고, 공연을 준비하는 의도에 따라서 분위기도 굉장히 달라진다. 페스티벌 같은 경우는 비싼 돈을 주고 먼 데까지 놀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들이 모인 날이니 만큼 우리도 작정하고 달려줘야 된다. 그러니 만약 이번 공연에서 우리를 처음 봤거나 앨범만 들어봤던 사람이라면 좀 놀랐을 거다. 말랑말랑한 그룹인 줄 알았는데 라이브에서는 굉장히 파워풀하더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럴 땐 우리도 다 막 미쳐서 노니까. 그러다가 그런 페스티벌이 아닌 다른 공연에서 우리를 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일 거다.
2004년도에 김C와 함께 OCN에서 방영하는 <오씨네 영화잡기>에 출연했다. 16mm 카메라로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무한도전>과 비슷한 부류의 프로그램이었다. 나랑 김c, 용이 감독, 이렇게 셋이 묶어서 출연했는데 매주 영화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하거나, 게스트들을 모시고 토크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김태용 감독, 만화가 강풀 외에도 다양한 게스트가 나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막판에 셋이서 영화 만들기에 도전한다는 컨셉으로 진행했는데 사실 그땐 영화 만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방송을 워낙 모를 때였고 그냥 좀 웃기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냥 제작진들이 짜주는 대로 갔던 프로그램이랄까.
김C는 요즘 <1박 2일>과 같은 버라이어티에서 왕성하게 방송활동 중이다.
재미있더라. (웃음)
그런 오락방송과 전혀 매치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정말 독특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를 구축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땠나?
나는 처음부터 김C가 방송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방송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자리잡고 적응할 수 없다. <1박2일>에서 김C는 웬만하면 뒤에 있는 편인데 그것도 오히려 자기 자리를 알기 때문에 똑똑하게 적응하는 방식인 거다. 처음부터 나는 김C가 방송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금 말한 김C와 마찬가지로 방송을 통해 활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인이 몇 명 있다. 근래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도 출연했었는데 방송에 대한 욕심은 없나?
<오씨네 영화잡기>이후로 TV에 나가는 것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 를 떠나서 내가 TV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스스로의 결론이었다. 당시 그 프로가 ‘투니버스’를 제외한 케이블TV 시청률 1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내가 웃기는 건 좀 하거든. (웃음) 그런데 나를 굉장히 소모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기본적으로 나는 카메라가 돌아간다는 걸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냥 체질이 아닌 거지. TV에서 라이브하는 것도 굉장히 싫어한다. TV카메라가 있으면 그 자체로 내가 편하지 않아서 내가 가진 백(100)을 보여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서 우리가 가진 백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병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TV카메라 앞에선 웬만하면 공연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때 얻은 결론은, ‘TV에 다시 나가지 말아야겠다’. 사실 그때 돈은 많이 받았지.
짭짤했겠다.
괜찮았지. 거기다가 ‘언니네 이발관’ 수입까지 더하니 갑자기 재벌 된 거다. (웃음) 그렇게 돈벌이는 좀 됐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나를 소모하는 느낌을 견디기 어려웠다. 요즘도 김C랑 연락하고 지내는데, 김c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저렇게 방송을 아는 사람은 방송하면서 음악도 할 수 있지만 확실히 나와는 다른 길인 것 같다고.
사실 방송을 어려워하는 것 같진 않던데, 그런 불편함을 연출적으로 가리는 건가?
기본적으로 나는 연출이 가능한 인간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 그게 가능한 건 그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대나 방송, 아니면 사석에서마다 내 모습들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유년시절 친구를 대하는 것과 회사 동료를 대할 때 완전히 달라지지 않나. 여기선 되게 까불까불 한데 여기선 의젓하게 오피셜한 모습을 보이고, 이런 경우 같은 거다. 그게 ‘난 얘네들 만나면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연출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런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무대 올라가면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방송에 나가면 그 상황이 날 그렇게 만드는 거다. 아무래도 방송은 긴장되고 불편하다. 방송이 내게 요구하는 모습은 오직 하나니까. 재미있거나 웃겨야 한다. 그래서 갖은 헛소리 다 해야 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다가 내 일기를 보면 또 뭔가 다른 사람 같고.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진짜일까, 싶어질지도 모르지. 그건 내 성격이 분열적이거나 다중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씬디 2009(디지털시네마서울 2009)’에서 본인이 연출한 트레일러는 지난 두 개의 씬디 트레일러와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완성됐다. 김영하 작가나 이상은 씨가 만든 트레일러가 단순히 풍경을 담은 영상에 가깝다면 당신의 트레일러는 온전히 연출된 것이다. 보다 영화적 방식에 가깝게 접근했다 할까. 일기에서 밝힌 연출의 변에 따르면 ‘1분짜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던데 그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나로서는 일단 트레일러 자체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그 두 분이 만든 트레일러 밖에 샘플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될 것 같은데, 앞선 두 분들의 작품이 그 분들의 선택이었다면 난 좀 더 거창하게 찍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러프하게 찍어야 되는 거야?”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더라.
주최측에?
아니. 내 주변에 영화 하는 분들에게. 나는 음악보다 영화에 관련된 친구들이 더 많다. 어쨌든 내 맘대로 찍으면 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지난 두 분은 직접 촬영까지 했다. 뭐가 됐든 나는 내 연출의도에 맞게 기술자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지, 내가 기술적인 부분까지 담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면서 그 안에 매몰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촬영을 하지 않으면 더 자유롭게 구상하고 연출이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감독이 돼서 판을 좀 벌려보자 싶어졌다. 촬영감독도 구하고, 프로듀서, 조감독, 주연배우까지 쫙 구해서 진행하게 됐다. 언제 또 이런 일을 해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연출 경험은 전무했을 텐데.
우리 홈페이지에‘녹음 스케치’라는 섹션에 제작동영상이 있다. 사실 그게 영화하는 분들에게 약간 화제가 됐었다. 신선하다, 재미있다, 이런 반응이 있었다. 그런 경험 정도?
다 떠나서 영화 현장이라는 걸 구성하는 것 자체는 완전히 처음이었으니까.
완전 처음이었지.
그 현장을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트레일러 제작이 시작된 셈이다. 난관은 없었나?
일단 처음엔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무슨 일이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만 확실하면 그 뒷부분들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물어보고, 알아나가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구상하는 게 힘들었지. 실제로 판을 벌려나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제작비는 어떻게 조달받았나?
일단 제작진행비용으로 사무국에서 돈 100만원 정도가 나왔다. 나 혼자 찍었다면 다 먹었겠지? (웃음) 사실 무보수로 도와주신 분들도 많고, 촬영감독님께는 차비 정도만 드렸다. 어쨌든 공짜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지 않나. 조명이나 세트는 실비를 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돈을 좀 썼지.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하하하>에 참여한 박흥렬 촬영감독을 섭외했다. 어떻게 접촉했나?
<싸움의 기술>시나리오를 쓴 민도현 감독이 소개시켜줘서 촬영 전에 홍대에서 미팅을 했다. 그 분이 당시 바로 몇 일 뒤에 홍상수 감독 차기작 크랭크인에 들어갈 상황이라 굉장히 바빴다. 중요한 건 페이도 줄 수 없었고, 사실 나를 도와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그 분을 뵙고 내가 이런 걸 찍고 싶다고 확실히 얘기하고 그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게 만들어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다. 결국 그 분께서 그렇게 느끼셨으니까 촬영을 하셨겠지.
차승우 씨를 배우로 섭외했는데 처음부터 생각했던 캐스팅이었나?
처음부터 승우를 생각한 측면이 크다. 그런데 승우가 앨범 녹음 중이었기 때문에 만약 차승우가 못하게 되면 차선책으로 내 주변의 누구로 해야겠다 정도의 생각은 있었다. 주인공은 영화배우처럼 멋있는 놈이어야 했기 때문에 내 주변에 멋있는 놈 원, 투, 쓰리를 뽑아서 이 놈이 안되면, 이 놈으로 가자 싶었지.
차선으로 생각했던 건 누구였을까?
<비바소울>의 성룡이하고 이지형.
아무래도 남성성이 물씬 느끼는 느낌으로 보자면 차승우가 최선책처럼 보이긴 한다.
그렇지. 지형이도 비주얼은 괜찮지만 걔가 마초적인 느낌은 또 아니거든. 그래서 만약 지형이로 가면 지형이가 자주 쓰는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룡이로 가면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했고. 성룡이는 차승우랑 또 다르게 남성적으로 생겨서 만약 그 친구로 갔다면 그 친구에 맞게 뭔가가 또 됐겠지.
결과물은 마음에 드나?
나는 대만족이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그림이 딱 그대로 나와서 만족한다.
영화 쪽에 지인이 많은 것 같다.
사실 나는 음악하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일이 거의 없다. 뭐라 해야 될까. 나는 음악을 음악적인 행위로써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괴리감 같은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음악적인 음악이라는 건 음악하는 사람 특유의 어떤 관성이라던가 음악하는 사람의 관습적인 판단들이랄까.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데 단지 어떤 음악적인 이유에서 좋다고 판단하는 부분들에서 대해서 알러지가 있다. 그래서 음악하는 애들보단 영화하는 사람이나 방송작가, 출판 쪽 사람들과 있을 때 오히려 할 얘기가 많아진다.
그 음악적인 음악이란 기능적인 기교에 천착하는 것을 의미하나?
기술적인 테크닉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도 스튜디오 녹음 경험만 수십 번이고, 녹음이나 앨범 만드는 작업에 대해서는 테크니션이 됐다고 봐야 된다. 중요한 건 테크닉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단 단순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서 음악이건 영화건 책이건 본질이 무엇인가의 문제다. 울림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랄까. 우리는 앨범을 만들거나 라이브를 할 때 이 바닥에서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동원해서 작업한다. 음악적으로 최고의 지식과 기술이 동원된다는 말이다. 그건 울림을 제대로 내기 위한 종을 만드는 작업인데 내가 아까 말한 부류들은 종을 만들되, 그 종의 알멩이가 비어있다. 즉, 기자에겐 독자가 중요하고, 정치인에겐 유권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게 핵심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음악은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음악을 만든다는 건 좀 특별한 일이다. 물론 글을 쓰거나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표현한다는 공통적 행위로서 별로 다를 건 없다. 단지 외피가 다른 거겠지. 처음 음악을 할 때부터 줄곧 생각했던 건 내가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거다. ‘어떻게’라는 건 결국 ‘무엇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에 집중하다가 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단지 음악하는 게 좋기 때문에 음악공부를 하고, 유학도 다녀오고 해도 정작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음악을 들어보면 공허하다. '어떻게'만 죽어라고 팠는데 정작 '무엇을'이 없다는 거다. 불행한 일이지. 갖고 있는 컨텐츠 자체가 빈곤하니까 방법론을 아무리 연마해도 공염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앨범에 대한 성취감은 어느 정도인가? 자신을 음악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있기 때문에 15년 동안 음악을 해왔을 텐데.
오히려 나는 음악하는 자체를 굉장히 괴로워하는 타입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뒤따를 ‘어떻게’라는 작업이 굉장히 고통스럽다. 최근에 만든 5집엔 억대의 돈이 들어갔다. 우리가 앨범을 3만장 넘게 파니까 손익분기가 될랑 말랑하더라. 일반적인 밴드의 녹음비 치고는 아주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사운드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몇 년간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투입돼서 작업해야 되고, 엄청난 돈도 들어가야 되고, 그래야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계산이 서면 이미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거다. 처음에 우리에게 배정된 작업비가 1억이었다. 그런데 1억 5천이 되고, 2억이 넘어갔다. 기간도 1년이 넘어가버렸다. 그러니까 회사를 상대로 설득해야 하고, 협상해야 되고, 이해를 이끌어내야 되고, 이런 과정 안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가져가고, 끊임없이 자평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거덜나더라. 그럴 정도로 해보니까 이제 나에겐 그 ‘어떻게’라는 게 즐거울 수 없는 거다. 나에겐 음악이 좋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좋아서 하고 싶어 미치겠다. ‘뮤직 메이스 미 하이(Music makes me high).’ 이런 애들하고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란 거다. 이제 와서 나는 음악전문가가 됐고, 이 바닥에서 인정도 받게 됐지만 그런 음악적인 사람과 나 사이엔 굉장히 괴리가 있다.
그 괴로움을 참는 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일 거다.
원래 트레일러 편집에 할애되는 시간을 이틀로 나눠서 12시간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2시간 만에 끝내버렸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아는 감독님들이 와서 쫙 앉아있었는데 내 힘으로 그냥 편집해버렸지. 나는 음악에 대해서 음악적으로 접근했다기 보단 어떤 분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범용적인 접근을 했다. 그러니까 내 머리 속에 있는 걸 끄집어 내서 현실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15년간 음악을 통해서 단련돼 온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내가 직접 기술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 없다. 기술자들과의 파트너십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그렇게 작업해왔다. 만약 내가 음악만 하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영화현장에서 판을 벌리고 프로 촬영기사랑 작업할 수 없었을 거다. 완전 휘둘렸겠지. 나는 내 가게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거나 책을 쓰거나 할 때도 내가 머리 속으로 원하는 걸 끄집어 내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경험적 노하우를 터득해왔다. 음악이라는 협의에 매몰돼 있는 게 아니라 결론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음악이건, 영화건, 책이건, 표현이 가능한 작업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에 천착해온 거다.
결국 당신에게 음악이나 연출, 그리고 글은 자신의 세계관을 소통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셈이다. 자신을 담아낸 결과물에서 값어치를 느끼나 보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그런 측면이 크다. 대신 방금 말한 부분에서 소통이라는 단어만 표현으로 바꾸면 적절하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완벽하게 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통이란 단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표현이나 발산이라는 말은 좋아한다. 소통은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그 사람이 제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좋겠다. 단지 작품의 창조자로서 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끄집어낸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입맛대로 그걸 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경험에서 기반된 결론이 아닐까?
그건 절대적이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도 사소한 대화조차 안 된다. 이번에 작업하는 내 책에 들어가는 내용 중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나한테 막 화를 내신다. 어제 냉장고에 넣어놓은 가지 나물을 왜 안 먹냐고, 그래서 자기가 지금 먹고 있지 않냐고, 화를 내시는 거다. 그럼 나는 이해가 안 가지. 그래서 가지 나물을 해놓으면 오늘 먹어도 되고, 내일 먹어도 되는데, 왜 하루가 지나도록 먹지 않는다고 화내시고 그걸 왜 엄마가 먹어 치우는 거냐, 하고 물으면 상하니까 그렇지, 답하신다. 아니,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데 그게 하루 만에 왜 상해요, 그러면 덥잖아, 그러시고. 그러니까 이건 그냥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엄마 머릿속엔 대화에 필요한 논리나 상식보단 내 아들은 내가 해주는 반찬을 잘 먹지 않는다는 믿음이나 단정이 중요했기 때문에 대화가 될 수 없는 거다.
자식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만한 사연이 아닐까. (웃음) 어쨌든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불가를 민감하게 느끼는 만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선 더욱 민감해질 수도 있겠다.
너무 많지. 오늘 이 인터뷰도 ‘내 앞에 앉은 기자가 내 이야길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그리고 녹음까지 돼 있었고 분위기도 좋았으니까 내가 이야기한 내용 그대로 나오겠지.’ 이렇게 생각했더라도 나중에 기사를 보면 ‘이거 내가 말한 의미랑 다른데’ 라고 실망하게 된다. 토시 하나 틀려지면 의미가 완전 달라지잖아. 예전에 인터뷰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5집 앨범에 엄청나게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답변했는데 나중에 기사를 보니까 ‘제작비도 엄청 들어갔을 거에요.’ 이렇게 적혀있더라. 나는 그런 말한 적 없거든. 나는 전체적인 디렉터이기 때문에 우리 앨범 제작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에 일기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일기의 사소한 문장조차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했더라.
내가 일기를 9년 정도 쓰고 있는데 옛날엔 안 그랬다. 아마 작년부터 그랬을 거다. 솔직히 자기가 써놓을 걸 남 보는 자리에서 고치면 초라하잖아. 자기가 써놓고 구리게 느끼니까 지웠나 보다 이럴 수도 있고. 5집을 작업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내가 원하는 만큼 후속 작업을 해보는 게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그걸 지난 4집까지는 못했지만 5집 때 그게 정말 최대치까지 허용되는 여건을 얻었다. 내가 100만 번 고치고 싶었다면 99만 번까진 됐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내가 원하는 퀄리티에 근접한 결과가 나오더란 거다. 거기서 내 강점이 수정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천만 번을 고치더라도 고칠 수 있으면 고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쪽팔리다는 생각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도 고친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도 언제부턴가 얘는 원래 고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게 서로간에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니까 편하더라.
