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은 자신이 쌓아온 문명의 풍요로부터 추방당했다. 과거를 대변하는 앙상한 풍경들이 주검처럼 나뒹굴며 문명의 단절을 증명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폐한 삶을 연명하며 죽음을 향해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삶이란 무력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지 남아있는 생명을 부지하는 본능뿐이다. 살아남았다는 말 자체가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곳은 이미 끝장난 세계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될 수 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생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단지 살아남았고 죽을 수 없어서, 혹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유효하지 않은 생이 하루하루 연장될 뿐이다. 마치 짐승과도 같이 그 삶엔 인간적이라 부를 만한 어떤 근거가 없다. 이미 인간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노력 자체에 의미가 없다. 폐허로 내려앉은 문명의 지난 흔적들은 인간이 쌓아 올렸던 모든 역사를 거짓말처럼 되돌린다. 거대한 재의 기둥이 된 나무들은 하나씩 쓰러져가고 바다마저 잿빛으로 물든 세상엔 한기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그 끝장난 세계의 풍경에 에워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아이는 묻는다. “우린 착한 사람인가요?” 아버지는 답한다. “그렇단다.” 선악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없는 세상에서 아이는 선을 묻고 아버지는 선을 답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이 불순한 세상에서 부자(父子)는 선을 꿈꾼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말의 희망이다. 단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할 아들이 그 빌어먹을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발 남은 총알을 장전하기 망설이는 건 그 두 발의 총알이 자신과 아들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 총알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아들부터. 그리고 그 전까진 살아남아야 한다. 불을 옮기는 사람으로써, 선의 방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 너머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건, 불행히도 그 부자가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이다.
<더 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종말을 지나쳐버린 인간들의 껍데기만 남은 일상을 살핀다. 그리고 그 얇은 껍데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단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해쳐야 하고, 해치지 않기 위해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한다.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부자는 남쪽을 향해 전진한다. 그 발걸음엔 어떤 의욕이나 야심이 없다. 그저 살아야 한다. 걸어도 걸어도 희망 없는 내일을 향해 살아나가서 전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살아간다는 의미를 환기시키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참혹한 풍경에서 몇 발치 벗어나 스크린을 응시할 누군가가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 대지 구석까지 잿빛으로 가득한 세계는 되레 보는 이의 현재를 환기시키고 그 세계 속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부자의 전진을 통해 제 삶을 살필 것이다. 그 황폐한 세계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전진하는 부자는 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음습한 세상에서 입김을 내면서도 종래까지 인간적인 양심의 체온을 잉태시키고 유지해나간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현세의 관념 따윈 온전히 증발해버린 곳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을 고민한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만약 원작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하여 <더 로드>에 좋은 평을 내릴 수 없다는 지적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이 있고, <더 로드>가 있었다. <더 로드>를 추켜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원작에 예속돼버린 것들이다. 그 황폐한 세계관의 디자인은 작가의 손으로서 이미 기록된 것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 아래 매몰된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러한 영화의 결과물을 보고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건 영화의 입장에서 분명 억울한 일이 될게다.
<더 로드>는 분명 비범한 작품이다. 걸작이라 불리는 원작의 유려한 활자를 장엄한 영상으로 치환한 <더 로드>는 비범한 텍스트의 위엄을 훼손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나열만으로도 일단 성공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그 재현성이 어떤 진심을 담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보다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 원작의 비범한 양태를 훼손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것이 품은 감정적 내면을 원작과 다른 판본의 틀 안에서도 온전히 전달해낸다. 텍스트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거나 연상했던 이미지들이 구체적인 자리를 잡고 시선을 압도해낸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황량한 풍경에 둘러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더 로드>는 원작을 통해 연상했던 막연한 이미지의 극단적 구체화를 이룬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온전히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건 어딘가 억울한 일이 될게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물론 <더 로드>는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아래 갇힌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동시에 그것이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세상에 그를 제압할 상대는 없다. 총알조차도 그에겐 가벼운 쇳덩이에 불과하다. 그는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이 남자, 나태하다. 질서의식도 없다. 언제나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니는 그는 도시의 필요악이다. 악당이 나타나도 그는 길가 벤치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잠을 자고 있다. 악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꼬마에게 등 떠밀려 현장으로 출동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안전이나 도시의 미관 따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의 영웅놀이가 LA를 위협하고 있다고, 그가 차라리 뉴욕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시민들은 푸념과 질시를 보낸다. 그 남자 핸콕(윌 스미스)은 그래도 술병을 따고 있다.
