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매틱은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스틱 한번 제대로 잡아보면 그 ‘손맛’을 잊기 힘들다. 물론 기어보다도 중요한 건 타고 싶은 차 그 자체다.
친구에게 물었다. “수동적인 여자와 능동적인 여자 중 누가 좋아?” 류현진의 직구처럼 답이 날아왔다. “낮에는 수동적이고 밤에는 능동적인 여자!” 그야말로 능동적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든, 수컷들은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운 여자’를 원한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능동적인 여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건 한번 어떻게든 ‘해볼라꼬’ 노력했던 기억의 산실일 것이다. 그러니 능동적인 여자가 좋다. 혹시 능동적인 여자 이상의 자동적인 여자라면, 주님께 영광.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너무 수동적인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입니다.’ ‘관계시 수동적인 여자는 어떻게 적극적이게 만들까요?’ ‘연애를 할 때 수동적인 여자 아닌 능동적인 여자 되라?’ ‘능동적인 여자의 섹스.’ ‘남자는 능동적인 여자를 좋아한다.’ 등등. 세상 수컷들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섹스로 통한다.
‘수동적’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란 이렇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또는 그런 것.’ 반대로 ‘자동적’은 이렇게 정의된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또는 그런 것.’ 그러니까 수동적인 여자란 달과 같은 존재다. 자신을 비춰줄 남자가 필요하다. 상대의 액션에 따라서 리액션도 제각각이다. 흥미롭지만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자동적인 여자란 자연히 태양과 같다. 주변에 빛과 온기를 전한다. 누리고 싶은 존재다.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때론 견딜 수 없게 뜨겁다. 지나치게 주장이 강해서 지칠 때도 많다. 고로 섹스를 기준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자동성을 판단한다는 건 다분히 수컷의 본능일 뿐이다. 게다가 남녀가 만나서 발정기의 개처럼 섹스만 하는 건 아니다.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도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이순재 선생님의 특별한 제안에 귀가 솔깃해질 나이가 온다. 인생은 길고, 섹스는 짧다. 수동적인가, 자동적인가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얼마나 매력적인가라는 기준이다.
페로몬 향수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 몰라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물론 니체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체는 평생 혼자 살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은 자웅동체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전략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여자와 자동적인 여자를 구별하는 건 남자일지 몰라도 기준은 분명 대상이 되는 여성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성격을 자신의 매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아니, 1년을 사귀었는데 한번을 안 해주는 거야. 내가 무슨 스님이냐? 그래서 1년 되는 기념일에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 같이 해외까지 나가서도 설마! 그리고 역시 드디어! 했지. 했어.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왔어. 아, 이젠 좀 쉽겠지. 아놔, 그런데 이게 뭐야. 또 안 해주는 거야. 내가 걔랑 한 3년 사귀었는데 1년에 한 두 번했나?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지금도 종종 걔가 생각난다니까? 헤어진 지가 언젠데.” 정말 아이러니한 사연이다. 쉬운 여자가 아니었기에 미련이 남는다. 자동적인 여자가 보다 좋다고 느낀다는 건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경험적 믿음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리드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말이 없다. “그냥 너 편한 대로 해”라는 말을 믿었다가 맘 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아예 상황을 리드해주는 자동적인 여자가 수동적인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상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도 어쩌면 이런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자신을 위한 지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댈 수 있는 편안한 파트너십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란 섹슈얼한 긴장감이 필요한 관계다. 연인이 아니라 모자지간이 돼선 곤란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연애이지 육아가 아니니까. ‘나는 솔직하고 털털한 여성이야. 그게 매력이지’라고 믿는다면 당신이 구애하는 그 남자에게도 그런 동성 친구 몇 명쯤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베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차려야 한다.
