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엔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 숫자들은 인류에게 찾아올 재앙을 예언하는 암호와 같다. 1959년 메사추세츠의 초등학교에서 개교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묻었던 타임캡슐로부터 50년 만에 발견된 종이엔 지난 50여 년간 전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을 예언한 숫자들로 채워져 있다. 문제는 그 외의 숫자들이다. 지난 50년 간 발생했던 재앙을 지목하는 숫자들 외에 다가올 재앙을 가리키는 숫자들이 있다는 것. 다가올 재앙의 정체를 반신반의하는 사이 끔찍한 예감은 실재가 된다. 재앙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는다. 예언이 작동한다.
“모든 것은 이미 의도된 순서대로 이뤄진다.”“모든 것은 의미나 의도가 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대립적인 관계에 놓인 두 주장은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통해 서로를 마주본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 근거가 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그 결과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없다. 예상되는 결과를 안다는 것이 무력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를 이룰 수 없을 때 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보다도 무기력하다. 특히나 그것이 거대한 재앙이라 할 땐 더더욱 참담할 뿐이다. <노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을 알게 된 인간이 그 앞에서 체감해야 할 스스로의 무력함을 어떤 방식으로 수긍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음모론처럼 시작되는 영화는 종말론에 다다른다. 지적인 추리를 요구하는 척하지만 결과적으론 종교적 성찰에 가깝다. 어쩌면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노잉>은 어느 재난 영화와 판이한 방식의 블록버스터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 보단 어떤 방식으로 그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해진다. 극복이 아닌 체념으로, 그리고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는 이들의 운명을 그린다. 예언서는 재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안이 아니라 그 재난이 부를 거대한 화를 미리 각오하게 만드는 선언과 같다. 그 이전에 두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 재난은 어느 블록버스터들과 마찬가지의 태도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유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 선연한 재난은 <노잉>을 온전히 실존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과학적 이론부터 지적인 추론, 그리고 장황한 스토리까지, <노잉>은 수많은 정보를 다룬다. 그만큼 <노잉>은 관객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좋은 영화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를 발췌하는 건 딱히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정보는 때때로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탓이다. 그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정보를 수집할 필요 없이 스토리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넘쳐 보내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정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영화는 비단 스크린 너머의 결과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실현하지 못할 것 같은 결과를 영화적 관성을 밀어붙여 끝내 이루고야 만다. <노잉>은 블록버스터의 탈을 쓰고 있지만 철학서마냥 진지한 사유를 요구한다. 압도적으로 끔찍한 결말의 영상은 대단한 스펙터클을 완전한 비극으로 절감하게 만든다. 엔터테인먼트의 속성으로 체험할만한 영상이라 말하기엔 단연 비극적이다. 짜릿하기 보단 끔찍하다.
그 너머에서 우린 새로운 물음을 얻는다. 스스로의 멸망을 통해서 대안이 발생한다면 그 희망을 긍정할 수 있나? 어려운 물음이다. 그 즈음에서 어쩌면 생각해야 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우린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세계의 멸망과 함께 죽어 없어질 운명에 처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노잉>은 그 거대한 이미지를 동원해 대단히 절박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똑똑해지는 것보다도 현명해진다는 건 실로 어렵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엄적 고민이란 점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의 가치란 희귀하여 값진 것이다. 그만큼 <노잉>은 보기 드물게 현명한 블록버스터다.
예민한 접사를 통해 누군가의 생채기를 세심하게 더듬어 가는 시선의 끝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집에 왜왔니>(이하, <우리집>)는 비극적이라 단정짓기 쉬운 결과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다. 물론 영화엔 어떤 비극적 암시가 없다. 그 비극은 단순히 상황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실상 영화적 태도와 무관하다. 온전히 영화의 태도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 특별한 사연일 뿐이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온전히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 김병희(박희순)는 다시 한번 기억을 따라간다. 그 기억엔 이수강(강혜정)이 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있다.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된다.
김병희는 막 생을 끊으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잃은 뒤로 그에게 있어 삶이란 그저 버거운 일이었다. 세상은 감옥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삶을 포기하는 시도가 그저 처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 막 벽에 못을 박고 노끈을 묶어 자신의 목을 조일 고리를 만들었고 설마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잡아당겨보기까지 했던 차였다. 그리고 결심의 순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그 중요한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그녀가 등장했다. 거짓말처럼, 불쑥 찾아와 남의 집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불미스럽게 그의 결단을 또 한차례 꺾어버린다. 이수강과 김병희의 만남은 생소하듯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급격히 틀어버린 혹은 다시 제자리로 튕겨버린 우연은 그토록 현실감 없게 일방적으로 찾아온다. 심지어 엽기적이라 느껴질 만큼 기막힌 방식으로.
현재를 축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나열되는 과거는 김병희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재구성되는 시점과 이수강의 과거를 플래쉬백하는 시점으로 나뉜다. 현재에서 파생된 병렬 구조의 과거가 나란히 배열된다. 두 사연의 간격은 동떨어진 것처럼 무관하지만 동시에 현재를 떠받드는 궁극적 인과의 실마리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우리집>은 그 사연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그리고 그 사연이 무엇을 가리키며 시작되는지, 강한 호기심을 부르는 영화다. 모든 호기심의 축은 이수강이란 인물에게서 시작된다. 그녀의 정체를 비롯한 모든 행위는 물음표를 소환하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수강의 사연이 큰 테두리라면 김병희의 사연은 핵심에 가깝다. 관객이 <우리집>을 통해 머금게 될 호기심은 입체적이라서 흥미로운 것이다.
두 인물에게 걸쳐지는 의문은 사실상 영화 내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보좌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삶엔 어떠한 연관도 없다. 단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재앙처럼 다가온 진실로 인해 한 순간 좌초된 삶을 맞이한 병희와 스스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관계의 결렬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사회적 인물로 몰락한 수강은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엇비슷하다. 결과적으로 그 만남은 지독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지만 동거와 공모는 필연처럼 이뤄진다. 그 기이한 연대는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형태 안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사연들이 감정적 동의를 구축하고 이 모든 총합이 이야기에 설득력을 덧씌운다.
