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 아니, 너는 비빔밥 집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이유를 물었다. 달래도 봤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도 해봤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언제나 너에게 최선을 다했고, 널 위해서 희생했고, 배려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슬픔의 끝에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에 휩쓸려 나가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이 펼쳐졌다. 아, 글쎄, 이소라 누나가 부른 것처럼 바람이 분다니까. 그리고 김동률이 노래합니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아, 정말 어떻게 안될까. 그런데 결국 그녀가 돌아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런데 이 노래가 이별 후 재회하는 노래였던가? 그걸 잘 몰라서였을까. 그 뒤로 우린 네 번 헤어졌고, 다섯 번째에서야 비로소 진짜 헤어졌다.
<연애의 온도>는 장영(김민희)과 이동희(이민기)의 이별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난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게 어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개차반 같은 공방이 펼쳐진다. 뒤에선 울고 불고 짜다가도 앞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을 듯이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그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회복된다. 거짓말처럼 붙어먹는다. “나 너랑 처음 하는 것처럼 떨려.” “나도 그래.” 몇 번이나 함께 뒹굴었던 그 방의 침대에서 마치 처음 자는 것처럼 말하고 진짜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대체 왜 싸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뭐 대수인가.
희한한 일이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망쳐놓은 뒤에야 풍요로웠던 시절이 간절해진다는 것이. 누구나 러브 스토리를 꿈꾼다. 솔로일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공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금이야 옥이야 물고 빨며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귀엽고 예뻐죽겠지. 그리고 점점 변한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가 ‘이 정도도 못 참아?’에서 ‘이 정도로 해줘도 저래?’로 진화한다. 편하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다 이해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 결국 그 관성은 이별에 부딪혀서야 멈춰서고 되돌아본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덕분에 헤어진 연인 가운데 몇몇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대부분 다시 헤어진다.
<연애의 온도>는 이별의 과정 이후의 결과를 전시하며 시작된다. 그 이후의 재회를 통해서 이 남녀가 일찍이 어떤 방식으로 헤어졌을지 깨닫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동어반복이다.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서 잘될 확률은 3%’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로또에서 1등이 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라는데 매주마다 1등이 나온다’니 희망을 갖고 다시 사랑한다 말한다. 미안하지만 관계에서 로또는 없다. 당신의 애인은 복권이 아니다. 그러니 서로를 기꺼이 감내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결국 당신 혹은 내가 변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난 그녀와의 다섯 번째만의 이별에서야 그걸 알았다. 당장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그걸 알 때 비로소 진짜 이별했다. 그날은 잠도 잘 왔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어도 선명한 금은 남는다. 더 이상 예전의 접시가 아니다. 박살난 관계에서도 금은 선명하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사실 그 금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 없다는 속설이 돈다. 그렇게 당신도, 나도 이별했다. 이별했었다.
<연애의 온도>에서 배우는 실전 연애 팁
DO 기다림
헤어지자는 그녀 혹은 그를 당장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버려라. 즉흥적인 흥분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러니 일단은 시간을 갖고 생각해라.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도 시간을 줘야 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당장의 어떤 노력에도 되돌리기 힘들 거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감내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Don’t 진상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뭐,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야!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부터 “남자(여자) 생겼어? 그 새끼 누구야?” 같은 막말을 내뱉는다면 당신 역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잡고 싶으면 당신부터 잡을만한 사람이 돼야 한다.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정말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깊은 배려라면야 어쩌겠냐마는.
별일 없이 산다고 노래하면서도 참 별일이 많았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장기하는 얼굴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다.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이인 그들은 역시 여전한 기대를 부른다. 마치 ‘네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라고 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내고 가져갑시다.” 무엇을?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의 신곡 ‘좋다 말았네’ 음원을. 어디서?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어떻게? 원하는 가격으로, 최저 10원부터. 그래서 ‘백지수표 프로젝트.’ 그렇다면 왜? 장기하가 답한다. “음원 가격 결정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의견은 분분한데 소비자들에겐 직접 가격 책정을 맡겨본 적이 없지 않나. 한시적인 프로젝트지만 음악을 듣는 분들의 생각을 약간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뮤지션들이 직접 자신들의 음원 가격을 책정해서 시장에 내놓고 100% 수익을 가져가는 음원 프리마켓을 운영하던 현대카드 뮤직에서 장얼에게 무언가를 같이 해보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터였다. 장얼이 생각한 게 바로 소비자가 책정한 가격대로 음원을 제공한다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다.