9년 간 웹상에 일기를 써온 것도 어쩌면 아까 말한 것과 비슷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의 일환이라 여겨서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 일기가 개인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사적인 영역이면서도 공적인 게시판 역할을 하는 것 같더라. 일기를 오픈된 공간에 전시하기로 마음 먹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아마 뮤지션이 그런 공간에 일기를 쓴 것 자체는 내가 거의 최초일 거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굉장한 전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뭐든 단순한 계기로 시작한다. 2001년도에 홈페이지를 개설할 때가 2집을 내고 망해서 3년 동안 음악을 못하고 다시 출발해야 할 시점이었다. 내 생각엔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때이기도 했고. 왜냐면 망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일기 밖에 없더라. 예전에 PC통신 시절부터 글 쓰는 걸 되게 좋아했다. 그 때 썼던 글에 내 사변적인 이야기도 많았고, 그 자체가 나에게 좋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시판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거의 최근에 와서 이뤄진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일기라기 보단 더 솔직한 내면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어떻게 그런 밑바닥에 있는 속마음까지 다 쓸 수 있냐고, 괜찮냐고. 나는 진짜 괜찮다. 완전히 속까지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게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작년부터 형식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워졌다. 예를 들어서 일기인데도 일기처럼 쓰는 게 아니라 서간문처럼,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처럼 쓸 때도 있고, 아니면 말한 대로 사람들 보라고 게시판처럼 쓰는 글도 있고, 아니면 누구 한 사람만 보라는 식으로 쓸 때도 있고.
9년 동안 그 포맷을 유지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한때는 일기란 것에 대해서 고민도 많았다. 아무래도 남이 보는 일기이기 때문에 정말 쓰기 싫을 때도 많았지. 이게 정말 내 솔직한 글인지, 쓰기 싫은데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는 순간도 있었다. 일기에 대한 피드백도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갈등들이 생기기도 했고. 다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부담이나 갈등들이 사라지고 편해졌다. 그래서 정말 100%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쓴다. 반말로 썼다가, 존대로 썼다가, 욕을 썼다가, 그냥 내 맘대로지. 만약 지금 와서 내 일기를 읽으면서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남 보라고 의식적으로 쓴 거 같다? 그것조차도 제 솔직한 개인적인 심경, 의도가 있다 해도 의도조차도 나의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타인의 반응을 의식했던 시점이 있었나 보다.
의식할 수 밖에 없지.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어쩌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내가 가진 무기가 솔직함 밖에 없기 때문에. (웃음)
그런 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라도 있었나?
9년간 갈등했는데 해방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 고민하게 되면 받아들이게 되는 때가 있지 않나. 그야말로 정말 그렇게 받아들이게 됐다. 최근에 와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됐지만 남들이 보는 거니까 때론 의식하게 되도 어쩔 수 없고, 그런 내 모습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긍정하게 됐다. 그리고 옛날에는 일기가 재미가 없어졌네, 뭐가 어쩌네, 그런 피드백이 오면 재미있게 써야 되나, 고민스럽기도 했다. (웃음) 지금은 그런 건 없다. 그냥 잘못된 건 지우면 되니까. (웃음)
사실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 같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훈련이 된다.
훈련? 무엇에 대한 훈련?
글쓰기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와 고등학교 시절 일기가 다르듯 글을 쓰다 보면 점차 문법을 신경 쓰게 되고, 형식에 공을 들이게 된다. 일기를 써오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한 욕심이 발전하진 않던가?
나는 반반인 거 같다. 일기를 쓴다는 게 글쓰기라는 면에서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기 안에 다른 글을 쓸 때 말이다. 일기는 아무래도 일기이기 때문에 패턴화되고 고착화되는 면이 있다. 내 일기엔 특정한 분량이 있다. 한 이 정도 스크롤이면 끝난다고 할만한 분량이 항상 정해져 있다. 만약 그런 내가 장편소설 분량의 글을 써야 된다고 하면 망하는 거다. 9년 동안 이만큼 밖에 안 써봤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다른 영역의 글을 쓸 땐 굉장한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가을에 출판될 책을 작업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책인가?
그냥 에세이다. 산문집이라 하기도 하는 수필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글쓴이가 살아온 이야기나 신변 잡기, 결국 자기 생각을 쓰는 거잖아. 나도 똑같다.
얼마 전,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씨도 여행기를 냈다. 이상은 씨도 여행기 책을 낸 적이 있고, 근래에 주변의 뮤지션들의 출판사례가 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고무되는 느낌은 없나?
아니, 나는 오히려 그럴 수록 쓰기 싫어졌다. 나는 남들이 하는 건 무조건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요즘에 왜 그렇게 책들을 많이 내나 싶어서 나는 내기 싫어지더라. 그런데 내가 책을 내게 된 건 ‘페이퍼’의 황경신 편집장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5집을 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출판 제의를 많이 받았다. 7군데 이상에서 제의를 했다. 돈을 대줄 테니까 런던에 다녀와서 ‘언니네 이발관 런던 정복기’ 이런 걸 원하는 대로 써봐라, 별별 제의가 많았다. 그걸 다 고사했다. 그런데 막판에 황경신 편집장이 와서 얘기하는데 그 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출판 제의를 비롯해서 트레일러 제작 의뢰도 그렇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제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
내 음악하는 동료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부탁들은 음악적인 분야로 한정된다. 물론 나한테도 피처링 좀 해달라, 가사를 써달라, 이런 부탁도 들어오지만 말한 것처럼 책을 내자, 영화를 만들자, 방송을 찍어보자,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 사실 이게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 왜 그럴까, 나도 생각해봤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주변의 가까운 분들도 많이 얘기하는데 그 사람들 말로는 내 음악도 음악이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호기심을 주는 경향이 있단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자꾸 나에게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더라. 최근에도 출판 제의를 받았었는데 1년 동안 세계일주를 다녀와서 책을 써보란다. 나는 태어나서 일에 관련되지 않은 개인적인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왜 이런 제안을 나한테 하냐고 물어보면 의례적인 답변만 온다. 이석원이라는 사람에 주목했다, 어쩌고 저쩌고. 어쩌면 이석원이란 사람에 주목했다는 표현에서 내 주변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음악을 하는 자세도 음악을 음악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의 음악, 사람으로서의 음악에 당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결국 내 음악이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 음악으로 가기보단 사람으로서 전달되는 측면이 있는 거 같다. 결국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는 게 달가울 것 같진 않다.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셈이니까.
그건 좋던데. (웃음) 난 원래 집 떠나면 못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행을 너무 가고 싶다. 지금 나이가 마흔 가까이 됐는데 작년부터 사는 것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졌다. 그래서 결국 책도 하게 됐고. 나이 먹으면 사람이 그러잖아. 갑자기 안 하던 걸 한다고, 나도 그런 것 같다.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봐야겠더라. 그래서 여행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졌다. 작년 연말에 콘서트 끝나면 가야지, 그랬다가 올해 5월까지 콘서트하는 바람에 못 가고, 이번 여름엔 책 써야 되니까 못 가고, 가을을 넘기면 이제 가야겠다고 지금 생각하지만 또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나란 사람은 책을 내기 위해 가게 됐건, 내 자의대로 가게 됐건 마찬가지다. 내가 일기에서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듯이 여행을 갔다 와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여행기를 쓰기 보단 어차피 나를 위한 사변적인 여행기를 쓸 거다. 책 내줄 테니까 돈 받고 여행가라, 해서 다녀왔다 해도 다는 그에 대해 완전히 다 쌩까고, 내 의도에만 자유롭게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수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러니까 일단 보내주면 나야 좋지. (웃음) 핑계 삼아 갈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고. 그런데 당장 오케이하진 않았다.
지금 와서 글이 큰 의미를 준다는 말처럼 뭔가 지금에 와서 새롭게 흥미를 끄는 요소들이 생기나 보다.
15년 동안 음악을 하면서 여기까지 정말 힘들게 온 대신 글을 통해 구원받았다. 음악은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5집도 내가 15년 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지식, 노력을 한계치까지 꺼내서 죄다 쏟아 부었는데 결국 100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그게 고통이 되고 아쉬움이 된다. 그런데 이 글쓰기라는 건 단 한 줄로도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글쓰기가 쉽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표현에 대해 내가 만족스럽다는 건 내 마음이 지금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고 느낄 때다. 나에겐 그런 게 너무 좋다. 음악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경험을 주더라.
5집은 개인적인 앨범이라고 말해왔다. 그 이전까지의 앨범이라고 해서 개인적인 범위와 무관한 작품들이 아니었을 텐데 특별히 5집을 개인적인 앨범이라고 밝힌 까닭이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이발관을 알고 나를 아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음악이나 글이 모두 나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됐다는 걸 알 거다. 다만 5집이 개인적이라는 건 다른 의미다. 지난 4집 같은 경우엔 이야기가 없다. 굉장히 통속적인 가사이기도 하고. ‘그대 지금 어디 있나요. 나 알고 싶어요.’ 이런 건 이야기가 아니다. 일반적인 감정을 가사를 담은 거지. 이번 5집에서는 그게 아니라 정말 깊은 내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는 거다.
5집의 가사가 개인적이란 말을 자전적인 일기라 이해해선 안되겠다.
일기라, 내 가사가 앞으로 어떨지 몰라도 지금까지는 거의 그랬던 거 같다. 단지 5집에서는 이발관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극대화된 거 같다. 내가 어떤 새로운 걸 했다기 보단 계속 내 개인적인 것들을 쓰다가 5집을 통해서 개인적인 표현이 폭발해버렸다고 할까? 언제 내가 개인적인 걸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5집은 레코딩 과정에서 수 차례 수정을 거쳤고, 그만큼 예정 발매일도 늦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하지만 5집은 명반이라는 평까지 얻었고 신에서도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이 뒤따랐다. 자신이 느끼는 불만족에 비해 외부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느낌이다. 아이러니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그렇지. 나는 4집 앨범이 나왔을 때 사운드적으로 완전히 정점을 쳤기 때문에 다 끝날 줄 알았다. 그리고 5집을 내면서 이 앨범을 내면 우린 망한다, 까진 아니었지만 어디로 숨고 싶었다. 앨범에 대한 스스로의 자신감과 반응이 반대로 가니까 아이러니를 많이 느끼지.
사실 4집까지는 자신의 앨범을 피력할 때 상당한 자신감을 어필하곤 했다.
그건 사실 창작하는 사람이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본인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떻게 듣는 사람을 만족시키겠나. 그런 모습이 4집까진 있었다. 그랬는데 5집부터는 많이 사라졌지.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타이틀부터 심경의 변화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야기 컨셉의 앨범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서사적인 형태에 기획적으로 접근한 앨범이라 봐도 될 것 같다. 그런 형태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뭔가?
5집을 만들면서부터 창작자로서의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변화인데, 그 모든 게 이야기라는 세 글자로 귀결된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창작자로서 고민하다 얻은 건, 나는 이야기꾼이 돼야겠다,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사람이 돼야겠다, 이런 결론이었다. 그래서 5집도 그렇게 만든 거다. 굉장히 개인적인 내 이야기를 갖고 픽션을 만들어낸 거거든. 다른 무엇을 해도 결국 다른 무엇을 하더라도 나한테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중요해진 거다. 아마 앞으로 당분간 그럴 것 같다.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음악을 시작한 경위는 사실 만들어낸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했다.
좀 만화 같지. (웃음)
가상의 밴드 이름을 내걸고 PC통신 게시판에 글을 쓰고, 이를 통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다시 한번 그 거짓 밴드 이름을 언급했고, 결국 그 거짓 이름이 진짜 밴드의 이름이 됐다. 그 당시 밴드 이름을 내걸었을 때 진짜 밴드를 할 것이란 생각이나 했나?
전혀, 상상도 못했다. 시작하고서도 얼떨떨했다. 앨범을 낼 거란 상상도 못했고. 내 인생이 좀 만화 같다. 팔자인가 보다.
결과적으로 그게 지금의 당신을 좌우해버린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그게 발단이 됐지.
만약 요즘 같았다면 거짓말 했다고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웃음) 그 당시를 종종 되새겨볼 때가 있나?
15년 전인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고 여기까지 워낙 정신 없이 왔으니까. 확실한 건 내가 아까 말한 음악적인 음악가들과 나는 유리되어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을 좋아서 한다. 음악을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이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음악을 시작한다. 너무 좋아서 기타를 배우고, 건반도 배우고, 곡도 만들어보고, 그런데 그 곡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다 보니까 프로가 되고, 이런 거잖아. 그런데 내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음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음악이 고통이었다. 음악을 하다 보니까 음악을 기술적으로 들어야 되더라. 난 음악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직업으로 삼고 나니까 그 즐거움이 사라지더란 말이다. 그래서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이걸 내가 왜 했나 싶을 만큼 너무 괴로웠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항상 스테레오 타입화된 음악가들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음악을 시작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지만 확실한 건 내가 음악을, 밴드를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싶어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항상 그런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음악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벽을 느낀다.
정말 음악을 위해서 자신을 매진하는 태도에 어울리긴 힘들다는 말 같다.
그게 그 사람들이 음악을 대하는 대다수의 방식이니까 내가 특이하다고 봐야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다. “그럼 왜 하냐?” (웃음) 그렇게 고통스럽고 싫은데 왜 하냐고. 그럼 정말 할말이 없지. 이번에 트레일러할 때도 사람들이 계속 즐기면서 하라는데 난 작업할 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내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작업은 글쓰기 밖에 없다. 정말 특이하지.
어째서 글쓰기만큼은 즐길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뭔가 즐길 수 있는 작업이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까.
정말 놀라운 경험이지. 완전 쏘 해피다.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할 수 있는 작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음악을 생각하면 너무 우울해진다. 이제 6집에 들어가야 되는데 두려운 거다. 만약 더 이상 곡이 안 떠오르면 어떻게 하지? 사실 이런 두려움은 2집 때부터 갖고 있었다. 나는 15년 동안 내가 음악하는 사람이란 자각을 거의 못하면서 음악을 했기 때문에 항상 음악한다는 사람들과 있으면 괴리를 느꼈다. 어느 순간, 내일부터, 어쩌면 지금부터 더 이상 악상이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은 거다. 그리고 내가 만든 앨범들을 봐도 내가 만든 것 같지 않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서 6집은 잘 만들고 싶지. 정말 끝내주게 만들고 싶다.
언니네 이발관이란 밴드의 역사가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첫 앨범은 국내 앨범 역사에서 명반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 정도 평가를 받을 거란 생각을 했나? 의외의 사실이 아니었을까.
너무 명반, 명반하니까 민망한데. (웃음) 1집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만들었다. 하지만 뜻밖은 아니었다. 나는 1집과 2집이 나왔을 땐 난리가 날 줄 알았다. 막 100만장 팔리고 뒤집어질 줄 알았지. 그런데 너무 안 팔려서 완전히 실망했다. 오히려 5집은 한 삼천 명이나 살까 생각했는데 3만 명이 넘게 사버렸으니까 오히려 지금 더 희한하지. 왜냐면 데뷔앨범을 만들거나 2집 정도 된 아티스트들은 자신감이 이빠이 올라있는 상태다. 누구나 자기 앨범에 다 죽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었던 거지.
오랫동안 악기를 다뤘던 사람도 아니고, 밴드조차 급조한 당신이,
(말을 끊고) 아, 질문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자신감이 있었냐 하면 나는 그때 우리나라에 진짜 프로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카피밴드도 그렇고, 프로라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하면 저렇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내 밴드 경험이 일천하고 경험적인 소스가 많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탱하게 해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자기 중심이 확고하다는 것이었고 좋은 음악이 무엇이다라는 확신이 내게 있었다. 어렸을 대부터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누구보다 프로였고, 그걸 그대로 보여주면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쟤네들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에만 집착하는 애들이야, 이런 판단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로선 걔네들을 굉장히 무시하면서 시작하기도 했지.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앨범이 나온 당시는 홍대 인디밴드라는 개념이 정립되던 시점이었다. ‘델리 스파이스’도 1집을 냈고, ‘크라잉 넛’과 ‘코코어’ 같은 밴드도 막 데뷔했던 시점이었다. 당시는 홍대 인디밴드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니네 이발관도 그 한 축을 담당했다. 당시에 그런 분위기가 이뤄진 배경이나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나는 그런 여건이 조성됐다기 보단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이 폭발했던 거 같다. 그 계기는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커트 코베인이 죽으면서 사람들에게 오함마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고, 자연스럽게 그런 충격이 응집된 게 아닐까. 여건이 충족됐다기 보단 어떤 흐름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우리가 여건을 만들어갔다고 할까?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듣고 나니까 문득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마이클 잭슨이 죽은 건 슬프고 안타깝지. 사실 우리 음악에는, 특히 5집엔 흑인음악적인 부분이 많이 가미돼있다. 마이클 잭슨이 엔터테이너네, 이런 애들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음악 자체가 굉장한 음악 아닌가. 지금까지 음악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받지 않을 거란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
자살이란 점에서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 문득 떠오른다. 일기에 그에 관한 글을 남기기도 했던데 뒤늦게 그 죽음으로부터 어떤 단상을 얻었나?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각성을 얻었다.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많이 했다. 그분의 죽음을 접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줬다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단순하게 영향을 잘 받는 타입이 있고, 안 받는 타입이 있지 않나. 나는 후자다. 내 주변에 어떤 형 때문에 자기 인생이 바뀌었네, 누군가가 하는 걸 쫓아서 했네, 이런 애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태어나서 생전에 누구 말 듣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 할만한 적은 없었다.
