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은 자신이 쌓아온 문명의 풍요로부터 추방당했다. 과거를 대변하는 앙상한 풍경들이 주검처럼 나뒹굴며 문명의 단절을 증명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폐한 삶을 연명하며 죽음을 향해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삶이란 무력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지 남아있는 생명을 부지하는 본능뿐이다. 살아남았다는 말 자체가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곳은 이미 끝장난 세계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될 수 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생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단지 살아남았고 죽을 수 없어서, 혹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유효하지 않은 생이 하루하루 연장될 뿐이다. 마치 짐승과도 같이 그 삶엔 인간적이라 부를 만한 어떤 근거가 없다. 이미 인간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노력 자체에 의미가 없다. 폐허로 내려앉은 문명의 지난 흔적들은 인간이 쌓아 올렸던 모든 역사를 거짓말처럼 되돌린다. 거대한 재의 기둥이 된 나무들은 하나씩 쓰러져가고 바다마저 잿빛으로 물든 세상엔 한기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그 끝장난 세계의 풍경에 에워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아이는 묻는다. “우린 착한 사람인가요?” 아버지는 답한다. “그렇단다.” 선악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없는 세상에서 아이는 선을 묻고 아버지는 선을 답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이 불순한 세상에서 부자(父子)는 선을 꿈꾼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말의 희망이다. 단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할 아들이 그 빌어먹을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발 남은 총알을 장전하기 망설이는 건 그 두 발의 총알이 자신과 아들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 총알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아들부터. 그리고 그 전까진 살아남아야 한다. 불을 옮기는 사람으로써, 선의 방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 너머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건, 불행히도 그 부자가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이다.
<더 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종말을 지나쳐버린 인간들의 껍데기만 남은 일상을 살핀다. 그리고 그 얇은 껍데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단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해쳐야 하고, 해치지 않기 위해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한다.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부자는 남쪽을 향해 전진한다. 그 발걸음엔 어떤 의욕이나 야심이 없다. 그저 살아야 한다. 걸어도 걸어도 희망 없는 내일을 향해 살아나가서 전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살아간다는 의미를 환기시키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참혹한 풍경에서 몇 발치 벗어나 스크린을 응시할 누군가가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 대지 구석까지 잿빛으로 가득한 세계는 되레 보는 이의 현재를 환기시키고 그 세계 속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부자의 전진을 통해 제 삶을 살필 것이다. 그 황폐한 세계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전진하는 부자는 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음습한 세상에서 입김을 내면서도 종래까지 인간적인 양심의 체온을 잉태시키고 유지해나간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현세의 관념 따윈 온전히 증발해버린 곳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을 고민한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만약 원작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하여 <더 로드>에 좋은 평을 내릴 수 없다는 지적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이 있고, <더 로드>가 있었다. <더 로드>를 추켜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원작에 예속돼버린 것들이다. 그 황폐한 세계관의 디자인은 작가의 손으로서 이미 기록된 것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 아래 매몰된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러한 영화의 결과물을 보고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건 영화의 입장에서 분명 억울한 일이 될게다.
