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의 엄태웅이 배우로 돌아왔다. 열혈형사로 분한 <특수본>이 바로 그것. 사실 엄태웅은 <1박 2일>로 전국을 돌던 와중에도 언제나 현장에 있었다. 단지 그 동안 우리가 배우 엄태웅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배우 엄태웅이 돌아왔다.
“저는 원래 배우였으니까요.” 그랬다. 엄태웅은 원래 배우였다. <1박 2일>이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부활>이나 <마왕>과 같이 어둡고 무거운 톤의 드라마에서 힘있는 연기를 선사하며 ‘엄포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는 <1박 2일>의 출연과 함께 그야말로 딴사람이 됐다. 족구 시합 중에 헛발질을 하며 ‘개발’이라 놀림을 받고, 김장 중에 생선 두 마리를 뽀뽀시키며 주변에 화색을 돌게 만들며 엄태웅은 대중 곁에 친숙하게 가 닿았다. 사실 배우에게 예능 출연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캐릭터들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서 출연진의 성격이나 취향을 적나라하게 벗겨내는 요즘 예능의 입담에 투신하기란 분명 꺼려지는 일일 게다. 엄태웅 역시 몇 달간 출연 요청을 고사했다. 결국 <1박 2일>은 실보다 득이 많은 선택이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강한 인상을 지닌 배우로 인식되던 엄태웅이 동네 청년과 같은 소탈한 자연인의 인상을 드러낼 때, 배우 엄태웅에 대한 인상도 새롭게 발견된다.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들의 가면 아래 드러난 엄태웅의 진짜 표정은 그래서 흥미롭다.
매주 방송되는 <1박 2일>의 촬영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엄태웅은 남은 ‘4박 5일’을 연기로 채워나갔다. 그의 9번째 영화 <특수본>(2011)은 경찰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특별수사본부의 형사들이 경찰 내부 비리에 접근해가는 과정을 그린 범죄액션물이다. FBI 연수 중인 심리학 박사 김호룡(주원)과 짝패를 이룬 열혈형사 김성범을 연기했다. “생명의 위협까지는 아니었지만 신체의 위협은 느꼈어요.” 너스레를 떨 듯 말하지만 실제로 맨몸으로 뛰고 구르는 스턴트 액션까지 소화해내는 엄태웅은 현장에서 ‘엄액션’으로 통했다. 처음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적응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특수본> 촬영을 병행하는 것도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태웅은 이 모든 과정을 즐기고자 노력했다. “일단 예능은 처음이라서 힘들었죠. 게다가 영화도 어떤 장면이 잘 안되거나 할 때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일이 있으니까 계속 해야 할 것 같고,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거죠.”
사실 엄태웅은 오랜 무명 시기를 견뎌내고 오늘까지 왔다.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1998)에서 단역 출연을 계기로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한 그는 긴 시간 동안 작은 역할에 자신의 꿈을 재워두고 기회가 무르익어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는 첫 번째 기회였다. 비록 단역이었지만 충무로를 주름잡는 수많은 남자 배우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엄태웅은 묻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2004)과 <공공의 적 2>(2005)으로 이어진 강렬한 인상으로 스스로의 자질을 인식시켜나갔다. 진정한 기회는 브라운관을 통해서 찾아왔다. 드라마 <쾌걸춘향>의 변학도 역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자신의 인생을 비극의 수렁으로 밀어 넣은 이들을 향한 복수를 감행하는 동안 내적인 갈등을 느끼는 1인 2역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전시한다.
“역할의 비중이 커지고, 개런티도 늘어나면서 부담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결국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는 건 좋은 일이겠죠.” <부활>이후로 엄태웅의 경력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진정한 주행이 시작됐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고, 그의 캐릭터들은 항상 극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곳을 점했다. 사실 엄태웅의 연기에는 그 캐릭터의 강도와 무관하게 일관적인 망설임, 즉 반박자 느린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어떤 역할을 연기할 때마다 그 캐릭터가 뭔가 과하게 보이지 않도록 변화를 주는 게 좋아요.” 그의 캐릭터들은 한결 같이 어떤 확실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존재한다. 그것이 그의 캐릭터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지금까지 스스로 시원하게 연기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엄태웅 스스로의 조심스러움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은 다가올 경험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와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능 출연이 쉬운 일이 아니었듯, 점차 넓어지는 연기적 보폭이 그의 발전을 대변하는 바로미터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지난해 270만 관객을 동원한 <시라노; 연애 조작단>으로 흥행배우 대열에 올라선 그가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건 때로 지나친 겸손처럼 보인다.