커트 코베인은 아니었을까? (웃음)
내가 봤을 때 커트 코베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받은 정도의 영향일 거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을 특별히 꼽을 수는 없지. 특정한 인물은 정말 없는 거 같다. 어떤 자잘한 의미에서 나에게 이런 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있는지 몰라도 결정적으로 큰 의미를 남긴 사람은 없다.
올해 했던 인터뷰에서 6집이 마지막 앨범이 될 거라고 공언했더라. 정말 다음 앨범이 마지막이 될 거란 확신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의중이 궁금하다.
그건 내 두려움이자 막연한 예상 같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앨범 내는 추세를 봤을 때, 내가 마흔한 살이나 두 살쯤 6집이 나온다 하면 7집은 40대 중반에 나온다는 얘기거든. 그랬을 때 나처럼 음악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선에 도달하지 않은 앨범을 만들어낸다는 걸 견딜 수 없을 것이고 아마 그렇다면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을 거다. 생물학적으로 40대 넘어서 자기 페이스를 제대로 내는 작곡가가 얼마나 있냐고 봤을 때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그러니까 아마 6집이 마지막이 되지 않겠나 싶다. 사실 지금 생각으론 6집이 나올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물론 지금 우리 언니네 이발관에서 이능룡이란 친구의 존재가 많이 가려져 있다. 사실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걔가 다 만든다고 보면 된다. 어떤 물리적인 영역의 음악, 소리는 그 친구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제 내가 외면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많이 가려져 있지.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이능룡에서 시작해서 이석원이 마무리 짓는다는 공식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이 생기지. 능룡이가 끝내주는 걸 만들어도 나머지 50을 내가 만들어야 되는데 내가 제대로 못 만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거든. 능룡이는 이제 한참 정점에 있을 나이인데 내가 그 선을 맞출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다. 음악은 하면 할수록 되게 힘든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로서는 어떤 결의를 다진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내 평생 마지막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내 모든 걸 쏟아 붓게 될 거다. 그런 선언적인 의미에 가깝다. 내 평생 해왔던 일을 이 이후로 죽을 때까지 영원히 못 본다는 생각을 갖고 6집 앨범을 만든다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고.
멤버와도 그런 의견을 공유하나?
늘 한다.
주변의 지인들은 그런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던가.
그 기사가 나가고 나서 너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웃음) ‘정말 마지막이냐? 왜 그러냐?’ 물어보는 거지. 내 대답은 이렇다. 막말로 6집이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7집을 낸다 해서 사람들이 욕할 건 아니지 않나. ‘6집이 마지막이다’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는 사람들은 이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만큼 기다리는 사람들일 거란 말이다. 그랬는데 내가 6집이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7집을 내면 ‘어, 이 새끼, 그렇게 말해놓고 7집을 왜 내?’ 이러면서 싫어할 것도 아니고. (웃음) 만약 7집이 좋게 나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지. 다만 나는 일단 이 앨범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지금으로선 없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을 거 같다. 나도 7집까지 내고 싶다. 정말 늙어서까지도 내가 가진 베스트로 활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쉽지 않을 걸 아니까 두려움을 표현한 거지.
사실 모든 창작자가 매번 베스트라고 불릴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 않나. 사실 5집은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고 지금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해왔는데 그 이전까지의 앨범들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떤가?
아까도 말했지만 수정을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게 항상 제작 기간이나 돈 문제 때문에 스톱이 된다. 2, 3, 4집이 다 그랬지. 그게 내겐 한이 됐다. 나는 수정할 게 이만큼 남았는데 회사에서 중간에 앨범을 강제로 내버린단 말이다. 3집 때도 마스터링 끝내고 나서 내가, “마스터링 더하자. 이 앨범 나가면 우린 망한다.” 했더니 제작자가 정신병원에 신고한다 그래서 그냥 앨범이 나가버렸다. 나는 정말 3집이 나가면 우리는 망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5집 때는 회사와 담판을 지었지. 아무리 시간이 많이 들고,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내가 하자고 하는 데까지 해주소.
3집은 지금까지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당시로선 많이 팔렸지. 하지만 정말 나는 그 앨범을 지금도 못 듣는다.
그 앨범도 기회가 되면 다시 수정하고 싶나?
아니, 그러기엔 너무나 과거가 돼서. (웃음)
예전에 운영했던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에 가면 시네마테크 전단지가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있어 보여서 가져다 놨다. (웃음)
그런데 왜 시네마테크 전단지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영화 쪽 사람들을 많이 안다. 한번 살롱에 아는 분들이 시네마테크 쪽 사람들을 모시고 왔었다. 그래서 그 분들과 이야기하고 대답하다가 자기네 ‘시네마테크 친구들’이 되면 뭐가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그럼 갖다 놓으시라고 했다. 나도 그런 문화적인 표현이나 활동이 뽀다구나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지원이라면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의 내부 인테리어에 관여했다고 하던데 직접 그 인테리어를 했다는 말인가?
인테리어 회사에 맡겼지. 다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인테리어 회사에 디자인을 일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거다. 상당한 디렉션이 들어가는거다.
그 당시 일기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던 기억도 난다. 종업원을 뽑아서 ‘사장님’이란 말을 듣는 게 처음으로 애인으로부터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충격적인 일이었다라는. (웃음)
소름이 쫙 끼치더라. (웃음)
가게를 영업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뭐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음악을 하는 자체에서 뮤지션이란 자각이나 미련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당시가 음악을 한지 10년 이상 된 2006년이었는데 음악하는 게 너무 힘들고 지쳐서 가게를 차린 거다. 장사해야겠다. 돈이나 벌자.
그런데 이제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 영업을 그만하게 된 이유가 뭔가?
나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작업이란 것에 미련이 없으니까 가게를 차렸던 것인데 이제 목숨 걸고 작업해야 되는 상황이니까 작업에 걸림돌이 되는 건 가차없어지는 거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나는 무조건 그걸 날렸어야 됐다. 나는 그 가게 때문에 작업이 방해 받는 걸 (손가락을 작게 벌리면서) 요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 그 가게에 애정을 갖게 된 이발관 팬들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공간이 됐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이 세상에 작업보다 더 중요한 건 없기 때문에 그게 작업에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순간 무조건 날렸다.
가게 운영까지 포기하면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바로 다음 앨범을 마지막이 될 거라고 말하는 뮤지션의 심정은 대체 뭔가?
다음 앨범을 목숨 걸고 만들지만 그 앨범이 마지막이니까 그 다음의 노후대책을 위해서 지금 일단 장사를 계속해야 한다, 그럴 순 없지 않나. 그렇게 미래를 보면서 지금 작업에 올인할 순 없을 거 같다.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에 올인할 수 없다. 무조건 사생결단하고 지금 이 작업을 어떻게든 잘 해내야지.
언니네이발관이란 밴드를 하게 된 것이나 집필 작업, 트레일러 제작까지, 어쩌면 이석원이란 사람의 오늘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서사는 우연에서 시작해서 필연으로 굳어진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만큼 계획적인 인생에 대해 염두에 둘 것 같진 않다.
나는 너무 계획적인 사람이다. 매일 계획을 짠다. 다만 그 계획이 맨날 바뀐다. 그래서 지금의 계획을 짜는 거다. 오늘의 계획, 한 달의 계획, 일 년의 계획을 짜지.
긴 미래를 염두에 둔 계획을 세운 적은 없나?
사실 몇 십 년 뒤의 일까지 계획을 짠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지난 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비롯해서 3관왕을 수상했다. 작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이 무산될 뻔한 위기도 있었는데 겨우내 시상식이 거행됐다. 어쩌면 그 사태가 한국음악신의 현실을 대변하는 사례가 아닐까. 인디밴드라는 정체성 안에서 이런 신의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언니네 이발관은 1집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밴드보다도 유복한 환경에서 음악을 해왔다. 우리는 불평을 할 자격도 실감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씬의 어려움 같은 질문을 받을때면 사실 난감하다. 물론 언제나 일이천명을 놓고 콘서트를 하다가 괜객이 몇십명 들어차 있는 클럽으로 동료의 공연을 구경갈때면 아찔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사실 인디밴드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열악한 느낌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것 같은 관성이 생긴다. 언니네 이발관도 인디밴드의 범주로서 이해되는 만큼 그런 선입견을 적용해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대부분 그렇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거다. 공연해도 페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다더라. 우리도 사실 그렇게 너무도 힘든 걸 아니까 주변에서 누가 음악한다고 못하게 한다. 나는 무대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누가 말릴 정도로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인데, 왜 그러냐 하면 진짜 너무 감사하거든. 음악한지 15년이 됐고, 대한민국에 밴드가 수천 팀이 되는데 왜 이 많은 돈을 주면서 우리를 아직도 헤드라이너로 세워주는지, 그게 너무 신기하고 고맙다. 그런 처지에 있는 우리가 대한민국 음악에 어떤 문제가 있고, 너무 힘들고, 이럴 수가 없는 거잖아.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건 그거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999개의 팀은 너무나 고생할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음악한다 하면 못하게 말리면서도 우리도 피해자란 식으로 대한민국 음악계의 문제가 뭐니 이런 생각을 해볼 일이 별로 없었다는 거다.
신의 열악함을 경험적으로 느낀 바가 없으니까 그걸 대변할 입장이 안 된다는 말이겠지.
그렇지. 지금 전속 엔지니어를 데리고 다니는 밴드는 메이저 통틀어서도 몇 팀 안 된다. 외국 페스티벌 할 때도 그렇고, 펜타포트 2006년 때도 그랬다. 국내밴드들은 사운드 개판이거든. 그런데 외국밴드들이 나오면 좋다. 왜냐하면 전속엔지니어들이 와서 전날부터 리허설하니까. 그때 내가 그걸 보면서 생각한 게 ‘씨발, 아니, 우리는 왜 전속 엔지니어를 쓰지 못할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지. 돈이 엄청나게 들거든. 심지어 이번 지산 락 밸리 때는 내 전용 모니터 스피커까지 가져갔다.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한 여력이 되면 돈을 아끼지 말고 때려 붓자는 거다. 그렇게 해서 우리 수입이 줄더라도 결국 최고의 퀄리티를 지닌 사운드를 내는 게 중요하니까. 물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 공연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작만큼이나 그 이후의 행보도 일반적인 케이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전형적인 인디밴드의 바로미터나 샘플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이렇다고 해서 대체로 그럴 것이다라는 것도 말이 안되고.
사실 첫 앨범이 백만 장 넘게 팔릴 거란 생각을 했으니 애초에 언니네이발관을 인디가 아닌 메인스트림으로 생각하고 신에 접근했나 보다.
정확하다. 인디에 관심 없었다. 그냥 우린 무조건 상식적으로 판 많이 팔고, 예쁜 여자 사귀고, 부모님한테 인정받고, 이거였지. 근데 갑자기 인디밴드라면서 몇 만장 팔리고 땡이니까 완전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야 싶었지. 그러다 일평생 인디가 돼버렸다. (웃음)
결국 의도와 다른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그 안에서도 의도와 다른 결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경험을 겪다 보면 차라리 무언가 기대를 하거나 특별한 예측을 한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생기지 않나?
그건 아니지. 왜냐면 나는 어차피 우연히 좋은 일이 많이 생긴 놈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자, 이럴 수는 없잖아. 남들은 할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팔자를 갖고 있다 해도 그게 나한테 왔을 때엔 분명한 계획이 필요하다. 책도 그렇다. 내가 책을 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막상 내게 된다고 했을 때는 계획적으로 간다. 트레일러 작업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서 지산 락 밸리에서의 그 하루를 준비할 때도 얼마나 계획적이었냐 하면 집에서 눈뜨면서부터 공연장으로 출발하기 전까지의 시간들을 분 단위, 시간 단위로 일일이 다 적고 그대로 체크해 나간다. 몇 시에 운동하고, 몇 시에 씻고, 옷은 뭐를 입고 나가고, 준비해야 할 건 뭐고, 피크는 몇 개를 챙겨서 어느 가방에 넣고,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절대 빠뜨리는 것 없게 완벽히 준비해서 회사로 가고, 회사 차를 타고 공연장까지 가서 리허설은 몇 시니까 그때까진 무엇을 하고 몇 분을 쉬고 몇 시에 밥을 먹을지, 이런 것까지 명확하게 있어야 한다. 그런 계획이 회사랑 공유돼서 이석원 씨는 몇 시에 밥을 먹어야 된다, 물은 몇 분마다 갈아줘야 된다, 이렇게 매뉴얼화되면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럴 정도로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간다.
말 그대로 완벽주의자다.
내 입으로 말하긴 남세스럽지만 좀 심하게 그렇다.
그게 때때로 스트레스가 되진 않나?
지금은 괜찮다. 완벽하게 가니까. 전속 엔지니어가 없을 때는 공연할 때마다 지옥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완벽하게 준비해도 개판인 엔지니어를 만나면 우리 소리가 나올 수 없거든. 예를 들어서 투 기타로 가는데 내 기타 소리밖에 안 나온다면 그 노래는 병신 되는 거다. 사실 그건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어떤가. 이발관 역시 병신이구나, 이거지. (웃음) 라이브라는 게 그렇다. 그래서 음악하는 게 내게 고통이었다. 내 의지와 능력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엔지니어를 둘이나 데리고 다닌다. 모니터 엔지니어를 전속 엔지니어로 박아 놓고, 완벽한 내 소리를 얻기 위해 무대에 내 전용 장비로 싹 갈아버린다. 그리고 바깥 하우스에선 우리 엔지니어가 가서 다 컨트롤한다. 여기서 밸런스 이렇게 잡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다 완벽하게 가면 하는 나도 완벽할 수 밖에 없고, 듣는 사람들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만큼 완벽한 환경이 꾸려질 때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음악이 힘든 건 완벽할 수 없는 작업이니까. 특히 앨범을 만드는 작업은.
사실 5집이 3만 장이나 팔렸다는 사실은 최근 국내 음반소비 추세로 봤을 땐 상당한 성과다.
많이 팔렸다고 봐야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음반 판매의 절대량이 급감했기 때문에 더더욱 눈에 띄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거의 망했다고 봐야지.
결과적으로 뮤지션의 음악을 소비하는 절대량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건 당사자로서 좋은 일은 아니지 않나. 특히나 고액의 제작비를 들여서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 입장에서는 더욱 힘 빠지는 일이 아닐까.
정말 우리가 환경적으로 좋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사실 우리 환경이 나쁜 게 아니니까. 앨범도 절대적 판매량은 적지만 상대적으론 많이 팔았고, 특히 공연에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우린 상당히 풍족한 편이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환경이라면 그만큼 보다 여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성격적으로 환경 탓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컨텐츠가 좋으면 어떤 식으로든 대중이 소비해준다는 믿음이 있다.
언니네 이발관이란 이름으로 5장의 앨범을 냈다. 만약 다음 앨범이 본인의 말대로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봐야 하나?
더 이상 좋은 곡이 나오지 않게 되면 앨범은 못 내겠지. 하지만 공연은 할 수 있다. 다만 더 이상 노래마저 할 수 없게 될 때 공연도 못 하겠지. 내가 음악을 못하게 되는 건 그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지산에서 보니까 ‘페티 스미스’도 그렇고, 김창완 씨도 그 나이에 정력적인 라이브를 하시지 않나. 빌리 조엘을 봐도 그렇고. 그러니까 이런 거다. 작곡가로서의 정점은 젊은 날에 치지만 라이브는 정말 늙어서까지 할 수 있다. 그런 생명력이 있는 가수가 돼야지.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 같다. 우리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우리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밀어준다. 우리가 공연을 많이 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올 수 없다. 그걸 보면 사람들이 언니네 이발관을 정말 많이 아껴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더 이상 좋은 앨범이 나오지 않는 것과 음악 생활이 접힌다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혹시나 마지막 앨범이란 발언이 음악적 은퇴를 의미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 놈의 마지막 앨범 이슈를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더라. 그래서 확실한 결론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앨범으로 만들겠습니다, 라는 각오 정도로 정리가 됐으면 좋겠다. (웃음)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게 나한테 뭐라고 해서.
팬으로선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발언이겠지. 마지막 앨범이라니.
짜증나지. 자기가 좋아하는데 그만 두겠다고 설레발이나 치고 이러니까. (웃음) 그런데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소니 EX1, EX3로 트레일러를 제작했다. 이제 영화를 디지털로 찍게 되면서 예전보다 손쉽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적인 레코드 방식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나 오토튠 같은 전자기기를 동원하고 샘플링 음원만으로도 음악을 만든다. 아무래도 문화적인 형태가 달라진 시대다. 글도 펜이 아닌 컴퓨터로 자판을 쳐서 입력한다. 어쩌면 언니네 이발관도 15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왔지만 어쨌든 언니네 이발관은 유지됐다. 그런 일관성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로 해석되는 바가 있나?
매 순간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그건 감사와 행운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거 같다.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 너무 고마운 일이다. 방금 15년을 얘기했는데 정말 그 세월을 생각하게 된다. 15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내가 이 자리에 또 서있을 수 있을까. 이건 감사한 일이고 기적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에 올라가서 그냥 내 자신을 불태워버리는 게 내 일이다. 언제 다시 서게 될지 모르니까.