정체불명의 해프닝처럼 시작된 사연이 양파껍질처럼 거듭 벗겨지며 사연의 실체에 접근할 때 얕은 호기심은 점차 깊은 연민으로 번진다. <우리집>은 분명 비극적인 사연인 까닭이다. 하지만 실상 영화는 담담하며 때때로 역설적인 유머를 장착하기도 한다. <우리집>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해학적인 인상마저 풍기는 영화다. 그 죽음엔 어떤 불행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죽음은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복구시킨다. 게다가 한 여자의 오랜 착각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지독한 간섭이거나 악몽이기도 하지만 실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구실이란 점에서 연민을 부르고 한편으론 위안을 준다. 수강의 과거를 모두 벗겨낸 이야기는 핵심적으로 병희의 사연을 벗기며 핵심을 들어선다. 그 지난한 과정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지를 되새겨버린 남자의 인생을 좌초시킨 근본을 비로소 고백한다.
지나친 우연이라 할지라도 무리가 아닌 사연에 감화될 수 있는 건 그 안에 놓인 진실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현실적이라 믿어지는 것들을 통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필연은 어쩌면 우연을 쌓아 올린 결과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집>은 첫인상이 낯설어 생소하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다. 스스로의 비극에 갇힌 이가 누군가의 담담한 비극을 마주한 뒤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실상 부조리해서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할만하다. 사실상 자신의 비극을 인식하는 병희와 수강의 태도가 겉보기와 무관하게 너비를 벌린 까닭이기도 하다.스토킹과 납치, 자살미수로 거칠게 포장된 사연이 너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설적으로 미소를 발생시키고 이를 연민까지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우리집>은 특별한 사연이다.
물론 본질적으로 사연의 형태는 여전히 비극에 가깝지만 그 비극의 중심에 놓인 자들은 죽음으로서, 혹은 그 죽음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물음엔 답이 없다. 그건 그저 그랬기 때문일 뿐이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필연이라는 게 어차피 우연처럼 시작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엽기적으로 만나 애틋하게 헤어진다. 그 만남 속에서 비극은 비극을 구출하고 미련 없이 소진된다. 게다가 영화는 노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공정한 시선을 견지한다. 일방적인 동정의 여지를 발생시키기 보다도 그 현실을 과감히 묘사함으로서 대안의 의지를 촉구한다. 정치적 주장이나 투쟁이 아닌 시선의 견지 자체로 하나의 쟁점을 마련한다. 이는 분명 공정한 시선이라 그만큼 깊은 배려다.
오랜만에 특별한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강혜정의 캐릭터에 대한 반가움도, 번거로운 과제나 다름없는 1인칭 나레이션을 탁월하게 소화한 박희순의 대단한 소화력도 <우리집>을 보좌하는 훌륭한 일원이다. 무엇보다도 엽기적이라 할만한 사연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적인 감수성을 야기시키는 <우리집>은 황수아 감독의 데뷔작이란 점에서 분명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한 성과다.
<천하무적>이란 타이틀은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적(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둑(賊)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두서없이 출발하는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단명하다. 소매치기 왕보(유덕화)는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왕려(유약영)와 떠돌아다니며 도적질로 삶을 연명한다. 그런 어느 날 왕려는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왕보와 깊은 갈등 국면에 들어선다. 그러다 우연히 사근(왕보강)을 만난 왕려는 그의 순수한 천성에 감화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왕보와 호려(유게)의 일당으로부터 사근의 돈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야연><집결호>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펑 샤오강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인 <천하무적>은 사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소매치기 씬이나 소매치기들 간의 결투 장면은 지나친 눈속임으로 일관하다 못해 때때로 한심할 정도다. 잔상이 심한 슬로모션을 통해 동작을 파악하기 힘든 영상으로 무마하는 소매치기 장면에서 디테일한 손놀림 따위를 기대했을 관객의 심리를 뻔뻔하게 반감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소재를 활용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지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다만 일면 타당한 구석도 있다. 사건의 전개보다는 개과천선을 바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그렇다. 사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의문을 야기시키는 그 변화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그 변화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시점부터 영화의 감정은 어느 정도 허무맹랑한 구석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성찰을 높이 평가할만한 자신은 없다. 변화의 양상이 타당할 뿐, 그것이 깊은 감동을 부를만한 수준은 아닌 덕분이다.
동시에 소매치기라는 소재를 통해 발생하는 기교적 기대감은 철저하게 망연자실해진다.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그릇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천하무적>의 문제는 그 어느 쪽도 확실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점이겠지만. 때때로 허세로 가득 찬 화면과 음악을 접하고 있노라면 이것이 고의적으로 웃음을 야기시키는 의도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소를 부르는 풍경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유덕화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동정을 부르는 느낌이다. ‘천하무의(意)’와 ‘천하무실(實)’의 연속이다. 의미도, 실속도, <천하무적>에선 얻을 수 없다.
이번이 첫 방한이 아니다. 뭔가 특별한 일정이라도 보냈나.
