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주리의 백치미적 연기가 인상적인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뮤지컬 성향까지 가미된 만화적 취향의 코미디다. 기시타니 고로가 자신의 첫 연출작으로 코미디를 선택했다는 건 일면 의외다.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를 통해 현장 경험을 시작한 기시타니 고로는 그 이후로 만만치 않은 사내이거나 진중한 남성으로서 각인돼왔다. “내 안에는 <개 달리다>의 강렬한 캐릭터도 있고 그 밖에도 배우로서 연기했던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배우로서 좀처럼 드러내지 못했던 기시타니 고로의 또 다른 취향을 드러낸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내가 보고 싶은 걸 찍는 방식”으로 작업에 임한 기시타니 고로는 “내 안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들을 다 이끌어내서 1시간 40분 동안 완전히 달려보자는 생각”으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을 완성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는 예기치 못한 살인에 휘말리며 시체 유기를 계획한다. 하지만 생각대로 하면 된다는 모CF카피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를 기다리는 건 엉뚱한 소동극의 연속이다. 비현실성이 강하게 자각되는 영화적 상황의 나열 속에서도 설득력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기시타니 고로는 명확한 연출적 목표를 지니고 현장을 통제했다. “기상천외한 스토리를 지닌 이 작품을 보통의 영화 찍듯 리얼하게 표현하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그래서 기시타니 고로는 모든 상황을 “오버액션으로 끌어올렸고”, 덕분에 “춤과 노래가 들어가는” 방식이 강구됐다. 과할 정도로 감정을 조장하는 매 상황은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기 보단 확실한 연출적 목표를 품고 스토리에 어울리는 표현을 선택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 작품을 찍으려고 생각해서 준비하고 시작하게 된 건 2년 전이다.” 기시타니 고로가 갑작스럽게 연출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외에도 기획을 고려할만한“다른 후보들”도 많이 있었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차분한 심리묘사가 요구되는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시타니 고로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을 자신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일본에 없는 타입의 영화를 만드는 것.”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만큼이나 기구하고 <달콤, 살벌한 연인>만큼이나 엉뚱하지만 보다 낙관적인 웃음과 여운을 전달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차분한 드라마타이즈 형식의 여운을 맺거나 적막한 개그를 구사하는 일본 코미디들과 분명 궤가 다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그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갈 여배우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리고 기시타니 고로는 “아슬아슬하게 밸런스를 조절하지 못하면 너무 오버가 되거나 분위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역할”로서 “우에노 주리 이외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시타니 고로가 “연기에 있어서 최고”라 생각한다는 우에노 주리는 그 기대를 충분히 보상할만한 연기를 선물했다.
배우로서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 중견배우가 메가폰을 잡고 현장에 서는 느낌은 어색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반대다. “배우일 때는 오늘 촬영할 신에서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서 언제나 현장에 가기 싫었다. 그러나 오히려 감독으로서 현장에 갈 땐 신나서 뛰어갔다.”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시타니 고로에게 현장의 새로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 작품이다. 어쩌면 앞으로 기시타니 고로의 연기를 만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드는 건 아닐까. “배우로서 가끔 어떤 역할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게 되면 그 방향으로 가게 된다. 감독과 배우로서의 밸런스도 마찬가지 아닐까. 연출적 갈증이 생기면 아마 다시 연출을 하게 되겠지. 결국 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결과론적인 일이다.”물론 기시타니 고로에겐 “찍고 싶은 영화가 많다”. 그러나 현재 기시타니 고로는 “내년에 공연할 연극 대본에 대한 생각으로 매진”돼 있다. 아직 차기 연출작에 대해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기시타니 고로는 예감한다. “만일 다음 영화를 찍게 된다면 이번 작품과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또 한번 기시타니 고로가 메가폰을 잡으면 그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가방을 끌면서도 즐겁게 뛰어가는 우에노 주리의 라스트신을 위해 찍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어쩌다 보니까 다시 사람을 죽이게 된 여자가 어두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내일 다시 즐거운 일을 만날지 모른다는 긍정적 기대를 품고 뛰어가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다.” 기시타니 고로의 말처럼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비극 속에서도 긍정을 쫓아가는 역방향의 희망을 그리는 영화다. 사실 이런 기시타니 고로의 긍정적 태도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 희망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20대엔 굉장히 가난했지만 연극배우를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까지 연극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번도 연극을 그만 두겠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 가난했던 20대가 내겐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시타니 고로는 어두웠던 과거의 환경 속에서도 미래적 빛을 향한 집념으로 오늘을 이뤘다. 어쩌면 그가 선택한 감독으로서의 길은 어떤 특별한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행복을 꿈꾸는 긍정의 발전으로 이뤄진 자연스런 결과가 아닐까.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후회가 필요 없는 소중한 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그렇게 기시타니 고로는 어제를 넘어 오늘로 소중한 순간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나이 듣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외모만 보고 10대인 줄 알았거든. 대부분 이런 반응 아니던가?
(웃음) 다들 그렇게 얘길 하더라.
민증 검사도 자주 받을 거 같다.
난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친구들 심부름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도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신분증 검사를 하더라. (웃음) 술자리에서도 신분증을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은 신분증 없이 술집에 가면 부모님한테 전화를 한다. 그래서 신분확인을 한다고 부모님한테 전화를 한 적도 있다.
대세는 동안이라 기분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웃음) 나름대로 불편함이 있겠다.
그래도 일단 나는 좋다. 덕분에 교복도 계속 입혀주시고. (웃음)
조만간 부산에서 무용 공연을 한다고 들었다.
10월 22일, 23일 이틀간 부산 국악원에서 큰 공연에 참여한다. 그 이틀 공연을 위해서 3개월 동안 연습했다. 지금 선생님께서 부산에 계셔서 서울과 부산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9월까진 그래야 할 것 같다. <푸른 강은 흘러라>개봉할 때까진 서울에 있다가 내려가야 할 테니까. 아마 부산영화제 시작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한국무용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연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전통예술원 한국무용과를 2007년도에 졸업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통예술원은 영상원과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 그때는 배우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영상원에선 1~2학년 때는 다른 외부 작품을 못하게 돼있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연기자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린과 아프리카>의 김민숙 감독님이 그때 <사과>라는 단편 뮤지컬 영화를 처음 만든다면서 춤이 필요하다 하셔서 내가 우연찮게 그 작품에 참여했고 그걸 인연으로 계속 영화를 하게 됐다.
처음엔 배우로서 영화에 참여한 게 아닌가 보다.
<사과>에선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춤을 췄다. 그러다 김민숙 감독님의 두 번째 영화인 <그림자>에서 배우들 안무랑 트레이닝을 맡았는데 거기서 김민숙 감독님께서 “네가 꼭 했으면 하는 역할이 있다”고 하시더라. 약간 정신상태가 좋지 않은 관기 역할을 맡았는데 그 역할도 대사는 거의 없었다. 그 역할을 하고 나니까 김민숙 감독님이 자기 졸업작품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게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던 단편 <기린과 아프리카>였다. 그렇게 연기를 시작한 게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덕분에 큰 기회도 많이 생겼고.
<기린과 아프리카>로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았다.
정말 부담스러웠다. ‘이건 뭐지?’ 싶을 정도로. (웃음) 그때 상을 받고 나서 난 무용만 해야겠다 싶을 정도로 겁이 났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연기상을 받게 된 것도 그렇고, 잠깐 짧은 한때라도 나에게 많은 관심을 준다는 것만으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갑작스럽게 상까지 받으니 얼떨떨했을 것 같다. (웃음) 그래도 한편으론 나름대로 좋은 계기가 됐다.
현장이 너무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에 남고,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한다는 것에 반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해왔기 때문에 내 분야에 대한 열정을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영화를 하면서 그런 걸 다시 되새기는 계기기 됐던 게 아니었나 싶다. 내 춤을 형성하는 시기는 있었지만 내가 나를 스스로 형성하는 시기는 별로 없었던 거다. 김예리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나 스스로도 모호했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는데 영화를 하면서 그런 고민을 하게 됐다.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영화를 계속 하고 싶어졌다.
연기는 영화라는 결과물을 통해 자신이 표현한 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확실하지만 무용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무대 공연이라서 자신이 표현한 걸 직접 확인할 기회가 드물다. 그런 피드백의 차이에서 오는 감흥도 다르진 않던가?
사실 무용은 긴 시간을 연습하고 난 다음에 하루, 이틀 공연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그 무대에서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한번에 터트리는 거라 그 자리에선 어떤 수정도 불가능하다. 영화는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끼리 조금씩 쌓아온 걸 여러 번 반복해서 좀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게끔 만드는 작업이다. 그래서 결과물이 중요한 건 무용보다 영화 같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른 분야라는 걸 느꼈고. 사실 무용은 무대공연이다 보니까 충분한 기록이 남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는 결과물이 너무 확실하고 기록적이다. 두 달 사이에 내 얼굴이 달라져서 다른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용을 할 땐 계속 나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자꾸 내 자신을 다른 모양으로 바꿔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잠깐이나마 경험할 수 있는 거랄까? 일종의 축복이지.
무용은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
정식으로 시작한 건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던 4학년 때부터였지만 무용은 정말 어릴 때부터 했다. 두 살이 좀 넘었을 때였나? 그때 우리 집이 제천에 있었는데 그 당시 제천에 어린이집이 없었다. 어디 맡겨놓을 곳이 없다 보니까 무용학원에 맡겨졌다. (웃음) 그때부터 뛰어다니는 걸 좀 좋아했다.
영재교육을 받은 셈이네. (웃음)
그런 건 아니고. (웃음) 엄마가 아는 분이 무용을 하기도 했고, 무용학원엔 언니들도 많다 보니까 거기 가서 놀아라, 이런 식이었지.
결국 학창시절 내내 무용에 전념한 셈인데 어머니께서 돈독한 후원자가 되셨나 보다.
어머니께서 학구열이 높으시다. 내가 무용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니까 그럼 좀 더 좋은 곳에서 좋은 선생님들한테 배워야 하니 서울로 가야 된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국립국악중학교 시험을 봤고 운 좋게 붙었다. 그 뒤로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예종까지 부모님의 덕으로 순탄하게 갔다. (웃음)
아무래도 무용에 재미를 느꼈으니 무용을 해야겠다 마음먹었겠지만 종종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나?
아마 그 당시 내 주변의 또래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사실 무용 밖에 해본 게 없어서 뭔가에 도전해본다는 생각 자체가 큰 두려움이었을 거다. 해본 게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거? ‘내가 이걸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아마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많은 생각을 갖게 되고 변한 거 같다.
영화를 통해 교복을 입게 될 기회도 많았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는 기분은 어땠나?
교복을 입을 때마다 기분도 좋았고 신기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을 누리면서 살았던 거 같진 않다. 예민한 시기였지만 난 생각보다 무디게 지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예민한 상태로 순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막상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또 그렇게 되더라. 그래서 교복은 입을 수 있는 한 계속 입어보고 싶다. (웃음)
계속 여고생 역할을 한다는 게 특별히 걸리진 않나 보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여고생을 연기하는 게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들을 많이 하지만 나는 무리해서 내 이미지를 바꾸고 싶진 않다. 하는 데까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그리고 그냥 학생 신분을 갖고 있을 뿐이지, 항상 같은 여고생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매번 다른 자아를 가진 여고생을 연기하는 거니까 나에겐 다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 맨도 똑같지 않을까? 여고생도 똑같이 보일 뿐이지, 다 다른 사람이다.
원우라는 여고생으로 출연한 <바다 쪽으로, 한 뼘 더>가 본인의 장편 출연작 중 첫 개봉작이 됐는데 아무래도 기면증을 앓는 여고생을 연기한다는 게 특별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기면증을 앓고 있다는 점보단 원우 자체를 많이 생각했다. 원우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아팠으니까 스스로에게 짜증이 많이 나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오랫동안 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본인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보니까 짜증도 많이 나고, 그 병을 계속 끌어안고 있다는 것 자체도 힘들 거다. 그렇지만 불치병이다 보니까 자꾸 잊어버릴 거 같았다. 자기가 아프다는 걸 잊고 있다가 그 병이 도지는 순간마다 스스로 자꾸 꺾이는 기분을 느낄 거라 생각했고 그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다. 그런데 오히려 나에겐 <푸른 강은 흘러라>의 숙이가 조금 더 어려웠다. 왜냐면 원우는 서울에 사는 아이니까.
아무래도 원우는 환경적으로 익숙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캐릭터라 숙이에 비해 그런 부분에서의 짐은 가벼웠을 것 같다.
원우를 준비하면서 지나가는 고등학생들을 많이 관찰했고 나는 고등학교 때 어땠었나 생각했다. 기면증에 대한 자료도 많이 봤고, 자전거를 타거나 넘어지는 연습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구체화되는 것들이 조금씩 생기더라. 그런데 숙이는 국어교과서의 문학작품에서 나오는 영희나 철이 같은 애들이라 감이 잘 안 왔다. 그래서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점점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감독님도 숙이는 참 단단하고 밝은 힘이 있는 아이라고 얘기하셨기 때문에 내가 지닌 어떤 에너지를 많이 끌어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연변말 외엔 특별히 참고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뭔가가 없어서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진 많이 불안했다. 그 상황 자체에 들어가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숙이는 전형적인 모범생처럼 보인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을까?
나도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고, 시키는 걸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학생이랄까. 다 같이 이걸 해야 된다 하면 그걸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애였다. 이걸 안 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은 별로 못했으니까. 사실 고등학교 땐 춤을 추는 게 너무 좋았고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적은 친구들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춤을 추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가 어떤 성격인지, 이런 게 중요하기보단 내 춤이 항상 먼저였다. 김예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김예리의 춤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 게 지금 와서 약간 후회된다. 그런데 숙이는 그런 아이 같지 않더라.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것이 옳은지, 정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아이였다. 같은 모범생이면서도 분명한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아이란 점에서 나완 분명히 다르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바다 속으로, 한 뼘 더>보다 먼저 촬영된 영화다. 첫 주연작을 맡은 장편영화이기도 했는데 연변까지 가서 영화를 찍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실 <기린과 아프리카>를 하고 나서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한 해가 넘어간 다음에 단편 두 작품을 했고 그 뒤에 <푸른 강>을 하게 됐는데 그래서 부담스럽더라. 사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냥 시키는 거라도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많아서 연변말이라도 잘 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연변 말이 처음엔 외국말처럼 들리더라. (웃음)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말이라 애먹지 않았을까 싶더라. 나름대로 트레이닝 과정도 있었을 것 같고 적응을 위한 노력이 있었겠지.
연변 예술대학에 있는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다 나와 또래였고, 그 중 동갑이었던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항상 옆에 붙어서 연습시켜줬고 그쪽에서 연변 말을 익숙하게 듣다 보니까 차이점도 알게 됐다. 우선 무슨 말이든 계속 해보는 게 중요했고, 그 친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씩 알려준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배웠다.
한국, 그것도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 연변은 낯선 곳이다. 교실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생소하더라.
사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그쪽 현실보다 좀 더 극적으로 꾸며진 이야기이긴 하다. 그런데 연변 사회에서 담배는 되게 일찍부터 배우는 거라 그런 것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거기도 서울만큼 문화적 변화가 빠르다. 한국의 모든 물품들도 시장에 가면 다 있고, 한국 3사 방송을 텔레비전으로 바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되더라. 그런데 다행히도 그 친구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얘기하고 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혼란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경제적 여건은 따라오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이상은 빨리 변하고, 뭔가를 하고 싶지만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어서 겪는 혼란이 많아 보였고 그런 것들이 안타깝더라. <푸른 강은 흘러라>와 또 다른 문화적 차이도 있고, 사회적인 문제도 있다. 그 전까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가 막상 그런 현실과 부딪히니까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워지는 것들도 많았다.
연변까지 가서 영화를 찍는다 하니 부모님 반응이 어땠을까 궁금하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아직까지 당연히 내가 무용을 할 거라 생각하고, 그런 것에 대해선 잘 모르시는 편이다. <기린과 아프리카>로 상을 받았을 때도 그냥 웃으시면서, “이런 것도 있구나” 하시더라. 강미자 감독님은 학교에서 뵀던 분이고, “이런 일이 있어서 연변에 가게 됐다”하니까 잘 다녀오란 식으로 말씀하셨다. 해외로 공연을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리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덕분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푸른 강은 흘러라>에선 상당히 일차원적인 대사도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너는 나를 실망시킨다.”라던가, 직설적으로 감정을 전하는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대사의 정서가 좀 간지럽더라.
물론 익숙한 어투는 아니었다. (웃음) 물론 연변 사는 친구들도 그런 문학적인 어투를 사용하진 않는다. 다만 모든 친구들이 영화에 몰입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서 대화했기 때문에 그런 어투가 어색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이미 철이도 철이였고, 숙이도 숙이였고, 미옥이도 미옥이였기 때문에 그게 힘들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중반부에 당구장 외벽을 풀샷으로 잡은 우중 신에서 무용동작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니까 무용전공자라는 걸 확실히 알겠더라. (웃음) 어떤 요구가 있었나?
촬영과 프로듀서를 맡았던 이지상 감독님께서 촬영 당일에 얘기하시더라. 당구장 신을 이렇게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 얘길 듣고 잠깐 고민했다. 거기서 많은 움직임을 보여줄 수도 없는 거고, 큰 율동을 보여줄 필요도 없는 거니까 숙이의 어떤 감정만 잘 표현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한번 해봤다.
그 장면에서의 동작은 자신이 직접 연출한 것이겠지?
사실 직접 짰다고 하기도 뭐하다. 그냥 몇 번 손 들고 만 건데. (웃음)
아무래도 자신의 무용 동작을 직접 관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웃음) 예기치 않게 연기를 시작했지만 연기를 통해서 연기 외적으로 특별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나.
춤추는 것도 어렵지만 연기도 어려운 일 같다. 게다가 나는 연기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만큼 연기 잘 하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내겐 새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걱정도 된다.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항상 똑같은 김예리처럼 보이니까. 내가 보기엔 쟤도 김예리고, 얘도 김예리고, 다 똑같은 사람 같아서 연기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비워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정말 한참 멀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란 생각만 는다. (웃음)
<푸른 강>에서는 또래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점에서 편하지 않았을까.
<푸른 강> 촬영이 굉장히 지연됐었다. 그래서 감독님도 힘들어 했고 거기 있는 연변 친구들도 본인들의 일이 있는데 그걸 접고 영화에 참여한 것이었기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또래라서 단합이 잘 된 거 같다. 맨날 우리끼리 술을 마셨다. 양꼬치에 맥주를 마셨는데 또래끼리 있다 보니까 할 얘기도 많았고 재미있었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편하더라. 그런 게 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됐던 거 같다. 그 친구들과 허울 없이 지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숙이가 됐다.
연변 맥주는 맛있나?
맛있다! 양꼬치도 맛있고. 그 친구들이 지역 내에서 맛있는 곳을 자주 데려가서 음식은 잘 먹었다. (웃음) 그래서 돌아와서도 많이 생각나더라. 종종 생각나서 다시 먹고 싶다고 그 친구들한테 연락도 한다. 우리학교 앞에 양꼬치 집이 하나 있는데 가끔 거기서 양꼬치에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웃음)
그래도 그 맛이 나진 않겠지.
그렇지. 그 맛이 아닌 거지. (웃음)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와 같이 중견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
박지영 선배님은 나를 처음 봤을 때 얘가 너무 낯가림 없이 대하니까 놀라셨나 보더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지영 선배님을 TV에서 많이 봤기 때문인지 너무 친근했다. 그래서 편하게 접근하게 된 것뿐인데. (웃음) 서여사 님은 감독님 어머니였는데 이미 준비된 서여사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웃음) 박지영 선배님도 그렇고, 서여사 할머니도 마치 소녀처럼 나를 예뻐해 주셨다. 진짜 엄마나 할머니처럼 도란도란 앉아서 농담하고, 밥 먹고, 자고, 이런 기분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푸른 강은 흘러라>외에도 아직 개봉을 기다리는 출연작이 있다. <귀향>이란 작품에도 출연했다고 들었는데.
<바다 쪽으로, 한 뼘 더>를 하기 전에 <귀향>을 먼저 찍었지만 <바다 쪽으로>가 찍자마자 바로 급하게 개봉을 해서 더 늦게 개봉을 하게 됐다. 내 입장에선 걱정이 좀 된다. 올해 <바다 쪽으로>가 먼저 나왔고 후반기에 <푸른 강>도 개봉하고 좀 더 있으면 <귀향>도 선보이게 될 텐데 이렇게 한꺼번에 출연작을 보여주면 내가 가진 걸 금방 다 드러내버리는 기분이라 걱정된다.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지? 이제 연기를 하면 그만 해야 되나? 이제 나를 불러주지도 않으면 어쩌나’라는 생각도 들고. 사실 배우는 누군가가 선택해주길 기다리는 직업인데 누군가로부터 선택 받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진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일년 동안 출연작이 겹치는 것도 마냥 좋아하기 힘든 일인 거 같다. 부담이 좀 된다.
오히려 연기에 대해 알아갈수록 감지되는 어려움이 커지는 게 아닐까 싶다.
차라리 생각이 없는 게 편했다. 잘 모르는 게 약이라고,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더라. 알면 알수록 무섭다. 처음엔 리딩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안 했지만 요즘은 리딩이 너무 어렵다. 앉아서 대사를 한다는 것도 너무 어렵고 누군가에게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어려운 일 같다. 그만큼 점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사실 무대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
무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 무대를 섰을 땐 잘 모르고 섰지만 어느 순간 무대에 선다는 게 무섭더라. 그런데 그 순간을 잘 넘기면 그 안에서 즐거움도 많이 찾게 된다. 무대나 영화나 비슷한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고비를 잘 넘겨야 될 텐데 싶어진다.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충실하게 작품에 임해야 될 것 같다.
<귀향>에서의 캐릭터는 기존의 밝은 이미지와 좀 상반되는 것 같더라.
좀 피폐한 고등학생 미혼모로 나온다. 스스로가 원하지 않게 어떤 상황에 계속 휩쓸려 가는 아이다. 사회나 어떤 현실 속에서 궁지에 내몰리는 캐릭터랄까. 나름대로 재미있게 찍었다. (웃음)
<파주>의 본예고편이 공개됐는데 짧게나마 등장하는 게 보이더라.
아마 잠깐 나올 거다. (웃음) 나도 아직 예고편조차 못 봐서 <파주>에 대해선 어떤 말을 하기가 어렵다. (웃음) <파주>는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게 만들고 연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대화가 부족하면 힘들다는 걸 알았다. <바다 쪽으로>를 끝내고 거의 바로 <파주>에 들어가다시피 했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오만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거든. 감독님이나 서우 양과 친해지면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게 후회된다. 연기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많이 배웠다.
확실한 건 지금까지 출연작 가운데 처음으로 본인 나이와 비슷한 연령 때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게 아닐까.
그건 그렇다. 빗나가는 성격을 지닌 모난 역할도 해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와서 좋았다. 26살이 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성인 역할을 할 기회가 조금씩 늘고 있다. 어쨌든 <파주>에선 좀 불량하다. (웃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주로 여자 감독들과 작업해왔다.
여복이 많다. (웃음) 나름대로 좋았던 점 중 하나였던 거 같다. 여자 감독님들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은 여자고, 여자 캐릭터를 더 빛나게 해준다. 그래서 여자 감독님들이 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내가 더 돋보일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런 점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 여자감독님들은 나에게서 다양한 면을 많이 봐주는 거 같다. 물론 남자감독님들과도 작업해봤고 남자감독님들도 좋은 분들이 많다. 어떤 한 분은 농담처럼 말씀하시더라. “넌 남자 감독들이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야. 그래서 여자 감독님이 너한테 그렇게 콜을 하는 거야.” (웃음)
본인의 말처럼 연기를 한다는 건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혹은 살아볼 수 없는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 할 수도 있을 거다. 실생활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대리만족을 할 기회도 생길 테고.
분명히 그런 건 있다. 다만 얼만큼 내 자신을 없애고 난 다음에야 그 캐릭터를 형성해 넣어야 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좀 더 그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나같이 그저 다 내 안에서 나온 김예리 같기만 한 거다. 그런 점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 할 수 없겠다, 이런 한계에 직접 부딪혀보고 싶다.
어쩌면 현재가 스스로의 연기에 동원되는 경험적인 밑천의 한계를 느낄 때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 더 많은 욕심이 생길 것 같고.
어느 친구가 얘기한 게 있다. 배우는 소모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역할을 해서도 안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그 말이 정말 맞는 거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걱정이 많아졌다. 강미자 감독님도 말씀하시길, 예리가 할 수 없는 것도 해야 된다고, 그래야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아마 그 말인 거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정말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가 돼야 좋은 역할을 많이 할 수 있는 거란 말씀을 해주시더라.
종종 현장에서 캐릭터로 연기를 하다 다시 실생활의 김예리로 돌아올 때 특별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나.
특별히 다른 건 없다. 그냥 그렇게 일하다가 집에 와서 쉬고, 또 일하고, 이럴 뿐이지. 물론 무용은 큰 공연을 해도 크게 이슈가 안되지만 좋은 영화는 작은 영화라 해도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많은 일이 생기다 보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부담감은 좀 생긴다. 난 그냥 지금 이대로도 참 좋은데 생각하기도 하고, 잘 해나가는 게 참 어렵겠다는 생각도 자꾸 든다.
작품을 거치면서 두려움이 커지는 걸 느끼나?
무대에서는 한번 넘어지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잘하면 격려해주는 게 있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은 거 같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고, 정말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많아졌다. 그 사람이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정말 잘해야 되는 거더라.
프로는 말 그대로 결과를 통해 평가를 얻게 되니까.
현장에서 못됐고 성격이 안 좋더라, 이런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연기 잘하잖아, 그 한마디가 중요한 거 같다고 느꼈다. 일단 이건 타협이 없구나, 영화는 정말 잘해야 되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좀 냉혹하다고 해야 하나? 한번 딱 꺾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봐주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어쩌면 그런 것들을 깨닫는 과정 자체가 배우로서 욕심이 커지는 수순이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지금 배우와 무용가로서의 삶을 병행하기 때문에 느끼는 혼란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다들 나에게 하나만 해야 되는 게 아니냔 이야길 많이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대로도 굉장히 좋다. 이렇게 연기할 수 있는 것도, 춤을 출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난 원래 크게 욕심내지 않는 편이다. 물론 내가 성공하고 싶어진다면 그게 욕심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 상태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모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한 가지를 버려야 해서 후회하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만큼 두 가지를 충실히 잘 해나가고 싶다. 그런데 정말 만약에 어느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아마 춤을 추지 않을까.