5집은 당신의 음악적 각오에 대한 전환점이 됐다. 운영하던 가게도 그만 두고 다음 앨범을 준비할 만큼 음악작업에 대한 비장함이 드러난다. 5집 앨범을 내기까지의 어려웠던 과정만큼 6집에서도 만만찮은 과정이 이어질 수 있다. 5집을 서사적 형태의 앨범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6집에 대한 막연한 기획이라도 잡히는 건 없나?
6집은 지금 전혀 제로 상태다. 아무 것도 없다.
트레일러도 만들었는데 영화 연출에 대한 관심은 없나? 설마 제의 받은 적은 없겠지?
(한참 생각하다가) 근래에 트레일러 작업하고 그런 제의가 있었다. 연출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니고.
반쯤 농담처럼 물었는데 정말 제의가 있었다니 내가 되레 놀랐다. (웃음)
원래 내 인생이 좀 만화 같다. (웃음)
회사를 그만 둔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를 옮긴다. 무비스트를 떠나 새롭게 둥지를 틀 곳은 아쉐뜨 미디어에서 발간하는 비욘드다.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촌놈이라 잘 모르지만 대한항공 기내지다. 투썸플레이스와 같은 커피점에서도 볼 수 있다. 나도 몇 번 거기서 봤거든. 개인적으로 기획이 좋은 잡지라고 생각했고 자료로서 소장해도 좋을 만하다 느낄 만큼 유심히 읽었던 기억도 여러 번이다. 주제 넘게 원고 청탁을 몇 번 받아서 원고료를 챙겨먹은 적이 있긴 한데 녹을 먹게 될 줄 몰랐다. 모든 것이 11월 중에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라 반 허공에 뜬 기분도 없지 않다. 초현실적이었다. 제안이 오고, 면접이 이뤄지고, 절차를 밟아, 통보를 받은 뒤, 회사를 떠나고 새로운 회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됐다.
정확히 2년 10개월 간 머물렀던 직장을 떠난다. 이미 애초에 내가 처음 앉아 있었던 그 사무실로부터 여러 번 이사한 뒤지만 어쨌든 그렇다. 다사다난했던 직장이었다. 그래도 다들 말하듯 다행이다. 대부분 말하는 바에 따르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들어와서 가장 잘 됐을 때 나간다. 그래, 그건 사실이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많은 일을 만든 건 회사가 어려웠다는 사정이었다. 제대로 월급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만만치 않게 이어지기도 했고, 한 때는 모든 걸 접을까 회의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직원이 채 10명 남짓도 되지 않아 손을 호호 불만큼 한산함을 느끼기도 했으며 때론 사무실을 무겁게 짓누르는 침울한 분위기가 싫어서 좀처럼 사무실에 나가기 꺼려질 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내 덕분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버티는데 한몫을 거들었다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게 됐다.
시원섭섭하다. 새로운 일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자라기도 했고, 뭔가 반복적인 권태 속에서 자라나는 의심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는 건 그만큼의 긴장과 설렘을 유발하는 일이라 다양한 채널로서 내게 고무되는 일이다. 걱정조차도 새로운 경험적 자극이란 점에서 유효하다. 더욱이 날 믿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도 그만큼의 책임을 짊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오프라인 잡지를 만드는 일원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 될 터이니 개인적으론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지금 이 정도 경력 즈음이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는데도 무리가 없는 시기란 점에서도 분명 좋은 시점이라 생각했다.
첫 직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떠나 보낸 적은 있었지만 내가 떠날 입장이 되리라 생각해 본적은 많지 않았다. 아니, 불과 정확히 1년 전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지만 어찌하다 무마된 뒤로 예상치 못했던 사안인 건 분명하다. 이별이라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딱히 많은 교감을 이룬 건 아니지만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마주 보던 대상과의 익숙함을 잊는다는 건 여러 모로 섭섭한 일이다. 글쎄다. 내 빈자리에 쾌재를 부를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생했다는 한 마디로 인사를 던지며 아쉬운 표정을 남기는 이들의 얼굴을 거듭 마주하다 보니 주제넘은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머쓱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난 세월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며 살진 않았던 것 같다. 잘나지 못해서 아쉬웠던 적은 스스로 많았다. 다만 적어도 못난 꼴은 남기지 않았나 보다. 그게 다행이다.
회사를 떠나던 날, 자리를 정리했다. 내 다음 사람에게 물려줘야 할 자리에서 최대한 내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컴퓨터 휴지통마저 정리했다. 책상에 내려앉은 먼지도 닦아낼 수 있는 만큼 닦아냈다. 누구라도 내 빈자리를 채우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뒤에 올 사람을 위해 지난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흔적 따위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은 그대로 사라지면 된다. 남은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게 한편으로 후련하다. 무비스트에서 머물렀던 동안, 난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 참견했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키우다 끝내 포기하거나 싸워대다 이래저래 심산이 무너지곤 했다. 한편으로 그 모든 문제들로부터 달아나는 기분도 들지만 이젠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던 이들과 그런 공적인 사안으로서 얼굴을 붉히고 화해해야 한다는 건 여러모로 괴롭고 고된 일이다. 새로운 직장에선 어지간하면 말을 아끼련다. 보다 체계가 철저한 곳이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내가 편해질 것 같다.
내일 당장 새로운 직장으로 나간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이러다 다시 예전 직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다. 내일 출근하면 바로 마감에 투입된다. 다음주까진 정신이 없겠지. 긴장된다. 그 긴장감이 좋다. 그 긴장감 덕분에 설렘도 동반되는 기분이다. 어쨌든 회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묘했다. 샤워를 하다 조금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나도 모르겠다. 마음이 따뜻했다. 잘 가라는 인사도, 잘 됐다는 축하도, 아쉽다는 찡그림도, 하나같이 애틋한 것이라 뒤늦게 견디기 어려웠다. 난 아직도 어리고 한참 모자란 인간이다. 하지만 덕분에 지난 2년 10개월 동안 사람 구실하고 살았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계기를 얻었다. 그러니 난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겠다. 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누군가를 통해 이뤄진 내 삶을 난 좀 더 소중하게 아끼겠다. 그러니 난 잘 살 것이다. 고마웠다. 당신들이 날 잊더라도 난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 not forget you.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이끼> 캐스팅은 어떻게 생각하나?
깜짝 놀랐다. 특히 이장. (웃음) 정재영 씨가 머리를 삭발했던데. 하지만 감독님이 믿음이 강하더라. 워낙 신뢰할만한 배우이기도 하고, 나 역시도 믿어야지.
만화가 아닌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고 변주한 타인의 창작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걱정이 있을 거 같다.
처음 영화를 계약했을 땐 어떤 분이 연출할지도 몰랐고 내 나름대로 상상만 해봤다. 배우는 누구, 감독님은 누구, 이렇게. 어쨌거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치를 벗어난 그 이상의 조합이 나왔다. 그래서 너무 기대가 커졌다. 일단 제일 기분 좋은 건 박해일 씨의 캐스팅이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에 박해일 씨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정지우 감독님께 내가 박해일 씨 팬이고, 류해국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고 하니까 소개시켜주더라. 그때는 그냥 조심스럽게 만났는데 나중에 캐스팅이 확정됐다고 하니까 속으로 ‘아싸!’했지. (웃음)
류해국이 박해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실제로도 박해일 씨를 모델로 류해국을 만들었다는 게 재미있다.
<연애의 목적>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나오는 게 좋더라. 왜냐면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사람은 와이셔츠나 벨트, 바지, 이 이음새가 맞지 않아도 막 입고 다니잖아. 양복 뒷주머니도 일간지가 아닌 벼룩시장 같은 거나 넣고 다니고. (웃음)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연애의 목적>에 나온 박해일 씨를 많이 응용했다. 항상 뭔가에 찌들어있고, 지쳐있는 모습. 그리고 특유의 애매모호하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도 탐나더라. 계속 그 모습을 머리에 넣고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영화에 관여하는 건 없나?
전혀. 어쨌거나 연재가 완료되기 전에 계약이 된 상황이라 계속 회의는 해나가야 했다. 정지우 감독님도 계속 물어보시고. “그러니까 이영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웃음) 그런데 그림으로 표현해온 사람이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또 그게 말로서 내 입으로 나오면 내가 그 말을 들어도 재미없다. 어떻게 이 분을 감동시킬까 고민이 되니까 설명도 잘 안되고. 완결되고 난 지금은 여러 문제로부터 후련해졌다. 만화로서는 일단 여기까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고 시나리오도 변형을 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폼이 생긴 거니까 그 분들도 편해졌고. 사실 5월 말에 연재를 끝내려고 했는데 8회 분량이 연장돼서 그 분들도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걸.
8회는 왜 연장됐나?
원래 기도원 이야기가 그렇게 길게 갈 분량이 아니었다. 하다 보니까 거기서 재미를 느꼈고 분량이 늘어난 거지. 뒤에 수습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몇 회를 더 해버리니까 결말부까지 길어져 버렸다. 아직도 내 생각엔 3회 정도는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미디어 다음(Daum)’측 사정도 있고 해서 거기서 마무리 지었다.
지금의 결말부도 불충분했다고 느끼나?
조금은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예정된 템포대로 진행했다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그걸 한 회에 몰아가다 보니까 급해진 바가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
<이끼>에서 정치적 메타포를 읽어내고 그런 해석을 반영한 댓글이 많더라. 실상 그렇게 읽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처음 잡았던 기본적 설정과 무관하게 연재 과정에서 관찰하거나 목격한 외부적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 극적으로 수정이 가미된 요소는 없었나?
애초에 <이끼>는 노무현 정권 때 기획됐다. 애초에 현정치상황이 <이끼>에 반영된 건 없었던 거다. 작은 권력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작은 권력에 빈정 상한 사람의 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인공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갑자기 거대 담론이 돼버렸다. 창작물은 사실 생물과 같다.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이야기가 확장되니까. 결국 애초에 내 머리 속에 구성돼 있던 것들이 너무 시시해져 버린 거다. 덕분에 뉘앙스가 수정된 부분이 있다.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내 예정대로 갔다고 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라난 분량도 생겼으니 그 이후로의 진행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원래 계획했던 결말의 형태가 변하진 않던가.
원래 결말까지 이야기를 다 짜놓고 들어갔다. 그런데 방금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자라나버린다. 그게 내가 간과한 문제였건, 단순한 실수였건, 독자들은 그걸 믿고 간다. 그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쓴 대사나 어떤 행위에 대한 묘사라 해도 독자들이 이건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면 일단 그 생각은 정당한 거니까 그것들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 줘야 한다. 그런데 내용상 이런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애초에 내가 잡았던 것만큼 갈 수 없게 됐다. 크게 봐서는 결과적으로 애초에 내가 잡았던 대로 가야 했던 거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기도원에서 류해국 아버지가 갑자기 도인 같은 말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관념 자체가 확 팽창돼버렸다. 결국 내가 애초에 잡았던 설정들이 시시해져 버린 상황이 된 거다.
애초에 잡았던 결말과 지금의 결말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결말부분은 사실 비극적으로 끝내려고 했다. 류해국 같은 주인공이 자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애초에 자기 생각과 습관을 다시 끌어와서 이 사건을 만든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네가 네 스스로 싫다고 느껴서 버리려던 성격이라면 네 성장을 위해서 완전히 버렸어야 했는데 왜 다시 그걸 또 쥐어 잡았냐고, 그런 생각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그에 대해서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의 가치가 소중한 거 아니냐고. 사소한 정의라도 그걸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나는 사회보단 개인 우선으로 관점을 두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작품 밑에 달리는 댓글 같은 걸로 인해서 어떤 사회성을 발견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결말부에서 류해국이 이기는 쪽으로 색채가 달라져 버렸다. 대신 류해국의 방법으로 이기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검사한테 손을 뻗고, 검사도 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잘못했다고도 하고, 이런 식으로 류해국을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남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융화형 인간으로 그리게 됐다. 검사도 유들유들한 타협적인 인간에서 주인공처럼 선이 분명해진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는 주인공의 파멸이야기였다가 한 40화 즈음부터 생각이 바뀌게 된 거다.
그런 생각의 전환을 이끈 주변 사람이 궁금하다.
<이끼> 40회 즈음에 영화판권 계약을 했고 그 후에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로 한) 정지우 감독님을 만났다. 정 감독님이 내 원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정도 들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솔직히 윤 작가 생각에 동의가 안 돼요. 나는 내가 바로 류해국 같은 사람이라 믿는데 내가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내가 그렇게 죽일 놈인지, 고민에 빠지네요.” (웃음) 계속 “류해국이 뭘 잘못했나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사실 나는 검사한테 조금 더 점수를 준다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박검사는 지방으로 좌천됐거나 말거나 어차피 사회의 주류에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시더라. 결국 왜 박검사가 승자가 되고 류해국이 패자가 되냐는 물음이었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파멸로 가는 건 아니란 생각이 굳어지더라. 검사한테 갈 역할이 류해국한테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최종적으로 끝이라고 도장 찍는 역할은 역시 주인공인 류해국에게 맡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말씀하시길, “류해국 같은 사람의 가치관은 지금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가치관인데 이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건 어떠한 명분도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너무 아깝잖아요.”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스토리 안에서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거였나?
류해국을 포함해서 다 죽고 이영지만 살아남는 거였다. 사실 직접 그리기 시작하면서 콘티를 짜기 전까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지. 그래서 마지막 버전도 한 스무 개 정도 나왔었다. 영화사마다 아직 연재 중인 만화니까 계약하기 전에 결말을 알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사에 한번 써주게 되지만 사실 그건 또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영화사엔 또 다른 버전을 써주고, 이러니까 영화사마다 각자 본 버전이 다 다른 거다. 정 감독님한테 얘기할 때도 이건 확정적인 건 아니고 나도 솔직히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듀나(DJUNA)’라고 하나? 그 사이트 게시판에 한번 “작가도 <이끼> 결말을 모른답니다. 큰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글이 있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항상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시작점과 끝점은 있는데 인물 위주로 가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설계는 없는 거다. 그런데 <이끼>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지. 사건 위주로도 정해놓고 프리(프로덕션)를 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야후>와 함께 <이끼>를 비롯해서 최근 연재했던 <그는 거기에 없었다>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건의 뇌관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부자관계가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념이 작품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건달 생활 비슷한 걸 하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야반도주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자꾸 신변이 위험해지고 이러다 보니까 그런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싫어졌는데 점차 이 사회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시작되고 확장되는 거 같더라. 처음엔 단지 내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서 ‘아버지 일기’라는 것도 써보고 그랬는데 인식이 좀 더 확장되고 깊어지다 보니까 그냥 우리나라 사회가 그렇다고 느껴지더라. 정치인들은 여성들도 굉장한 마초 근성을 갖고 남성화돼서 움직이잖아. 이런 게 진짜 혐오스럽더라. 난 아직도 아내를 부를 때 ‘누구 씨’라고 부른다. ‘누구 엄마’ 이러는 것도 싫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나 남자야’라고 뻐기는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야후>를 봐도 남자라고 폼 잡고 나오는 애들은 진짜 남자같이 나온다. 아주 권위적으로 여자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그런 사회에 대한 의식이나 분노가 굉장히 많은 거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이랄까.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특히 요즘은 세대간 갈등이 경제적 문제로서 크게 두드러지는 시대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결국 세대간의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니까. 류해국은 기성 세대와 대립하는 젊은 세대로 치환해도 좋은 인물이다. 결국 그 적의를 사회적 행위로서 내보이고 이를 통해 자기 부정적 파멸마저 도모한다. <야후>도 사실 그런 세대적 적의에서 비롯된 자기 파멸적 이야기다. 원래 계획했던 <이끼>의 결말을 듣고 보니 <이끼>도 <야후>와 비슷한 비극적 파국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 볼 수 있었겠다. 다만 두 작품이 결말에서 극명한 차이를 두게 된 건 외부에서 얻은 영향력이 그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작품의 변화가 스스로의 생각 자체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맞다. 이제 지는 걸 이야기하긴 싫어졌다. 어떻게 보면 파멸을 그리고 싶다는 건 사소한 동기일 뿐이다. 내겐 엇나가고 싶어하는 정서가 굉장히 많거든.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네 만화 정말 재미있어.” 그럴 수록 막 엇나가고 싶어진다. (웃음) 정말 마이너한 정서지. 액면으로 느껴질 만한 선의의 칭찬이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자랐던 사람이라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찰흙으로 잘 빚어놓고서 ‘에이, 이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란 식으로 막 뭉개버리는 애들 같은 마음이랄까.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정지우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게 너무 사소한 태도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지해줄 때 욕심을 내서 더 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촛불집회만 봐도 과거와 (시위가) 형태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나. 과거 386세대들이 변절해가는 과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과거를 또 비난하고, 적의를 갖고, 그런 건 너무 비참한 삶이 아닌가. 그래서 한번이라도 그 안에서 승리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자 싶더라. 비록 그게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도 그런 식으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나 스스로도 분명한 선을 갖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애도 둘이나 낳았고. 이제 지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더라. 내가 포기하는 싸움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멈추지 않은 이상 지는 싸움이란 건 없는 거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만화에 <불의>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는데 이게 그냥 추모만화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면 했다. 불은 저절로 또 생겨나겠지만 불 끄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런 열망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개입됐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야후>는 여전히 당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야후>는 <이끼>보다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함의를 두르고 메타포적 이미지를 적시한 작품이다.
