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영화화된다고 하자 사람들은 문제적인 캐릭터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누가 맡을 것인가에 주목했다. 루니 마라는 의외의 카드였다. <소셜 네트워크>(2010)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연모하던 여인의 단정한 인상을 기억해낸 이들은 덕분에 더욱 의심했다. 스웨덴에서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닐스 아르덴 오플레르 또한 이에 질색했다. 하지만 모두의 기우를 발로 차버리듯, 그녀가 해냈다. 가시처럼 세운 머리, 스키니한 가죽 의상 곳곳을 메운 메탈 재질의 장식과 체인 벨트, 얼굴 곳곳에서 발견되는 피어싱. 퇴폐적인 스타일 만만하지 않게 무뚝뚝한 태도와 범접하기 어려운 반사회적인 인상. 마라는 완벽하게 리스베트가 되어 스크린에 등장했다. 부유한 NFL 구단주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은 이를 더욱 비범하게 수식하는 반전이었다. 화염병처럼 강렬한 폭발, 루니 마라는 이제 막 불이 붙었다. 더욱 뜨거워지리라.
스웨덴 재계의 큰 손으로 꼽히는 재벌의 뒷거래를 폭로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다니엘 크레이그)는 되레 곤경에 처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명예훼손의 역공을 당한 그에게는 이를 맞받아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정보원의 증발로, 심증은 충분했지만 물증이 없었던 것. 덕분에 재판에서 패소하고 막대한 벌금형 구형으로 전재산을 날리게 된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스웨덴의 산업을 일으킨 기업으로 꼽히는 방예르 산업의 전직 회장 헨리크 방예르(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제안을 대신 전하는 변호사로부터였다.
펑크한 헤어스타일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루니 마라)는 사실 유능한 정보원이며 천재적인 해킹 실력의 소유자다. 사회부적응자에 가까운 그녀의 외모는 모든 이들의 편견을 부르는 동시에 그녀의 공격적인 성향이 구체화된 결과에 가깝다. 문신과 피어싱으로 무장한 그녀는 한 남자에 관한 정보 수집을 의뢰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로 인해서 한 남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바로 리스베트가 조사한 바로 그 남자였다.
고인이 된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스릴러 3부작 중 첫 작품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스웨덴에서 제작된 <밀레니엄 제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작과 다른 각색이 발견되는 작품이지만 그 결과물에는 차별점이 있다. 각색물로서 두 작품의 차이는 인물 간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 내면의 감정까지 포용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스웨덴 버전은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관계를 동료라는 이성적 대상의 범위 안에 가두며 원작과 다른 길을 걷는 반면, 핀처는 두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적 화학 작용을 보다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소설에 내재된 멜로적인 여운을 영화로 끌어온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만남이 성사되는 과정이나 결말부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원작에 충실한 건 핀처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지 원작의 모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기 보단 그 결정적인 순간을 스크린에 세워 넣을 것인까라는 고민이 원작의 감정까지 영화가 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맞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선택은 3부작으로 진전될 시리즈의 형태에도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예감을 부른다. 특히 원작이나 스웨덴 버전과 달리 결말부의 사건 해결 방식을 보다 독립적으로 각색해낸 측면은 이런 추측을 보다 강하게 대변한다.
스웨덴 버전이 남녀의 관계적 심리를 잔가지라 생각하고 쳐낸 결과물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이루는 관계에 보다 큰 흥미를 느낀 작가의 각색물이라는 차이로 보인다. 그만큼 스웨덴 버전이 사건의 추리와 해결에 공을 들인 작품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인물의 심리와 현재의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이 작품을 보다 개인적인 야심이 깃든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핀처의 작품에서도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 이해할만한 아이디어가 발견되지만 이는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기보단 먼저 선점한 결과에 대한 차별적인 대안이 불필요했던 까닭처럼 보인다.
핀처의 작품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스웨덴 버전의 영화와 원작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이 작품이 결국 원작과 스웨덴 버전을 섭렵한 관객에게 더 큰 발견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작을 먼저 숙지한 관객이 반대의 경우보다 영화를 보다 즐길 수 있는 확률이 크다. 사실 핀처의 영화는 두 인물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할애하는 분량이 책 한 권을 훌쩍 넘기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속도감 있는 사건의 진전을 바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기다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카엘이 헨리크를 만나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는 광경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는 복잡한 브리핑과 같아서 단숨에 들이키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핀처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건 스타일의 양식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핀처의 장기는 이 작품에서도 녹록하잖게 드러난다. 특히 극 초반 영화의 줄기와 상관이 없는 오프닝 시퀀스의 비주얼은 CF감독 출신다운 핀처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부록과 같다. 동시에 핀처의 감각은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에 비해서 보다 정밀한 장르물의 형식에 가깝게 보인다. 특히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생물처럼 미끄러져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유려하게 공간을 포착하고 응시하는 방식은 필요에 따라서 극적인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와 캐릭터 표현력이 두드러지는데 그 중에서도 리스베트를 연기한 루니 마라는 단연 인상적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무난한 인상으로 출연했던 그녀는 펑크한 스타일로 무장한 리스베트를 연기해냈다는 이슈를 넘어서 완벽하게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했다. 단연 올해의 발견이랄까.
