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
좁은 방안에서 자신의 부인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의 눈에 수심이 서려 있다. 하지만 메일을 검색하던 청년의 눈이 곧 진지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집어 든다. 메일을 빼곡하게 채운 텍스트의 행간 사이에 놓인 단어들을 유심히 살피던 청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책과 대조한 뒤 관계가 모호한 단어들을 끄집어내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나열한다. 청년은 저마다 독립적인 의미의 단어들을 나열하지만 그 단어의 나열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읽어내고 있다. 그와 동떨어진 또 다른 장소, 국정원에서는 어떤 이들의 동행을 주시하는 요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국정원의 요원들은 북에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전문암살자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선상으로 연결된 두 개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사건을 향해 수렴된다.
<의형제>는 마치 낡은 시대의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이념의 대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에서 남북의 대립적 구도 자체가 낡고 낡은 것이다. 하지만 <의형제>는 남북이라는 지정학적 대치 구조를 본질처럼 끌어들이는 대신, 수단으로서 활용하는 영화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 지원(강동원)과 그의 뒤를 좇는 국정원 요원 한규(송강호)는 낡고 낡았지만 여전히 유효한 남북관계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요구에 의해 대치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에 놓여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형제>가 다루는 건 그 두 사람의 대립 구도적 운명이 아니다. 그 대립 구도적 운명이 불가분하게 뒤섞이게 되는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영화의 목적지에 가깝다.
남북이라는 이념적 대립에 얽힌 인간들의 연민을 이끌어내며 비극적인 지정학적 운명을 상기시키던 작품들과 달리 <의형제>는 그 지정학적 속성을 다른 의미의 감정적 치환에 활용한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 지원과 간첩을 수사하는 국정원 요원 한규는 극단적인 대립구도로서 서로를 배척하거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명확하게 다른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오해로 인해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거나 지나친 과욕으로 오랜 수고는 허사로 끝난다. 자신이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내쳐지게 된 두 남자는 조직을 위해 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뒤늦게 마주하게 되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두 남자의 우연한 동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오해를 낳고 긴장의 국면을 이어나간다. 단순히 오해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긴장 관계는 부조리한 유머를 빚어내는 동시에 사연의 귀추를 주목하게 만드는 흥미의 유발지점과 같다. 버디무비의 유머와 홍콩 느와르의 비장미가 함께 엿보이는 동시에 지정학적 특수성이 더해져 독자적인 특성을 빚어낸다.
극의 밖에서 모든 정보를 수집해낸 관객들이 극 안의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오해의 여정을 지켜보게 만든다는 건 영화가 그 결과를 주목하게 만들 때 가능한 방식이다. <의형제>는 그런 자신의 의도를 영리하게 관철시키는 영화다. 상황의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유머와 긴장의 속성이 러닝타임에 적절한 가변성과 안정성을 부여한다. 안정적인 걸음을 유지하면서도 보폭을 적절히 조절한다. 무엇보다도 <의형제>는 오프닝과 피날레의 묘미를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초반 도입부를 통해 흥미를 자아내던 영화는 초반부 총격전의 긴박감 넘치는 묘사를 통해 관객의 시야를 스크린에 고정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결말부에 다다른 또 한 번의 총격신은 초반 총격신의 수미쌍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성공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입구와 출구가 정확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다.
해피엔딩을 연출하는 결말부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의형제>는 꽤나 흥미로운 버디무비로서 평할만한 영화다. 특히 동물적인 순발력으로 신의 공기를 장악하는 동시에 적절한 여백을 만들어내는 송강호의 연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공적이며 이에 적절한 리액션과 피드백을 이루며 자신의 캐릭터를 일궈내는 강동원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그 밖에도 많은 배우들이 적절한 위치를 잡고 제 역할을 해내는 가운데, 북파간첩 전문암살자로 등장하는 그림자 역할의 전국환은 강력한 카리스마로서 극의 깅장감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얼굴이다.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성공적인 데뷔를 이룬 장훈 감독은 <의형제>를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탁월하게 날려버렸다. 무엇보다도 장훈 감독은 <의형제>를 통해 전작의 성공이 운 좋은 캐스팅의 수준에 기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에서 기인한 것임을 뚜렷하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성공적이다.