엄태웅은 말한다. “연기는 살아가기 위한 수단 이상이 아니에요.” 하지만 또 다시 말한다.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제 안의 모습이 하나하나씩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그럼 언젠가 저만의 연기 스타일이 보이겠죠.” 엄태웅에게 중요한 건 분명 삶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연기한다. 하지만 연기는 그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발전을 바란다. 무엇보다도 엄태웅은 동료 연기자들로부터 유독 ‘인간적’이라는 평판을 많이 듣는다. 촬영 현장 곳곳의 풍경을 차곡차곡 쌓아둔 그의 미니홈피 사진첩은 정이 많은 인간 엄태웅을 드러내는 창과 같다. 그는 삶과 직업의 경계를 넘어서 구수한 된장 내음처럼 퍼져가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쉬었다가 오는 듯한 <1박 2일>” 사이사이로 연기적 경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벌써 <특수본>의 차기작인 <네버엔딩 스토리>의 촬영을 마친 그는 벌써 그 이후의 차기작인 <건축학개론>의 촬영에 들어갔다. 구수한 된장처럼 친숙하지만 깊이 있는 매력을 지닌 배우 엄태웅은 그렇게 삶을 담그며 스스로를 숙성시킨다.
제임스 프랭코는 수많은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다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빠르고 철저하게 자신의 영역을 점유해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를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궁극의 에너지원이다.
영광은 일찍 찾아왔다. TV영화 <제임스 딘>(2001)의 타이틀롤을 맡은 제임스 프랭코는 전설적인 미남 스타가 남긴 여운을 재현하며 ‘제2의 제임스 딘’이란 호평을 얻었고, 골든글로브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이는 그를 메소드 연기의 포로로 만들었다. 로버트 드니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시티 바이 더 씨>(2002)에서 마약쟁이를 연기하기 위해서 중독자들과 몰려다니며 길거리를 전전했고,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출 데뷔작 <소니>(2002)를 준비하고자 게이 스트립 클럽에 드나들며 스트리퍼들의 행위와 습성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자 오디션을 봤지만 결국 해리 오스본 역으로 캐스팅된 <스파이더맨>(2002)은 그의 전세계적인 출세작이 됐다. 하지만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를 완성하기까지 5년 동안 프랭코가 이룬 경력들이란 대부분 무색한 것들이었다.
“연기가 내 전부였을 때, 스스로에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거듭 말하면서도 내 연기가 나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세 편의 출연작이 공개됐던 2006년은 프랭코에게 있어서 대단한 실망을 안긴 한 해였다. <라파예트>를 준비하며 비행조종사 자격증까지 얻은 그는 <아나폴리스>를 위해서 8개월 간 링에서 복싱을 배웠고, 검술을 연마한 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출연했다. 결과적으로 이 세 작품은 흥행과 비평의 면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영화가 잘 되면 행복했고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났다. 배우로서 어떻게든 완성된 결과물에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날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그저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외의 결단을 내린다.
2006년 프랭코는 부모의 바람을 등지고 10년 전에 자퇴했던 캘리포니아의 UCLA로 다시 돌아가서 철저하게 학업에 매진했다. 주전공인 문학과 창작뿐만 아니라 과학론, 프랑스어 등 다양한 학문들을 집어삼키듯 공부해나갔고 끝내 62학점을 이수했다. UCLA 수료 후, 프랭코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서 세 개 대학을 옮겨 다니며 문학과 영화, 극작을 공부한다.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 당시에는 잠시 시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수학은 촬영장에서도 이어졌다. <스파이더맨 3>(2007)를 촬영하는 세트 안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밀턴과 제프리 초서의 시를 읽었고, <파인애플 익스프레스>(2008)를 촬영하며 16세기 영국 문학을, <밀크>(2008)의 세트장에서는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메소드 연기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연기적 지식으로 자신을 무장시켰다.
