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의 모험>을 잘 몰라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즐기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퍼포먼스 캡처를 동원한 <틴틴>은 원작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를 얻어냈다. 언캐니 밸리의 한계가 간혹 목격되긴 하나, <틴틴>은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영역의 현실화와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가를 드러내는 현재의 척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틴틴>의 오락적 완성도 또한 탁월하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대가의 만남이란 카피가 단순한 홍보용 문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리즈로서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람 후,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기대치가 불필요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 틴틴 없이는 스노위도 없다.
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좁은 열도에서 세계로 눈을 돌렸다. 일본영화계의 이단아라 불렸지만 결국 세계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한계와 편견을 베어내고 세계로 나아간, 그는 전설이다.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감독 개인에게 세계적인 거장으로서의 이력을 부여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개척한 작품으로서도 의의를 지닌다. 당시 일본영화계를 이끄는 건 유미주의 형식을 중시하던 미조구치 겐지와 오스 야스지로였다. <라쇼몽>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은 동시대 일본영화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미조구치는 12살이나 어린 새까만 후배가 자신이 얻지 못한 대단한 영광을 일찍 차지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삼켰다. 결국 술도 끊고 작품에 전력한 미조구치는 이듬해 <오하루의 일생>을 통해 베니스영화제 본상을 수상한다. 이는 미조구치의 뛰어난 재능에서 기인한 사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구로사와의 <라쇼몽>이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을 활짝 열어놓은 덕분이었다. 실로 ‘라쇼몽 효과’라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친문학적인, 반시대적인
구로사와의 <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으로 이야기의 입구와 출구를 세우고 <덤불 속>으로 통로를 확보해내듯 각색된 영화다. 세찬 폭우가 내리는 ‘라쇼몽(羅生門)’을 다각도로 비추는 몽타주 컷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아래 앉아 있던 나무꾼과 승려가 비를 피하는 행인을 만나 자신들이 겪은 어떤 사연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 사연인즉슨 이렇다. 백주대낮의 깊은 숲 속에서 어떤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리고 용의자로 붙잡힌 도적과 현장에 있었던 남자의 부인, 그리고 죽은 남자를 몸 안에 빙의한 무녀, 그리고 이를 목격한 나무꾼은 차례로 자신이 체험하거나 목격한 사건에 대해 진술해 나간다.
아쿠타가와의 소설에 기반한 <라쇼몽>과 같이 구로사와는 다양한 고전문학 위로 자신의 창작적 뿌리를 내렸다. 사실 구로사와는 화가를 꿈꾸던 미술학도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슈샤 서양화학교에 입학한 뒤,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마르크시즘 대신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이나 <맥베스>를 일본의 정서로 해석한 <란>과 <거미집의 성>을 비롯해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을 영화화하는 등 다양한 고전문학 작가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에 투영해내곤 했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그렇게 부드러운 방식으로 매혹시킨 작가는 없었다”고 밝힌 도스토예프스키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실제로 <라쇼몽>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영화화하기 위한 준비였음을 고백한 바 있는 구로사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들의 고통에 천착하듯 기술해나가는 것처럼 인물들의 고통을 면밀히 살피는데 주력한다.
이런 경향은 구로사와의 현대극 안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데루스 우잘라>, <산다는 것>과 같은 구로사와의 현대극 속 인물들을 두고 일본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이처럼 말했다. “그들은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방식을 스스로 정한 뒤 자신만의 고뇌 속에서 혼자 고통 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는 인간들이다. 그 극단적인 폐쇄적 태도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대세순응적이라 불리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주장이 담긴 것 같다.” 일본 최고의 문호로 꼽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가운데 <라쇼몽>과 <덤불 속>을 각색해 영화화한 <라쇼몽>에서도 이런 태도는 깊게 드러난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을 펼치는 네 인물은 저마다 설득력 있는 개연성을 획득함으로써 되레 진실을 미궁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결국 ‘진범은 누구인가’라는 후더닛 구조의 의문에서 출발하는 <라쇼몽>은 진술의 나열과 함께 시작점의 의문을 희석시키고 같은 사건을 진술하는 인물들의 입장 차이에 대한 심리적 의문에 초점을 맞추게 만든다. 사실 각자의 진술 과정은 저마다의 죄의식을 무화 시키기 위한 변명이자 합리다. 이는 곧 당시 전후 일본 사회에 만연된 가치판단의 부재를 직시하는 것이었으며 대세순응적인 태도에 반발한 구로사와의 반시대적 심리와 깊게 연관돼 있다. 이런 인물들의 태도는 ‘라쇼몽 효과’라 일컫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예시로서 자리잡았다.
