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새벽 위로 비틀즈의 ‘Norwegian Wood’가 흐른다. 깨어있는 자와 잠든 자의 경계가 분명한 새벽 두 시의 라디오는 감미롭다. 음악이 끝난 뒤, 음악평론가 지성희(지진희)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자신이 선곡한 음악을 설명한다. 아무도 몰랐다. 그가, 새벽에, 전국으로 송출되는 생방송 라디오에서, 이혼을 선언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역시도 몰랐다. 당당하게 뒤통수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자신이 뒤통수를 맞게 될 것임을. 호기롭게 이혼계획을 선포한 성희는 절친한 친구 동민(양익준)과 아내가 있는 강릉으로 달려가지만 집 안에서 성희를 기다리는 건 아내가 아니라 편지 한 통이다. 아내가 사라졌다. 보기 좋게 이혼하려다 이혼당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연출했던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집 나온 남자들> 역시 제목부터 그 내막이 궁금해지는 영화다. “여행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이하 감독의 말처럼 로드무비의 느낌이 가미된 코미디물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썰렁한 정적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박장대소와 실소 사이에 놓여 있는 코미디였다면 <집 나온 남자들>은 보다 박장대소에 가까워진 적극적인 유머가 눈에 띄는 코미디다. 사건들은 보다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집 나온 남자들>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처럼 한 여성의 과거가 밝혀져 나간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품고 있다.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비밀이 차례차례 밝혀져 나갈 때, 남자들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달아 나간다. “분명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의미가 전달되는 걸 느꼈다”는 양익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유쾌한 웃음 사이로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의미가 새어 나온다.
무엇보다도 <집 나온 남자들>에서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배우들의 조합이다. 지진희와 양익준, 그리고 이문식까지, 좀처럼 비율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은 에너지를 지닌 트리오는 영화에 특별한 시너지를 불어넣었다. “모든 대사가 배우들의 입을 거쳐 재탄생했다고 보면 된다. NG가 나고, 테이크를 갈 때마다 매번 대사가 바뀌곤 했다. 배우들이 대사를 어떻게 칠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사실 지진희와 양익준을 한 공간에 밀어 넣고 투샷으로 잡는다는 점에서 이미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지진희를 통해 캐릭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는 이하 감독은 이를 지성희에 반영했고, “<똥파리>를 통해 팬이 된” 양익준을 섭외했다. “이미 잘 알았던” 지진희와 달리 <똥파리>의 상훈처럼 날 선 사람이 아닐까 싶었던 양익준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눈 녹듯 걱정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정말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이문식에게 지방의 ‘옴므파탈 제비’역할을 맡겼다. 배우들은 때로 형제처럼, 때로 친구처럼 어울리고 짓궂은 장난도 불사하며 현장을 떠들썩하게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기습적인 전국민적 이혼선언이 아내의 시간차 이혼선언에 무색해진 탓에 아내를 찾으러 떠난다는 성희의 여정은 그 시작만큼이나 끝을 짐작하기 어렵다. 과연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호기심은 점차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라는 의문으로 번져 나간다. 그 지점에서 우린 함께 답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과연 그 사람일까. 기막힌 사내들의 소란스러운 로드무비 <집 나온 남자들>이 자아낼 웃음은 관계와 소통의 의미로 내달리기 위해 거쳐야 할 톨게이트와 같은 통과 의례나 다름없다.
로드무비 & 버디무비
집 나간 마누라를 찾아 떠나는 남자의 여정에 절친은 코가 꿰어 동행하고, 그 와중에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누라의 오빠가 나타나 합류한다. <집 나온 남자들>은 로드무비의 여정 위에 버디무비의 활기를 왁자지껄하게 띄우는 코미디다. 덕분에 현장은 시끌벅적했고, 이하 감독은 “그 자체를 즐겼다”. 이제 관객만 즐기면 된다.
이하 감독 인터뷰
한 여자의 과거가 밝혀져 나간다는 점에서 전작과 비교할만한 코드가 보인다.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관심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영화로 자꾸 그런 얘기를 하게 되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람이 어떤 존재라던가, 이런 걸 깨우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항상 확신할 수 없기에 계속 관심이 가나 보다.
일종의 로드무비 같다.
사실 여행영화를 찍고 싶었다.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영화를 하고 싶었다. 거기서 출발한 영화다. 길 위의 풍경을 많이 담았지만 인물을 따라가는 쪽으로 편집하다 보니 많이 빠졌다. 그래서 내가 원한 만큼의 멋진 로드무비가 된 것 같진 않다. (웃음) 하지만 적어도 직접 그런 느낌들을 만들어 나갔으니까 이미 로드무비를 해냈다고 생각한다.
전작의 흥행 실패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진 않았나?
차기작을 하기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흥행 스코어에 대한 강박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기서 오는 걱정과 답답함은 있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즐거워질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즐거운 영화가 하고 싶어졌다.