<야후>에 나왔던 사건사고들은 지방에 살던 내가 서울에 올라온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진짜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TV를 보니까 마치 컴퓨터그래픽처럼 다리 중간이 내려앉아 있고,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마치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토픽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처럼 치부해버린다 할까.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당시엔 며칠 만에 사람들이 구조됐네, 이런 뉴스를 보고 세상이 정말 원색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관심사를 만화로 그렸던 거다. 사실 난 사회발언적인 인간이기도 하고.
그런 관심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별자리를 공부하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 한 명에게도 구조라는 게 있지 않나. 사회와 그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있고. 결국 드라마라는 게 사람 이야기고,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나 권력 관계가 나타나고, 종교도 들어가고, 모든 게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졌다. 꼭 기독교나 천주교 같은 특정종교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영역에 마음을 담아두고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도 다 종교적 의도가 되겠구나 싶어졌다. 물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던 부분이다. 내게 별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도 다 목사님 같은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별자리 배우면서 성경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까 자연스럽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겹쳐졌다. 인물을 우물처럼 깊게 보는 관점도 생겼다. 결국 <이끼>할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이끼>가 <야후>보단 관념적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잘 잡아서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야후>보단 <이끼>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큰 건가?
원래 <야후>에서 주인공을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첫 아이가 생기면서 그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나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까 뒤로 가면서 해프닝 위주의 사건들이 채워졌고, 결국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절반밖에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끼>에서는 뭐건 간에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가 원했던 밀도까진 들어가봤다는 느낌이 남더라. 지금까지 내가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잘한 게 아닌가 싶다.
밀도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류해국이 이장 집에 찾아가기 전에 했던 대사가 기억난다.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밀도로 채워져 있다.” <이끼>는 대사량이 적은 만화가 아니다. 동원되는 대사의 표현방식이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덕분에 해석의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고. 그림만큼이나 언어를 동원하는 방식에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문장에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바가 없지 않았다. 스토리를 쓸 때 종이를 한 장 옆에 두고 대사를 반복해서 써봤다. 일단 직접적이라 느껴지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았지. 그 다음에 표현이 많이 부풀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쓰지 않았다. 최대한 쉬운 문장이면서도 읽어봤을 때 적재적소에 쓰인 것 같아서 그 자체로 괜찮다는 느낌이 좋더라. 평이하지만 날 선 느낌? 그래서 대사는 반복해서 써보고 판단했다. 가장 훌륭한 대사는 폼 잡거나 많이 부풀려진 대사가 아니라 그 상황을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대사니까. 주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그런 대사가 있지.
대사량이 적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사를 아끼는 경우도 많다. 함축적이라 이해되는 대사도 많고.
<야후>마지막 권에서 주인공과 신무학이 죽기 직전 “잘 가라.” 할 때, ‘아, 이런 맛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송지나 작가가 <모래시계>에서 “나 떨고 있니?” 이 대사를 쓰기 위해 7일 간 고민했다는 것처럼 나도 그 대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 가장 쉽게 의미를 응축시키면서도 얘네 나이에서 할 수 있는 대사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죽기도 바쁜 애들이 무슨 대사를 질질 끌면서 하겠냐 싶더라. 그래서 결국 “잘 가라.” 한마디로 가게 됐는데 그때 내 스스로 느낀 거지. 대사는 각 잡을수록 후지게 나오는 구나. 대사의 선이 분명해버리면 그 내용에 대해서 책임져줘야 하는 상황이 자꾸 발생한다. 여러 해석이 나올만한 대사를 쓸 수 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내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사회 비판적인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 어려운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런 주인공이 마치 식자층 같은 대사를 쳐대거나 사회적 발언을 해버리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보이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대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옆집 사는 아저씨가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하는 말 정도 수준의 대사가 필요했다.
캐릭터의 지적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될만한 대사는 최대한 배제했다는 건가?
맞다. 무엇보다도 <이끼>는 분명히 그림은 보이지만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관념적 만화라서 묘사에 집중하려 했다. <이끼>를 하면서 어떤 분명한 걸 지적하듯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도 그만큼 불분명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선이 뚜렷한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진 못하겠더라. 각자 처지에 맞는 이야기에 집중하자 싶었다.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을 보고 <살인의 추억>이 연상됐다. 인간적이라 이해되는 지방성의 이면에 감춰진 잠재적 폭력성이라던가, 소박한 환경 내에 깊게 뿌리 내린 부조리한 심리가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압축판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더라. 무엇보다도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은 그 자체로 작품에서 중요한 미장센이다. 그런 마을을 상상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차량의 주행속도를 10km/h정도 높이기 위해 곡선을 최대로 줄이는 형태로 완성됐다. 그만큼 굉장히 폭력적으로 건설됐지. 한번 그 도로를 타고 고향집을 갔다가 올라오는데 어떤 터널에서 나오니까 소음 방지벽 너머에 가둬진 작은 마을이 보이더라. 돈을 몇 푼이나 받았을지 몰라도 저 마을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었겠지. 도로 아래 교각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낯선 사람은 저 마을에 들어갈 수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가까운 동네 사는 사람조차도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갈 마음도 들지 않는 마을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저런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들도 인상 자체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의 모티브는 어디서 시작됐나?
그 공간에 대한 호기심 이후로 사연이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보자는 전제가 뒤따랐다. 종종 시골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서울에 계속 살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다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무서웠거든. 시골에 살면서 보면 가끔 시골에서 막걸리 같은 거 마시고 그러다가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다. 낫도 흉기가 되는 물건인데 눈 한번 돌아버린 사람 주변에 그런 게 놓여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농사를 짓고 힘을 쓰다 보니까 체격도 좋은데 저 사람이 순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을 정도지. 그래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순박해 보이지만 눈 한번 핑 나가면 살벌해 보일 수 있는 느낌의 캐릭터들을 만들려고 했다. 이장 같은 경우, 딱 봤을 때부터 재수없어 보일 만큼 혐오스런 선입견을 주는 이미지를 모아 놓은 거다. 대머리에, 광대뼈에, 음흉한 큰 눈까지. 주인공인 류해국은 척 봐도 이질감이 느껴지게끔 훌쭉한 느낌을 줬고.
한 마을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그런 관계에 잠재된 은밀한 사연과 그 사연의 발굴을 통한 갈등과 충돌이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만큼 캐릭터의 내외를 디자인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거다.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도 존재하겠지만 주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진 않았을까.
사실 모델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인물마다 하나씩 죄를 집어넣었던 거다. 백지 상태의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얘는 무슨 죄, 얘는 무슨 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이입했다. 이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원죄, 그리고 전석만은 어린 아이를 죽이고 할머니도 죽게끔 한 죄, 그리고 그 외에도 인간의 몸뚱이로 장사하며 이를 통해 그 누군가를 죽인 죄, 간접 살인을 한 죄, 이런 식으로 죄를 부여해놓고 그 죄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성격들을 접목시킨 거다. 살다 보니 죄를 짓게 됐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성격을 만든 다음에 죄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이해하는 힌트로 적용시킨 거다. 인물 파일을 만들 때 본래 타고난 이 사람의 성격을 먼저 설정한 뒤, 그 사람의 서사를 만들게 된 거다.
마을에 모인 인물들이 가지라면 이장은 뿌리와 같은 존재다. 아무래도 이장은 다른 캐릭터보다도 극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존재를 구상하는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그런 사람 많지 않나? 특히 사회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의 생각을 점유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2~30명 정도의 인원이 화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수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몰리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더라. 만약 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틀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순간, 이제 이장 같은 사람이 되겠지. 그런 흔한 성격을 극대화시킨 거다. 사실 류해국 아버지 같은 사람도 흔하다. 예전에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봐왔는데, 작은 교회에 가보면 마치 절대자인 양 행사하는 목사가 많다. 목사가 없으면 전도사가 그 역할을 하고 앉았다. 권사만 해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똑같은 시골 촌부인데 권사네, 장로네, 이런 이유만으로 어른입네, 행세하는 사람이 많다. 정식으로 교단에서 인증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고 그로부터 추출해온 성격을 약간만 세게 변형시켜버리면 <이끼>같은 집합이 생긴다.
마을은 죄의식의 연대로서 은둔하는 장소다. 그 공간의 성격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사람이 독립적인 거 같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의존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감춰야 될 것이 많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죄의식을 일정부분이나마 노골적으로 감싸주는 방어막이나 울타리 같은 존재를 항상 염원한다. 예를 들어 집단 섹스를 해도 서로 용인될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죄의식을 공유해주는 사람이 너무 고마운 거지. 그래서 결국 그 마을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거고. 예를 들어서 기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인데 왜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교회에 다 갖다 주고 그랬을까. 그건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절대적인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위로를 얻고, 보호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뿐이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악마를 키우는 거다.
<이끼>에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 많다. 특히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호감을 끌어내기 보단 지나친 자기 아집과 오기로 뭉친 인간으로 인식되어 호감을 증발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반에 보면 류해국 보고 ‘얘 뭐냐, 진상이냐, 이 새끼 뭐냐. 진상이다. 짜증난다’ 이렇게 욕하는 댓글도 많다. (웃음) 나도 공감한다. <야후>할 때도 선배들이 그랬다. “야, 걔가 주인공 맞아? 걔 너무 찌질해!” (웃음) 내가 그런 모호한 정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인물의 정서에 동의를 해주고 싶다가도 그런 인물이 막 싫어지기도 해서 그걸 그대로 표현에 옮긴다. 어쩌면 내가 나를 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끼>의 이장은 단순히 악인이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실적인 윤리 안에서 분명 악으로 규정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인물만의 명확한 합리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부조리 자체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처럼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 내가 작은 세계에서도 상처받고 사는 편협한 인간이다 보니까 자신을 합리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 방어기제가 잘 발달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부럽다. 류해국 아버지를 보면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고, 이장은 형이하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 둘의 충돌을 그리고 싶어졌다. 자살에 있어서도 주인공 아버지는 스스로 숨을 멎게 해서 죽지 않나. 인간으로서 정말 할 수 없는, 자율신경까지 점해버린 사람이다. 결국 그 극단적인 죽음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박탈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장이 그 마을의 절대적 메시아라면 마을 사람은 그에게 고해를 받고 구원을 얻은 존재다.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쫓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마을의 암묵적 합의를 파괴하는 침입자다. 어떤 식으로든 유기적으로 순환하던 마을의 생리를 훼손하는 바이러스이거나 박테리아 같은 존재로 마을사람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믿음 자체를 통해 평온한 연대적 삶을 이루던 집단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이물질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한편으로 <이끼>가 종교적 믿음의 형태에 대한 도발을 던지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아, 정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사실 내가 어릴 때 나름대로 교회를 진지하게 다녔다. 그래서 <이끼>의 기도원 신을 그리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렸던 거 같다. 특히 맨 마지막 회 작업할 때, 잠을 자면서 꿈을 꿨는데 예전에 같이 교회 다녔던 선배 형이 군화에 교련복 상의, 군복바지를 입고 기도원 샤워실로 나를 끌고 가더니 나를 두들겨 패더라. 그래서 4시간 자고 일어나서 잠을 확 깨버린 거죠. 덕분에 안 그래도 <이끼>마지막화 분량이 많았는데 잠까지 설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실 도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종교적인 죄의식이 있었다는 걸 느끼고 뒤늦게 그게 도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내가 하나님, 예수님, 이런 용어는 절대 쓰지 않고 절대자, 신, 이런 단어만 썼던 것도 다 그걸 피해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어떤 특정종교에 국한돼서 해석되는 건 위험했을 거다.
그런 식으로 한정되게 이해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절대자에 대해 탐닉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던 거지.
믿음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숭고하지만 그 행위적 목적은 때로 불순하고 도피적이다. 예를 들어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연기한 캐릭터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죽인 살인범을 면회 갔을 때 자신은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전도연 씨가 대사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이 널 용서하냐.” 개인적인 신앙은 때때로 공공적인 윤리를 무력화시킨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한다. 결국 이장에 대한 신앙적 믿음에 의지하는 마을 사람들은 현실적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 마을이라는 도피처에서 살아간다. 결국 류해국은 그런 도피를 통해 평온을 누리는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다시 출렁이게 만드는 존재다.
헤집어버린 거지. 다시 원래대로 세팅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곤란해지고.
어떻게 보면 류해국은 현실에서 도피해버린 인간들의 나약한 양심을 뒤집어 끌어냄으로써 그 실체를 각인시키고 스스로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되레 자신의 부조리한 정서마저 극복하게 되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달아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이 각각 5년 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 정권을 빼앗긴 세력들이 항시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사람들은 지금 야당인데 전혀 야당같지도 않고,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고 있고, 오히려 정권을 잡은 쪽이 계속 힘들어하고, 이제 다시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언제 우리가 뺏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래 잡아왔던 사람들처럼 쉽게 안착하고. 이 사람들은 어쩌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이 자리에 들어와서 자기네 룰을 헤집어 놓는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처가 쪽 집안이 좀 잘 산다. 그런데 처가 쪽 친척들과 모여서 밥을 먹는데 그때 한참 촛불집회하고 그럴 시기였다. 처가 쪽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작은 아버님 한 분께서 그때 노무현 전대통령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새끼가 어디 대통령이나 했다고 저 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숙모님이 추임새를 넣었다. “왜들 저래. 지금 대통령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응원은 못할망정 촛불집회나 하고 있어.” 그 양반들은 노무현 전대통령 당선됐을 때부터 욕을 하셨던 분들이다.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응원해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나에게 한나라당 입당 원서까지 주셨던 분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은 병균 보듯이 하고, 마치 급이 다른 녀석이 어디 와서 까불고 있냐는 식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던지고. 그 때가 <이끼>를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래서 스토리를 쓸 때, 조직과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더 깊게 자리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힘으로 구축한 정의라고 할까.
정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지들끼리의 룰이지. 그곳에 류해국이 들어가서 하나씩 툭툭 건들기 시작하니까 얘네들은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쁘고, 점차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끼>에 달린 댓글을 보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와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에 걸친 많은 해석들이 대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보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그런 건 그 분들 마음이지.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런 외부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 같더라. 그리고 나는 무아의 경지에서 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지 그 안에 어떤 의도를 담고자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나 의도가 분명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기본적인 정체성은 내 작품이 보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렇게 정치적인 해석을 동원해서 댓글을 다는 건 그 사람들 마음이고 자유로운 권리다. 내 만화에서 그런 코드를 읽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걸 내 만화를 통해서 본 것뿐이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봐도 대단하다 싶은 해석들이 댓글로 달리는 건 어쩌면 내 작품에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겠지. 나는 <이끼>나 <야후>가 우화 같은 풍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내러티브보단 인물에 관심이 많다. 어떤 반전을 넣어서 깜짝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기승전결의 감동보다는 이 인물을 따라가다가 혹하고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사건을 배치하는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야심 차게 머리를 돌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웃음)
류해국이 부정하려 하는 맞은 편의 인간들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류해국의 아버지나 이장이나,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메시아적 능력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결국 류해국의 아버지는 이장에게 눌리고 이장은 류해국의 손에 처단된다. 권력적 관계가 결과적으론 인간에게 얼마나 허망한 게임인지를 인식시키려는 대목아닌가. 권능에 가까운 위력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던 인간일지라도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게 힘을 발휘해왔는지를 드러낼 때 그 내면에 놓인 인간의 존재 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별자리 배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나에겐 훌륭한 변명거리지. 나는 박탈감이 많은 사람인데 그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나 이재용이나,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의미부여하지 말라는 거지. 결과적으로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 죽을 사람들이고. 물론 내가 추구하는 삶이 있고, 기왕에 사는 거라면 삶의 색채를 더 밝게 가져가는 게 맞겠지. 자기가 자기를 긁어가면서 사는 거보단 조금 무책임해 보일 정도로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낫겠더라. 처음에 류해국을 처단시키자고 결정했지만 나중에 류해국을 처단하지 않고 포지티브한 영역으로 끌어올리자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발전적 고민의 결과였던 거다.
그런데 그 별자리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순정만화가 이황주 씨와 친했는데 그 분이 우연찮게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래서 김준범 씨와 같이 공부했지. 내 인생에서 굉장히 많은 전환점이 됐다고 할까?
별자리를 공부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점지하는 것을 배우는 일인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늘진 않았나?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시작한 거라서 남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사실 대부분은 남에게 관심이 많더라.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한 사람들 대부분을 만나면 생일이 언제냐고 묻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해 쉽게 단정하려 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실례다.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고 제 머릿속으로만 파악하는 거지. 그런데 상대방은 잘 모르잖아. 정보가 부딪히는 거지. 어떤 면에서 이건 폭력이다. 그래서 난 그런 게 싫다. 그 사람이 먼저 물어보기 전에는 그런 말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게 됐나?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명상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이렇구나,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때도 많고, 탐욕스런 과거가 떠오르거나 낭비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흘러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 과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사람들과 오해를 일으키고 그런 오해를 쌓아둔 부분들에 대해서도 왜 그런 문제에 좀 더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까, 조금 더 쉽게 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스스로 대인 관계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얼마나 닫힌 성격이었냐 하면, 허영만 선생님 화실을 그만 두고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옮긴 다음에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도 그만 두고 나왔는데’ 막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화실에서 선생님들이 화투를 치면서 새벽마다 라면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한번 화투판을 엎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조운학 선생님한테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집단으로 난리가 났지.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거다. 난 왜 그럴 때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이끼>의 류해국이나 <야후>의 김현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측면이 강하다. 어쩌면 그런 캐릭터 성향은 본인 스스로의 생각이 반영된 측면이라 봐도 될 거 같다.