동서양을 녹인 세계적 경지
구로사와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무성영화 변사로 일하는 셋째 형 헤이고의 영향이었다. 헤이고는 구로사와를 곧잘 극장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구로사와는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체험했다. 무성영화가 자신의 영화적 기초임을 종종 밝혀온 구로사와는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라쇼몽>은 내가 무성영화를 연구하면서 얻은 생각과 의도를 적용시킬 시험장이 될 것이다”라며 제작 당시의 태도를 소회한 바 있다. 절제된 대사 속에서 인물의 표정이나 행위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무성영화에 대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은 어떠한 결말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부조리한 형태의 현재적 현상을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를 영화화한 구로사와는 원작의 태도에서 벗어나 부조리한 상황의 나열을 통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끝내 휴머니즘을 각성시키는 작품으로 완결된다. 이는 시대와 풍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한가운데서 인물의 위선을 고발하고 이를 통해 설득력 있는 웃음을 연출하며 끝내 희망적인 가치를 주장하던 오손 웰즈나 존 포드와 같은 대가들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면 <라쇼몽>에서 나무꾼의 마지막 진술을 통해 재현되는 도적과 사무라이의 우스꽝스러운 결투는 이에 앞서서 세 인물들의 진술이 각기 다른 양상을 재현하면서도 스스로를 비범하게 치장하던 태도와 대치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역설적인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실제적이고 진지한 상황에 놓여 있던 인물의 태도가 위선적인 과장으로 드러날 때, 그 역설적인 찰나가 희극적인 활기로 발전된다. 또한 윤리적인 몰락에 대해 개탄하던 인물들이 라쇼몽 아래서 발견한 어린 아이의 생을 거두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시대적 희망을 거머쥐게 만들고 이를 통해 휴머니즘을 각인시킨다. 이는 시대를 관통하는 원작의 염세적인 시선을 수용하는 동시에 보다 따뜻한 시대적 체온을 갈망한 구로사와의 입김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서구 고전영화들이 발전시킨 다양한 스타일이야말로 <라쇼몽>을 수놓은 영감의 보고다. 구로사와는 이를 통해 노와 가부키 같은 전통적인 일본연행의 형식을 고집한 당대 일본영화계의 풍토와 대척점에 섰다. 당시 일본영화에서 좀처럼 활용되지 않던 클로즈업을 비롯해서 깊은 숲 속까지 파고드는 과감한 트래킹 샷,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숙련된 몽타주 기법, 일정한 간격을 지닌 플래쉬백의 반복적인 변주 등은 그 영향력을 대변한다. 또한 이를 정중동의 인물 배치, 명상적인 리듬감이라는 일본 연극의 전통적 형식으로 포장하며 동서양의 요소를 절충해낸다. 영화학자 노엘 뷔르시는 “내용에 봉사하는 서구 주류의 형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 미학”이라며 구로사와를 예찬했다. 그의 영화가 단순히 서구 영화에 대한 모방을 넘어서 동서양의 특성을 융화시키는 새로운 경지로서의 발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은 구로사와가 동서양에서 각기 상대적인 평을 얻게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라쇼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나는 일본을 향해서가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구로사와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세계적이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1990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연단에 오른 구로사와는 말했다. “영화는 진정 놀라운 표현 수단이지만 본질을 꿰뚫어 핵심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 왔지만 나는 아직도 영화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등 할리우드의 후세대 거장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통해 그의 가치를 지지하고 대변해 왔다. 그렇게 구로사와의 이름은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선명한 빛을 밝히고 있다. 열도의 한계를 이겨내고 서양의 편견을 베어내며 세계로 나아간 구로사와 아키라, 그는 전설이다.