최소한 소통에 대한 고민은 있었을 것 같다. 적어도 자신의 취향이 담긴 작품이 외면당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랄 수도 있고.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내 취향을 바꾼 건 아니다. 다만 함께 작업하는 배우나 스태프와 조금 더 소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결국 내가 추구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예전과 다르게 시도했다.
<집 나온 남자들>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나?
감히 말해보자면 지금 한국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코미디가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작품을 선보인 뒤, 그로부터 나오는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고 싶다. 단순히 관객 수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 66)
사실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은 <공공의 적 2>라고 명명됐어야 하는 작품 같다. <공공의 적2>?
사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강력반 형사 강철중이 다시 복귀한 거니까. 그렇지. 1편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1이 됐고.
솔직히 본인도 <공공의 적 2>보단 <강철중>에 애정이 남을 것 같은데. 백배나 당연하다. 솔직히 <공공의 적>이 너무 강렬해서, 바로 이어서 못하겠더라. 게다가 강력반 형사가 만날 적이 있고, 검사가 만날 적이 다르지 않나. 강력반 형사로서 적을 찾기가 힘들어서 직업을 바꿔봤지. 하지만 머릿속에 계속 저 강력반 캐릭터를 살려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철중>을 잡으면서 오케이, 이거다, 밀어붙인 거지.
사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오랜만에 본인을 감독으로서 현장에 복귀시킨 캐릭터이기도 했다. 맞다.
그만큼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캐릭터였을 텐데 다시 한번 그 캐릭터를 꺼내 들었다는 건 제대로 진검승부를 해보겠다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감 플러스, 내가 제일 잘하는 장르를 다시 한번 해보자는 거였지.
동시에 한국영화 위기가 공공연해진 상황에서 강우석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감이 <강철중>에 대한 비장감을 덧씌우는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이 영화 판에서 나까지 작품을 꺼냈는데 이게 안되면 나는 문 닫겠다, 난 이제 물러난다.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느껴졌다.
<강철중>에서 이원술이란 캐릭터는 전작의 ‘공공의 적’들과는 다르다. 완전히 다르지.
이전까지의 ‘공공의 적’들은 단선적인 악인이었다. 그냥 나쁜 놈. 머리 안 쓰고 그냥 나쁜 놈.
그에 반해 이원술은 다양한 감상을 부르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아무래도 그건 장진 감독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이원술은 분명히 영향이 있다. 다만 (장)진이가 만든 캐릭터를 강우석화(化) 시켜버린 거지. <공공의 적>시리즈의 승부처는 적이다, 적. 강철중이 아니다. 강철중이 만난 새로운 적이 어떻게 하느냐가 이 영화의 흥행결과로 나타나겠지. 그래서 난 정말 웃음을 주고 싶었어. 물론 사람들이 보기엔 참 나쁜 인간인데 영화가 경쾌하니까 덜 나빠 보일 수도 있단 말이야. 애정이 가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그 웃음 때문에 혹시 덜 미워 보이더라도 그런 걸 시도해보고 싶었어. 이렇게 악당도 웃길 수 있구나. 영화적으로 큰 웃음을 줄 수 있구나. 마지막에 처단할 때 덜 통쾌할 수 있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 재미를 주면 된다고 생각했지. 또 전편의 공공의 적들처럼 재영이가 직접 칼 쑤시고 다니는 것만 하면 사람 지친다. 내용만 바꿨지만 전편 또 보고 있다고 그러면 안되잖아. 본 영화 또 보는 거 같으면. 그래서 정말 새로운 영화하자, 고삐리 양아치도 나오고, 칼잡이도 나오고. 대신 1편의 향수가 있으니까, 이문식, 유해진이 나와야 된다, 그건 분명히 1편을 복기하면서 한번 즐겨라, 하는 부분이지. 그리고 이외의 나머지는 새롭게 한번 즐겨라, 는 것이고. 고삐리와 강철중의 대결도 있고, 이원술과의 대결도 있으니까, 분명 새롭지만 1편과 무관한 영화 같지 않다는 말이지. 그래서 1-1이 딱 맞는 거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공공의 적’과 달리 이원술은 관객의 호감을 얻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당연하지. 그래야 다음 편이 나온다.(웃음) 이번엔 저게 누구야, 이렇게 되야 한다고. 워낙 연기력이 탄탄한 설경구는 이제 그대로 두고, 이번에는 어떤 적인지, 그 놈을 어떻게 잡을지, 그런 기대치가 있는 거지. 적이 살아줘야 시리즈가 간다니까.
어쨌든 <강철중>은 여러모로 장진의 흔적이 배어있다. (장진 감독이) 설계를 했으니까. 물론 구성은 내가 올렸지만. 설계자의 설계가 나쁜 것이 아니면 구성에 받아줘야 해. 그렇잖아. 현무암 쓸 걸 대리석으로 쓰겠다, 이렇게 재질은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지만, 그것도 쓸 때부터 나랑 말을 많이 맞췄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시나리오 작업에도 어느 정도 관여했다는 말인가? 관여 안 할 수가 없지. 아이디어는 내 아이디어인데.