여명(이하, '여'): 와서 보니까 홍보사에서 영화 홍보를 위해 스케줄을 많이 잡아놓은 덕분에 일단 일하느라 시간이 없다. 같이 온 스텝들은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남대문도 다녀 왔다는데. (웃음) 홍콩에서 한국이 TV에 나오는 걸 보고 놀러 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막상 맨날 오게 되면 일만 하고 간다. 가끔 그냥 편하게 거리를 걸어 다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쯔이(이하, '장'): 어제 간 극장은 새로 만든 극장인지 좋더라. 한국의 영화 산업이 빨리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더라. 여: 처음 한국에 온 게 12년쯤 된 거 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친숙하다. 그 시간 동안 여러 번 와서 그럴까. 물론 잠깐씩 머물 수 밖에 없었지만 몇 주마다 한번씩 오가던 곳처럼 그 시간차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매란방>은 경극을 소재로 한 영화다. 현재 중국에서 경극에 대한 인지도가 어느 정도인가? 여: 일단 내가 사는 홍콩에도 경극의 일종인 ‘오극’이라는 홍콩식 지방 경극이 있다. 그러나 홍콩은 워낙 작은 도시고, 시장도 작기 때문에 점점 ‘오극’은 많이 없어지는 추세다. 그래서 정부에서 보호차원으로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공연하기도 한다. 그래도 중국은 워낙 도시들이 크니까 계속해서 꾸준히 경극이 공연되는 기회가 많아지는 걸로 안다. 최근엔 ‘매란방 대극장’이라는 게 생겨서 매란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많은 경극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되고 있다.
본인은 경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수준이었나? 여: 나도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 대부분은 경극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인지는 없다. 매란방만 해도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고, 그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학교 교과서를 통해 소개되는 이야기 정도만 알게 됐을 뿐, 깊은 지식은 없었다.
그만큼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생소한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여: <매란방>을 본 젊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매란방이 살았던 연예계가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를 이해하면서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동시에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사는 비슷하다는 걸 느낀다. 단지 핸드폰이 없어서 전보를 쳐서 연락하는 것처럼 기술적인 환경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하는 일, 사랑과 같이 겪어내야 할 감정, 이런 인간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어떻게든 극복하는 걸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시대적 차이만 있을 뿐,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걸 느낀다면 <매란방>이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맹소동의 헤어스타일이 그 당시 유행이었는데 지금도 유행되곤 하지 않나. 그조차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시간이 흘러도 어디에 있어도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사진기자들의 플래쉬가 영화를 다시 플래쉬백하는 느낌이었다. (웃음) 영화로 치자면 미래가 되는 지금 내 앞의 기자들의 플래쉬가 그때보다 빨리 터진다는 것만 다르지. (웃음) 살아가며 느끼는 감성은 시대와 무관하게 비슷하다고 느낀다.
연기에 임하기 전에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장: 경극을 훈련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경험이 전무한 예술을 배운다는 것도, 실제 인물을 모방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2달 정도의 훈련 기간을 거치면서 그 인물 자체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 덕분에 촬영 당시엔 그냥 그 인물이 됐다. 돌아보면 즐거운 작업이었다. 여: 우리 같은 후배에겐 먼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부터 공부했다. 한 세기 이전의 성취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당시 주변 환경과 모습이 어땠는가에 대한 세심한 연구와 토론을 거쳤다. 그에 근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장쯔이 씨는 남장 배우 ‘맹소동’을 연기했다. 소감이 궁금하다. 장: 일단 첸카이거 감독님과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다. 항상 내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난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물론 경극을 배우는 과정은 사실 상당히 힘들었다. 몸의 자세부터 작은 손동작이라던가, 입 모양까지 다 배워야 하는 탓에 힘들었지만 그런 과정들이 내 자신에겐 큰 도전이었고 그래서 즐거웠다. 맹소동의 분량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때때로 맹소동을 좋아해주거나 그로부터 신선한 생동감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좋은 경험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매란방과 가슴 아픈 사랑을 나누지만 영화에서 햇빛처럼 밝은 부분을 차지하는 역할이라고 본다.
반대로 여명 씨는 여장 배우를 연기하는데 그만큼 여성적인 제스처를 익히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혹시 그로 인한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나?
여: 사실 영화로 보여진 연기가 생활의 일부가 된 것처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무대 위에서는 여자 같지만 무대 밖에서는 남성적이지 않나. 촬영 중에 특별히 신경 쓴 바는 없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감독님이 잘 연출해준 덕분이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정신적으로 전력을 다해서 임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에피소드처럼 전하면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단순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 같아서 그에 대한 말은 삼가겠다. 그냥 배역 그 자체로 생활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훼손하지 않고자 배려하는 거니 이해해달라.
<패왕별희>의 장국영과 비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여: 비교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다. 장국영은 존경하는 배우다. 외부에서 비교하는 걸 좋아한다 해도 내가 그 비교에 참여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나? 여: 장쯔이 씨는 내면이 꽉 찬 배우다.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연기를 한다. 사실 데뷔 이후로 10년 동안에 출연작이 10여 편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만큼 배우로서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더 많은 도전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신인 때 찍었던 무협영화 한편(<와호장룡>)이 크게 흥행한 만큼 그 이미지에 지배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스스로가 그 동안 새로운 장르와 작품을 선택해왔다. 최근엔 본인이 직접 제작한 현대물도 찍었다는데 이런 움직임을 보면 많은 관객들이나 나 같은 배우의 입장에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만큼 장쯔이라는 배우를 보는 관객들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장: 여명 씨는 매란방처럼 젠틀하고 우아한 면이 있는 반면에 가끔씩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예계 톱스타로 살아왔으면서 그런 모습을 간직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워낙 친한 관계이고 평상시에 배우라는 의식을 안하고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덕분에 현장에서 연기를 하려고 의식한다기 보단 최대한 편안하게 촬영에 임했다. 영화에서 매란방과 맹소동이 즐겁게 웃는 장면을 보면서 평상시 서로를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우정이 있기 때문에 함께 교감하는 모습들이 연기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명 씨의 말대로 장쯔이 씨는 <와호장룡> 이후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장: 지금까지의 작품을 보면 분명 그 때보단 범위가 넓어진 거 같다. 최근에 소지섭 씨와 찍은 <소피의 복수>에서 내가 연기한 인물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 정도인데 실제로 내 모습은 열 일곱, 여덟 정도로밖에 안 보이더라.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미안한데, (웃음)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고 비단 내 생각만은 아니다. (웃음) 덕분에 배우로서 나이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내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경험을 얻었다. 반대로 나이가 많은 역할을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우로서 연령을 맞춰서 연기하는 범위도 훨씬 넓어진 것 같다.
