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잭맨은 할리우드의 호주 출신 톱스타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배우다. 스크린과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호주 시드니 출신인 휴 잭맨은 활동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집안에 머무는 시간보다도 해변에서 놀거나 캠핑을 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여행을 좋아했지만 단순히 여행만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호기심이 많았다. 이는 연기에 대한 흥미로 이어졌고, 재능에 대한 발견까지 나아갔다. 무대 경력을 쌓아나가며 재미를 느끼던 잭맨이 배우로서의 진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22살 무렵이었다.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며 춤과 노래 실력이 빼어난 잭맨이 자신의 무대를 꿈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보다 중요한 건 ‘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였다. 호주의 TV시리즈 <코레일>은 잭맨의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상대배우였고, 지금의 아내인 데보라 리 퍼니셔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불과 한 시즌만에 막을 내렸지만 잭맨은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얻었다. 그는 말했다. “아내와의 만남은 그 작품으로부터 비롯된 가장 훌륭한 결과였다.”
대단한 지위에 오른 이들에게는 일종의 전환점이라 불리는 타이밍이 존재한다. 잭맨에게는 <엑스맨>의 히어로로 등장한 2000년이 그랬다. 아다만티움이라는 강철 골격을 지닌 불사의 몸과 다혈질의 성격을 소유한 뜨거운 남자, 울버린은 잭맨을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격상시켰다. 사실 그 강철손톱은 원래 잭맨의 것이 아니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2000)에서 울버린 역에 내정된 건 더글레이 스콧이었지만 그는 하차했고, 잭맨은 기회를 얻었다. 잭맨에게 있어서 울버린은 하나의 과제였다. 원작 코믹북의 팬이 아니었던 잭맨은 자신이 울버린 같은 남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티 해리>시리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매드 맥스 2>(1981)의 멜 깁슨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 모습을 보며 울버린이 지닌 야수적인 본능, 다혈질적인 난폭성의 잠재력을 이해하고자 했다. 한편 소품에 불과했지만 강철손톱을 달고 연기를 하다가 상대 배우를 찌르거나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등의 실수를 견뎌야 했다.
결과적으로 울버린과 함께 잭맨의 터프한 이미지는 <엑스맨>의 성공적인 스크린 안착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서 전세계에 배포됐다. 하지만 이는 잭맨을 오해하게 만들만한 소지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1년에 공개된 그의 출연작 세 편, <썸원 라이크 유>와 <스워드피쉬>, <케이트 앤 레오폴트>는 주요했다. 제각각 장르적인 차이를 지닌 이 세 편의 작품은 하나같이 잭맨에게 소득에 가까운 결과물이었다. 단순한 하드보디 액션 배우로 이해될 수 있었던 그는 1년 만에 다양성을 지닌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특히 부드러운 로맨티스트이자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는 가장으로서의 삶에 충실한 잭맨의 실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엑스맨>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속편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엑스맨 2>(2003)와 <엑스맨 – 최후의 전쟁>(2006) 그리고 울버린을 주인공으로 삼은 스핀오프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까지, 울버린을 연기하는 잭맨은 일관된 이미지 속에서 안티히어로의 고뇌와 분노를 폭발시키는 노하우를 익혀갔다. 사실상 울버린으로 주목 받은 잭맨이 울버린과 같은 하드보디 캐릭터로 방어전을 치를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했다. 기독교적인 사상을 판타지 액션의 모티프로 삼은 <반헬싱>(2004)의 롤타이틀에 캐스팅된 것도 어쩌면 울버린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엑스맨>의 세 번째 속편의 공개와 함께 울버린으로서의 사명을 끝낸 직후,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6년, 대가들과 함께 한 영화 세 편으로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우디 앨런의 <스쿠프>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천년을 흐르는 사랑>,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가 바로 그것. 특히 앞선 캐릭터들과 달리 비열한 면모를 지닌 정치인으로 등장한 <스쿠프>와 질투와 야심으로 사로잡힌 마술사를 연기한 <프레스티지>는 잭맨의 연기적 내면에 대한 증명서에 가까웠다.
할리우드 톱배우 반열에 오른 잭맨은 대작에 출연하며 그 지위를 공고히 다져나갔다. 물론 그 지위가 언제나 안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잭맨은 고향 호주에서 촬영된 <오스트레일리아>(2008)에서 역시 호주 태생인 니콜 키드먼과 호흡을 맞췄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대거 등장하는 이 영화는 대단한 규모와 반비례한 평가를 얻었고,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엑스맨>시리즈의 스핀오프 <엑스맨 탄생: 울버린>으로 다시 한번 강철손톱을 빼 들었고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영화적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작인 <리얼 스틸>(2011)은 여러 모로 성공적인 복귀전처럼 보인다. 인간 대신 로봇이 복싱 선수로 활약하는 시대를 그린 SF 기반의 이 영화는 사실상 부자의 관계 회복과 루저의 승리를 그린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자상한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곤 했던 그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 인물의 부성애와 밀착된다.