그래도 장진 감독의 시나리오인 만큼 특색이 상당히 두드러졌을 텐데. 그런 걸 다 걷어내 버렸지.
본인의 연출적 취향에 걸맞게 변형되거나 제거된 게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름대로 반영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존재했을까? 당연하지. 예를 들면, ‘진아, 이 씬은 내가 못 쓴다. 내가 알아서 바꾸마.’ 그렇게 바꿨지. 그 대신에 전체 틀거리가 좋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수정을 하더라도 작가 입장에서 기분 나쁘지 않겠지. 오히려 자기 코미디에 내 코미디를 더 얹어줬으니까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러는 거지.
고등학생들이 조직에 연루된다는 설정은 누구로부터 착안된 아이디어인지. 어느 분 아이디어가 아니라, 영화 크랭크인한 뒤 한달 만에 이 사건이 실제로 터졌었어. 임성훈의 ‘세븐데이즈’에서 이게 나오는 거야. 조폭이 직업화되고 있다, 이 코너였어. 거기서 조폭들을 인터뷰하는데 조폭들이 어이없는 말들을 하더구먼. 나 이 생활에 만족한다, 나 연봉 얼마 받는데 대우도 괜찮다, 청소년들한테 이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어.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가도 돼? 이게 다 영화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이런 생각도 들고. 영화 속에서 조폭들이 너무 멋있잖아.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이거 한번쯤 말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지. 그 대신에 조폭을 너무 극악하게 그리면 영화가 너무 지저분해져 버린다고.
폭력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건 경계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폭력성이 가미되면 청소년들 보여주고 싶은데 이 영화는 못 보여줄 것이고, 대신 적을 좀 재미있게 가보자. 그래서 웃고, 즐기고 나오다가도 우리 사회가 이런 면이 있구나, 이 정도만 생각하게 해주면 상업 영화로서 할 도리를 다한 거 아닌가, 그런 판단을 했다.
이전 시리즈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굵어졌다. 웃기면서 메시지를 밑에 깔았으니까. 소리 지르지 않고.
장진 감독과 함께 K&J를 설립한 이후, <강철중>은 가장 본격적인 공동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이 전에 <아들>이나 <한반도>로 따로 놀긴 했지만 <강철중>이 우리가 영화사 세워놓고 함께 한 첫 게임이지. 처음 링에 오른 거야.
사실 본인이 오랫동안 장진 감독의 배후세력이기도 했다.(웃음) 난 진이가 한다면 뭐든지 밀었으니까. 심지어 시나리오가 안 좋아도 찍으라고 했으니까.
솔직히 장진 감독의 이야기가 본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건 아니었을 텐데. 아니지. 하지만 생각은 비슷해. 다만 표현의 차이가 있지. 예를 들면 <거룩한 계보>도 잘 가다가 갑자기 판타지로 가버리잖아. 그래서 ‘진아, 이거 하지 마라. 위험하다.’ 그러면 절대 아니래. 그래서 ‘야, 총 맞고 비행기 떨어지고, 그게 (말이) 되니? 그게?’ 그 전까지는 꼭 <대부>처럼 멋있게 가잖아. 그러다 어느 순간에 벽 무너뜨린다고 벽에 달려가 박고 있고.(웃음) 그런 거야.
혹시 이 부분만큼은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장진 감독이 애착을 보인 부분은 없나? 이것만 살려달라고 할만한 건 내가 아니까 알아서 살려놓지. 애초에 내가 진이 보고, ‘네 맘대로 써라. 내가 못 찍는 건 알아서 걷어내마.’ 그랬더니 ‘감독님 알아서 하십쇼. 전 그냥 분량만 전적으로 채웁니다.’ 그래서 OK 한 거니까.
<강철중>을 <공공의 적>시리즈의 가능성을 책정하는 기준으로 생각하진 않나? 계속 가고 싶다는 뜻이지.
예전에 <투캅스3>같은 경우는 김상진 감독에게 맡기기도 했었다. <투캅스>와 <투캅스2>찍을 때, 너무 고생해서 내가 억만금을 벌어도 다신 이거 못한다 그랬지. 그런데 (김)상진이가 ‘그럼 감독님 이거 저 주세요.’ 그러는 거야. ‘자신 있어? 너?’ 그러니까 ‘네. 제가 청출어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랬다가 제대로 망해서 시리즈가 문 닫았잖아.(웃음) 지금도 혹시 (누군가가) ‘<투캅스>감독이세요?’ 그러면 ‘아, 아닙니다.’ 이래.(웃음) 어쨌든 그땐 그랬고, 강철중은 3편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거야. 왜? 적이 바뀐다 이거지. <투캅스>는 적을 쫓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뭔가 만들어가야 되는 거고, 이게 시트콤이나 다름이 없단 말야, 시츄에이션 코미디. 근데 <공공의 적>은 우리 시대에 또 다른 천인공노할 나쁜 놈, 퍼블릭 에네미(public enemy)가 나타나면 되잖아. 그렇기 때문에 3편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거야.