히치콕이란 이름은 한 감독을 지칭하는 절대명사의 영역을 넘어선 장르를 설명하는 절대명사다. 히치콕이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서스펜스를 지배하는 스타일이며, 규칙이고, 철학으로 군림한다. 히치콕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의 양식을 자신의 창작에 투영하며 오마주의 제의를 치른다. Hitchcockian의 순례를 떠난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아버지, 거대한 수사로 치장한 히치콕은 동세대와 후대의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남겼다. 그 영향력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항상 1순위로 언급되는 브라이언 드 팔마는 <드레스드 투 킬>을 통해 히치콕의 양자가 됐다. 너무나도 유명한 <싸이코>의 욕실 살해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드레스드 투 킬>의 관능적인 도입부 샤워신은 드 팔마가 히치콕에게 얼마나 매료됐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드 팔마는 스스로의 입으로 ‘히치콕의 영향력’을 공언함으로써 그 명예를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그 후로도 드 팔마는 <필사의 추적>의 우스꽝스러운 샤워신으로 <싸이코>의 샤워신을 다시 한번 재해석한 뒤, <이창>과 <현기증>을 아우르는 <침실의 표적>을 통해 히치콕의 영향력을 온전히 전시해낸다. 하지만 이런 드 팔마의 경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두고두고 드 팔마의 발목을 잡는다. 히치콕에게 오마주를 바친 드 팔마의 명예는 오늘날에 이르러 드 팔마를 히치콕의 모방자라고 낙인 찍게 만들었다. 사실 드 팔마의 관심은 히치콕에만 집중된 건 아니었다. 드 팔마는 히치콕과 동시대의 거장이었던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리메이크했고, 몽타주 기법의 교과서적 장면이라고 일컫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시퀀스를 <언터쳐블>에서 고스란히 재현하며 에이젠슈타인을 오마주한다. 하지만 일찍이 <그리팅>과 <시스터즈>를 통해 히치콕의 ‘관음증’과 ‘현기증’을 흠모했던 드 팔마는 히치콕의 후광을 통해 영예를 얻었으나 히치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방범으로 전락했고, 드 팔마 스스로도 히치콕과의 비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근작인 <블랙 달리아>는 현재 드 팔마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가까운 히치콕 ‘강박관념’에 빠지고 말았다고 느끼게 만들 정도다. 드 팔마의 불행은 그가 ‘히치콕을 너무 많이 안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거듭 감상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더 배울 만한 게 있다.”이는 마틴 스콜세즈가 영국의 영화지 <사운드 앤 사이트>에 기고한 히치콕에 대한 헌정사다. 드 팔마와 동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기도 하는 마틴 스콜세즈는 보다 영리한 방식으로 히치콕을 흠모했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명장면을 재해석하며 모방의 오명을 썼던 것과 달리 마틴 스콜세즈는 히치콕을 참고하는 방식으로서 그의 장기를 자신의 영화에 녹여냈다. <택시 드라이버>의 오프닝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는 트래비스의 눈동자 클로즈업은 <현기증>의 그것에 가깝다. 히치콕의 <오인>을 연상시키는 카메라 기교와 히치콕의 시점이 적극 반영된 듯한 뉴욕 시내의 주관적 묘사로 가득한 <택시 드라이버>의 긴장감은 히치콕을 참고한 영화광 마틴 스콜세즈의 전리품에 가깝다. 히치콕의 작품에서 음악을 전담했던 버나드 허만을 삼고초려한 끝에 그에게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을 맡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버나드 허만의 유작이 된 <택시 드라이버>는 <싸이코>의 그것만큼이나 감정적 파고를 일으키는 음악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스콜세즈는 히치콕의 인상적인 오프닝 타이틀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솔 바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기도 했다. ‘솔 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 진정한 영화의 시작이 이뤄진다’고 말하기도 했던 스콜세즈는 <좋은 친구들>부터 <카지노>까지 솔 바스가 디자인한 오프닝 타이틀을 사용한다. <카지노>는 결국 솔 바스의 유작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두 사람이 스콜세즈의 영화를 통해 유작을 남긴 셈이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달리 스콜세즈는 히치콕과 함께 수많은 감독들의 영향력을 들먹이는 영화광의 면모를 과시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참고사항으로서 히치콕을 나열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스콜세즈는 자신이 감독을 맡은 스페인의 샴페인 광고에서 ‘히치콕이 남기고 간 3페이지짜리 미완성 트리트먼트가 있었다’는 거짓말로 무성 테크니컬러 단편을 만들기까지 했다.
앞선 두 감독과 다른 의미에서 거장이 된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히치콕의 양자다. 스코티의 고소공포증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줌렌즈와 트래킹 샷을 결합해 활용한 <현기증>의 '줌 인 트랙(Zoom in & track out)'기법은 <죠스>에서 해변가의 상어를 처음 목격하는 브로디 서장의 시선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또한 <죠스>는 <새>의 해양버전이라는 평을 얻기도 했는데 무방비 상태로 수면에서 유영하는 인물에게 접근하는 백상어의 모습은 사람 주변으로 한 마리씩 모여드는 새들의 집결만큼이나 긴장감을 조성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았던 J.D 카루소의 연출작 <디스터비아>와 <이글 아이>는 노골적인 히치콕의 차용에 가깝다. 히치콕의 <이창>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각각 차용했지만 두 작품은 히치콕의 작품과 전혀 다른 판본이다. 히치콕의 두 작품이 마치 잘 볶은 원두커피처럼 중후한 향을 낸다면 J.D 카루소의 그것들은 커피우유처럼 가공된 오락영화의 단맛을 뽐내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스필버그는 <디스터비아>가 <이창>을 도용했다는 혐의로 <이창>의 판권소유자로부터 피소 당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히치콕이 살아생전에 스필버그를 ‘물고기를 만든 소년’이라 비하하며 만남을 간청하는 스필버그의 부탁을 거절했던 일화만큼이나 굴욕적인 사건이다.
