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학생들이 모인 교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독백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일인칭 시점의 서술로 일관되는 소설의 구어체는 유코의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소설의 화법은 사건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부하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단지 교훈적인 메시지에 접근하기 보다는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목적에 충실한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다섯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의 양상을 중계하며 결말부를 제외하면 내러티브의 흐름 또한 동일하다. 하지만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는 건조한 톤의 문체로 일관된 원작과 다른 범위의 감상적 접근을 유도한다. 영화는 보다 인위적인 연출적 과장이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미끈하게 정돈된 이미지가 유려하게 흐르는 <고백>의 영상은 유코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진실에 다다라 비로소 그것이 이 영화의 분위기와 이질적인 포장에 가까운 결과물이자 위장에 가까운 고의적 연출이라는 진실에 접근한다.
활기찬 교실의 풍경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침전돼 있다는 사실은 곧 그 교실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지고, 그 모든 과정은 세련된 영상으로 포장된다. 이는 일종의 위장이다. 진실을 폭탄처럼 안고 있는 아이들은 그 불안감 속에 스스로 잠식되고 도피하듯 공격성을 발휘하다 이내 쉽게 폭발의 위협에 꺾이고 만다. 이는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공격성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을 겪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평온한 외형에 대한 은유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작은 괴물들이 자라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삶을 유린한 뒤,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의 룰을 완성한다. <고백>은 이 모든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한 학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압축하고 확대해나간다. 그리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으로 구현해낸다.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영상이 감상의 흐름을 막아서는 경우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 냉소적인 영화는 결국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말해도 좋은 결과물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의 지옥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기준조차 깨닫지 못한 악마로 길들여지고, 또 다른 지옥을 함께 만들어간다. <고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동시에 결코 낯설지 않은, 소름 끼치는 경고이자 진단이다. 당신의 아이는 안전한가? 그 전에 당신은 안전한 사람인가? 스스로 장담할 수 있는가?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당신의 무관심까지 집어삼킬 게다.
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어머니의 뒤늦은 진심을 확인한 망나니 아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난다. <심장이 뛴다>는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내며 그 광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상황의 진전을 통해 극적인 파고를 얻어내고자 하는 스릴러다. 마치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모성도, 뜨거운 긴장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으로 착각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레 성질이 뻗친다.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파괴된 사나이>는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산산조각 나버린 어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놈 목소리>처럼 절규하는 아버지는 <올드보이>처럼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을 괴롭히는 범인을 <추격자>처럼 좇는다. 후더닛 구조를 포기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도전적인 작품이지만 결과물은 지극히 실패에 가깝다. 좀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것마냥 맥락의 가닥을 잡지 못하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열연은 연기쇼와 같은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지나치게 의욕만 앞선 장르적 기시감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용서는 없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올해의 과유불급 스릴러로 꼽힐만한 작품이다.
권력은 음모의 숙주다. 음모를 먹고 자란 권력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욱 음모를 키워나가지만 점차 덩치를 키운 음모는 권력에 기생하다 결국 그 권력 자체를 먹어치운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자신이 마련한 음모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파멸되는 어느 권력가와 그 권력을 조종하는 거대한 배후의 질서를 대필작가의 눈으로 묘사해내는 정치스릴러다.
미국의 해변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이는 영국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그의 최측근 맥아라였다. 이를 대신할 대필작가를 찾던 출판사는 새로운 고스트(이완 맥그리거)를 적임자로 찾게 되고, 그를 아담 랭이 있는 미국 별장으로 보낸다. 하지만 이와 함께 아담 랭이 국제전범재판소에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자서전 집필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무는 고스트는 그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는 예전부터 인간성의 극단에 대한 물음에 매달려 왔다. 할리우드 진출작인 <악마의 씨>는 광신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를 환기시키고, 초기작인 <물속의 칼>이나 <혐오>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묘사한다. 또한 <차이나타운>을 통해서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조명하며 <테스>나 <비터문>을 통해서는 엇나간 성적 욕망을 묘사해낸다. 무엇보다도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묘사함으로서 인간이 빚어낸 거대한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다.