“클럽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봐. 한 명은 정말 화끈하게 잘 놀아. 그런데 그 옆에 좀처럼 말도 없고 새침한 여자가 앉아있어. 둘 다 예뻐. 섹시해. 일단 그날은 화끈한 여자랑 자겠지. 그런데 아마 그 다음 날엔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 연락할걸.” 좀 놀아본 지인의 말이다. 모든 남자의 심리가 꼭 이렇진 않다. 하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 물론 내숭 떠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 정확하게는 내숭만 떠는 여자는 별로다. 물론 적당한 애교에 녹지 않는 남자는 드물다. 하지만 꼭 콧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상냥하게 한번 거절해보시라. “미안하지만 안돼.” 당신의 자동적인 여자의 유전자를 억누르고 수동적인 여자의 탈을 써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먹기 쉬운 떡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먹기 힘들어지면 애써 손을 뻗는다. 남자의 마음도 간사하다. 쉬운 여자가 되느니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마음을 얻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체질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말이지. 지나치게 수동적인, 의존성이 심한 여자는 피곤하다. 누구라도 쉽게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적절한 수동적 태도는 이성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채찍질을 한번 했으면 당근을 하나 물려줘야 하는 법이다. 긴장과 이완의 균형처럼 수동과 자동의 균형을 맞추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남자를 리드하는 건 좋다. 처음부터 모든 패를 보여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다. 좋아한다면 모든 것을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일방적이거나 쉽게 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에서 캐리는 상담사에게 하소연한다. 연애도 잘 안 풀리고, 인생도 꼬여간다며, 자신이 만난 남자들이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그때 상담사가 말했다. “당신이 만난 이상한 남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모든 이유는 당신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자동적인 여자이건, 수동적인 여자이건,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마라. 스스로를 뽑기 인형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선택을 이끄는 여자가 돼야 한다. 매력 있는 여자가 돼야 한다. 남자가 원하는 것도 그런 여자이니까.
직장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여자 상사가 그랬다. 듣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글래스 실링(glass ceiling)’이라는 숙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유리 천장’이란 뜻이지만 ‘여성이나 어떤 집단이 높은 지위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차별은 뿌리 깊은 전통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통용되고 유전자적으로 세습되면서 때론 교묘하게 역할의 분리처럼 강요되는 차별적인 유전자가 사회 도처엔 여전하다. 어쩌면 굳건한 남성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여성의 공성전과 남성의 수성전은 현대 인류사의 한 단면을 차지하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따르면 야훼는 에덴동산의 외로운 독거남을 위해서 그의 늑골 하나를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란 남자에게 있어서 뼈를 내어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탈무드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남자가 잃어버린 늑골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는 훼이크고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남성은 항상 여성을 ‘소유’하고자 했다. 그래도 된다고 믿었다. 아니, 믿을 것도 없이 그랬다. 전쟁에서 여성이 전리품처럼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전쟁이 지배하던 역사의 주인공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건 어쩌면 야만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위치에 서있는가. 남자만 지배하는 시대가 끝났을 뿐 남자가 지배하는 시대가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론이 거창했다. 어쩌면 거창한 핑계를 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다. 군대도 다녀왔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하기 최적화됐다고 여겨지는 ‘남자 직원’ 중 하나다. 무슨 자신감이냐고? “군대문화에서 익힌 계급적인 충성심이 강하다.” “군대 경험을 통해서 상하 관계에 익숙해서인지 무언가 지시를 내리면 일단 부딪혀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여자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여자 상사’로부터. 지금부터 인용되는 말들은 모두 여자 상사들로부터 얻은 답변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 상사란 직장 내에서 최소한의 결정 권한이 있는, ‘팀장’급 이상의 직책을 지닌 여자들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무기명으로. “누런 소가 일을 잘하오? 검은 소가 일을 잘하오?”라고 묻는 황희 정승의 질문에 밭 갈던 농부가 굳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타산지석 삼았다. 그 농부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면 검색하길 요망하며 본론으로 다시 정주행.