혹시 <투캅스3>처럼 이 시리즈도 언젠가 다른 감독한테, 에이, 노! 네버! 노! 안 하면 안 했지. 못 줘, 이제.(웃음) 진짜 못 줘. 그리고 내가 안 하면 설경구가 안 해.
조연들의 매력을 살리는 것도 염두에 뒀을 텐데. 아마 배우들 연기가 나쁘지 않았을 거야. 이번에 조연들을 하나씩 다 살려보려고 주변 배우들까지 내가 하나씩 일일이 다 컨트롤했다고.
사실 <공공의 적>이 인기를 얻은 배경으로 조연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공공의 적>에 나왔던 유해진, 이문식이 드라마 운반하는 브리지(bridge)로 잠깐 나오고, 고삐리 태진이, 칼잡이 문수, 그 다음에 이원술 따라다니는 변호사까지 다 자기 노릇을 하잖아. 영화가 재미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려면 조연의 등장과 퇴장을 명확하게 잡아줘야 돼. 등장하면 왜 등장하는지, 무슨 롤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주고, 엔딩 아웃 시켜라 이거지. 내가 이번에 주인공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고 조연들까지 일일이 다 손봤던 건 입체적인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였으니까.
사실 이문식이나 유해진 같은 경우는 <공공의 적> 개봉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지.
하지만 지금은 종종 주연까지 맡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너무 작은 역할을 맡기는 게 아닌가 불안함은 없었나? 아니야. 그들이 그 영화로 컸기 때문에 너무나 흔쾌하게 하겠다고 하더라고. 심지어 돈도 안받았잖아. 마치 아버지한테 아들이 뛰어오는 것처럼. 그래서 ‘너희 여기 출연한 거 후회하게 하진 않을게.’ 그랬더니 ‘아, 저희 믿습니다.’ 그러더라. 첫날 크랭크인을 이문식하고 갔고, 다음 날은 해진이하고 갔어. 아주 기분 좋게 찍었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당신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크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대감일 거다. 영화 잘 되면 또 찍고, (다른 감독에게도) 이 영화 찍게 하고, 저 영화도 찍게 하고, 그렇게 영화판을 몰고 가는 느낌에 대한 기대감. 이번에 <강철중>이 잘되면 한국영화가 어려운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 그런 기대 때문일 거다.
아무래도 그런 면에 대해서, 엄청 부담스럽지. 그런데 거기서 만약 진짜 개떡 같은 영화가 나왔다면 그 배신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야. 기자들조차도, 쟤는 끝장났다, 이런 식으로 글들 엄청 써 보냈을 거야, 아마. 어이없는 영화 찍었다면, 너마저 이러냐, 너마저, 이런 마음에서 얼마나 많은 분노의 글이 나오겠어. 고등학생들조차 ‘이명박 OUT’ 피켓 들고 다니는데, 언론에서 일개 감독하나 못 죽이겠냐고. 거기에 대해서 난 각오한다니까. 이번에 만약 당신들이 봤을 때, 내가 유머 다 잃어버리고, 드라마도 모르는 놈같이 보이면 날 개같이 밟아도 좋다. 대신 좋으면 칭찬해줘라.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이잖아.
사실 예전에 <한반도>당시에 스스로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영화 찍고 나니까 한국 해경과 일본 해경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강철중>에서도 비슷한 시의성이 발생한 것 같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광우병’이란 단어 딱 한번 나오는데도 민감하게 들린다. 사실 그 전에 소 얘기 많이 나오잖아. 처음부터 도축장 씬도 있고. 나중에는 ‘수입산인데 속여 팔면 안되지.’ 이런 대사도 나오고. 후반부에 가면 ‘고기 맛이 어떻습니까?’ 물으면 강철중이 ‘이 맛이지. 한우가. 반성 많이 했구나.’ 이런데다가 광우병 대사까지 나오니까 사람들이 확 기겁을 하는 거지. 근데 4개월 전에 난 그런 의도로 찍은 게 아니라, 이왕 소고기 먹는 거 한우 먹어주자, 우리 농민들 위해서. 그런 뜻으로 한 건데…..내가 마치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말야.(웃음)
아무래도 시사적인 부분에서 영화적 모티브를 얻다 보니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인 관심이 많아서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생기는 거 같아.