장쯔이 씨는 예전에 <야연>으로 내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멜로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소지섭 씨와 함께 <소피의 복수>로 호흡을 맞췄다. 장: 아, 그건 한국영화가 아니니까 아직 이뤄진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웃음)
함께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 장: 일단 소지섭 씨는 중국어 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거다. (웃음) 영화에서 상반신 육체가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덕분에 아름다운 근육을 봤다. 아쉽게도 여명 씨는 근육을 보여줄 기회가 없더라. (웃음)
혹시 여명 씨는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할 만큼 인상적인 한국 여배우가 있나? 여: 항상 이런 질문 받을 때마다 화제를 바꿔보고 싶다. (웃음) 어떤 남자배우가 어떤 여자배우와 일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단지 하루 동안의 뉴스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영화사가 아시아의 모든 배우들을 캐스팅할 역량이 되고 그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생각이 있으며 최소한 10편까지 찍을 수 있는 시리즈를 기획할 수 있다면 일년에 오직 그 영화 한 편만 나와도 될 것 같다. (웃음)
매란방을 연기하면서 직접 화장을 하기도 했는데 배우로서 화장하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었을 거 같다. 여: 연기할 때도 화장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매란방>에선 화장도 준비의 일종으로서 하나의 예술 안에 포함되는 행위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단순히 일상적인 화장과 비교할 순 없는 거 같다.
<매란방>에서 원화는 백부로부터 무대를 떠나라는 유언을 얻는다. 하지만 결국 배우의 길을 걷는다. 본인들도 배우로 살아가면서 얻는 자부심도 있지만 그만큼의 난관도 느낄 것 같다.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장: 일단 배우로서 살아가면서 얻는 장점이 단점보단 많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그만큼 사회가 주는 책임감을 받아들이면서 생활을 한다. 다만 사생활에서 많은 제약이 있고, 가끔 미디어에서 기사를 팔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그럴 땐 힘들지만 그런 작은 문제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배우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거나 연기를 하면서 그걸 표현해내는 과정은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자신의 연기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는 매란방의 대사가 배우로서 의미심장하지 않던가? 그리고 연예인으로서 ‘종이족쇄’를 차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때가 있나?
여: 예술가는 누군가가 사랑을 얻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점유하게 되면 그것도 결국 불행이 될 수 있다. 맹소동이 매란방을 떠나가는 것도 정답인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감히 매란방의 선택을 대신할 순 없다. 다만 나 역시도 사랑보다 일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나 역시도 연예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운명적인 아픔이 있다. 장: 많은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가지만 누구나 자신의 일 가운데서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 역시도 어떤 실제적 경험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때로 영화 속 감정이 현실의 감정과 충돌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여: 요즘 장쯔이 씨한테 ‘종이 족쇄’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풀린 거 같다. (웃음) 나도 예전에 우리 집 커튼 사이로 사생활을 찍어가는 이들을 대면하곤 했다. 가끔 파파라치들 떄문에 속도 위반을 하면서도 피해야 할 때도 있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감내해야 하는 측면이 없진 않다.
만약 자식이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겠나? 장: 만약에 내가 낳은 자식이 배우가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문제는 그 아이가 선택할 일이다. 만약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엄마로서 배우를 하며 겪게 됐던 좋지 못했던 경험까지 다 가르쳐주고 싶다. 여: 난 스무 살 때부터 서른 다섯 살까진 자식이 생기면 죽어도 배우는 못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우리 집안엔 다시 나 같은 배우가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웃음) 만약 자식이 생긴다면 아들보단 딸을 갖고 싶다.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로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할 거 같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내가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하지만 딸이라면 내가 충족시켜야 할 기대가 많지 않을까. 딸은 내게 있어서 성공적인 걸 보여주지 못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다. 혹시나 아들이 연예계 계통에 있다면 절대 얼굴이 알려지는 일은 못하게 할 거라 결심했다. 예를 들어 프로듀서라던가, 그러니까 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끔 할 거다. 물론 이건 다 내 생각에 불과하고, 정말 그런 상황이 왔을 땐 운명에 따르게 될 거다. 다만 나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엄격한 가치관을 갖고 있을 뿐이다. (웃음)
최근 홍콩영화가 많이 침체됐다. 여: 예전엔 분명 홍콩영화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고, 잘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 만약 냉기라면 분명히 다음엔 더 좋아지는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주식도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는 것처럼 모든 일엔 기복이 있다. 관객들은 항상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를 원한다. 영화도 그런 면에서 관객들을 자극시킬 수 있고 새롭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성장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영화는 검열이 심해서 표현의 제약이 많은 게 사실이다. 장: 듣기로는 한국도 옛날엔 영화를 찍거나 상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있었다고 들었다. 심의도 거쳐야 되고, 절대 보여질 수 없는 부분도 있고. 그런데 이젠 등급제도 정착되고 관객들이 많은 영화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들었다. 중국 영화는 아직 심의 제한이 있어서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예전에 심의가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에서 <올드보이>의 혀가 잘리는 모습과 같이 폭력적인 묘사를 담은 영화가 상영될 수 있었을까? 지금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영화는 인간의 심정을 눈으로 보는 표현의 문화다. 중국도 점점 올라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더 많은 관객들이 중국영화를 선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대작들이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여: 시간에 따라서 모든 변화가 이뤄진다. 할리우드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트랜스포머>같이.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뭔가를 생각해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창의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너무 비슷한 소재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도 그런 환경의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란 새로운 것을 창작해나가는 일인만큼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인재를 통해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난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순 없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노력에 동참하고 싶다.