히치콕은 나이와 국경, 분야를 초월하며 매혹을 선사했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이야기적 방식인 맥거핀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를 온전히 반영하는 작품이다. 또한 브라이언 싱어의 근작인 <작전명 발키리>에서 슈타펜버그 대령이 히틀러를 테러하기 위해 폭탄을 숨기는 장면은 프랑수아 트뤼포와 히치콕의 유명한 대담 가운데 등장했던 맥거핀 이론의 사례와 명확히 닮았다. 한편 히치콕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진 스티븐 킹은 조지. A 로메로의 <나이트라이더스>에 ‘대형 샌드위치를 먹는 남자’로 카메오 출연하며 히치콕의 카메오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 한국의 봉준호 역시 히치콕과 비견되는 젊은 감독군에 속한다. 최근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출품됐던 <마더>는 현지에서 공개된 뒤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되며 호평을 얻었다. 오명을 쓴 남자, 관음증, 미묘하게 엇물려 돌아가는 내러티브, 그리고 결과적으로 맥거핀을 이루는 스토리텔링. 히치콕의 미스터리한 이야기 흐름과 서스펜스적인 연출이 깊게 관여한 듯한 <마더>는 히치콕의 영향력이 희미하듯 깊게 배어든 작품인 셈이다. 사실 봉준호가 맥거핀을 선호하는 스토리텔러란 점에서도 봉준호에게 히치콕의 영향력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알려진 것처럼 봉준호에게 <새> 리메이크 제안을 던졌다는 미국 에이전시의 안목은 괜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히치콕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를 바친 건 구스 반 산트다. 히치콕의 <싸이코>를 숏 바이 숏으로 완성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리메이크라기 보단 일종의 필사본이나 다름없다. 문체가 다를 뿐 동어반복의 문장에 가까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원본과 완벽한 대조군을 이루는 필사본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엔딩까지 최대한 원작에 밀착한 방식으로 완성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온전히 평단과 관객에게 조롱 당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용감했다. ‘히치콕의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봉준호의 생각을 구스 반 산트는 자기 희생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졸작 <힛쳐>따위가 <새>가 방영되는 TV를 스크린에 노출시키며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를 들먹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실로 정직하고 비범한 오마주다. 구스 반 산트야말로 뼈 속까지 진정한 Hitchcockian인 것이다.
<트랜스포머>가 이룬 시각적 성취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로봇의 철판을 CG로 구현하는 건 크리쳐나 생물의 피부를 재현하는 것보단 손쉬운 작업이다. <트랜스포머>의 성취는 사실상 이미지의 구현 자체에 있다기 보단 그 이미지가 정신적 편견에 가까운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지점에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흔해빠진 수사보다도 중요한 건 거대변신로봇들이 실사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오락영화가 시장성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린 안될 거야’를 ‘꿈은 이루어진다’로 변화시킨 저력이랄까. 이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을 등에 업고 스릴러적 감각을 바탕으로 두른 액션 시퀀스를 선사하던 <터미네이터>의 인간형 로봇과 전혀 다른 재질의 쾌감을 두른 본격 로봇 블록버스터의 출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전작의 성공에 힘입은 속편이다. <트랜스포머2>도 상업적인 성공을 밑천으로 컨텐츠의 자가증식을 거듭 반복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2>가 선택한 세일즈 포인트는 양적 팽창이다. 어느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속편들이 그렇듯 <트랜스포머2>에서도 물량공세적 팽창이 단연 눈에 띈다. 일단 로봇의 개체수가 현저히 늘었다. 그리고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도 전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너비를 확장했다. 심지어 2시간 30여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은 <트랜스포머2>의 덩치를 가늠하기 좋은 요건이다. 러닝타임의 확대는 서사보단 묘사에 대한 팽배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LA도심을 비롯해 미국을 무대로 벌어지던 로봇들의 활약상은 속편에 이르러 상하이와 이집트 등 전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점령하듯 펼쳐지고 나열된다.
로봇의 개체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보다 눈에 들어오는 로봇 캐릭터는 현저히 줄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범블비’를 제외한 나머지 로봇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소모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매력이 없다. 물론 ‘스타스크림’이나 ‘메가트론’과 같이 악의 축에 선 로봇들도 비등한 자태로 그 맞은 편에 온전히 존재감을 알리지만 무채색의 디자인으로 통일성이 두드러진 ‘디셉티콘’로봇들은 하나같이 몰개성적이다. 심지어 컬러풀한 색채감으로 개성을 자아내는 ‘오토봇’로봇들도 딱히 명확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새롭게 가미된 트윈스 로봇, ‘스키즈&머드플랩’은 인상적이라기 보단 눈에 밟히다 마는 수준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닥다리 로봇 ‘제트파이어’정도를 제외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력을 전달하는 로봇 캐릭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개체수가 증가했을 뿐, 하나같이 일회용에 가깝다. 물론 그만큼 질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만큼 소모적인 감상을 부추긴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형 합체로봇 ‘디베스테이터’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합체버전은 새롭게 ‘득템’했다 할만한 볼거리를 추가한다. 게다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엔 <터미네이터>를 직설적으로 겨냥한 듯한 인간형 로봇조차 등장한다. <그렘린>을 모방한 듯 방정맞게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로서의 활용도가 낮아보인다. 늘어난 숫자만큼 출연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로봇이 많아 보인다.
