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마라톤 출전 선발전에서 1등을 한 조선인 준식(장동건)이 일본의 마라톤 유망주로 촉망 받던 하세가와(오다기리 조)를 제치고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 하지만 1등으로 호명되는 건 하세가와였다. 분노한 조선인 관중들은 일본인과 뒤엉켜 싸우고 그 결과, 준식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으로 징용된다. 그곳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준식은 새로운 부대장으로 임명된 하세가와를 마주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던 준식과 하세가와의 인연이 전장에서 새로운 악연으로 거듭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독일군 포로들을 검사하던 연합군은 동양인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느꼈다. 독일군 군복을 입은 동양인은 자신을 ‘꼬레아’라고 소개했다. <마이웨이>는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제 치하 한국인에 관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된 소설을 각색한 결과물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프랑스 노르망디까지 오게 된 한국인의 감춰진 사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호기심을 당기고 상상력을 부추긴다. 결국 <마이웨이>는 사진 한 장, 즉 파편과 같은 소재를 뼈대 삼아 그려낸 작품이란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뽐낸 바 있는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한다. 빠른 속도로 컷과 컷을 쪼개며 스피디하게 다각도의 이미지 정보량을 소나기처럼 쏟아 넣고 핸드헬드로 현장감을 주입한다. 결과적으로 <마이웨이>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라기 보단 그 전쟁신 자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웨이>는 강제규 감독의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전시하기 위해 마련된 그릇 같다. 일제 치하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고 반목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터에 서게 되고, 핏덩어리가 되어 뒹굴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도 끝내 서로 살아남아 노르망디 해안에서 해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사실상 네 차례 정도 전시되는 전쟁 시퀀스를 조성하기 위한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저마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전쟁신이지만 반복적으로 비슷한 것을 보고 있다는 감상 안에서 그 위력이 무마된다. 그 간극을 차지하는 건 야만적인 시대성 안에서 탈이데올로기적 경험을 차례로 경험하는 두 남자의 여정이다. 조선에서 몽골로, 러시아로, 독일로, 그리고 노르망디 해변으로, <마이웨이>는 영화의 감정적 체온으로 보자면 악연에서 인연으로, 지독한 갈등에서 극적인 화해로 나아가는 멜로적인 로드무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로드무비적인 여정도, 이 모든 사연을 비극적인 멜로로 봉합하는 스토리텔링의 감정도, 전쟁신을 끼워 넣기 위한 액자처럼 보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여정이 분명 효과적으로 감정을 툭툭 치는 찰나가 있지만 그 감정적인 총합이 끝내 클라이맥스의 파고로 넘치는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스펙터클의 눈요기가 익숙해질 무렵, 예상 범위 안에서 딱 떨어지는 서사에 대한 흥미도 반감된다. 결국 거대한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서 페이소스가 소모되는 양상이다. 특히 스펙터클의 풍경 안에 선 중심 캐릭터의 감정선이 지나치게 작위적인 합에서 구르는 탓에 이입하기가 어렵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투어를 하는 기분이랄까. 150여분에 다다르는 러닝타임을 이런 식으로 견디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노릇이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
세계2차대전이 한창 중인 튀니지 사막에서 독일군 대령 장교는 다짐한다. 나는 조국 수호가 아닌 인류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이 아닌 인류의 주적이라 판단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그 독일군 대령 슈타펜버그(Stauffenberg, 톰 크루즈)의 양심적인 성찰을 조명하는 데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자 연기의 입을 빌어 던지는 일종의 고백성사다. 동시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도입부에 이를 명백히 밝힌다. 적어도 이 허구적 산물의 어느 측면까지 실재가 반영된 것인지 가늠할 순 없겠지만-또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적어도 영화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방어기제 노릇을 한다.
일단 <발키리>는 어느 비윤리적 집단 내부에서 피어난 양심적 선언에 대한 재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발키리>는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고 포복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두려움은 온전히 그 시대에 내포된 정신병적 파시즘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이 대항하는 건 거대한 악이 아니라 거대한 악처럼 강요되는 정신병적 불안이다. 두려움은 충돌과 갈등을 도모하고 이는 곧 영화적 서스펜스의 주체로 발전한다. 서스펜스의 날을 세우는 건 인물의 외부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결과물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로서 이뤄지는 심리적 불안감이다. 그 불안은 인물들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제약하며 가둔다. 그 사이에서 차분하고도 점진적인 서스펜스가 영화를 잠식해나간다.