사실 <유령작가>는 원초적인 광기와 공포가 지배하던 그의 전작들에 비해 보다 장르적으로 매끈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보다 확실한 건 <유령작가>가 바로 현시점에서 펼쳐지는 전세계적인 부조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내면적 자의식을 확장하기 보단 그 개인의 자의식이 사회와 연동되는 현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부정한 세계의 장벽에 맞서던 개인의 허무한 말로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차이나타운>의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형태로서 매끈한 선을 지닌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서서히 전진하듯 서술적으로 묘사한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에 비해 폴란스키의 영화는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된 듯한 서사의 경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사의 단계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원작의 디테일한 텍스트는 영화에서 암시와 복선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이처럼 플롯의 잔가지를 쳐내고 보다 긴밀하면서도 단단한 내러티브를 구성해내는 동시에 보다 극적으로 변주된 연출을 동원한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원작과 비교했을 때 극영화로서의 묘미를 살렸다고 평해도 좋을 만큼 뚜렷한 각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들로부터 감지되던 원초적인 기운이 탈색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이점으로 자리잡을만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선보이며 흉악한 시대의 속살을 응시하는 폴란스키의 시선은 확실히 유효하다. 권력의 상층에 머물던 이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 그의 몰락이 세상의 정의를 일으켜세운다고 믿지만 결국 그 몰락은 그 배후에 놓인 누군가의 또 다른 권력의 수단으로서 소비될 뿐이라는, 거대한 이 세계의 은밀한 진실을 일깨운다. 영국의 전수상 토니 블레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르는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깊은 시선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탁월한 정치스릴러로서의 품격을 얻었다.
살인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지방 형사들의 몽타주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극 초반부터 정체가 개방된 범인의 당돌한 심리와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 구도가 <추격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범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아버지는 직업윤리에 반하면서까지 제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놈 목소리>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이입한 <세븐 데이즈>. 그리고 그 끝에선 <올드보이>를 본뜬 듯한 죄와 벌에 대한 패러독스가 걸려든다. <용서는 없다>는 마치 지금까지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적절한 성공을 거둔 한국영화의 레퍼런스를 섞어 넣고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 같은 형태를 띤 영화다.
금강 하구둑에서 토막 난 시체가 하나 발견된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는 결정적 단서를 잡아내고 손쉽게 용의자 이성호(류승범)를 검거한다. 경찰의 심문 중, 범행을 부인하던 이성호는 신참 여형사 민서영(한혜진)의 추궁에 손쉽게 자백을 한다. 하지만 이성호의 계략에 의해 강민호가 불가피하게 사건에 개입하고 대학 시절 은사로서 강민호를 존경하던 민서영은 그의 심상찮은 태도를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용서는 없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심리다. 이성호는 <용서는 없다>의 논리를 완성하는 핵심이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조종자다. 강민호는 이성호의 계략대로 놀아나는 말이며, 민서영을 비롯해 강민호의 주변인물은 강민호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긴장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조율하는 이의 절대적 역량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시할 것인가가 <용서는 없다>의 키인 셈. 단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는 없다>는 그 역할의 어필에 실패한 영화다.
<용서는 없다>의 이성호는 자신의 명확한 속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강민호를 움직이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오랜 목적을 완수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지만 사실상 이런 식의 이야기 구조에서 그 변수란 본래 그 게임의 설계자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는 없다>가 그려나가는 서사의 논리는 지나치게 우연을 간과하고 있다. 명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나쁘다. 덕분에 결말부에서 주어져야 할 충격이 얕다. 사실상 <용서는 없다>는 결말을 위해 모든 과정이 할애되는 영화다. 그 모든 지난한 여정이란 결말부의 정점에 서기 위한 오르막길인 셈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빈틈이 많은 과정은 동력을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며 결말의 정점 역시 높이가 모자라다. 논리적 동원이 빈약해지는 가운데 감정적 이입만 과도해진다.