<매란방>에서도 보이듯 자본과 예술은 어느 정도 필연성이 있다. 여: 좋은 예술이 나오려면 돈 많고 용감한 사람이 투자해야 한다. (웃음) 게다가 지금처럼 영화계 시장이 좋지 않을 땐 투자자들이 잘 선택해서 투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내가 한 발자국 나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마 다른 전세계 영화시장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관객들은 어차피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그 숙제는 우리가 풀어가야 한다. 전세계 어디에나 예술가는 존재하고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노력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난 <매란방>을 통해 어떤 어려움이 있고 힘들다 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겨나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소녀는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은 언제나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고가 있던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이다. 하지만 비로소 퇴원했고,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엔 반가운 언니가 있지만 반갑지 않은 새엄마도 머물고 있다.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자매와 새엄마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다. 안나(에밀리 브라우닝)와 알렉스(아리엘 케벨)는 아버지(데이빗 스트라탄)의 새로운 연인 레이첼(엘리자베스 뱅크스)을 경계하고 그녀를 주시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는 분명 모체의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분명 <장화, 홍련>을 환기시키기 좋은 자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인 감수성과 원초적인 기운이 얽힌 호러적 연출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자신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독자적인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에 가깝다. 폐쇄적인 공포가 동화적 순수와 결합돼 발생시키던 중의적인 심리적 의문을 미스터리의 중추로 밀고 나가던 <장화, 홍련>과 달리 틴에이저 스릴러의 이미지와 함께 병리학적 콤플렉스 증세를 설명하며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미스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안나와 알렉스>에서 중시되는 건 인과적 내러티브다. 나열된 정보는 위장을 통해 관객의 의문에 혼선을 더하고 호러적인 연출을 덧씌우며 그 근본지점에 대한 추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인과관계는 분명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화의 반전은 시점의 착시를 통한 눈속임과 허위적인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결과물에 가깝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설득시키지만 결과물이 주는 쾌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인과관계가 뛰어난 구조적 자질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시야를 제한하고 엉뚱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 정보의 향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정보들은 결국 안나의 심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착란에 불과하다. 결국 관객은 그 모든 진실과 무관한 풍경을 보는 셈이다. 결국 그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에 충격을 느끼기 보단 뒤늦게 진실을 대면할 뿐이다. 놀라운 반전이라기 보단 속임수에 가까운 잡기다.
연출적 야심은 평범하고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평범하다는 말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케이스의 영화다. 때때로 연출되는 호러적 이미지들이 식상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는 적절하게 보장된다. 최소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장화, 홍련>에 매혹된 관객에게 하대 받을 가능성은 크지만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분위기보단 설득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대비는 동서양의 정서적 차이로 읽힐만한 구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 알렉스>는 타당한 면이 있는 결과물이다. 다만 좀 더 확실한 건 <안나와 알렉스>가 <장화, 홍련>보다 괜찮은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와 전혀 다른 야심을 지녔다 해도 그 그릇의 자질엔 분명 차이가 있다.
루시힐(르네 젤위거)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따뜻한 마이애미 해변에서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대기업 회의에 참석하며 업무를 시작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네소타 발령에 나선다. 낙후된 지방 공장의 손실을 절감하기 위해선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직원들의 정리해고 절차가 필요하다. 중책을 떠안았지만 그녀의 자신감은 팽배하다. 적어도 미네소타행 공항에 도착할 때까진 그랬다. 하지만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몰아치는 칼바람에 한번, 그리고 결코 만만찮은 공장 직원들의 텃세 속에서 또 한번 발을 구르고 치를 떤다.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시크한 생활을 즐기던 루시힐에게 미네소타는 지방의 촌뜨기들이 모여 사는 열악한 구석에 불과하다.
교훈적인 인생지침서처럼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찰적 스토리가 줄기를 이루고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의 무드가 가지를 친다. 따뜻한 마이애미에 익숙한 루시힐이 척박한 미네소타에서 적응해나가는 모습 그 자체가 <미쓰 루시힐>의 관건이나 다름없다. 개인주의적 편의에 길들여진 도시 여자가 지방의 관심을 번거로워하거나 텃세에 갈등을 빚다 결국 소박한 진심을 깨닫고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맥락은 물론 뻔하다. 전형적이거나 도식적이다. 하지만 귀엽고 아기자기한 묘사들이 곳곳을 장식하며 소소한 매력들이 소박하게 진열된다. 뜨겁게 달아오를 만한 특별함은 없지만 그 진심에 담긴 온기가 서서히 전해질만큼의 자질은 있다.
무엇보다도 (비록 국내 국내개봉명에 불과하지만) <미쓰 루시힐>이라는 롤타이틀처럼 루시힐이란 캐릭터가 어필하는 매력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루시힐은 르네 젤위거를 본떠 만든 캐릭터라고 해도 될 만큼 배우의 매력이 투과된 캐릭터다. <미쓰 루시힐>의 루시힐은 도도하고 고상한 척 하지만 르네 젤위거의 출세작이라 말할 수 있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처럼 쉽게 망가지고 털털한 내면을 드러낸다. 때때로 과감한 슬랩스틱을 서슴지 않으며 웃음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이미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딘가 심심하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조연 캐릭터들에 더욱 정감이 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진하고 소박한 얼굴로 영화의 표정을 대변하고 소소한 매력을 더한다.
<미쓰 루시힐>은 큰 맥락보다도 작은 소품들에 정이 가는 영화다. 뛰어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소소한 매력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소임은 충분하다. 물론 도시와 지방이라는 지정학적 대비는 단조롭고 한편으로 지방의 인심을 지나치게 우상화시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물질주의적 풍요와 개인주의적 이기에 젖은 현대도시인들의 삭막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효력도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 상투적이고 투박하지만 때때로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곧잘 발견된다. 예쁘지 않은 여자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처럼 <미쓰 루시힐>은 소박한 이미지에 아기자기한 매력을 숨겨둔 귀여운 영화다.