<발키리>의 결말을 언급하는 행위가 스포일러로 규정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허구적 야심은 역사적 기록을 뒤집고자 할 만큼 과감하지 않다. 실패한 혁명은 적어도 그 당시엔 반역으로 기록되고 처형당한다. <발키리>는 그 당시엔 반역이라 불리던 에피소드다. 히틀러가 암살당해서 죽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는 이상, 그가 자살했다는 역사적 증언을 아는 이상,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적 몸통이 온전히 실화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선언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확인하는 이상, 결과는 명백하다. 슈타펜버그의 신념은 결국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결론이 도출된다. <발키리>는 정해진, 혹은 예고된 결말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추이를 묘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동시에 그 정해진 비극을 향한 인물의 의지가 대두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온전히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물음은 어째서 당연한 비극적 결과를 전개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슈타펜버그의 고결한 양심적 선언을 비추기 위해서?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첨언이 필요하다. 더 잠재적인 야심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이 매그니토의 유태인 수용소 씬을 등장시키는, 울버린의 인체 실험적 장면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엑스맨>의 수장 브라이언 싱어가 만든 <발키리>엔 사유화된 욕망이 잠재돼있다. <발키리>는 영화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유태인 브라이언 싱어가 공존하는 영화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에게 대항한 범인류적 위인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이기 전에 브라이언 싱어가 복원하고픈 어떤 정의에 대한 추도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 기도를 꿈꾸는 군내부 세력들과 처음 접촉하는 장소에서 목격하는 건 일종의 정치다. 독일의 미래를 위해 히틀러를 죽이고자 하는 그가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부터 생존을 위한 정치적 모략을 목격한다. 그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적임자를 찾고 있다. 그들의 사명감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안전에 있다. 패전이 점차 시일 안으로 다가오자 패전국의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 히틀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의 죽음이 사명이라 믿는다. 그런 그에게 정치는 온당치 않다.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을 위한 정치란 일종의 사기와 같은 것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그런 사람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실제적인 슈타펜버그로부터 어느 정도 가공된 인물이다. 가공의 주체는 브라이언 싱어다. 그는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윤리적으로 부정하는 인물로서 바라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슈타펜버그와 목적을 같이 하는 주변의 군부 세력들이 패전국 독일의 역사에서 명예롭게 히틀러의 존재를 지우길 원하는 것과 궤가 다르다. 패배가 예감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유하려는 이들의 정치 가운데 슈타펜버그만이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윤리적 타락을 본다. 슈타펜버그는 유일한 양심이자 조직의 윤리적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기제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의 육체를 빌려서 독일 나치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내부적인 양심을 발효시킨다. 외부에서 유입된 강제적 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잉태된 자율적 신념이 스스로의 모체를 부정하길 바란다.
세계2차대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르고 있지만 <발키리>는 전장을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극 초반 튀니지에서의 씬을 제외하고 전쟁터다운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베를린 독일군부의 장교만이 등장한다. 연합군과 독일군과의 전투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 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이 영화에 스펙터클이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으나 의도하지 않은 바를 스스로 원해서 실망했다 말하는 건 석연찮다. <발키리>는 전쟁의 승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패배한 체제의 전복을 통해 자신을 보수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미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전범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 바둥거리는 이들의 처량한 사연이다.
<발키리>에서 흥미로운 건 히틀러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는 세력들간의 정치적 갈등이 발견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테러의 주변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가늠하는 제3자들의 태도다. 슈타펜버그의 비장함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덕분이다. <발키리>는 어느 한편에 선 자들의 묵묵한 표정보다도 그 중간지대에서 방목하듯 살아가는 회색분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점을 갈등하고 고심할 때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슈타펜버그의 결의에 찬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그만큼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편에 설 것인지를 망설이는 자들의 표정은 흥미롭다. 결국 <발키리>는 어떤 선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선의와 건너편의 악의 사이에 놓인 중간자들의 흔들림이 드러날 때 더욱 매력적인 흥미를 부른다. 중심부보다 주변부의 설계가 더욱 흥미롭다.