<더 로드>는 분명 비범한 작품이다. 걸작이라 불리는 원작의 유려한 활자를 장엄한 영상으로 치환한 <더 로드>는 비범한 텍스트의 위엄을 훼손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나열만으로도 일단 성공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그 재현성이 어떤 진심을 담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보다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 원작의 비범한 양태를 훼손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것이 품은 감정적 내면을 원작과 다른 판본의 틀 안에서도 온전히 전달해낸다. 텍스트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거나 연상했던 이미지들이 구체적인 자리를 잡고 시선을 압도해낸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황량한 풍경에 둘러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더 로드>는 원작을 통해 연상했던 막연한 이미지의 극단적 구체화를 이룬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온전히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건 어딘가 억울한 일이 될게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물론 <더 로드>는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아래 갇힌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동시에 그것이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전작 <폭력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는 관객을 폭력의 현장에 무덤덤하게 노출시키며 이야기를 꺼내 든다. 날이 선 면도칼은 사람의 목을 갈라 피를 쏟아내고, 약국에 들어와 도움을 청하던 임산부는 발 아래로 하혈하다 쓰러진다. 시작부터 피가 흥건하다. 그 거리엔 피가 흐른다. 포도주를 따르듯 피를 부르는 무리들이 조용히 살아간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피의 거래로 거리를 장악한 이들의 살벌한 언약에 발을 담게 된 자의 이야기다. 폭력에 가담한 그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 없다.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침전된 삶에 발목을 잡힌다.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다. 니콜라이는 국제적 범죄조직 ‘보리V자콘’의 보스 세미온(아민 뮬러-스탈)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을 돕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앞뒤 분간 못하는 키릴과 달리 니콜라이는 냉정하면서도 속이 깊다. 거친 인상과 달리 난폭하지도 않다. 명확하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직감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런던 거리를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보리V자콘’의 패밀리들은 거리의 이방인이다. 그들은 폭력을 유입하며 그 거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니콜라이는 그들이 장악한 거리에 편입하기 위해 폭력을 전시한다. 신임을 얻고 그들의 일부로 거듭나려 한다. 결국 세례식이 거행되듯 그는 조직의 일부로 문신을 새긴다.
폭력을 계승하려는 아비는 직계의 무능함을 질시하면서도 보호하려 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인을 주문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후계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거나 무력하다. 아비들이 자식들로 전전긍긍할 때 새롭게 유입된 이방인이 눈에 들어온다. 니콜라이는 키릴로 인한 조직의 손실을 보석하기 좋은 대상이다. 세미온은 니콜라이에게 의식을 통해 조직을 세례한다. 그는 조직의 신임을 얻고 중책을 맡게 된다. 자식으로부터 비롯된 조직의 부채를 갚기 위한 제물로 삼는다. 사투가 벌어진다. 조직의 일원으로 거듭되는 순간 조직을 위한 죽음에 내몰림마저 불사해야 한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한 관찰이 시작되는 건 일기장 덕분이다. 사람이 죽는 동시에 생명이 태어난다. 폭력에 노출된 어미는 죽어서 새로운 자식을 남긴다. 동시에 그녀가 남긴 기록은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산원 안나(나오미 왓츠)는 그 실체로 접근하지만 실상 그녀조차도 은밀하게 다가오는 폭력의 위협을 감수해야 할 따름이다. 니콜라이는 조직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은밀히 흔들린다. 조직의 수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명령을 이행하지만 그는 폭력을 맹신하는 무리와 다르다. 궁극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조직에 잠입하면서도 조직의 수하로서의 역할극에 충실하다.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폭력에 온전히 노출된다. 또한 조직에 충성하는 동시에 안나와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 이전의 사연처럼 보인다. 두 영화가 하나의 맥락을 두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정서적인 진화의 측면에서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보다 뒤가 아닌 앞에 놓인 이야기 같다. <폭력의 역사>가 폭력의 인과율을 운명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양면성을 저울질하듯 관찰하는 이야기다. 전자가 어떤 결과에 대한 후일담이라면 후자는 결과를 가늠하는 전사의 추적에 가깝다. 갱스터 무비의 외피를 입고 중후한 방식으로 구술되는 영화는 흥건하고 질퍽거리는 이미지를 묘사한다. 관객은 그 폭력을 관찰하는 동시에 온전히 폭력에 노출된다. 아이를 입양한 안나의 가족이 스코틀랜드의 외딴 곳에서 평화를 누릴 때 니콜라이는 런던의 어두운 바에서 고독을 맞이한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사내는 구원을 약속할 뿐 정작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선의든 악의든, 폭력은 그 대상마저 철저하게 유린한다. 발가벗고 적을 맞이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선 악마가 되야 한다. 폭력과 계약한 사내는 그 속에서 계속 가라앉을 따름이다. 죽여야 할 적도, 살려야 할 가족도 모두 다 잃은 채 홀로 아득한 폭력에 갇혀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