아직까진 무용을 통해 얻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배우로서 욕심이 자라고 있고 후에 배우로서 더 많은 애착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예전엔 그냥 거의 놀러 가는 수준으로 현장에 갔다. 욕심도 없었고 책임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욕심이 난다. 내 스스로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그것을 위해 어떤 다른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돼있다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영화는 기록이 남는 건데 내가 못하는 모습을 남긴다는 건 가슴이 아픈 일 같다. 보고 싶지 않아지니까. 그래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 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지금까진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지 않나.
사실 못한다, 잘한다, 기준이 애매하니까. (웃음)
본인의 연기에 대한 기대감이나 관심이 깊게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절하게 요구되는 기대감만큼의 몫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그냥 내 욕심만 늘어가는 것 같다. 그냥 여기까진 잘 해온 거 같은데 지금 여기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다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걱정하다 주저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해보고 나서 안되더라도 후회 없이 해보고 털고 잘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기와 무용을 병행하면서 생기는 시너지는 없나?
<귀향>때 신선한 경험을 했다. <귀향>촬영 때 무용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스케줄이 꼬였는데 정서적으로 무거운 상태의 아이를 연기하는 거라 역할 자체도 어려웠고 촬영을 하고 나면 진이 막 빠져서 힘들었다. 그런데 무용 연습을 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누르고 잊으면 차차 잘 개어낼 수 있었다. 한쪽에선 피폐하고 힘들어도 반대쪽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내 안에 쌓인 걸 배설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 생겨서 좋았다. 두 가지가 서로 완충이 되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같이 해야겠구나, 마음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입구를 만들면 출구도 만들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것에 대해 걱정이 있으시진 않나.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신다. 진로를 빨리 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종종 말씀하신다. 다른 친구들은 무용 공부도 더 해나가면서 선생님이나 무용수로서 입지를 점점 다지는 시기에 너는 그러지 못하는 거 같은데 괜찮은 거냐고 걱정하신다. 그런데 나는 적어도 서른 전까진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냔 생각이 든다. (웃음) 내가 이기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다행히 부모님께서 그런 부분을 많이 봐주시고 계신 것 같다. 저러다 말겠지, 이런 생각으로. (웃음)
일단 지금은 한참 즐겨도 좋을 나이니까. (웃음)
연기 덕분에 무용하는 것도 즐거워졌다. 예전엔 동작 하나 안되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내가 좁아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연기를 하고 난 뒤로 스스로 여유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용도 즐겁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전엔 그렇지 못했으니까. 입시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고. 내가 무용수로서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도 컸지만 요즘은 좀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힘든 연습을 하는 것도 즐겁다.
어쩌면 연기를 통해서 삶이 한 뼘 더 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지금은 무용이나 연기를 다 못하게 되더라도 뭔가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한다. “내가 뭐든 못하겠어? 뭐라도 하면서 풀칠은 할 수 있겠지?” 이런 몹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웃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사실 애기 가지려고 쉬고 있었다. 그래서 살도 쪘고, 여러모로 홍보하기 적절한 시기는 아닌데 홍보하러 다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웃음)
아무래도 <날아라 펭귄>이 인권위 영화인 덕분에 인터뷰 중에 영화 외적인 질문이 많았을 것 같다.
내가 사교육 열풍에 관련된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혜안이나 결론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사견에 불과하지 않나. 내게 어떤 집행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담이야 나눌 수 있지만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대답하기 버겁다. 엄마로서 어떻게 자식을 교육할 거냐, 물으시는데 사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지금 낳아본 적도 없고, 일단 그냥 엄마나 됐으면 좋겠는데. (웃음) 계속 그런 질문을 받았는데 나도 내가 아직 어떤 엄마가 될진 모르겠다. 대충 넘기듯 대답하고 있긴 한데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인 거 같다. 워낙 큰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아직 현실로서 맞닥뜨린 부분도 아니니까.
어쩌면 <날아라 펭귄>을 통해 간접경험을 얻었다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처음 들어본 단어가 많았다. ‘선행학습’.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선행학습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는 엄마들 얘기는 처음 들어봤다. ‘태글리쉬’ 이런 용어도 처음 들어봤고. 정말 아빠 말대로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나라 운동을 왜 영어로 가르치니? (웃음) 어쨌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물론 <날아라 펭귄>이 굉장히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고 주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서 많이 공감하면서 찍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낳는 건 최근에 와서 결심한 문제인가?
그 전엔 일을 하면서 출산까지 겹치는 것이 버거울 거 같아서 피했는데 요즘엔 낳아봐야겠다 싶어지더라. 그래서 남편한테 “낳을까요?” 물으니까, “예. 낳읍시다.” 해서 결정했다. (웃음)
아무래도 예정에 없던 작품을 한 셈인데.
계획했던 작품은 아니었지. 드라마 하는 와중에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캐스팅도 안되고, 제작비도 없는 상황이라 같이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게 됐다. 주말 드라마는 일주일에 5일 정도 촬영하고 이틀 정도 쉬니까 그때마다 가서 촬영했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나?
있었지만, 사실 드라마에서 내 분량이 조금 적어서. (웃음) 무엇보다 마음의 부담이 없었고 스트레스도 별로 없었다. 그냥 연기하기 전에 약간의 긴장감이나 의심들이 조금 있었지만 내게 압박을 줄 만큼은 아니었지. 오히려 현장이 즐거워서 가고 싶고, 가면 편안했다. 촬영 준비할 때 옆방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재미있고 그랬다.
<날아라 펭귄>은 사실 옴니버스적 형태에 가까운 영화다. 결국 주부이자 직장인으로서 가정과 회사를 배경으로 한 두 가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셈인데 그 두 환경은 본인에게 생소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 회식 문화를 겪어본 적이 없다. 영화 현장에도 어른들이 있지만 직장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아니니까,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할 순 없었다. 게다가 영화 하는 여자들은 담배도 많이 피니까 회의할 때 보면 위 아래 막론하고 다 꺼내 물잖아. 부장님 있다고 담배 못 피우고 이런 거 없지. 그래서 그런 모습이 생소하긴 했다. 그래도 배우들이 전부 돈도 받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모여서 그랬는지 찍을 때마다 분위기가 좋았다.
에피소드가 변하면서 주연에서 조연으로 비중이 이동된다.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역할을 하는 셈인데 그 와중에서도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사실 처음엔 감독님께서 조금 걱정하셨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유명한 사람이 조연 캐릭터로 나오니까 관객 입장에선 뭔가 해주길 바랄 수도 있고, 앞선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연결돼야 할 텐데 완전히 분리된 환경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연결시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 그런데 좋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 같다. “요즘 애들은 진짜 용감하다.”, “과장님, 한잔 하세요.” 이런 대사들이 원래 대본에 있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커트하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나오더라. 물 흐르듯이 분위기가 흘러가서 재미있었다. 게다가 누구 하나가 애드립을 쳐도 거슬리지 않았다. 자기 캐릭터에 맞게 적재적소에서 소박한 애드립을 치고 개인적인 욕심으로 균형을 깨뜨린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맙더라.
아무래도 그런 애드립을 잘 받아주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것 같다.
누구라도 이 작품에 좋은 걸 해야겠다 싶었을 거다. 그러니 상대방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상황을 연출하려 했을 테고. 사실 개인적인 분량이나 캐릭터에 대한 욕심으로 나오는 애드립은 다 알거든. 전체 흐름을 깨니까. 다들 진짜 직장 동료들처럼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매번 상을 잘 차려주는데 궁합이 잘 맞아야지. (웃음) 우리가 개런티는 못 받아도 밥상은 잘 받는다면서 항상 즐겁게 촬영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어깃장 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최근에 홍상수 감독님의 <하하하>에도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고 들었는데.
전부 감사패만 받았다. 물론 통영에서 촬영할 때 숙박이나 숙식은 제공해줬지. 그거 말고는 받은 건 없었다. 돈이 너무 없으셔서 안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웃음)
작품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은데.
홍상수 감독님에겐 영화를 만드는 자신만의 완벽한 시스템이 있다. 작품에 대한 신뢰도 신뢰지만 그런 독창적인 시스템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작품 자체가 <하하하>잖아. 한 여름의 흥겨움 같은 거랄까. 그런 기분으로 한 달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물론 슛 들어가니 술도 세게 먹어야 했고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사실 홍상수 감독님 영화가 겉보기엔 가볍게 찍은 것 같지만 상당히 계산적이고 집요하게 촬영된다고 들었다. 현장에서 아침마다 대본을 주신다. 물론 그게 미루고 미루다가 방송 전날 주는 드라마 쪽대본 같은 건 아니고. 이건 매일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거니까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아침마다 쓰시는 건데 매일 하나씩 받을 때마다 너무 놀랍다. 앞뒤의 엮임, 짜임, 구성, 뒤깎기, 이런 것들이 너무 절묘하다. 그래서 지금 대사 하나를 다르게 하고 싶다가도 다음에 이게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연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감독님이 써준 대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오고 그 상황 속 행동들에 신중하게 접근하게 된다. 카펫 짜는 거 보면 그냥 착착착 짜는 거 같지만 정교한 그림이 나오잖아. 그런 느낌이다. 마치 슥슥 찍는 거 같은데 그 안에 짜여짐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정교하지.
예전에 김태우 씨와 유준상 씨를 인터뷰했는데 비슷한 말을 하더라. 아침마다 대본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릴 정도로 설렌다. 뭐가 나올까, 이러다가 딱 나오면 제일 먼저 받아가지고 정말 푹 빠질 정도로 반해서 그걸 싹 빨아들이고 싶어진다. 그날 그날 재미가 있다.
마치 재미있는 연재소설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일 거 같다. <날아라 펭귄>도 이야기가 재미있더라. 인권위에서 만든 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다른 사람이 봐도 재미있어 할까 걱정되더라. 너무 여러 인물이 나오고 클라이막스가 확실한 것도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시사 반응이 좋은 거 같다. VIP시사 때는 아무래도 다 영화에 애정을 갖고 오신 분들이 오시니까 호의적일 수 있지만 뒤풀이에서 새벽 2시 반까지 얘기가 끊이지 않는 거다. 집안 얘기는 하지 않던 사람들도 자기 자식 얘기, 부모 얘기, 요즘 교육문제 얘기, 이런 이야기로 자리가 파할 줄 모르더라. 사실 뒤풀이 분위기를 보면 그 영화를 점칠 수 있는데 분위기가 참 좋더라. 그래서 약간 헷갈린다. 이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나, 이 분위기로 보면 되게 재미있는 건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하나 이상씩 공감할만한 지점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에 임 감독님한테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여자들이 전부 다 드세냐고 했다던데. (웃음) 남자들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감독님은 지금까지 영화에서 항상 남자 편이었잖아요.” 막 이랬다. (웃음) 옛날에는 남자다움이 한 가지 모습이었다면 요즘 남자들은 돈만 벌어와선 안되고 다양한 걸 요구 받고 그만큼 다양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남자들도 어려움이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 교육이나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대부분 엄마들의 파워가 센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엄마들이 문제야.” 라는 대사를 할 때 재미있었다.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인권문제에 있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내가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의 인권을 침해한 적 있고, 내가 침해당하고도 모를 수 있는 거다. 사실 조금만 신경 쓰고 배려하면 서로 존중해줄 수 있는 부분인데 그걸 못하다 보니까 집단적으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엄마가 악착같이 그려지지만 사실 아이만큼이나 엄마의 삶도 고단하다.
엄마도 자기의 다른 모든 것들을 접고 아이에게 올인하는 거니까. 그래서 부부의 인권도 이야기를 만들어서 넣어야 된다는 말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자기랑 방에 들어가서 자자 그러는데 와이프는 계속 애만 잡고 늘어지고, 둘째를 낳자는데 둘째 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하냐면서 아내가 남편과 잠자리를 거부한다던가, 이런 부부의 인권문제도 넣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러자니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줄였지.
요즘처럼 육아가 힘든 일이 된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애를 낳기로 결심한 마당에 두렵진 않나? 정말 어려운 일 같다.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낳아보는 거지, 그런 생각 다하면 못 낳을 거다. 많은 것들이 변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결혼으로 환경이 좀 변하더라도 서로 잘 맞춰서 배려하면 기존의 자신을 많이 바꾸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다는 건 기존의 나를 엄청나게 바꿔야 되는 일이다.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변화 없인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을 것 같다. 그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아서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친구분이나 지인들 가운데 엄마가 된 사람도 많을 텐데.
많지. 친구들, 선배들.
그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괴리되는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나?
엄마들끼린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밤이 새도록 얘기한다. 정보를 주고 받고, 받아 적고, 그리고 또 한참 또 얘기하고, 자기 자식 한탄하다가, 공교육 환경 욕하기도 하고. 난 그런 대화에 끼지 못하고 그냥 옆에서 맥주나 마시거나 안주나 만들어주고 그랬지. 그런데 나 역시도 많이 들어왔던 부분이라 그런 걸 무시할 순 없다.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 일이겠지만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나마 해본 적은 없나?
자세히는 안 해봤다. 그냥 음악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아니면 너무 경쟁관계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도? 만약 아빠 닮으면 음악 좋아하고 엄마 닮으면 책 좋아하겠지. 우리 둘 다 누군가를 이기거나 1등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이도 그렇게 컸으면 좋겠다. 이 정도만.
막상 아이를 기르다 보면 욕심이 커질 수도 있을 텐데.
막상 닥쳐보면 모르는 거니까. (웃음)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서 남편인 장준환 감독과 많은 상의를 한 건가?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잘하는 짓이냐, 이런 얘기부터 시작해서 몇 명을 낳을 것인지도 생각했다. 유명한 사람의 아이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부담주진 않을까 싶어서 아이한테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했지.
아이를 낳고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한이 생길 수도 있다.
이미 워낙 제한이 많았기 때문에. (웃음) 애 낳기 전에 이미 애 엄마 역할도 많이 했고, 여러 가지를 했기 때문에 하기 나름이지, 뭐.
멜로영화 주인공으로서 기회도 확연히 줄어들지도 모른다.
사실 나한테 로맨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정통 멜로도 별로 없었잖아. 그런데 이젠 좀 해보고 싶더라. 예전엔 욕심도 없었다. 그런 작품보단 다른 작품이 좋았고. 그런데 이제는 사랑을 알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완전히 아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생각하던 20대 초반의 설레고 앞뒤 모르는 사랑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 같다. 이젠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가슴 아파하는 그런 표현들을 할 수 있겠다고,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 1년은 쉬려고 하니까 모르겠네. (웃음)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30대 중반이 되니까 멜로가 생각이 난다.
성숙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을 꿈꾸나 보다.
사랑에도 깊이가 있겠지. 사랑은 늘 철없는 거고, 늘 이기적인 거라지만 이렇지 않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랑?
결혼은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줬다고 생각하나?
글쎄, 사실 결혼하고도 계속 일을 했고, 내가 살던 환경에서 계속 살게 됐으니까 그렇게 큰 변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하도 결혼 안 한다 그래서 최대한 변화 없게 했나? (웃음) 물론 이런 생각은 든다. 결혼하고 나서 아직까진 웃는 시간이 더 많았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더 부드러워진 거 같다고 얘기하는 거 보면 결혼하길 잘됐네 싶어진다. 그리고 노인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노인문제?
시어머니를 모시는데 시어머니 연배가 80세가 넘으셔서 나한테는 할머니나 다름없다. 그런데 노인문제는 정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거 같더라.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문제인데 너무 개인적으로만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더라. 육아나 교육도 그렇듯이 노인문제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공공의 영역에서 해결돼야 할 사안들마저 개인들에게 떠맡겨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생각도 해봤는데, 나라에서 시립, 공립유치원 많이 만들잖아. 유치원을 만들 때 법적으로 노인시설도 같이 만들게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를 안 내주는 거지. 아침에 애들이 유치원에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버스 타고 갔다가 오후에 같이 오는 거다. 프로그램 따로 하더라도 밥은 같이 먹고. 그럼 애들이 뭘 먹는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볼 수 있고, 애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충분히 볼 수도 있을 테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그 영화 뭐였더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근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거기 보면 양로원이랑 유치원이 같이 있는 시설이 나온다. 그걸 보고 ‘내가 생각하던 게 저건데! 저런 게 정말 만화에 나오다니 일본은 저런가?’ 생각했다.
교육학과를 전공했다.
맞다. 그런데 교육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웃음) 내 손으로 레포트를 써본 적도 별로 없고.
교육학 전공자가 연기를 하게 된 경위가 궁금한데.
다들 의아해한다. ‘사카모토 준지’라고, <KT>라는 영화를 만든 일본 감독을 만난 적 있는데 그 분도 교육학과 출신이라더라. 그 분도 교육학과 출신을 영화계에서 만나기가 어렵다면서 놀라던 게 기억난다. (웃음) 사범대 나온 사람만의 특징이 있는데 처음부터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고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제도에 순응을 잘한다. 도덕, 법률, 규범을 어기는 사람도 별로 없고 성향적으로 착하다. 그래서 MT같은 데 가서도 놀아도 밀가루에 찹쌀떡 넣어서 빼먹고, 2인 3각 게임 경기하고, 이러고 논다. 덕분에 문과대나 다른 과 사람들이 보면 우릴 애 취급하면서 되게 비웃고. (웃음)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지. 그런데 나는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이며 국악반이며 하는 게 많았다. 다른 공부들에 관심이 더 많다 보니까 대학생활에서 그런 게 주가 됐고, 교육학이 부가 됐지.
만약 전공대로 직업을 선택했다면 <날아라 펭귄>에 나오는 회식 문화를 경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텐데.
학교 회식도 만만치 않다더라. 거기도 나이별로 쫙 이렇게, (웃음)
<태왕사신기>로 드라마 데뷔를 했는데 당시 연기적 논란이 많았다. 사실 지금까지 작품 활동하면서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당황스럽지 않았나?
그때는 뭐, 경황이 없었지. 현장 자체도 경황이 없었고. 매일 대본도 바뀌고,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고, 그래도 온에어(on air)는 100% 이뤄져야 하니까 촬영은 해야 됐고, 그렇게 쉼 없이 넘어갔다. 후반에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까지 같이 작업하느라 바빴지. 사실 <태왕사신기>현장은 보통의 드라마 현장이나 영화 현장과도 달리 좀 특별했다. 박상원 선생님 말에 따르자면 제3의 현장이랄까. “네가 지금 드라마를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 말 듣고 나니까 ‘난 드라마를 해보려고 한 건데 억울하네’ 생각되더라. (웃음)
<내 인생의 황금기>를 통해 다시 한번 브라운관 연기에 도전했다.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적응할 때까지 해볼 거다. (웃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작품, 나랑 잘 맞는 작품을 못 만났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내 인생의 황금기>때 감독님이 나한테 그러시더라. 남들 드라마 30년 하면서 겪을만한 안 좋을 일들을 어떻게 드라마 두 편에서 다 겪어보냐고. 이럴 정도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어쨌든 내가 선택한 거니까 이렇게 겪다 보면 나중에 좋은 날 오겠지. 아마 또 하게 될 거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작품에 대해서 미리 알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사실 정보를 많이 안 주거든. 늘 바뀔 수 있는, 제대로 되지 않은 정보만 주고. 그래서 내가 미리 좋아하는 마음을 듬뿍 담을 수 있는, 마음 붙이려고 뒤늦게 노력하지 않고 시작부터 애정을 듬뿍 갖고 시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드라마 현장에서 얻은 신선한 자극은 없었나.
있었지. 신선한 자극이라기 보단 약이 되는 부분이랄까. 선생님들께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면서 도와주시기도 했고, 가르쳐주시기도 했고. 덕분에 선생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6개월 동안 일주일에 5일씩 어떤 작품에 출근하듯이 레이스 하나를 끝냈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나한테는 큰 경험이었다.
연기 잘한다는 남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는데, 항상 상대배우의 연기를 눙치듯 연기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느 영화 메이킹에서 보니까, ‘모건 프리만’이 그랬던가? 연기의 본질은 리액션이라고. 내 연기는 상대 배우에 따라서 편차가 큰 거 같다. 이건 상대방 탓은 아니고, 내가 상대방을 많이 탄다고 해야 될까? 만약 10번 슛을 들어간다고 하면 그때마다 상대방의 연기가 변하지 않아도 내 리액션은 계속 변할 거다. 감독님들도 나한테 그런 얘기 정말 많이 한다. 내 샷이 아니어도 변할 때가 있다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내 분량을 따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한다. 맥을 놔버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게 내 단점이다.
그만큼 상대의 기운에 따라 어떤 능동성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대되는 면도 있지 않을까.
그 기운에 굉장히 좌지우지되는 거 같다. 조금 덜 그래도 될 거 같은데, 그걸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직 거기까진 기술이 없나 보다. 앞으로 더 좋아지겠지.
사실 남들보단 당사자니까 민감하게 느껴지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연기파 배우라고 인정받지 않나. (웃음)
누가 그러더라. 연기파 배우 그게 얼마나 웃긴 말이냐고. 요리파 주방장? 이런 말과 똑같다고. (웃음) 주방장은 당연히 요리를 해야 되는 거고, 배우는 당연히 연기를 해야 되는 거잖아. 연기파 배우란 말이 그만큼 웃긴 말이라고 누가 써놓은 글을 보면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만큼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10년 정도 매년마다 한 작품 이상씩은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아무래도 애를 낳고 나면 지금보단 자중하게 될 공산이 크겠다.
쉬면서 한번 앞으로의 10년도 한번 생각해봐야지. 대학졸업하고 스물여섯에 시작해서 한 10년 했으니까 서른 여섯부터는 다시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이걸 계속 할건지 말 건지도 생각해보고, (웃음) 계속하면 어떻게 할건지 고민해보고.
지난 시절을 자주 돌이켜보나?
많이 돌이켜보진 않는데 그런다 해도 정말 좋은 기회가 많았으니까 아쉬움이 남거나 그렇진 않을 거 같다. 별다른 욕심은 없다. 많은 작품을 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좋은 작품 한편 하면 그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고, 후반 작업하고, 홍보하고, 개봉하는 몇 달 동안 계속 그 작품의 영향을 받는다. 작품 자체나 그 작품을 함께 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나중에 또 어디서 상영이 돼서 누군가 그 영화를 보면 피드백도 많이 오게 된다. 아무리 큰 상을 받아도 순간이다. 즐거운 것도 순간이다. 그런데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 작품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게 진짜 소중한 거 같다.
연기자로서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얻은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 대한 변화를 느낄 때가 있나?
옛날엔 이렇게 생각했다. 프리(프로덕션) 때 준비하고, 슛 가면 연기하고, 홍보 끝나면 쉬어야 된다고.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다. 난 촬영할 때가 제일 즐겁고 행복하니까 그때 제대로 노는 거고, 촬영하지 않을 때 일해야 되는 거 같더라. 준비하는 일. 좋은 작품을 만나기까지 준비를 게을리 하면 안되겠단 생각이 이제서야 좀 든다. 그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모르겠다. 무조건 쉬어야 되고, 심지어 제발 날 그냥 방치해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긴 작품을 하면서 나를 너무 괴롭혔으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촬영할 때가 진짜 재미있게 노는 순간이란 걸 알았고, 더 재미있게 놀 순 없겠더라. 그러니까 이젠 그 사이에 열심히 준비하고, 준비가 됐을 때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제 당분간은 아이 생각만 해야 할 텐데, 아이는 딸이 좋겠나, 아들이 좋겠나? (웃음)
나는 아무나 괜찮은데 시어머니께서 아들을 바라시니까 삼신 할머니께서 참조해주셨으면 좋겠다. (웃음)
방금 홍보사 직원분과 대화하는 걸 듣게 됐는데 예능프로에 출연하셨다는 거 같더군요.
예. <야심만만>. 내가 그런 데도 다 출연하고, 이런 일도 있네요. (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길래 나는 몇 년 있으면 연금 나온다 그러니까 다들 넘어가더라고요. (웃음) 사실 저는 쇼크를 줄이기 위해서 계속 스스로 입력시켜요. 곧 60이다, 이렇게.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모습은 뵌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요.
처음이에요, 처음. 만약 제가 일기라도 썼다면 일기장에 적어둘 텐데 일기를 안 써서. (웃음)
시사회 무대인사 때 많이 긴장돼 보이시던데요.
너무너무 긴장됐어요. (웃음) 제가 요즘 청바지를 많이 입고 다녀서 굽이 낮은 신발을 많이 신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데 막 넘어질 거 같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잘 떨어요. 사람 있는 곳에 갈 때 좀 많이 긴장해요. 카메라는 안 무섭지만 사람은 좀 무서워해요. 시사회 무대에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많은 기자 분들 앞에 서보는 것도 처음이었거든요. 그리고 3년 만에 연기를 하는 거잖아요. 3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떨렸는데 그 많은 기자 분들 앞에서 시험치고 시험점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 같아서 너무 무섭더라고요. “쟤 연기 왜 저래?”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선생님 정도의 오랜 경력이면 그런 자리에 서는 것쯤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에겐 떨리는 순간이었나 보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그런데 안 그래요. 아이 낳을 때마다 힘든 건 마찬가지에요. 작품도 똑같아요. 그 인물이 나한테 들어올 때까지, 내게 익숙해질 때까진 굉장히 많이 고통스러워요. 다른 욕심은 없어도 이건 있어요. 내 자존심. 김영애 그러면 “그래, 연기 잘 하지.” 이런 칭찬을 듣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애자>에서도, “그래, 엄마는 김영애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칭찬 듣고 싶은 거죠. 적어도 제가 하는 역할만큼은 제가 최고라는 소릴 듣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제 자신도 인정할 수 있어야 되고 남한테도 인정받고 싶죠. 그게 좀 강해요.
홍기선 감독님께서 그러셨죠. <애자>의 어머니 역할은 처음부터 김영애 씨 몫이었다고요.
그건 아니었어요. (웃음) 찍다 보니까 저한테 정들어서 그렇게 마음이 바뀐 거지 처음엔 아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찍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야, 엄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런 거죠. 지금 와서 보니까 김영애가 아니고선 생각이 안 된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 김영애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칭찬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건가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족하긴 쉽지 않죠. 어려워요. 저는 모니터 잘 하지 않아요. 모니터 잘 하지 않는 배우로 알려졌거든요. 모니터 하기 싫어요. 제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왜 얼굴이 저렇게 밖에 안돼. 저 정도 깊이 밖에 없어. 자꾸 이렇게 되요. <애자>도 1차 편집본 봤을 때 굉장히 실망했어요. 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표현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한심했죠. ‘야, 여태 60여 년을 살아오고서도 너한테 나타나는 게 그것밖에 안되니’ 싶더라고요.
<애자>에서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았나 보네요.
그럼요. 만족스러운 부분이 얼마나 되겠어요. 단지 내가 어떻게 했던 지간에 칭찬이 듣고 싶은 거죠. (웃음) 그래도 그게 제 능력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능력 밖이니까 포기해야죠.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거고, 평가 받는다는 게 무서워지는 거에요.