백부는 경극 배우였다. 그는 배우로서 명성을 누렸고,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백부는 광대였다. 광대란 명예를 쌓아 올려도 한 줌 바람에 허물어지기 좋은 운명에 불과했다. “경극배우로 성공해도 멸시를 벗어날 수 없다. 무대를 떠나라.” 백부의 유언장을 읽어 내려가던 어린 원화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연기를 가르칠 선생님이 왔다. 백부는 원화에게 무대를 떠나라 했지만 운명은 원화를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매란방>은 배우로서의 삶을 면치 못했던 어느 한 사람의 운명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된 이름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경극 배우 ‘매란방’의 실존적 삶을 영화화했다는 <매란방>은 한 인물의 인생 속에서 격정적인 사건을 추출해 서사적으로 나열한다.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의 반복으로 진전되는 상황은 3번의 점프컷을 통해 크게 분할된다. 유년시절 스승으로 모시던 대배우와의 대결, 성장한 매란방(여명)과 맹소동(장쯔이)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미국 진출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린 매란방의 역경. 3조각으로 나뉜 서사엔 저마다 극적인 사연이 존재하며 이는 <매란방>이란 스토리텔링을 분할하는 카테고리처럼 질서정연하게 나열된다. 그 중심엔 어김없이 ‘매란방’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근원이 되는 주체라기 보단 모든 사건에 연루된 객체로서 그 자리를 지킨다. 사건의 배경이 되어 병풍처럼 존재한다.
물론 유년 시절의 서사는 매란방이라는 인물의 기초적인 서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극한다. 서양연극을 공부했다는 구여백(손홍뢰)은 원화를 만난 뒤 관료직을 버리고 원화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결국 타성에 젖은 경극 배우들의 전통적 관념에 대항하고자 하는 구여백에게 감화된 매란방은 자신의 스승과 대결을 펼친다. 물론 그 대결의 주체는 매란방이 아니다. 진보적인 구여백과 ‘경극의 대왕(伶界大王)’이라 지칭되던 보수적인 대배우의 대립 안에서 매란방은 승부를 결정짓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국면 안에서 매란방이 느끼는 정서적 애환이 백부의 유언을 환기시키며 일종의 감흥을 부른다. 대배우의 쓸쓸한 몰락과 이를 지켜보는 매란방의 부채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예감이 매란방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매란방>에서 묘사되는 ‘매란방’은 전반적으로 반사율이 낮은 인물이다. 공허하며 한편으로 단조롭다. 인물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낄만한 여지가 많지 않다. 흥미로운 건 매란방의 주변부를 차지하는 서사이며 그 서사에 참여하는 주변인들이다. 씬의 감정을 지배하는 건 대배우이거나 맹소동이거나, 일본군 장교다. <매란방>에서 ‘매란방’은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면서도 주체적인 감정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실제 인물의 서사가 그러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영화상에서는 그렇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유년 시절 이후 여명이 연기하는 매란방의 서사가 이에 해당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시점부터 매란방이란 인물의 관점은 흐리멍텅해진다.
매란방은 대단한 사연 속에서 감정을 지배하는 역할을 선점하지 못한 채 그저 존재한다. 유년 시절 이후로 나열되는 두 번의 큰 사건 속에서 매란방은 무색무취의 형태로 그저 늙어갈 뿐이다. <매란방>은 주인공을 날려버린 배경 사진과 같다. 그 여백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나 주변부에서 고조되는 감정에 흥미를 느낀다면 다행이겠지만 매란방에게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매란방 이야기라는 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면 감상 자체가 텅 비는 꼴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찰리 채플린도 영감을 얻었다는 매란방의 실제연기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경극이 소리를 절제한 무대극으로서 무성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영화는 매란방의 삶이 관객에게 어떤 영감을 주지 못할 정도로 심심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매란방’이 <패왕별희>의 데이(장국영)가 연기한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인물이 경극배우라는 점에서 <매란방>과 <패왕별희>는 누군가에게 비교하고 싶어지는 영화가 될지 모른다. 물론 그것이 필요한 수순일지는 의문이다. 단지 두 영화가 평행선에 놓기 좋은 비교군의 조건을 지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경극을 소재로 한 첸 카이거 감독의 작품이란 공통분모가 선명한 까닭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명과 장국영의 연기력을 비교한다거나 두 작품의 우열을 논한다는 건 사실상 부질없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 <매란방>은 <패왕별희>보다도 훌륭한 기능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존적 재현과 허구적 창작의 너비만큼이나 두 작품은 엄밀히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타고난 환경과 천성이 다른 두 인물의 서사에 우열의 잣대를 부여한다는 건 어딘가 무지막지한 태도다.
사실 118분 가량의 상영시간으로 국내에서 개봉될 <매란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떤 면에서 무색한 일처럼 느껴진다. 국내 수입사에서 가위질 했다는 30분의 서사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첸 카이거 감독의 승인을 얻었다지만 감독 스스로도 편집본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결과물을 놓고 이야기한다는 건 어딘가 무색한 일이다. 실질적으로 영화상에서도 무성의한 편집의 결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매란방>은 위대한 경극배우, 좀 더 포괄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예술가가 인생과 세월의 풍파 속에서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재현하는 드라마다. 30분이 잘려나간 국내개봉판의 모습에서 매란방의 수난이 오버랩된다. 마치 그것은 문화적인 정서나 이해 차이로 경극의 묘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멸시하는 타지인들의 무지한 태도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신문물과 구시대적 풍습이 공존하는 일제 치하의 경성은 분명 흥미를 끌만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시대다. <그림자 살인>은 그 과도기적 시대상을 무국적의 그릇으로 활용한다. 친일 세도가들이 득세하고, 이를 비호하며 밥그릇을 유지하는 관료들이 자리잡은 암울한 시대상 한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민초들의 활력이 거리를 지배한다. “요즘 세상 의리 없이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만시경을 들고 바람난 유부녀의 불륜 현장을 추적해 얻은 사진과 기사를 신문사에 팔아 넘기는 홍진호(황정민) 역시 앞선 대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흥망과 무관하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뒤바뀐 국가 권력의 주체들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채워진 그곳은 마치 아나키스트들의 영토 같다. 서양의 신문물과 과거 조선의 관습들이 공존하는 20세기 초 일제치하 경성의 풍경을 무국적성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양식은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시대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그림자 살인>은 역사성을 지워버린 특이성을 통해 장르적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취향을 대변하듯 호기로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복을 차려 입고 플라스크나 비커와 같은 과학실험 도구 앞에 앉은 순덕(엄지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도기적인 시대 이미지를 대변하는 중의적 뉘앙스가 된다. 국적불명의 현실을 굳이 불행으로 치환하지 않는 태도로 장르적 그릇을 마련한다.