빠른 속도감을 자랑하는 컷의 흐름은 전작만큼이나, 혹은 전작보다 더 현란하다. <트랜스포머2>는 마치 눈에서 뇌로 시각적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와 경쟁하듯 컷을 구겨 넣은 이미지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 고속촬영을 모방한 슬로모션으로 거대한 속도감 사이에 작은 심호흡을 마련하기도 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는 두뇌적 판단을 흐린다. 정신 없음 자체를 만족의 요건으로 유도하는 양상이다. 사실상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활유적이며 의인화된 강철피부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인정할만한 성과는 스크린에 구현된 로봇의 육중한 자태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로봇의 육체에 인간적 감수성을 투영했다는 지점에 있다. <트랜스포머2>는 이런 감수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로봇간의 격돌 과정에서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윤활유를 내뿜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마치 인간의 피부조직과 피로 대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마저 든다. 로봇의 파괴가 아닌 살해처럼 인식된다. 그것은 엄연히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따위와 무관한 별나라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유사 생체가 아닌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종족인 셈이다. 인간 캐릭터, 즉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나 미카엘라(메간 폭스)의 매력이 전작에 비해 반감됐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로봇 캐릭터들이 그 공백을 대신할만한 자질을 지닌 덕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트랜스포머2>의 주인공은 로봇이다. 오히려 인간이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로 구현된 가상의 존재가 인간의 연기를 압도한다. 이는 호불호의 영향력을 떠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중량감이 늘어난 액션신은 시각적 정보가 층위를 형성할수록 지독한 기시감을 부른다. 변신과 난투의 동어반복 속에서 그 특별한 매력이 점차 반감되는 느낌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서 로봇의 육박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의 밀도보다도 광활하다. 항공모함을 부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로봇들이 몸을 던진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이, 한낱 손바닥만한 인간들은 발에 땀나게 뛰고 달릴 뿐이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자면 늘어난 부피에 비해 질량은 축소된 느낌이다. 오락적 밀도가 감소됐다. 로봇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했던 전작의 유머는 좀처럼 활용되지 않는 반면 입담도 느슨해졌다. 전작보다도 비범한 역할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비해 활용도가 낮아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의 대비를 통한 시너지가 약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로봇의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할 입체적 구조가 헐겁다. 그만큼 감흥의 유효시간도 짧아진다. <트랜스포머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영상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다. 이는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그 유효함이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동어반복적인 액션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구축된 장시간의 러닝타임은 결말에 임박할수록 과감한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음에도 지켜보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단순한 시각적 감흥에 기댄 너비의 확장만을 앞세워 2시간 30여분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물론 전작에 비해 좀 더 암담해진 분위기는 비범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완구로봇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에 가깝던 <트랜스포머>를 성인 취향의 오락물로 끌어올렸다 할만한 변화다. 때때로 그것은 만화적 취향의 로봇 대전이 아니라 장르적 서스펜스가 가미된 잔인한 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디셉티콘 3종 로봇이 펼치는 중반부의 전투신은 <트랜스포머2>의 액션신 가운데 백미라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마냥 생생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다. 망막을 피로하게 만드는 컷의 속도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마냥 포기할 수 없는 유흥일지도 모른다. 말초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시각적 압도감을 감상한다는 건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느슨한 농담과 육중한 액션의 동어반복 가운데 사족이 남발되는 스토리를 긴 시간 동안 감내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을 충만 시켜줄 것이라 믿어지는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는 전제 덕분일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돌아가는 과잉적 이미지 가운데 로봇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명하게 판별되진 않아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에 현혹된다면 <트랜스포머2>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영화라 추켜세울만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빈 깡통임에 틀림없지만 깡통 디자인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므로, 그 디자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는 분명 적정수준의 역치를 넘어선 과잉의 자극을 내보내는 중독적 엔터테인먼트다. 즐기고 있다기 보단 홀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다한 자극적 세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실은 긴축되고 자극은 증폭됐다. <트랜스포머2>의 장기적인 흥행성패도 그 지점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결과는 어쩌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극적 세기를 조율할만한 새로운 지표로서 참고될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물론 테스트베드 대한민국의 이상기후적인 열광이 보편적인 기초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16일 자정까지 엠바고가 걸려서 자세한 말은 할 수 없고, 어쨌든 확실히 전작보다 늘어난 제작비만큼 물량공세적 규모가 커졌다. 로봇 개체수도 현저히 늘었고, 액션 신의 중량감도 불었다. 심지어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로봇도 등장하고, 전반적으로 전작에 비해 좀 더 잔인하다 느껴질 만한 측면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디셉티콘의 선조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건 마치 프로토스 질럿 같기도 하고. 시각적인 압도감은 분명 대단하지만 말초신경이 마비되는 느낌이라 이게 딱히 적정수준의 오락적 만족감을 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지럽고 산만한 기분에 가깝다. 러닝타임이 생각보다 길다. 2시간 30분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육중한 액션과 느슨한 농담이 반복된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스토리는 사족이 남발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력이 확고히 느껴진다. 그는 확실히 외계문명의 인류기원설에 흥미가 많아 보인다. 하긴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UFO를 날린 마당에 외계로봇의 스토리만큼 좋은 그릇도 없겠다만. 어쨌든 <트랜스포머>의 가장 큰 매력이 변신로봇들의 육중한 난투극이라 믿었던 이라면 더더욱 만족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다. 다만 전작에 비해 분위기는 확실히 좀 더 암울하다. 비범한 척 하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은 아니고. 애들 입장에서는 좀 암담해질지도 모를 일. 범블비는 여전히 귀엽다. 애교가 넘쳐, 그냥. 누나들이 좋아하겠다. 메간 폭스는 더 예뻐진 느낌. 남자들은 하악거리겠지. 어쨌든 <트랜스포머>는 <트랜스포머>다. 빈 깡통인 건 알겠는데, 그 깡통 디자인이 볼만한 건 사실이니까. 물론 그냥 한번 보고 싹 잊어버리면 되는 영화라고 말하기엔 그 자질의 미덕이 그렇게 명쾌하게 정리될만한 수준인지 모르겠다.