3년 정도 연기를 중단하셨던 공백이 끼치는 영향이 있던가요?
처음에는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많이 떨어지고 예전 같지 않아서 굉장히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달 동안 굉장히 많이 힘들었죠. 눈 혈관도 터지고, 체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원체 힘들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그 감각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영화적인 시스템이 과거에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때와 많이 달라졌잖아요. 이번 <애자>현장에서도 많은 차이를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요즘 젊은 주연 배우들이 영화를 하고 나면 텔레비전을 많이 기피하죠. 왜 그런지 이해가 갔어요. 일단 영화는 작품이 완전히 나와있는 상태에서 제작되지만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쪽대본 들고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한국영화가 모든 시스템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영화가 하는 영화들마다 손님이 많이 들어서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만큼 현장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그 새로운 분위기를 통해 신선한 자극을 느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예. 그랬어요. 그래서 행복했고요. 난 우리 감독님을 참 잘 만난 것 같아요. 자칫하면 제가 구닥다리 배우처럼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참 많이 다듬어줬죠. 신인 감독이지만 많은 걸 집어줬어요. 제가 감각을 찾는데 굉장한 도움이 됐죠. 강희처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후배를 만나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던 거 같고요.
최강희 씨처럼 김영애 씨도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이 얼마나 돌이켜지실진 모르겠지만 그런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는 경우는 없나요?
그런데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저는 몇 십 년 동안 혼자서 대본보고, 의상 구하고, 현장 가고, 메이크업까지 다 했어요. 그 당시엔 누구나 다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지금은 제작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잖아요. 나 혼자 옛날 생각이나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세상을 따라가면 되죠. 가끔 과거 얘기하는 분들 많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옛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지나간 얘기 별로 안 해요. 이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일들이 있을 건가가 궁금하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전 제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고 있지 않아요. 심지어 사진도 별로 정리해놓은 게 없어요. 그런 건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1971년에 데뷔한 이후로 지난 38년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족적을 남겨오셨는데요. 특히 7~80년대엔 정말 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잖아요. 1년에 4~5편씩 나온 경우도 있고요. 엄청난 다작배우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제가요? 전 기억 잘 못해요. (웃음) 제가 주인공을 무지 많이 하긴 했죠. 그런데 기억나는 건 몇 작품 밖에 없어요. <설국>하고 <겨울로 가는 마차>?
임권택 감독님 작품에도 3편이나 출연하셨죠.
<왕십리>도 했고, 그랬었어요. 그랬네.
고영남 감독님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하셨더군요.
고영남 감독님은 특히 절 예뻐하셨어요. (웃음)
78년도에 개봉된 <절정>으로 영화기자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맞아요. 너무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영화에서 갈비뼈가 다 드러나게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던 기억이 나네요. 가슴 보이는 게 뭐 그리 부끄럽다고 힘들어했는지 몰라. 사실 제 가슴이 좀 약한 편이거든요. (웃음) 물론 그때는 그런 게 굉장히 큰일이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외에 좀 야한 영화도 꽤 했었어요. 베드신 있는 거. 그러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크면서 비디오샵이 한참 유행했죠. 아이가 2~3살 때, 걔 손을 잡고 만화영화를 빌리러 다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얘가 커서 엄마가 야하게 나오는 그런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하지?’ 사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때부터 갑자기 영화를 끊은 거에요.
아무래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만한 일이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데 말이에요. 작품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대단한 일은 아니죠. 이건 예술에 속하는 분야고, 엄마 일이라고,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갈 수 없었죠. 하여튼 아이가 이 영화를 보면 안되겠단 생각만 들었어요. (웃음)
세월을 보내고 나니 지난 시절에 느꼈던 어려움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으시나 봅니다.
지금은 이제 그렇게 대단한 일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모르겠어요. 폭풍을 헤치고 나오면 웬만한 작은 파도는 무섭지 않잖아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작년 동안 개인적인 신변에 큰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경험들도 힘들었던 당시를 지나 지금에 이르게 되니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전 작품을 할 때마다 힘들다고 느끼는 건 매번 똑같아요. 그리고 굳이 연기를 떠나서라도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이나 힘든 시간들을 헤치고 나오면 그게 다 나를 키우는, 나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내 폭을 넓혀주는 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젊어 고생은 돈으로 사서라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믿음이 있어요. 힘든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힘들게 살았고, 또 한번의 결혼을 했죠.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두 번의 큰 일을 겪으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옥 같았죠. 지옥이 다른 게 아니고 이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넘겼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 와서 보면 좀 더 나를 겸손하게 하고, 더 너그럽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나를 둥글게 만들고, 또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라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90년대 이후로는 영화 출연 편수가 현저하게 급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화는 안 한다고 소문이 났대요. 사실 그건 아니거든요. 단지 제가 너무 바빠서 영화까지 눈을 돌리기엔 시간이 없었을 뿐이에요.
영화제작 환경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예전 영화 풍토는 제작 시스템을 비롯해서 모든 것들이 지금하고 많이 달랐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제 성격하고도 잘 안 맞았나 봐요. 제가 굉장히 낯을 가려서 사람을 잘 못 사귀거든요. 4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도 이쪽에서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5사람도 안 되니까요. 제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만났다가 몇 달 있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 만나고, 이런 환경에 적응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영화를 멀리 하게 됐고 텔레비전을 바쁘게 하게 되니까 영화까지 넘볼 여유가 없더라고요.
연기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배우라는 일도 사람과 부딪히는 일이니까요. 그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그걸 극복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고요.
저는 드라마도 하는 사람하고만 많이 해왔어요. 제가 좀 틀에 매이거나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편이기도 하고 굉장히 폐쇄적이라 사람을 사귀기 어렵거든요. 제가 상처를 워낙 많이 받기 때문에 남한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아예 사람 만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카메라 렌즈 안에선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실제 자신의 모습과 차이를 느낀 적이 있나요?
그런데 모든 인물은 김영애에서 출발해요. 다른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하는 모든 역할엔 제가 들어있어요. 다만 그게 얼마만큼의 부분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겠죠. 그래서 배우들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고두심 씨가 임백무를 연기했다면 저와 또 다르게 표현됐을 거에요. 김자옥 씨가 했으면 또 달랐을 거고요.
일단 <애자>를 보는 어떤 관객이라도 자식으로써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엄마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엄마 앞에서는 다 애인 거죠. (웃음)
누구나 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여자라면 누군가의 딸이거나 엄마니까요. 그리고 우리 감독님이 시나리오부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을 예리하게 잘 집어냈어요. 사실 저는 VIP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편집순서를 바꿨다던지, 속으로 ‘어머, 왜 저건 잘려나갔지? 원래 다음 대사는 뭔데’ 이런 생각만 하다 보니 몰입할 수 없었죠. (웃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감독님이 누구보다 예뻤어요. 사랑스럽고. (웃음)
최종 편집본은 그때 처음으로 보신 건가 보죠?
예. 그 전엔 편집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1차 편집된 미완성본을 40인치 모니터로 봤죠. 기술 시사는 전날 새벽 2시에 했대요. 그날 오전부터 계속 스케줄이 있었으니까 그건 볼 수도 없었죠.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만족스러웠으니까 영화를 선택하신 거겠죠?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제가 굉장히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그때는 그걸 벗어나지 못했었죠. 이혼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 선뜻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저 그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죠.
어쩌면 어머니로서의 공감대도 작품 선택에 일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나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쉽지만 내 이야기 같았어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작품성도 있어야 하지만 재미도 있는 이야기에요. 이 시나리오는 그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저한테 괜찮다고 생각하게 해줬어요. 이걸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판단했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장면이 있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애자와 어머니가 TV를 보고 같이 앉아있다가 티격태격하게 되고 결국 애자가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잖아요. 그때 짐 싸서 방을 나가는 애자에게 어머니가 한마디 하죠. “김치 가져가, 이년아!” (웃음)
그게 우리가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고. 그런데 어떻게 남자가 그런 걸 쓸 수 있었나 몰라요.
남자라서 모녀간의 정에 대해 완전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지만 <애자>는 모녀 간의 정서를 잘 표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일 가깝고 닮아있으면서도 원수 같은 관계죠. (웃음)
아무래도 아들보단 딸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이 들면 딸하고 엄마가 더 친해져요. 동질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라는 캐릭터를 연기하시기 이전에 이미 실생활에서 어머니로서 살아가고 계시죠. 그래서 아무래도 어머니로서 느끼는 감정이 캐릭터의 감정으로 이입되는 느낌을 얻은 경우는 없으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연기할 때 그렇지 않아요. 오직 그 상황만 생각하죠.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제 개인적인 감정을 연기에 담지 않아요. 단지 김영애가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죠. 물론 촬영하는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 엄마한테 나는 이렇게 했다고, 강희하고 수다를 참 많이 떨었죠. 마음은 그런데 실제론 잘 안 된다고. 강희도 저한테 하는 것처럼만 하면 자기 엄마도 좋아하실 거래요. 하지만 잘 못하잖아요. 강희뿐만 아니라 다 그래요. 그런 얘기는 많이 했죠. 하지만 연기할 때 저는 오직 최영희로 돌아가서 그것만 생각해요. 연기하는 순간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영화 외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연기에 몰입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도 드는데요.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투영될 수 있는 감정을 가려낸다는 건 그만큼 냉철한 감각이 요구되는 일일 테니까요.
제가 다른 사람 앞에서 제 실제 이미지보다 훨씬 단단해 보이거나 강해 보이는 건 제가 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연기를 제쳐두고 비로소 김영애로 돌아가는 건 오직 저 혼자 있을 때니까요. 정말 힘든 시간에 새벽 2~3시쯤 잠도 못 자고 서럽게 울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때 비로소 나로 돌아온 거죠. 그 외에는 제 속을 잘 안 들어내고 잘 안 들켜요. 그러니까 생각보다 단단해 보이나 봐요. 그리고 제가 좀 이지적인 이미지로 보인다면서요. (웃음) 사실 전 자식을 걱정시키는 철없는 엄마 쪽에 가까워요. 많이 사랑 받길 원하고, 보호받길 원하고, 굉장히 여리고 상처도 잘 받죠. 그런 저를 잘 내놓지도 않고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운 편이신가 봐요.
예. 그래서 어리광도 잘 안 부리죠.
갑자기 <황진이>에서 연기하셨던 임백무가 생각나네요. 임백무는 겉으로 독하고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지만 실은 아픈 사연을 홀로 감당해내는 처연한 캐릭터니까요.
상처가 쌓인, 말하자면 딱지가 두껍게 앉은 사람이잖아요. 예술에 대한 고집도 강하죠, 일에 있어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점은 저와 많이 닮았어요. 사실 저는 그 인물이 참 싫었어요. 연기하면서 정말 지긋지긋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그 여자가 엄마하고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좀 놀랐죠. 저는 제가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한테도 그걸 요구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아들한테도 그래요. 그렇게 하기를 원해요. 그렇게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사귀지 못하는 것도 제가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그 상처가 굉장히 오래가고 깊게 가니까요.
1971년에 MBC공채 3기 탤런트로 연기자라는 이름을 얻으셨고, 1973년에 <수사반장>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데 연기자라는 직업에 흥미를 갖게 된 경위가 궁금하네요.
(웃음)
?
아니, 갑자기 좀 어이없는 생각이 나서요. 저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상업학교 원서를 냈고 부산여상을 갔어요. 원래 아버지께선 저한테 사범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죠. 학교 다닐 때 성적은 잘 나왔거든요.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저는 한 2~3일 반짝 공부하면 성적은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잘 나오는 편이었거든요. 10등 밖으로 떨어져 본적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나 당돌하면 부모 몰래 상업학교 원서를 냈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가라고 하셔서 집에서 쫓겨났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한달 간 이모 집에 있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부산 TBC총무부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너무 재미없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대학교를 가야겠다 싶어서 재수하려고 하다가 배우가 된 거에요. 탤런트를 뽑는다면서 친척언니가 너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배우 한번 해보라고 원서를 사 오셨고 지원하게 됐는데 정말 돼버렸죠. (웃음) 전 그때까지도 그저 월급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연만 들어보면 애자가 생각나는데요.
좀 대책 없었죠. 고집 세고, 멋대로고, 적당히 영리하고. 사실 제가 이마가 넓어서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항상 단발머리로 이마 싹 올려서 머리에 핀 꽂고 다니고, 그런 부분에서는 어긋나본 적이 없었지만 마음 속은 제 맘대로였죠. 이미 그 때부터 결혼 안하고 애만 낳아서 살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고. (웃음) 전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장래 희망하면, 현모양처. (웃음) 그러면서도 사춘기 때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야단치면 눈 똑바로 뜨고 앉아서 대들고, 맞아도 도망가지도 않고. 그래서 엄마, 할머니 속을 엄청 썩혔죠. 부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다루기 힘든 아이 있잖아요. 제가 좀 그랬어요.
아버지께서 엄하셨던 만큼 충돌도 잦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꽉 막힌 분이셨어요. 학교 다니기 전까지 저는 소설책만 너무 좋아하고 천자문은 안 읽는다고 종아리를 맞고 다녔었죠. 한글을 떼고 나서부터 동화책을 그렇게 좋아했고요. 옛날엔 집에 책이란 게 없었어요. 제가 51년생인데 50년대에 전쟁 끝나고 무슨 책이 있었겠어요. 문방구에 몇 권 걸려있는 게 다였죠. 그래서 학교 끝나면 맨날 문방구 앞에 가서 조금한 게 턱 치켜들고 그걸 보고 있었어요. 주인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셨는지 그냥 올라와서 읽으라고 할 때까지. 그럼 쪼그리고 앉아서 그걸 보는 거에요. 그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를 6시 전에 깨우시고 마당에서 보건체조를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서 몰래 소설책을 봤죠. 타고 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저를 배우로 만든 건 제가 20년 동안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거의 소설만 읽었어요. 이제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거지만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좀 현실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도 월급 주는 직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웃음)
아버지께서도 부산 출생이셨나요?
예. 저도 스무 살까진 부산에서 살았고요.
부산 남자 분들이 좀 무뚝뚝하잖아요.
무뚝뚝하고 굉장히 권위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너 이거 한번 먹어라” 소리해보신 적 없어요. 원체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서 받을 줄만 알았지, 주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어쩌면 기질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 우리 엄마가 불행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뒤늦은 연민이 깊게 자리잡았나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나이 들면서 엄마를 많이 걱정하고 제가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말은 늘 퉁명스럽고. 어쩌다 전화오면, “(격양된 어조로) 나 바빠! 빨리 얘기해!” 이랬으니까. 그래서 우리 엄마가 사근사근한 제 친구들을 굉장히 부러워했어요. 저도 제 친구 엄마들한텐 사근사근했죠. 문제는 우리 엄마한테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엄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배우를 한다는 것 역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말도 안 됐죠! 그런데 저희 고모님께서 저를 아버지께 데려가셔서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한번 맡겨보시라고, 그랬어요.
친척 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소설을 좋아하셨다면 혹시 작가를 지망한 적은 없었을까 싶은데요.
그렇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몇 번 상은 받았어요. 글짓기 같은 데서.
정말 애자랑 닮은 점이 너무 많은데요. (웃음)
다만 저는 애자처럼 술 먹고 다니거나 그런 건 없었죠. 우리 아버지는 학교 끝난 지 1시간 안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막 학교에 전화하고 그랬어요. 도서관에서 책 봤다 해도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왜 도서관에서 책을 보냐고 뭐라고 하시고. 전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어쩌다 남학생이 쫓아오면 네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그렇게 틈을 봐서 쫓아오냐고, 저만 욕먹고 맞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예쁜 게 죄죠. (웃음) 여전히 젊은 시절의 미모가 곱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친척 분이 배우를 권했던 것도 그 미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연기력 같은 거 논하지 않고 얼굴이 좀 예쁘장하면 배우 하라는 말 많이 했어요. 어려서부터 전 아이들한테 예쁘단 소리 잘 안 해요. 제가 스스로 예쁘다고 하면 낯 두꺼운 얘기가 되겠지만, (웃음) 사실 제가 그런 소릴 정말 많이 듣고 자랐거든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자만심 같은 게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아이들한테 그런 얘기 잘 안 해요.
정말 막연하게 배우가 된 셈인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후에 현장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 다닐 때 영화 본 거라곤 순전히 딱 한 편, <푸른 하늘 은하수>(1986)밖에 없었는데 제가 배우를 하겠다니 얼마나 황당해요. 그런데 저는 장녀라서 책임감이 강해요. 공부를 그렇게 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느 정도 상위권 수준으로 점수를 올려놨던 건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죠. 그것도 제가 가진 어떤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일단 뭔지도 모르고 월급 주는 일이라 생각해서 배우가 됐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도로 보따리 싸서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면 창피한 일이잖아요. 어떻게든 여기서 붙어있어야 되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했죠. 엑스트라를 하더라도 말이에요. 사실 배우가 뭔지 알고 내가 정말 이걸 해야겠다 했던 건 연기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난 뒤였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배우가 어떤 건지 알기 시작한 거죠.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5년 뒤에서야 연기자로서 자각했다고 하셨죠.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냥 하다 보니까 이게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운명을 믿어요. 팔자 같은 걸 믿거든요.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단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죠. 일단 돈은 행복의 척도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하루 세끼 라면만 먹으면서도 ‘그래. 나는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럴 수 있고, ‘나는 왜 라면 밖에 못 먹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행복의 척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운명을 믿어요. 아마 태어날 때 제 운명이 이렇게 정해져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배우가 된 과정도 운명적이란 말에 어울리네요. (웃음)
너무 어이없죠? 그래서 사실 제가 이런 얘기 잘 하지 않아요. (웃음) 왜냐면 정말 죽기 살기로 배우가 되려는 사람에겐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김영애 씨가 배우로 발탁된 건 김영애 씨의 가능성을 본 사람이 분명 있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1970년 10월 달에 입사해서 1971년부터 작품을 했으니까 스무 살에 시험을 봤고 스물 한 살부터 연기를 시작한 거죠. 그때는 로션도 바르지 않을 때였죠. 나중에 들었지만 그때 전 사투리도 썼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뽑힌 건 카메라 페이스가 너무 신선했기 때문이래요.
젊은 시절엔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라 캐릭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살도 붙었고 늙어서 얼굴이 쳐지거나 주름이 져서 그 날카로움이 좀 깎였지만 예전엔 더 심했죠. 그래서 예전엔 제 얼굴이 참 싫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충분히 얼굴로 감정이 표현됐을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보면 너무 날카롭고 뾰족해서 만들어 놓은 얼굴 같기만 한 거에요. 그런 느낌이 너무 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결국 그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던 분들이 김영애 씨를 자신의 작품에 선택했고, 계속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90년도까지 정말 많은 영화를 찍었던 것일 테고요.
예전에는 보름 만에 만든 영화도 있었어요. <비련의 홍살문>(1979)같은 영화가 그랬죠. 당시엔 스크린 쿼터가 있어서 우수한 국내영화를 하나 만들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게 허가해줬거든요. 그래서 예산도 많이 들이지 않고 보름 만에 찍고 그랬죠. 제가 3박4일을 한숨도 안자고 영화를 찍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밤을 셌던 기간이에요. 저는 굉장히 예민해서 어릴 때부터 방이 바뀌면 잠도 못 잤어요. 낯설면 화장실에 못 가니까 아무 것도 안 먹고 귤 통조림 같은 거나 한두 개 먹고 견뎠죠. 기억나는 게, 한 겨울 산속에서 3박4일간 잠도 안 자고 촬영하다가 밥 먹으러 내려갈 시간이 없어서 밥을 날랐던 때가 있었어요. 구르마 같은 데 앉아서 다 식은 얼음 같은 밥을 먹는데 사람 것인지, 짐승 것인지, 무더기로 쌓인 똥이 아래에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면서도 밥을 먹고 있더라고요. 그냥 ‘저게 여기 있구나’ 그러면서 먹었어요. 저한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잠을 그렇게 3일 이상 못 자니까 그냥 말갛게 된 느낌? 그나마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몰라요.
<달려라 울엄마>의 방영이 종료되고 연기를 그만 두겠다 선언하셨던 적이 있었죠. 아무래도 사업적 이유가 일차적이었겠지만 젊었을 때 그렇게 힘들게 매진했기 때문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그때 제가 연기를 중단한다고 그랬던 건 두 가지 이유였죠. 첫째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했죠. 연기는 저 혼자 그만 두면 돼요. 하지만 그 때 이미 회사직원은 7~80명 정도나 있었던 때였고 김영애 보고 ‘참토원’에 들어온 7~80명의 직원을 제쳐두고 난 이제 힘드니까 그만하겠다 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힘들고 싫었지만 처음으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기도 했고요. 회사가 그렇게 커진 만큼 회사 일에 매달리다 보니까 연기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죠. 제가 제일 싫어하던 짓, 연기를 부업으로 삼는 짓거리를 어느 날부턴가 내가 하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케줄에 피해를 받게 되고, 마음은 콩밭에 놔두고 몸만 와서 대본보고 있고. ‘똥배우’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은 아니고 제작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어떤 배우를 욕하거나 흉할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정말 이러다간 제가 그렇게 불리겠다 싶었죠. ‘쟤 왜 저래’ 소리 들을 거 같더라고요. 또 한 가지는 그때 남편이 제가 배우로 활동하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연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죠.
20대 초반부터 주연급 여배우로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어머니 역할을 계속 맡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 사이에 스스로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때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상실감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 시절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되는 일이에요. 그냥 주어진 걸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지 못하면 상처받아요.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우긴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기다려야 해요. 그래도 전 운이 좋았던 게 그냥 누구 엄마에 그치지 않고 돋보이는 역할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파도>나, <형제의 강>, <야망의 전설>같이, 누구의 엄마에 그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많이 낸 배우에요. <황진이>도 그렇고, <달려라 울엄마>도 좋았죠.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고, 한편으로 감사하죠.
지난 38년 동안 배우로 살았습니다. 여전히 배우로서 얻고자 하는 욕심이 남았나요?
한 가지. 어떤 작품에서건 ‘아, 정말 좋은 배우다’, ‘이건 딱 김영애다’, ‘김영애만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 단지 그거에요. 어떤 배역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2년 전 인터뷰 당시에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에도 그런가요?
예. 덕분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요가학원>촬영하기 전에 3개월 동안 요가를 배우러 다닐 때, 차를 끌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다닌 적이 더 많았거든요. 항상 요가매트를 들고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날 제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거에요. 너 요즘 요가배우냐고. 그래서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누가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사진에 찍힌 건가요?
사진은 아니고, 글이 올라왔어요. 지하철에서 차수연 씨를 봤는데 요가매트를 옆에 끼고 신문을 읽고 있더라. (웃음) 그래서 아,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죠.
드라마도 2편이나 출연했는데 몰라볼 리 없죠.
그런데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브라운관으로 얼굴을 노출됐을 때 얻게 되는 인지도는 때론 상상 이상이니까요.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을 거 같고요.
그래도 아직까진 그렇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에요. 가끔씩 물어보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 그냥 아니라고 하면 아닌가 보다 하고 그냥 가버려요. (웃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군요. (웃음)
똑같죠. (웃음) 지금은 요가 때문에 살이 많이 빠지긴 했는데 그것 빼곤 다 비슷해요. 생활하는 것도 그렇고, 여전히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그때 제가 장쯔이 닮았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그 뒤로 이런 말을 또 들어보진 않았나요?
가끔씩 들어요. 아직은 누굴 닮았다는 말이 따라다니는 거 같아요. 아직까진 제가 확실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거 같아요.
<요가학원>의 나니는 궁극적으로 마리오네트 같은 캐릭터입니다.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다고 할까요. 그만큼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감독님께서 제 이미지가 나니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서슴없이 제게 그 캐릭터를 주셨지만 그 이후로 나니라는 캐릭터의 내적인 면을 어떻게 보여줘야 될지 서로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공포에서는 선악이 분명히 나눠져야 되는데 보통 악역이라면 독하게 생겼거나 이미지가 센 사람들이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번 같은 경우는 그 반대 이미지로 저를 캐스팅하셨으니까 조용하고 차가운 이면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뿜어져 나오게끔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그런 소스들 중 하나가 말투라던가, 말을 하기 전과 후의 호흡이라던가, 아니면 나니 만의 걸음걸이나 동선들이었죠.
일반적으로 감정을 담은 대사는 자의적으로 호흡을 통제하거나 조율할 수 있지만,
음율이 있죠.
나니의 화법은 모든 음절이 또박또박하면서도 어절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상당히 기계적인 어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화법을 설정하고 그에 적응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요가 선생님처럼 얘기하는 캐릭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희 요가를 전담하셨던 진수원 원장님의 말투를 녹음해서 한 2주 동안 연습했어요. 그렇게 연습해서 감독님께 보여드렸더니 나니라는 캐릭터는 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요가 강사처럼 얘기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고,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감독님께서 저에게 눈동자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주셨어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과 함께 감정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감정이 말로 묻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배제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이하게 대사를 쳐줬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죠.
어쩌면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에서 기능적인 요구가 많았던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캐릭터의 화법 자체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했고, 요가도 배워야 했으니까요.
정말 달랐죠. 일단 나니는 동선의 폭도 좁았어요. 인순과 비교해봐도 인순은 동적인 캐릭터라서 쉽게 눈에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나니는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제약된 상황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축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했죠. 아까 말했던 화법이라던가, 걸음걸이, 아니면 무드라(mudra, 수인), 만트라(mantra, 진언), 이런 것들을 몸에 익히는 게 참 힘들었어요. 그런 대사만으로 무서운 감정을 전달해야 되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긴장돼있기보단 오히려 힘이 빠진 듯한 상태를 유지했을 때 관객에게 더 무섭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대로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영화를 준비하는 3개월 동안 저를 버리고 제 몸부터 많이 바꿨어요.
요가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교정된 부분도 있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요가로 교정된 건 유연성이었죠. 보통 다른 친구들은 어깨가 많이 내려가 있는 편인데 저는 약간 솟은 어깨라 이게 어떻게 보면 항상 긴장돼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내리는 작업을 했고, 등을 약간 굽히고 다니는 버릇도 고쳤어요.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보이려면 정자세로 보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건 다른 방식으로 원장님과 교정을 잡아야 했거나 따로 집에서 연습이 필요했어요.
요가는 해본 적 있었나요?
캐스팅 되고 나서 감독님과 미팅할 때, 감독님께서 요가는 접해봤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런데 한번도 안 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캐스팅이 넘어갈까 봐 3개월 정도는 해봤다고 거짓말했어요. (웃음) 그랬더니 감독님께서도 다행이라고 하시는데, 오히려 제가 속으로 감독님께서 그렇게 봐주셔서 다행입니다, 싶었죠. (웃음)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2~3주 정도 더 빨리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미친 듯이 연습했죠.