그럴 거다. 자기 반성적인 면은 그래서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결국 스스로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죽였거나 죽이려 했던 셈이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부정적 성격을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캐릭터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음, 그렇다기 보단 나를 캐릭터에 투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나는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반영된 이 캐릭터들도 이 사회에선 안 되겠구나, 라는 식으로 접근된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구나 싶었던 거지. 그러니 당연히 이 사회에서는 소멸이 돼야 맞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한쪽으로 굉장히 오만한 구석이 있다. 내 속에 오만한 탑이 하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아래 나머지는 폐허 같은 정서가 채워진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만 나에게 남을 굉장히 잘 깔보는 태도가 있는 반면, 한편으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편이다. 그런 성향이 캐릭터에 많이 투영되다 보니까 어차피 얘네들도 이 사회에 적응 못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회와 융화할 수 있는 타협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끼>는 결과적으로 <야후>에 비해 그런 정서를 덜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그만큼 스스로도 변한 게 아닐까.
예전에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데 사소하게 차끼리 시비가 붙었던 걸 보게 됐다. 서로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싸우면서 “야, 쳐봐, 쳐봐!” 이러면서 길 한가운데서 뒤엉키더라. 그 길 옆에 많은 차가 있는데도. 나는 남의 눈이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못하거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공격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사는 구나 싶었다. 그게 내 눈엔 천박해 보이지 않는 거다. 나는 쪽팔려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 때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깡이 놀랍더라. 아이 낳을 때도 그럴 수 있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소한 거라도 싸워서 쟁취하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도 꽤 했다. 그런데 나는 결코 그렇게 안 되더라.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모종의 박탈감을 느낀다. 형태를 떠나 그 너비나 크기로서 중요한 존재감을 행사하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 인물들은 결핍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세상에 대한 분노나 다른 세계에 대한 공격성으로서 충만하려는 것만 같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만약 내가 박탈됐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만큼의 실패나 상실을 맛보게 되면 그 반대영역에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분명히 생길 거다. 특히 내가 그런 게 굉장히 강한 편이니까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런 게 강하게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 <이끼>의 류해국도 원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설정하려 했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바꾸게 된 거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변해간다. 엄한 데서 보상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안에서 싸워야 한다. 상실감이 있으면 싸워서 얻어내든가,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든가. 지금 정권에 대한 박탈감을 지녔다 해도 다음 투표 때 두고 보자, 이럴 수 있다면 이건 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상실감을 엄한 데서 채우거나 회피하지 말자는 거지. ‘세상 이렇게 됐으니 나도 모르겠다. 투표고 뭐고 그냥 여행이나 다니자.’ 이러지 말자는 거다. 자기가 뭔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구석에서 그걸 다시 챙기고 뚜렷하게 싸워야 한다.
류해국을 죽일까 했다지만 주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결국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주변의 요구가 어쩌면 시대적 요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류해국은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다. 덕분에 박 검사도 힘들어졌고. (웃음) 사실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모른 체할수록 자신의 안위는 편해진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들춰보고 캐내고 찌르다 보니 마찰과 충돌이 생기고,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어려운 건 그런 피곤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불편한 정의보다도 편한 불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그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그런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뤄진 게 아니었을까. 최소한 그런 가치에 대한 보상심리를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만화에서라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졌다. 위로 받아야 할 곳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니까. 예를 들어 국가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니 각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만화가로서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갔을 텐데, ‘아고라’를 보면 종종 ‘벌써 죽었냐? 촛불집회 그거 그냥 유행이었냐?’ 이러면서 자괴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 서로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원하는 정권으로 교체된다 해도 그 사람들이 또 우리를 다 대변해주는 건 아닐 거다. 그 사람들도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궁극적으로 현 정권이 목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항시 환기해야 되고, 경계해야 되고, 서로 위로해줘야 한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해서 대기업의 비리가 정의롭게 파헤쳐진 적 있었나? 결국은 그 너머에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단지 이명박 대통령 욕하는 데서 끝날 문제가 아닌 거다. 단지 표면적으로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노골적인 문제가 발견되니까 그렇게 거대한 시위적 형태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뿐이다. 거대 기업, 자본, 흔히 말하는 커튼 뒤의 사람들과의 싸움은 대를 이어서 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구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감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게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화가로서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줬다 믿으니까.
<이끼>는 제도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고,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합의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후>보다 더 나아간 작품이다. 어쨌든 <야후>나 <이끼>처럼 정치적 해석이 동원될만한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작품으로 인지도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나?
그런 부담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론 창작자지, 사회 운동가는 아니니까.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작품은 내가 할 수 없는 거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안에는 사회관찰자 입장으로서의 피가 많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생각이 나를 점유해버릴 수는 없지. 그걸 경계하기도 하고. <이끼>도 특별히 정치적으로 풀어보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마 그런 목적을 노리고 시작한 작품은 <야후>가 유일했다. 다만 우연찮게 <이끼>를 독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엮다 보니까 나도 문득 ‘이렇게도 풀이가 가능하구나’라는 지점이 생겼다. 나는 굳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
<야후>에서 나오는 수경대의 비행용 바이크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특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 자체의 이미지는 명백히 허구지만 막강한 공권력의 도구로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구가한다. 요즘 세태에 너무 잘 어울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웃음) 그래서 오히려 요즘의 세태에 대한 기시감을 뒤늦게 느낀다. 비행용 바이크라는 날아다니는 기체를 생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애초에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처음엔 오토바이 기동대를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지엽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더라. 공간적인 제약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날아다니는 걸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워의 특성이 강한 서울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지상은 어렵겠다 싶더라. 어쨌거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중앙에 서 있어야 했고, 그만큼 기동력을 확보할만한 수단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헬기도 생각했는데 사실 헬기는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비행체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던 일들이 많았으니까 ‘이쯤 있으면 어때?’란 생각도 하게 됐지.
사실 <야후>에서 수경대만 빼면 리얼한 시대극 만화가 된다. 그리고 그 수경대의 비행기체는 <야후>에서 만화적 상상력으로서 발휘된 가장 특별한 이미지다.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 한번은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 교수를 하는 선배가 너무 안타까워하는 거다. 선배가 수업 중에 계속 이야기했단다. “너희 <야후>라는 만화 꼭 봐라. 우리 시대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아마 <야후> 6~7권 즈음에서 수경대 비행바이크가 나오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야, 이거 뭐니? 정말!’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왜 갑자기 이게 나오는 거야. 오토바이로 해도 됐잖아. 왜 이걸 넣는 거니?” 이렇게 너무 안타까워하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그걸 진짜 넣고 싶었거든. 그때만 해도 주인공이 서울 시내를 날아다니면서 벌이는 총격전을 보여주는 내용을 생각했으니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와서 ‘아싸!’싶었던 게 있다. <야후>최종 권에서 50미터 탄이라고 50미터 넘으면 뻥하고 터지는 총알이 나오는데 그 총알이 최근에 개발됐다 하더라. (웃음) 거리를 정해서 쏘면 엄폐물 너머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서 화약이 터져서 사상을 입히는 거다. 그 뉴스를 보면서 ‘아, 내 머리가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어.’ 싶었지. (웃음)
<야후>도 그렇지만 <이끼>에서도 분량이 늘어날수록 그림체의 변화가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문제에 봉착하는 거 같긴 하다. 심지어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슬램덩크>조차도 첫 단행본과 마지막 단행본의 그림체가 판이했으니까. (웃음) 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어쨌든 작가로서는 뒤늦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일 거다. 사실 <이끼>의 댓글에서 종종 ‘작화붕괴’라는 말이 보이더라. 심지어 후기에 직접 그걸 거론하기도 했고. (웃음)
거기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한다. (웃음) 사실 80회씩이나 되는 장편을 하다 보니 사람이 그 정도 그리다 보면 뭐가 늘어도 늘거든. 보다 능수능란해지면서 더 잘 그리게 되는 거지. 특히 나는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잘 그리지 못한다. 학창시절에 보면 만화를 잘 베껴서 그리는 애들 있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그걸 잘 못해서 남의 그림을 베껴본 적은 별로 없다. 거의 내가 만들어서 그림을 그려봤지.
모사가 어렵단 말인가?
그렇다. 애들은 로보트 태권V, 마징가도 잘 그리는데 내가 그리면 뭔가 비율도 맞지 않아 보인다. 태권V라고 할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는데 정작 결과는 태권V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렇게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러다 보니까 류해국 같은 주인공은 제발 같은 그림으로 나오기 쉽게 개성을 분명히 담아보려 했다. 그 삐쭉하게 만든 코 같은 거. (웃음) 그런데 박 검사는 개성이 모호하다 보니까 매회마다 자꾸 얼굴이 바뀐다. 사실 이현세 선생님처럼 개성을 강하게 주면 작화붕괴가 일어날 일도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쓰는 그림체가 그런 경향을 더 심하게 가중시키는 탓도 있다. 모니터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모니터 하나에 실제 그림 사이즈보다 200%확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얼굴을 그릴 때도 눈썹 하나만 모니터에 꽉 채우고 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를 그리고 있는 건지 모니터만 봐서 잘 모를 때가 생긴다. 선 하나 그리고, 축소해서 다시 보고, 다시 키워서 또 그리고. 물론 이게 변명은 안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니까. (웃음)
인물들의 신체비율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웃음) 그런데 그런 불균형한 느낌이 후에 오묘한 특징으로 인식된다는 기분도 들더라. 뭔가 상당히 기괴하다고 할까.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웃음)
그런 어설픈 방식도 몇 회를 가면서 밀어붙이다 보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독자들이 맞춰주더라. (웃음)
<이끼>엔 스크린적인 이미지가 많이 동원된다. 롱테이크가 연상되는 컷도 이어지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핸드헬드적인 이미지가 연출되는 느낌도 들더라. 컷 자체에 기능적 공을 들인 흔적도 역력하지만 특별한 장면 연출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도 받았다. 일반적인 출판 만화는 정보가 양 페이지로 한꺼번에 확 들어온다. 예측이 가능하지. 그런데 웹툰은 작가가 하기에 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한 장면만 눈에 띌 수 있게 구성이 가능하고 계속 (마우스 휠을) 내리면서 봐야 하니까 잔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잔상을 이용하기 위해 반복컷도 많이 쓴다. 매번 다른 컷들로 이어지면 잔상이 남을 여지가 없어지니까 비슷한 표정의 컷이 반복돼야 보다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가다가 예상치 못한 컷이 떡 하고 올라오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크롤 만화의 장점이 그런 거다. 독자들의 점유력이 세진다고 해야 하나. 말한 대로 한 컷 한 컷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출판 만화엔 배경이 없는 컷도 무지하게 많으니까 주인공 얼굴로만 때워도 되는 컷도 있지만 웹툰에선 매 컷마다 컷 자체의 밀도를 유지시켜줘야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배경도 계속 깔아줘야만 된다. 그런 전제로 가다 보니까 작업 자체가 힘들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리듬이다. 재미도 리듬에서 생기니까. 처음엔 그 스크롤만의 리듬을 못 잡아서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게 정말 재미있나?’ (웃음) 의심도 들었다. 반복해서 볼수록 나는 익숙해져 버리니까 제3자들의 반응을 모르겠더라. 다행히 10회 정도 지나고 보니까 어느 정도 조절이 됐다.
방금 했던 말처럼 강도하 작가와 같은 기존의 만화가들은 테두리의 구획에 정확히 색의 경계가 나눠진다는 느낌인 반면 <이끼>의 색감은 회화처럼 번지는 느낌을 준다.
포토샵 툴 중에 직선을 그리는 툴이 있다. 사실 이걸로 대부분 라인을 따서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문하생들한테 작업을 시킬 때도 그걸 못 쓰게 한다. 다 손으로 따서 그리게 만든다. 비뚤어져도 상관없다고, 흔들려도 상관없으니까 손으로 그리라고 한다. 유리라면 모를까, 실제 건물벽을 흙으로 미장센하고 나서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직선은 아니거든.
매체의 변화에 따라 그림체에서도 변화가 생기는 게 느껴지지 않던가?
처음엔 인물을 그리는데 그 툴의 사이즈를 너무 두껍게 했다가 가늘게 했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작화붕괴니, 그림체가 다르니, 이런 얘기도 많이 나왔다. 그게 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던 거지. 후반부로 갈수록 체계가 잡히고 날 것 그대로의 느낌도 사라졌다. 사실 스크롤 만화가 영화와 비슷한 면이 많다. 매 컷마다 그림 사이즈를 다르게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최대한 컷은 유지한다. 그렇게 와이드 컷을 유지하다 특정장면에서만 변형을 시켜줘도 그게 별로 충격을 주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덕천이가 할머니 귀신을 보는 신에서도 비슷한 사이즈가 유지되다가 마지막 컷이 길어지니까 독자가 봤을 때 공간감이 확 넓어진다고 느껴져서 순간 놀랐을 거다. 갑자기 정보량이 많아진 거니까. 이장이 주인공 아버지 목을 잡고 훈계하는 신에서는 거의 이장 얼굴만 쭉 나온다. 독자가 마치 이장에게 목을 잡힌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이장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독자한테 이장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댓글에서 “이번엔 날로 먹었네?”하기도 하고. (웃음) 이현세 선생님이 그리는 까치는 어떻게 그려도 까치다.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 쪽 작가들은 그림이 조금만 변형돼도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나도 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그린다는 게 부담이 크다. 특히 나같이 동일한 얼굴을 잘 못 그리는 작가는 카메라 각도만 바뀌어도 새로운 얼굴형이 막 나오거든. 그니까 그 클로즈업을 하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부담인데 그걸 날로 먹었다고 하니까 황당하긴 했다. (웃음) 하여튼 스크롤 만화는 그런 장점이 있다. 두 페이지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절대 못 가거든. 갈 수가 없다. 왜냐면 많은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와버리니까.
웹툰을 하면서 그 매체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애를 먹기도 했겠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적 방식을 구사했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결말부로 갈수록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스크롤을 내리면서 보다 보면 속도감이 부여되는 신이 있다. 중심부에 비해 주변부 이미지를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아웃 포커싱되는 느낌의 컷이 많았다. 동시에 스크롤을 빠르게 내릴수록 프레임의 속도감이 연출되는 기분이 들더라. 기존의 웹툰과도 그런 점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웹툰 작가들이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토샵 툴을 쓴다. 솔직히 내가 그런 기능을 전에는 몰랐던 거지. (웃음) 하다 보니까 포토샵 기술이 늘어서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해서 알게 된 것들을 쓴 거였다. 아마 초반부부터 그 기능을 알았다면 초반부부터 적극적으로 썼을 거다. 다만 초반부는 좀 정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었으니까. 물론 후반부도 정적이지만 영화로 치자면 풍경 자체는 정적인데 왠지 드럼 소리가 사운드로 깔리는 느낌에 가까웠다고 할까. 그리고 만화에는 사운드가 없으니까 이미지로 그런 느낌을 좀 주려고 했던 건 있었다. 굳이 내가 실험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끼> 단행본도 발간되고 있는데 애초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의 <이끼>와 같은 형태는 불가능했을 거다.
머릿속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서 책으로 나올 거니까 책도 고려해야 돼. 이렇게 작업은 못 하겠더라. 왜냐면 웹툰에 적응하고 웹툰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버겁고 힘드니까 출판까지 고려해서 작업한다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뭔가 이렇게 보여줘야지, 이런 건 전혀 없었다. 특히 출판만화를 하다 보면 문하생 때 배워왔던 관성대로 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법도 쉽게 가고. 그러니까 만약 웹툰에서 실험적이라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건 점점 늘어간다는 거?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발견을 느끼면서 ‘이런 것도 넣어봐야지. 이것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컬러링 작업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작업도 천차만별일 텐데 웹툰에 컬러가 들어간다는 것도 과거와 작업적인 차이를 느끼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발생한 시도적 차이도 있었을 테고.
진짜 힘들지. 출판 만화할 때는 먹만 필요했다. 흑백만화다 보니까 제일 센 표현이라면 먹칠이었다. 그런데 컬러 만화이다 보니까 어디에 포인트를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다 자기 색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색을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다 보니까 작정한 게 차라리 전체적으로 톤을 다운시켜버리자는 거였다. 아예 무채색 계열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리고 대신 빛으로 음영을 묘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통일감도 주고, 음영이 생기면 좀 더 인상이 강렬해지는 게 있잖아. 색을 쓴다는 기분 말고 빛을 묘사한다는 기분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색을 쓰는 건 기본적으로 작업시간도 더 걸릴뿐더러 색에 대한 계획도 갖고 가야 하니까 힘들거든.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신이 생각나는데 류해국 아버지가 기도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는 복도 신에서 시체들을 음영으로 표현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차라리 구체적인 실물의 모습을 어둠으로 덮어서 실루엣만 감지시켰기 때문에 살벌한 기운 자체가 보다 증폭되는 것 같더라.