주드 아패토우가 제임스 프랭코를 처음 본 건 12년 전이었다. 아패토우는 의아했다. 멀쩡하다 못해서 여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끌어낼만한 매력적인 20대 청년이 어째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일까. 아패토우는 당시 TV시리즈 <프릭스 앤 긱스>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부연하자면, <프릭스 앤 긱스>는 제목 그대로 괴물과 괴짜 같은, 문제아들과 얼간이들로 이뤄진, 덜 자란 아이들의 모자란 일상을 엿보는 너드 코미디물이었다. 그러니까 아패토우는 그가 이 작품에 출연을 희망한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프랭코는 원작자인 폴 페이그가 졸업한 고등학교가 있는 미시간까지 날아가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조사했다. 그런 그를 보고 모두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저주 받은 컬트 코미디로 여전히 회자되는 <프릭스 앤 긱스>에 출연하며 주드 아패토우 사단의 웃기는 사내들과 맺은 인연은 결국 대단한 밑천으로 돌아왔다. 이 잘생긴 배우를 가장 고전하던 시기로부터 구원한 것이 바로 그 아패토우 사단의 <파인애플 익스프레스>(2008)였다. 세스 로건과 아패토우가 건넨 시나리오를 받아 든 프랭코는 하루 종일 약에 찌든 채 허허실실하며 얼간이 짓을 해대다가 진창 같은 상황 속으로 굴러들어가는 마약상 사울을 연기하며 새로운 연기적 자아를 얻었다. 치열한 준비 과정과 진지한 캐릭터를 도맡았던 지난 경력들과 달리 반쯤은 맛이 간 너드 역할이 일으킨 대단한 반향은 프랭코의 가치관을 흔들었다. “거기에는 많은 자유와 즉흥성, 창의성이 있었고 다른 이들의 조언이 수렴될만한 여지도 있었다.”
구스 반 산트의 <밀크>(2008)에서 하비 밀크의 애인 스콧 스미스로 등장한 프랭코는 그 뒤로도 <하울>(2010)의 비트제너레이션 작가 앨런 긴스버그 역으로 동성애자 역할을 맡았다. 이 두 독립영화는 동성애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실존인물을 극화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프랭코의 성정체성에 대한 루머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되레 프랭코는 이런 반응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반규범적인 생활양식 대로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반대 세력을 다루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저 내가 게이일 거라 안다 해도.” 프랭코는 연기를 벗어나서 자신의 행위 자체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거대한 예술적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2009년 9월부터 낮 시간에 방영되는 3류 연속극 <제너럴 호스피털>에 프랭코라는 동명의 인물로 등장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상호연관관계와 그것이 작품의 안팎으로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탐구적 흥미를 직접 칼럼으로 써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잠정적으로 정해진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새로운 가능성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걸 잘 점령했다. 기적에 가까운 연기였다.” 협곡 사이로 미끄러지다 떨어져 내린 돌에 팔이 끼어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 탈출한 아론 랄스턴의 실화를 영화화한 <127시간>(2010)의 대니 보일은 프랭코를 극찬했다. 비행기를 타고 뉴욕과 촬영지를 오가며 연기한 그는 틈나는 대로 마르셸 프루스트를 읽어가면서 바위 사이에 갇힌 한 남자의 고립된 감정을 감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이 연기로 첫 오스카 후보에 오른 프랭코는 애파토우 사단의 코믹 판타지물 <유어 하이니스>(2010)로 한숨을 돌리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으로 오랜 시리즈의 기원을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
최근 예일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이수한 프랭코는 뉴욕대에서 시를 영화로 변환하는 강의를 맡았다. 지난 해에는 단편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연기 외에도 연출에 관심이 많다.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1955)에 출연했던 살 미네오에 관한 작품을 연출하고 베니스 오리종티 부문에 출품했다.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도전이며 그 도전들은 보람이고 즐거움이다.” 그는 안주하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즐기는, 정의할 수 없는 에너지를 지닌 배우, 그가 제임스 프랭코다.