사실 최근 경찰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많은데. 근데 그건 걱정이 안 되는 게, <강철중>은 민생사범 쫓는 거야. 지금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가 있는 거지, 실제 강력반 형사들이 소매치기도 안 잡고 강도도 안 잡고 그런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잖아. 강철중은 민생사범을 잡는 일개 형사니까 그걸 여기에 비유해서 과잉 진압하는 경찰을 떠올리진 않을 거 같아. 일반시사 해봤잖아. 그럼 거기에 경찰 너무 미화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의견 나와야지. 근데 정말 나쁜 놈 잡는 거니까. 내가 봤을 땐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 같다.
사실 강철중은 형사가 아니었다면 깡패가 될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강철중이란 캐릭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활용하는 방향에 대한 답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고삐리들한테, 깡패가 그렇게 되고 싶어? 너 깡패가 부럽냐? 이런 대사 하잖아. 그런데 실제로 그런 애들 많거든. 학교가면 일진회 있잖아. 그런 걸 선망한다는 말이지. 영화보고 나면, 이거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한 거 아냐? 한번쯤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강철중은 한국영화의 자본동원력 안에서 묘사가 가능한 안티히어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금으로 할리우드 애들 못 이겨. 우리 정서로 이겨야지. 우리 정서로. 우리 식으로 이겨야 된다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영화도 대작을 제작하는 비율이 늘었다. 시장상황도 그에 기대는 느낌이고. 조금 더 영화인들이 신중해질 필요가 있어. 너무 급하게 찍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하고, 정말 이 시나리오가, 이 내용이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지, 상업영화 찍으면서 최소한의 그런 노력들은 해야 될 것 같단 말이지. 투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편수만 무조건 늘릴 게 아니라 내실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주면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영화 선택한다. <괴물>이 재미있으니까 보러 간 거지, 누가 보라 그래서 봤냐고, 그러잖아. 그런 관점에서 우린 지금 영화 내실에 힘을 쏟아야 돼.
91년에 찍었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이후로 각본 작업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참여하던 안 하던 난 이름을 안 올리니까. 다 참여는 하는데 이름은 빼지. 내가 작가란 이름을 가지면 뭐하냐고. 누릴 거 다 누리는 놈이. 자기가 조금 써놓고 왜 이름 넣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공로 인정받으려고? 내가 다 썼으면 내 이름을 넣지.
워낙 할 일이 많다 보니 각본까지 도맡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아니고, 내가 촬영할 때 워낙 시나리오 수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아이디어가 안 나와서 그런 거다. 조금 미흡하더라도 작가에게 쓰게 하는 게 나아. 어차피 내가 고쳐 찍으면 되니까.
글쓰기는 일단 작가에게 맡기고 연출로 승부한다? 물론이지. 만약 내가 고치다가 힘들 때 다시, 이건 네가 고쳐줘야겠다, 그 정도 부탁은 하는 거지.
좀 오래 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모티브가 궁금하다. 사실 1편 작가들이 뽑아낸 캐릭터다. 내가 꼴통 형사는 그려본 적이 없잖아. <투캅스>는 재미있는 형사였고. 작가가, ‘감독님, 꼴통 형사 이야기 한번 해보실래요? 진짜 나쁜 놈인데 꼴통 형사 이야기, 나쁜 놈이 더 나쁜 놈 잡는 영화.’ 이러더라. 그 때 감이 왔다. 바로 그거다. 화이트 앤 블랙이 아니고, 회색. 그렇게 오케이 한 거지.
그 당시 <공공의 적>으로 오랜만에 감독직으로 현장에 복귀했는데 만약 강철중을 못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복귀 안 했을걸. 그 정도 되니까 내가 복귀했지. 3년 반 만에 영화 찍는 놈이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으면 바보지, 바보.
<한반도>는 말이 많았었다. 좀 위험했지.
사실 <공공의 적>으로 현장에 복귀한 뒤로 공공의 적 시리즈를 제하면 <실미도>와 <한반도>가 남는다. 두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한반도>가 <실미도>에 비해 민감한 반응을 얻었던 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의 평에 대해서 내가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라고 말한 것뿐이야. 나는 판타지로 소리를 질렀는데 사람들은 현실정치로 받아들이고 굉장히 오해를 하더라. 지금 이 세계화 시대에 일본에게 국수적으로 이래야 할 이유가 뭐냐, 굉장히 편협한 인종주의다, 막 이러는 거다. 사실 사상이 없는 영화였고 나한테는 판타지였는데 그렇게 들이대니까. 아, 지금 이 사람들이 영화평을 안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너 이런 얘기하면 안돼, 그래서 사실은 되게 당황했어. 억울하기도 하고. 관객한테, 우리 이런 일이 있죠.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죠? 이런 동의를 구하려던 거거든. 그걸 전달하는 수단은 웃음이 될 수도 있지만, 영화 보는 동안에 다른 생각 말고 나와 한번 생각을 맞춰보자는 거지. 이런 인물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객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소통하고 싶은 거였다. 일반 관객들은 받아주는데, 먹물, 화이트 칼라들, 또는 언론들, 평론가 시각에서 안 받아들이는 거야. 이런 영화는 만들면 안 되는 영화다. 그래서 난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시의성도 컸다. 시의성 플러스 노무현 정권. 이거 이 정권 밀라고 찍은 거 아냐? 이런 오해까지 하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보고 차기 국회의원 나가시려고 그러죠? 이러고.(웃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어쩌면 그런 과정도 다시 강철중을 빼 들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됐을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내가 다시 재미있는 얘기로 돌아왔을지도 몰라. 내가 바보가 아니거든.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협한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 개념으로 영화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다시 즐거운 영화 찍어드릴까요? 이런 마음으로 다시 몸풀어본 거라고. 내가 감각이 아직 죽진 않았다고, 연출자로서 비겁하지 않게 연출해보자, 그런 의도도 있고.
