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바야흐로 뱀파이어물의 바로크 시대다. 고전적인 호러 장르의 유물이나 다름없었던 뱀파이어는 지금 과도기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새롭게 줄기를 뻗어나가는 뱀파이어물의 진화가 엿보이는 다섯 편의 계보를 소개한다.
<박쥐성의 무도회>
용감한 뱀파이어 킬러 혹은 실례합니다만, 당신의 이빨이 내 목을 물었어요(The Fearless Vampire Killers Or Pardon Me, But Your Teeth Are In My Neck). 고전적이면서도 음산한 한글 제목과 달리 긴 영문 원제는 모종의 위트를 품고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과 출연을 겸한 1967년작 <박쥐성의 무도회>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례적이란 수사로 치장되는 작품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며 과감한 폭력 묘사조차 불사하는 그의 극단적인 연출 방식 안에서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B급 감수성으로 무장한 이 뱀파이어 영화는 중후한 서스펜스 대신 백치스러운 소동극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이 영화는 비극적인 후일담을 낳았다. 여주인공 역의 샤론 테이트는 이 영화로 만난 로만 폴란스키와 결혼한 뒤 임신 8개월에 이른 당시 살인마 찰스 맨슨이 이끄는 광신도 집단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박힌 유머들은 역설적인 비극으로 맺혔다.
<노스페라투>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나우르의 1922년작 <노스페라투>는 흡혈귀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를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독일 표현주의 고딕영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성적인 메타포를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뱀파이어 영화의 섹스심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이자 뱀파이어라는 캐릭터의 묘사에 있어서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뱀파이어 영화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을 동명 그대로 리메이크한 1979년작 베르너 헤어조크의 <노스페라투>는 원작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발전적 성과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보다 간결해진 캐릭터 관계를 통해 서사적인 몰입도를 높인 리메이크작은 시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원작의 분위기를 보다 관념적인 형태의 메시지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중심 캐릭터로 등장하는 세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눈에 띄는 가운데 특히 강인한 이미지를 전하는 이자벨 아자니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드라큐라>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 가운데 그 원작의 형태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꼽히는 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92년작 <드라큐라>다. 드라큐라의 고전적인 중후함이 잘 표현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사악한 악의 상징으로서 드라큐라를 묘사해온 뱀파이어물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놓인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며 이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의상이 시대극으로서의 사실감을 더하는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트는 장르적인 위력을 더한다. 이는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통해 강력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멜로적인 감성을 부각시킨 코폴라의 연출적 야심과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안소니 홉킨스 등, 화려한 출연진만으로도 호화로운 이 작품에서 드라큐라 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의 열연은 단연 돋보인다. 최초로 컴퓨터 편집을 시도한 작품으로서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은 아카데미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앤 라이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낡은 유물처럼 여겨지던 캐릭터를 회춘시킨, 그러니까 보다 현대적인 배경 안에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확신하게 만든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스타에서 세계 영화시장을 선도하는 큰 손으로 자란 두 배우,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당대 꽃미남 스타였던 두 배우의 외모만으로도 뱀파이어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긴다. 영원히 늙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서의 영원성에 대한 환상과 고독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는 양면적 특성을 부여한 이 영화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하고 있다. 고전적인 캐릭터를 현대적인 배경에 녹여내며 악마적인 공포를 한 꺼풀 벗기고 한층 더욱 신비로운 캐릭터로서의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성공함으로써 영화적 캐릭터로서 뱀파이어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기도 하다.
<렛 미 인>
자신의 방 안에서 칼을 꺼내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매일 같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대상이 없는 윽박 뿐이다. 어느 날처럼 홀로 집 앞의 나무를 대상으로 화를 풀던 소년은 등 뒤에서 기이한 인기척을 느낀다. 소년, 소녀를 만난다. <렛 미 인>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주문이다. 외로운 소년과 고립된 소녀는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밀회를 시작한다. <렛 미 인>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스이자 절절하고 시린 멜로의 감성을 품은 뱀파이어 호러다. 창백하듯 투명한 스웨덴 설원은 평화와 공포가 함께 머무는 중의적 공간이다. 새하얀 눈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사라지면 그 위로 피가 맺힌다. <렛 미 인>은 간혹 무덤덤하게 머리를 드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다가도 순수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실로 아름답고도 경악할만한 로맨스를 선사한다.