엠마 스톤은 TV시리즈 <히어로즈>의 오디션장에서 캐스팅 감독이 경쟁 배우에서 전한 말을 엿듣고 완전히 ‘밑바닥’에 떨어졌다. “10점 만점에 자네는 11점이야.”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스톤은 11살 무렵부터 무대에 오르며 자신을 단련시켰다. 꿈은 이루어진다. 스톤은 영화 데뷔작 <슈퍼배드>(2007)로 수면 위에 떠오른다. 우디 해럴슨과 함께 출연한 코믹 호러물 <좀비랜드>(2009)는 결정타와 같았다. 전기톱을 들고 좀비들을 썰어나가는 당찬 헤로인의 모습에 대중과 평단은 열광했다. <이지 A>(2010)로 주연을 꿰차며 당찬 이미지를 어필한 그녀는 성공적인 평가 속에서 자신 있는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올해 미국 내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에 오른 유일한 영화가 된 <헬프>(2011)로 성숙한 연기력마저 과시했다. “오로지 자신감이 열쇠다.” 그녀는 그 자신감으로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엠마 스톤이 진정 대세다.
다코타 패닝과 엘르 패닝은 할리우드의 ‘뜨거운 자매’다. 다코타는 일찍이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 수준을 넘어서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엘르 역시 그녀의 예쁜 여동생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엘르는 선언하듯 말했다. “다코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죠.” 그리고 심상치 않은 행보를 걷고 있다. 지난 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소피아 코폴라의 <썸웨어>(2010)에서 엘르의 존재감은 기대 이상이다. 화려한 일상을 전전하며 공허한 일생을 채우는 어느 스타 배우가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수식해주는 딸과의 교감을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엘르는 현재진행형의 성숙을 마음껏 자랑한다. 특히 근작인 <슈퍼 에이트>(2011)에서 그녀는 또래의 남자 아역배우들과 비교될 만큼의 성숙한 면모를 과시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사랑할 뿐이에요.”이제 엘르는 더 이상 타코타의 동생으로 불리지 않는다. 준비된 슈퍼 탤런트로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미국과 영국만큼이나 호주 역시 주목할만한 배우의 산실이다.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차지한 호주 출신 스타의 새로운 계보를 잇는 건 바로 애비 코니쉬다. 샤를리즈 테론이나 니콜 키드먼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유년 시절 자칭 톰보이였으며 자애심이 강했다. 호주영화협회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아찔한 십대’ 배우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자애심 덕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6년, 코니쉬는 히스 레저와 호흡을 맞췄던 <캔디>와 리들리 스콧의 <어느 멋진 순간>으로 호주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무대를 넓혀나간다. 특히 비운의 시인 존 키츠의 연인으로 등장한 <브라이트 스타>(2009)는 당돌하면서도 우아한 코니쉬의 기품을 발견하는 자리였다. 박력 있는 여전사로 열연한 <써커 펀치>(2011)에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코니쉬는 <리미트리스>(2011)를 통해서 성인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완벽하게 이행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다. 반짝이는 별이 새롭게 떠올랐다.
니콜 키드먼은 ‘될성부른 나무’였다. 키드먼을 ‘떡잎부터 알아본’ 제작자들은 그녀를 발 빠르게 할리우드로 인도했다. 일찍이 할리우드의 뮤즈 자리를 수성한 그녀는 여전히 가지를 뻗고 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키드먼은 호주 출신의 부모와 함께 시드니로 건너가 유년시절을 보낸다.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었던 키드먼은 발레를 배우고자 찾은 호주 유소년 씨어터에서 연기에 관심을 얻게 된다. 175cm에 달하는 장신이었던 열네 살 무렵, 영화 데뷔를 이룬 그녀는 우월한 유전자만큼이나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1987년에 방영된 TV미니시리즈 <베트남>으로 호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키드먼은 <죽음의 항해>(1989)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눈길을 끈다.
