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인간은 드라큘라와 함께 서구의 고전적인 서스펜스의 소재로서 이야기를 통해 장수를 누려왔다. <울프맨>은 이 고전적 소재가 현대에서도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작품 같다. 1941년, 조지 와그너가 연출한 동명원작을 리메이크한 <울프맨>은 ‘랩 디졸브(Lap Dissolve)’ 기법을 활용하며 당대 영상기법의 교과서적 선례로 추앙받았던 원작의 시대로부터 현격하게 진화된 CG기술력을 토대로 현대적인 영상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면서도 고전적인 특수분장기법을 포용함으로써 클래식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원작이 동시대 안에서 파격적인 가치를 증명했던 것과 달리 <울프맨>은 되레 복고적인 가치를 어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식적 태도는 원작의 형태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리메이크라는 방식의 가치를 생산해낸다.
사실 <울프맨>은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원작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10여 년 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로렌스(베네치오 델 토로)에게 동생이 실종됐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이로 인해 로렌스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로 인해 아버지 존(안소니 홉킨스)과 재회하는 로렌스는 괴기한 사건에 휘말림과 동시에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큰 틀 안에서 원작과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는 서사는 딱히 그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현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만한 것이 아니다. <울프맨>은 전형적인 늑대인간 이야기를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재가 잉태한 스토리의 원형에 근접한 작품인 까닭이다. 예기치 않게 늑대인간의 운명에 속박돼 버린 사내의 비극적 운명론, 그리고 그 위에 덧입혀질 로맨스적 비극 등은 하나 같이 고전적인 소재의 전형성을 설명하기 좋은 사례에 가깝다.
물론 <울프맨>이 원작의 서사적 육체에 온전히 빙의된 것만은 아니다. 변형된 캐릭터의 이름은 자처하고라도, 로렌스와 대립각의 위치에 선 아버지 존의 캐릭터의 변화는 원작과 <울프맨>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을 이루는 가장 큰 수단이다. 액자구성에 가까운 아버지의 서사에 비극적인 감정선을 부여한 원작과 달리 <울프맨>은 철저하게 존에게서 비극적인 감정선을 배척시킨다.그는 <울프맨>에서 로렌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 그의 비극성과 폭력성을 보다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대립각으로서 보다 강한 존재감을 설득한다. 동시에 존을 연기하는 안소니 홉킨스는 이런 영화의 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런 캐릭터의 완성도는 결말부에 연출되는 파국적 정서를 보다 강력하게 보좌하는 것이기도 하다.
<울프맨>은 CG를 비롯한 현대적 영상기술을 전시하며 늑대인간의 변신이나 폭주가 발생시키는 잔인한 볼거리를 부각시키기 보다도 고전적인 서사와 문학적 비극의 연출에 보다 적극적이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의 비극적 운명론과 오이디푸스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멜로적 파토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정서적 무게가 중후한 시대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영상을 곁들이며 <울프맨>에 앤티크(antique)한 가치를 부여한다. 실제로 로렌스가 배우로서 <햄릿>의 무대에 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 <울프맨>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비극적 딜레마가 극적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울프맨>이 추구한 과거지향적인 방식의 수용은 때때로 낡은 산물이라는 인식을 온전히 차단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늑대인간이라는 고전적 소재의 낡은 감성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서사적 투박함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비극적 정서를 지향한 서사적 의도는 일면 비범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탄탄하게 여며야 할 서사적 진전에서 느슨한 간극들이 발견된다. 또한 늑대인간이 연출하는 서스펜스적 긴장감과 액션의 박진감을 묘사하는데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하기 보다도 개인의 트라우마와 딜레마를 정신분열저인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는 양상이 때때로 혼란스럽다. 고전적인 서사의 양식을 수용하겠다는 극적 의도와 달리 인물의 정서는 현대적인 정신질환적 분석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부되는 양상이다.