사건의 단초는 빈약하지만 인과관계의 나열로 놓고 보자면 플롯의 개연성은 인정할만하다. 다만 내러티브 상의 구조적 미숙이 눈에 띈다.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는 초반부는 탐정물의 기본 구조를 축으로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를 가미하며 속도감을 더한다. 특히 경성 스타일의 옥상 추격씬은 나름의 볼거리다. 하지만 그리 영민한 이야기를 밀고 나가지 못한다. 탐정추리극이라는 타이틀처럼 신선한 시대상과 복잡한 인물 관계를 통해 후더닛 구조를 발전시켜나가지만 적당한 수위의 장막이 걷히고 나면 되레 정답이 예상되는 지점으로 스스로 들어선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성공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또한 캐릭터들은 기대되는 역량에 다다르지 못하고 주변을 겉돌거나 외형적 묘사 이상의 기능적 활약을 선보이지 못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하나 캐릭터의 역할을 위한 제반이 불성실하다. 뛰어난 능력치가 예상될 뿐 그에 적절한 활용 능력이 결여된 양상이다.
실상 야심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장르적 연출에 몰입하던 전반부와 달리 시대에 대한 소묘가 적극 가미되는 후반부는 그 기운을 담보로 묵직한 상황을 연출한다. 시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후반부의 사연은 직업 윤리와 권력자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시대적 착취에 대한 응징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벌려나간다. 덕분에 전반부와 괴리된 듯한 리듬이 발생하며 말미에 다다라서 발견되는 클라이맥스의 도돌이표가 권태롭기까지 하다. 쌍둥이와 같은 얼굴로 분열된 양면성의 대립적 이미지는 <그림자 살인>이 노출하고자 하는 핵심적 주제일지 모른다. 이는 분명 흥미로운 접근이나 이를 묘사하는 방식이 또 한번 세심하지 못하다. 게다가 그 지점에서 이미 희석된 탐정추리극이라는 본래 의도가 다시 한번 아쉽다. 결국 <그림자 살인>은 시대에 대한 딜레마를 뛰어넘지 못한 장르물이다. 혹은 뛰어넘을 마음이 없었다 해도 그것 또한 석연치 못한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등장하는 위성사진의 부감이 심상치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버지니아 CIA본부의 복도, 그리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누군가의 발걸음. 엄청난 예감을 일으키는 오프닝이 환기시키는 예사롭지 않은 예감은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 박자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비범한 척하기 좋은 농담과 같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얻을 게 없는’결말로 종착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번 애프터 리딩>의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CIA분석가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의 해임 장면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할 수 없는 범위로 사건을 부풀려나간다. 오스본과 이혼을 고민하는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국무부 연방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내연의 관계이며 그와 전혀 무관한 스포츠센터엔 전신성형을 꿈꾸는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낙천적인 동료 채드(브래드 피트), 인자한 상사 테드(리차드 젠킨스)가 있다. 동떨어진 구석에 자리한 두 맥락의 인물들이 동일한 문단에 포섭되는 건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스포츠센터에서 발견한 CD한 장이 채드와 린다의 손에 들어가며 거창한 음모론이 꿈틀댄다. 작은 오해는 불미스런 갈등으로 발전하고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의 자장 안에 들어선다.
실상 사건의 맥락엔 어떤 본질 자체가 없다. 그저 그 허무맹랑하게 커지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도가 발견될 뿐이다. 정체불명의 관계도 속에서 맞닥뜨린 개개인들은 불필요한 해석을 덧씌우며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의 수순에 이르고 만다. 사건의 핵심에 놓인 사람도, 사건을 스스로 확대하는 사람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건의 총합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산출된다. 그러나 그 해프닝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통해 설득력을 갖춘다. <번 애프터 리딩>은 구심점이 없는 인과관계만으로 온전한 스토리텔링을 형성한다.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녹록하다. 허풍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구술엔 어떤 허세가 없다. 빈틈도 군더더기도 없다.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이 커다란 해프닝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과장된 음모론에 도취된 이들은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거나 그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이라도 결국 본질은 없다. 결국 그 모든 악화일로는 그저 실없는 상상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망상을 통해 음모론을 확장하는 인물들과 그 추이를 관찰하는 건 CIA정보부다. 그들은 린다나 채드의 상상처럼 대단한 음모의 중추가 아니라 그저 퇴임한 정보분석가의 뒤처리나 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묘사한다). 결국 그 망상의 음모론은 어떤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마치 살상무기 없는 이라크 전처럼, 그건 그저 해프닝이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속이 빈 형태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블랙코미디의 자격을 거머쥔다. 실체가 없어서 완벽한 해프닝을 이루는 <번 애프터 리딩>은 그 자체를 통해 거대한 음모론의 지지자들을 완벽하게 조롱한다.