일본의 한 영화제에 참석 중이던 키드먼은 톰 크루즈의 측근으로부터 차기작 계획을 묻는 전화를 받는다. 토니 스콧의 <탑 건>(1986)으로 할리우드의 큰손이 된 크루즈는 <폭풍의 질주>(1990)로 심기일전을 다짐하던 차였다. LA로 키드먼을 초대한 그는 그녀와 출연 계획을 상의한다. 이는 키드먼의 할리우드 진출에 관한 이야기이자 세기의 커플이었던 키드먼과 크루즈의 인연에 관한 서두이기도 하다. 199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부 서약을 맺은 두 사람은 론 하워드의 <파 앤드 어웨이>(1992)에서 또 한번 호흡을 맞춘다. 아일랜드의 보수적인 귀족 집안에서 자란 진보적인 여인이 자립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은 뒤, 한 남자의 야심에 동참하는 과정은 키드먼의 현실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톰 크루즈의 아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구스 반 산트의 <투 다이 포>(1995)는 키드먼을 위한 영화였다. 수잔 역을 얻기 위해 구스의 집에 직접 전화를 건 키드먼은 그에게 말했다. “<드러그스토어 카우보이>(1989)를 봤어요. 당신과의 작업을 간절히 원해요.” 수잔은 섹슈얼한 매력을 이용해 남자를 물건처럼 이용하는 팜므 파탈이다. 이는 키드먼이 연기한, 강인하고 순정적인 여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그녀를 통해 키드먼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19세기 말, 보수적인 영국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제인 캠피온의 고전 로맨스물 <여인의 초상>(1996)에서 지적이며 당돌한, 미모의 여인 이사벨을 연기한 키드먼은 자신이 그려왔던 도전적인 여인들의 면모에 보다 깊은 감수성을 이입해낸다. 진보적인 여인의 초상에 세심한 심연의 갈등을 새겨 넣으며 자신의 연기적 깊이를 증명해냈다.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1999)과 함께 키드먼은 내외적인 고난에 직면한다. 크루즈와 함께 부부로 출연한 이 작품은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의 혼돈을 그리고 있으며 키드먼은 전신 노출까지 불사하는, 헌신적 열연을 펼쳤다. 큐브릭에 대한 깊은 애정은 부부의 공동출연으로 이어졌지만 이로 인한 세간의 지독한 관심은 두 사람의 관계에 치명타를 입혔다. 오랜 제작기간이 소요된 이 작품은 급기야 최종편집이 끝나기 전에 찾아온 큐브릭의 죽음으로 기로에 선다. 결국 영화의 불완전한 완성과 함께 두 사람의 관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2001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각자 퇴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 뒤로 키드먼은 다시 '힐을 신을 수 있'었지만 '삶이 붕괴되는'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해에 키드먼의 경력은 보다 반짝이기 시작했다. 환락가의 여신 사틴 역을 맡은 바즈 루어만의 뮤지컬 <물랑루즈>에서 다이아몬드와 같이 반짝이는 미모를 자랑한 키드먼은 빼어난 가창력과 안무까지 뽐내며 관객들을 현혹시켰다. 톰 크루즈가 기획자로 참여한 호러 <디 아더스>가 공개된 것도 같은 해였다. 이듬해, 이 두 작품으로 각각 골든글로브 두 개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키드먼은 <물랑루즈>로 두 번째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얻게 된다.
영국의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에 얽힌 세 여인의 삶을 그린 <디 아워스>(2002)에서 메릴 스트립, 줄리언 무어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한 키드먼은 버지니아 그녀를 연기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민하고 우울한 예술가의 생을 연기해내야 했던 키드먼은 인공적으로 제작된 모형 코를 달고 그녀를 연기한다. 자신을 잊은 채 온전히 버지니아라는 인물로 빠져들었다. 이는 여전히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혼에 대한 아픔을 지울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경력에 정점이 됐다. 2년 연속 골든글로브 수상을 이어간 그녀는 수상자 신분으로 오스카 단상에 오르는 첫 영광을 차지한다.
할리우드의 주류배우로 꼽히는 키드먼은 독립영화에서 보다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여왔다. 그녀의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자주 동원되는 건 예민한 심성과 불안한 정서다. 독립적인 여성의 의지를 강인하게 피력하던 그녀는 점차 히스테리한 여인으로서 존재감을 피력해왔다. 돌발적으로 공기를 불안하게 잠식하는 그녀의 캐릭터들은 극적인 분위기를 강화하는 요소로 영화에 기여해왔다. 연극적인 무대를 날것처럼 카메라에 담아낸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2003)이 178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온전히 그녀의 연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생>(2004)과 <인터프리터>(2005)에서도 이는 유효하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죽은 옛 연인임을 자칭하는 소년을 만나 벌어지는 미스터리와 국제적인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는 한 여인의 정체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서스펜스는 키드먼의 존재감이 발휘된 결과물이다.