마치 <올드보이>의 그것과 비슷한 파국을 그리는 <용서는 없다>는 단적으로 자해를 무릅쓴 어느 남자의 복수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 복수의 정당함이란 굳이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어느 개인의 복수란 그 행위의 윤리적 정당함을 따져 물을 수 없게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인정될만한 사안이다. 다만 그것이 공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로서 대중에게 언급될 때는 사안이 다르다. 누군가의 개인적 범위의 사연을 소비하기 위해선 충분한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얹어야 한다. <용서는 없다>는 사연의 틈새를 메우지 못하고 자꾸 옆길을 뚫어가려는 작품이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형태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범인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허세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배우의 연기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정작 제 기능성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동시에 뻣뻣한 대사에 갇힌 이성호를 연기하는 류승범은 <용서는 없다>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다.
4대강 개발이라는 현안을 차용한 건 맥거핀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해도 눈가림의 구실은 한다. 동시에 부검 과정을 세심하게 다루고 시체의 형태를 디테일하게 살린 더미는 눈길을 끈다. 문제는 그것마저도 현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말에 다다르면 그 세심한 부검과정의 묘사가, 체모마저 디테일한 더미의 전시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라는 해답이 제시된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딱히 비범한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화자가 끝까지 비범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 지겨운 일이다. <용서는 없다>가 그런 꼴이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사연은 갈피를 잃고 이성마저 잃은 뒤, 이야기를 갈무리할 타이밍마저 제대로 잡지 못하다 결국 허세로 자폭한다. 정말이지 용서가 안 된다.
어느 한가한 오후, 아내가 정성껏 차린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어린 딸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던 클라이드(제라드 버틀러)의 집에 두 명의 괴한이 침입한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한 클라이드는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만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아내와 딸의 죽음을 잊을 길이 없다. 범인들은 경찰에 의해 검거됐지만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검찰은 자신의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겠다는 한 명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처벌을 방임한다. 담당검사 닉(제이미 폭스)의 설명을 듣게 된 클라이드는 망연자실하고, 법정의 무죄선고에 굳은 표정으로 법정으로부터 뒤돌아 선다.
(본래 작품과 무관한 일이지만) 정직한 제목이 우스꽝스럽게 읽히는 <모범시민 Law abiding citizen>은 문제의식이 뚜렷한 주제를 품고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가 정의적인 질서를 구현하지 못할 때 그 제도적 맹점에 희생된 개인으로부터 체제적 위기가 도래한다. 법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그 법을 따르는 개인의 배신감은 거대한 복수심으로 변질된다. 선량한 모범시민은 지독한 괴물로 변태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범시민>은 근래 개봉작 가운데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함의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뼈대만 앙상한 제도적 권위 속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건 부조리한 힘과 폭력이다. 개인의 사소한 억울함이 방치되거나 외면당할 때 제도적 정의는 일거에 무산된다. 직접적으로 비교하자면 <모범시민>의 클라이브는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나 다름없는 셈이랄까. 그만큼 문제제기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비범한 현실적 고민을 품은 작품이라 인정할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모범시민>은 그 주제의식의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제도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낼 뿐, 그 결함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물론 문제의식을 전하는 작품이 그 대안을 제시하는 의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다만 스스로가 표한 그 문제의식은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다. <모범시민>은 문제의식을 손에 쥐고 있지만 단단하게 주무르지 못한 탓에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영화다. 클라이브가 표하는 분노엔 실체가 있다. 그러나 <모범시민>에서 그 실체는 단지 액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스릴을 그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분노로 표방되는 감정적 진화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게 단순히 사건을 발전시키고 비밀의 규모를 키워나가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거대하게 부풀려진 비밀 너머의 진실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빌딩을 붕괴시킨 것이 도끼질의 위력이었다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성적 합의를 전달하지 못하는 작품이다. 제도적 맹점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화풀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빌미로 발화된 이미지도 인상적인 용도로 활용되지 못한다.
제이미 폭스와 제라드 버틀러를 비롯해 배우들은 적절히 제 역할을 해낸다. 특히 역할에 걸맞은 위엄을 전하는 비올라 데이비스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영화의 빈틈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양심을 팔아서 재미도 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의미도, 재미도 얻어내지 못하는 모범적인 실패사례다.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