몸을 움직이는 건 좋아하는 편이에요?
사실 동적인 운동을 되게 좋아해요. 달리는 걸 좋아해서 러닝머신 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취미로 재즈 댄스도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요가는 한자리에 머물러서 몇 초 동안 한 동작으로만 있어야 하는 정적인 운동이라 저한테 너무 힘들었어요. 확실히 저는 동적인 운동을 많이 선호하는 편이었던 거죠. (웃음)
그렇다면 나니의 어떤 매력이 차수연 씨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걸까요? (웃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감독님께서 저에게 왜 러브콜을 주셨는지 딱 알겠던데요. 그러니까 어떤 역을 할 것 같으니 시나리오 한번 봐라, 단지 이런 이유를 떠나서 시나리오에서 나니 역을 보니까 어떤 이미지 때문에 감독님께서 제게 이 캐릭터를 주신 건지 알게 됐어요. 나니는 단면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적고 감정이 절제된 인물이라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분위기가 풍기지만 몇몇 신에서는 발랄하고 밝은 모습들이 보여지기도 하고, 끝에 가서는 간미희를 배반했을 때 무너지는 모습까지 드러내잖아요. 이렇게 한 영화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란 점이 끌렸어요. 아직 제가 많은 영화를 해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가 쌓아놓은 경력 안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선물세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에도 감정을 절제한다는 측면에서는 기존의 캐릭터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자신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을 느꼈어요. <아름답다>나 <보트>, <여기보다 어딘가에>같은 작품은 캐릭터의 감정적인 부분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고, 저도 감정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라서 그런 감정적인 표현들은 편했죠. 그런데 <요가학원>은 감독님께서 “마지막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그 전까진 모든 감정을 배제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감정의 표출이나 감정적인 표정은 너무나 잘 보인다. 하지만 <요가학원>에서는 그런 감정을 상중하로 나눠서 보여줬으면 좋겠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상태로 얘기하고, 행동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학원생들을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덕분에 <요가학원>을 통해 한가지 배운 거 같아요. 항상 표출만 할 줄 알았지, 그걸 어떻게 조절해야 할진 아직 몰랐으니까요.
지금까지 7편의 영화와 2편의 드라마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3년 차 배우로서 적은 경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인터뷰에서 그런 말도 했더군요. <요가학원>이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은 작품이라고요. 맞아요.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저에겐 항상 미팅이 있었고, 오디션이 있었고, 감독님들께서 그 역할에 어울린다고 판단됐을 때 작품에 임했었죠. 그런데 <요가학원>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같이 작업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제가 하겠다고 답변한 다음부터 미팅이 이뤄졌고요.
그래서 더욱 영화에 애착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저한테는 좀 애정이 남는 영화에요. 이전까지는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볼 땐 항상 제 자신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반적인 스토리나, 아니면 상대 배우와의 관계나 호흡 같은 제 개인적인 부분들이라던가, 전체적인 분위기 안에서 제 단점들을 잘 꼬집어서 봤었거든요. 저럴 땐 저렇게 하면 안 됐었는데, 이렇게. 그런데 <요가학원>은 너무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게 돼서 저는 그냥 다 괜찮더라고요. (웃음) 제 연기가 괜찮다기 보단 전반적인 영화 흐름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옛날 같은 경우엔 제가 어떻게 했다는 걸 제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가학원>은 주관적으로 보다 보니까 어디가 모자랐는지, 어디가 잘 안됐는지, 그리고 어디가 좋았는지, 더 듣고 싶어지는 거 같아요.
어쩌면 출연작 가운데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예. 너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어요. (웃음)
아무래도 전작들이 개봉할 때와 기분도 남다르겠어요.
그래도 같이 출연한 배우들이 많아서 지금까지 작품 중에 제일 힘이 되는 거 같아요.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같이 긴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여섯 명이나 더 있다는 게 힘이 되더라고요.
오늘 오후에 무대인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관객 앞에서 무대인사를 하는 기분도 남다르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일반 관객에게 무대인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이번이 처음으로 도는 거에요.
아, 그런가요? <보트>때도 하지 않았나요?
예. 저는 안 했어요. 제가 나름대로 영화에 많이 출연했지만 대중들에게 이미지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 관계자들이나 감독님들은 이제 제 이미지를 잘 알게 돼서 이번 년도부터 많은 영화 제의를 많이 받게 된 거 같지만 대중들에겐 <요가학원>의 나니가 차수연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거죠.
사실 영화에서 나니의 전사가 조금씩 노출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과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대한 충분한 부연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할만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도 고민이 깊어질 수 있는 측면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캐릭터의 과거를 추측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니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었나요?
사실 원래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에게도 요가학원에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사연들이 담긴 과거 신이 있었어요. 시나리오 자체엔 더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감독님께서 그걸 영화에서 압축시키시다 보니까 배우들이 그런 설정만 인지하고 연기에 임해야 했어요. 다른 친구들 같은 경우에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요가학원에 들어왔던 것처럼 저 또한 비슷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와 함께 간미희와의 사연을 담은 전사가 있었죠. 아쉬운 부분이긴 해요.
영화가 너무 많은 걸 보여주는 것 역시 딱히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설명이 불충분할 땐 그걸 표현하는 배우에게도 부담이 생길 수 있겠죠.
그런 갭을 줄이는 게 힘든 거 같아요.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좀 더 설명을 해줘야 이해되지 않을까 싶은 경우도 있지만 작업하는 입장에선 이게 너무 지나치게 착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어디에 포인트를 줄지에 대해선 감독님만이 아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요가학원>은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상업영화란 단어에 어울릴만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무래도 전작들과 현장 분위기부터 차이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전작들에선 감독님과의 대화가 항상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 <요가학원>에서는 배우들도 너무 많고, 감독님도 따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전작들보단 적었던 거 같아요. 인디 영화나 저예산 영화라 할 수 있는 전작들 같은 경우에선 촬영장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들어갔거든요. 다만 <요가학원>같은 경우에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전작들보다 대화를 적게 했지만 막상 현장에선 감독님과 얘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어요. 감독님께서, “다음 주에 이런 식으로 한번 해볼까” 하시면서 소스를 던져주시면 전 거기에 제 상상을 덧붙여서 감독님께 보여드렸고 그러면 감독님께서 또, “그것도 괜찮네?” 이러시고, “그럼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또 어떨까?” 이렇게 다시 소스를 던져주시고, 계속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마치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처럼요.
전작에서는 항상 상대역이 남자였지만 <요가학원>에서는 오로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연기를 했습니다.
시나리오 받았을 때, 나니라는 캐릭터가 먼저 보이긴 했지만 그 주변에 캐릭터가 너무 많았어요.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이 캐스팅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7명의 배우들이 다 모이면 정말 많은 불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았었죠. 여자 배우 2명만 모여도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진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거든요. 그런 얘기 못 들어보셨어요? (웃음) 그런데 2명도 아니고 7명인데 이게 과연 잘 풀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처음에 저희끼리 미팅을 했던 장소가 요가학원이었어요.
<요가학원>을 찍기 위해서 요가학원에 모였군요. (웃음)
예. 그렇게 1명씩 들어오면서 서로 인사하고 곧바로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서 요가를 시작했죠. 서로 말로서 통성명하긴 했지만 그 사람의 이면을 보기 전부터 저희끼린 몸으로 같이 부딪힌 셈이죠. 사실 유진이 빼고 다들 요가를 처음 접해보는 거라서 모두 몸이 힘들고 지치는 상태였고 그래서 더욱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요가 덕분에 서로에게 더 편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거죠.
아무래도 요가 마스터를 연기하는 만큼 영화상에서 보다 숙련된 요가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요?
정말 부담이 많았어요. 저는 요가가 처음이라 <요가학원>에 캐스팅되고 나서 남들보다 3주 일찍 매일 4시간씩 원장님과 혼자서 연습을 했었죠. 제가 3주 동안 열심히 했다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 동작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3주 만에 될 수 있는 동작들이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이제 3주 후에 다른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유진이가 오자마자 한번에 제가 못했던 것들을 하는 거에요. 유진이는 5년 전부터 요가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니까 제가 3주 동안 했던 것들이 너무 허탈해지고,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어요. 그때 당시 실력으로 보자면 유진이가 마스터를 해야 되고 제가 유진이 역할을 해야 했던 입장이었던 거죠. 제가 그토록 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던 동작을 유진이가 한번에 하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무너져버렸어요. 그 3주 동안 한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때 술 한잔 했어요. (웃음) 그리고 어느 정도 집착은 버렸어요. 이게 금방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구나, 그러니 3개월 안에 최선을 다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천천히 다시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기능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심리적으로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영화에선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낸 느낌인데요. 힘들었던 만큼 만족감도 크지 않았을까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작업이었어요. 제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소재였으니까요. 요가 초급 과정의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선생으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3개월 안에 그 정도 수준으로 피치를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그만큼 몸도 힘들었지만 캐릭터로서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이 많았죠. 그런 덕분에 나니에게 많이 배워가게 된 입장이 됐어요. 저를 바꾸게 된 입장인 거죠. 덕분에 몸도 많이 밝아졌고, 이렇게 저를 자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 제 안에서 여러 가지로 차수연이란 배우를 업그레이드시켜준 영화가 된 거 같아요.
혹시 <요가학원>에서 욕심 나는 다른 캐릭터는 없었나요?
저는 나니가 좋던데요. (웃음) 물론 개인적으로 <요가학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캐릭터는 인순인 거 같아요. 인순의 강박증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 분들도 다 갖고 계실 거에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공감이 갔죠. 마치 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캐릭터 같아요.
<요가학원>은 외모지상주의 세태를 공포로 치환한 작품입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느끼는 강박도 많이 묘사되고요. 사실 차수연 씨와 같은 배우들이야말로 외모에 대한 강박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직업이 아닐까 싶은데요. 혹시 지금까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나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예쁘시지만. (웃음)
저도 외모적인 콤플렉스는 분명히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저희는 얼굴이 먼저 보여지는 사람이고 그만큼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눈길이 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예뻐서 눈에 띄는 연기자나 배우가 있는 반면에 너무 예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연기적인 매력이 갖춰졌기 때문에 얼굴 자체가 아름답게 보이는 배우도 있는 거 같아요. 갈 길이 다 다른 거죠. 사실 너무 예뻐서 그 배역이 잘 안 보이는 배우들도 있잖아요.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너무 예쁜 게 죄인거지. (웃음) 캐릭터가 보여야 되는데 너무 예뻐서 배우의 얼굴이 보이는 거죠. 저도 너무 예쁜 배우들을 보면 너무 예뻐서 캐릭터가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얼굴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는 눈에 띄게 예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를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영화 관계자 분들에게 종종 어느 캐릭터를 맡더라도 그 캐릭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만큼 저는 캐릭터가 잘 스며들 수 있는 베이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캐릭터의 내면적인 부분을 보여주는데 보다 유리한 입장이고 그만큼 연기적인 수준을 많이 끌어올려주면 제 얼굴이 아름답게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무래도 장단점이 있는 거죠. 단지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되는 거 같아요.
차수연 씨도 눈에 띄게 예쁘신 것 같은데요. (웃음) 예전에 전도연 씨를 닮고 싶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네요. 그만큼 자기 역할에 헌신적인 배우를 선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배우로서 너무 망가졌다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때로 꺼려지는 일이 아닐까요.
<요가학원>이전에 <집행자>를 찍을 때 윤계상 선배랑 베드신이 있었는데 그 신에서 우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옆 방에서 조용히 하라면서 벽을 두드리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맡은 캐릭터가 좀 당차서 너나 조용히 하라면서 막 소리지르고 도리어 그 벽을 치는 모습이 나와요. 그 한 샷을 찍고 나서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나는 오케이지만 네가 한번 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왜요? 저는 괜찮은데요.”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아니, 여배우가 이렇게 안 예쁘게 나오면 본인에게 좀 그렇지 않아? 다시 찍을래?” 하시는 거에요. 사실 어떤 분들은 카메라에 예쁘게 비춰질 수 있는 각도를 잘 알아서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그 각도로 비춰지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솔직히 저는 그 캐릭터로서 확실하게 보이는 게 얼굴이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배우로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연기적으로 노력하고 자기 계발을 해서 제 캐릭터가 잘 보이게 되면 그게 저를 아름답게 보여줄 거라 생각해요. 저 역시도 그런 배우가 예쁘게 보이고요. 어쩌면 그게 저와 다른 배우들의 차이일지도 모르죠.
<집행자>얘기가 나왔는데 사실 <집행자>에 차수연 씨가 출연했다는 건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남자배우들에 대한 정보만 공개됐더군요.
홍일점이에요. (웃음) <요가학원> 들어가기 전에 촬영은 다 마친 상태였고요. 올해 11월에 개봉될 거 같아요.
올해에 개봉작 가운데 4편이나 차수연 씨의 이름이 올라가는 셈이군요.
혹시 <보트> 보셨어요?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고의적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차수연 씨 출연작은 다 봤습니다.
와! (웃음)
2년 전 인터뷰에서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캐스팅 배경이 하정우 씨의 추천 덕분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보트>에서 하정우 씨와 함께 출연했습니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배우와 한 작품에서 만난다는 게 편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2년 전만 해도 하정우 씨는 떠오르는 신인이었지만 이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가 됐고요. 그걸 옆에서 지켜본 입장이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정우 오빠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보면 배울 점도 많고, 연기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신 분이니까요. 에너지가 정말 넘치는 배우에요. 그리고 저도 그 에너지를 받아서 더 좋은 에너지로 쓸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배우인 거 같고요. 우선 촬영장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배우인 거 같아요. 저는 제 것 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아직까진 그런 여유가 없지만 정우 오빠는 그런 여유로 현장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연기에서도 자연스럽게 여유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얼마나 치밀한 계획과 설정들을 갖고 연기하시겠어요. 저는 아직 많은 경험이 적은 배우라서 여전히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데 옆에서 오빠가 그런 부분들을 집어주기도 했어요. <보트>에서 담배 피는 연기를 할 때,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을 만큼 과하다 싶은 제안까지 주더라고요. “혀로 끄면 참 임팩트 있겠다.” (웃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니면, “담배를 피우고 나서 컵에 집어넣어봐. 그럼 좀 살 것 같은데.” 그렇게 사소하지만 제가 섬세하게 잡아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살짝 건드려주곤 했죠. 너무 감사했어요.
<오감도>에서 허진호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셨죠. 허진호 감독님의 작품이라 점만으로도 멜로 연기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오감도>촬영은 4일 동안 했는데 아직 저에겐 짧은 시간에 그 배역으로 빠져들 수 있는 노련미가 없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그저 허진호 감독님을 믿고 멜로라는 장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보려 노력했던 거죠. 그래서 사실 <오감도>인터뷰 때는 기자 분들에게 재미있게 말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오감도>에서 귀신 역할을 맡았고, <별빛 속으로>에서도 귀신 역할이었는데, 이번에 <요가학원>도 사실 귀신에 가까운 역할이었죠. 아무래도 차수연 씨의 인상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저는 차수연 씨의 눈동자가 그런 감상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기자 분들이 도리어 저한테 자신의 신비스런 이미지가 어디서 나오는 거 같냐고 물어보시곤 하는데 저도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 눈동자에서 묘하고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나온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니까요.
본인이 대답하기엔 좀 쑥스러운 답변이잖아요.
저는 했는데! (웃음) 사실 감독님들께서 다들 그렇게 얘기하셔서 제가 스스로 캠으로 저 자신을 찍어봤어요. 그렇게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제 까만 눈동자가 흰자 부분을 좀 더 많이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좀 묘한 느낌으로 발산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큰 눈이 아닌데도 좀 더 커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생기는 거 같고요.
사실 지금까지 신비스럽거나 차갑고 속 모를 느낌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각인시킨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아니요. 저는 저에게서 제일 처음으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그런 것이라면 먼저 그런 이미지로 성공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잘 하고, 잘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정확하게 보이면 이제 또 다른 이미지를 제 안에서 찾으려고 하겠죠. 예를 들어서 정우 오빠는 <추격자>에서 살인자 역할로 성공했잖아요. 그 이후로 살인자 역할은 이제 안 들어온다고 해요. 그런 것처럼 저도 차갑고 신비스런 이미지로 정확히 쐐기를 박아주면 그 다음엔 감독님들께서 또 다른 이미지의 저를 원하지 않으실까요? 제 안엔 또 다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 때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면 되겠죠.
이윤기 감독의 신작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촬영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국가대표> 이후로 4편의 영화에서 하정우란 이름이 보이더군요. 이미 촬영이 끝난 <페럴렐 라이프>를 비롯해서 현재 촬영 중인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신작 <황해>와 전계수 감독의 차기작으로 예정된 <러브 픽션>까지, 정말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웃음) 쉴 틈도 없어 보이는데 체력적인 부담은 없나요?
체력적인 문제는 없어요. 일단 저와 프로덕션끼리 서로 약속했던 부분만 잘 맞아떨어져서 계획적으로 촬영이 준비되고 이뤄지기만 한다면 스케줄은 물리적으로 전혀 무리 없이 돌아가니까요.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난 캐릭터를 복제하지 않고 잘 변주해 나가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는가라는 부분이죠. 배우로서 얼마나 소비되지 않느냐가 최고의 관건이랄까. 상업적인 설득력을 염두에 두면서도 기존에 있었던 영화보다 새롭거나 실험적인 프로덕션, 제작 방식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선택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러브 픽션>은 굉장히 새로운 영화에요.
어떤 점에서 말인가요?
대사의 템포나 리듬, 톤 자체가 굉장히 만화적이에요. 우리가 영화상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캐릭터들의 대사 속도보다 2배 정도 빠르거든요. 과거 ‘하워드 혹스’의 작품이나, ‘우디 알렌’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만큼이나 빨라요. 그런 점에서 유니크(unique)한 면이 있죠. 지금은 제작이 딜레이(delay)돼서 언제 촬영에 들어갈지 미지수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꼭 전계수 감독님과 찍어내고 싶어요.
지금 찍고 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이윤기 감독과 두 번째 만났고, 이미 <황해>를 통해 나홍진 감독과 두 번째 작품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과도 이미 두 차례씩 작업했죠. 한 감독과 다시 만나서 작업하는 경우의 장점을 그만큼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물론 엄청난 신뢰가 생기죠. 전작을 통해서 지지고, 볶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모니터를 통해서, 어떤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많은 부분을 공유했으니까요.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와 내가 연기했던 인물이 있는 한편의 영화를 우리가 만든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전반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베스트를 뽑기 위해 같은 단계에서도 더 위에 있는 문제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거죠. 거두절미 할 수 있는.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은 언제 결정하신 건가요?
<추격자>를 끝내고 나서 나홍진 감독님과 윤석이 형하고 같이 또 다른 그림을 그려보면서 이런 거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게 <황해>였어요. 작년 여름에 결정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생각해오면서 준비하고 있죠. 당장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준비해야지, 하는 게 준비가 아니잖아요. ‘구남’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감독님을 만날 때마다 얘기를 나눠가면서 장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준비를 해나가는 거죠. 이렇게 하다 보면 1년에 많게는 주연작 3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지속적으로 몸을 달궈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또 일상 안에서 몸을 식히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 배우로서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만큼 일상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배우 하정우로서의 삶과 김성훈으로서의 삶에 분명한 차이를 두려고 해요. 예를 들면 연예인이 아닌 일반적인 친구들과 축구팀을 만들어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과 부딪혀보기도 하고, 그 사람들과 같이 밥도 먹는 건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3~40대, 많게는 50대까지, 지금의 남자들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무엇을 통해서 삶의 체증을 해소하는지 직접 느끼고 저도 30대 초반의 남자로서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것들이 리프레쉬(refresh)되는 것 같아요. 그만큼 발란스(balance)를 맞춰주는 게 가장 중요하고 이런 생활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작을 하는 만큼 차기작 선택에 있어서 전작과의 캐릭터적 차별성이 중시되지 않을까 싶군요.
매번 다른 거 같아요. 어떤 배우가 ‘메소드(method)’ 연기를 한다 했을 때, 메소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또 다르게 ‘스타니슬라브스키(Stanislavski, 1863~1938)’식의 연기를 할 수도 있고요. 자기의 경험으로 회귀해서 그 안에 놓인 자신만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도 있고, 연기 하나하나를 기술적인 표현 방법으로 구사하며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법도 가능하죠. 우는 장면에서도 제 감정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우는 연기 자체를 만들어내는 거에요. 이렇게 다양한 표현 방법을 염두에 두는 건 최소한 1년 이상의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국가대표>라는 상업적 작품이 여름에 떡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보트>라는 저예산 예술영화를 찍어도 보완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조합을 생각하고 나니 더욱 큰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종종 보면 상당히 본능적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분석적으로 연기에 접근한다고 들었습니다. 단지 캐릭터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신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그 안에서의 역할 자체의 높낮이를 제한할 만큼 계산적인 연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따라서 연기적 표현 양식이 달라지는데요. 홍상수 감독님은 좀 예외적인 케이스지만, 윤종빈 감독님, 이윤기 감독님, 김영남 감독님, 다들 극사실적인 연출 방식을 선호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런 영화 안에서 배우가 해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일단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그렇다면 배우는 철저히 도구이자 오브제(objet)로서 관객들에게 그 신을 잘 설명하고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봐요. 감독들이 컷을 쪼개는 스타일에 따라서 종종 빈 공간이 많이 생기기도 하는데, 쉽게 얘기해서 마가 뜨는-일반적으로 촬영 현장에서 대사와 대사, 액션과 액션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생길 때 ‘마가 뜬다’고 표현한다.- 부분이죠. 그 부분에서 관객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봐요. 윤종빈 감독님은 원신원컷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종종 인물을 따라잡으며 팬(pan, 카메라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기법)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팬을 하기까지 1, 2초 정도 마가 뜨는 장면이 생겨요. 그렇게 마가 뜨는 장면에서 감독이 원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내가 할 몫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내가 그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거든요. 캐릭터가 변질되지 않고, 스토리가 피해 받지 않게끔 시나리오 상에 명시되지 않은 애드립을 넣어줘도 될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서 내 개성을 조금 더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는 것 같고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작업이기도 하겠죠. 직접 찍은 단편 영화가 한편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카메라를 잡아본 연출적 경험이 연기적 관점에 작게나마 일조한 측면이 없을까요?
어떤 신하고 신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극적 흥미를 높이면서 찍고자 한다면 그 신에서 마지막 컷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연기를 끝냈는지 신경 쓴 후에 그 다음 신의 첫 번째 컷을 구상하죠. 예를 들어서 완전 풀샷으로 끝나는 신이 있어요. 그 풀샷에 제 모습이 담겨있고, 그 다음 신에서 윤석이 형의 타이트 바스트나 타이트 클로즈업이 들어가요. 그럼 여기서 내가 어떻게 연기해줘야 윤석이 형의 타이트 샷이 잘 붙겠다 계산하는 거죠. 캐릭터의 연기를 떠나서 영화적 재미를 주는 극적 연출의 영역까지 고려하는 연기가 가능하면 더욱 극적으로 신이 넘어가는 효과가 생겨요. 아무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모든 연기가 정확하게 계산과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때때로 그런 계산의 오차를 메우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 필요할 때도 있을 거고요.
영화 안의 신마다 초(初)목표가 있잖아요. 각 신마다의 흐름에 따라서 발란스를 맞추는 가운데서도 각 신마다의 초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거죠. 계산적인 합을 잘 맞춰서 도달해야 할 신이나 장면이 있고, 어떤 건 그냥 현장에서 그때 그 기분에 한번 맡겨보자, 하게 되는 지점도 있는 거 같아요. <추격자>에서 심리 분석관과의 대질 신은 정확히 3번 째 촬영일에 가서야 촬영할 수 있었어요. 왜냐면 처음엔 그분하고 뭔가 톤이 안 맞았고, 두 번째는 제가 못했어요. 이상했거든요. 그 장면만큼은 계산하지 않았던 장면인데 그 전에 파출소에서,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하는 장면이나 그 다음에 이 형사가, “그 여자 어떻게 했어.” 물으면 정으로 찍고, 아킬레스를 따서 어쩌고 하는 장면, 그리고 여자 형사에게 냄새 비리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중요 포인트가 반복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건 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템포까지 계산하면서 연기했지만 마지막에 클라이막스 지점에선 어떤 계산이 설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건 그냥 현장 가서 내 느낌대로 찾아가서 해봐야겠다, 싶었죠. 계산대로 해보면 뭔가 너무 작위적이 될 거 같아서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흔한 취조 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꽃이죠. 스릴러의. (웃음) 그렇기 때문에 무모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 있게 내 필대로 가봐야겠다, 했는데 두 번이나 안된 거에요. 두 번째엔 감독님한테 정말 정중하게 오늘 못 찍겠다 사과드리기도 했죠. 한번 테이크를 갔는데 하고 나니까 너무 작위적이라 민망한 거에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정우, 너 이제 어떻게 할래. 그만 찍을까.” 하시길래 마지막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했죠. 결국 그 날 안 찍고 세 번째 날에 촬영장에 갔는데 사실 그날도 느낌이 별로 안 좋았어요. 몸 상태도 안 좋았고. 그런데 거기서 딱 느낀 게, ‘그래. 지영민도 지금 피곤하겠지. 그렇게 시달리고 밤을 새고 얻어터져서 지금 새벽 4시까지 왔는데, 지치겠네. 얘기하기도 싫겠네. 나도 연기하기 싫은데, 부담도 되고, 이걸 써봐야지.’ 했는데 통한 거에요.
<국가대표>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작품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심 걱정되는 바는 없었나요? 그런 지점과 비슷한 걱정은 있었죠. 시나리오 자체가 많이 거칠었거든요. 스토리는 분명하고,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그려지는 인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산만한 부분들이 있었고요. 하지만 김용화 감독님에 대한 100%신뢰가 있었고, <국가대표>가 상업영화로서 분명한 미덕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에 분명히 이 종목을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가 거칠긴 하지만 그걸 100배 이상 덮어줄 장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처음에 감독님한테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이런 소재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고요.
사실 <국가대표>는 하정우 씨가 찍은 첫 상업영화라 명명해도 될 것 같습니다. <추격자>가 5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사실 <추격자>가 처음부터 그 정도로 대단한 인지도를 얻을 것이란 기대감에서 기획된 영화는 아니니까요.
(손을 모으면서) 그렇죠.