사실 처음 강철중이 상대한 공공의 적은 사소한 개인적 범죄자였다. 하지만 속편에서부터 그 범위가 조직적인 형태로 확장되는 느낌이다. <강철중>에서는 확실히 기업적인 조직 자체가 공공의 적이 됐고. 1편의 <공공의 적> 타이틀이 붙을만한 것인가, 약간 회의가 있었다. 천하의 몹쓸 놈이지, 그게 공공의 적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공공의 적 2>에서는 천박한 자본주의자를 하나 건드렸고. 그건 공공의 적이 맞거든. 근데 <강철중>이 사실 공공의 적 중에 가장 사실 공공의 적답지. 그래서 이 영화보시고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이번엔 정말 공공의 적 같네? 이러더라.
<강철중>에서 등장하는 강철중은 <공공의 적> 당시에 비해 성숙했다는 느낌도 든다. 캐릭터가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당연히 성장해야지. 세월이 흘렀는데. 인간이 변해가야지.
사실 애초부터 강철중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나쁜 놈이지. 정의롭지 않아.
<공공의 적>에서도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상대에 대한 사소한 복수심이 발단이 되기도 했었고. 그렇지. 그런 개인적인 원한도 좀 있고.
하지만 <강철중>에서 그는 과거에 비해 사회적인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의지가 좀 더 보인다. 사람이 연륜이 몸에 배면 사고가 달라진다. 당신도 5년 후에 본인의 글이 달라질 거라고. 지금처럼 많이 안 써도 더 짧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글이 나올 거라고. 그것처럼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나쁜 짓 했던 놈이 생활인이 되듯이, 그래야 시리즈 안에서 변해가는 이 사람과 함께 우리가 생활해가는 느낌이 들지. 과거가 좋았다고 해서 그대로 다시 가면 그 영화 무슨 재미로 봐.
딸이 많이 자란 것에 대한 영향도 있지 않나 싶은데. 사실 옛날에 가족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가족도 중요해진 거지. 그래서 일일교사도 가잖아. 1편 같았으면 일일 교사 갔겠냐고, 걔가.
우린 깡패지만 사회에서는 우리를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실한 청년이라고 부른다. 극 중 이원술의 대사에서 나오는 말인데 이는 마치 사회적인 조직체계나 조직문화에 대한 비유처럼 들린다. 실제 건달 아니지만 보면 건달 같은 애들 많잖아. 사회에서도 조직 형태가 그렇고. 일반 회사도 안으로 보면 깡패보다 더한 곳이 많아. 폭력을 안 쓸 뿐이지. 사람 함부로 자르고. 그니까 그 대사를 보면, 건실한 청년으로 불러주니까 깡패 짓 열심히 하다 보면 나처럼 돼, 이런 아주 나쁜 꿈을 던져주잖아. 우리가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강철중은 항상 주먹으로 공공의 적을 처단한다. 그런 응징방식을 묘사하는 건 그 상황에서 발생할만한 쾌감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만든 캐릭터인데 당연히 내 생각이 안 들어갈 수가 없지. 그리고 내 생각도 당연히 있지만 관객들도 대등하게 배려해줘야지. 우리는 깡패 보면 무서워서 피한다. 근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피하면 안돼. 아무리 무서워도 들러붙어야 한다고. 그래야 사고가 맑아지고 투명해지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는 길거리 지나가다가 진짜 깡패들끼리 싸우면 우리는 그렇게 못하지. 도망가야지, 어떡해. 무슨 칼 맞을 일 있어? 그런데 강철중은 그러면 안되지. 거기서 시비를 가려주던지, 다 때려서 무릎을 꿇게 만들던지. 그건 영화적 통쾌함 때문에 해야 하는 거야.