분야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 상사들은 직장 내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서 직장 내에서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원 시절엔 조금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옆에서 볼 땐 답답하고 줄서기에만 급급해 보여서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팀장이 되고 보니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깍듯하고 다른 팀으로부터 주요 정보를 수집해오는 정보력도 있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을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관계를 형성시킨다. 관계는 바로 정보망이다. 정보가 패처럼 돌려진다. 좋은 패는 아무 곳에서나 펴는 게 아니다. 이기고 싶은 상대 앞에서 펴는 거다. 인정받고 싶은 상대에게 던져야 한다. 그러니 동료들은 몰라도 상사는 알게 돼있다. 그 패를 확인하게 되는 쪽은 상사일 테니, 그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정보의 장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저 동료 여자들이 한심해 여기는 단합회장에선 은밀하게 정보가 오고 간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 때도 남자들은 대놓고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은 즉각적으로 반대의견을 표한다. 표정 관리도 잘 안 되는 편이라 일을 주는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게 남자다. 유전자적으로 서열을 나누고 패를 가르는 게임에 능하다. 어쩌면 군대는 그런 본능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발시키는 조직일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일상에 2년간 체류하다 보면 방사능에 피폭당한 사람처럼 상명하달 방식의 수직적인 조직 체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게임상에서 일단 클리어해야 하는 스테이지처럼 느껴지는 거다. 상사에 대한 복종심도 존재하겠지만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복하겠다는 욕망도 적지 않을 거다. 뭐,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기도 하고.
“남자들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당장의 흥미에 이끌려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아이템을 개진하는데 그러다 보면 논리에 막히는 경우도 있고 큰 관점에서 허술한 측면이 발견된다. 남자들은 아무래도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디테일한 가능성을 깊게 파고드는 편이라 무언가를 추진할 때 더뎌 보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다 안전성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아서 신뢰하게 된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에서 남자는 목적을 성취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고, 여자는 누군가와 자신의 느낌을 공유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남자는 결과적인 완성을 추구한다. 여자는 그 순간의 흥미를 인정받길 바란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먼저 딴 것도 여자였다. 선악과를 권하는 여자를 믿고 역시 한 입 물었던 남자는 여자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애초에 리스크 있는 거래는 피하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 교훈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장점들이 남자들의 뛰어난 경쟁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야근시키는데 무리가 없다는 건 과연 장점인가?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가? 무조건적인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사업에서 유리한가? 이 모든 장점들을 빛내주는 건 남자들 자신일까, 그 장점을 요구하는 사회 혹은 조직문화의 분위기일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의 성비가 여전히 높은 만큼 남자들에겐 좀 더 많은 선배가 있기 마련이고, 남자들 특유의 선후배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갖춰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애초에 불리한 경쟁이다.” 그러니까 출발점이 다르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결혼이나 육아 문제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잠재적으로 여자들에게 지속적인 중요 업무를 맡기는 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큰 것 같다.” 출발선도 다르지만 트랙의 조건도 차별적이란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상사’의 위치까지 오른 여자 상사들이 남자의 경쟁력을 인정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남성보다도 치열하게 습득한 여자만이 그 유리 천장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조직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
반대로 어느 남자 상사는 말한다. “여직원들은 빨리 이해할 줄 알아서 편하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성별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라고 느껴지는 환경을 진단해야 한다.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건 여자들에 대한 경계심리가 있는 거다. 관료적이고 계급적인 시스템 말이다. 결국 남자든 여자든 편하게 일하면서도 저마다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의 장점이 편안하게 수용되는 사무실의 풍경은 당장 요원해 보인다. 현실적으론 지금의 직장에서의 최적화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의 경쟁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력이 조직을 진보시키기 보다 조직에서의 생존에 유용한 것이라면 과연 그 경쟁력을 존중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의 경쟁력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별이 아니다. 언젠가 당신이 누군가의 상사가 됐을 때 당장 시도할 수 있는 그 무엇에 관한 고민일 거다.
지금 <엘르>를 넘기는 당신은 여자 아닌가? 빤한 질문 아니냐고? 그렇다면 혹시 <엘르> 보는 남자본적 있나? 이것도 빤한 질문인가?