그런 점에서 <국가대표>는 전작들과 다른 연기적 접근성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용화 감독 같은 스타일에서는 분명 달라져야죠. 일단 컷 수가 너무 많고 편집에 따라서 인물의 입체감이 너무 많이 달라지니까요. 그랬을 땐 최대한 표현을 자제하고 노멀하게 감정의 발란스를 유지해야죠. 일단 과잉수준으로 넘어서면 안 돼요. 이렇게 작품 색깔이나 연출 스타일에 맞게 변할 수 있다면 우려할만한 조건들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애초에 상업영화임을 인지하고 작품에 들어간 영화는 <국가대표>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런 이해가 연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었을까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국가대표>에서는 내러티브 위로는 절대 나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철저하게 기능적인 역할이라 생각했죠. 다른 배우들을 위해서 희생했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앙상블을 위해서 노력했어요. 표면상으로 중심축은 저였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인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절반은 사실 방 코치의 몫이기도 했고요. 이런 발란스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 관계를 그리는 각 신마다 수위조절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두 번째로 <국가대표>엔 유난히 바스트 샷이 많았고, 김용화 감독의 영화는 음악이 유난히 많은 편이기도 하고, 교차편집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조금 더 튀어 보여서 개성이 드러내면 굉장히 언발란스해질 것 같았죠. 그만큼 감정을 최대한 비워내려고 노력했어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제 감정의 옷처럼 입히게끔, 혹은 편집이나 영화적 장치들로 과장시킨 감정들이 저를 거치면 과잉이라고 보이지 않게끔 제가 서 있는 것, 제가 쳐다보는 것, 이런 행위 속에 담길만한 감정도 비워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덧붙이지 않으려고,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프레임 안에서 후반 작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여지나 여백을 열어놓으려고 했고요.
<국가대표>는 연기 이전에 스키점프 선수로서의 자태를 몸에 익히는 작업이 배우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스포츠 영화입니다. 완벽한 기술력을 몸으로 전시할 수 있을 때 설득력 있는 연기도 가능한 영화니까요.
사실 스키점프라는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배우가 맡은 역할은 10%정도 뿐이었어요. 어차피 선수들이 스키점프 장면에서 대역을 맡았고, 배우들은 점프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스키점프 장면에 잘 연결시키는 역할이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최대한 어깨 높이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키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부츠를 만질 때조차 어색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죠. 점프복을 내 몸이 익숙하게 느끼도록 노력했어요. 그래서 직접 점프복을 갖고 다니면서 집에서도 점프복을 입고 러닝머신을 많이 뛰었고요. 심지어 부츠도 갖고 다녔고. 그런 생활적인 익숙함까지 일반관객들이 디테일하게 느낄 순 없겠지만 거기서 중요한 건 지금 배우가 선수로서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동기 부여를 주는 거죠. 결국 이런 게 대사 연기나 다른 부분에서 분명히 파급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것 역시 메소드의 기본적인 방식이죠.
그런데 사실 모든 연기라는 게 다 그런 거 같아요. 로버트 드 니로가 <택시 드라이버>를 위해서 3개월 간 택시 운전을 했다는데 그걸 하고, 말고에 따라서 과연 어떤 연기적 차이가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제일 큰 차이는 그렇게 3개월을 했기 때문에 택시 운전자에 대해서 알 것 같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기고 연기적으로 더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게끔 동기부여를 형성해주지 않았을까라는 거죠. 그런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큰 효과라고 생각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전작에서 맡았던 캐릭터들보다 평면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도 보다 직설적인 느낌이 들고요. 사실 하정우 씨가 좀처럼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덕분이기도 하고요. (웃음)
김용화 감독님의 훌륭한 점 가운데 하나는 매 장면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거에요. 감독이면서도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쇼트를 바라보고 있는 거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정말 행복해하는 여자의 표정을 비추는 쇼트가 있는데 감독이 처음에 여주인공한테 그 표정을 주문했을 때는 원했던 표정이 잘 안 나왔대요. 그래서 감독이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 후에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상상해보고 그 표정을 한번 만들어봐라”. 그랬더니 여배우에게 기막힌 표정이 나왔다고 하죠. 그런 것처럼 김용화 감독도 매 적재적소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현실적인 요소도 생기고,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끌어내게끔 움직일 수 있게 유도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국가대표>엔 기존에 제가 했던 연기적 표현 방식들과 달리 감정이 굉장히 풍부해져서 간지러운 부분이 있죠. 마지막에 버스를 내린 뒤 공항에서 나와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전 그러기 싫다고 했어요. 솔직히 너무 간지러웠거든요. 공항에서도 과연 그렇게까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처음에 감독님에게도 그렇게 질문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죠. “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많은 대중들은 이렇게 연기를 해줘야 터칭(touching)을 좀 받는다.” 그래서 납득이 했어요.
<추격자>나 <멋진 하루>처럼 두 명 정도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전되는 영화는 배우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묘미가 됩니다. 그러나 <국가대표>처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하죠.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이루는 입체감이 관건이기도 하고요. <국가대표>를 보면서 <비스티 보이즈>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리더라는 역할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비스티 보이즈>는 매니저로서의 느낌이라면 <국가대표>는 맏형 같은 느낌의 차이가 있었죠. 사실 현장에서 또래 배우들 가운데 실제로 맏형 노릇을 했을 거 같은데요. 선배로나 형으로서나 후배들을 지켜보는 입장이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과 4~5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만큼 제 나이가 많은 거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이 저를 선후배가 아닌 동료나 친구로 느낄 수 있길 바랬고요. 그들을 도와준다기 보단 편하게 같이 어울리려고 노력했어요. 도리어 그들을 더 높여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조언을 한번 구해보기도 하려고 노력했죠. 어쩌면 <멋진 하루>에서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도연 누나가 저를 계속 서포팅(supporting)해줬다고 느꼈는데 제가 도연 누나로부터 느꼈던 걸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본인이 경험했던 부분이라 더욱 그 중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겠죠. <추격자>와 <멋진 하루>의 하정우 옆에 김윤석과 전도연이라는 좋은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정말 엄청난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히트>에서 고현정 누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덕분에 어떤 캐릭터로 만나서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기 보단 자연스럽게 형, 누나, 하면서 인간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어쩌면 배우들의 앙상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하정우 씨 스스로도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멋진 하루>의 병운이라고 밝혔던 것으로 아는데 정말 실질적으로 병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래요? (웃음)
제스처라던가, 세세한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발생하는 뉘앙스가 언뜻 병운을 연상시켜요. <비스티 보이즈>에서의 대사처럼 느낌이 있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연기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을 창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연기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나요?
(손뼉을 치면서) 아! 지금 갑자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어쩌면 <국가대표>의 밥, <보트>의 형구, 그리고 대표적으로 <추격자>의 지영민, 이 세 인물은 사실 제 힘으로 연출해낸 캐릭터 같아요. 그리고 <비스티 보이즈><멋진 하루>는 그냥 저에게 있는 그대로 했던 거 같고요. 제가 요즘 채플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키드>(1921), 이런 작품들을 보면 채플린이 감독이기도 하면서 본인이 직접 그 인물을 연출하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럴 수 있다면 되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 그대로 캐릭터 자체를 하나의 창작으로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요. 사실 채플린은 방랑자적인 캐릭터를 계속 연출하고 사용해왔죠. 하지만 <라임라이트>(1952)같은 경우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늙은 인간 채플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이런 양면성이 공존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전자의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고, 복제 논란이 많을 수 있을 거에요. 그래서 관객들이 그런 의미를 좀 알고 제 연기를 본다면 굉장한 재미가 있을 거 같아요. 감히 말씀 드려보자면 이 시대의 채플린, 이런 캐릭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거 같아요. 짐 캐리가 <에이스 벤추라>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재미난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 배우의 어떤 한 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영화를 봤을 때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너무나 영화적인 캐릭터니까요. 도리어 저의 것을 보여주는 게 또 영화적일 때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추격자>의 지영민, <보트>의 형구, <국가대표>의 밥 같은 경우는 저의 또 다른 다채로움이 반영된 캐릭터라는 점, 만약 그걸 알고 저와 제 영화를 보신다면 충분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보트>의 형구와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종종 지난 캐릭터와의 연속성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하정우 씨처럼 한 작품을 끝내고 바로 차기작에 들어가는 경우, 이렇게 전작의 캐릭터와 연관성이 존재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캐릭터적으로 기시감이 크지 않나요?
사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마다 거의 다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전부 다 약간 방랑자 같단 생각이 들어요. 쉽게 예를 들자면 집이 없고, 가족이 불투명하고, 인물의 성장환경이 좀처럼 노출되지 않으면서, 그런 식으로 뭔가 여지가 있어 보이는, 개인적으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면 재미를 느끼는 거 같아요. 영화를 찍을 때 저도 제가 재미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거든요. 만약 그런 연관성이 없다면 재미가 없을 거에요. 아니면 반대로 완전히 다른 뭔가가 있어서 느껴지는 재미도 있겠죠. 앞으로 다른 캐릭터를 만나보고 찾아 보면서 그런 재미를 열어나가다 필모그래피가 좀 쌓이다 보면 그 때 또 한번 정리해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죠.
연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그림, 무용,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관심은 호기심에서 출발하지만 적당한 관심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죠. 그래서 어느 정도 자기 기준 안에서 적당히 성취를 이뤘다 싶으면 쉽게 만족하고 손에서 놓기도 하고요. 마치 이건 이 정도면 됐어, 라는 식이랄까요. 하지만 하정우 씨에게 연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관심 이상의 욕망처럼 보입니다. 성취에 대한 깊이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어쩌면 다른 관심들이 그만큼 그 연기적 성취를 위해 할애되는 부차적 노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 굉장한 연관성이 있어요. 쉬운 얘기로 영화를 찍거나 배우로 살아가는 건 종합예술을 하는 거잖아요. 제가 그런 순수예술에 많이 기대고 영감을 얻게 되는 거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떠한 지점에서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건 충분히 거기에 대해서 얻은 바가 충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만약에 미술을 한다, 사진을 찍는다,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도 어떤 일부분에서만 영감을 얻어요. 어쩌면 그게 다 저를 치우치지 않게 하는 지점일지도 모르죠. 그러한 것들이 오로지 제가 연기를 하고 영화를 찍는데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죠. 만약 주객이 전도돼서 제가 그 발란스를 놓치고 다른 것들에 빠져들면 일단 묘미는 있겠죠.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에 치우치는 건 제가 생각하는 방향 안에서 빗나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들은 제가 계속 연기적으로 영감을 받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부분으로서 가치가 있어요.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는데 왠지 풍경보단 인물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표정에서 느껴지는 다양성이 캐릭터의 내면을 표정으로 구사하는 배우에겐 좋은 영감을 부를 것 같거든요.
인물 사진을 굉장히 좋아해서 종종 사람들을 찍으러 가요. 많이 찍었고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종종 어떤 인물들을 봤을 때 특이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거 같아요. 사실 배우가 가장 멋지게 보일 때는 그 배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한테 연기적 영향력을 굉장히 많이 주셨던 대학 교수님한테도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배우는 무표정의 힘이 제일 중요하다. <대부3>에서도 알파치노가 시칠리아로 넘어가서 아들의 연주를 회상하는 장면 있잖아요. 알 파치노는 아무 것도 안 해요. 선그라스 낀 얼굴로 무표정한 알 파치노의 얼굴에서 회상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알 파치노 컷으로 돌아오면 안경 벗고 가만히 있죠. 아까 초반에 말씀 드린 것처럼 어쩌면 그 무표정이 그 회상 장면을 넣을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라고 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무표정이라는 건 그 사람의 제일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얼굴의 안면근육을 다 풀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사진을 찍을 때도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표정으로만 찍어달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그 사진들을 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어쩌면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때라고 할 수도 있겠죠.
맞아요. 사실 우린 어떤 강박 속에 있는 거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 사람들은 잘 그려야 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실사와 똑같이 그려야 된다라는 강박으로 이해해요. “그림 잘 그리세요?”라고 물어보면, “아, 그림은 젬병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림 자체가 그냥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거잖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동차를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꽃을 그리는 건데, 어렸을 때부터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전 그게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도 마찬가지 같아요. 분명히 모든 사람이나 모든 배우들이 자기만의 매력 포인트를 갖고 있는데 그걸 어떤 이상한 기준에 자꾸 맞춰가려고 하는 거 같거든요. 배우로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자신만의 매력 포인트로 삼아야죠. 그림을 그린다면 제가 생각하는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는 거에요. 그 안에서도 자신과 엄청나게 싸우게 돼요. 내가 그리는 이 꽃이 남이 봤을 때 꽃이 아닌 거 같은데, 이 색은 남이 보면 어딘가 대비가 맞지 않다고 말할 거 같은데, 생각하죠. 하지만 결국 그게 풀리게 되면 제가 원하는 걸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릴 수 있는 결과에 도달하게 돼요.
누군가의 기준을 쫓아가기 전에 자신의 기준에 따라 모든 걸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죠.
사실 전작들은 대부분 감정적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감정적인 해소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는 결말의 스키점프 신을 통해 모든 감정을 증발시키는 느낌입니다. 배우에게도 그만큼 명확하게 감정을 해소해주는 쾌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너무나 좋아해요. 스키점프로 날아가는 장면이나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뭔가 해소됐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감독님은 밥이 자기 인생에 통찰을 했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이번 <국가대표>를 통해서 많은 걸 받아들인 부분이 있었어요. 밥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나니까 제가 이전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은 너무나 방황하거나 방랑하면서 겉돌지 않았는지 고민하게 됐어죠. 이젠 좀 더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제대로 된 직업도 있는 캐릭터를 만나야겠다 생각도 들었고요. 어쩌면 그 장면 자체가 주는 속 시원함이 지금 저에게 어떤 쉼표가 될 수 있는 게 아닌지,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건 아닌지, 인생의 1라운드를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촬영 중에 큰 부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그 마지막 장면이 촬영 때 살이 제일 많이 올라왔던 신이었어요. 살 퉁퉁 쪄가지고, 감독님께서 “너 때문에 컷이 안 붙는다. 어떻게 겨울하고 여름 사이에 8kg차이가 나냐.” 하소연하셨죠. (웃음) 제가 그때 팔이 부러져서 한달 반 동안 운동도 못하고 스트레스 받다 보니까 먹기만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게 그 솔트레이크 장면만 남았었죠.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웃음)
<두번째 사랑>같은 경우는 미국에서 영어로 연기를 했고, <보트>에서는 일본에서 종종 일본어로 대사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국내 배우가 타지에서 타국어로 연기를 하거나 자국어를 쓰는 외국배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건 흔한 기회는 아니죠. 어떤 면에서는 도전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되게 단순하게 받아들인 거 같아요. 일단 제가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거 같고요. 어쩌면 지금까지 무모하게 계속 추진해나가고 있었는데 이젠 다져나가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험을 축적해야 되고 이를 통해 뭔가를 더 학습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굉장히 웃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뭔가 정말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를 위해서 지금 나이부터 계속 쌓아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고 도전해 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국가대표>가 개봉했으니 이제 하정우 씨가 또 한번 떠나 보낸 작품이 됐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찍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작품을 맞이한 셈이죠. 이렇게 항상 영화를 보내고 맞이하는 시기가 짧은 만큼 전작과의 친밀감을 덜어내는 것이 새로운 작품에 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요?
제 몸이 재료라면 재료를 달궈놓은 상태에서 또 시작할 수 있는 셈이니까 그것만으로 되게 좋은 거 같아요. 사실 저는 한 작품을 끝내고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계속 이렇게 작품을 거듭하는 부분에 있어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요. 옛날에 <카르멘>이라는 연극을 했었는데 그때 엄청난 상처를 받았었어요. 친했던 선배가 공연을 보고 나서 막말을 하는 거에요. “너 연기하는 거 보고 정말 실망했다. 난 네가 연기를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민망해서 쫑파티도 못 갔어요. 그때 연출자하고도 사이가 안 좋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죠. 대인 기피증까지 올 정도였어요. 그런 피해의식이 있었는데 그걸 풀어준 게 <고도를 기다리며>였어요. 그렇게 위축된 상태에서 소극장 공연 한번 재미있게 해보자는 동기들과 함께 무대에 서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카르멘>때 했던 고민과 막막함이 완전 풀렸어요. 아, 이게 치유가 되는 구나 싶었죠. 최주봉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작품으로 상처를 받으면 다시 작품으로 치유해야 된다. 대신 기 기간을 더 두면 안 된다.” 스키점프도 마찬가지거든요. 스키점프에서도 점프하다 넘어지면 코치가 바로 다시 가서 뛰라고 해요. 왜냐면 그 기억을 없애주려고. 매번 작품을 찍다 보면 슬럼프가 분명히 와요. 상처도 생기고요. 제가 알게 되는 실수에 대해서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든 지점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늘 다음 작품에서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서 다음 작품 찍다 보면 예전에 했던 고민들이 녹을 때가 있죠.
어쩌면 지난 고민들을 녹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기간이 보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여자랑 몇 날 몇 일 섹스를 하다가 ‘아, 써야겠다’ 해서 제 방에 들어가서 몇 일만에 만들었다고 하죠. 베케트가 그랬듯이 잭슨 폴락도 필이 왔을 때 밤 새도록 그림 그렸다 하고, 그렇게 필이 올 땐 계속 하고 싶잖아요. 지금이 아무리 저에게 다지는 시기다, 그렇게 말하게 된다지만 그냥 지금 저는 너무 하고 싶은 욕망이 충만한 상태 같아요. 저한테 어떻게 이런 다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요.
과거 드라마나 영화 더빙 경력이 많으셨으니까 더빙 자체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엔 어려움이 없었어.
그렇지만 혹시 애니메이션 더빙과 실사영화 더빙 사이의 어떤 차이를 느끼신 바가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만화영화에서의 표현은 조금 과장되거든. 인물이 소리지르거나, 호흡한다거나, 과장이 많죠. 그래도 <업>은 사실적인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 공상과학영화나 치고 받는 액션 영화는 외형적인 걸 중시하니까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영화 같은 경우, 과거의 고전이나 명화 같은 작품은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실질적으로 과거의 명배우들이 나와서 표현하는 건 개인적인 톤 깊이가 있으니까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에요. 그러니 후시 녹음에서 그런 걸 보완할 수 있겠느냐란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 건 오히려 자막을 흘려서 관객들에게 배우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정서를 부여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만화는 그렇지 않고, 약간 과장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표현이 단순하니까, 아마 그런 차이가 있을 거에요.
애니메이션 더빙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하지 않으려 그랬지. 무슨 만화 더빙까지 하라고 그러냐 싶었어. 그런데 주최측에서 상당히 간곡하게 요청을 하더라고. 캐릭터가 성격상 나하고 비슷하다, 영화가 아주 좋다, 그러면 한번 보자. 그래서 봤더니 아주 좋아. 특히 요즘 어린이용 만화라는 게 죄다 살벌하고, 삭막하고, 거칠고 좀 그렇더라고. 어린이용 만화는 좀 환상적이어야지. 그래서 어린애들이 그 만화를 보고 꿈을 그릴 수 있어야 돼. 맑고 깨끗하고 고운 정서를 집어넣어야 되는데 거칠고 전투적인 것들이 횡행한단 말이야. 지금도 텔레비전 보면 여러 만화가 나오는데 그림도 이상하고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메시지도 없고. 그런데 <업>은 환상적이면서도 사랑이 있고,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대단히 감동적이고 상당히 좋은 영화란 생각이 들어요.
웬만한 실사영화보다도 디테일한 표현력을 구사하기도 하죠.
그럼, 표현이 아주 디테일하잖아요. 대단히 사실적이죠. 내가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요. 이런 만화영화는 봐라. 거기에 연기의 기본이 담겨있다. 2중, 3중 적인 연기의 깊이가 나오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연기의 개념은 이 작품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고 있다. 표정이라던지, 제스처라던지, 발성이라던지, 이런 부분을 심도 있게 보면서 연기의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얘기란 말이에요. 애 표정도 그렇고, 영감 표정도 그렇고, 인형이 나올 뿐이지 사람이 나오는 것과 똑같아. 아주 기본에 충실한 영화란 말이에요.
작년에만 드라마 세 편을 하셨고, <라이프 인 더 씨어터>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끼신 적은 없으셨나요.
사실 우리 부계 쪽은 (체질이) 좀 약해요. 그런데 다행히도 강한 모계 체질을 타고 나서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감사하고 있지. 매일 같이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정이 과제처럼 나오는데 아직까진 한번도 그 과제들을 빼먹은 적이 없어요. 거의 다 수용했단 말이죠. 오늘 같은 날도 어제 (새벽) 4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촬영이 끝났단 말이에요. 지금 내 파트가 3개 정도 남았는데 내 앞에 임시 파트를 찍고 나서 2시 반부터 촬영을 시작했다가 한 3시 50분 정도에 끝났나. 그런데 내가 오늘 8시에 MBC 골프동호회 때문에 필드에 나가야 된단 말이에요. 약속이 돼 있으니까, 못 가면 안되지. 그래서 거의 못 자고 거기 가서 골프치고 온 다음에 지금 여기에 온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책임감이 중요해요. 내가 맡은 일은 쓰러지기 전까진 충실히 이양해야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그렇게 하게 되는 거지.
<굿모닝 프레지던트> 촬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영화도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2006년도 즈음에 <모두들, 괜찮아요?>와 <파랑주의보>로 오랜만에 영화에 복귀하셨죠. 그 이후로 다시 첫 영화입니다.
70년대 중반까지 하고서 거의 못했으니까 한 20년 동안 공백기가 있었던 거지. 그 다음부턴 한국영화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생긴 영화들은 너무 젊은 영화라 우리가 출연하기엔 적절치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한 3~4년 전에 잠시 나와서 한국영화의 현상 변화를 봤더니 너무 많은 변화가 왔다라는 거에요.
아무래도 공백이 길었던 만큼 현장 시스템의 변화를 절실히 체감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정도로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않았나 싶은데요.
7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영화가 주저앉아버렸던 거지. 그리고 8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작품이 적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 흥행감독들조차 안되겠다 싶어서 작품 세계를 바꾸면서 자기 변신을 시작하던 때란 말이죠. 그렇게 성공한 케이스가 임권택 감독인데 어쨌든 난 그 무렵이 한국영화의 변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무렵에 상대적으로 텔레비전이 바빠지기 시작하니까 영화 쪽에 신경 쓸 수도 없었고, 이상하지만 그 동안에 프로포즈도 없더라고. 내가 인위적으로 기피한 건 아니야. 그런 조건 때문에 영화에 뜸했던 거지. 게다가 아무래도 테레비 드라마 작업 조건 때문에 스스로 찾아 다니면서 영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래서 생긴 공백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아무래도 요즘 한국영화가 작품성보단 흥행성에 기준을 두고 제작되고, 그렇기 때문에 젊은 주인공 위주의 영화를 만들게 되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던 거지. 물론 TV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근래 와서 한 명, 두 명, 나이 먹은 배우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얻게 되니까 점점 참여 폭이 넓어지는데 아무래도 나 역시 이런 일환으로 이번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최근에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 씨가 있기 때문에 <마더>가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배우를 존중하는, 그리고 배우의 관록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그런데 외국에서는 다 그렇잖아. 영화의 영역이 다양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역량 있는 배우들을 가지고 연기 중심의 영화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메시지를 만들 수도 있는 거고, 그럴수록 화제가 다양해지니까. 서양에서는 아직도 그런 가치가 공존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유행하는 소재가 하나 생기면 다 그 쪽으로만 몰려가서 어느 한쪽이 비어버린다고. 그 동안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낄 수 있는 영역이 없었지. 한 땐 텔레비전도 그랬으니까. 젊은 배우들 고액 출연료를 주다 보니 출연료 문제도 생기고, 그러니까 다른 부분은 다 빼버리게 되는 거에요. 무슨 홀어머니, 아니면 홀아버지,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경향도 생기고. 그런데 요즘 많이 달라진 게 그것만 가지곤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현시점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아. 요즘 텔레비전에서도 다양한 소재가 생기고 영화에서도 생기고, 이런 것들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가운데서 우리도 뭔가 진로를 모색해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영화에서 노수사관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셨던 적이 있었죠.
김성종 씨의 미스터리 작품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작품에서 나오는 오영수라는 캐릭터가 상당히 재미있단 말이에요. 외국에서도 나이 먹은 배우들이 노련미를 발휘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들이 있잖아요. 그런 경향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의 다이나믹한 액션도 필요하겠지만 노련한 수사관의 관록을 보여주면서 신구(新舊)가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과거 불란서에서 장 가방(Jean Gabin)이 알랭 들롱(Alain Delon)과 같이 출연한 갱 영화-<암흑가의 두 사람>(1973)-처럼 말이죠. 관록 있는 배우의 노련미가 관객에게 신뢰를 주고 영화를 버텨나가게 만드는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라는 게 사실 대단히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분야라서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만큼 쉬운 장르는 아니겠지만 배우로서 한번 해볼만한 재미있는 조건이 아닐까 싶은 거에요.
요즘 각광받는 후배 배우들 가운데 연극 무대 출신 배우가 많습니다.
당연한 건 지금 화술들이 다 엉망진창이라고.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젊은 친구들 보면 말이 안 돼. 말을 못해. 말은 못한다는 게 벙어리란 뜻이 아니라 일상용어가 그런대로 통할 뿐 캐릭터가 구축이 안 된다는 말이야. 왕을 하면 왕이 나와야 되는데 왕 같지가 않고 모자라고 바보 같은 왕이 나온단 말이지. 그런데 그 왕들이 그런 왕들이 아니란 말이야. 인물을 표현하고 해석할 땐 이중, 삼중의 깊이를 가지고 표현해야 되는데 단순히 표피의 일면식만 가지고 표현해버린단 말이야. 껍데기만 보인단 말이지. 결국 시늉만 하고 마는 거야. 학예회 수준이라고. 그런 건 누구나 다 해. 변호사면 변호사답게, 젊은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수준에 어울리는 지적 표현이 나와야 할 텐데 그게 안 된단 말이야.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 좋은 조건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와서 뭔가 얘기하는데 맨날 지적 표현이 안 되고 있어. 쉽게 얘기하면 깡패나 양아치는 잘 하는데 그 외의 캐릭터는 잘 안 된단 말이야. 본인들도 의식해. 그게 왜 그러냐. 화술이 안되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배우의 필연적 조건은 언어구사력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게 요즘 무시되고 있다고.
아무래도 배우로서의 경험적 내공보다도 자신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할만한 캐릭터에 치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보다도 그런 사람들을 선발해서 쓰는 조건이 잘못된 거에요. 충분한 훈련을 시켜서 화술을 터득시키고 이만하면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설 때 등장시켜야 되는데 이건 초벌구이도 안하고 그냥 나온단 말이야. 과수원에서 과일 따다가 농약도 안 닦고 그냥 내놓는 거란 말이지. 사과 하나를 따더라도 일일이 포장하고 이만하면 먹음직스럽겠다 싶어서 내놨을 때 팔리는 거지, 농약 묻은 거 그냥 따가지고 내놓으면 팔리겠냔 말이야. 우리가 지금 드라마를 그런 식으로 만들고 있는 거야. 사실 우리 젊은 친구들이 좋은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훈련을 안 시킨 거란 말이야. 기초가 취약한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그건 본인들에게도 상당히 안타까운 문제고, 시청자들을 위해서도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지.