북유럽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은 수많은 반도와 섬으로 이뤄진, 일명 ‘북방의 베네치아’다. 오후 4시 즈음에 해가 저무는 스톡홀름의 11월 이른 밤을 뜨거운 열기로 사로잡는 건 북유럽 최대영화제인 스톡홀름국제영화제다. 오는 17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질 21번째 축제는 선댄스 드라마 부문 대상작인 <윈터스 본>(2010)과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휘파람을 불고 싶으면 불지>(2010)와 같은 화제작들로 스톡홀름의 이른 밤을 밝힌다.
칼을 빼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그곳엔 대상이 없다. 소년은 강해지고 싶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공을 대상으로 협박해봐야 증명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년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소년의 칼은 소년의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다. 소년은 낮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윽박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온다. 창문을 가린 방이 특이하다. 어느 밤, 소년은 또 한번 나무를 상대로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시작한다. 인기척을 알 수 없게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난 소녀가 소년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
<렛 미 인>은, 궁극적으로 원제인 ‘Let the right one in’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소녀를 초대하는 주문이다. 이는 영화를 본다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의 감정적 의미다. 소녀가 소년에게 듣고픈, 혹은 소년이 소녀에게 전하고픈 진심의 언어다. 그것은 투명하게, 때론 창백하게 느껴지는 스크린의 중의적 질감과 무관하지 않다. 눈빛에 반사된 자연광처럼 투명한 광량을 보존하던 스크린은 때때로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처럼 질겁한 인상으로 돌변하곤 한다. <렛 미 인>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과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맥락의 평면성은 특별한 장치적 소재 하나로 입체적 양상을 띤다. 동심에서 비롯된 순수한 로맨스는 귀엽고 천진난만하지만 그 관계의 배후엔 경악할만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이란 이엘리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란 점에 있다. 다시 한번 이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는 낮에 죽어있고, 밤에 살아나는 존재, 즉 뱀파이어다.-스포일러라고 판단하지 말 것. 어차피 영화는 이런 정보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미 이 정도의 정보는 이 영화의 홍보상에서 배포되는 실정이다.- 그녀의 존재는 <렛 미 인>에서 역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호러 장르의 제스처를 안고 간다는 점을 암시하게 만드는데 그에 따라 영화상에서도 잔혹한 방식의 호러적 장면들이 연출되거나 등장하곤 한다. 또한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소년과 소녀의 러브스토리의 지속적 한계를 예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양면성을 획득한다. 별개의 지점에 놓인 두 감정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소통시킨다.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스웨덴의 평화롭고 적막한 풍광이다. 다소 이색적이긴 하나 끔찍한 상황에서는 항상 기이하게도 유머가 발생한다. 풍경에서 발생하는 역설적 태도가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태도와 함께 기이한 슬랩스틱을 발생시킨다. 자연이 잘 보존된 그곳의 평화로운 풍경은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편으로 그 적막함이 모종의 살인을 기획하기 좋은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장소에 대한 모순이 공포와 유희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투명한 채광이 창백하게 돌변할 때 정서적인 긴장감만큼이나 어떤 적막한 고립감이 동시에 발생한다. 그 적막한 풍경 속에 홀로 선 오스칼의 모습도 외롭기 짝이 없다. 심지어 친구들이 소변기에 버린 바지를 봉지에 주워담고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엔 한겨울의 한기만큼이나 외로움이 담담하게 서린다. 오스칼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소년이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동병상련의 상대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은신처다. 처지가 비슷한 건 이엘리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갈망한다.
오스칼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년에게 세상은 무심하고 창백한 곳이다. 이엘리와 오스칼은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은총이다.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자 절대적인 신뢰가 가능한 상대다. 그 은밀한 연대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감정을 투명하게 보존한다. <렛 미 인>은 초자연적인 소재를 통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를 황홀하게 완성한다. 간혹 무덤덤하게 접근하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지만 <렛 미 인>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애틋한 멜로다. 괴로움이 직면한 낮에 창백하기만 하던 소년은 소녀가 살아나는 밤을 기다리며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년을 한 뼘 성장시키고 소녀를 살아가게 만든다. 소년의 밤은 누군가의 낮보다 아름답다. 그 밤엔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가 있으므로, 소년은 빛난다. 무엇보다도 <렛 미 인>은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선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판타스틱한 러브스토리는 실로 경악할만한 로맨스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