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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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뱀파이어물의 바로크 시대다. 고전적인 호러 장르의 유물이나 다름없었던 뱀파이어는 지금 과도기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새롭게 줄기를 뻗어나가는 뱀파이어물의 진화가 엿보이는 다섯 편의 계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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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문>을 보기 위해선 전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뉴문>의 전편인 <트와일라잇>은 분명한 취향의 호불호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등마저 굽어버릴 판인데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거리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적 만듦새에 대한 불평이 좀처럼 합당하게 먹힐 구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뉴문>이 보고 싶은 이라면 그에 따른 명확한 취향의 확신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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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문> 단평

cinemania 2009. 12. 1. 14:36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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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단평

cinemania 2009. 6. 8. 14:58

지현의 할리우드 진출작 논란 따위를 접어두고라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블러드>는 현재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이 부여하는 묘미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하는 작품이다. 초중반에 등장하는 집단 학살신은 심심하지 않은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딱히 인상적인 액션 수준을 유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때때로 게임 동영상을 삽입한 것마냥 조악하기 짝이 없는 CG가 심심찮게 눈에 띄고, 비전문액션배우의 지친 몸놀림을 커버하기 위해 시종일관 흔들어대는 카메라 워크도 무색하기 짝이 없다. 결론은 <블러드>가 딱히 미덕을 설명하기 어려운 오락영화란 말이다. 혹시나 만약 <공각기동대> 오시이 마모루의 동명 원작 스크린판이란 문구 따위로 그 이상의 기대감을 충만한 관객이 있다면 모든 기대감을 접는 게 낫다. <블러드>는 전공투 시절의 역사적 의식을 투영한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소설도, 그 이후로 뱀파이어 팬픽 수준의 양질을 유지하며 분화해나간 블러드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과 코믹스와도 다른 작품이다. 특히나 증축된 서사는 <블러드>를 부실한 스토리텔링으로 흔드는 과욕 같다.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 할만한 전지현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할 뿐, 안타깝지만 액션을 구사하기엔 지치는 몸놀림을 선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3부작을 생각한다지만 이미 시리즈로서의 가능성은 끝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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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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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단평

cinemania 2009. 4. 25. 12:49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 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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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습격하는 대신 동물을 사냥한다. 태양빛을 받으면 피부가 보석처럼 빛난다.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독심술, 예지력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과 공존한다. 창백한 얼굴에 되려 기품이 서렸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반인류적인 존재로 묘사되던 기성 뱀파이어와 다르다. 생존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관점 자체가 판이하다. 새로운 종족이다. <트와일라잇>은 뱀파이어를 묘사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습성을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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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빼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그곳엔 대상이 없다. 소년은 강해지고 싶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공을 대상으로 협박해봐야 증명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년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소년의 칼은 소년의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다. 소년은 낮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윽박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온다. 창문을 가린 방이 특이하다. 어느 밤, 소년은 또 한번 나무를 상대로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시작한다. 인기척을 알 수 없게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난 소녀가 소년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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