<엑스맨>에 발탁되기 전까지, 잭맨은 호주에서 무대를 비롯해서 몇 편의 영화와 TV시리즈에 출연했다. <엑스맨>으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뒤에도 잭맨의 무대 경력을 줄곧 이어져왔다.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그는 2004년에 공연한 피터 앨런의 <오즈로부터 온 소년>을 통해서 대단한 호평을 이끌어냈으며 토니상 트로피까지 얻었다. 한때 <미녀와 야수>의 무대 위에서 가스통으로 자리한 적도 있는 그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영광이었다. 그는 울버린의 강철손톱을 전시하는 사이에도 자신의 연기를 갈고 닦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실함은 생활연기자로서 잭맨을 설명하기 위한 유용한 단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을 통해서 그의 춤과 노래 실력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질 예정이다. 특히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자로서 특별히 한번 뽐낸 바 있었지만, 브로드웨이를 찾아야만 <킹스 스피치>(2010)로 아카데미를 석권한 톰 후퍼 감독이 연출하는 <레미제라블>(2012)에 캐스팅된 것. 물론 울버린의 강철손톱도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은 디딤돌과 같다.” 휴 잭맨은 여전히 디딤돌을 밟고 서있다.
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
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성장 과정, 그들의 만남, 그리고 결국 그들이 갈라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창세기적인 서사의 흥미만큼이나 ‘엑스맨’이라는 유닛의 개성과 이 시리즈의 장점이 어디 있는가를 잘 아는 작품이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신선한 활약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짜릿해진다.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영화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연출가임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들의 근원을 소개하는 근사한 기회가 마련됐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성과일 것이다. 시리즈를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
개성이 강한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는 <엑스맨>시리즈는 각자 개별적인 사연의 줄기를 성장시키기 좋은 캐릭터의 금광이다. 집단으로 투척해도, 개인으로 조준해도 맥락은 가능하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앞선 세편의 시리즈에서 중심에서 활약했던 울버린(휴 잭맨)의 전사를 다룬다. 캐릭터의 존재만으로 기획을 가능케 한 영화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 열 이야기 안 부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획이다. 물론 이는 앞선 세 편의 시리즈가 나름대로 성공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더욱 설득력이 강해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울버린이 무의식을 통해 문득문득 방출하는 그의 과거사와 관련된 조각 같은 이미지들은 <엑스맨>시리즈에서 중요한 호기심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울버린의 과거를 추적하는 <울버린>은 호기심을 자극하던 캐릭터의 역사 자체를 드러내는 이벤트라는 점에서 흥미를 부른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만으로도 <울버린>은 폭넓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은 돌연변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는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고 출생의 비밀마저 듣게 된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소년의 삶이 순탄치 않게 미끄러져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불사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해나가는 로건(휴 잭맨)과 빅터(리브 슈라이버)의 서사가 감각적인 이미지를 밀어내며 나열된다. 비범한 삶의 궤도에 들어서는 캐릭터의 유년시절에서 시작해서 성장한 캐릭터의 환경을 명확한 이미지로 흘려 보내는 타이틀 시퀀스는 폭력 가운데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돌연변이의 숙명 그 자체를 짧고 굵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 <울버린>은 울버린의 과거라는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형태애서 멈춘 영화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애초에 구겨버려야 한다. 일단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꽤나 반갑다. 또한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네임밸류 아래 큰 성과가 아니다. <울버린>은 캐릭터의 기원 그 자체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발생시키지만 캐릭터의 기원을 묘사하는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색한 영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외관은 오락적 기능성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영화적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영웅의 사연을 그저 구경거리로 제한해버린 셈이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휴 잭맨)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에서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깊은 잠재력을 지닌 영화임에 틀림없다. 비범한 오프닝 시퀀스와 감각적인 타이틀 시퀀스는 그런 기대를 한껏 달아오르게 한다. 그러나 <울버린>은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멈춘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구겨버려야 한다.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는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반가움이 이를 대체한다.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아래 대단한 성과가 아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은 충분하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용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다는 의미가 적나라하게 나뒹굴 뿐이다.
롱숏에 담아낸 풍경들이 저마다 장관이다. 인물 너머에 펼쳐지는 풍경들도 좋은 밑그림이다. 그저 카메라에 잡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호주를 위한 영화다. 게다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배우 니콜 키드만과 휴 잭맨까지 출연한다. 바즈 루어만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사랑과 전쟁, 인간과 자연을 아로새기는 거대한 대서사로 기획했다. 특히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얻었던 호주의 수난사를 위로하고자 한다. 특히 노예로 착취된 혼혈2세들, 일명 ‘빼앗긴 세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성찰보단 호강에 가깝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스토리는 초호화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스토리는 안이하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활공하는 카메라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방만한 이야기에 방대한 이미지가 산만하게 흘러 넘친다. 저마다 제 빛을 내느라 응집될 겨를이 없다. 호주의 절경도, 배우들의 열연도, 방만한 서사도, 거대한 규모도, 하나같이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정작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게 없다. 그저 거대한 전시관을 보고 나온 기분이다.