지난 11일 미국 현지시각 8시,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렸다. 지난해 작가 노조의 파업에 동참한 배우들의 보이콧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시상식 무산이라는 진통을 겪었던 골든글로브는 올해 다시 아카데미 전초전의 열기를 띄웠다. 그리고 돌아온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풍성한 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이변을 연출했다.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4관왕에 올랐다. 감독상, 각본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 주제가상까지 쓸어담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주요부문 석권과 함께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외교관 출신 작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다. 지난 해 미국 비평가들의 찬사와 지지를 한 몸에 얻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지난 8일 열린 미국 비평가상 시상식에서도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해 제65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는 골든글로브 2관왕에 올랐다. 다사다난한 인생 역정을 지닌 미키 루크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레슬러>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노래한 ‘The Wrestler’로 주제가상을 수상하며 2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샘 멘데스가 연출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은 스티븐 달트리가 연출한 <더 리더>로 여우조연상까지 수상하며 이례적인 겹경사를 맞이했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괴력적인 연기로 보여준 히스 레저는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며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 밖에도 뮤지컬코미디 부분에서는 우디 알렌이 연출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가 작품상을, <킬러들의 도시>와 <해피 고 럭키>에서 주연을 맡았던 콜린 패럴과 샐리 호킨스가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장편애니메이션상은 픽사 스튜디오의 <월-E>가 선정됐다. 이로서 지난 2004년 신설된 이래로 픽사 스튜디오는 <카><라따뚜이>에 이어 <월-E>까지 3번 연속 골든글로브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공고히 다졌다. 외국어영화상엔 이스라엘 출신 감독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에게 돌아갔다. 아리 폴만의 실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한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난 해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스티븐 스필버그는 1년이 유예 끝에 한해를 건너 미뤄둔 영광을 찾았다.
올해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영국 출신 영화인들에게 많은 트로피가 수여됐다. 대니 보일을 비롯해 영국 출신 배우 케이트 윈슬렛과 샐리 호킨스, 아일랜드 출신의 콜린 패럴까지 영국출신 감독과 배우들의 저력이 빛났다. 한편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론 하워드의 <프로스트 VS 닉슨>은 5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으나 한 부문에서도 호명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기록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남우조연상 단 1개 부문 후보로 올랐지만 히스 레저의 수상으로 일말의 체면을 살렸다. 과연 아카데미 전초전의 결과가 오스카 트로피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영화부문 수상작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수상 각본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먼 뷰퍼이 수상 드라마_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선정 드라마_남우주연상 <레슬러 The Wrestler> 미키 루크 수상 드라마_여우주연상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케이트 윈슬렛 수상 뮤지컬코미디_작품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선정 뮤지컬코미디_남우주연상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콜린 패럴 수상 뮤지컬코미디_여우주연상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샐리 호킨스 수상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Dark Knight> 히스 레저 수상 여우조연상 <더 리더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수상 장편애니메이션상 <월-E> 앤드류 스탠튼 수상 외국어영화상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폴만 수상 음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 R. 라만 수상 주제가상 <레슬러 The Wrestler> 브루스 스프링스틴 ‘The Wrestler’ 선정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 스티븐 스필버그 수상
현대인은 수많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포위된 채 살아가고 있다. 길거리에 설치된 무인 카메라는 시종일관 사람들을 감시하고 휴대폰의 전파는 개개인의 동선을 끊임없이 추적한다.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인터넷에서 개인의 정보는 검색 한번으로도 수십 차례에 걸쳐 노출된다. 편의를 위해 개발한 자동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눈과 귀에 노출된 채 잠재된 관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글 아이>는 그 수많은 눈과 귀에 둘러싸인 인간들의 편의가 통제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위협의 메시지를 담아낸 액션 스릴러를 표방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과 함께 제리(샤이아 라보프)는 이상한 음모에 빠져든다.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75만 달러와 자신의 방으로 배송된 각종 첨단 무기들 앞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제리에게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방에서 달아나라고 경고하고 이윽고 FBI가 쳐들어와 테러용의자로 제리를 체포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과 함께 레이첼(미쉘 모나한)도 이상한 음모에 빠져든다. 연주를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 아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레이첼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평범한 청년과 평범한 싱글맘은 그렇게 미궁 속을 헤매듯 정체 모를 음모의 게임 위를 날뛰는 두 개의 말이 된다.