아무리 어둡게 해도 노트북 모니터로 보면 웬만하면 다 나온다. 그래서 최대한 노트북에서조차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게끔 하려고 그렇게 어둡게 해놨는데 누가 그 조잡하게 펜터치 돼있는 걸 포토샵으로 완전 밝게 만들어서 댓글에 올려놨더라. (웃음) 그때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 미안한 게 또 그 밑에 사람들이 댓글로 욕을 써놨더라. 알아는 볼 수 있게 해놔야 될 거 아냐, 하면서 욕을 써놓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여튼 그렇게 어둡게 된 장면도 웹툰에선 적극적으로 쓸 수 있다.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해놓으면 인쇄가 떡이 져버린다. 스크릴 톤을 여러 번 붙여놓게 되면 미세한 알갱이들이 인쇄하면서 다 뭉개져 버려서 효과가 잘 살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히 컬러만화라서 채도 만으로도 색을 뭉개버릴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이끼>는 항상 도입부에 어떤 중요한 풍경을 프롤로그처럼 전시한 뒤, 타이틀 컷을 배치하고 본격적인 작품을 밀고 나가는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키를 쥐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먼저 전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적인 컷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경묘사에 공을 들이고 빛과 음영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혹시 만화보단 회화적인 부분에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는지 궁금하더라.
컬러만화를 하게 되니까 회화를 많이 보게 됐다. 최근의 모던회화 말고 클래식한 거 있지 않나. 네덜란드 풍경화 같은 걸 많이 봤지.
사실주의적인 고전회화 말인가?
그렇다. 풍경을 많이 담았던 고전주의 회화 같은 거. 특히 <이끼>에서 구름 사이로 달빛 묘사되는 장면 같은 건 네이버 블로그에서 참고한 거다. 회화만 쫙 올려놓는 블로거들 있잖아. 달빛이 정말 대낮처럼 환한 밤을 그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밝은데 어떻게 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계속 살펴보게 됐다. 그러면 구름은 이렇게 묘사하고, 이건 이렇게 묘사하고, 이런 걸 계속 분석해보고 내 작품에 적용해보기도 하는 거지. 강도하 같은 경우, 나무 숲을 그릴 때 윤곽을 잡아서 색을 넣지만 나는 나뭇잎을 다 그린다. 터치가 많이 들어간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사실 강도하처럼 그리는 게 애니메이션적인 기법인데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를 싫어한다. 어쩌면 내가 수채화 전공의 입시미술로 그림을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색에 대한 직관력이 강한 편이다. 그런 경험적 기반이 있어서인지 회화작품들을 참고한 게 도움이 됐다.
원래 미대를 진학하려고 했다던데.
실패했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웃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품은 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다. 이미 만화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당시 만화 전공 대학이 없으니까 당연히 미대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자기가 대학을 가지 않을 거란 설정은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미술을 하고 싶어서라기 보단 만화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미대를 선택했던 건가?
비슷하다. 만화는 너무 좋았지만 만화가에 대한 자각은 크지 않았고, 만약 직업이라도 하나 갖는다면 화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했던 거지. (웃음) 그렇게 ‘미대 갈까?’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졌고, 우리 집 경제상황이 나를 재수시켜서 대학에 보낼 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화가가 돼야겠다’가 된 거지. 학교 다닐 때도 진로 상담을 받지 않나. 난 항상 ‘그걸 왜 하지?’라고 생각했다.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진로가 없나?’ 생각했지. (웃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서 왜 고민하는지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몰라도 과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갔거든. ‘화학을 좋아한다는 애가 경영학과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웃음)
결국 미대 진학이 좌초되고 만화가를 지망하게 됐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히 고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항시 어려웠지. (웃음)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명확한 진로가 잡힌 게 아니었을까.
만화 그리러 서울로 올라온 것부터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루트를 모르니까 만화학원을 가게 된 거지. 그런데 그 만화학원 원장님이 만화가 협회에서 허영만 선생님과 싸운 적이 있어서 전화번호조차 가르쳐주지 않더라. (웃음) 결국 나 혼자 앞길을 찾아야 했던 거지. (웃음) 한때 아파트 벤치에서 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벤치 생활하던 멤버 형이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들을 만나게 돼서 연락처를 받아와서 나한테 가르쳐주더라. 결국 허영만 선생님이 계시는 은마 아파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알게 됐고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객지 생활을 하면서 노숙도 했던 경험이 <야후>에서 김현에게 반영됐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상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아까 말한 아버지에 관한 심상도 그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주목하는 부분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 특별한 감상을 얻는 게 아닐까 싶더라. <야후>의 단행본 표지에 그려진 건 항상 얼굴이었는데, 이번에 <이끼>의 단행본 표지 역시 얼굴이더라.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하면서 내면적 변화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사람을 통해 작품에 대한 모티브나 소스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궁금하다.
남에 대한 관찰보다도, 나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나에겐 상실이나 결핍의 정서가 굉장히 많다. 어릴 때 미술대회에서 받아온 상장을 벽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놨었다. 그런데 남의 집에 가보고 나서 상장은 액자에다 걸어놓는구나, 처음 알았지. (웃음) 어쨌든 집이 망해서 이사를 가는데 우리 집을 사러 온 사람이 벽 안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본다면서 그 벽지를 다 찢더라. 그래서 상장이 남아있는 게 한 장도 없다. 내 상장이 찢어지는 걸 내 눈을 목격하기도 했고.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데, 상도 많이 받는데, 왜 내겐 항상 그 다음이 없지?’ 싶더라. 열매가 맺어야 되는데 그 다음이 없는 거다. 상실감 같은 거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뒤 칠판의 절반을 내주셔서 분필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숙제 검사조차도 그림 연습으로 대체해줄 정도로 밖에서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작 집에서는 왜 인정을 못 받을까, 이런 생각들. 그리고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와도 아버지는 거의 신경도 안 썼다. 그 까짓 거, 이런 식이었지. 그래 놓고 본인이 다 망한 뒤에 자신 없을 땐 “너 대회 나가서 상 받았냐?”고 얄밉게 물어보고, 치사하게 이제 와서. 스스로 돌아봤을 때 내 인생이 안타까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짠하고, 그런 느낌들이 굉장히 많았지. ‘나는 왜 이렇게 불쌍하지?’란 생각을 자주 품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보니까 별자리 공부도 하게 된 거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
그래서 결국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나?
그냥 난 또 다른 걸 무언가를 위해서 결핍이 돼있구나, 라는 거. 다른 뭔가를 강화시키려다 보니까 이런 결핍이 된 거구나, 라고 인정하게 됐다. 다들 생김새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각자 다른 미션을 갖고 태어난다고 할까. 그 미션을 하기 위해서 어떤 옵션들을 갖고 태어나는데 강화된 옵션이 있는 반면, 결핍된 옵션이 있는 셈이지. 마치 야구팀 운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구단주 게임을 예로 들면, 자금이 한정돼 있지 않나. 선동렬 한 명 산다면 나머지 선수는 리틀 야구단에서 사와야 한다. 그러니까 표준 퀄리티를 올릴 것이냐, 아니면 주력 선수 몇 명을 올리고 나머지를 버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누구나 똑같이 100을 갖고 있다면 어떤 사람은 90이 한 면에 몰려있는 거다. 어떤 회장이라는 사람은 전생에 조상이 나라를 구해서 그게 돈 버는 쪽으로 갔나 싶기도 하고. (웃음) 근데 나는 그게 아닌 거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많이 강화된 사람이더라. 그런데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런 결핍에 대한 포지티브(positive)한 보상이 항상 있다는 거다. 물론 네거티브(negative)한 보상도 있고. 네거티브는 사람을 파멸로 몰 수도 있지만 포지티브는 그 결핍으로 되레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고 할까. 8년간 별자리 공부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폭도 넓어졌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라는 선이 뚜렷해졌지. 얼토당토않은 걸 탐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잃거나 기회를 빼앗기지 말고 확실히 하자. 사실 이 회사에도 그런 각성이 없었다면 굳이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별자리를 공부하고 나니까 내 얼굴 앞에 거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남을 뿐이지, 남이 뭘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린 인물들의 얼굴이 스스로에 대한 다양한 자화상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혹시 요즘 주시하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이 있나?
최근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빤하게 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에 ‘수유 너머’라는 곳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조금씩 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면 8년 동안 배운 별자리를 다 소진한 상태라 이걸 다시 끌어와서 국물을 우려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창작자가 스스로 처참해질 때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을 때다. 문화를 향유하는 건 생활이어야 하고 그렇게 우러나와야 진짜 좋은 내용이 나오는 건데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남의 책을 뒤적이고 남의 영화를 살펴보고, 그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수면 위로 뭔가 떠올리기 전에 그 수면 아래에서의 활동이 좀 바쁘게 필요하겠더라.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온라인 강의도 많더라. 문화강의도 많고. 그렇게 뭔가 배워보려 한다.
강단에도 서고 있다고도 들었는데.
세종대학교에서 하고 있다.
강단에 서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전한다는 건 어떤가?
강단에 서는 친구들은 막상 자기가 학생들한테 에너지를 얻어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 아이들의 학비가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그 학비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 수업 준비를 해보니까 6~7시간 걸리는데 마감해가면서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그래도 어떻게든 그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얻어오긴 뭘 얻어와. (웃음) 그 애들이 수업 끝났을 때 ‘아, 오늘 뭐 좀 들었네.’ 이런 느낌이 들 정도가 돼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진중권 씨가 쓴 ‘미디어 아트’란 책을 읽으면서 ‘아트 앤 스터디’라는 문화교양 웹사이트에 매달 돈 십만 원씩 내고 유료강의도 들었다. 내가 애들한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웹툰을 고민하지 말고 디지털 만화를 고민해라.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창작자라고 생각해라. 만화도 창작의 한 범위니까. 우리 시대에 너무 흔해져서 가치 없는 말이 많다. 정의, 도덕, 교양. 특히 교양이란 말은 원래 의미에 비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쓰이지. 하지만 창작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교양이다. 창작자는 교양인이 돼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계속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발표하게 만들어서 그 애들을 발가벗기려 한다.
수업 방식이 궁금하다.
내가 지금 단편만화를 가르치는데 단편 만화 기획서를 써오라 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한 명씩 발표시킨다. 이걸 왜 기획했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설득해보라 한다. 핵심적인 건 이거다. 말로 하지 못한 관념은 쉽게 지워지는 거니까 글로 써보고 말로 표현해놔야 된다. 그리고 말 못하면서 글을 잘 쓰는 사람 없다. 글을 잘 쓰려면 말도 잘 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앞뒤 분명한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말은 어눌해도 상관없다. 대신 앞뒤를 맞춰라. 그래서 여기 앉아있는 네 동료들이 네 작품을 사가야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입장에서 네 생각을 최대한 매력 있게 설명해라. 그렇게 먼저 기획서로 전부 다 심사한다. 그 다음에 콘티를 짜오게 한다. 애초에 기획했던 바가 콘티에서 어떤 리듬으로 표현됐는지 프로젝션으로 쏴서 이 장면은 어떻게 그릴 거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했다는 걸 설명하게 한다. 그리고 이걸 그리기 위해 어떤 사진자료를 취재했는지 그 과정도 검토한다. 최종적으로 그 과정에 걸맞은 결과가 나왔는지에 점수를 주는 거다. 결국 그 과정에서 배운 성취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만화가로서의 기능력보다 생활력을 학습하는 교육방식처럼 보인다.
그렇지. 출판사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연재를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면 설득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인의 어떤 능력을 알고 같이 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협업이 가능할까라는 거다. 최소한 자신의 매력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한 분야를 이끄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던지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느닷없이 그렇게 됐지. 뽑아낸 작품도 별로 없는데 중견이 돼버렸으니까. (웃음)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갔을 때 허영만 선생님 연세가 지금 내 나이였다. 그때 이미 허영만 선생님은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세상에 작가로서 이름을 많이 알렸다. 이미 한 100타이틀 가까이 그린 작가였으니까. 나는 아직 20타이틀도 꼽지 못한다. 만화를 꾸준히 본 독자라면 모를까.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책임감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 에피소드 형태의 단막극으로 진행되는 웹툰이 서사적 호흡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사적 연재로 이뤄진 웹툰을 주목 받게 만든 시초는 강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서사적 형태의 웹툰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독자의 주목을 얻게 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끼>도 그런 흐름의 중심에 놓인 작품이다. 사실 이전까지 지면 출판 작가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서사가 없는 작품을 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서사적 형태가 작품의 기본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 개그물을 한다 해도 서사가 있는 개그물을 하고 싶지. <아색기가>같은 아이디어는 내 머리 속에 있질 않다. 사실 흥미도 별로 없고. 물론 (양)영순이 작품을 재미있게 본다. 단지 내가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사실 웹툰으로 들어올 때 그런 생각은 했다. 원래 웹툰은 유머 사이트 게시판을 이용해서 만화적인 패러디물을 올리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거다. 그런데 기성작가로서 그런 후배들이 만들어놓은 웹툰이란 판에 들어오면서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들어온다는 게 실제로 굉장한 부담이 됐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될까 고민도 됐고.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나도 후배들이 했던 것처럼 간결하게 치고 나가는 형식을 따라 한다는 건 너무 치사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강풀이나 강도하가 몇 년에 걸쳐서 서사적 만화 폼을 웹툰에 안착시켰고 나는 다행히 서사라는 게 웹툰에서 인정받는 시기에 여기 들어와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서사적 폼으로 웹툰에 들어오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그 역할을 똑바로 맡고 싶었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 작가는 웹툰이라는 매체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 대표적인 웹툰 작가다. 반대로 당신은 기성 매체 작가로서 매체의 변화에 편입된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매체에서 적응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이 많았을 거 같다.
굉장히 부끄러웠지. 그리고 못하면 어쩌나 싶었고. 예를 들어서 가령 댓글 개수조차도 액면으로 쫙 나오지 않나. 이게 개그작가보다 못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웃음) 물론 작품의 경종을 극화냐, 개그냐, 로 나눌 수 없지만 좀 더 둔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함의도 못 잡아내면 처참할 것 같았다. 특히 경력이 20년이나 됐다는 사람이 기존의 웹툰 작가들만큼의 흥미도 못 끌어내고, 싸구려처럼 말하자면 낚시 정도도 못하면 곤란한 거 아닌가 싶더라. 엄청난 돈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웹툰에서 작업하던 후배들보단 많은 돈을 받으니까 그만큼 돈 값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래서 연재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이끼>를 끝내고 나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들어갔지. 이것보단 나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강풀 보면 신기해죽겠다. 어떻게 연달아서 저렇게 뻥뻥 터뜨릴까. (웃음) 나는 한 3년 헤매다가 이제 이야기 하나 나왔는데, 신기하지.
결과적으로 <이끼>는 웹툰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놀랄 만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계속 만나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도 사실 거의 안 만난다. 강도하, 이충호 씨, 아니면 자주 가는 술집 사장님, 이런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이 없는 거지. 그래서 처음에는 댓글만 놓고 고민하다 보니까 댓글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가 생기더라. 누가 댓글로 이슈 하나 던져놓으면 그 의견에 시비 걸기 위해서 내 만화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댓글을 다는 거다. 그럼 결국 만화하곤 정말 상관없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런 판단이 드니까 댓글이 수백 개, 천 개 달려도 자기들끼리 노느라고 다는 건가 싶어지는 거다. (웃음) 그리고 조회수로 고료를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다음은 네이버에 비해 조회수가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냥 ‘난 아직 멀었네?’라는 생각만 들고. (웃음) 그래서 또렷하게 내가 뭘 이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사실 웹툰하면서 영화 계약한 후배들이 많다. 다만 강풀 말고는 이슈가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나는 이슈 메이커라고 할만한 강우석 감독님이 연출을 맡으면서 그 덕을 꽤 본거지. 솔직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과연 <이끼>가 반응이 있나 싶더라. 길 다니면서 누구한테 사인을 해줄 일도 없었고, 동네 아파트에서 동대표 나와라, 이러면 나가고. (웃음) 네이버 ‘한국인’에 실리고 이랬을 때 요즘 내가 조금 이슈가 되나 보다, 이 정도지.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적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런데 (강)풀이는 만나보면 확실히 그런 태도가 있다. 지금 웹툰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그만큼 자기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기준점이 될 수 있으니까, 항상 그걸 각성하고 산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생각은 거의 없다. 그냥 풀이가 “형, 이렇게 해보죠.” 그러면 “그래.”하고, 내가 풀이 등을 타고 간다는 생각이지. 아직은 내 위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이 안 난다. 어차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정지우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렛츠 필름 김순호 대표님께서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칭찬 말고 의미부여를 해주시니까 너무 송구스럽고 감사했다. 그때 내가 감동을 받아서 허투루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허영만 작가님도 다음에서 <꼴>을 연재했다. 현재 출판만화의 소비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그 대안으로 웹툰이 부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기존 출판만화에서 중시했던 만화의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는 진화라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퇴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밟히기도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돋보이지만 기본적인 기능적 자질이 부족한 작품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런 과정에서 종종 기성 작가들과 웹툰 작가들 사이의 신경전도 없지 않은 거 같다. 매체의 변화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분명 고민이 있지. 나는 만화가들이 너무 형식을 따진다고 생각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출판만화의 어법을 왜 고정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든다. 나도 거기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만화에 어떤 특정한 형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웹툰이 가진 좋은 장점이 많다. 출판만화가 포기했던 장르의 다양성이라던가, 그 동안 출판만화가 도외시했던 독자층의 흡수, 이런 것들은 웹툰이 가진 큰 장점이라고 본다. 대신 출판만화는 신인작가가 등용해도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그 신인작가도 출판만화의 관습에 적용됐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자기의 개성을 보이기 보단 편집장 한 사람의 안목을 통과해야 연재할 수 있는 곳이 출판만화니까. 그런 점에 비해서 웹툰은 순기능이 많다. 기본적으로 웹툰이 아닌 디지털 만화를 염두에 둔다면 모바일이나 이북(e-book)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시 어마어마한 환경변화가 이뤄질 거다. 이랬을 때 언제까지 출판만화의 폼에 대해 고정적 확신을 주장해야 하겠나. 물론 그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그쪽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출판만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웹툰이 출판만화에 대한 관심도를 흡수해버린다는 이유로 공격 아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화의 질적인 수준을 저하시켜버렸다나. 그런데 본격적으로 웹툰이 활성화되고 작가들이 먹고 살만큼의 고료를 받기 시작한 건 불과 5년 안팎이다. 그런데 출판만화는 3~40년이나 된 분야다. 자기들이 자신들의 어법을 고민하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밀리게 됐는지를 고민해야지, 이제 파이가 좀 넓어진 상황에서 그 넓어진 파이에 대해 돌 던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건 자멸하자는 뜻이지. 스스로 내적인 고민을 하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변해야 하는 거고. 예를 들어서 출판만화를 책으로만 파는 게 한계가 있다면 이게 디지털 컨텐츠로 전환됐을 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으면서 여전히 일본만화만 수입해오고, 그러면서 수입구조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작가들의 마인드에 너무 많은 한계를 지어준다. 출판만화의 형식이 정확한 폼인 것처럼 강요한다던가. 그런 게 나는 못마땅하다.