남자들은 <엘르>를 보지 않는다. 이게 무슨 자폭 테러이고 자학 공갈인가 싶겠지만 경험상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다. 궁금하다면 한번 직접 물어보시라. “<엘르> 챙겨봐”라고 말하는 남자가 얼마나 있는지.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질문을 받을 그가 일단 패션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 혹은 산업적인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잡지보는 것 자체를 낙으로 자처하는 남자 역시 여기서 말하는 그 ‘남자’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의 자격이란 최소한 손을 뻗어서 닿는 위치에 놓인 잡지를 한번쯤 훑어볼 정도로 잡지에 완벽하게 무관심하지 않은 남자를 의미한다. 감히 장담하건대, “몇 번 본적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어려울 거다.
<엘르>를 읽지 않는 그들은 흔히 여성 패션지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매거진을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 혹은 ‘우먼’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매거진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자들이 주독자층을 차지하는 잡지에 관심이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이시한 여자’는 있어도 ‘걸리한 남자’는 없다. 남자 옷을 입은 여자가 패셔니스타 대접을 받을지 몰라도 여자 옷을 입을 수 있는 남자는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정말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아니고서야 골격의 구조상 입을 수 있는 옷조차 드물다. 단적으로 남자는 치마를 입지 않는다. 물론 당신은 “마크 제이콥스는 치마를 입잖아!”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답해보시라. 당신의 애인에게 치마를 입힐 자신 있나? 혹시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인 킬트(kilt)로 딴지 거는 사람은 반사. 게다가 남자들은 립스틱이나 코스메틱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 아이템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반대로 여자들 중엔 남성 패션지를 본다는 심지어 즐겨본다는 여자가 생각보다 적지 않다. 그리고 그건 그녀들이 남성복을 입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관심이 많다. 그럼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냐고? 그럴리가. 다만 서로에게 갖는 관심이나 호기심이 다를 뿐이지. 예를 들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넥타이를 매줄 수 있다. 남자도 여자의 집업 드레스의 지퍼를 올려줄 순 있지만 그건 엄연히 다른 행위다. 남자가 남자의 넥타이를 매주는 거 봤나? 웬만해선 시도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의 지퍼를 올려줄 수 있다. 남자의 복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동성인 남자보다 이성인 여자에게 주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건 자연스럽단 말이다. 그리고 그러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여자는 자신의 남자를 자신의 기준대로 변화시키는데 능하다.
반대로 남자는 여자의 취향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최소한 그 취향이 눈뜨고 볼 수 없는 재앙이거나 집안 기둥뿌리 뽑아먹는 재난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대부분의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없다. 선물을 하는 방식에서도 그런 차이가 보인다. 남자는 대부분 그 여자가 갖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을 만한 것을 선물한다. 후자일 땐 대부분 값비싼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이 선물하고 싶은 것을 찾는다. 자신의 남자가 자신의 취향대로 변신할 수 있길 기대한다. 정리하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입히고 싶은 것을 선물하고, 남자는 여자를 벗길 수 있는 것을 선물한다. 이성에 대한 남녀의 욕망이 대단히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게 바라는 걸 영리하게 어필해보시라. 그게 그의 주머니 사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에게도 대단히 편안한 일일 테니까. 물론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당신이 아까 앞에서 언급한 그런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전제하에서.
기면증을 앓는 원우(김예리)는 이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때때로 못마땅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병이 더욱 싫다. 할머니는 이를 말없이 지켜본다. 혈연으로 엮인 세 여자의 집안을 살핀다는 점에서 여성영화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바다 속으로, 한 뼘 더>는 정적인 가족드라마다. 어머니와 딸의 갈등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는 모녀의 연대를 차분하게 살피는 시선이 사려 깊다. 심신을 괴롭히는 병세를 극복하려는 소녀나 새로운 로맨스 앞에 마음을 여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만의 성장통을 건넌다. 물론 때때로 인공적인 어투가 경직된 찰나를 인식하게 만들고 심심함이 감지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산뜻하며 긍정적인 에너지가 귀엽고 섬세하게 찰랑거린다. 온전히 따뜻하지 않아도 포근한 감성이 충만한 독립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