상대 패를 읽을 수 있다면 게임은 유리해지기 마련이다. 도박이란 게 그렇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그래프의 변화를 읽는 자가 돈의 주인이 된다. <작전>은 그래프의 변화를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은 주식을 통해 ‘작전’을 펼친다. 주가의 흐름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주가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대사를 빌리자면 대한민국 경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덕분에 주식에 관련된 전문용어가 난무하고 이에 관한 언어들이 삽시간에 흘러간다. 다양한 정보가 현란한 영상과 함께 스크린 속을 활보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딱히 인지하거나 숙지할 필요는 없다. <작전>은 주식에 대한 복잡한 이해를 바라는 영화가 아니다. 주식은 <작전>이란 영화를 설계하기 위한 일종의 매물과 같다.
<작전>에서 주식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한 도표와 같다. 부자들이 어장에서 먹음직한 미끼를 던지면 빈자들이 달려들고 그 사이 부자들은 그물을 던져 모조리 낚는다. 정보의 접근성은 자본의 유무에 따라 구별된다. 유산 계급의 속성이 근본을 구별한다. 속칭 데이 트레이너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강현수(박용하)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작전을 펼치는 황종구(박희순)의 차이도 거기서 비롯된다. 강현수는 재능을 통해 운을 확보하지만 황종구는 자본을 통해 계획을 실행한다. 증권 브로커 조민형(김무열)과 황종구의 작전을 가로채는 것도 재능을 통한 운이다. 이를 통해 재능밖에 없는 이는 밑천을 지닌 자의 수하로 포섭된다. 마치 그것은 프로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아마추어가 프로의 세계에 입성한다는 의미와 같다.
강현수는 <타짜>의 고니를 닮았다. 혈기 좋게 고를 외치다가 개털이 된 고니처럼 강현수 역시 찌질한 인생 갈아타기 위한 정답으로 주식을 믿었다가 바닥을 친다. 하지만 자신을 망가뜨린 그 곳에서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처럼 망가진 삶을 같은 방식으로 복구해나간다. 주식시장과 도박판엔 눈먼 돈이 난무한다. <작전>은 <타짜>의 변형이다. 인텔리한 주식 용어와 이론들이 어지럽게 출력되지만 실상 그건 중요치 않다. 실제적인 증권시장의 복잡한 함수관계를 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치밀함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이며 그것을 가능케 할 요구도 불필요하다. 그저 꼴만 갖추면 된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기싸움을 벌이는 캐릭터들의 심중이다. <작전>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교훈하는데 모든 것을 펀딩한다. 강자와 약자는 자본의 여부로 나뉘고, 그들은 곧 선과 악으로 대비된다. 비윤리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강자들은 악으로 묘사된다. 예외는 있다. 작전에 참여한 자산 관리자(PB) 유서연(김민정)은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그래서 악보단 선에 근접한 지점에 선다. 그것이 본인의 입장에서 유리한 고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상대적인 캐릭터 비중이 낮다. 강현수와 황종구 일당의 대비가 <작전>의 본질에 가깝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우열관계에 대한 반발과 성토가 <작전>의 핵심이다. 장르적인 연출을 시도하고 이미지가 빠르게 전환된다. 동떨어진 세계를 남몰래 염탐하는 듯한 흥분도 발생한다. 전문용어들이 난무하지만 모든 걸 이해하고 넘어갈 의무는 없다. 그건 그저 피상적인 세계관에 불과하다. <작전>은 리얼리티를 구사하는 허구일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존에 근접해있는지를 따져 묻는 건 불필요한 작업이다. 흡사 그것은 희화화된 조폭들을 위시한 조폭코미디의 전략과 유사해 보인다. 사실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보단 영화적으로 연출된 설정을 앞세워 교훈을 전파한다. 문제는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을 교훈적 태도로 설명하던 영화가 결말부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바탕으로 성공한 캐릭터의 BMW를 등장시킬 때, 기존의 설교는 허세가 된다. 에그타르트와 초코파이를 대비시키는 이미지만 그럴싸할 뿐,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에 대한 의식은 개선시킬 수 없다. 맛있고 비싼 음식을 마음껏 즐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할 수 밖에. 결국 남는 건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뿐, 긴 설교는 한탕주의를 가리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