<뉴문>을 보기 위해선 전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뉴문>의 전편인 <트와일라잇>은 분명한 취향의 호불호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등마저 굽어버릴 판인데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거리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적 만듦새에 대한 불평이 좀처럼 합당하게 먹힐 구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뉴문>이 보고 싶은 이라면 그에 따른 명확한 취향의 확신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셈이다.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를 상상했다간 화들짝 놀라다 못해 십자가를 그을 만큼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는 정통 팬들에게 불순하다 못해 이단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여기서 뱀파이어란 단지 10대 취향 팬픽의 비범한 주인공에 가깝다. 태양빛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린다는 스와로브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들과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황홀한 시선엔 환상이 어른거린다. 뱀파이어라고 쓰고 아이돌이라 읽어야 한다. 단지 뱀파이어는 거들 뿐, 중요한 건 사랑이고 로맨스다. 그러니까 결국 뱀파이어란 존재는 태생이 다른 인간과의 로맨스에 난관을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종교배의 삼부능선인 셈이다.
초반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읊조리는 <뉴문>은 이윽고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치환한다. 자신이 곁에 있을수록 벨라가 위험해진다는 판단을 내린 에드워드가 결국 벨라를 떠나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벨라가 탈선을 시도하고 자살마저 결심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동원되는 건 삼각관계다. 남몰래 벨라를 사모하던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자신의 마음을 종종 어필하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벨라는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벨라는 제이콥의 비밀을 알게 되고 벨라도 모르는 위기가 다가온다.
사실상 <뉴문>은 진지하게 눈뜨고 볼 수 없는 영화다. 만약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라는 소재에 이끌려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팔자를 탓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귀여니 소설을 읽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개념적 충격을 체감했다면 <뉴문>을 보는 130분 간 자기성찰을 하다 못해 득도라도 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건 이 영화의 태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뉴문>은 유아적인 환상으로 점철된 원작 텍스트의 태도를 온전히 이미지로 재생하고 있는 영화다. 열광과 혐오의 기준도 그 지점에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수 없는 취향의 현상인 셈이다.
확실한 건 <트와일라잇>을 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면 <뉴문>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됐거나 그 오그라듦을 하나의 개그 장르로 이해해버렸던 당신이라면 조만간 티켓을 손에 쥘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고, 늑대인간이고, 로맨스고, 멜로고, 다 해당사항 없다. 그 절실한 대사와 그윽한 눈빛을 의도적인 개그로서 즐길 수 있던가, 슈퍼스타적인 뱀파이어의 외모에 매혹당하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130분을 견딜 재간이 없을 게다. 물론 여자친구 손이라도 잡고 보게 될 남자라면 극장 문을 박차고 나와서 그 지난한 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건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최소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된 여자 친구의 상향평준화된 눈높이를 고려해본다면 조만간 찾아올 크리스마스에 TV리모컨이나 붙잡게 될 확률이 커질 테니까.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은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
전지현의 할리우드 진출작 논란 따위를 접어두고라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블러드>는 현재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이 부여하는 묘미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하는 작품이다. 초중반에 등장하는 집단 학살신은 심심하지 않은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딱히 인상적인 액션 수준을 유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때때로 게임 동영상을 삽입한 것마냥 조악하기 짝이 없는 CG가 심심찮게 눈에 띄고, 비전문액션배우의 지친 몸놀림을 커버하기 위해 시종일관 흔들어대는 카메라 워크도 무색하기 짝이 없다. 결론은 <블러드>가 딱히 미덕을 설명하기 어려운 오락영화란 말이다. 혹시나 만약 <공각기동대> 오시이 마모루의 동명 원작 스크린판이란 문구 따위로 그 이상의 기대감을 충만한 관객이 있다면 모든 기대감을 접는 게 낫다. <블러드>는 전공투 시절의 역사적 의식을 투영한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소설도, 그 이후로 뱀파이어 팬픽 수준의 양질을 유지하며 분화해나간 ‘블러드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과 코믹스와도 다른 작품이다. 특히나 증축된 서사는 <블러드>를 부실한 스토리텔링으로 흔드는 과욕 같다.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 할만한 전지현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할 뿐, 안타깝지만 액션을 구사하기엔 지치는 몸놀림을 선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3부작을 생각한다지만 이미 시리즈로서의 가능성은 끝난 느낌이다.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인간을 습격하는 대신 동물을 사냥한다. 태양빛을 받으면 피부가 보석처럼 빛난다.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독심술, 예지력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과 공존한다. 창백한 얼굴에 되려 기품이 서렸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반인류적인 존재로 묘사되던 기성 뱀파이어와 다르다. 생존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관점 자체가 판이하다. 새로운 종족이다. <트와일라잇>은 뱀파이어를 묘사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습성을 무시한다.