국내에서 360만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강남스타일’로 싸이가 얻은 수익은 6600만원이었다. ‘강남 스타일’의 음원당 가격은 18원이 조금 넘는 수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162건의 다운로드가 기록된 ‘좋다 말았네’의 음원 누적금액은 2644049원. 곡당 1200원 이상을 호가하는 가격이다. 그 수치만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현대카드의 전태영 사장은 트위터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곡의 가치만 내라는 장얼의 부탁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가를 낸 것 같다.” 이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로 새롭게 정립된 음원가격이 음원 소비자의 객관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장얼의 팬들의 주관적인 애정이 담긴 수치로 보인다는 의견이다. “사실 팬들이 우리 체면을 살려줬다고 봐야지(장기하).” 장얼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겐 팬들과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직접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우리 음원을 다운로드 받았는데 아무리 간소하게 절차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더라. 그런 귀찮은 과정을 감내하면서 우리 음원을 사주신 분들이 고마웠다(장기하).” 그렇게 장얼은 5년 만에 팬들과 교감했다.
시작은 2008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귓바퀴를 휘감으며 심심찮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한 음절 툭툭 내뱉듯 또박또박하게 발성하는 가사엔 묘한 맛이 있었다. 랩 같기도 한데, 노래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데,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나. 에스프레소를 뽑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라떼도 주문할 수 있는 카페에서도 적잖이 ‘싸구려 커피’가 들렸다. 그 즈음 온라인에선 어느 밴드의 라이브 동영상이 적잖이 전파됐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며 진지하게 노래하는 한 사내의 양 옆으로 선글라스를 낀 두 여인이 무표정하게 팔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 그 사내란다. 장기하라고 했다.
장기하가 출연한 그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홈레코딩으로 만든 세 곡의 노래가 든 싱글 앨범이 불티나게 팔렸다. 장기하는 혼자서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도 하고, 연주도 하고, 집에서 직접 녹음도 했다는데 공연만큼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당장 무대에서 함께할 세션들을 구했고 결국 항상 함께할 멤버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가 좋아하는 ‘토킹 헤즈’를 모티프로 작명된 밴드명이다. 사실 데뷔 초기의 장얼과 지금의 장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얼굴들’이 많이 달라졌다. 라이브 무대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두 여인 미미 시스터즈(코러스, 안무)가 탈퇴하면서, 남자 일색의 밴드로 재탄생했다. 장기하가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 드러머였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원년 멤버 이민기(기타)와 정중엽(베이스)은 여전하지만 2집부터 새롭게 가세한 이종민(건반)과 원년 드러머의 군복무로 최근에 합류한 전일준 그리고 일찍이 장얼의 비밀병기였던 하세가와 요헤이(기타)까지 합세하며 6인의 진영이 갖춰졌다.
‘김창완 밴드’의 일원이기도 했던 하세가와 요헤이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한지 20년에 달하는 기타리스트다. 지난 2집 <장기하와 얼굴들>에선 프로듀서와 기타 파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그 이전부터 장얼의 보이지 않는 멤버였다. “처음엔 기타 두 대가 필요한 곡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멤버가 되기 어려웠지만 함께 작업할수록 마음이나 생각이 잘 맞았다. 점점 하세가와 형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식멤버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대외적으론 큰 변화처럼 보이겠지만 내부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장기하).” 사실 하세가와 요헤이의 영입에는 장기하의 투병도 한몫 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밝혔듯이 장기하는 국소이긴장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기이하게도 종종 손이 꽉 쥐어져서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는 증상인데 장기하의 왼손에도 같은 증상이 생겼고 덕분에 일찍이 드러머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1집 당시만 해도 기타를 연주했지만 이젠 기타 연주도 어렵다. 그래서 사실상 트윈 기타 체제였던 밴드에 기타 파트 하나가 공석이 됐고 자연스럽게 하세가와 요헤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하세가와 형이 나보다 기타를 훨씬 잘 치니까 내 손이 불편해진 덕분에 우리 전투력이 상승할 수 있었던 거죠(장기하).”
