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6.29 동성애 그리고 세계는, 우리는.
  2. 2011.11.07 <헬프> 유연하고 경쾌하게
  3. 2009.06.05 <로니를 찾아서> 단평

동성애자에게 딱히 관심은 없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호기심을 느낄 수는 있겠다. 그 역시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호기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란 전제와 유사한 것이다.

어쨌든 예전에도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퍼에 가서 장을 보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왜 내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지지하고, 반대하고, 이런 의견을 내야 하느냐는 말이다. 정말 지겨운 일이다. 결국 이런 불필요한 질문이 던져지는 배경엔 그런 타인의 삶을 겁박하고, 제한하는 존재들의 사상이 주류로 자리잡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동성애자들에게 관심이 없음에도 동성애자들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나를 포함한 그 누군가 또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건 결국 내게 가해질 수 있는 차별에 대항하기 위함이고 그런 의식의 연대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관심이다. 당연한 관심이어야 한다.

어제 시청과 그 부근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종교 단체의 행사였다고 들었다. 퀴어 퍼레이드보다도 이를 반대한다고 시청에 나와서 북도 두들기고, 발레도 하고, 부채춤도 췄다는 이들의 보기 드문 꼴불견을 구경하지 못해서 뒤늦게 아쉽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명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몸소 실천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랑과 이타심의 교리를 잘 이행하는 이들에게 줄 불쾌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어쨌든 수면 아래에 놓여 있던 차별의 증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건 정말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행하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북소리와 발레와 부채춤이 어우러진 꼴불견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나야 그 형체가 보다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거나 그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나는 앞으로도 동성애자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차별이 희미해진 세상이 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쨌든 변화의 조짐은 보이고, 변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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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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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과 백인의 빈부 격차는 그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구분 짓는 주요한 잣대 노릇을 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며 인종 간의 갈등이 야기됐다. 특히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의 위상이란 백인 가정을 위해 제공되는 값싼 노동력에 가까웠다. 유년시절부터 흑인 가정부의 손에 길러진 미시시피의 백인 아이들은 자라난 뒤, 되레 그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 표면적인 계급적 구별이 사라졌을 뿐,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는 광폭한 차별의 한가운데서 폭력을 체감하면서도 묵묵히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아온 미시시피 흑인 가정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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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동네 주민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 단면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무능력한 마초이즘은 때때로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이방인들에 대한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니를 찾아서>는 어느 치졸한 마초의 체험을 통해 적나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극적 재미를 진전시키는 영화다. 인호(유준상)가 뚜힌(로빈 쉐이크)과 함께 로니(마붑 알엄 펄럽)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버디무비와 로드무비의 조합을 이룬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사회적 시선을 견지한 극적 연출이 인상적이다. 다만 문제의식을 발견할 뿐 어떤 결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변화를 관찰할 뿐이다. 인호의 변화는 결국 한국남자들, 더 넓게는 한국사람들의 가능한 변화를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정치적 주장보다도 설득력 있는 사연이 귀엽고 즐겁게 전달된다. 물론 인호가 로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일면 무모한 희망처럼 보이고 목적성도 흐릿하다. 하지만 그 여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무모한 희망에 동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로니를 찾아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시에 한국어에 유창한 불법체류자 외국인들의 모습은 기이한 구경거리처럼 보인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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