단순히 말하자면 <트와일라잇>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공산품이 아니다. 특정한 대상을 타깃으로 한 맞춤식 기능성 제품과 같다.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만 장르물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뿌리가 되는 기성 뱀파이어와 다른 개체다. 전통적인 특성과의 접점이 좁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은 뱀파이어의 모티브를 빌린 어떤 은유적 대상에 가깝다. 비약하자면 귀여니 소설의 일진과도 비슷한 존재다.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서 소녀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특별한 개체들이다. 그것이 종족의 구분으로 진전됐을 따름이다. 궁극적으로 할리퀸 로맨스나 다름없는, 그럼으로 전세계 소녀팬들의 열광을 한몸에 얻은 원작소설의 인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뱀파이어 영화라기 보단 틴에이저 무비라 명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만남은 실질적으로 플라토닉한 로맨스를 이룬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혈액을 탐닉하는 뱀파이어의 전통적인 습성을 간단히 배제해버린 <트와일라잇>에서 두 존재의 차이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거리감의 기능성에서 이뤄질 수 없는 감정적 거리로 치환된다.
존재의 차이로 인해 조숙한 성애는 거세되고 로맨스의 개체는 존재를 보존하듯 저마다의 순결을 유지한다. 전통적으로 에로티시즘의 화신처럼 묘사되던 뱀파이어 대신 순결하고 강직한 기사의 상이 아른거린다. 이사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은 단지 뱀파이어와 인간이라기보단 단순히 이뤄질 수 없는 어떤 관계라고 규정해도 무방한 허울과 다름없다. <트와일라잇>는 단지 그것을 간단히 걸쳐버린 셈이다. 이를테면 그렇다. 심각하면 지는 거다.
취향의 여부를 떠나서 영화 자체가 기본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말을 하긴 어렵다. 때때로 인물과 상황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장면적으로, 연기적으로 느슨하여 객석으로의 전이가 지체된다. 단지 그것이 복선으로 장치되기 위한 애매모호함이었다 핑계를 댈 수 있을지언정 그 상황 자체가 종종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기 힘들다. 에드워드를 연기하는 로버트 패틴슨은 때로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기 보단 몰입하려 애쓰는 표정을 지독하게 전시한다. 이것이 때때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이다. 동시에 이는 배우의 잘못이라기 보단 캐릭터에 대한 막연한 구상으로 젊은 배우의 덕을 보려 한 연출자의 과오에 가깝다. 몇몇 장면은 허세가 심한 기교로 남발된다.
원작 소설의 인기가 본토에 비해 미약한 국내에서 그 기능성의 여파를 장담하긴 힘들지만 특정 대상을 위한 효과는 유효하다. 틴에이저 로맨스 무비로서의 기능성이 뱀파이어를 착취해 슈퍼히어로로 확장시키며 판타지의 환각을 조장한다. 기본적인 골조는 소녀의 성장이며 그 여정은 인테리어와 같은 로맨스를 가꾸며 이뤄진다. 마치 통과의례를 거친 것마냥 모험 같은 로맨스는 사춘기 소녀에게 시련과 경험을 선사한다. 그 동세대 소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킬링 타임이다. 영화의 분량 이후에도 진전될만한 원작의 소스가 여전히 많은 분량을 남기고 있다. 영화도 이를 의식하듯 애매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미 시장을 의식한 영화가 얼마나 자기 계발에 충실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공될 제품의 생산 라인은 좀 더 장기적으로 가동될 것 같다.