'모든 것은 사소한 법(It is all small stuff)’이다. 다만 그 사소함이 때론 대단한 해프닝을 낳는다는 것. 물론 심각할 필요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은 그저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를 즐기는 바보들의 향연일 뿐이며 우리는 그저 그들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즐기면 된다. 하나같이 이름값이 대단한 배우들의 부조리한 앙상블 역시 또 다른 백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코엔형제는 <번 애프터 리딩>를 통해 깊이와 너비를 모두 갖춘 이야기꾼임을 입증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 재능을 발휘하는 그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재능이 스스로의 삶을 위한 유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아이들의 어울림이 낳은 웃음소리로 소란스러운 정원엔 햇살이 가득 들어섰다. 어머니의 75번째 생일을 맞아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이 한 집에 모였다. 오랜 추억을 공유한 형제들의 옛집에서 그네들의 손자와 손녀가 또 다른 추억을 공유하는 중이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어느 새 할머니가 사는 집이 됐고,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자신의 사후에 유산 처리를 정리하는 중이다. 집안 곳곳에서 놓인 예술품과 고가구, 집기들은 그저 낡고 오랜 삶을 증명하는 소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고가를 자랑하는 미술품과 앤티크한 양식의 고가구들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탐낼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적 유산이다. 형제의 추억이 자리한 그 집엔 그만큼이나 값진 가치를 품은 예술적 유산들로 이뤄졌다.
인상파 화가 카밀 코로와 상징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오딜롱 르동의 그림, 화려하고 귀족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들부터 작은 찻잔 하나까지, 문화적 가치가 온전한 산물로 곳곳을 채운 그 집은 마치 박물관과 같은 사명을 띠고 있다. 오랫동안 엘렌느(에디뜨 스콥)가 손수 모은 미술품과 고가구의 보호소를 지키는 근위병처럼 벽을 세우고 문을 열고 닫았다. 하지만 그 집은 자신의 여생이 길지 않을 것을 직감한 엘렌느와 운명을 함께 한다. 엘렌느는 자신의 사후에 그 유산들을 자식들이 잘 처리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탁을 전해들은 큰 아들 프레데릭(샤를르 베르랭)은 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다짐한다.
벽에 걸린 그림과 곳곳에 놓인 가구들은 형제들의 추억과 함께 묵어온 것이다. 그것이 고가의 미술품이거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가구이기 전에 프레데릭은 추억으로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심이 강하다. 그러나 각기 미국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아드리엔(줄리엣 비노쉬)과 제레미(제레미 레니에)는 감상보다도 실리를 추구한다. 더 이상 프랑스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닌 두 사람에게 오랜 추억이 놓인 집을 보존한다는 건 딱히 이로운 일이 아니다. 프레데릭의 계획은 형제간의 이견을 통해 무산되고 결국 집안의 모든 집기들의 일부는 팔려나가고 대부분 미술관에 기증된다. <여름의 조각들>은 사라지는 것과 보존되는 것의 형태를 관찰하는 영화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형제들의 구심점이 되던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처분될 상황에 놓이고 그 집에 놓인 유산 역시 뿔뿔이 흩어질 운명을 맞이한다.
오르세 미술관 20주년을 기념해서 기획된 <여름의 조각들>은 오랜 예술적 가치가 보존되기 힘든 현실과 그것이 현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고 있는가를 제시하는 보고서와 같다. 집 안의 미술품과 고가구들은 형제들의 기억 속에 걸려 있거나 놓여있다. 그들의 추억을 차지하던 지난 일상의 흔적들이 팔려나가고 미술관에 전시되는 상황 속에서도 추억은 온전하다. 단지 그 흔적들이 지난 추억과 달리 온전하게 조립되지 못하고 흩어진 형제처럼 각기 다른 곳에서 보존된다. 아이러니하지만 현대의 미술품들은 더 이상 인간의 삶 속에서 보존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금고 속에 감춰지거나 혹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전시될 운명에 놓였다. 개개인의 삶에 영감을 주고 함께 공존하는 소품으로서 장식되기 보단 금전적 가치로 평가되고 제도적으로 보호되는 유물로서 가려지거나 보호된다. 물론 이에 대해 불평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런 방식이 현대로부터 이 가치 있는 산물들을 지켜내고 유전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가치를 공유할 수 없는, 혹은 개인의 추억으로서 사유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한번쯤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유산들이 오랜 세월을 전해져 오는 동안 인간의 가치관은 수없이 변모한다. 시대에 따라 부각되는 삶의 기호와 공유하는 의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예술적 가치에 대한 견해가 존중될 것이란 예상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전세대는 후세대를 위해 지켜야 할 것을 보호하고 그것들을 온전히 물려줘야 할 필요가 있다. <여름의 조각들>은 변하는 것 가운데서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비록 그 선택이 자신의 추억이 담긴 현실을 분해하고 나누는 일이라 쓸쓸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위대한 유산이 누군가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추억이기 보단 깔끔한 카탈로그처럼 짜임새 있게 전시되고 설명되는 파편의 역사로 잔존할 수 밖에 없다는 건 한편으로 애석한 일이다.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선 이별을 감내해야 한다. 그저 화창한 볕 가운데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너머의 풍경처럼,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은 보존될 수 없는 현실에서 흐릿해지지만 그만큼 그리움이 깊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추억은 더 이상 예전 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공유된다. 개인의 소유에서 공유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부여하는 미술관의 기능성은 이처럼 이롭다. 하지만 한편으로 능동적인 삶의 터전에서 문화적 서사를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건 한편으로 씁쓸한 일이다. 물론 현명한 답을 얻기란 힘들다. 다만 그런 고민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과업이자 현대의 풍요를 미래로 전해주기 위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의 조각들>은 학술적인 동시에 예술적이며 현실적 고민 속에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그리는 작품이다. 또한 현실의 예술적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프랑스의 제도적 고민과 달리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성이 요구된다. 건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제도를 통해 인류의 유산을 보존하는 선진국의 가치관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