동시에 그것이 어쩌면 본인이 현실에서 지닌 공권력에 대한 불만을 영화적으로 해소하는 측면이 아닌가 싶다. 바람일 수도 있고. 맞다. 나는 강철중 같은 형사가 분명 있다고 본다.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오케이 하거나, 또 그렇게 못한 사람들이 보고, 나도 앞으로 이렇게 한다, 그럴 수 있잖아. 내가 형사는 안 해봤지만 실제로 <공공의 적 2>보고 검사들이, 맞아, 검사는 저렇게 해야 돼, 자기들끼리 그랬다는 거 아니야. 강철중 같이 검사라면 저렇게 해야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악을 잡아야지. 안되면 총을 들이대는 한이 있더라도.
요즘 안 그래도 시국이 어지럽다. 나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되게 슬펐다. 내가 작업 중이라 참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이젠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이 진짜로 높아졌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진국 수준일지 모르나 의식들은 정말 선진국 수준이다. 아줌마들이 유모차에 애태우고 나온 거 보면, 야, 이제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됐다, 싶더라. 난 되게 감동받았어.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영화적 모티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웃음) 난 더 이상 (영화적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감독이 되고 싶진 않아. (웃음)
사실 여성 캐릭터를 못 본지 오래됐다. 한 10년 됐지. 10년. 내가 사실 코미디라면 할 수 있다. 그런데 멜로 드라마 해라, 그런 건 내가 못해. 남녀 사랑이야기 같은 건 못한다고.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건 해보겠다 싶어서 코미디로서 여성 배우가 등장하는 건 앞으로 분명히 나올 거 같은데, 여성스러움을 묘사하는 건 난 못한다.
사실 <마누라 죽이기>나 <미스터 맘마>처럼 여성이 등장했을 때 코미디도 유연해졌던 것 같다. 그건 우리 마누라가 무진장 웃기니까.(웃음) 진짜로. 결혼하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 마누라가 결혼하고 나서 지금은 완전 개그우먼됐어. 옛날에 내가 웃기려고 하면 화내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자기가 날 웃기고 그래.
사모님께서 유쾌하신 편인가 보다. 되게 명랑해. 되게 밝고.
다시 한번 여성캐릭터를 앞세운 코미디를 찍어도 될 거 같은데. (웃음) 일단 내가 해보고 싶은 거 한 두 개 먼저 해보고.
사실 최근 시네마서비스 위기설이 심상찮게 돌았었다. 실제 위기다. 실제 지금 심각한 위기라고. 지난 2년 동안 개봉했던 영화들이 다 망했잖아.
시네마서비스의 위기를 한국영화 위기의 실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우리하고 싸이더스 어려워진 거 보면 당연히 한국영화 전체가 어려워진 거지.
본인은 재미있는 영화의 부재가 한국영화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기회라고 본다. 진짜 한국영화가 질 높아질 수 있는 기회다.
부가판권이나 극장과 배급의 수익 배분의 구조적인 개선도 시급하지 않을까. 그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한국영화의 수준문제다. 수준문제. 사실 요 근래 극장에서 내걸기에 민망한 작품들이 많았잖아. 기자시사에서 보고 민망하지 않았어?
…… 기자들도 답답했을 거야. 어떻게 이런 영화에 3~40억씩 돈들이냐, 이런 영화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영화들 편수 줄이고, 한국영화 가능성 있구나, 발전하네, 이럴만한 영화들이 드문드문 나와줘야 된다 이거야. 너무 안 나오고 있잖아. 요즘.
그런 실망감이 축적되다 보니 관성적으로 한국영화 자체를 기피하는 관객도 발생하는 것 같다. 그걸 깨주려면 재미있는 영화가 계속해서 나와야 돼.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강철중>에 그런 기대를 하는 거 같아. 어려움도 극복해주고, 관객들도 만족시켜주고.
반면에 그런 관성이 <강철중>에게도 작동할 수 있다. 당연히 지금 관객들이 너무 안 나오니까, 사실 한국영화를 너무 안 보니까 걱정이 된다. 그러니까 좀 오게 해봐!(웃음)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강한섭 교수가 취임했다. 의견이 궁금하다. 나는 잘 할 거 같은데. 워낙 의욕이 넘치고, 본인도 너무 하고 싶어했고. 그리고 사실 지금 강한섭은 안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분명 더 잘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면 안티가 많다는 얘기는 감시가 많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난 오히려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잘할 것이다. 내가 저번에 축하한다고 전화했는데 그 때, 당신 정말 잘해야 된다, 여러 명이 주시하고 언론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 진흥위원회 똑바로 운영하고 정말 한국영화에 뭐가 도움이 되는지 정말 잘해달라, 그랬다. 그러니까 정말 믿어달라고 하더라. 자기가 3년 동안 한국영화에 큰 도움이 돼보겠다고. 잘할 거다.
지금 사실 제작자나 기획자로서, 한국영화 안에서 산업적으로 많은 짐을 지고 있는데, 종종 감독역할에만 치중하고 싶다는 생각하진 않나. 왜, 정말 하루에 수십 번도 하지. <강철중>기자시사회에서 어떤 기자들이 그러더라. 온갖 이상한 짓 다 하면서도 이 정도는 만드는데, 감독만 하면 정말 어떤 영화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고.