사실 슈타펜버그가 나치의 비윤리적 태도에 항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의 이익에 반하는 히틀러의 행위적 결과가 참담하다는 데서 악을 규정한다. 윤리라기 보단 실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의 <발키리>가 균형을 잃는 것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다. <발키리>는 독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느 애국자에 대한 항거적 실화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자의 내면에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이 우회한다. 히틀러를 숭배하거나 숭배하는 척을 하며 살아갔던 독일인들의 무기력에 대한 항의와도 같다. 이런 태도는 <발키리>를 때때로 지극히 사유화시킨다. <발키리>는 정치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날 때 긴박해진다. 목적을 완수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윤리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미션이라 끊임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검증하고 자신의 안위를 판단한다. 유일하게 행동을 위한 행동을 펼치는 슈타펜버그만이 적극적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슈타펜버그를 소환한 주체가 종종 의무감의 주체를 헷갈리듯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 인물의 의지를 허구의 틀 안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캐릭터의 탈을 쓰고 자신의 유전자적 트라우마를 투영하려는 의무감이 캐릭터의 균형을 흔든다. 슈타펜버그의 강력한 정치적 매력은 그가 정치를 하지 않는 인물이란 점에서 발생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신념을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때때로 슈타펜버그를 통해 어떤 정치를 하려 든다. 슈타펜버그를 윤리적 주체로 삼아 히틀러라는 상징적 비윤리를 비판하려 든다. 결말의 숭고함은 어딘가 지나치다. 페이소스가 발생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의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슈타펜버그의 안위와 그의 가족에 국한된 사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키리>는 비정치적인 인간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태도를 탐구한다. 전쟁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을 예감한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보존될 길을 찾는다. 그건 그 전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이 되길 시도하는 것이다. 히틀러를 죽이면 전범이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패배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발키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강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비극적 역사에 갇힌 유태인들의 기적 같은 구원담을 말해온 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다. 그건 휴머니즘에 기반한 일종의 대항적 희망이다. 비극에 대한 방어적 성찰이다. 하지만 <발키리>는 그 비극을 잉태한 주체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갈망하듯 재현한다. 동족의 비극을 기획했던 자들의 내부적인 몰락을 기획한다.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의 간접적 고발이 아니라 비극의 발원지에서 펼쳐지는 자기 모순을 통해 정신병적인 체제를 고백하듯 그린다. 더 이상 과거를 동정하듯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극복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야심이 담겨있다. 더 이상 유태인의 비극을 그리는 추모제가 아니라 비극을 기획한 적의 심장부를 겨눈 직접적인 가해를 꿈꾼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고자 했던 이들은 정치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려 했다. 전쟁의 무의미를 깨닫는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 사명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그의 결단과 행위를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고 망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정치적인 인간이 정치적인 결단을 종용한다. <발키리>의 성과는 그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지나친 감정을 요구하는 결말이 불합리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그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부화시키려는 막판의 시도가 지속적인 서스펜스의 리듬을 흐트러뜨린다. 섬세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심리적인 기저에서 찬찬히 흐르고 불거지던 긴장의 구조적 흐름이 허망하게 급류된다. 특히 너비보다도 깊이에 치중하던 <발키리>의 서스펜스 구조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감정적인 과잉 상태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쉽다. 그건 단지 결말이란 정보의 개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던 온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음역 대를 규칙적으로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악장에 다다라 갑작스럽게 고음역대로 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발키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극 말미에 다다라 지나친 무리수를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싱어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방조한 셈이다. 오로지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슈타펜버그조차도 비정치적 태도로 정치를 완수한다. 결국 휴머니즘은 무색해진다. 시대적인 정신질환을 진단하던 영화가 뒤늦게 인간미를 설득하는 건 어딘가 무력한 일이다. 정치적 승리를 원했던 패배자에게 숭고함을 부여할 때 그것은 명예가 아니라 일종의 모욕적 미화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