대학교 강단에도 서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내 수업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4시간이에요. 단지 내가 그것만 하려면 학교 나가는 의미가 없어요. 그걸로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이 정 필요하다면 내 시간을 할애하마, 그렇게 한 7년 전부터 워크샵을 시작한 거야. 한 학기 동안 레퍼토리를 준비해서 석 달 동안 매일 연습합니다. 저녁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일단 화술부터 진행해. 말부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석 달을 매일 연습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6~70% 밖에 안 돼. 그 때 말하지. 봐라, 연기란 게 이렇게 어려운 거란 말이야. 너희들 TV보고 그게 연기의 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번엔 다시 학부 3학년들을 데리고 똑 같은 작업을 가을에 해야 돼요. 그걸 7년째 하고 있다고.
학생들이 힘들어하진 않나요. 일단 선생님도 힘든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나한테도 그래. “괜히 고생해서 할 필요 없지 않냐.” 사실 나도 월급이라고 주는 거 별거 없거든. 그런데 일주일에 하루 4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어. 소위 연기를 하려는 애들에게 보탬이 되지 않아. 내 양심에 비췄을 때는 그래. 내가 비는 시간은 매일 나가요. 그럼 일주일에 4~5번은 나가게 된다고. 최소한 3번 정도는 나간단 말이야. 내 작업 끝내고 밤 늦게라도 가니까. 사실 이 아이들도 일주일에 내 강의는 4시간만 때우면 되는데 매일같이 나와요. 그게 보통 힘든 게 아니란 말이야. 옆에서 그러지. “저녁에 놀기도 해야지. 괜히 시간 아깝게 이럴 필요 없지 않냐.”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야. 재미있는 건 석 달 동안 한 명도 빠지지 않는다는 거. 한 명도 안 빠져. 자기들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밤 새면서 같이 작업하는 거야. 이게 지금 7년째 내려오는 거야. 그러니까 2학년이 들어오면 나한테 하는 첫 인사가 이거야. ‘3학년 될 때까지 계실 겁니까’ 물어보는 거야. 왜? 지네 선배들한테 듣는 게 다 있거든. 그렇게 해야 연기를 좀 터득할 수 있는 거에요.
연기에 대한 기술적 지도와 함께 연기에 접근하는 자세를 함께 수업한다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연출자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화술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새가 모이를 물어다 먹이듯 초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방송이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 기본이 안되면 창의력도 발휘될 수 없어요. 배우가 되겠단 아이들이 대사는 못하면서 괜히 춤추고 노래만 한단 말이야. 희곡이나 영화에서 지적이고 철학적인 캐릭터나 대단히 높은 수준의 인격체가 될 땐 대사만으로 그 캐릭터가 나와줘야 되는데 지금 이런 식으로 어떻게 그런 캐릭터가 나오겠냔 말이야. 그걸 석 달 동안 훈련하는 거야. 내 방식이 다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배우니까 비슷하게는 가르칠 수 있단 말이지.
그래도 칭찬해주고 싶은 후배 배우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후배들 많지. 용모나 자질은 다 훌륭해. 다만 좀 더 구체적인 훈련을 더해서 연기에 대한 개념을 이해시키고 말하는 법, 표정 쓰는 법, 동선, 이런 것도 터득시켰으면 하는 거지. 이런 걸 뛰어넘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한 6개월만 가르쳐도 좋은 재목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그네들 문제가 아냐.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그러다 보니 그 좋은 소재를 가지고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한 두 작품 하다가 안타깝게 밀려나는 거란 말이야. 좋은 배우들은 많지. 여자 같은 경우는 여럿이 있지만 예를 들어서 고두심, 김해숙, 김영애, 이런 일련의 배우들, 김혜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더 아래로 내려오면 김희애, 그리고 하희라, 이런 애들, 아주 야무지게 잘한단 말이야. 제대로 연기를 해요. 남자들도 마찬가지고. <베토벤 바이러스>를 같이 했지만 김명민 같은 경우 캐릭터를 대단히 깊게 연구하고 만들어냅디다. 자세도 진지해. 그런 배우들이 좋은 배우가 되는 거야.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거란 말이지. 단순히 돈 버는 스타의 개념하곤 다른 거야.
톱스타의 위치를 점하면서 좀처럼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배우들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죠.
연예인도 수익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으니까 이것 저것 다 하긴 해야 되는데, 저게 배우인지 연예인인지, 모델인지 구별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아. 배우는 아무래도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연극을 하든, 출연해서 연기를 함으로써 그 진가가 나오는 거지. 광고만 하면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단 말이지. 적절하게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제 연기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작품에 출연했으면 하는데 왜들 출연도 안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단 말이야. 결국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한 40대쯤 되면 그 동안 쌓아왔던 게 다 없어져버리는데.
<업>처럼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는 건 모든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 결과가 중시되고 과정이 간과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결과를 쫓아가면서도 과정을 무시하는 풍토가 그런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거야. 우리는 탁월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야. 개체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나라 똑똑하지. 능력 있고 잠재력이 있어. 스포츠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도 대체적으로 걸출하잖아요. 삼성을 일부로 띄우는 건 아니고 산업적인 측면에서 삼성의 기술력은 확실히 세계적인 거 아니오. 이렇게 훌륭한 우리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되는데 거기에 정치가 뒷받침을 해줘야 된다고. 사실 그 동안 목표만 향해서 뛰다 보니까 그냥 지나친 데가 많단 말이야. 기본이 약해졌다 이거지. 이젠 그런 걸 착실하게 다져나가잔 얘기야. 그런 바탕을 다시 다지는 거지. 과거 우리 때는 여러 가지로 분배의 문제가 있었단 말이야. 분배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요령을 써서 뒷거래를 한다거나 해서 그걸 채워 넣으려 했거든. 그래도 지금은 차이가 느껴진다 해도 대체적으로 잘 나온단 말이야. 그러니 이젠 차분하게 하나씩 인성 같은 부분을 잘 다져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선진국형 인격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나. 늘 우리 대학생들한테도 얘기하는데 ‘너희들 시집, 장가 가면 애들 잘 키워라. 인성을 바탕으로 해서 제대로 키워라. 어른 보면 인사 꼬박꼬박 잘 하는 아이들, 사회 질서 잘 지키는 아이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들로 키워라’ 어려서부터 잘 가르쳐야 된단 말이죠.
교육에 대한 문제도 항상 개선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육이란 게 사회 발전의 잠재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적 가치관은 지나치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이라는 건 학교와 가정이 일치가 돼야지, 학교 따로, 가정 따로 하면 안 돼요. 학교 선생한테 가서 애 벌 세운다고 따지고, 이딴 짓 하지 말란 말이야. 선생이 애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는 이상, 그건 참견하는 소리나 다름없지. 어디 선생님 귓방망이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그딴 놈이 어디 있냔 말이야. 그런 놈이 사회에 나와서 뭐가 되겠어. 가까운 나라에선 다 그렇게 하고 있잖아. 일본 같은 곳도 백 년의 교육적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고. 옳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이놈의 입시교육으로 집약돼서 나머지 교육은 지나치게 무시되고 있어요. 얼마 전에 교육부 장관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대학 가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게 기본 인성교육이다. 3살, 4살짜리 유아들의 인성교육부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유치원부터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초등학교로 가자 이거야. 이런 것도 관심을 좀 가지라고.
예전에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도 하셨습니다. 요즘 시국이 어지러운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안타깝지. 지금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하나의 문제점을 느끼고 있단 말이에요. 과연 국회가 저렇게 극단적인 두 개의 평행선으로 달려야 되는 건가. 한국의 정치 현실이 그런 건가. 지금 우리의 위상이 그 정도 밖에 안되나. 안타깝기 그지없단 말이에요. 중요한 부분은 뭐냐. 어쨌던 간에 우리가 사는 터전은 대한민국이고, 정치의 궁극적인 몫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대한민국 국민의 복지라고. 난 그 가치관엔 여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조건을 두고 왜 타협을 못하고 조정이 안되냔 말이야. 왜 무조건 상대한테 반대만 하려 하고, 왜 무조건 밀고 나가야 되느냔 말이야. 이젠 그 놈의 정치가 좀 선진화돼야 될 거 아니야. 과거엔 국민들이 정치 수준을 못 따라간다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정치가 우리 수준을 못 따라오는 거 같아요. 이런 부분에서 심각한 자기 반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아무래도 정치권과 국민들과의 소통이 좀처럼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몇 가지 정책들이 논쟁 사항이 되고 있습니다.
정책이라는 걸 오픈해서 같이 검토하자는 거야. 지금 문제가 되고 있지만 비정규직법이나, 미디어법이라던가, 4대강 문제라던지, 그게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고 구체적으로 까보자는 거야. 국민들한테 구체적으로 설득을 해보라 이거야. 어느 한쪽의 논리만 주장할 수 없는 거 아냐. 상호간의 장단점이 다 있을 테니까. 국민을 설득하도록 만들자 이거야. 그렇게 가야지, 무조건 된다, 안 된다, 이게 뭐냔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소위 A라는 시스템이 집권했을 때 어느 정도 이룬 발전이 있다면 그 다음에 정치 입장이 다른 B라는 시스템이 집권한다 해도 그 바탕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이게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죄다 엎어버리면 맨날 제로섬에서 시작된단 말이야. 이건 국가발전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거지.
아무래도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반대로 정치는 더욱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히려 정치가 우리 사회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이젠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말이야. 이젠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어. 그럼 시야를 돌려서 밖으로 평정을 해나가야 될 시기란 말이야. 그러려면 인위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가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다양한 역량 가운데 좋은 역량들을 결속하고 합의해서 다 같이 일률적으로 밀고 나가야 될 거 아니야. 거기에 정치가 뒷받침을 해줘야 될 텐데 뭐 하는 짓거리냐 이거야. 그것도 집권을 안 해봤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 집권해 봤잖아. 이제 정권교체도 가능해졌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책 개발을 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라고 국민들이 선택한 거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국민들이 선택할 가치가 없어지고, 목표가 없어졌다면 이건 대단히 한심한 얘기가 돼버린 거란 말이야. 그러니 이제 정치가 좀 선진 수준으로 가야 하지 않겠냔 말이지.
한예종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한예종 사태에 대해서는 내가 내용을 잘 몰라서 큰 관심을 두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정부 차원의 자체적인 판단이 문제가 된 거지. 일단 나도 정치라는 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야. 그런데 그것도 사실 과거 정권에서 코드 정책으로 싹 입수해버린 결과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고. 앞의 정권에서 한 일도 따져야 한다 이거야. 과거 보수 언론에서도 문제를 지적했지만 한예종도 그렇고, 영화진흥위원회도 그렇고, 그게 예전에 잘 됐다면 누가 뭐라고 말 못한다고. 그런데 결국은 부실하단 말이지. 그러면 이제 새로운 정권에서 문제를 따진단 말이야.
경험적으로 느끼신 바라도 있나요?
내가 중랑구에서 문화원장을 할 때 얘기를 좀 해보자면 그 당시 구청장이나 위원들은 다 내 반대쪽이었어요. 내가 중랑구에서 아직까지 사회복지회 회장을 하면서 이 지역의 복지시스템을 총괄하고 있었지만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하는 것도 싫어해. 특히 이상수 (국회의원) 같은 사람은 내가 정치를 더 이상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얼씬거리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야. 내가 지역 도내이션(donation)으로 임기를 유지하면서 그때까지 5년을 하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구청장은 어쩔 수 없이 날 모신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성을 냈어. "염려하지 마라. 내가 이걸로 정치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랬지만 이미 내부적인 실무 인선은 자기 식구로 만들어 놨어. 사무국장부터 말단직원까지 자기 식구들로 다 박아놨다고. 나만 외톨이야. 그런데 내가 5년 동안 이 친구들하고 일하다 보니 이 친구들이 결국 나한테 다 동화되더란 거야. 그런데 구청장이 다시 내 쪽으로 바뀌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젠 이 친구들이 내 쪽에서 눈에 가시처럼 보이니까 또 다시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 내 아래 사무국장이 우리 쪽이 아니라고 쫓아내려고 드는 거지. 그래서 내가 동반으로 관뒀다고. 왜냐. 이 사람 열심히 했다 이거야. 나하고 정치 입장이 다르지만 열심히 하면 내가 분명히 알아줘야지. 내 밑에서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했는데 이제 우리 쪽에서 자기네 식구를 동원해야 한다고 싫어하는 거야. 새로 온 구의원 놈들이 뻣뻣하게 군다고 싫어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씹어서 갈아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왜 갈았냐?’ 그랬더니 어쩌고, 저쩌고, 뭐라 그래. 그래서 “내가 5년을 데리고 있던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으면 나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니 나도 관두겠다.” 이러고 나와버렸지. 나는 내 돈으로 밥 먹고, 내 교통비 가지고 다녔지, 거기서 판공비 백원 한 장 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운영하는 나한테 하자가 없는데 왜 내가 5년을 데리고 있었던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자르냔 말이야. 사무국장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왜 나만 1년 더 하느냐고, 할 수 없다고 동반 사퇴했어. 그러니 지들이 깜짝 놀라지. 그럴 줄은 몰랐으니까. 오히려 내가 오냐, 그렇게 해라. 그럴 줄 알았지.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실무적인 인사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자리잡지 못하고 정치적 파워가 모든 구조를 좌우해버린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스스로가 코드 인사로 참여했다고 생각되면 정권이 바뀔 때 그냥 나와야 되는 거야. 임기가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앉아있으면 안돼. 자기 역량을 잘 판단해서 자리를 잡아야 된단 말이야. 과연 내가 여기서 적임자인가. 내가 지금 여기 순수하게 능력으로 들어온 것 같나. 만약 코드 인사로 들어왔다 싶으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그 이전 정권하고 신의를 지키는 거지. 너는 나가도 나는 결단코 고수해야겠다. 이런 매너라면 좀 촌스럽다는 거야. 난 거기서부터 후유증이 나온다고 본다고. 새로 올라온 놈들은 바꾸고 싶지. 말 안 들으니까. 내각이 바뀌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임기제를 무시하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정권이 바뀌어서 코드가 안 맞은 사람이라면 그냥 나와야지. 그런 원칙이나 양식이 있으면 별 문제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그 부분에선 정리가 안 된다는 건 소위 테크니컬(technical)한 실무진이 딱 정확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거야. 내가 볼 땐 윗대가리들이 갈려도 실무진은 그대로 있어야 된다는 거지. 그런 시스템으로 빨리 발전해야 된다고. 그러려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는 기준이 생겨야 되는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늘 얘기하는 거라고. 저번에도 경기도에서 고위공무원 특강을 해달라 해서 그때 이런 얘길 했어. ‘삼국지’만 읽어봐도 거기 다 나와있다. 리더가 되려면 우선 용기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지혜가 있어야 된다. 그 위에 필요한 게 덕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그리고 그걸 다 갖춘 뒤엔 운이 따라줘야 된다 이거야. 삼국지를 보면 다 나오잖아. 유비가 말이야. 자기를 죽이려던 적장이 붙들려와도 명장이면 잘 모시고 다스려서 자기 사람 만들잖아. 결국 그 사람이 평생을 같이 하고. 이게 치덕이라 이거야. 정치 논리?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박사 논문을 써도 그 이상의 답이 없다고. 제갈공명이 젊은 선비인데 일국의 지도자가 삼고초려를 하잖아. 우리 같으면 와라, 가라, 할 텐데 삼고초려를 해서 그 사람을 모신다 이거지. 이게 인재등용의 안목이라 이거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자꾸 모신다고. 그 사람이 칼싸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그 덕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만드는 거야. 수호지도 마찬가지지. 송강은 조그마한 글방 선생이라고. 그런데 그 밑에 백팔호걸이 모이는 것도 덕으로 인재들을 끌어안은 거란 말이야. 옳은 일을 해서 나가는 거란 말이지. 원칙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아무래도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런 원칙을 얼마나 잘 뿌리내리느냐가 중요할 테니까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공직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당분간은 개인의 행복권을 포기해야 돼. 행복 누리고, 권세 누리고, 이런 모든 걸 포기하고 오로지 내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자기를 희생해야지. 그렇게 국민을 감동시켜라 이거야.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단 한 명도 국민을 감동시킨 대통령이 없어. 노무현도 마찬가지라고. 51%로 당선됐지만 49%의 반대가 있다면 이게 절대적인 반대야. 편을 가르면 이게 평생 반대가 된다고. 그래서 고생을 한 거야. 그 중에서 10%라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는 거야. 대통령이 되면 나를 격렬히 반대한 놈도 국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런 안목에서 접근해야 된다 이거야. 지금도 그걸 못하고 있잖아.
지금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촬영 중이고, 가을 즈음에 <거침없이 하이킥 시즌2>도 시작할거라고 들었습니다. 올해도 계속 바쁘시겠네요.
그리고 아마 겨울에는 작년에 찍으려다 못 찍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거 들어가야 돼. 그것 때문에 내가 SBS프로그램도 하나 포기했거든요. 9월 초에 시트콤도 시작할 거고. 그렇게 두 작품을 하게 되면 거의 풀(full)로 뛰어야 돼. 그러면서도 이제 저녁에 비는 시간엔 학생들과 씨름해야지. 쉴 시간이 없어.
처음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시트콤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던 경험이 어쩌면 오랜 연기 인생에 있어서 파격적인 결심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어쩌면 이번에 애니메이션인 <업>의 더빙을 결정한 것도 파격적이라 느껴질 만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이번에 했던 고민은 먼저 거하곤 또 다른 거란 말이에요. 구성도 다르고, 인물도 달라지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작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대본을 봐야 되겠지만 이전 것과는 달라져야 된단 말이야. 그걸 연구하고 있는 거니까. 시트콤이라는 게 아무래도 외형적 설정도 필요하고, 순수한 드라마와 달라요. 나중에 감독과 구체적인 상의를 해야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외형의 변모를 가져올 것인지 고민이고, 결국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된단 말이야. 아무래도 잘못 표현하면 먼저 작품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그래서 되도록 예전과 달리 표현해야 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요.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작가나 연출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에요. 그 동안에 그 사람들의 업적이 있고, 내가 <하이킥>을 하면서 충분히 상업적 코미디를 잘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내가 믿는 거지.
이제 연세가 고희(古稀)를 넘기셨는데 아직도 연기자로서 어떤 꿈을 꾸시나요?
지금은 아직까지 날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필요로 한다면 그 필요에 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맞춰나가야지. 그래서 아직은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 해야 될 과제들이 자꾸 있으니까. 다만 나이 먹었으니까 이제 앞날을 장담은 못하지만 지금 내 컨디션으로 봤을 때 아직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 나이가 되면 문제가 되는 게 대사 암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기도 하고, 점점 이제 신호가 오는 거야. 녹화현장에 가서도 똑 같은 곳에서 4~5번 NG를 낸다거나 이러면 곤란하구나 싶어지겠지. 연극을 2시간씩 끌고 나갈 때, 혹시 이 대목을 다시 봐야 되나, 이런 위기를 느끼면 이제 관둬야 되는 거야. 그 전까진 필요하면 계속할 생각이야.
90년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일찍 갔더군요.
제가 빠른 90년생이에요. 원래 지금 2학년이 됐어야 했는데 <반두비>를 찍느라 휴학을 해서 이제 2학기에 복학하려고요.
연극영상학 전공인데.
예. 연출 배우고 있어요.
연기가 아니라 연출 지망생인가요?
원래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요. “연기는 대학가서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시작할 수 있는 길도 있다지만 만약 대학부터 그 길을 선택했다가 나중에 그 길이 너랑 맞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그만 두게 됐을 땐 네가 할 게 없지 않냐.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해라.” 하셨죠. 그래도 관심 있는 분야가 이 쪽이다 보니까 연기가 안 된다면 연출 쪽으로라도 가자 싶어서 이렇게 됐어요.
연극영화과에 가는 건 반대하셨지만 연출 공부는 반대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분야에 대한 반대는 아니셨어요. 공부를 하라는 거죠.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데 공부를 벗어나서 다른 걸 하는 건 아니라고, 네가 아직까지 부모 밑에 있으면 부모님 말씀을 따르라고 하셨어요. 연기한답시고 괜히 애가 붕 떠서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만 낭비할까 봐 걱정되신 거 같아요. 그런데 연출과 간다고 하니까, 거긴 시나리오 쓰는 것도 배우고 그렇게 공부하는 바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기본적인 원칙을 중시하시는 편이신가 봅니다.
맞아요. 그런 걸 중요시 하세요. 저는 어릴 때 아빠의 그런 면들이 이해가 안 됐어요. 청소년 때나 사춘기 때. 이런 말 하면 안될 거 같은데, 아빠가 너무 틀에 박히신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다니다가 연기라는 사회생활을 하는 셈이잖아요. 부모님이 제어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고 제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되는 사회 생활을 하는 건데, 그러다 보니 아빠가 하신 말씀이나 저를 키우신 방식이 옳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거 같아요.
어머니께서도 반대하신 건가요? 그리고 영화에 출연한다니 아버지 반응은 어땠나요?
엄마는 전적으로 해주시려고 하거든요.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던 건데 대학교 와서 영화도 찍고, 그렇게 조금씩 하니까 좋아하세요. 그래도 아빠는 이제 학교 돌아가면 학업에 열중하라고 하시죠. 엄마는 그냥 신기해하고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친구분들 만나면 가끔씩 얘기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딸 영화 나오고, CF도 어디어디 나왔다고. (웃음)
부모님께서 혹시 <반두비>를 보셨나요?
부모님은 아직 못 보셨어요. 제가 장난으로 엄마한테, “보고 싶어?” 그랬더니, “아니, 별로.” 그러셔서, “보고 싶으면 돈 주고 사서 봐.” 그러니까 됐다고, 안 보겠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아무래도 표를 드려야 보실 거 같아요. (웃음)
조금이라도 연출 공부를 한 셈인데 그 덕분에 생겼다고 할만한 변화는 없을까요?
연출 쪽을 공부하다 보니까 스태프 분들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알 거 같아요. 제가 1학기 때 조명을 배웠는데 그 무거운 걸 나르고, 수업 다 끝났지만 조명이 다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찍을 때 스태프 분들에게 조금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다만 아직 깊게 배운 게 없어서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시선이 달라졌다거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아닌데 작게나마 스태프 분들의 노력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오디션을 통해서 <반두비>에 출연하셨죠.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제가 맨 처음에 출연한 <사람을 찾습니다>의 이서 감독님이 신동일 감독님과 친하세요. 그래서 이서 감독님이 저를 추천해주셔서 그렇게 처음 뵙고 시나리오를 본 다음에 <반두비> 오디션을 본 거에요.
신동일 감독님은 조금 섬세한 편이시죠.
사람 눈을 안 쳐다보시잖아요. 그죠? (웃음) 감독님과 처음 미팅을 했을 때, 감독님께서 제 눈을 안 쳐다보시는 거에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생각했어요. (웃음) 그렇게 사적으로 만나면 그러시지만 현장에서는 영화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오히려 민서 캐릭터를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죠.
그럼에도 신동일 감독님의 영화는 상당히 놀랍게도 세죠. 꽤나 직설적인 발언들도 등장하고요.
그 직설적이라는 걸 누구는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모든 영화들이 밝은 사회만 그리는 건 사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가상으로나마 영화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반두비>란 영화는 아닌 거죠. 정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고 행동하잖아요. 그런데 감독님 혼자서 글을 쓰신다거나 저 혼자서 그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전혀 힘을 낼 수 없잖아요. 그 말에 담긴 메시지가 전달되기 힘든데 이렇게 매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건 효과적이라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가려운 부분도 긁어줄 수 있고, 현실에 없는 희망을 가식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진실된 희망을 주잖아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일단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편차는 있지만 신동일 감독님의 두 전작이 공통적으로 무거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란 점은 명확하죠. 그만큼 <반두비>도 무거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진 않았나요?
<방문자> 상영할 때 감독님께서 시사회 표를 주셔서 보러 갔던 적이 있어요. 생각 없이 가서 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약간 무겁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래서 <반두비>가 청소년에게 많이 보여지길 원하는 영화이니만큼 <방문자>처럼 무겁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찍게 됐죠. 그런데 <반두비>는 아무래도 여고생이 주인공이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정말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정말 유쾌하고 밝은 영화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 두 작품에 못지 않게 좋은 성과를 거두신 거 같다고 축하 드렸어요. (웃음)
올 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반두비>가 2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전주에 못 갔는데 폐막 전날이었나, 검색어에 말 오르는 거에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신기했죠.
그전에 이미 백진희 씨에겐 <반두비>가 첫 주연작이라는 점에서 이미 의미가 분명한 작품이었겠죠.
아무래도 첫 (개봉)영화에서 첫 주연까지 맡아서 뜻 깊은 작품이죠. 사실 기대하지 않고 오디션을 봤거든요. 그런데 주인공이 되니까 막상 부담감도 밀려오더라고요. 찍는 중간중간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나중에 완성본을 보고 나서 내가 나한테 부끄럽지 않을까 의심을 많이 했죠.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스스로 그런 의심을 극복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네요.
그런 의심이 많이 드니까 집중을 못하겠던데요. 하나를 하더라도 내가 진짜 잘 하는 게 맞나 싶고. ‘진짜 민서라면 이렇게 행동했을까’, 의심이 드니까 정말 작은 문제도 더 크게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감독님께도 많이 여쭤봤죠. “감독님, 민서는 왜 이걸 이렇게 해요? 이렇게 하면 아니지 않아요? 보통 아이들이 이렇게 할까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민서는 특별한 아이니까 이렇게 한다고 하시는 거에요. 초반에 많이 의심했는데 점점 연기를 하면 할수록 민서라는 캐릭터에 제가 동화돼서 그런 의심이 잦아들었어요.
‘동화’됐다는 말이 마치 캐릭터에 빙의됐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는군요. 자신도 모르게 때론 민서로서 행동하고 말하게 됐다는 의미겠죠.