<디스터비아>를 통해 히치콕의 <이창>을 하이틴 스릴러로 변주했던 D.J 카루소 감독은 전작에서 출연했던 샤이아 라보프와 함께 또 한번 히치콕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듯 하다. <이글 아이>는 누명 쓴 남자의 광활한 도주를 그려낸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모티브로 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외부적 형태와 달리 내부적 야심이 좀 더 광활하다. 사실 <이글 아이>가 지닌 주제 의식은 현대SF무비나 근래 액션 블록버스터들에서 줄곧 발견되고 제기되던 일원화된 정보화 시대의 맹점에 대한 경고와 동일하다. 부분적인 이미지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영화의 목록만 열거해도 상당하다. <본 얼티메이텀>이나 <다이하드 4.0>과 같은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차용되던 무인화 정보 시스템의 폐해를 비롯해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와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의 디스토피아 세계관, 더 멀리 나아가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어떤 대결적 구도의 세계관-직접적인 스포일러라 언급을 피함-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거창한 의식구조는 황망한 내러티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실 <이글 아이>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음모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조작하고 신호 체계를 조종하는 음모의 주체는 가히 절대자에 가까운 구도로 음모의 숙주들을 내몰지만 정작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식상해진다. 문제는 단지 그것이 식상함으로 내려앉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구현했던 절대적 능력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디지털 신호 체계를 장악한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과감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부터 <이글 아이>는 현저히 무뎌진다. 종래엔 그 음모에 귀속된 인물에 대한 적절한 설득력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글 아이>는 제공권의 야심에 비해 빈틈 많은 전술을 구사한다. 흥미로운 초반설정은 호기심의 제공권을 장악하지만 지나치게 부풀린 궁금증에 비해 결정력이 부실하다. 초현실적 기대감이 비약적 논리로 몰락하는 양상이다. 물론 초반의 카체이싱을 비롯해 킬링타임용 볼거리는 틈틈이 제공된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정권교체의 뉘앙스를 풍기는 정치적 텍스트를 은밀하게 제시하는 이 영화의 태도는 그마저도 일종의 허세로 치부 당할 여지가 농후해졌다.
90년대도 아닌 1989년이다. 전작이라고 명명되어야 할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의 개봉연도가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하, <해골의 왕국>)은 그로부터 20년에서 1년이 모자란, 무려 19년 만에 제작된 속편이다. 이는 분명 어떤 이들에겐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함께 한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를 21세기에 스크린으로 볼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못했던 올드팬들에게 <해골의 왕국>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가셨더라, 는 말처럼 진위만 분명하면 이유 따위야 알 바 아니란 듯이 들뜨게 되는 일이다.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가죽 중절모와 무엇이든 낚아채고 때론 밧줄처럼 활용되는 채찍은 20여 년이 지나도 쓸모가 대단하다. 물론 흰머리가 무성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이하 ‘인디’)는 분명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실감하게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지적이면서도 화끈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롱 섞인 위트를 날릴 줄 알며 코 앞까지 닥친 위기 앞에서 순발력 있게 기지를 발휘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 쉬지만 여전히 그는 쉼 없이 달리고 주먹을 날리며 악에 대항한다.
물론 20세기 아날로그 방식으로 채워진 <인디아나 존스>는 흡사 어드벤처 영화의 유물이라 할만한 것이다. 특히나 디지털 방식이 대세인 21세기에서 그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큼 쉰내 난다고 소박맞을 물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으로 돌아온 존 맥클레인이 ‘죽지 않아’를 증명했듯 인디아나 존스 역시 21세기에서 현저하게 불필요한 노동으로 분류된 아크로바틱 액션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한다. <해골의 왕국>은 철저하게 <인디아나 존스>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 유물에 얽힌 전설, 그리고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 유치하고 조악해 보이지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험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낭만.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던 의미를 간과하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를 증명하듯 전작에서 악의 축으로 등장하던 나치는 사라지고 빈자리를 메운 건 공산진영의 소련군이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두르던 전작들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건 비단 영화 밖만이 아니다. ‘Better dead than red(빨갱이가 되느니 죽음이 낫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적나라하게 증명하듯 <해골의 왕국>은 미소진영의 대립이 한창이던 1950년대 냉전시대의 미국에 서있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서막인 <레이더스> 말미에 등장했던 네바다 군사기지 51구역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덕분에 <레이더스>에서 인디가 찾아냈던 성궤도 잠시 형체를 드러낸다.- 그곳에서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인디에게 무언가를 찾아내라 종용한다.
