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 가사의 기원을 찾아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이하, <슬픔보다>)는 정리하자면 이렇다. 좀 더 친절히 말하자면 어떤 유행가 가사에 담긴 실화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승철이 연기하는) 이승철은 자신의 필이 꽂힌 어느 무명 가수의 노래말을 작사한 작사가를 찾아 가지만 찾을 수 없다. 그 사연을 얘기하자면 길다. 그리고 <슬픔보다>가 바로 그 사연을 담은 이야기다.
케이(권상우)와 크림(이보영)이라고 서로를 지칭하는 남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인이 아닌 동거인으로서 살아간다. 부모가 죽었거나 떠난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케이는 크림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고백할 수 없다. 그의 플라토닉한 사연은 그가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영화는 이미 초반에 그 사연을 드러내버리므로 이는 명백히 스포일러가 되지 못한다.- 그는 걱정한다. 자신이 떠나면 크림은 혼자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 고민한다. 크림을 위해 좋은 남자를 마련해주겠다고. 흡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미개가 새끼를 위한 식량을 비축하는 심정과 다를 게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이건 필히 비현실적인 러브스토리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슬픔보다>에선 순정만화의 체온이 느껴진다. 때때로 낯간지러운 비유적인 대사들이 차고 넘치며 유행가 가사를 넓게 풀어헤친 듯한 사연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그 비현실적인 관계와 사연 속에서 신파가 흐른다. 문제는 그 모든 감정들이 딱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체감되지만 특수한 사연이라 이해한다면 일면 그럴 듯한 내용이라 감안하지 못할 건 없다. 세상의 모든 사연들은 타인의 입장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없지 않으니. 다만 그 감정마저 인공적인 뉘앙스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심각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의 옆에 좋은 남자를 남겨줘야 한다는 남자의 태도가 다분히 비현대적이다. 순수한 사랑이라기 보단 마초적인 기운이 은연중에 감지된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사가의 존재 여부는 그냥 허탈하게 웃고 말일이다.
사랑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는 이야기 속에서 장황하고 능숙한 언어적 비유는 되레 허망해진다. 게다가 그 비유를 품고 있는 사연의 테두리가 작위적인 혐의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양상 속에서 언어는 갈 길을 잃고 홀로 반허공에 뜬다. 남자의 일방적인 선택이 알고 보니 다른 한쪽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고 있으며 또 알고 보니 또 다른 이의 헌신에서 비롯된 사연이더라, 란 식의 완벽한 우연에 기댄 삼각구조 신파 모드를 보고 있노라면 껍데기만 남은 감정들이 전시되는 쇼윈도를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투명하다기 보단 표백됐다는 말이 어울리고, 순수하다기 보단 유치하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신파인 척 포장된 거짓말이 나쁜 거지. <슬픔보다>는 그런 거짓말이다. 감정을 팔아먹는 문장으로 채워진 하이틴 시집마냥 언어로 포장된 텅 빈 감성에 불과하다. 슬픔보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특히 후반부의 내레이션 구조는 최악의 고문이나 다름없다.
서로를 케이(권상우)와 크림(이보영)이라고 부르는 남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인이 아닌 동거인으로서 살아왔다. 순정만화의 체온이 느껴진다. 다분히 비현실적이라 규정될만한 관계 속에 신파를 그려 넣는다. 그 사연 속에 은유적인 대사들이 차고 넘친다. 유행가 가사에서나 들어 봄직한 사연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비유로서 사랑을 설명하는 것에 능하다. 하지만 사랑을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는 이야기 속에서 언어적 비유는 쉽게 허망해진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곁에 좋은 인연을 점지해주고 떠나간다는 내용은 일면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선택이 아닌 쌍방의 암묵적 이해 관계로 거듭나고 삼각관계의 신파로 승화될 땐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문장의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 특히 크림의 시점으로 반전되는 후반부의 내레이션은 고문에 가깝다. 투명하다기 보단 표백됐다는 말이 어울리고, 순수하다기 보단 노골적이라 유치하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이 너무나도 작위적이라 그 감정마저 노골적인 매물로 전시되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진다. 인공적인 감미료 맛이 진하게 우러난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신파인 척하는 게 나쁜 거지. ‘슬픔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야기’라 불려도 억울할 게 없는 영화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행복합니다>가 9일 오후 2시,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소름><청연>을 연출한 윤종찬 감독의 세 번째 작품 <나는 행복합니다>는 올해 타계한 이청준 작가의 단편 소설 ‘조만득 씨’를 각색한 작품으로 현빈과 이보영이 주연을 맡았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지리멸렬한 삶을 다루고 있다. 정신질환 환자들을 치료하는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나는 행복합니다>는 환자로 입원한 만수(현빈)와 정신병동의 간호사로 재직 중인 수간호사 수경(이보영)의 사연을 평행처럼 진행시키는데 두 인물은 각자 미쳤거나 미쳐가기 직전의 상태에 몰려있다. 두 인물의 삶은 대칭을 이루듯 펼쳐지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모를 모시는 만수와 암투병중인 노부를 모시는 수경의 삶은 경제적 난국과 그로 인한 연애의 파국을 경험한다는 측면까지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지난한 삶을 거쳐 과대망상증이란 정신질환자로 규정된 수만과 달리 미쳐버리기 직전에 몰렸을 뿐, 아직 질환자로 판명되지 않은 수경은 정상인이다. 결국 상황 이후의 수만을 상황 이전의 수경이 목격하고 관찰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동병상련은 서로를 보좌한다. 각자가 상대의 처지를 바라보는 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차별된 의식 세계로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통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영화는 고단한 수경의 현실을 그만큼이나 고단했던 수만의 과거와 종종 대칭 시키는 동시에 수만의 현실과 대비시키는데 그것은 수경의 비극적 현실의 무게감을 측정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수경으로 하여금 어떤 예정될 것만 같은 미래를 경계하게 만든다. 수만의 현실과 과거를 순차적으로 진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수경의 현실이 미묘하게 맞물려 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떤 연대를 모색하거나 노골적인 교감을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두 사람은 적절히 동떨어진 위치에서 상대를 관찰하거나 적절한 거리감만큼 서로를 탐색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낙관을 배제한 이 영화의 엔딩은 지속될 비극의 굴레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희망을 자아낸다. 이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떤 희망을 모색할 수 있다’는 윤종찬 감독의 주관이 개입한 측면이기도 하거니와 그 결과물의 주제 양식이 그것을 적절하게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이들의 비극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허구지만 그것이 바탕으로 두른 세계관은 결코 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을 예감하게 한다. 종이에 써 갈긴 만수의 수표는 형태적으로 우리가 탐닉하는 지폐와 별다를 바 없다. 비정상인에게 수표로 통용되는 것이 정상인의 눈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통용되는 돈의 가치, 더 나아가서는 재화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역설과도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행복합니다>는 어쩌면 현실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가치를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역설적 리얼리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처럼 생존 그 자체를 희망이라 붙드는 영화는 역설적인 제목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잴 수 없는 인간적 의지의 표상 같아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축제의 마지막 날, 그 지리멸렬한 비극을 대면해야 하는 어떤 관객들의 상황도 역설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것이 이 시대에서 점차 간과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복합니다>는 희망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축제를 위한 특별한 마침표가 될만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