서구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20세기,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어느 식민지가 그러했듯 영국의 소유가 된 호주의 원주민들은 백인 정복자들의 하수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가 탄생했다. 원주민 여성과 이주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백인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원주민과 격리된 수용소에서 길러졌다. 그리곤 백인들을 위한 종으로 팔려가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두에 등장하는 긴 자막이 가르키는 ‘빼앗긴 세대’에 대한 사연은 이와 같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들을 언급하고 말하려 한다. 일단은 그렇다.
166분이라는 방대한 러닝타임만으로도 서사적인 너비가 느껴진다. 서사는 전후반의 구조로 나뉜다. 두 맥락의 서사를 관통하는 건 일관된 정서다. 박애와 사랑. 휴머니즘과 로맨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대한 천장과도 같은 서사를 떠받드는 정서적 기둥 역할로 구축된다. 거대한 스케일의 이미지들은 빛 좋은 포장지와 같다. 화려한 이미지가 벽화처럼 영화를 두른다. 롱숏에 담긴 거대한 풍광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드넓은 평원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는 절경이 호화스럽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병풍을 두른 영화다. 유채색에 가깝게 대비된 색감의 톤이 더욱 적극적인 제스처를 발생시킨다.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것은 그림이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 안에 인물을 담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텍스트 이전에 삽화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책과 같다.
호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남편을 쫓아 영국에서 날아온 새라(니콜 키드먼)는 남편의 유지를 받아들여 1500마리의 소를 항구까지 몰고 가야 한다. 지체 높고 고상하기만 하던 새라가 문명의 이기를 깨닫고 로맨스에 이끌리는 과정은 전형적인 클리셰로 읽힌다. ‘몰이꾼’ 드로버(휴 잭맨)와 함께 1500마리의 소를 끌고 항구로 나아가는 여정은 서부 개척지로 나아간 영국 젊은 남녀의 모험과 로맨스를 그린 <파 앤드 어웨이>를 닮았다. 일본 전투기들의 대규모 공습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진주만>을 연상시킨다. 이별남녀의 애틋한 로맨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히는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평이하다. 풍광의 스케일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지만 이야기에 더해진 감정적 울림은 정해진 너비를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다. 비극도 희극도 그 간격을 철저히 유지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조율된 풍경이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날아가는 카메라의 숏엔 전시적 욕망이 철저히 반영됐다. 측면에 밀어 넣은 인물 너머로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놓은 컷엔 좋은 밑그림에 대한 욕심이 팽배하다. 이미지에 대한 욕망 위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이야기는 정직하게 진행된다. 그만큼 볼거리는 충분하며 이야기는 순탄하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만의 앙상블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감흥이 얕다. 감정의 진폭이 좁다. 이미지에 눈이 돌아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영화라기보단 화보에 가깝다. 아름다운 회화적인 색감에 담긴 이야기는 깊은 공명을 부르지 못하고 찰나를 채울 따름이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이야기임을 노골적인 자막에 실어 직시했지만 성찰의 여력은 앙상하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시선이 영화의 전반을 관장하는 주제라면 모험과 로맨스는 각기 전반과 후반을 지배하는 주요소재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넘고, 사활을 걸며, 희생을 불사하지만 그 과정의 긴장감을 도출하는 기능적 효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반라의 원주민 캐릭터를 내세워 영험한 신비를 전시하려 하지만 기이한 현상 이상의 설득력이 없다. 되려 맥락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연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동시에 백치미스럽게 타자화된다.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캐릭터를 장치해버린 인상이다.
사랑과 전쟁, 자연과 인간, 자유와 박애,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의 너비만큼이나 방대한 대서사를 펼쳐 보이지만 그만큼 산만하며 개별적인 요소들의 집중력도 미약하다. 풍경은 아름답고 배우들은 훌륭하며 스케일은 거대하지만 정작 감흥이 없다. 방대한 서사엔 지극히 평범한 인상으로 가득하다. 물론 구도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양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호주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영상이 아니란 점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어떤 비범함을 발견할 때 감흥도 커지는 법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와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진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연극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호화롭지만 어울리는 주인을 얻지 못해서 텅 빈 집처럼 허망하다. 물론 그 호화로운 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 없는 집에서 손님 노릇을 하는 것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값비싼 장신구도 과도하게 착용하면 제 빛을 낼 수 없는 사치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저마다 반짝이지만 제 능력을 지나치게 뽐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어울릴 줄 모른다. 비범한 것들이 저마다 지나친 빛을 내다 보니 되려 빛을 보지 못하고 평범하게 한데 모였다.