<인디아나 존스>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당신이라면 이 시리즈가 지닌 이야기 맥락이 예상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몰랐다면 이제라도 알아둬라.- 숨겨진 보물과 이를 악용하려는 무리들의 음모에 맞서 인디는 한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이를 소유하려는 악은 소멸하고 인디는 살아서 제집으로 돌아온다. <레이더스>에 등장했던 메리언(카렌 알렌)이 재등장하고, 이전에 그녀의 아들이자 인디와도 깊은 관계임이 밝혀지는 머트(샤이아 라보프)가 동행하는 모험은 원전에 충실한 반가운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신선한 감각이 수혈된 것이다. 다만 인디의 아버지 헨리(숀 코네리)는 죽어서 사진으로만 등장한다.-숀 코네리가 나이 관계상 출연제의를 고사했다고 한다.-
동세대를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인디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1950년대가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이 된 건 인디의 나이를 고려한 것이자 모험의 실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역동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 인디의 나이를 고려할 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전작 시리즈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거니와, 성스런 유물을 악용하려는 무리들이 존재해야만 모험은 이뤄진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소련은 나치만큼이나 유효한 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이념대립이 구시대의 산물이 된 요즈음에 소련이 전작의 나치들마냥 악의 무리처럼 활용된 것이 불편한 사실이 될 수 있겠지만 전작들이 그러했듯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악은 그저 모험을 성립시키는 구실로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을 뿐, 불필요하게 감정을 유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우크라이나 억양의 이리나 스팔코 역으로 케이트 블란쳇이란 매력적인 배우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전작들에서 등장했던 소모적인 악역들과 <해골의 왕국>에서의 그들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골의 왕국>은 올디스(oldies)한 시리즈의 감성을 현대에서도 구디스(goodies)하게 살렸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단지 인디아나 존스의 채찍질이, 그리고 그의 치킨 레이스가, 그리고 세월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푸념마저도, 돌아온 풍운아 존 맥클레인의 아날로그 액션에 비견할 만큼 환호와 열광을 점지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땀내나는 인디의 액션은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시킬 정도로 숭고한 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두른 동세대 영웅들의 초현실적 몸놀림으로 즐비한 블록버스터의 현세태에서 아크로바틱 액션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주를 이루는 <해골의 왕국>은 구시대적 유물의 현대적 희소성을 환기시킨다.
물론 <해골의 왕국>은 모험 그 자체로 이뤄졌다. 오랜 팬에게는 실로 반가운 귀환이자 <인디아나 존스>가 낯선 세대에게는 생소하지만 만끽할만한 체험이 될만한 것이다. 물론 의외성은 존재한다. 마치 멀더와 스컬리가 제기했을 만한 <엑스파일>스러운 결말은 무시무시한 스케일이 가공할만하지만 세대를 막론하고 빵상 아줌마를 대면했을 때나 느낄만한 생소하고도 난감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특유의 어드벤처 감수성은 <해골의 왕국>의 말미에 이르러 SF적 경이로움으로 치환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디는 ‘그들도 고고학자였다’며 감탄사를 날리지만 그것이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지지한 범우주적 프로젝트의 실상에 대한 충격을 상쇄시킬만한 위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이건 호불호에 대한 말이 아니다.- 모험의 종착역은 지금까지 <인디아나 존스>에서 봐왔던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초월한 것이며 경이롭고도 경악적인 것이다.-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알고 봤다 해도 결국은 당했다고 말할만한 것이다.- 마치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핵폭발 씬만큼이나.
중요한 건 <해골의 왕국>이 미래보단 현재에 충실하며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유년시절에나 꿈꿀만한 유치하고 조악한 상상을 영화적 모험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그 당시 관객들이 그것에 열광했다는 것. 그건 그 단순하고 유치한 꿈이 매번 낭만과 위트를 지닌 정의로운 인간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 관객의 취향이 과거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감수성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그리고 <해골의 왕국>은 취향을 뛰어넘을만한 보편적 기질이 가득하다. 다시 한번 고고학 노동자, 인디아나 존스가 주목 받을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핵 떨어져도 죽지 않는 진정한 ‘다이하드’ 노장 인디아나 존스는 죽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다만 사라질 뿐. 물론 이전과 다르게 인디아나 존스 가족의 재구성이란 점에서 이번 시리즈는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