물론 영화의 중후한 무게감을 관철시키는 언해피엔딩의 결말부까지, <울프맨>은 자신의 서사적 의도를 며확히 관철시키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를 얻어낼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고전적인 중후함과 우아함을 갖춘 배우들의 풍모와 기질은 <울프맨>의 의도를 명확히 다지는 영화적 밑천으로서 유효한 역할을 해낸다. 다만 고전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이미지 안에서 현대적인 정신분석학에 기인한 트라우마를 연출해내는 작품의 기질로부터 발생할만한 감상적 불협화음은 상업영화적인 자극적 세기를 원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감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안티히어로의 감수성에 젖은 현대 관객의 기대감에 고전적 괴물의 트라우마를 들이미는 꼴이랄까.
가명의 셀프메이드(self-made) 작가가 된 감독. 그 전업엔 사연이 있다. 감독은 눈이 멀었고, 빛이 없는 세상에서 연출이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이야기꾼으로 삶을 전가했다. 감독은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그게 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처럼 어긋난 단추를 채우듯 균열적인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의 삶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리던 시절을 수집해 다시 삶을 복원해나가는 작업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잔잔한 심해에서 거친 수면으로 나아가듯 로맨스의 파국을 심상찮게 묘사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지만 특유의 멜로적 파토스에서 새어 나오는 긴장감과 성격이 다른 스릴러적 서스펜스가 별도로 구성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풍부한 정서적 감흥을 자아내는 유려한 영상은 여전히 대단한 감상을 부여하면서도 서사적 흥미를 자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전작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덕분에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감지되던 자극적 심상의 깊이가 얕아진 듯한 인상이 들지만 텍스트적인 재미는 좀 더 보충된 느낌이다. 동시에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98)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자전적 고백이 담긴 것만 같은 입체적 감상마저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영화적 경력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귀향>이나 <그녀에게>만큼의 감정적 진동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안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페넬로페 크루즈를 선택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안목은 이번에도 또 한번 여실히 증명된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럽다.
한적한 휴양지를 찾은 가족이 이방인의 방문을 받아들이지만 뒤늦게야 그들이 딸에게 린치를 가한 상대임을 직감한 부모는 울분을 삭히며 그들에게 맞설 채비를 한다. ‘적과의 동침’을 알게 된 ‘가족의 역습’. 마이너 취향의 B급 이미지를 가지치기하고 인물의 심리적 서스펜스를 줄기로 사건을 묘사해나가는 <왼편 마지막 집>은 웨스 크레이븐의 것이라기 보단 차라리 스티븐 킹의 것에 가깝다. 약자로 치환되는 소시민이 가족을 위협하는 악랄한 범죄자에 맞서 벌이는 사투는 생존적 저항에서 대결적 복수로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모종의 쾌감을 부여한다. 잔혹한 이미지를 전시하기 보단 인물의 거리감에 따라 조율되는 심리적 중압감을 주무기로 삼는 <왼편 마지막 집>은 지나치게 날카롭지도 무디지도 않은 칼처럼 용도가 적절한 오락적 장르영화로서 가치가 있다.
출산을 앞두고 산통에 시달리는 산모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한다. 휠체어를 탄 채 분만실로 향하는 산모는 당장 맞이한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설렘이 가득하다. 하지만 곧 잉태의 축복은 사산의 저주로 돌변한다. 갑작스런 출혈과 함께 유산을 알리던 의사는 곧이어 태아의 주검을 꺼내기 위한 절제술에 돌입한다. 비명을 지르는 아내 앞으로 뒤늦게 분만실에 들어온 탓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남편이 캠코더를 들이민다. 순간 의사가 말한다. “아이가 살아있어요.”온 몸에 피에 젖은 아이가 아내의 얼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한번 날카로운 비명으로 분만실을 뒤흔들던 아내는 비로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난다.