사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의 적 3>에 해당한다. 하지만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본래 타이틀 대신,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네임밸류를 앞세우고 ‘1-1’이란 번거로운 순번을 꼬리에 붙인 건 다름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틀로 전면에 내세운 ‘강철중’은 그 앞에 ‘원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1-1’이라는 순번이 붙은 부제는 전작인 <공공의 적 2>를 시리즈로부터 분가시키는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돌아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강철중>이 ‘공공의 적 1-1’이 된 사연은 이렇다. 결국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란 브랜드를 재건하는 작업이다. 무리한 확장사업으로 인해 훼손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철중>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개별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는 것은 속편이 맞이해야 할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철중>에 주목할만한 점은 설경구의 출연,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강철중>에서는 장진 감독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만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눈에 띤다. 또한 강철중과 상대하는 이원술(정재영)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악인 캐릭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규환(이성재)과 한상우(정준호)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인으로써 강철중과 대척점에 놓였다면 이원술은 전자들에 비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에게 태연하게 칼을 쥐어주는 악인이긴 하지만 조직적 의리를 중시하고, 자가수성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적 자상함마저 갖추고 있다. 강철중을 주목하게 만들던 전작의 단선적인 악인들에 비해 이원술은 좀 더 입체적인 선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됐다.
동시에 <강철중>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에 비해 성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양아치만큼 껄렁껄렁하고 애처럼 멋대로이며 손발이 자동 반사되는 폭력적 습관도 여전하다. 그러나 자신의 철없음을 타이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한 딸이 있고, 15년 차 경찰 공무원 월급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는 빈곤한 현실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세월에 장사 없듯,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강철중>에서 강철중은 철없이 막무가내이던 <공공의 적>시절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위트가 감소한 강철중 앞에 인간적 매력을 갖춘 악인 이원술을 대립시키면서 캐릭터 구도가 종종 역전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 사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조규환을-<공공의 적 2>는 논외로 치고- 미치도록 잡고 싶어한 건 강철중이 정의에 목숨 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규환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인면수심의 탈을 쓴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술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악인이다. 특히 그가 사시미 하나를 쥐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그 두목(문성근)과 담판을 짓고 나오는 장면은 인상적인 카리스마가 구사되고 인간적인 유머까지 겸비한다.
단선적이던 캐릭터 나열방식에 불분명한 혼선이 발생했다.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의 것이지만 이원술은 분명 장진 감독의 것에 가깝다. 결국 두 감독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위트에 도취되기도 한다. 수위가 넘칠 것 같은 웃음의 타이밍에 좀처럼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건 융합될 수 없는 스타일의 간극 때문이다. 선이 굵고 묵직한 강우석 감독의 판을 지탱하기엔 장진 감독의 스타일은 가볍게 들뜬다. 동시에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공의 적>의 단선적 관계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얹으며 다소 번거로워졌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관여하는 조폭들의 실상을 그리는 <강철중>은 누가 봐도 공익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게는 상도덕의 윤리부터, 크게는 기업의 경영 윤리가, 게다가 대한민국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까지, 넓은 현실관념의 메시지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이 더더욱 <강철중>을 경직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유머가 녹아 들지 못하는 것도 이 심각한 사안들이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극적인 유연성을 방해하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강철중>은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 리턴즈’라 명명돼도 상관없는 작품이다. 하는 꼴을 봐서는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것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력계 형사 강철중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라면, 게다가 양복 차려 입은 검사 강철중이 정의를 주창하던 경직된 모습에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이에겐 더더욱 반가운 사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오리지널 <공공의 적>을 계승하는 만큼 본래 <공공의 적>을 채우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류양아치였던 산수(이문식)는 강철중 덕분에 학교(!)에 다녀온 뒤, 유흥업으로 성공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칼잡이 용만(유해진)도 정육점을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다. 또한 강철중과 애증을 나누는 엄 반장(강신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공공의 적>의 중요한 관점포인트가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을 통해 얻어지는 굵직한 재미였음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은 <강철중>의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강철중은 서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한국형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가 상대하는 악인은 언제나 부자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게다가 강철중은 가난하고, 심하게 강직하지 않다.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풍자가 막연한 단상처럼 녹아있는 강철중은 분명 대한민국 서민들을 통감시킬 만한 자의식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공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보단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다소 길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는 강철중의 대사는 결코 선한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부패시키고, 이를 좀먹고 자라는 무리들을 향해 그는 주먹을 날리고 맞짱을 뜬다. <공공의 적> 그리고 <강철중>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면 분명 이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친화적이고 부에 관대한 대한민국의 알량한 공권력과 달리 강철중은 공권력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허구적이지만 실존적인 심판을 몸소 실천한다. <강철중>에 호감을 부여할만한 요인은 영화 외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위협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