그런 게 연기의 매력이고 자꾸 하고 싶게 만드는 거 같아요. 처음 시작했을 땐 의문으로 시작하거든요. ‘민서는 왜 이렇게 행동하지? 왜 얘는 이 상황에서 이렇게밖에 못할까. 나 같은 보통 아이나 아무리 튀는 아이들도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이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고 촬영이 계속되면서 그냥 제가 민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오는 거에요. 처음에 돌 던지는 장면도 저는 좀 그랬거든요. 부잣집에 돌 던지고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집안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까 싶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되니까 정말 초인종 벨을 누르고 반대편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 정말 욱해서 돌을 던지게 되는 거에요. (웃음)
<반두비>에서 민서란 아이와 백진희 씨의 거리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더군요. 영화만 보고 이야기하자면 마치 민서가 백진희 씨 같더군요. 지금도 조금 걱정됩니다. 화나면 영화처럼 손에 쥐고 있는 거 아무데나 던져버릴까 싶어서. (웃음)
아니에요. 영화만 그럴 뿐이에요. (웃음) 일단 저는 민서처럼 극단적이지 않아요. 학교를 그만둔다던가, 카림같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면을 빼고 보면 성격적으로 약간 비슷한 면이 있을지도 몰라요. 민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고 쉽게 욱하는 다혈질 소녀잖아요. 그런 면이 비슷한 거 같아요. 저도 울분을 못 견디거든요. (웃음) 그런 성격이 비슷해서 연기가 수월했던 거 같아요.
민서가 등장할 때, 촛불소녀 부채를 들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과외비를 이야기하며 민서 주변에 서 있던 소녀들과 명확히 대비를 이루는 이미지입니다. 민서가 또래들과 차별화된 사회적 의식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랄까요.
저도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시사프로를 즐겨봤기 때문에 민서가 낯설진 않았어요. 민서는 세상에 무관심하듯 무대포인 소녀잖아요. 그런데 민서의 무대포식 행동이 결국 올바른 행동이죠. 요즘 너무 사교육 열풍이 심해서 애들 모두 영어학원에 다니는데 민서가 이를 부정하는 건 형편이 안 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에 저항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네들이나 잘해’라는 대사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잖아요. 물론 제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저항할만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관심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중엔 집까지 쳐들어갔고요. (웃음) 민서는 상당히 터프한 다혈질 소녀에요. 본인은 화가 나면 어떤 편인 것 같아요?
화가 나면 말을 안 해요. 화가 풀릴 때까지 상대한테도 절대 말하지도 않거든요. 집에 들어와서 부모님이 말 시켜도 말을 안 하죠. 화 푸는 방법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면 울면서 화를 풀 때도 있어요. 막 심하게 분출하는 스타일은 못돼요. 화를 내면 더 커질 걸 알기 때문에. 욱하는 게 심해서 제어가 안될 때가 있거든요. (웃음)
부모님께서도 상대배우를 아실 수 밖에 없었을 텐데 반응이 어떠셨나요?
아셨죠. 막 인터넷도 검색해보시고 그러시는데. (웃음) 처음엔 영화 찍는다고 좋아했는데 상대배우가 하얀 사람도 아니고, 까만 사람이라니 어떻게 연기할 수 있겠냐고, 솔직히 부모님께선 걱정하셨죠. 그렇다고 말씀을 많이 하신 건 아니고 결국 너한테 주어진 거니까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그 분도 자기 역할 주어진 데에서 열심히 할 테니까 너도 그 분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 맡은 바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죠.
<반두비>는 어쩌면 백진희 씨에게 외국인 연기자와 호흡을 맞췄다는 점에서도 두고두고 특별하고 생소한 경험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외국인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 일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도 제 자신에 대해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냥 길에서 마주치는 똑 같은 사람이지,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계속 마주치고 밥도 같이 먹고, 연기도 하고, 그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니까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가 영화 찍기 두 달 전부터 준비를 들어가서 그 동안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마붑 씨가 한국말을 잘해요. 얘기하다 보니까 다를 게 없다는 걸 느꼈죠. 저도 모르게 제 안에 편견이 있었던 거 같아요. 처음엔 좀 멀리하려고 그랬을 거에요. 그런데 같이 지내다 보니까 어느 새 저도 모르게 그냥 가까워져 있고, 그래서 정말 피부색만 다르지 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사람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죠.
한국말을 너무 잘 해서 신기했어요. 겉보기엔 딱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 하시니까 점점 익숙해지고, 그냥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서로 다른 생김새를 보고 느끼는 이질감만큼이나 문화적 차이도 개인의 잠재적인 편견을 만들 수 밖에 없겠죠.
그게 어려운 거 같아요. 아무래도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 만났기 때문에 생각이나 언어도 같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걸 깨는 게 상당히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시간을 갖고 차츰차츰 시도해야죠.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물 흘러가듯이 계속 얘기하고, 그렇게 1분 볼 거 10분 보고, 10분 볼 거 30분 보게 되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주는 거 같아요.
당사자만큼이나 감상자들도 독특하다 느낄만한 캐릭터의 어울림이죠.
어떻게 보면 남들과 다른 시작점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이게 이슈가 됐으면 좋겠어요. (웃음) 물론 이슈가 되긴 됐어요. <반두비>에 대한 안 좋은 글들이 벌써부터 너무 많아서요. (마붑 알엄이) 협박 전화도 받으셨다고 인터뷰에 말씀하신 것도 봤는데 그래서 너무 속상해요. 물론 이주노동자 분들 가운데 나쁜 사람도 있겠죠. 한국사람이라고 다 착하고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일부분만 보고 모든 사람들을 평가한다는 건 아니지 않나요. 영화를 보시고 나서 생각을 해보셔도 늦지 않을 텐데 미리 단정짓고 나쁜 글들만 써버리면 다른 사람에겐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죠. 분명히 내용이 뭔지도 자세히 모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러는 거 같아요.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말이 많죠.
보지도 않으시고, 그냥 지레짐작으로 저럴 거다 하시나 봐요.
어쩌면 본인도 <반두비>를 통해 직접적인 경험을 거친 덕분에 얻은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제가 <반두비>를 찍지 못했다면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현장을 갈 일도 없었을 거고, 그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냥 듣기만 했다면 지금만큼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 거에요. 막상 가서 보니까 정말 작업환경이 열악해서 깜짝 놀랐어요. 일하다가 쉬는 장소가 있는데 거기 벗어놓은 신발에 바퀴벌레가 가득 들어가있는 거에요. 냄새도 심해서 머리가 아플 정도고요. 그 분들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거죠. 저는 그 분들이 그렇게 일해주기 때문에 저희 사회가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보통 대한민국 청년들은 3D업종에 종사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 분들이 와서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 업종에 종사해서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거죠. 물론 그 중에 나쁜 분들도 계시겠죠. 사람이 살면서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다 나쁜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두비>가 청소년 불가 판정을 받아서 본인도 속상하겠어요.
사람들이 <반두비> 검색해보고 19세라는 것만 봐서 그런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너무 속상해요. 그런 내용 전혀 아닌데,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정성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19세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을 박아버리시는 분이 있더라고요. 몰랐는데 오늘도 그런 분을 만났어요. 덜컥했죠.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연기를 하지도 않았고 감독님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배우, 혹은 연예인으로 살다 보면 이상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루머에 휩쓸리는 경우도 있고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책을 읽었어요. 제목이 <루머의 루머의 루머>인데 여자주인공이 루머에 휩싸여서 결국 자살을 하거든요. 그런데 자살하기 직전에 테이프를 녹음해요. 자살에 동기부여를 한 사람들한테 다 한마디씩 남겨서 그걸 돌린다는 내용이죠. 그걸 읽고 나니까 무서운 거에요. ‘무슨 이런 걸로 죽을 생각을 해’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유가 모이고 쌓이다 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정신 똑바로 차려서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을 제대로 갖고 있으면 덜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만큼 더 강해져야 하는 거 같아요.
아직 사회적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여자로서 느끼는 불합리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반두비>에서 민서를 연기하면서 어떤 쾌감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고요.
아무래도 여자는 약자라서 보호받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 당하고 무시 받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반두비>에서는 교복 입은 16살짜리 어린 꼬맹이가 세상을 진두 지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빠보다도 나이 많으신 분 따귀를 때리고, 그 집에서 행패도 부리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카림이라는 청년을 휘어잡기도 하죠. 항상 여자는 약자고, 뒤에서 보호받아야 되고, 눈치도 많이 보잖아요. 일단 남자가 우선이라는 가부장적인 생각들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희열을 느꼈어요.
<반두비>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영화에 먼저 출연했죠. 그 작품에 출연하게 된 경위도 궁금하군요.
CF를 통해서 얼굴이 조금 알려졌는지 ‘애니콜 시보소녀’를 찾던 매니저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을 만나게 되면서 저도 회사랑 계약을 했죠. 그분이 ‘너 나랑 일해볼까’ 하신 뒤에 그 분과 처음 미팅을 간 자리가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영화 오디션이었는데 딱 된 거에요. 너무 신기하다 싶은 마음으로 촬영을 했죠.
CF를 통해서 카메라를 먼저 접했지만 아무래도 영화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거에요.
전혀 다르죠. CF는 솔직히 대사보단 표정 위주니까요. 그리고 대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동기 부여가 다르잖아요. 얘가 이런 말을 할 땐 이유가 있는 거죠. 그 땐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나 봐요. 지금 보면 되게 웃기거든요. (웃음) 물론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걸 느끼는 거 같아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그 사람처럼 반응하고 행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캐릭터와의 거리감을 이해해야 하는 측면의 어려움도 있었겠죠.
민서가 갖고 있는 상처와 외로움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저와 정반대의 성장배경을 갖고 있으니까요. 저는 부모님이 두분 다 계시지만 민서는 어머니 밖에 없고, 민서는 외동딸이지만 저는 여동생이 두 명이나 있는 큰 언니거든요. 그리고 저희 집은 큰소리 한번 난 적 없을 정도로 단란하기 때문에 저에게 민서는 가족의 화목함을 모르고 자란 소녀처럼 불우해 보였어요. 제가 연기하면서 과연 그런 상처를 이해하고 제가 그런 면을 보여줄 수 있을지 불안했어요. 그런 상처 때문에 민서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건데, 내가 그런 걸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어쨌든 민서란 캐릭터가 저에게 주어진 이상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해야 했어요. 케이크 하나를 먹더라도 정말 민서가 이 케이크를 먹을지, 집에 싸가서 엄마를 줄지, 그 외로움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민서를 100% 이해하진 못했다 해도 반은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CF에 출연한 경위도 궁금합니다.
운 좋게도 길거리 캐스팅이었죠. 그리고 일단 사진심사가 먼저 올라간 다음에 감독님과 미팅을 해요. 카메라를 두고, ‘그 자리에서 해봐라’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촬영한 자료를 감독님과 광고주들이 같이 보시고 회의를 한 뒤에, ‘얘로 가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자료가 남아서 어쩌다 보니까 이를 통해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런 과정이 그 당시 본인에겐 상당히 놀랄만한 변화의 연속이었을 텐데요.
신기했어요. 그냥 맨날 공부만 하다가, ‘미팅 있습니다. 오세요.’ 그래서 갔다 오면 일주일 안에 연락이 와서, ‘촬영합니다.’ 그럼 공부하다가 촬영장 가서 촬영하고 오고. 그 순간엔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죠.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입시 공부하느라 힘들잖아요. 저는 공부를 별로 안 했지만. (웃음) 어쨌든 누구나 힘든데 그렇게 하루 이틀 정도 CF를 찍는 게 저한테 주어진 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늘에서 주어진 상. 정말 특별한 취미생활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걸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카메라 앞에 있으면 행복하고, 그래서 관심이나 호기심이 다 이쪽으로 쏠리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이전에 꿈은 없었나요?
음, 꿈이 없었어요. 아마 요즘 청소년 대부분이 그럴 거에요. 고등학교에 가서 꿈이 뭐냐 그러면, ‘꿈 없는데요. 그냥 대학교 가서 졸업 잘해서 공무원 시험이나 봐서 공무원이나 돼야죠.’ 대부분 이럴 걸요. 저도 평범한 학생이었고 특별한 꿈은 없었어요. 그냥 공부하라 그래서 공부했고, 시간 나면 친구들이랑 놀았고, 맨날 무의미하게 살았던 거 같아요.
하긴 요즘 초등학생에게 꿈을 물어봐도 서울대 진학이라고 답한다 하더군요. (웃음) 아무래도 어른들이 꿈꾸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한 탓이죠.
맞아요. 초등학교 때는 꿈이 많았는데 점점 현실이라는 걸 알아가면서 꿈이 사라지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제 동생이 저와 10살 차이 나는데 또 다르더라고요. 동생한테 꿈이 뭐냐고 했더니 없대요. “네 친구들도 그래?” 그랬더니 대부분 그렇다고. ‘또 다르구나’ 생각했죠.
저 어릴 때만 해도 꿈들이 거창했죠.
대통령? (웃음)
박사, 의사, 이런 것도 많았어요. (웃음) 사실 어릴 때 꿈은 어른의 눈높이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구체적인 꿈을 좇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현실성을 파악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지금은 세상이 각박하니까 중고등학생조차도 사회에 나가서 먹고 사는 길을 먼저 생각하는 건가 보죠. 그만큼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 환경이 학생들의 꿈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학교라는 공간이 그 시기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거 같아요. 공부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강압적으로 해야만 하는 게 돼버렸으니까. 또 우리나라 현실상 공부가 아니라 예체능처럼 다른 분야는 집안이 빵빵하지 않고선 할 수 없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건 대학가서 해라, 이런 식이니까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에 너무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다고 해야 하나.
주변에서 이렇게 CF도 찍고, 영화도 찍었다 그러면 부러워하는 친구는 없나요?
아니요. 여자애들이 샘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는데, (웃음) 그런 말은 안 하더라고요.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직설적이에요. “너는 그냥 볼 땐 괜찮은데 TV에서 보면 얼굴이 왜 그렇게 크게 보이냐”고 그런 말이나 하지 부러워하진 않더라고요. (웃음) 각자 자기만의 꿈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열심히 하니까 그럴 지도 모르죠. 겉으로 내색하는 친구는 없어서 속마음까진 모르겠어요.
반대로 시기하는 친구는 없었나요?
있었어요! 제가 예전에 공익광고 찍어서 학교에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거기다 낙서를 엄청 많이 한 거에요. (웃음) 어린 마음에 새벽에 지우러 갈 수도 없고. (웃음)
CF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됐고, 그 다음은 연기에 도전한 셈이죠. 진지하게 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또 궁금해지는군요.
처음엔 호기심이었죠. CF로 먼저 시작하면서 조금씩 카메라 앞에 서는 시간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얼마나 신기해요. 공부만 하던 학생이 CF찍고, TV에 나오고, 돈도 벌고. (웃음) 그렇게 조금씩 호기심이 커져서 관심이 되고, 점점 연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고2, 고3때부터 강한 계기가 생겼던 거 같아요. 제가 고3때 ‘애니콜 시보소녀’ CF를 하면서 해외촬영을 했는데 연기를 못한다고 감독님한테 혼났거든요. 그게 컸던 거 같아요. ‘내가 연기를 하면 어떨까.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연기가 해보고 싶은 거에요.
주눅이 들어서 일찍 단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 보면 민서만큼이나 오기가 만만찮은 성격인가 보군요.
그런 점이 민서와 비슷한 거 같아요. 욱해서 오기가 발동하니까, ‘나도 잘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포기하면 어떡해요. 아직 어린데. (웃음) 세상에 쉬운 일은 없잖아요. 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걸 겪으면서 견뎌내고,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거니까. 그렇게 결국 잘 되면 얼마나 좋아요.
처음으로 스크린에 뜬 자신의 얼굴을 봤을 텐데 기분이 어땠나요?
실망스럽죠. (웃음) 그냥 <반두비>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어요. 오디션장에 예쁜 친구들도 많이 왔을 텐데 감독님은 왜 나를 썼을까. 전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요. 오디션장 가면 예쁜 친구들 정말 많거든요. 촬영하면서 한동안 잊어버렸는데 큰 스크린으로 제 얼굴을 보니까 다시 한번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고치고 싶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한 두 군데가 아니고. (웃음)
아무래도 얼굴 예쁜 사람 순서대로 배우를 시킨다면 지금 현재 훌륭하게 인정받는 배우 가운데서도 그만 두셔야 할 분이 많을 걸요. (웃음) 아무래도 백진희 씨가 신동일 감독님이 찾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사람이었겠죠. 전 영화를 보면서 민서의 심드렁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는데 백진희 씨가 아니었다면 그런 얼굴이 아니었겠죠. (웃음) 어쩌면 자신도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 알지 못했던 버릇이라도 찾아내지 않았을까 궁금한데요.
있죠. ‘나한테 저런 얼굴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내가 저렇게 연기했구나’ 깨닫기도 하고.스크린으로 보여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게 많이 느껴져요. 민서가 아니라 백진희가 보였던 장면도 있어요. 노래방에 카림이랑 같이 가서, “엄마, 특실 비었지? 2시간만 넣어줘.” 이 때, (테이블을 두들기면서) 이렇게 딱딱 치고 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그냥 한 거에요.
계산하고 의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행위들이 그냥 감지된다는 거죠.
저도 모르게 나와요. 그 말을 하고 나면 이런 행동이 이어지고, 그게 되게 신기했어요.
아직 경험적으로 백지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경험적인 자극의 강도도 크게 느껴질 수 있겠죠.
그 하나하나를 잘 기억해두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배우가 되려면 모든 반응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반응에 대해서 기억해두면 다음에 이와 비슷한 반응이 왔을 때 그 반응과 비교할 수 있겠죠. 살짝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공통점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걸 항상 기억하고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본인은 사실 적은 경험이라고 느끼고 있는 반면 주변에 자신의 경력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CF를 찍고,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한 시선을 둘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스스로 그런 시선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
대학교 가서 처음 친구들 사귈 때 특히 그랬어요. 제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알려지니까 친구들이 다르게 보는 거에요. 처음에 그걸 견디기 힘들었죠. 왜 그럴까, 나는 아직 이름도 안 알려졌는데, 버스타도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저럴까, 생각했죠. 인터뷰는 제 속에 있는 깊은 생각까지 다 얘기할 수 있어서 좋은 거 같아요. 아무래도 친구들과 얘기할 땐 이런 대화를 할 수 없거든요.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건 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단 시나리오 받고 놀랐어요. 성매매하는 곳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장소가 있는지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이게 뭐에요?” 물어보고 이런 저런 설명을 듣다가 굉장히 놀랐고, 걱정도 많이 됐어요. 그런데 너무 그 부분에 염두를 두다 보니까 영화 전체가 안 보이고 그 장면만 보이게 되더라고요. 감독님께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된다고 말씀드리고 대화도 많이 나눴고요. 그런데 감독님이나 스태프들이 아무리 신경 써준다 해도 해내는 건 제 몫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힘들었죠. 하고 나서도 좀 그랬고. (웃음)
남자들이 징그럽진 않던가요?
아니요. 다행히 그 정도는. (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나 됐나요?
이제 1년 넘었으니까 2년째죠.
약 1년 만에 다시 교복을 입게 된 셈인데.
저는 고등학교 때 사복을 입어서 교복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아, 그럼 중학교 이후로 교복을 처음 입는 건가요?
4년 만에 입는 거죠. 그래서 교복 입는 거 좋아요.
본인 나이보다 어린 여고생 역할을 연기한다는 건 어떤가요? 아직 그 당시로부터 많이 지난 나이가 아니라서 그리 어색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는 아직까진 교복 입고 학생역할 하는 게 잘 맞는 거 같아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성숙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이 대가 있는 역할을 지금 하기엔 버겁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 학생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20대 여대생 같은 경우도 아직은 무리가 아닐까 싶어요. 솔직히 대학교도 한 학기만 다녀봤기 때문에 여대생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죠. 외적으로도 성숙해져야겠지만 동시에 내적으로도 커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겠죠. 도전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괜히 섣부르게 못하는 걸 할 순 없잖아요. 아직은 자신도 없고, 지금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겠죠.
독서 좋아하세요?
예. 책 읽는 거 좋아해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말을 잘할 가능성이 많더군요.
아, 저 말 잘 못하는데. (웃음)
자기 주장이나 주관이 뚜렷한 거 같아요. 사실 요즘 학생들 여건상 독서가 쉬운 취미는 아닐 텐데요.
요즘 학생들은 책 많이 못 읽을 걸요. 문제집 보는 시간이 많지, 책 읽는 시간은 적을 거에요. 저는 최근에 <반두비>때문에 휴학을 해서 남는 시간도 대부분 책 읽는 시간으로 보냈거든요. 어릴 때와 다르게 느끼는 것도 많아진 거 같아요. 간접적으로 많은 걸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으니까.
배우로서도 간접경험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는 개인적인 범위 내에서 가능한 취미죠. 그만큼 개인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공간을 중시하는 성격이 아닐까 예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저는 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적인 사람 같아요. 개인적인 활동을 주로 하거든요. 생각해보면 뭔가 좋아서 환호한 적도 얼마 없거든요. 남들과 소란스럽게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어쩌다 친구를 많이 만나도 4~5명 정도 모여 앉아서 수다나 떨고, 그게 다에요. 책 읽고 혼자 생각할 때가 많아요.
자신의 캐릭터나 작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군요.
작품을 하나 하면 얻는 게 많은 거 같아요. 한 작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거든요. 얘는 이런 가정 환경에서 살았지만 얘는 어땠을까, 이렇게 사람에 대한 분석을 많이 하기도 하고, 또 아무래도 감독님과 대화하려면 너무 애 같아선 안될 거 같단 생각도 들었어요. 제 자신에 대해서 저도 모르게 점점 생각을 깊게 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까 생긴 것과 달리 속이 깊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웃음)
연기가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없나요?
사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처음 본 사람하곤 거의 말을 못해요. 대화를 이어가지도 못하고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그런 게 조금 없어진 거 같아요. 물론 아직도 그런 면이 많이 남아있죠. 잘 모르시는 분들은 화났냐고 묻는 분들도 있어요. 뚱한 표정으로 있으니까. (웃음) 사람 대하는 게 어려워요. 게다가 다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니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괜히 낭패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조용해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혼자 있을 땐 더 정적인 거 같아요. 사람들 대하느라 힘들었던 시간을 혼자 있는 시간으로 보상받겠다는 생각이랄까?
어쩌면 더 변할지도 모르죠.
잘 모르겠어요. 그냥 책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좋아서 계속 이런 식으로 갈 거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요즘은 사람을 안 만나도 대화할 수 있는 창이 너무 많아요. (웃음)
대화라기 보단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자기가 가진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을 때 말의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만약 이렇게 인터뷰로 만나지 않고 사적으로 만났다면 주제를 갖고 만난 게 아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는 기자님이 물어보시면 저는 답하고, 또 물어보고, 이런 식의 대화가 편하고 좋아요.
<반두비>에서 민서가 주유소 사장님에게 가불을 요청하면서 거짓말로 쌍꺼풀 수술 때문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죠. 아까 장난처럼 성형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정말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나요?
저도 조금 하고 싶긴 하죠. (웃음) 그런데 눈은 정말 고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요즘 다들 쌍꺼풀 있는 눈들이잖아요. 물론 안 그런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 그래서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런 얼굴이 되기 보단 저만의 개성을 확실한 매력으로 둔 얼굴을 갖고 싶거든요. 그리고 그런 개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눈이 아닐까 싶어요.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께서 눈 하나로 살아온 세월이나 지금 하려는 이야기를 다 표현하시잖아요. 정말 그런 눈을 닮고 싶어요. 전 외꺼풀이라 깊은 눈매는 아니지만 그래도 외꺼풀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저는 눈만은 절대 고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반두비>를 통해 배우로서 시작점을 출발한 셈입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어떤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지점일지도 모르고요.
깊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대사 한마디를 던지더라도, 의미? 깊은 의미를 던질 수 있는 그런 것. 김혜자 선생님의 눈빛 반만 따라가도 성공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혹시 롤모델이라고 말할 만한 배우가 있나요? 방금 말한 김혜자 선생님?
롤모델은 김미숙 선생님. 눈빛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지잖아요. 여자로서도 닮고 싶고, 피부도 너무 좋으시고. (웃음)
관록 있는 분들을 동경하시는군요. 만족하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겠어요. (웃음)
그 정도 나이에 그 정도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워요. 아무래도 연기적인 부분이 많이 보이나 봐요.
직접 연기를 해봤기 때문에 좀 더 실감나는 건지도 모르죠.
사실 예전엔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걸 새삼 깨닫게 된 거죠. 일단 저런 감정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하나씩 깨우쳐 갈 수 있었던 과정인 거 같아요.
민서처럼 고등학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변했다고 생각하나요?
학교에선 틀에 갇힌 주입식 입시교육 위주로 학생들을 다스리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학생들처럼 주어진 것에만 반응해야 했죠. 1번부터 5번 보기 중에 1번이 답이라면 1번 보기처럼 반응하고 살았는데 이제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면서 약간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보는 시각도, 하는 행동도, 드는 생각도.
그렇다면 <반두비>는 백진희 씨에게 무엇을 남겼다 말할 수 있는 영화일까요?
다른 문화권의 다른 인종, 그것도 한국인이 경멸하는 이주노동자를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영화 내용이 신선하다면 신선하다고 할 순 있겠지만 저한텐 둘이 친구가 된다는 게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친군지 로맨스인지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웃음) 그런 부분을 깊게 생각하다 보니까 이렇게도 친구가 될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생각하는 게 많이 변했어요. 이제 막 싹을 틔운 느낌이랄까. 그전까진 모든 일에 있어서 세상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것도 많이 없어졌고 사람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배려하려고 노력하게 된 거 같아요. <반두비>를 하면서 친분이 쌓인 스태프분들 한 분 한 분이 소중하다는 감정을 느꼈어요. 저한테 주어진 모든 것들, 저한테 주어진 제 주변의 사람들, 저한테 주어졌던 일들, 저한테 주어지는 일들, 그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민서도 카림이라는 진정한 친구, 반두비를 만나면서 느끼는 게 많아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서 숙녀로 성장하잖아요. 나중에 영화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모습이 정말 다르거든요. 인생에 있어서 한번의 전환점이 된 거죠. 민서에게 카림이 그런 존재인 것처럼 어쩌면 <반두비>가 저에게 그런 존재가 된 건지도 모르죠.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 어떤가요?
제가 VIP시사회 때 어느 누구도 초대를 못했어요.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염려스럽고, 저도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보는 거라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죠. 그래도 최고로 인정받는 윤석 씨와 짝을 해서 그런지 보시고 난 분들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조금 안심이 돼요. 그래서 이젠 다 돈 주고 보라고 하려고. (웃음) 5%정도 긴장감이 풀어지긴 했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니까 조금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는 중이죠.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일 텐데요. 그래서 더욱 특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분에 대해선 생각할 수 없어요. 그저 어느 부분에서 연기가 좀 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했죠. 한두 군데 정도 캐릭터와 조금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라고 할까? 저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남들이 몰라도 본인은 보이거든요. 아, 저기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게 있죠. 늘 보여요. 그래서 한번도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제작보고회 때는 데뷔하는 심정으로 연기했다고도 하셨죠. 아무래도 드라마 위주로 연기활동을 하다가 영화를 한다는 게 그만큼 부담이 되는 일이었나 보죠?