<핸콕>은 기존의 히어로 무비들과는 개념이 다르다. 핸콕은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신분을 가리기 위해 평범남과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술병을 들고 다니는 고주망태가 되어 음주비행을 일삼고 기분 내키는 대로 도시의 기물을 파손하는 꼴통(asshole)일 뿐이다. 물론 그가 도로에서 총기를 난사하며 질주하는 자들을 제압하거나 철도 건널목에 멈춰선 차에 탑승하고 있는 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철도를 막아서는 등,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나 막대한 실정이다. 핸콕은 악당들로부터도, 시민으로부터도 천대받는 유례없는 초인이자 사회적 필요악이다.
기존의 히어로 무비의 관습을 뒤엎는 설정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다. 제각각 슈트를 갖춰 입은 초인들은 자신의 이중생활에 번뇌하거나 마이너리티로써의 정체성에 고민하곤 했지만-최근 <아이언맨>이 이례적인 사례를 남기긴 했지만- 술병을 들고 날아다니는 핸콕에게 그들은 쫄쫄이 타이즈를 입은 호모에 불과하다. <핸콕>은 히어로 무비의 관성에 짓눌린 무게감보단 가십거리를 양산하는 셀레브리티의 가벼움에 가깝다.핸콕이 우연히 목숨을 구한 홍보전문가 레이(제이슨 베이트먼)가 핸콕에게 ‘당신은 사랑받아야 한다’며 이미지 메이킹 제의를 주고 핸콕이 결국 이를 수용하는 순간 <핸콕>이 지닌 설정의 가벼운 묘미는 확실한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꼴통으로 불리던 핸콕이 제멋대로 웃자란 버릇을 억제하며 자숙을 하던 중, 결정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레이가 준 슈트를 입고 매너있게(?) 악당으로부터 도시를 구하는 순간 그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탈바꿈되고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찬사 받는 영웅의 탄생 과정은 흡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는 듯한 묘한 뿌듯함을 남기는 동시에 아이러니한 위트를 형성시킨다. 동시에 이는 스타 기획 시스템 속에서 사고뭉치 셀레브리티가 국민스타로 거듭나는 이미지 메이킹 과정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설정의 묘미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 약발도 떨어진다. 기막힌 설정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그건 에너자이저처럼 오래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운 소재 덕분에 <핸콕>은 러닝타임을 유지시킬 땔감이 더 필요했다. 그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은 간단한 발상전환만으로 상승세를 유지했던 영화적 묘미를 순간 역으로 눕히는 셈이 됐다. 물론 의외의 캐릭터를 전복시키는 깜짝쇼를 펼치며 (스포일러 따위를 접하지 않은 관객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효과를 일시적으로 작동시키긴 하지만 그 역시도 약발이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재치 있는 입담과 설정의 파격을 통해 버라이어티의 묘미를 펼치던 <핸콕>은 드라마로 연결한다. 랩뮤직처럼 리드미컬하던 재미는 점차 오페라처럼 장중해진다.
전후로 양분할 수 있는 내러티브 전환의 무리수와 함께 영화는 전체적인 흐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처럼 연인의 운명을 타고난 불사의 남녀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의 비범한 능력을 중화시키는 덕분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운명적 비극을 통해 간절한 로맨스의 기운마저 내포하는 후반부는 개별적인 설정으로써 흥미를 유발할만한 사안이지만 기존에 <핸콕>이 지니고 있던 주요한 매력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핸콕이 선량해지는 순간, <핸콕>은 일정한 묘미를 잃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핸콕>은 삐딱하고 불량한 초인의 망나니 짓을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작품이었기에 그 설정에 발전적인 양상을 덧씌우지 못하는 이상, 영화적 효력도 거기서 끝날 공산이 컸던 까닭이다.
러닝 타임의 절반 가량을 꼴통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에 할애한 <핸콕>은 나머지 러닝타임을 메우기 위한 대책마련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10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안에서 그 설정을 효과적으로 지속시킬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애초에 <핸콕>의 시나리오는 현재 완성본에 비해 조금 어두운 내용으로 전개됐다 한다.- 기존의 이미지를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용두사미로 전락한 듯한 <핸콕>은 여러모로 아쉬운 기획물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선전하는 윌 스미스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용두사미의 진수를 보여준 <나는 전설이다>의 뒤를 이어 <핸콕>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 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