처음 장얼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가 미미 시스터즈의 시크한 퍼포먼스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장기하가 써내려간 구성지고 알싸한 구어체 가사의 묘미와 반복적인 후렴구가 주는 경쾌한 리듬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중현, 송창식, 산울림, 송골매 등 7~80년대 국내 음악신을 이끌던 대가들의 무드를 버무리듯 얼큰하게 재현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음악적 영역을 구축해내는 저력이 있다. 불과 두 개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밴드에게 과찬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지난 5년 사이에 장기하와 얼굴들만큼 영향력 있는 밴드가 국내에 얼마나 등장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장얼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지난 2집에서는 큰 음악적인 변화가 발견됐다. 멜로디가 풍요로워지고 사운드의 입체감이 더해졌다. “아마 내 생각엔 키보드 때문인 거 같다(하세가와 요헤이).” 키보드 멤버의 영입은 밴드의 음악 제작 방식도 변화시키는 계기도 작동했다. 장얼의 음악은 대부분 장기하가 가사를 만들고 흥얼거리는 리듬을 통해서 얻어진 대략적인 멜로디를 통해서 시작된다. “1집 같은 경우엔 내가 멤버들에게 악보를 주고 이대로 쳐주라고 부탁했지만 2집에선 곡의 뼈대만 만들고 같이 합주를 하면서 편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연주자들만 생각할 수 있는 플레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좋다 말았네’를 포함한 3집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장기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건 여전하지만 이젠 장기하 안에서 끝나는 밴드가 아닌 셈이다.
무엇보다도 장얼의 가능성은 끈끈한 팀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냉면’이 뜬다는 하세가와 요헤이를 따라서 다들 냉면 애호가가 돼버렸다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장얼의 멤버들은 서로의 술버릇을 두고 또 한번 유쾌하게 떠든다. 길게는 5년간 동고동락한 멤버들은 이제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잘 통하며 잘 닮아간다. 그들에게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는 직업 이상의 즐거운 꿈이다. 그리고 오는 5월 12일, 또 한번 꿈은 이루어진다. 호스트가 돼서 게스트를 모시고 공연을 펼치는 ‘얼굴들과 손님들 1탄’이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린다. 첫 번째 게스트는 뉴욕의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텔레비전.’ 이들의 첫 내한 공연을 모시게 된 경위 또한 장얼스럽다. “우리도 지금까지 신기해하는 일이다. 하세가와 형으로부터 텔레비전이 일본 공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가서 보자!’ 이러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접선이나 해보자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데 메일을 주고 받다가 정말 성사돼버렸다(장기하).” 농담처럼 시작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우리 멤버들이 좋아하는 밴드 중엔 중에 해외에 비해서 국내 인지도가 낮은 탓에 내한하기 힘든 밴드들이 많다. 그들을 초대해서 ‘얼굴들과 손님들’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좋아할 이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장기하).” 참고로 오는 가을에 발매될 3집 앨범은 심플하지만 강력한 로큰롤을 구상한다니, 기대하시라. 장기하가 부른 그 노래가사처럼. ‘뭘 그렇게 놀래?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지 몰라?’
대세는 리얼이다. 리얼을 보장하는 건 실시간이다. 고로 10억의 상금이 걸린 인터넷 생중계 서바이벌 게임은 대세를 아는 기획이다. 문제는 이 서바이벌이 단순히 게임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수준이 아닌, 인생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진짜 리얼 서바이벌이라는 점에 있다. 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대인들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듯 거액의 상금을 눈앞에 둔 게임 참가자들의 생존 게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참혹한 세태를 방조한 자들에게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은 일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영화는 좀처럼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남았고, 그 생존자의 기억을 더듬어 플래쉬백을 전진시키고,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서사의 구조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본질적인 이야기 구조다. 게임의 법칙 안에서 철저한 규칙성이 보장되지 않고, 우연을 필연처럼 눈가림하려는 수작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좀처럼 어리석지 않고서야 그 단점을 알아채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와 감정들이 연출되곤 하는데 하나같이 심각한 수준의 비웃음을 유발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시작점을 결말에 전시할 때, 영화 자체의 수준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똘똘 뭉친 이 영화가 내던지는 궁극적 원인이란 건 어지간해서 이해할 수 없는 비약적 현실이다. 물론 현실에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영화적 설득력은 그 어처구니 없음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체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10억>은 좀처럼 설득력이 없는 영화다. 그저 개똥철학을 담은 무책임한 혐오덩어리에 불과하다. 고생한 흔적이 확연한 배우들만 뒤늦게 안쓰럽다.
<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