칼을 빼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그곳엔 대상이 없다. 소년은 강해지고 싶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공을 대상으로 협박해봐야 증명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년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소년의 칼은 소년의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다. 소년은 낮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윽박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온다. 창문을 가린 방이 특이하다. 어느 밤, 소년은 또 한번 나무를 상대로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시작한다. 인기척을 알 수 없게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난 소녀가 소년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
<렛 미 인>은, 궁극적으로 원제인 ‘Let the right one in’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소녀를 초대하는 주문이다. 이는 영화를 본다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의 감정적 의미다. 소녀가 소년에게 듣고픈, 혹은 소년이 소녀에게 전하고픈 진심의 언어다. 그것은 투명하게, 때론 창백하게 느껴지는 스크린의 중의적 질감과 무관하지 않다. 눈빛에 반사된 자연광처럼 투명한 광량을 보존하던 스크린은 때때로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처럼 질겁한 인상으로 돌변하곤 한다. <렛 미 인>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과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맥락의 평면성은 특별한 장치적 소재 하나로 입체적 양상을 띤다. 동심에서 비롯된 순수한 로맨스는 귀엽고 천진난만하지만 그 관계의 배후엔 경악할만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이란 이엘리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란 점에 있다. 다시 한번 이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는 낮에 죽어있고, 밤에 살아나는 존재, 즉 뱀파이어다.-스포일러라고 판단하지 말 것. 어차피 영화는 이런 정보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미 이 정도의 정보는 이 영화의 홍보상에서 배포되는 실정이다.- 그녀의 존재는 <렛 미 인>에서 역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호러 장르의 제스처를 안고 간다는 점을 암시하게 만드는데 그에 따라 영화상에서도 잔혹한 방식의 호러적 장면들이 연출되거나 등장하곤 한다. 또한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소년과 소녀의 러브스토리의 지속적 한계를 예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양면성을 획득한다. 별개의 지점에 놓인 두 감정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소통시킨다.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스웨덴의 평화롭고 적막한 풍광이다. 다소 이색적이긴 하나 끔찍한 상황에서는 항상 기이하게도 유머가 발생한다. 풍경에서 발생하는 역설적 태도가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태도와 함께 기이한 슬랩스틱을 발생시킨다. 자연이 잘 보존된 그곳의 평화로운 풍경은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편으로 그 적막함이 모종의 살인을 기획하기 좋은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장소에 대한 모순이 공포와 유희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투명한 채광이 창백하게 돌변할 때 정서적인 긴장감만큼이나 어떤 적막한 고립감이 동시에 발생한다. 그 적막한 풍경 속에 홀로 선 오스칼의 모습도 외롭기 짝이 없다. 심지어 친구들이 소변기에 버린 바지를 봉지에 주워담고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엔 한겨울의 한기만큼이나 외로움이 담담하게 서린다. 오스칼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소년이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동병상련의 상대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은신처다. 처지가 비슷한 건 이엘리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갈망한다.
오스칼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년에게 세상은 무심하고 창백한 곳이다. 이엘리와 오스칼은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은총이다.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자 절대적인 신뢰가 가능한 상대다. 그 은밀한 연대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감정을 투명하게 보존한다. <렛 미 인>은 초자연적인 소재를 통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를 황홀하게 완성한다. 간혹 무덤덤하게 접근하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지만 <렛 미 인>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애틋한 멜로다. 괴로움이 직면한 낮에 창백하기만 하던 소년은 소녀가 살아나는 밤을 기다리며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년을 한 뼘 성장시키고 소녀를 살아가게 만든다. 소년의 밤은 누군가의 낮보다 아름답다. 그 밤엔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가 있으므로, 소년은 빛난다. 무엇보다도 <렛 미 인>은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선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판타스틱한 러브스토리는 실로 경악할만한 로맨스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