아내의 악몽에서 시작되는 <오펀: 천사의 비밀>(이하, <오펀>)은 진짜 악몽 같은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 한 가정의 비극을 담보로 한 스릴러다.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한 부부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영민하고 착한 여자아이를 입양하지만 딸이 된 입양 소녀는 어느 순간부터 괴물 같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점차 의심에 빠져드는 아내, 이를 부인하는 남편은 지난 날의 비화를 꺼내 들고 갈등에 빠져들며 아이가 계획한 파국으로 발을 담근다. 친절한 이방인의 유입이 갈등을 부르고 감춰진 속내가 파국을 모색하는 과정은 어느 스릴러 영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란 점에서 <오펀>이 활용하는 서스펜스의 장치들은 딱히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악마적 영악함을 지닌 아동 캐릭터로부터 강력하게 발산되는 서스펜스는 <오멘>과 같은 오컬트 무비의 기시감을 부른다. 동시에 입양아가 평화로운 가정을 뒤흔든다는 설정은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 지키기 스릴러에서 활용하던 전술과 유사한 것이다. <오펀>은 ‘낯선 자의 친절을 경계하라’는 스릴러적 규칙에 입각한 캐릭터 장르물이다. <오펀>이 새 술을 담은 부대는 아니란 의미다. 하지만 <오펀>은 뛰어난 응용력을 선보이는 호러이자 스릴러다. 사악한 본능을 고스란히 선보이는 아동 캐릭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매력을 선사하며 이는 <오펀>이 곳곳에 매복해둔 장치들과 더불어 장르적 착시를 이룬다.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악의 근본처럼 묘사하는 동시에 호러적인 연출방식을 더하며 전략적으로 초자연적 예감을 부른다.
캐릭터의 완성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만큼 어린 배우의 영민한 연기가 관건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펀>에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는 높게 평가 받을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노골적인 본심을 드러내는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할 때마다 긴장감이 새어 나오고 이는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축적되며 영화 안에서 지속적인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또한 <오펀>은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절대악의 대상에 국한시키지 않고 아동 특유의 유약한 심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궁극적인 장르적 목적성에 접근한다. 이기적인 아동의 심리를 전시함으로써 절대적인 신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인 병리학으로서 범죄적 논리를 설득시킨다.
말미에 다다라 밝혀지는 진실은 사실 <오펀>이 야기시킨 모든 서사적 이해를 온전히 전복시키는 반전 그 자체다. 아동 캐릭터라는 정보를 통해 이해되던 심리적 구조를 일거에 전복시키는 동시에 스토리의 흐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반전으로서의 쾌감을 부른다. 물론 추격과 난투로 점철되는 후반부의 단순화된 흐름은 심리적 긴장감을 유지하던 그 이전까지의 흐름과 배반적인 감상을 부르지만 그 상황을 통한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구가하고 있다고 인정할만하다. 정서적 긴장감의 양태가 달라질 뿐, 흐름의 양상은 훼손되지 않으며 서스펜스의 절대량은 보존되거나 더욱 상승한다.
물론 아동 캐릭터를, 그것도 입양아를 악의 이미지로 치환하고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일부 특수한 계층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불순함이 감지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염두에 두자면 감안할 수 있는 성공적 투자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의도적인 필요악쯤은 충분히 감안하고 장르적 성취를 즐기는 것이 타당하다. 그만큼 <오펀>은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르는 스릴러다.
미소 너머로 본심을 가린 채 가족을 위협하는 이방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캐릭터, <오펀: 천사의 비밀>은 기시감을 부르는 영화다. <오멘>과 같은 악마적 아동이 등장하는 오컬트를 비롯해서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지키기 스릴러까지, <오펀>이 흡수한 장르적 전례는 차고 넘친다. <오펀>이 영리한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오펀>은 새로운 전형이라기 보단 뛰어난 응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악한 유아적 캐릭터를 통해 장르적 착시를 발생시킨 뒤, 관객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무엇보다도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점차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마다 연출되는 긴장감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쌓여나간다. 결과적으로 <오펀>이 이룬 장르적 성취의 팔 할은 절대적으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력에 얹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내던져진 반전 역시 호불호의 차이를 발생시킬 가능성은 존재하나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적절한 흐름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말미에 다다라 난투극으로 변질되는 양상이 영화를 단순화시킨다는 인상도 들지만 역시나 그 순간조차도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생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른다.