미국의 여류 사진가 디앤 아버스의 삶을 모티프 삼은 <퍼>(2006)는 한 여인의 자립을 그린, 잉태적 삶에 관한 이야기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한 이 작품에서 특유의 예민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키드먼은 불안과 설렘의 경계를 부유하던 한 여류 사진가의 거짓말 같은 생에 사실적인 감정을 부여한다. 보다 현실적인 일상에 근접한 <마고 앳 더 웨딩>(2007)이나 <래빗 홀>(2010)에서도 이런 특성은 발견된다. 우연히도 두 작품에서 남편과 갈등을 빚는 아내이자 여동생과의 반목을 거듭하는 누이로 등장하는 키드먼은 각각의 영화에서 부풀어 가는 불화를 찔러 터트릴 것마냥 날이 선 심성을 휘두르는 불안 그 자체다. 롭 마샬의 <나인>(2009)은 키드먼이 여전히 빛나는 외모를 자랑하는 할리우드의 여신 자리에서 내려설 생각이 없음을 대변한다. 하지만 키드먼의 마이너한 감성은 그녀를 메이저 배우로 인식하길 방해하거나 거부하도록 만든다. “나는 영감을 주거나 강박적인 사람들과 일하길 좋아한다.” 가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할리우드의 뮤즈, 니콜 키드먼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미완의 초상이다.
유년시절부터 ‘랄프로렌’이나 ‘갭’과 같은 의류 브랜드를 비롯해서 ‘버버리’의 캠페인 모델로도 활약한 바 있는 ‘훈남’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건 딱히 놀라운 사연이 아니다. 하지만 알렉스 페티퍼에게서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엿보인다. <트와일라잇>시리즈의 로버트 패틴슨이나 <해리포터>시리즈의 다니엘 래드클래프가 그러하듯이,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젊은 배우들은 대부분 특정한 캐릭터의 옷을 입고 태어난다. 페티퍼는 올해 초에 차례로 개봉된, <아이 엠 넘버 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외계인 초능력자로 분한 뒤, <비스틀리>에서 잘생긴 외모를 되찾고자 사랑을 갈구하는 추남으로 변신한 페티퍼는 혜성과 같은 등장을 뛰어넘어 상한가를 달리고 있는 신예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SF스릴러물 <나우>(2011)에서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함께 이름을 올린 페티퍼는 올해 또 한번 새로운 면모를 과시할 전망이다. 어메이징한 영 건, 알렉스 페티퍼를 기억하라.
디즈니의 공주로서 화려한 데뷔식을 치룬 앤 헤서웨이는 궁전에 머무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성장통을 헤치며 길을 닦아왔다. 이제 그녀 앞에 길은 열려 있다. 방향을 정하는 건 그녀의 몫이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어수룩한 외모와 수줍은 성격을 지닌 소녀 미아는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소녀는 그네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았다는 그 백조처럼 사회지도층 왕가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소녀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뒤바뀐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은 할리우드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앤 헤서웨이는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 헤서웨이의 첫 번째 영화로 공개된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가 그녀의 무명 시절을 하루 아침에 지워버린 셈이다.
뉴질랜드의 <천국의 맞은 편>(2001) 촬영장에 있던 헤서웨이가 오디션을 위해 태평양을 건넘으로써 그녀의 첫 번째 전환점이 마련됐다. 미약한 경력을 지닌 헤서웨이가 디즈니 공주의 왕관을 하사 받은 건 누구보다도 커다란 눈과 시원한 미소를 자랑하는 미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처음치고는 괜찮은 경력이 있었다. 1999년, 폭스TV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겟 리얼>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선 16세의 헤서웨이는 이듬해에 영 아티스트 어워드의 TV시리즈 최우수연기자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하지만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연출한 게리 마샬이 단 한번의 오디션으로 헤서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오디션 도중 앤이 의자에서 넘어졌고 이로 인해 캐스팅을 결정했다.” 미아 역을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여자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필요했다. “본래 나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헤서웨이가 바로 그녀였다.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할리우드의 신데렐라가 된 헤서웨이 역시 성장통을 건너야 했다. 디즈니의 공주가 되어 화려한 유명세를 드레스처럼 걸쳤지만 이는 점차 그녀를 불편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2>(2004)의 촬영 일정으로 인해 헤서웨이는 출연 성사를 목전에 뒀던 <오페라의 유령>(2004)을 포기해야 했다. 학창 시절 소프라노로 활동한 바 있는 그녀에게 이는 마치 목소리를 잃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겐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전부였고, 이는 당시 내 경력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엘라 인챈티드>(2004)와 <프린세스 다이어리 2>와 같이, 밝고 건강한 미소를 요구하는 가족영화들 속에 갇힌 헤서웨이의 갈증은 점차 심화됐다. 