부담스럽죠. 이미 어느 정도는 다 보여준 느낌이고, 그만큼 다들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배우일 텐데 아무래도 스크린에선 괜히 달라 보여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역시 영화 촬영이 여러 방면에서 좀 더 섬세해요. 그래서 긴장을 받게 되는 것도 있고. 늘 어떠한 방면이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무슨 얘기할까 고민되는데 영화 얘기만 나오면 일단 마음이 신인 같아. 제가 신인의 자세로 찍었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너무 농담처럼 얘기한대. 진짜라니까! (웃음) 이건 농담 아니에요.
신인이라는 단어엔 설렘과 부담의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번엔 너무 운이 좋았어요. 김윤석이란 배우와 같이 그냥 업혀가는 느낌이랄까? 거북이 등에 탄 느낌? (웃음)
김윤석 씨 때문에 영화를 선택했다는 말씀도 하셨죠.
제 연기가 대형스크린으로 보여진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영화는 거의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는 상대배우가 김윤석 씨라고 하니 너무 혹하는 거에요. 그러면 대본이라도 좀 봐야겠다 했죠. 그래서 처음으로 이종용 감독님과 미팅을 하게 된 거고요. 만약 윤석 씨 얘기 못 들었으면 대본도 안 봤을 거에요.
대본을 보고 나서 거절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제 입장에서는 대본을 보고 거절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돼요. 자신의 작품이라면 누구라도 열과 성을 다하면서 뼈를 깎아가는 느낌으로 썼을 텐데 그걸 보고 나서 ‘저 안 해요’, 이러기는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못할 거 같으면 아예 안 봐요. 사실 영화는 워낙 제가 해보지 못했던 장르잖아요. 그리고 오래 전에 한번 했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있고요. 그 이후로 작업도 철저해야 하고, 집중력도 요하는 작업이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도 아예 안 봤을지 모를 일인데 윤석 씨가 출연한다는 말에 보게 된 거죠.
김윤석 씨의 이전 출연작은 얼마나 보셨나요?
<타짜>도 봤고, <추격자>도 봤어요. <추격자>는 남편하고 둘이서 제일 마지막 걸 봤는데 보고 나서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너무 섬뜩한 거에요. (웃음) 사실 우리 애기 아빠도 영화를 좋아하는데, 남자 배우 둘 다 너무 매력 있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는 배우가 ‘김윤석’, 그러니까 ‘정말?’ 되묻더라고요. (웃음)
좋은 연기자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건 연기자로서 당연한 욕망이겠죠. (웃음) 반면 이연우 감독은 <거북이 달린다>가 첫 번째 장편 입봉작입니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에 신인감독이라니 불안한 점은 없었나요?
저를 정말 편안하게 해줬어요. 사실 제가 프로포즈를 받고 한달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못한다고 했었거든요. 상대배우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봤고 너무 작품도 좋았지만 그 땐 가족문제가 있었어요. 작년에 아이가 수능시험을 봐야 했고, 저도 개인적으로 쉴 기회가 한번도 없어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였죠.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하겠다 그랬는데 그걸 한달 동안 다 받아주셨어요. 제가 촬영장에 적응이 안 될 것 같다니까 자기가 적응하게 해 드릴 거라고. (웃음) 사실 저는 그래요. 일을 하기 전에 사람을 보고 반하거든요. 그래서 작업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분명히 있어야 일하기가 참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이연우 감독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젊은 사람이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배우한테는 이런 건가요?’ 물어보니까, ‘원래 배우한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게 영화’라며, ‘영화를 한편하고 나서 이 매력에 빠지면 다신 드라마를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설렘을 많이 줬죠. (웃음) 윤석 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 전에 이미 이연우 감독을 많이 믿게 됐고요. 좋은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원한다니 같이 작업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렇다면 왜 꼭 자신을 선택하려 하는지 궁금하진 않던가요? 이연우 감독님께 한번쯤 여쭤보셨을 것 같은데요.
물어봤죠. 대본을 보고 왜 꼭 이걸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그런데 처음 한마디가 ‘예뻐서요’, 이래요. (웃음) 사실 그래요. 나이 든 아줌마한테 예쁘다고 하면 좋죠. 그래서 막 웃었지만 ‘그건 제가 썩 좋아하는 답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했더니 어쨌든 저 아니면 안된데요. 사실 저 아니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저 아니고도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충분히 다른 느낌의 조 형사 부인이 됐을 거에요. 그런데 그 쪽에서 견미리 아니면 안 된다, 라고 프로포즈를 하니까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조형사 아내가 어떤 걸까, 그들이 날 필요로 한다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그리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그걸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생각에 약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고.
사실 대부분 시골의 아줌마를 연상한다면 조금 살도 찌고 느슨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의 아내는 오히려 그와 반대적인 이미지라 흥미롭더군요. 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사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조금 더 변형을 줬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예를 들어서 다섯 살 연상이고, 생활에 찌는 아내라면 기미도 거뭇거뭇하게 올라와 보여야 되고, 머리도 좀 부시시한 파마머리로 갔어야 되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너무 통속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 여자는 아이들 머리도 한 올 한 올 다 빗겨서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게 딱 묶어주잖아요. 또순이 같이, 뭐 하나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그런 느낌의 여자로 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좀 깐깐한, 깡 진 느낌? 제 나름대로 그렇게 바꿔보자고 했는데 조금 아쉬운 건 제 모습이 조금 고왔다는 거? 예뻤다는 게 아니라 조금 생각보다 곱게 보였어요. 사실 기본 메이크업만 하고, 라인 하나도 안 그릴 정도로 화장을 거의 안 했어요. 그런데도 화장기가 있어 보이는 게 좀 아쉬웠죠. 그래서 다음에는 저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본래 얼굴이 어디 갈 순 없죠. (웃음) 하지만 어쩌면 그건 자신만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그 동안 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도회지 여성의 이미지로 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도 더 평범해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돼요. 체형 자체도 너무 슬림한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슬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엉덩이에 속옷도 더 넣고 그랬는데도 영화로 보니까 조금 그렇더라고요. 개인적인 제 생각이 이래요.
결과적으론 그런 외모를 통해서 억척스러운 여자라는 공감대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억척스럽다’는 단어가 표현이 강하게 들려서 그렇지, 사실 다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이런 형태에서는 이게 맞고, 저런 형태에서는 저게 맞을 뿐, 각자 거기에 잘 맞춰서 살다 보면 다들 억척스럽게 살 수 밖에 없죠. 보통 아줌마들을 보고 억척스럽다고 얘기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아줌마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사실 개인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로서 그런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조형사가 주인공이라서 나중에 멋있어 지는 거지, 그게 실제 남편이라면 속 터져 죽을 거에요. (웃음) 생각을 해봐, 그게 무슨 형사야. 손가락 잘리고 들어오고, 무술 한답시고 어설프게 폼 잡는 거 보면 어처구니가 없죠. 정경호를 때리려다가 맨날 다른 곳을 찍잖아. 그래서 내가 너무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가 (옆자리를 치면서) 진짜 남편한테 뭐라 그랬다니까. 정말 답답해서 저러고 살겠냐고. 너무 영화에 몰입한 거지. (웃음)
조형사의 아내야 말로 진짜 내조의 여왕이죠. (웃음)
진짜 그래요.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양말 뒤집어 가면서,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웃음)
조형사의 아내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여자입니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섬세하고 복합적인 내면을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경험이 요구되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굉장히 연기를 잘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20대 초반인데도 4~50대 감정을 다 표현하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사실 그 친구들도 몸에 밴듯한 느낌으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순 없겠죠. 아무래도 저희 같은 나이의 배우들은 자신 자체가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걸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내 남편이 누워있고, 내 새끼가 내 앞에 와 있고, 내가 부업을 할 때, 리액션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일상이니까.
상대배우의 안정감이 주는 시너지도 있었을 거고요.
저희가 하루 만에 만화방에서 세 신을 다 찍었는데 마치 드라마 촬영하듯이 드르륵 찍어서 굉장히 편했어요. 어려움이 없었죠. 그만큼 윤석 씨가 잘 받쳐줬고, 잘 맞았다고 할까. 스폰지 같은, 아니, 그보다도 체형에 맞춰서 흔들리는 물침대? 라텍스 침대에 누우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채워지는 느낌이잖아요. 상대가 어떻게 하든 갭이 없게 안착을 해주는, 그런 느낌의 배우였어요. <거북이 달린다>에선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를 은연 중에 보여주지만 사실 사이 좋은 부부처럼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심리적인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였어요. 이번에는 정말 그저 거북이 등에 탄 느낌이었으니까.
영화에 대한 부담감을 적잖게 말씀하셨는데, 드라마와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드라마는요. 오랜 시간 시청자들을 젖어 들게 해요. 그래서 처음엔 만약 영자로 시작을 했더라도 끝에 가서 견미리가 되죠. 오래하다 보면 다 제 화(化)되는 거죠. 제가 안 하고 다른 배우가 했다면 또 그 화(化) 되는 거에요. 그렇게 젖어 들어요. 제가 스크린이 무섭다는 건 농담이나 겸손한 말이 아니라 진짜 스크린이 무서워요. 드라마는 ‘쟤 왜 저래’, 그러다가도 그 다음 장면이 나오면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잘하면 되죠.
드라마는 매회마다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도 배우에겐 영화보다 좀 더 관대한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죠. 모니터를 꼭 하고 나서 이번 주 저 신에서 제가 너무 아니었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수 있는 신이 있어요. 오늘 못했다면 내일 만회하거나 다른 신에서 강하게 임팩트를 주면 되고, 끝날 때쯤 평가를 한꺼번에 하거든요.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영화라는 건 깜깜한 공간에서 2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는 만큼 들통나거든요.돈 내고 영화를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면 한마디씩 꼭 하잖아요. 그런 순간순간의 평가가 다 오죠. 적어도 ‘누구 때문에’, 이런 소리 듣는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웃음) 기왕이면 잘 봤다 소리를 듣고 싶죠. 그런데 오히려 연기가 너무 좋더라, 이런 말보단 전반적으로 다 좋았는데 그냥 뭐가 좋았는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더 좋은 거 같아요. 너무 강해서 딱 보고 나면 뭐가 좋았는지 말할 수 있는 것보단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면 벌써 그 연기에 젖어 들었다는 거니까요.
드라마는 분절된 형태로 방영이 지속되는 만큼 연기톤의 변화도 어느 정도 수용되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연기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단점이 있겠죠.
그런 것도 있어요. 그만큼 그 두 시간 동안 빠져들게 만드는 연기를 했을 땐 그 캐릭터에 젖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에 <거북이 달린다>를 해보고 나니까 다음엔 발랄한 거 내지는 그렇게 삶에 찌든 억척이 아니라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의 억척스러움을 해도 재미있을 거 같고. 그러니까 작품에 따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좀 다르죠. 영화배우들이 이런 것 때문에 영화 하는 구나 싶기도 하고.
브라운관에 비해 스크린이 크다는 점도 영화가 두려워지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런 것도 있죠. 그러니까 결국 정말 잘해야 된다는 거, 공동작업인데 나 때문에 (한숨쉬면서)‘아~’, 이렇게 되진 말아야 되잖아요. 물론 어떤 일에나 그런 부담은 늘 있어요. 드라마에도 있고.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좀 더 큰 거죠. 그리고 스크린이 크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좀 더 섬세한 연기가 요구된다는 점도 있죠. 드라마는 약간 생방송 같다고 할까. 드라마는 원투쓰리(카메라)로 순발력 있게 탁탁탁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서로 약속하고 다짐하듯 디테일하게 들어가니까 장르적으로 요구되는 연기가 다르죠. 그런 면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는 장르적 느낌을 다르게 만들긴 해요.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로 두려움이라는 허들을 하나 넘은 셈이라 말해도 좋겠어요.
남의 등을 타서 넘었죠. 솔직히! (웃음) 저 혼자 막 달려가라고 하면 두렵겠지만 너무 푸근한 상대를 만났고, 그 사람이 리드하는 대로 몸만 흔들어주면 될 정도로 편했으니까요. 정말 해피한 거죠. (웃음)
사실 그 동안 영화 제의가 없진 않았을 텐데 그 제의를 20년 가까이 뿌리쳤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웃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시나리오를 본 영화는 거의 없어요. 강제로 집까지 보내서 2~3개 정도 본 건 있지만 대부분 보기 전에 일단 거절부터 했으니까요.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스크린이니까 자신 없었어요. 핑계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없었던 거에요.
자신에게 제의가 들어왔던 작품의 완성된 형태를 보고 나서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요?
있었죠. 있었지만 저보다 괜찮은 배우들이 대신 하셨기 때문에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드라마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 제의가 왔을 때, 제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못하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이 했기 때문에 진짜 좋아졌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저도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전 그 감독한테 전화해요. 거보라고, 나 아니어도 너무 좋지 않냐고. 그건 진짜 필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욕심이 없다기 보단 그게 시청자나 관객을 위한 진짜 배려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배우에 대한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 부분은 없었나요?
저는 몰랐는데 사람들이 제가 영화를 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신기해해요. “이번에 영화 했지? 보러 가야지.” 이러면 “그래, 봐.” 이러면서도 보면서 뭐라 그럴까 걱정이 앞서요. 그리고 ‘뭐, 늘 저랬는데’, 이럴까 봐 걱정되고요. 배우로서 차라리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좋아요. 그런데 ‘늘 똑같지’, 이러는 건 조금 섭섭하고 서운하죠. 제가 너무 많이 보여진 연기자이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런 것들이 좀.
사실 드라마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 면에서 <거북이 달린다>의 시골 형사 아내는 그 이미지만으로 특별한 변화라 인지될 가능성도 적잖습니다.
제가 기존에 몇 년간 해왔던 캐릭터들이 야무지고 도시적인 느낌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모르겠지만 남들은 제가 사극에서 굉장히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맡았을 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해요. <거북이 달린다>에서 아내는 그런 면에서 다른 역할이긴 하죠. 장르를 옮겼기 때문에 시청자가 아닌 관객들이 제 연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영화 계통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평가를 할지, 그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기본적으로 저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만 돼도 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했어도 윤석 씨가 잘 맞춰줬을 테고, 그만큼 다른 매력이 있었을 거에요. 저는 ‘나 아니면 안돼’, 이런 생각 별로 안 하거든요. 저희가 선택 받을 때, 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행복하긴 하지만 막상 스스로 돌이켜 보면 저 아니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색깔이 달라지긴 하겠죠.
캐릭터의 이미지를 통해 배우의 성격을 가늠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역할에 따라서 사람을 멀게 느끼거나 가깝게 느껴는 거 같아요. 예전에 제가 <인현왕후>라는 사극을 할 땐 모든 분들이 다 저한테 착하다고 했어요. ‘아, 착한 사람 왔네’, 그랬어요. 왜 착한지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됐죠. 그런데 <대장금>을 하고 나니까, ‘어휴, 미워죽겠어! 어쩜 그렇게 독하게 해!’ 이러고. (웃음) 그러니까 역할을 잘 맡아야 돼요. 요즘은 우리 애들도 그래요. “엄마, 이젠 그렇게 악역 같은 거 하지마. 사랑 받는 역할만 해.”
자제 분의 수능준비 때문에 <거북이 달린다>를 고사하려 했다는 얘기도 하셨죠.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악역을 맡지 말라는 자제 분들의 사소한 말이 어머니로서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에겐 큰 고민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요. 어쩌다 보니까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제 직업이 배우가 됐죠. 어느 순간에 제가 배우로 평가 받게 된 거에요. 직장인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 그런 사실을 평가해주겠죠.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저 연기가 좋아서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배우로서 앞만 보고 뛰었더니 다른 사람들이 너는 연기자라고 평가해준 거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까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직업보다도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런 거 물어보시잖아요. “일이 더 중요해요? 가정이 더 중요해요?” 대부분 둘 다 중요하다고 대답해요. 하지만 전 가정이 더 중요해요. 이상하죠?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일도 중요하지만 제 가족들이 제가 일을 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럴 때 제 일을 찾는 거지, 제 일을 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남편이나 아이들이 얘기하는 걸 조금씩 생각하게 돼요. 아이들이 조금 크다 보니까 점점 제 역할을 보게 돼요. 깍쟁이 같은 역할이라도 하면, 그런 역할 말고 집에 있는 평범한 엄마하라고. 그럼 이제 제가 설득을 시키죠.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도 있고, 선악이 분명해야 드라마가 재미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게 이렇다니 나도 조금 그렇게 해볼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웃음)
(웃음) 그럼요. 집안이 편해야 나와서 일도 잘되죠.
84년도에 탤런트 공채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84년 3월부터 입사를 한 걸로 됐지만 사실 83년도에 입사했어요. 제가 83학번이라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저는 연기의 ‘연’자도 몰랐죠. 원래 연예인에 꿈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가수 전영록하면 ‘와~!’하는 세대였는데 저는 그런데 무덤덤했고 오로지 무용밖에 몰랐거든요. 제가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오로지 무용만 생각하는 그런 아이였죠.
그런데 어쩌다 연기자로 입문하신 겁니까?
엄마가 우연히 원서를 갖고 와서 “얘, 한번 원서라도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이런 거 내면 큰일나.” 그랬더니, “얘는, 네가 되겠니. (웃음) 그냥 사진 하나 붙이고 한번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 빤빤하게 빗고, 엄마 블라우스하고 언니 큐롯(Culotte)바지 입고, 구두 하나 신고, 그렇게 원서 사진 찍어서 하나 붙여 보낸 게, 1차, 2차, 3차 다 통과해버린 거죠. 제 수험번호가 3316번이었어요. 그때 한 6천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스무 명 정도를 뽑았거든요. 남자 10명, 여자 10명. 그런데 됐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가니까 여자 10명 중에선 저 하나, 남자 10명 중에서 딱 한 명만 연예인의 ‘연’자도 모르는 친구였던 거죠. 있어요. 그 친구도 지금은 그만 뒀는데, 그 친구와 저만 카메라나 연기 경험이 없는 친구였어요. 남들은 다 연극이나 CF경험이라도 있었거든요. 방송국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 어디론가 가요. PD중에 선배도 있고 그러니까 다들 찾아가는데 항상 둘만 그 자리에 앉아있어요. 만날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앉아있는 거죠. 오리엔테이션에서 워크샵으로 작품을 하나 해보는데 암기력만 좋지, 연기는 어떻게 하는 지도 몰라서 헤맬 때는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싶었죠.
그래도 어떻게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땐 1년 전속계약을 해서 월급을 줘요. 한편 출연하면 5천원을 의무적으로 주는 거죠. 1년 동안 월급을 받고 이걸 하기로 했으니까 학교는 휴학했고 1년 동안 열심히 다녀야겠다,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안 해본 역할이 없었거든요. 1년 동안 단 하루도 안 쉬었어요. 왜냐면 그땐 집전화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밤에 갑자기 전화하면 집에 있는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제가 항상 연락이 되는 사람 중에 껴 있었던 거죠. 그렇게 가면 뭘 시켰느냐, 더빙을 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드라마가 대부분 후시녹음이었잖아요. 군중 박수, 이런 것까지 나가서 해야 되는 거에요. 초인종 ‘딩동’소리 듣고 ‘누구세요’, 이런 것까지 입맞춰서 이펙트를 넣어주고. 제가 사실 더빙의 천재에요. 그때 1년 동안 다 배웠거든. (웃음) 그리고 그 1년 동안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걸로 제가 연기를 배웠죠.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전속이 풀렸는데 365일 바쁘던 애가 이젠 일이 없는 거에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싶었죠. (웃음)
그게 20년이 넘는 연기자 경력의 시작이었군요. (웃음)
만약 제가 하고 싶었던 무용을 계속 했다면 아마 사랑 받는 무용가가 돼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분명한 건 제가 그냥 욕심이나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앞만 봤다는 거죠. 어떤 사심이 없었다는 거에요. 동기들이 주인공을 할 때 어쩌면 어린 마음에 아무래도 부럽기도 했겠지. 그런데 막상 질투하기 보단 내가 저기까지 가기 전에 일단 이걸 잘해야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저를 연기자라는 자리에 있게 만든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시에 일에 욕심내면서 스타가 되고자 했던 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오히려 다 없어졌어요.
사실 연기의 ‘연’자도 모르고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만큼 아무래도 처음엔 배우로서의 가치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연기자로서 삶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의 자각이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주기적으로 와요. 딱 십 년 된 해였는데 그 전까진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연기를 했거든요. 일단 대본을 받으면 너무 예민해지고 두려웠어요. 맨날 대본을 껴안고 잤죠. 한 십 년간 정말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욕심도 없어지죠. 그런데 십 년 차엔 뭐랄까, 내 연기가 가짜구나 싶었어요. 그 때 45일 동안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무대에 서는 게 도살장에 올라가는 기분이었어요. 관객들 눈이 너무 무서웠고 미치겠는거지. 이건 가짜 연기인데, 이 연기를 갖고 매일 이 관객들 앞에 서는 게 옳은 일인가, 정말 몸살을 했죠. 그래서 그 연극이 끝나고, 그 다음에 들어온 드라마를 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 둬야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아마 본능적으로 열심히 했을 거에요. 그 전까진 제 연기를 모니터할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조금씩 생각했죠. ‘아, 그래. 너도 조금 가능성이 있는 아이구나.’ 그렇게 십 년을 넘겼어요. 그런데 또 한번 십 년 차가 되니까 또 그게 오더라고요. 예전에 <사랑공감>이라는 드라마를 할 때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때 또 한번 느꼈죠. ‘아, 이게 또 나한테 오는구나.’ 정말 잘해야 된다는 느낌. 그걸 지내고 나니까 그 다음이 다시 좀 쉬워졌어요. 그래야만 마음이 조금 편해져요. 같은 일을 이십 년 정도 하니까 좀 익숙해지는 거 같아. (웃음)
그런데 <사랑공감>덕분에 상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웃음) 그런 것 때문에 용기를 얻어서 계속 할 수 있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인생이 아이러니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자신의 평생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어느 날 밤에 문득 창가에서 제가 여태껏 어떻게 연기자 생활을 했는지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운 거에요. 사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버릴 수도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싹싹 잘도 빠져 나왔는지, 어쩜 그렇게 잘 버텼는지, 참 아무 생각 없이 버텼네 싶어서요. 어쩌면 욕심이 없어서 버텨진 거 같아요. 최고가 돼야겠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 스타가 돼야겠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주어진 걸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까 가능해진 거죠. 자기가 밑바닥부터 올라갔으면 몇 계단쯤 올라온 줄 알잖아요. 그런데 내려가는 건 쉬워요. 그렇게 어느 순간 딱 떨어지면 어떡해요. 그 괴로움을 참기 힘들죠. 그런데 학연이나 혈연, 지연이 없이 제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게 지금까지 오히려 저를 연기할 수 있게끔 해준 거 같아요.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다가도 어느 틈엔가 인기 없이 내려올 때도 잘 내려와요. 그냥 툭, 툭, 툭 내려오면 되지, 뭐. (웃음)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도 왜 자꾸 자신에게 연기적인 기회가 주어지는지 의아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요. “지금 당장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앞만 보면서 열심히 가다 보면 누군가 너를 최고로 만들어주고 있더라. 그걸 너 혼자 만든다고 생각하지마. 주변에서 함께 만들어주는 거야. 주변에서 너 최고야, 라는 소리가 나와야 최고지. 네 자신이 너 혼자 아무리 최고라고 해 봤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네가 최고가 되겠니.” 지나고 보면 참 운 좋았다 싶어요. 저도 자신이 없는데 누가 저를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누군가 늘 찾아줘서 행복하게도 늘 그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요.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순간순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픽 나요. ‘어머, 네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기를.’ (웃음) 사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늘 감사해요. <사랑공감> 때는 주인공을 맡고 상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에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의 연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랬어요. 저보다 훨씬 스타였던 분인데, “야, 너 이제야 그런 거에서 벗어났는데 왜 그런 역할을 해?”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어요. “저는 그냥 견미리니까요.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니라 그냥 배우니까요.” 제가 그 맛을 한번 봤다지만 그거 아닌 다른 걸 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배우라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그 역할에 대해서 크기나 질, 양을 따지겠어요. 질이나 양은 제가 만드는 거죠. 5분을 나와도 5분 동안 제가 충실하면 아마 남을 거에요.
그런 생각들도 사실 당시엔 몰랐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는 알기 어려운 사실일지도 모르죠.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게 아닐까요.
십 년 지나고 이십 년 지나니까 이런 말을 하지, 십 년 차 되는 해에도 너무 아팠고, 이십 년 차 되는 해에 또 아팠고, 그래서 한편으론 두려워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두려움이 다시 오면 그 땐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때도 또 힘들어 지겠죠. 아마 그때마다 힘들 거 같아요. 그래도 그 때 아팠던 게 지금은 너무 많이 도움이 되니까 앞으로도 참아야겠죠.
나이에 따라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아뇨. 그런 것보단 곱게 나이 들고 싶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연기자는 너무 나이 먹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고, 너무 젊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죠. 참 맞추기 힘들어요. (웃음) 그래도 저는 주름진 얼굴이 친숙하고,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으로 비춰지고 싶어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실 사생활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터넷이 무서워요. 그런데 저는 어차피 공인이라 그런 무서움을 감수하지만 아이들이 크니까 그게 아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줘요. 그래서 어느 때는 인터넷 사이트에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걔들은 굉장히 괴로워하거든요. 그리고 차라리 있는 얘기만 하면 괜찮아요. 어느 때 보면 제 딸도 아닌데 제 딸이라고 올라와있을 때도 있다니까요. (웃음) 다만 기분 좋게도 예쁜 애들만 올라와있어서 다행이지. 내 딸보다 훨씬 예쁜 애들이야. 그냥 추측해서 올렸나 보죠. (웃음) 그런데 어쨌든 걔들도 불편할 거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저는 연기자일 뿐이지, 스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이슈가 되는 게 별로 재미없어요. 그냥 저에게 주어진 걸 잘 하면 되는 거죠.
<거북이 달린다>가 본인에게 준 특별한 변화가 있을까요?
이제 영화배우가 됐으니까 영화 시나리오는 다 받아서 읽어봐야지! 이런 자신감을 줬어요. (웃음)
다음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벌써 났더군요. 주인공이라던데.
아, 그렇게 나갔더라고요. 사실 해볼까 생각하다가 안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홍보가 먼저 나가버렸죠. 연령대가 조금 안 맞더라고요. 영화 개봉했으니까 이제 조금 더 쉬어야겠다 싶어요. 이렇게 몇 달 지나가고 찬바람 불 때쯤 다음 작품 생각해보려고요. 이번엔 좀 많이 쉬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생선가게 아줌마라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전 후딱 해버리니까요. 제 마음 저도 몰라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