선혈이 선명한, 상흔이 뚜렷한, 공포에 질린 소녀가 공장지대에서 발견된다. 신체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가득한 소녀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는다. 소녀가 발견된 공장지대 건물 내부엔 가학적 증거들이 즐비하다. 의문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과연 그 안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큐적 질감의 영상 너머로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연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사연은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의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의문을 증폭시키고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물음표의 미로를 만들어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에 봉쇄한다.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잔혹한 이미지가 전시되는 스크린을 응시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라는 물음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은 실로 잔혹한 영화이기 전에 강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가학적 사연을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 이후로, 역시나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참한 학살신이 시선을 장악하고 그 지점부터 충격이 고스란히 쌓여나간다. 모든 의문의 주체인 루시(밀레느 잠파노이)가 눈물을 동반한 학살을 자행하고, 정체불명의 괴인으로부터 근본을 알 수 없는 공격을 당하고 쫓기게 되는 순간까지, 관객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을 공략하는 서스펜스에 난도질 당해야 한다.
쏘고, 베고, 찌르고, 가르는 고문적 이미지가 생생하게 눈앞을 오가는 광경은 치가 떨릴 만큼 잔인한 감상을 부른다. <마터스>가 핸드헬드로 포착한 혼란의 도가니를 통해 캐릭터의 공황적 심리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면 공포에 질린 캐릭터의 얼굴을 관찰하는 외부자의 위치를 문득 깨닫고 캐릭터가 내지른 비명과 함께 저만치 다른 편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말 것이다. 폭풍우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서스펜스의 여정이라 할만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장르적 연출 면에서 가히 탁월하다 칭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일관하는 동시에 극한적인 체험에 가까운 공포를 깊게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정체를 드러내는 극악한 세계관은 앞선 시각적 자극을 잊게 만들 정도로 참담한 심경을 안긴다. <마터스>의 본질은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탁월한 장르적 연출과 극한의 가학적 이미지를 동원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사실상 후반부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수련과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편적인 이미지즘의 총합을 통해 전가되는 서스펜스의 즉물적 자극을 넘어서 좀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만드는 공황적 충격이 엄습한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의문에서 시작해 감정을 후벼 파는 서스펜스가 거칠게 휘몰아치고 나면 후두부를 강타하듯 충격적인 세계관이 머리를 들고, 밑도 끝도 없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마터스>는 불순하게 여겨도 무방할 정도로 극악한 영화다. 의문을 품게 만드는 극단적인 참상이 거칠게 전시되고 나서야 베일을 벗는 끔찍한 세계관의 정체는 결과적으로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적 빌미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 제 스스로 물음표를 파기한다. 그것은 선의의 여운이라기 보단 악의적 도피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대체 뭘 본거냐. 하지만 끝난 영화는 말이 없다. 참혹한 기분과 어지러운 심정이 모든 감정이 휘발되듯 창백해진 심리 안으로 어지럽게 맴돈다.
끝없는 의문 사이로 감탄과 탄식이 명확히 동반되는 <마터스>는 어떤 의미로든 분명 놀라운 영화다. 장르적인 방식 안에서도 뛰어난 연출적 자질을 선보이고,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서사의 저력이 대단하다. 동시에 그 끔찍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방식 역시 관습을 잘 따르면서도 창의적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깊게 파고 드는 참담함 너머로 내려앉은 의문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공포를 넘어 극한의 불순함을 선사한다. 그 불순함을 좀처럼 잊을 길이 없다. 그래서 더더욱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