또 한번의 공주 놀이를 마친 헤서웨이는 <하복>(2005)에서 자신의 발랄한 이미지에 욕설을 퍼붓듯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에서 노출 연기와 베드신을 선보인 그녀의 행보는 연기의 질을 떠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질풍노도의 일탈이 아니었다. 발랄한 공주로 박제처럼 남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내가 창조해낸 어떤 것보다도 그 영화가 더욱 자랑스럽다.” 여기서 헤서웨이가 경의를 표한 그 영화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다. 두 남자의 애틋한 멜로드라마인 이 작품은 그녀에게 역할의 크기와 반비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치장했던 젊은 날을 지나 결혼 뒤, 가난에 치여 거칠고 억척스럽게 변해버린 여인의 삶, 헤서웨이의 연기는 지난 날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앤디를 통해 그런 자신감은 구체화됐다. “그건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어떻게 어른답게 선택하는지, 희생의 유무가 어떤 후회를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결과적 차이를 배우는 일이었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온갖 시중을 들어야 하는 비서의 고단한 일상이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헤서웨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시행착오 속에서 진정한 희생의 의미를 깨닫는 인물을 연기해낸다. 점차 패셔너블해지는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헤서웨이에게는 몸매관리가 필요했고, 그 탓에 “배가 고파서 에밀리 블런트와 함께 손을 잡고 울었다”지만 이 작품으로 헤서웨이는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던 메릴 스트립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는 건 그녀에게 더 없는 행운과도 같았다.
성취는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다.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사랑을 그린 <비커밍 제인>(2007)은 현대판 신데렐라로 익숙한 헤서웨이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 영화가 자신을 위한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의 권유로 마음을 돌린 그녀는 제인 오스틴을 자신에게 맞는 맞춤복으로 완성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를 연습하고, 방언을 공부하며 고전적인 우아함에 사실성을 새겨 넣고자 했다. 스티브 카렐과 함께 한 첩보물 코미디 <겟 스마트>(2007)에서 액션까지 소화하는 팔방미인으로서 헤서웨이의 경력은 점차 다채로운 색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2009년, 헤서웨이는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는 여인이 누나의 결혼식에 참여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레이첼, 결혼하다>(2008)에서 헤서웨이의 연기는 변신이라는 수사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진화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영화로 인해 생애 처음으로 흡연을 경험한 헤서웨이는 단지 방탕한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짜 몰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의 딜레마와 이로 인해 얻은 상처들로 앙상해진 여인의 지독한 트라우마를 표출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하얀 여왕은 헤서웨이가 팀 버튼의 기괴한 세계관조차 어울리는 배우로 자라났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로 또 한번 제이크 질렌할과의 연기적 궁합을 과시하는 <러브&드럭스>(2010)에서는 파격적인 노출 연기조차 안정적으로 소화해내면서도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고 표현하는 능력까지 갖춘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언제나 10대가 지나면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건 내게 대단한 변화였다.” 배우는 경험을 입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켜줄 새로운 경험을 갈아입는다. 헤서웨이는 지금 옷장 앞에 서있다. 자신의 성장에 걸맞은 새로운 옷을 고르고 있다.
리부트를 결정한 <스파이더맨>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발탁된 건 앤드류 가필드였다. 많은 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새로운 연출자로 선정된 마크 웹은 말한다. "비록 그의 이름이 아직 낯설겠지만 그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재능을 이해할 것."2007년, 가필드는 첫 주연작 <보이 A>에 출연한 뒤, <로스트 라이언즈>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버라이어티>에서 ‘주목해야 할 배우 10인’으로 선정됐다. 이듬해에는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자신의 경력에 자랑스러운 초석을 세웠다. “내 모든 목표는 단지 내 스스로 표현하길 허락 받는 것이었다.”그는 대단한 갈망만으로 희망을 이룰 수 없음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성과는 15살부터 무대에 오르며 연기적 가능성을 닦아온 노력의 산물이었다. 지난 해에 공개된 <소셜 네트워크>와 <네버 렛 미 고>에서 모든 건 확실해졌다. 그가 자신의 재능으로 이름을 닦아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앤드류 가필드는 빛나고 있다.
‘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