안에서 느끼는 갈등이 생각보다 깊나 보다.
기성매체가 웹툰을 공격하는 논리는 딱 그거다. 결국 웹툰은 수입구조가 없으니까 허상 아니냐. 그런데 사실 이 인터넷 IT 비즈니스라는 게 끊임없이 개발되는 중이고 계속적으로 도구가 개발되고 모델이 나오면서 또 새로운 시장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웹툰 시장만 보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수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정작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포털의 웹 구조만 보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굉장히 오만한 판단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IT환경에서 많은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정착시키려 노력하는데 강 건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허수네, 뭐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굉장히 비겁한 행위일뿐더러 나라 전체의 산업적인 측면을 봐도 그건 아닌 거다. 성공을 기원해줘야지. 그렇게 힘을 합쳐서 자기네 컨텐츠도 잘 되게끔 가야지. 웹툰이 망한다고 자기들이 잘 될 거란 보장도 없으면서 왜 거기에 돌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제발 앉아있는 사람끼리 뛰어가는 사람 다리 걸지 말고, 같이 뛰든가, 손을 내밀든가 하자는 거다.
류해국처럼 뛰어들어서 뭔가를 헤집어 놓을만한 발언이다. (웃음) 만화가로서의 기능적 창작력을 넘어 산업적인 생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만화 그리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형식으로 말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체되지 않는 작가가 되야 한다. 자기의 시효가 끝났을 때는 독자 앞에서 사라져도 되지만 나를 대체하는 누구 때문에 내가 밀려나는 상황은 없어야지. 적어도 몰개성적인 작가는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만의 작가적 역량을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창작자라는 분명한 자기 태도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말한다. “나는 극화 만화가가 꿈이야, 이렇게 단정하지 마라. 말이 다 빚이 된다. 너희가 경험할 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아직 모른다.” 예전에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 시절에 같은 화실에 있던 사람들이 만화잡지를 보면서 “이건 너무 일본풍이야. 이건 너무 상업적이야.” 그랬는데 그 말들이 결국 자기 스스로한테 다 빚이 돼서 돌아온다. 괜히 자기가 말한 상업적인 만화 그려놓고서 우리끼리 만나면 불필요한 죄책감에 빠져있지. “사실 나 요번에 상업적인 거 좀 했어.” 이러면서. 그게 뭔 상관이냐. 우리가 배운 게 상업만화인데.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 (웃음)
어쨌든 <이끼>의 연재를 끝내고 나서 남는 단상도 많았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나 속이 팽창돼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사사로운 동기나 아이템을 캐치해서 작품을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가 너무 부풀려진 상태다. 왠지 대부분의 생각이 딱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원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지. 부담감이라면 부담감이랄 수 있고. 설경구 씨도 <역도산>으로 살 찌운 상태에서 바로 뭘 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빨리 본래 상태로 축소시켜서 옛날의 예민했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반짝반짝한 생각을 돌릴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 물론 <이끼>는 내게 너무 고마운 작품이다. 다만 빨리 이 사이즈를 줄이는데 집중하려 하고 있다. 호흡조절을 해줘야지.
이제 댓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후련하겠지. (웃음)
댓글에 괜히 욕 써놨다가 다른 팬들에게 융단폭격 맞을까 봐 그런지 메일로도 욕을 하더라. (웃음) 댓글로 하면 몇 줄로 끝날 수 있는 말이 메일로 오니까 더 강렬하게 오는 거지. 그냥 멋도 모르고 클릭해서 열어봤다가, 어이구. (웃음)
지면 연재를 병행했는데 앞으로 또 웹툰에서 연재를 계획하는 바가 있나?
원래는 있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이끼>때문에 그것들이 지금은 시시해져 버렸지. (웃음) 처음에 생각할 때는 그 아이템들에 대해서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 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상황이지.
스스로에게도 <이끼>가 어떤 변화를 남겼다고 생각하나?
포지티브의 확신, 긍정의 힘을 느꼈다. 연재가 끝나고 댓글을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긍정으로 끝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많이 위로를 받았다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게 가장 큰 성과였나 보다. 나에게는 그 동안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
오랜 과거부터 인간들은 달을 통해 미래를 읽고, 현재를 파악했다. 영원을 누릴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달리 순간을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이지러지다 차오름을 반복하는 달은 그만큼 신비롭되 불길한 것이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딘 이후로도 그곳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환형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달을 향한 인류적 호기심이 신비에서 실리로 변모했을 뿐, 그 구체는 여전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미지수의 창작적 자원량을 보유한 미지의 영토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are we now?)”단순하듯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자막으로부터 미끄러져나가듯 이어지는 낮은 음성의 내레이션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며 다양한 불협화음에 시달리던 인류가 달의 표면에서 채취한 청정원료 ‘헬륨3(HE3)’를 대체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이뤘다고 전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그 모든 성과가 전세계 자원소비량 70%를 차지하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루나 산업(Lunar Industries LTD)’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리고 기업광고에 가까운 그 도입부 영상이 묘사하는 거대한 변화는 인류의 머리맡에 놓인 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치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놓인 달 기지에서 홀로 헬륨3를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작업을 도맡은 샘 벨은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가족을 만나는 날만 손에 꼽은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유일한 동료라 할만한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가 종종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컴퓨터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도 어느덧 계약 만료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 2주가 지나면 자신을 태우고 지구로 갈 수송선이 도착할 것이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자신의 딸도 안아줄 수 있다. 그런 어느 날, 월면 작업차를 타고 자원채취 현장에 순찰을 나간 샘 벨은 충돌사고를 겪게 되고 이로부터 영화는 조금씩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선다.
<더 문>은 범인류적 진전을 피력한 그 동영상의 실체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가던 한 남자에 대한 사연을 그리는 SF영화다. 달에서 채취한 에너지를 지구로 전달하는 달 기지 ‘사랑(Sarang)’에서 3년의 계약기간 동안 홀로 그 모든 작업을 도맡는 샘 벨(샘 록웰)에 관한 드라마다. 지구의 중력에 속박된 이상 결코 볼 수 없다는 달의 뒤편에 대한 비밀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전인류의 편의를 위해 홀로 달에서 외로운 작업을 펼쳐가는 샘 벨의 삶 또한 고립된 비밀처럼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한 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달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현대문명의 이기를 착륙시켜 완성한 SF영화 <더 문>은 광활한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 표면을 독점하기엔 너무도 작은 존재인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회상이나 영상의 동원과 같은 간접적 방식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배제한다면 직접적으로 스크린에 노출된 시공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에 불과한 <더 문>은 그만큼 정적이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서 달 기지에 홀로 남아 전인류를 위한 에너지 공급에 중책을 맡고 있다는 샘 벨의 상황은 언뜻 봐도 비상식적이다. <더 문>의 우주는 샘 벨의 정서적 고립을 묘사하기 위해 장치된 광활한 감옥이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더 문>에서 달은, 더 넓게 우주는, 궁극적으로 휴머니즘과 멜로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광활한 모노드라마의 무대다.
일차적으로 묵묵히 일상을 견뎌나가는 인물의 고독을 담담하게 응시하던 영화는, 이차적으로 그 인물을 둘러싼 삶의 실체를 가볍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시야에 들이밀며 본질적 물음에 접근해나간다. 광활한 우주의 깊은 어둠처럼 평온한 고독을 유영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개하며 이를 대면한 인물의 심리적 공황을 긴장으로 달궈나간다. 마치 대기권에 돌입하며 대기와 마찰하는 우주선의 표면과 내부의 온도가 다른 것처럼 인물의 공황적 심리 밖에 흐르는 차분한 공기를 평등하게 포착함으로써 감정적 역설을 이끌어낸다. 관객은 <더 문>에서 그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고독의 만료를 기다리던 남자의 운명이 행성의 소멸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며 그 고독이 끝없이 팽창되는 우주적 너비의 운명과 같은 것임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가스와 먼지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연민을 자아내던 샘 벨의 고독은 창작자가 연출한 충돌적 상황을 빌미로 이야기적 자전력과 공전력을 얻어 단단한 감정적 형태를 완성하고 전달해낸다. 샘 벨을 연기하는 샘 록웰의 연기는 <더 문>의 자전력의 기반이 되어 관객의 몰입을 당기는 인력이 되고 창의적인 발상과 전개는 공전력의 기반이 되어 거대한 감정적 은하계를 이룬다. 공기가 없어 소리가 발생할 수 없는 우주의 적막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전 궤도와 공전 궤도를 지닌 행성들의 화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귀로 확인하는 것과 같이 황홀한 경험적 진경을 전달한다.
결국 도입부의 물음은 여운적 답변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대의적 진리를 떠올리기 위한 발사대나 다름없다. 심오한 질문과 달리 답변은 명확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지 않는 삶. 결국 무음의 우주에서 살아남아 유음의 지구로 돌아간 샘 벨은 비로소 삶에 대한 선택권을 얻고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적막한 무음의 대지에서 번잡한 소음의 대륙에 내린 샘 벨은 그렇게 긴 시간의 고독 끝에 제 삶을 찾아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문>은 최근 개봉된 <디스트릭트9>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응용력과 이야기에 대한 창작력의 자산적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지난 SF영화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더 문>은 창조보다도 발굴의 가치를 설득하는 참신한 결과물이다. ‘사랑’이라는 한글로 표기된 달 기지의 이름이나 성조기와 나란히 놓인 태극기가 발견되는 우주복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배려가 인상적인 건 그것이 단순히 얄팍한 생색내기에서 비롯된 이벤트가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과 관심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선물이라 이해될 만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문>을 통해 대한민국에 애정을 표현한 던칸 존스는 무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다. 어쩌면 그는 <더 문>에 진심을 담아 국내 관객들과 조우하길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관객이 그 진심에 답할 의무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문>을 완성한 던칸 존스의 재능이 그 진심을 빛낸다는 점에서 <더 문>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돼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망가의 신화, 아니메의 전설, 오타쿠의 복음. 신도적인 팬덤에 둘러 쌓여 끊임없이 복기되고 해석되는 묵시록 <에반게리온>은 그 이름에 얽힌 수많은 언어만으로도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작품의 개별적 가치를 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신드롬으로서 이미 하나의 거대한 세계임을 증명했다. <에반게리온>의 매력은 그 세계관의 너비를 짐작할 수 없는 비정형성에 있다. 메카닉 애니메이션의 형태 안에 잠재된 성장담, 그리고 오타쿠 문화의 총아적 이미지까지, 그 모든 요소가 그것을 해석하고 독해하는 이들의 세계관 안에서 거듭 확장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재생산시킨다는 점에서 <에반게리온>은 진화하는 유기체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신극장판 4부작은 그 유기체적인 특성을 증명하는 새로운 <에반게리온>의 진화적 결과물이다. 정형되지 않은 세계관을 새로운 틀에 넣고 주조한 또 다른 판본이다. <에반게리온>의 조물주 안노 히데아키가 ‘리빌드(Rebuild)’를 천명하며 그 첫 번째 결과물 <에반게리온: 서>(이하, <서>)를 공개했을 때, 이미 그 세계는 뒤틀리고 있었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파격적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워밍업으로서 <서>를 마련했을 뿐이다. TV시리즈로 상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26부작 가운데 6부까지를 변주해 나열한 <서>는 원작에 대한 기시감 속에서 꿈틀대는 파괴적 전조를 드러내며 기존의 팬덤을 또 한번 끓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질적으로 발전된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세계관을 융해시키겠다는 잠재적 욕망을 감지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예고는 <에반게리온: 파>(이하, <파>)에 이르러 본격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에반게리온>에 탑승한 팬들을 파격적인 파란의 대지로 발진시킨다.
원작의 팬이라면 도입부에 등장하는 새로운 영상만으로도 파격적인 감상을 얻을 것이다. <파>의 곳곳엔 원작의 흐름을 거부하듯 어긋나는 서사의 흔적과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발견적 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형의 에반게리온과 캐릭터가 등장하며 이를 통해 서사적 너비를 확장하는 동시에 기존의 형태와 판이한 서사적 진행을 확보해나간다. 기존의 시리즈가 묘사했던 캐릭터의 성격마저 무마시키는 동시에 관계의 틀마저 온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고 그 순차적인 캐릭터 등장 시점마저 완전히 무너뜨려버린다. 가장 파격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두 편의 시리즈가 남겨진 이 신극장판의 중반부에 다다르는 역할을 하는 <파>의 서사가 이미 지난 시리즈의 결말부에 접근해버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끝에서 ‘써드 임팩트(third impact)’의 시작을 언급해버림으로써 그 이후에 지속될 두 편의 서사가 도무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그 방향성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내달려 버렸다. 실로 폭주적인 진화를 거듭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신극장판으로 <에반게리온>을 처음으로 접한 관객들에게 <파>는 단순히 놀랍게 뛰어나거나 이해할 수 없게 난해한 작품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존의 원작 시리즈에 대한 경험치가 있는 관객이라면, 또한 그 이상의 애정을 지닌 팬이라면 <파>를 통해 충격과 경악의 감상적 지배를 느낄 확률이 크다. <서>가 만들어낸 서사적 오차범위를 통해 변화의 징후를 예감하거나 각오했던 이라 할지라도 <파>가 새롭게 선사하는 파괴적 위력과 건축적 징조들은 그 이후를 예측할 수 없게 생소해서 기다림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원작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결말부의 파격은 이 새로운 신극장판의 궤도가 더 이상 원작 팬의 정보량 안에서 해독될 수 없을 것임을 호기롭게 선언해버린다.
“이번만큼은 신지 네가 원하는 세상을 남겨주겠어.” 카오루의 대사는 신극장판이 던지는 구체적 선언을 대신한다. 기존의 팬덤을 배반하듯 붕괴적인 네거티브를 그려낸 TV시리즈의 결말이나, 보다 서사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선보이는 구극장판의 파국적 결말과는 또 다른 차원의 신세계를 기대하게 만든다. 동시에 이번 신극장판이 기존의 오타쿠적 세계를 온전히 망가뜨림으로써 오타쿠적인 팬덤의 질서를 냉소하고 이를 통해 성장과 변화를 촉구하던 성격과 지향점이 달라지리라는 예감도 가능하다. 자신의 선택 앞에 유약하기만 했던 소년 신지는 과감히 자신의 결정을 통해 폭주를 감행하고, 자신의 감정을 침전시키듯 살아가던 소녀 레이는 모성적 본능을 이끌어내며 소년의 성장을 촉매한다. 오래 전 팬덤을 이뤘던 관객들의 성장만큼이나 <에반게리온>도 진화했다. <파>는 에반게리온을 위한 창세기 외전, 아니 신창세기나 다름없다. <에반게리온>의 팬을 자처하는 누구라도 그 끝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탄식이 아닌 탄성이리라. 새로운 복음이 도래한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Service! Service!
무엇보다도 <파>를 이을 또 다른 복음의 서 <에반게리온: Q>를 예고하는 '서비스! 서비스!'는 꼭 챙길 것. 물론 누구보다도 에바의 팬을 자처하는 팬이라면 자막의 오름과 함께 상영관을 꽉 채우는 'Beautiful World'를 찬송가처럼 듣고 있겠지만. 게다가 그 끝까지 챙겨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을 아는 당신에게 그것이 분명 ‘잔혹한 갈망의 테제’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자명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